신용카드 시장의 급속한 성장과 정체의 과정 2000년에서 2002년까지 삼 년 동안 신용카드사들은 매년 수 조원에 달하는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신용카드사들이 이처럼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장규모의 급속한 팽창이 있었다. 업계평균 20.5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수수료율도 한 몫을 했다. 신용제공과 고금리 상환의 순환이 이제 막 가동되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서는 채무자들이 금리를 지급할 여력이 있었다. 그런데 2002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시장의 급속한 팽창과 높은 수수료율이 이번에는 시장불안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기 시작했다. 시장의 급속한 팽창은 카드사간 영업경쟁을 심화시켰고 과다한 출혈경쟁은 신용카드사의 수익구조를 크게 위협했던 것이다. 신용카드 시장의 팽창은 수많은 사람들을 신용의 사슬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차입과 고금리 상환의 악순환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금리는 점점 더 불어갔다. 그 결과 경제전체적으로 민간부채의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 2002년 말 가계 당 신용잔액은 2,915만원 수준으로까지 늘어났고, 이러한 부채규모는 GDP 대비 70퍼센트에 달하는 것이었다. 신용불량자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연체율은 1개월 이상 연체를 기준으로 2001년 말 3.8퍼센트에서 2002년 말에는 8.8 퍼센트로 급증했다. 카드사들은 언제까지고 얌전히 금리를 상납할 줄 알았던 이들이 너무나 불량스럽게도 신용사회의 신용을 어기며 채무의 불이행을 선언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2002년 5월 정부는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통해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비중을 50퍼센트로 제한했고 카드 수수료율을 낮출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연체율을 낮춰 카드사의 동반부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기대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다. 돌려막기식 까드깡에 매달려 왔던 이들은 현금대출 서비스 비중이 제한되자 거짓신용의 끈을 놓치고 신용불량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카드 수수료율의 인하도 그들의 경영상태만 급속히 악화시켰다. 2003년 1월 연체율은 11.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같은 달 9개 주요 신용카드사들은 4천 1백억 원에 달하는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카드사들의 주식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카드사들의 주인들은 이제 카드사들의 신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SK 회계부정 사건으로 채권시장의 분위기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카드사들은 이전시기 자금조달과정에서 막대한 분량의 카드채를 발행했었고(2003년 3월 20일을 기준으로 총 89조원), 그 중의 상당수는 투신사의 단기금융펀드(MMF)에 편입되어 있었다 (25.5조원). 투신사들이 카드사의 신용을 믿지 못하고 채권회수에 나설 경우 카드업계의 붕괴를 넘어 금융산업 전반이 무너질 위험이 존재했다. 지난 3월 17일, 4월 3일 두 번의 금융정책협의회를 거쳐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 다시 나섰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난 조치가 카드사들을 규제하고 경쟁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조치는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사색이 짙어 가는 카드사들을 구원하기 위해 5조 원 가량의 브리지론을 긴급 수혈해 4월과 6월 사이에 만기가 도래하는 투신권 보유 카드 채 10.4조 원 중 50퍼센트 가량을 즉각 매입할 수 있게 했다. 나머지 50퍼센트에 대해서는 투신사더러 만기를 연장하라고 요구했다. 카드사들의 재활을 위한 방안으론 현금대출 서비스의 제한시한을 1년 더 연장했고 카드 수수료율을 다시 카드사들의 자율에 맡겼으며 현금서비스 수수료를 평균 3-5퍼센트 인상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23일 은행연합회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3월에도 신용카드 관련 신용불량자수는 11퍼센트가 증가했다. 카드사들의 주가는 여전히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 3월 26일 카드사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신용카드사들의 부실문제는 여전히 남한 경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제기되고 있다. 새로운 금융규율에 의한 가계대출로의 중심이동 국내에서 신용카드가 처음 선보인 때는 신세계 백화점과 미도파 백화점, 롯데 백화점 등의 유통업체들이 고정고객의 확보와 판매촉진을 목적으로 자체 카드를 발행한 지난 1969년이었다. 그 후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신용카드와 코리안 익스프레스 등의 본격적인 신용카드 회사들이 출현했고 1980년대 초에는 은행들이 카드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LG와 삼성이 카드업에 진출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까지도 신용카드 시장의 성장규모는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러던 신용카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계기가 된 것은 1999년 이후 제출된 정부의 신용카드시장 규제완화․활성화 조치방안이었다. 97년의 위기 이후 정부가 신용카드 시장을 활성화한 이유로는 우선 세수확충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신용카드의 사용을 활성화해 법인과 자영업자들의 거래 투명성을 높이고 합리적인 과세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실제로 재경부의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신용카드 사용의 활성화 덕분에 2001년 한 해 동안 약 3조원의 세금을 더 거둘 수 있었다). 더욱이 카드를 이용한 물품결제의 활성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금융자본이 실물부문에게 요구하는 기업회계처리의 투명성도 높일 것으로 보였다. 덧붙여 그 당시 OECD 등이 한국정부에게 내수 진작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정부가 소비 진작을 위한 한 방안으로도 카드사용의 활성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9월과 2000년 9월 두 번에 걸쳐 정부는 이러한 정책목표를 담은 신용카드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상의 이유만으로 신용카드 시장의 급속한 팽창 원인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은 대체로 소비와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신용시장도 함께 팽창했다는 결론으로 끝나게 되는데 근래에 신용시장의 급속한 팽창을 이끌었던 것은 그것이 가지는 지급결제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현금서비스 기능, 즉 열악한 처지에 처한 사람을 대상으로 현대판 샤일록들이 벌이는 고리대 놀음이었기 때문이다. 현금서비스 이용금액은 2000년 200퍼센트, 2001년 84퍼센트, 2002년 33퍼센트를 기록하면서 신용카드 이용내역 중 가장 두드러진 성장을 나타냈다. 전체 신용카드 이용금액 중 현금서비스 이용금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1998년 51퍼센트에서 2002년 58퍼센트 수준으로 증가했다. 현금서비스는 가계대출의 한 형태로 제공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 사회에 새로운 금융규율이 자리 잡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새로운 금융규율은 기업들로 하여금 건전한 재무구조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그들의 자금조달방식을 은행대출 등의 외부자금(대출금은 기업의 장부에서 부채항목에 기재된다) 위주에서 주식발행을 통한 내부자금(주식은 장부상 자기자본항목에 기재된다) 위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금융규율은 금융기관들에도 적용됐다. 그에 따라 금융기관도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위해 100퍼센트의 위험가중치가 부여되는 기업대출보다 아무런 위험가중치가 부과되지 않는 가계대출을 선호하게 되었다. 더욱이 초기의 구조조정 과정이 기업매각과 인수․합병을 통해 실물부문의 과잉자본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가계대출은 수익성 차원에서도 더욱 안정적인 투자처였다. 여기에 자산담보부증권(ABS) 등 자산유동화시장의 성장도 신용카드 시장의 급속한 팽창을 도왔다. 카드사들은 이제 자기 수중의 내부자금 뿐 아니라 기존에 발행된 대출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추가대출을 위한 자금을 외부로부터 손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출이 채권을 낳고 채권이 다시 대출을 낳는 신용팽창의 흐름이 채권시장의 활성화로 물꼬를 튼 것이다. 노동의 불안정화와 소매금융 수요증대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위기 이후 신용카드 시장의 수요측면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이다. 구조조정의 과정은 노동조건을 크게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대규모의 실업자와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노동자들은 생계수준의 저하를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소매금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주도의 금융산업 구조조정과정을 통해 중소규모의 자금대출을 주 업무로 삼았던 기존의 지방은행들과 일반시중은행들이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인수․합병을 통해 대형화되었고,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 서민금융담당 은행들도 거의 절반 정도가 퇴출되거나 활동 폭이 크게 위축되었다. 다소나마 공적인 통제를 받았던 소매금융기관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신용카드사의 현금서비스와 사금융이 대신했다. 그 손길이 이끄는 길이 구원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텨내기조차 힘들었던 실업자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의 투기열풍, 그리고 거기에 편승함으로써 나의 미래가 오늘과 같진 않을 거라는 절망적인 도취도 신용카드를 이용한 현금대출의 부담을 크게 마비시켰다. 로버트 매닝이 그의 저서 『신용카드 제국』에서 미국 신용카드 시장의 성장과정을 분석하면서 말했듯이, 신용카드산업은 억압적인 노동시스템과 사회적 소비관계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지탱하는 불안정한 장치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신용카드사들이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던 기존의 영업범위를 구조조정으로 실직자로 몰린 노동자, 대학생, 은퇴한 노인 등의 저소득층과 심지어 파산한 개인들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로버트 폴린(R. Pollin)은 사람들이 차입을 하는 이유가 소득계층에 따라 상이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득순위 하위 40퍼센트의 사람들은 소득의 정체 또는 하락에 따른 소비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절박한 차입(또는 벌충하기 위한 차입)”을 하는 반면, 상위 20퍼센트의 사람들은 투자 및 투기 또는 부의 과시를 위해 차입을 한다. 버쏘우드와 켐슨(Berthoud & Kempson)은 영국 신용시장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가계 예산에서 신용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가난한 가계들은 대체로 금융적 곤경을 완화하기 위해 신용을 이용한다. 좀더 살 만한 계층은 자신들의 소비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용을 끌어다 쓴다. 양쪽 다 그들 몫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신용을 쓰는 것이다. 한쪽은 가난을 경감시키기 위해, 다른 한쪽은 그들의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해 신용을 사용한다.” 신용이용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신용카드사들은 각각의 고객층을 달리 대했다. 그들은 수수료율이 매우 낮고 여타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카드를 발급해 우수고객유치에 주력하는 한편,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 부으며 이들 극소수 자산가 계급의 생활방식과 소비패턴을 선전하여 경제구조조정 속에서 자신의 지위가 더욱더 불안정해져 가는 중산층들의 소비심리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끝으로 신용카드사들은 노동조건이 불안정화로 차입이 절박한 이들에게는 과중한 채무의 짐을 떠 안겼다. 2003년 현재 현금서비스 수수료는 최저 11.9퍼센트부터 최고 23.6퍼센트에 이르는 등 그 폭이 매우 넓다. 더욱이 각 신용카드 사업자의 기간별 카드금리 조정 내역을 살펴보면 카드수수료율의 최저치는 그나마 시장금리의 변동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임에 반해 절박한 차입자들에게 부과되는 카드수수료율의 최고치는 거의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요컨대 소득별로 신용카드 서비스 이용부담은 비대칭적이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지급한 고금리를 통해 부유한 금융자산가들이 더욱더 많은 부를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켜갔다. 카드로 카드를 막는 빚놀이가 전개되고 카드사들이 이를 통해 영업을 확장해 나간 결과, 더그 헨우드의 표현처럼, 부채는 밑으로 가라앉았고 부는 위로 올라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003년 보고서에 의하면 OECD의 기준에 따라 소득계층을 중간 값의 150퍼센트 이상을 상류층, 50퍼센트 이하를 빈곤층, 그 중간에 위치한 이들을 중산층으로 분류할 때 1997년 남한사회에서 상류층과 중산층, 빈곤층은 각각 21.8퍼센트, 68.5퍼센트, 9.7퍼센트를 차지했다. 2001년 상류층은 22.7퍼센트로 1997년에 비해 0.9퍼센트 정도가 증가한 반면, 중산층은 65.3퍼센트로 3.2퍼센트가 감소했고, 빈곤층은 12.0퍼센트로 2.3퍼센트가 증가했다. 이러한 수치는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이후 중간층 중 상류층으로 흡수된 이들은 극히 드문 반면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 경제전체에서 대다수 국민은 순채무자에 속하는 반면, 순채권자의 비율은 매우 작은 수치에 불과하다. 이미 상당히 많은 부가 위로 올라갔고 밑에는 이제 지독한 부채만이 남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축적방식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부를 끌어올려 집중시키는 두레박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물에 물이 마르면 더 이상 올라올 수 있는 것도 없고 밑에 남은 이들이나 위에 있는 이들이나 연쇄적인 갈증에 허덕이는 파국만이 전개될 뿐이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파괴는 파국만을 부를 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런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금융자본이 실물부문에 기생(寄生)해 살아가고 따라서 그의 사활이 실물부문에 긴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정세를 막론한 진실이지만, 금융자본의 구체적인 활동방식과 한계의 실내용은 정세에 따라 변화한다. 실물부문에 투자자금을 댈 때 그들은 이윤의 크기가 커질 거라 믿으며 그 중 일부를 분배받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기존의 실물부문에서 이윤창출의 전망이 난망할 경우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며 이윤이 실현되기만을 느긋이 기다리기보다는 기생의 대상을 재빠르게 변경하면서 부유(浮游)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내일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특히 실물부문에서 파이(pie)의 성장이 정체될 경우 그들은 크기가 정해진 크기의 파이 중 좀더 많은 몫을 자신의 수준에 ‘집중’시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파생상품의 거래와 각국의 통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 주식시장의 부양을 통한 막대한 자본이득의 수취.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경제의 구조조정을 통한 실물부문 과잉자본의 파괴가 수반된다. 이상의 이야기는 금융자유화와 금융세계화를 전후한 금융자본의 일반적인 활동방식에 대한 서술이다. 그런데 97년의 위기 이후 경제의 구조조정이 빠르게 전개되고 노동자의 삶의 조건이 불안정해지면서 금융자유화 시대 금융자본 활동방식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시장의 급속한 팽창과 가계부채의 누적, 그리고 거기서 주어지는 이자를 통해 금융자본이, 비단 과잉 누적된 실물자본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파괴하면서 금융적 부를 또 다른 방식으로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의 이러한 전략은 미래 이윤의 일부를 얻기 위해 생산을 증대시키는 노정에 참여하는 것도,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크기가 고정되어 버린 총 자본 내의 파이 중 좀더 많은 몫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이는 소매금융이라는 촉수를 통해 이전 시기 노동자계급에게 지급된 노동의 생산물을 사후적으로 환수하려는 금융적 집중의 파국적 형태일 뿐이다. 이는 실질임금의 하락과 노동의 불안정화가 계속됨으로써 노동계급이 기본적인 생계유지의 상당부분을 소매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산과정에서의 착취를 넘어 재생산과정에서도 그들 소득의 일부를 이자의 형태로 수탈하려는 이중의 착취전략이다. 이자지급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부의 상향 재분배는 노동자들을 더욱더 헤어 나오기 힘든 채무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늪에 빠져 가는 그들로부터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뽑아내려고 촉수를 빼내지 않는 금융자본의 탐욕스런 기생성은 금융자본 그들 또한 연쇄부실의 늪으로 함께 몰아넣고 있다. PSSP
4월 4일 개최된 토론회 자료집입니다.
딸기와 수박 농사로 성공해 대통령상과 새농민상, 농림부장관상 등을 받아온 농민이 농가부채로 고민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14일 저녁 8시께 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박연거(51)씨 집에서 박씨가 농약을 마시고 신음중인 것을 가족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8시간 만에 숨졌다. 1986년부터 농사를 시작한 박씨는 고향에서 고랭지 딸기와 복수박 농사로 성공한 뒤 94년 신한국인으로 지정돼 대통령상을 탔으며, 97년에는 새농민상과 과학영농부문 농림부장관상을 잇따라 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2억8천만원의 빚을 진 것으로 알려졌다. - 3월 17일자 한겨레 기사 칠레를 남미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산자부(윤진식 장관)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계기로 칠레 및 남미지역에 대한 수출시장 저변확대를 위해 3.24(월)부터 칠레 산티아고에서 한국상품특별전시회를 개최함. 이번 전시회는 LG전자, 현대자동차, 재형솔루텍 등 총 81개 업체가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한칠레 경제교류 행사로서, 휴대폰, 승용차 등을 포함, 디지털TV, DVD플레이어, 무선진공청소기, 초음파의료기기 등 신기술제품 총 100여품목을 전시함으로써 한국상품 붐을 조성하게 됨. - 3월 25일 산자부 보도자료 목숨끊는 농민들, 목숨줄 조이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민들은 농업개방의 칼날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졌다. 농산물 수입은 전면 개방되었으며 쌀만이 최소시장 접근물량 방식으로 수입되었다. WTO 출범 이후 수입액은 51.2% 증가하였고 식량자급도는 급격히 하락하였다. 2001년 식량자급률은 31%에 지나지 않으며 쌀을 제외하면 5% 수준이다. 또한 국내 농업보조금도 매년 감축되어 농가소득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고 농산물 가격도 낮아지고 있다. 이는 곧 농가소득 감소와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지난 10년동안 정부 통계로도 농가부채는 약 259% 증가했으나 소득은 약 65% 증가하는 것에 그쳤다. 모든 상황은 농민들을 살 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게 만드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하나 둘씩 농촌을 떠나거나 삶을 떠나갔다. 여기에 또 하나의 칼날이 끼어든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하 한·칠레 FTA)이 그것이다. 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국가간 무역을 자유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장벽을 제거하자는 내용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국내외 거대자본에게는 혜택을 가져오지만 민중에게는 혜택은커녕 파괴적인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칠레 FTA는 한국이 처음으로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정이다. 98년도부터 추진하여 2002년 10월에 협상을 타결하였으며 2003년 2월에 칠레 대통령이 방문하여 서명한 지금 국회비준 절차만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추진 과정에서 한번도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내용 역시 하나에서 열까지 농업을 붕괴시키고 농민을 압살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한·칠레 FTA가 실행된다면 이것이 기준이 되어 이후 모든 협상에서도 다른 나라에 똑같은 수준의 개방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칠레 FTA 국회비준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한·칠레 FTA는 국가기간산업이자 식량안보 주권산업이 농업, 농촌을 붕괴시킨다. 16년 내에 관세가 철폐되는 것이 15개 품목, 10년 내에는 210여개 품목, 7년 내에는 50여개 품목, 5년 내에는 560여개 품목, 즉시 철폐는 250여개 품목 등 총 1080 품목이 관세가 철폐되면 더 이상 지어먹을 농사가 없게 된다. 포도만 해도 연간 300억원 피해, 기타과실은 5,355억원 피해, 축산물은 1조 3,500억 피해를 볼 것이다.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피해는 더 막대할 것이다. 둘째, 공산품 수출은 미미하고 농업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국가경제에도 마이너스 결과이다. 이미 칠레에서 한국 상품은 점유율 수위권이다. 자동차 2위, 냉장고 2위, 전자렌지 1위, 세탁기 1위, 자동차 타이어와 배터리, 섬유, 엘리베이터, PVC 등이 1위이므로 공산품 관세가 철폐된다고 해서 추가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적을 것이다. 오히려 농업의 붕괴는 한국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낳을 것이다. 셋째, 농산물 완전 관세철폐에 대한 기준이 되어 이후 WTO 개방압력에 대응할수 없게 된다. 농업은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보통 국가간 협정에서 농업개방은 최소화되거나 제외된다. 그러나 한국은 쌀, 사과, 배를 제외하고 모든 농산물의 관세철폐를 약속함으로써 이후 다른 국가들에도 똑같은 개방을 약속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2004년까지 진행되는 WTO 협상에서도 농산물 수출국(케언즈그룹)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4월에 한·칠레 FTA가 비준되면 한국은 WTO 협상에서 개도국지위 유지, 보조금감축 최소화 등을 주장할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넷째, WTO의 위생 검역조치를 따르도록 함으로써 국민건강권을 포기하고 있다. 이는 "검역과 검사를 과학적으로 하되 과학적 근거가 있는 위험요소가 발견될 경우에만 수출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수입국의 독자적인 1차 검역권을 없앤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조작이나 호르몬 농산물 등의 수출입에 대해 검역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국민건강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한·칠레 FTA는 이후 쌀 재협상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1080여 품목에 대해 관세를 철폐하게 되는 한·칠레 FTA가 비준되면 결국 이는 WTO 농업협상 대응을 불리하게 하며 쌀 재협상에 있어서도 쌀을 전면 개방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미 지난 2월에 정부는 WTO에 제출한 개방계획서에서 전략품목(쌀, 마늘 등)의 관세를 6.7% 부과하자고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쌀 관세화 개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부의 FTA특별법이 해결책이 되나? 노무현 정부는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선대책마련 후 국회비준'의 원칙 하에 '자유무역협정체결에 따른 농업인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FTA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경영이양 등 지원, 폐업지원, 피해산업 긴급구제, 농업경쟁력 강화, '자유무역협정 이행지원기금' 설치 및 운용, '자유무역협정이행지원 농업위원회' 구성 및 운영 등이다. 그러나, 반민중적 내용으로 가득한 FTA를 체결하면서 특별법으로 피해를 보상해주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성난 농심 달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난 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와 WTO 출범과 함께 'WTO이행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시행령조차 만들지 않고 사문화시켰으며 그 이후 정부의 정책은 농가부채 키우기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말하는 FTA특별법의 내용도 피해농가에 대한 소득보전이 아니라 소수를 제외하고 폐업을 유도하는 구조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농업축소, 탈농을 위한 농업구조조정법이라고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4월로 다가온 '한·칠레 FTA' 국회비준 저지 투쟁 1호선 신길역 앞에 자리잡은 전농 사무실 한쪽 벽은 현재 국회의원들의 이름으로 빼곡히 차 있다.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가 예상되는 한·칠레 FTA 국회비준을 막아내기 위해서 국회의원 전원을 상대로 비준 거부 서약을 받으면서 그 상황을 매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월 29일 현재 국회의원 114명의 비준 거부 서약을 받은 상태이다. 과반수 이상의 서약을 받아내면 국회 비준을 저지시킬 수 있는 압박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농은 예상하고 있다. 농업회생연대와 같은 농민관련 연대단체 뿐 아니라 전국민중연대도 함께 단체, 지역을 추동하여 국회의원 서약을 받아내고 있다. 물론 서명만 받는 것으로 국회비준을 저지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전농은 대대적인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지난 2월 간부수련회를 통해 전농은 농민운동의 모든 역사를 걸고 한·칠레 FTA을 저지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에 따라 전 간부가 구속도 불사하는 투쟁을 결의하였다. 한·칠레 FTA를 저지하지 못하면 WTO 농업협상이나 쌀 재협상도 대응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때문이다. 그리고 3월 전국적으로 시군구 단위로 영농발대식을 한·칠레 FTA 저지 투쟁의 결의를 담아내는 투쟁선포식으로 개최하였고 각 지역별로 국회의원 지구당사 점거농성 등 투쟁의 수위를 점차로 높이고 있다. 또한 3월 29일 전국 동시다발 민중대회를 통해 투쟁역량을 모아냈고 4월에는 7일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에 돌입하며 17일에는 전국 도로 차량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그리고 국회 본회의에 한·칠레 FTA 비준안이 상정되면 즉시 상경 총력투쟁을 벌일 계획이다. 한편 3월 25일부터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WTO DDA농업협상에 농민대표단을 파견하여 미국, 호주, 일본 대표부 대사 등을 면담하여 한국 농업의 실상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고 현지에서 단식농성까지 진행하고 있다. WTO 개방,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거스르지 않고서 민중의 미래는 없다 농민들은 작년 10만 투쟁을 일구어냈다. 전국 각지 읍, 면, 마을에서 올라온 농민들의 입에서 "WTO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 "신자유주의 철폐" 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민중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한발짝만 더 내딛으려 해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그 날선 칼날은 몸을 베어온다. 그렇지만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볼 도리가 없다. 아무리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운동진영 출신 인사가 정부에 들어간다 한들 WTO, 투자협정, 자유화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한다. 이제 세계는 '다른 세계'를 적극적으로 지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전세계 투쟁하는 민중들의 몫이다. 4월, 농민들은 WTO 개방, 한칠레 FTA 비준에 저항하여 또 일어선다. 국회 앞으로 간다. 3월을 달군 교육개방 저지투쟁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의료시장 개방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자본특구를 만들려는 경제자유구역 폐지투쟁도 준비되고 있다.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본에 대한 규제 철폐, 민중의 삶과 권리 침해라는 동일한 맥락이지만 투쟁은 시차가 있고 단일하지 않다. 그러나 공동의 투쟁을 조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각각이 하나의 사안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WTO 개방의 문제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 PSSP 거대 다국적 곡물 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칠레농업 우리나라에도 바나나 등 외국농산물을 수입판매하고 있고 세계적인 유통망을 지닌 돌(Dole), 유니프루티(Unifrutti) 등의 다국적기업이 대거 진출하여 대규모 직영농장을 보유하고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 다국적기업을 주축으로 한 6대 메이저가 전체 수출물량의 70% 이상을 취급하고 있다. <델꾸도社 예(칠레 과수업계 3위 업체)> 900개 회원농장, 2300ha의 직영농장(총 15000ha, 450명의 정규직원과 3000명의 농업노동자 고용) → 전국 9개소의 대형 최신식 포장센터(수집, 선별, 포장) → 예냉(precooling) → 신선도 유지(콜드체인) → 수출(신선 및 건조과실 120종을 세계 각지에 수출) - 전농,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저지 자료집」中
작년 11월 14일, 노동운동의 거센 반발을 무시하고 국회에서 통과된 '경제자유구역법'은 노무현정부의 출범을 전후로 발표된 12대 국정과제(2월 21일), 경제운용방향(3월 27일)등에서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실현과제를 주요하게 언급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올 상반기 중의 시행령 마련 작업을 거친 이후 하반기부터는 법안의 실행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지난 21일, 7월 경제자유구역법 발효와 함께 인천공항, 부산항, 광양항 인근 지역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우선 지정할 것이라 발표하였다. 주지하다 시피 노무현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방안은 물류중심지, 첨단산업클러스터, 비즈니스중심지 구축이라는 크게 세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류중심지의 경우 인천공항, 부산항, 광양항을 개발하여 동북아 물류의 중심거점화 한다는 것인데, 보다 장기적으로는 남북철도의 연결을 통해 유라시아대륙과의 연계 교통망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첨단산업클러스터 조성 계획은 IT/BT등의 첨단산업과 동북아의 부품·소재 공급기지, R&D기지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부분의 경우 김대중 정권 당시의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구상에서는 없던 것이 추가된 것으로, 국내 재벌들의 '역차별' 주장과 투기성 금융자본의 진출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결과라 예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즈니스 중심지 구상은 금융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하여 초민족기업과 금융기관의 아시아본부를 유치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2007년까지 OECD수준으로 금융관련제도를 선진화하고 기업경영 및 생활환경을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개선하겠다고 한다. 대략의 구상이 드러난 시점에서, 그리고 법안이 이미 통과되고 시행령 제정, 기획단 구성 등 법안 실행을 위한 제도정비라는 매우 어렵고 불투명한 투쟁지형을 앞두고 이 투쟁의 방향과 의미에 대한 재정리가 필요하다.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구상의 허구성 김대중 정권 당시의 경제개혁을 통해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는 남한 경제에 있어,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가운데 제시된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구상의 배경은 결국 다음의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초민족자본(기업)의 경제전략, 즉 세계 자본시장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적응·편입하는 방식만이 남한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보장한다는 판단이다. 이에 현재 미국과 EU를 위협할 만큼 높은 성장잠재력을 평가받고 있는 중국시장을 고려한 가운데, 남한의 지정학적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시장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이다. 둘째, 이러한 구상 하에서 경제자유구역과 같이 특정 지역을 집중 육성하는 방식이 왜 필요한가의 문제인데, 이미 나라전체가 경제특구라 할 만큼 개방이 진전된 동아시아 다른 국가(대만, 홍콩, 싱가폴 등)들에 비해 남한 경제가 가지는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적 투자, 이에 따라 특정 지역,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육성책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의 현실가능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인데, 자본유치형 국가들의 경제적 불안정은 작년 초 아르헨티나 사태를 비롯하여 에콰도르, 브라질 등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통해 증명된다. 다른 한편 경제자유구역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로는 멕시코의 마낄라도라, 아일랜드의 IT밸리, 네덜란드의 물류중심지, 중국의 푸동 등이 있는데, 각각의 나라들의 세계시장 내 위치나 국내 경제상황 등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남한의 모델로서 적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사례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특구의 지정이 개방과 착취의 전국화·제도화를 위한 전초전이라는 사실뿐이다. 미국의 제조업 조립작업의 '도피공장' 역할을 하기 위해 1960년대 경 설치된 멕시코의 마낄라도라의 경우 애초 북부 국경지역의 20km이내로 한정되어 있던 것이 1972년 국내 전체로 확대되었으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체결 이후에는 거의 무관세 지역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이는 저임금을 찾아 멕시코에 진입했던 미국의 초민족기업에게 영구적인 수탈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경제자유구역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구상이 가져올 파괴적 효과에 대해서 운동진영 내에서는 이미 많은 분석들이 진행된 바 있다. 정리하면 크게 세가지 측면인데, 먼저 전적으로 외자유치를 위한 이러한 정책이 남한경제의 불안정성, 초민족금융자본에 대한 종속성을 더욱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2002년 제경부에서 발표한 외자유치 관련 통계를 보면 2002년 외국인투자가 전년대비 19.4% 감소한 9,101백만불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감소의 이유를 전세계적 경기침체와 국내 대형 M&A물량 감소에서 찾고 있다. 1998년 외국인투자촉진법이 제정된 이후 외국인직접투자가 활성화되었던 1990-2000년 당시 주요 실적이 부실기업에 대한 M&A에 따른 것이었으며, 2000년 초반 들어서면서 직접투자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대부분이 증권시장으로 유입되었다는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뒷받침된다. 문제는 이러한 외국인투자의 불안정과 투기성이 경제자유구역과 같은 특혜성 조치들로 점철된 구상을 통해 극복될 것인가인데, 현재까지 드러난 사례들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지난 2월 초, 인천 경제자유구역 내에 생명공학산업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백스젠, 미국계 부동산 투자회사인 게일컴퍼니가 이미 본계약을 맺고 각각 올 3월, 내년 10월에 공장과 비즈니스센터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고, 국제적인 물류기업인 디에이치엘(DHL)이 홍콩에 있는 동북아센터를 영종도로 옮기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한 달도 안되어 게일사와 계약의 전제조건인 2008년까지의 제2연륙교(송도와 신공항 연결) 건설이 이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영국 건설업체인 AMC측의 자금조달 계획이 마련되지 못함으로써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또한 인천의 경우도 송도와 김포 등지에 이미 들어와 있던 몇몇 외국기업들 조차 경제자유구역의 지정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업철수를 추진중이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동북아중심국가 구상이라는 것은 외자유치를 내건 위험한 곡예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지역간 경쟁과 불균형발전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의 우선 지정이 확실시되고 있는 지역은 인천, 부산 광양 세 곳이지만,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12대 국정과제 내의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신국토관리전략" 등에 따르면, 지역특화산업의 육성이라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대도시들에 대한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렇듯 남발되고 있는 계획에서 배제된 지역들의 반발과 경쟁적인 특성화전략의 입안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이미 서울의 금융중심지 조성, 경기도의 IT밸리 중심의 자유구역의 지정이 해당 지자체의 적극적인 요청 하에서 확정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인천 송도에 IT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대해 대덕산업단지에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특혜지역으로 추가 선정해 줄 것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신국토관리전략' 등에서 제시하고 계획의 대부분이 인천, 부산, 광양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자유구역과 연관이 되어있는데(서해안 벨트, 중국진출의 교두보 마련), 장기적으로 경제자유구역의 전국적 확산을 예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경제자유구역의 실행이 노동자·민중들에게 미칠 파괴적인 효과에 대한 것이다. 작년 말 민중운동이 경제자유구역법안의 제정되던 당시 이에 대해 강도 높은 투쟁을 벌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먼저, 노동권은 심각하게 후퇴할 것인데, 월차휴가 폐지, 주휴·생리휴가 무급화, 파견대상의 확대, 단체행동권 제약, 장애인·고령자 의무고용 회피 등의 조항이 경제자유구역법안에 명시되어 있다. 월차휴가, 생리휴가의 경우 주5일제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에 대한 공격이라 할 수 있다. 파견제의 경우 현재로써도 비정규직투쟁의 중심과제인데, 경제자유구역 내에서 이에 대한 무제한적 사용이 허용된다면 전국적으로 더욱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조치들이 결국에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명분 하에 저임금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교육과 의료 부문에서 외국민간자본 진출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WTO 서비스시장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선시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함으로써 개방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 밖에도 소득세, 법인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종토세 등이 2년에서 3년간 50%에서 100%가 면제되는 등 매우 파격적인 조세감면 혜택이 주어지며, 환경규제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적 투쟁과 지역의 투쟁이 결합되어야 한다. 경제자유구역 지역이 확실시되고 있는 인천, 부산, 광양의 지자체는 2003년 주요업무계획의 많은 부분을 이에 대한 계획으로 채우고 있다. 인천의 경우만 하더라도 IT산업의 전략적 육성, 지식정보산업 기반 육성, 인천국제공항 2단계 건설 사업, 컨테이너 정기항로의 개설과 확충 등의 정책제시와 함께 해외 기업 투치유치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다른 지역 역시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인데, 지정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각종 정책과 아이디어를 발굴하는데 주력하고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구상은 2020년에 이르러 그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매우 장기적인 플랜이다. 실지로 광양시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정이 고시되는 것이 대략 2004년 상반기, 재경부의 승인이 2005년 경, 개발사업 시행을 2005년경 이후로 전망하고 있다. 작년 말, 법안의 제정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민중운동이 올 상반기 투쟁을 얼마나 강력하게 벌이냐가 이 20년의 계획을 좌우한다 하겠다. 부산과 경기 지역의 경우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걸쳐 지역차원의 투쟁기구를 구성하여 경제자유구역법 폐기, 지정반대를 위한 투쟁을 진행중이다. 그러나 광양, 인천지역의 경우 우선 지정대상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직까지 이렇다할 투쟁의 흐름을 만들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의 허구성과 경제자유구역 실행이 가져올 노동자·민중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를 적극적으로 폭로하는 것을 중심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 경제자유구역 투쟁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투쟁과 해당 지역차원의 응집된 투쟁이 상호 결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노동운동, 민중운동 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시급히 조직되어야 한다. 경제자유구역의 직접적 폐해가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는 결국 경제자유구역의 전국화, 노동권의 하향평준화로 결과할 것이 명약관화하기에 노동운동이 일차적인 투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의 논리 하에 사실상 新지역이기주의를 추동하면서 추진중인 동북아중심국가 건설 구상의 실상을 지역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폭로해 나가야 한다. 요컨대 경제자유구역 투쟁은 하나의 법안 폐지 투쟁을 넘어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 그것의 요체로서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보다 확대·강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 산업의 관계가 밀접함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연적이던 아니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산업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관념은 20세기 내내 부동의 진실로 여겨져 왔다. 그러한 인식을 확장시키는데 미국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또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량생산과 소비 그리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적극적 투자는 산업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을 낳게 한 미국식 산업 혹은 미국의 산업과 과학기술간의 관계에 대해 차분히 볼 수 있는 기획을 준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식 산업의 발달은 대단히 우연적인 몇 가지 계기들과 필연적인 계기들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것은 역시 미국의 특수한 상황과 세계적 상황에 이끌린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산업과 과학기술간의 관계가 정립되었고 냉전을 통해 오늘날 미국식 생산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금융화를 진행시키면서 산업과 과학 기술의 관계는 기존의 관계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전적 관계 맺기일지 퇴보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문제이나 분명히 이는 지난 2세기 동안 형성된 미국식 생산에 비하면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세계적인 휴대폰 반도체 업체인 퀄컴은 군으로부터 불하받은 CDMA기술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윤은 금융적 이해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산업부문을 넘어섰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과학기술이 산업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생산 혹은 산업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미국식 생산체계는 변화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생산의 변화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생시켰다. 하나는 미국 내 노동관계의 변화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미국식 생산의 붕괴이다. 전제했다시피 이러한 붕괴이후 자본이 순방향의 성장을 이루어 낼지는 미지수이나 현재 미국의 경기 침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전쟁보다 경제를' 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구호가 미국 반전시위에 등장할 정도로 미국의 경기침체는 심각하다. 하기에 이번 기획에서는 현재까지 이르는 미국식 생산의 발전 혹은 전개양상을 시기적 구분에 따라 3차례에 거쳐 다룰 것이다. 처음 기획은 미국식 대량생산의 탄생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기획은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산업을 특징짓게 되는 군-기업-과학기술의 관계정립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은 2차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미국 산업-과학기술의 변모이다. 산업을 이루는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번 기획의 목적은 과학과 기술이 미국산업에 미친 영향 그리고 미국식 생산과 산업이 과학기술의 현재적 꼴을 이루기까지의 역사이다. 기획1. "Colt Revolver에서 Model T까지" 왜 미국에서 출발했는가 미국식 생산과 과학기술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왜 미국에서 먼저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발명 혹은 생산이 이루어 졌는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몇 가지 전통적인 답들을 꼽아보면 우선 미국은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론티어 정신이 있다는 설명(1890, 터너의 프론티어 이론)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진취적인 미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 같은 미개한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대고 있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의 성격이 이데올로기로서 복고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에 저항했던 성격을 본다면 이러한 증거는 오히려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의 상황 때문에 러다이트적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다른 설명으로 미국은 인구가 적고 노동력이 귀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꿈은 승진도 자신의 공장을 갖는 것도 아닌 대규모 경작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활한 대토지가 이미 인디언 대학살을 통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에서는 일찍이 노동 대체적인 기계가 등장할 수 있었다. 수확기(C.Mccormick의 Reaper)가 그 예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종교적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미국은 두 번째 에덴(America as a second Eden)이라는 관념이다. 유럽대륙은 타락한 땅이고 미국은 새롭게 세운 낙원이기 때문에 유럽의 상품 보다 자국 상품을 보다 선호하는 경향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수출·입 균형을 보면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미국은 유럽대륙으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흔히 언급되는 것으로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실용적 공리적 사회철학이 있다. 물론 평등과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미국에 있었는지는 심각하게 회의적이고 또 그러한 사상이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쟁적이지만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미국식 생산의 특징이라는 언급은 중요하다. 이상의 전통적인 해석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려보면,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은 미국이 산업에 기계를 도입하는데 대한 적극적 동인을 마련해 주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앞선 전통적 해석에서 언급한 요인들이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앞서 말했던 인구에 비해 광활한 토지와 노동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인들을 통해 노동력의 대체를 위한 기계의 생산과 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계 도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생산의 특성과 정착 미국식 생산의 특성은 기계와 비숙련 노동에 의해 제작된 표준화되고 호환가능한 부품들에 의한 대량생산이다. 이러한 미국식 대량생산이 처음으로 이루어 진 것은 19세기 초엽 정부의 지원을 받은 병기창에서 소총을 생산하면서부터 이다. 남부가 부유해지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계)를 만든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1798년 정부와 2년간 1만 5천정의 소총을 공급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최초의 대량생산은 하퍼스 페리 병기창(Harpers Ferry Armory)의 존 홀(John Hall)에 의해 실현되었다. 홀에 의해 실제로 대량생산된 소총은 10년간 5천 500정에 불과했다. 다소 엉뚱한 휘트니의 호언장담은 하지만 호환가능한 부품들과 표준화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애초 생산의 목적이 대량생산이었던 관계로 대량생산을 가능케하는 조건인 표준화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숙련의 정도를 노동자 개개인에게 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준화에 의한 호환가능한 부품들의 생산은 생산에 있어 숙련을 부차화 시켰고 이는 대량생산에 물꼬를 튼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기에 휘트니의 호언은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가능성있는 확신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소총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한 홀에 의해 대량생산방식은 다양한 산업분야로 전파되었다. 서부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1830년대 개발된 콜트 리볼버(Colt Revolver)는 바로 이러한 대량생산방식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대량생산기술은 1860년대의 Singer재봉틀과 1870년대 자전거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식 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산방식이 발전하였으나 아직 두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 미국식 생산은 아직 걸음마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두 인물은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Tailor)와 헨리포드(Henry Ford) 이다. 헨리 포드의 혁명 : 자동차의 대량생산, 노동자의 대량생산 헨리 포드의 혁명적 업적은 당시까지는 장인과 숙련공의 영역이었던 자동차 생산을 비숙련노동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이기도 했던 포드는 자동차 시장이 보다 확장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적정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시장은 부유층에서부터 시골에 까지 무한대로 확장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 자동차는 자전거가 스피드를 위한 레저였던 것처럼 다만 레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자동차의 적정 가격을 500불 정도로 제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1905년 경 개발한 Model N은 여전히 높은 가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3년 후 개발한 Model T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포드는 거듭되는 개량을 통해 1912년경 Assembly Line 과 Conveyer belt 시스템을 완성했다. 포드의 영향은 다만 생산방식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14년1월 1일 포드는 종래 2,3달러였던 급여를 5달러로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Five-Dollar Day). 그와 동시에 포드사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한 Sociological Dept가 만들어졌고 포드는 작업장내에서 뿐만 아니라 작업장 외에까지 노동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통제가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사에 지원하는 노동자들의 줄은 줄어들지 않았고 자동차의 표준으로 포드의 생산방식이 확립되었다. 포드의 성공은 다만 대량생산방식의 개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전반을 아우르는 생산과 노동 그리고 소비에까지 포드가 미친 영향은 컸다. 거대한 공장과 자본의 집중과 강화는 생산에 있어 표준으로 확립되었고 노동은 탈 숙련화 되었으며 소비는 대량소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생산에 있어 노동의 탈 숙련화 와는 다른 양산으로 고도로 숙련화된 기계가 인간의 숙련을 분절하여 대체했다. 포드는 다양한 공작기계들을 개발함으로써 이에 성공을 거두었고 포드가 개발한 생산공정과 기계들은 산업에서 생산의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물론 그가 꿈꾸던 노동자를 포함한 생산의 완전한 기계화와 함께 말이다. 테일러의 혁명 :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 테일러가 노동과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하버드 진학대신 기계공의 도제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22살 되던 해 Midvale Steel에 입사한 테일러는 6년 만에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당시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에 주목하고 그를 없앨 수 있는 다각도의 방법을 찾는 한편 작업을 분석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정리하려 했다. 테일러는 그의 신조대로 작업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오직 한가지의 길(One best way to do a job)에 매달렸다. 이는 당시 숙련 노동자들의 은밀한 태업(soldiering)에 속수무책이던 관리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테일러는 베들레헴 철강공장에 자신의 방식을 적용시켜 200%의 생산성을 상승시킴으로서 스스로의 이론을 증명했다. 베들레헴 철강공장의 독일계 운반 노동자 슈미트에 대한 실험은 전형적인 테일러의 성공을 보여준다. 테일러는 그의 동선을 분석하여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고 효율적인 동작을 지시했다. 그 결과 하루 12.5 톤의 물품을 운반하던 슈미트는 테일러의 지시 하에 하루 47.5톤의 물품을 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임금은 50%가 올랐다. 이 결과는 당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11년 발표한 논문에서 밝힌 테일러의 작업에 대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시간에 대한 분석, 작업에 대한 분석, 경제적 인센티브, 기능적 직장(foreman)과 계획 부서를 통한 경영의 중요성이다. 노동자의 노동을 기능적 직장을 통해 분할하고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 성과급뿐만 아니라 목표량을 달성 못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차별급여의 도입까지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는 임금에 따라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부속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테일러주의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통제에 저항했고 회사의 소유자들도 테일러의 방식이 스스로의 경영권을 침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일러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미국에서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노동과 생산과정의 통제로 그의 후예들에 의해 자리잡았다. 소결 : 미국식 생산방식의 완성과 기술의 산업에의 도입 테일러와 포드에 의해 드디어 미국식 대량생산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노동의 탈 숙련화를 통해 대량생산의 전형을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기술과 생산간 관계의 전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공학의 정립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대학에 생기기 시작한 공학(engineering) 학과들은 공장에서 기술공의 도제로서 6년 동안 고된 노동을 통해 기계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실험실에서의 실험과 기계설계를 강조했다. 공학은 작업장의 숙련을 연구실의 숙련으로 옮겼고 이는 노동자에게서 숙련을 박탈하는 대신 새로운 숙련계층을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숙련계층은 미국 산업에 있어 중요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 배후에는 테일러의 영향이 있었다. 테일러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계층은 대부분 작업공정을 알고 이를 분석-개량할 수 있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러한 공학중심의 미국 대학들의 설립은 공학과의 교양학부로서 기초과학연구자를 필요로 했고 이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육성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의 순서와 정확히 반대 순서가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미국식 생산방식이 바야흐로 자신의 완결된 몸을 갖게 된 것이다. PSSP 계속>>
전농에서 발간한 자료집입니다.
준비기획단의 자료는 여전히 공개되는 것이 없더군요. 인천시 2003년 주요업무부분 중 경제자유구역과 관련한 부분만 추린 것인데, 인천시에서 구상하는 바와 대략적인 추진일정이 개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