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는 인권마저 차별받아야 하나 - 불법적인 강제단속 정당화하는 국가인권위 규탄한다! - 서울경인이주노조의 국가인권위 점거농성을 지지한다! 1. 국가인권위는 서울경기이주노동조합 아느와르 위원장에 대한 출입국관리공무원들의 불법적인 단속과 구금이 적법한 것이라는 결정을 지난 2일 이주노조에 보내왔다. 이는 출입국관리공무원들과 검,경이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단속이 정당한 것이라고 손들어줌으로써, 그동안 ‘인간사냥’이라고 무수하게 비난받아온 강제단속 행태를 더욱 부추기는 처사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인권마저 외면한 국가인권위를 강력히 규탄하며 즉각적인 무효를 주장하는 바이다. 2. 아느와르 위원장은 이주노조를 결성하였다는 이유로 지난 5월 14일 새벽 1시경 표적단속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시보호명령서를 발부권한이 없는 9급 출입국공무원이 발부했으며 보호명령서를 48시간 내에 발부해야 하는데 이를 훨씬 초과해서 발부하고 심한 구타가 발생하는 등 출입국관리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마저도 무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강제단속과 구금은 원천무효가 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인권위는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사건이 진정된 지 7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난 11월 14일에서야 이것이 적법하다는 반인권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3. 법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단속을 해도 규탄받을 마당에 최소한의 절차조차 지키지 않는 강제단속을 국가인권위마저 정당화시켜 준다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은 도대체 어디가서 하소연을 하란 말인가? 아직도 인권후진국인 이 나라의 현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주노동자들은 인권마저 차별받아야 하나.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의 국가인권위 점거농성은 너무나 정당하다. 국가인권위는 스스로의 반인권적 결정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에게 사죄하고 이를 철회해야 한다. 아느와르 위원장은 즉각 석방되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단속과 추방은 중단되어야 한다. 2005년 12월 6일 사회진보연대
> “물과 에너지는 인권이다!” 물․에너지 사유화 반대 국제 노동조합 대회 자료집 주빌리사우스-아태지역 (APMDD) 자유무역협정WTO반대 국민행동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공공운수산업노동조합연맹
* 부산 국제민중포럼 시 개최된 '대안세계화와 지역사회운동' 워크샵 자료집입니다.
폭력타살 살인정권 노무현 정권은 민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 경찰 폭력으로 사망한 고 전용철 농민의 죽음에 부쳐 1. 연일 농민들의 음독, 분신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지난 15일 농민대회에서 경찰의 곤봉에 머리를 난타당한 전용철 농민이 오늘 새벽 돌아가셨다. 노동자들 역시 비정규직으로 인한 생존의 벼랑 끝에서 처절한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누가 민중들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대책 없는 농업개방과 쌀 수입 개방, 살농 정책으로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자본의 편에만 서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해체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함으로써 삶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의 첨병 노무현 정부는 반드시 민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2.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APEC 정상회의에서 ‘사회양극화와 빈곤문제에 관심을 가지자’고 각국 정상들에게 제안했다. 한국의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그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이가 국제회의에서는 입에 발린 동정심을 표시한 것이다. 철저한 거짓과 기만, 위선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대책 없는 민중생존권 유린으로써 간접적인 타살을 자행하더니 이제는 경찰 폭력으로 직접적인 타살을 자행한 ‘살인정권’이다. 3. 그래서 농민들이 ‘노무현 정권 퇴진, 타도’를 외치고 나섰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노동자 농민들이 스스로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전 사회적인 저항을 일으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이다. 정권과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이 일체가 되어 민중을 죽이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제 노동자 농민 빈민 제 민중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하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민중 연대투쟁의 물결에 나서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와 법질서는 폭력의 악순환을 부른다 소요사태의 책임은 국가와 경찰, 그리고 지배계급에게 있다 지난 10월 27일, 이슬람 신도들이 한 달 동안 낮 시간에 금식을 하는 라마단의 마지막 날, 주민 중 실업자가 50%에 달하고 어린이의 반수가 유급을 경험하며 불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많고 경찰의 무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불심검문이 아이들에게 생애 최초의 굴욕과 증오를 가르치는 파리 방리유(외곽도시) 클리시 수 부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내무장관이 10월 19일 교외 폭력 행위에 ‘가차없는 전쟁’을 치르겠다고 선포한 이래 경찰 검문이 한층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늦게까지 공놀이를 하던 이민자 2세 청소년들은 모욕을 피하고 한 달간 주린 배를 한시라도 빨리 채울 생각에 우회로를 택한다. 경찰과 마주친 이들은 달리기 시작하고 이들 중 두 소년 지에드(17)와 바누(15)는 송전소 담을 넘다가 변압기에 떨어져 감전사한다. 프랑스 언론은 “주변에 일어난 절도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이들 소년을 용의자로 보고 검문을 하려 했을 뿐 추격전은 없었다”는 경찰의 주장을 일제히 보도한다. 그러나 당일 주변 지역에서 절도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방리유 젊은이들은 분노한다. 사고 발생 다음날 밤, ‘경찰의 살인적 추격 작전’을 규탄하며 400여 명의 젊은이들이 250-3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한 가운데 실탄이 경찰차에 날아들고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다음날, 클리시 수 부아 시장을 비롯한 지역 정치인들과 희생자 가족 등 500여 명이 비폭력 침묵시위를 벌이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상황은 없는 등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인다. 그러나 10월 30일 밤, 사르코지는 소년들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책임을 부인하고, 도시 테러를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더 이상 순찰의 문제가 아니다… 체포다”라는 등 강경 발언을 내놓는다. 이와 함께 지난달 25일 또 다른 방리유 아르장퇴유에서 무슬림들을 쓰레기라고 모욕한 사르코지의 발언이 저녁뉴스 시간에 수 차례 방송된다. 이에 더해 사르코지는 소요현장을 초강력 분무기로 청소할 것을 주문하면서 방리유 주민들을 다시 한번 쓰레기 취급한다. 이처럼 명백한 도발에 분노하며 화염병과 돌을 든 방리유 젊은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온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소규모 그룹을 이룬, 14-20세의 마그레브나 아프리카 본토 출신 이민자 자녀들로 구성된 젊은이들의 산발적 방화와 약탈이 늘어난다. 파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22개 교외 소도시들로 소요가 확산되고, 11월 6~7일 밤은 자동차 1,400대가 방화되고 400명이 체포된다. 파리 근교에 한정됐던 혼란은 디종을 시작으로 지방 도시까지 번져 226개 마을에서 1,173대의 차량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며, 심지어 독일과 벨기에 대도시의 외국인 밀집 거주지역에서 프랑스 소요사태의 모방범죄로 보이는 차량방화 사건이 발생하여 전 유럽이 긴장한다. 전국적인 소요사태가 13일째 계속된 11월 9일 프랑스 정부가 본토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비상사태령을 선포한다. 야간통행금지, 집회와 결사 금지, 영장 없는 단속·체포·체포·언론·출판 통제·거주지 제한 등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항목으로 이루어진 비상사태법은 1955년 프랑스 식민지이던 알제리의 독립전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으로, 정부가 2-3세대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을 식민지 신민으로 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방도시들에는 산발적인 소요가 이어지고, 경찰은 에펠탑과 샹 젤리제 대로 등 주요 지점을 위주로 삼엄한 경계 활동을 펼친다. 한편 파리 라탱 구역에서는 좌파 및 노동 단체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열려 정부의 비상조치 발동을 비판하고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사퇴를 촉구한다. 한편 사르코지는 9일 하원회의에서 이번 소요사태에 관해 유죄 판결을 받은 외국인은 체류의 합법성 여부와 관계없이 즉시 추방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피고인이 동일범죄에 대해 이중으로 형사처벌받을 위험을 방지하는) ‘이중위험’(double jeopardy) 금지의 원칙을 드러내놓고 비웃는다. 소요사태를 계기로 “외국인 전원추방”을 주장하는 극우파들도 목소리를 높인다. 11월 8일 『르파리지앵』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3%는 야간통금에 찬성한다. 또한 여론조사기관 CSA에 따르면, 강경발언으로 논란이 된 사르코지 내무장관도 우파성향의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얻는다. 우파 정당 프랑스운동(MPF)의 필립 드 빌리에 당수는 “통금령을 실시하고 군대를 투입하라”고 정부를 압박한다. 또 1980년대 중반 ‘이민자 2백만, 실업자 2백만’이라는 악명 높은 선거구호로 반(反)이민운동을 선도하고 2002년 대선 결선투표 진출로 기염을 토했던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펜은 이민자 대량 유입이 프랑스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자신의 경고가 옳았던 것으로 입증됐다면서 “프랑스 신분증이 있다고 다 프랑스인이 아니다. 프랑스를 위협하는 이민자들은 그들의 원래 나라들로 돌려보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의 신입당원 담당 부서는 사태 발생 이후 1천여 명이 새로 가입했다고 밝힌다. 며칠 동안 침묵하던 시라크 대통령의 첫 발언은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법질서를 존중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빌팽 총리는 11월 8일 오후 하원에 출석해 “프랑스가 진실의 순간을 맞았”으며 “우리 통합 모델의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이민정책에 있다”면서 불법 이민을 더욱 강력하게 금지하겠다고 밝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질서와 경찰논리는 모든 사회쟁점과 갈등을 압도하는 절대선의 자리에 등극한다. 시라크는 “공공질서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질서 회복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랜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부시 역시 테러와의 전쟁이 ‘끝없는 전쟁’이며 인내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주 문제’ - 사회 위기를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 이번 프랑스 소요사태의 중심에는 이른바 ‘이주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주 문제’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심각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실업, 빈곤, 주거, 사회갈등, 범죄, 교육, 동일성, 보건, 복지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이 ‘이주자’들의 존재 때문에 생겨나거나 악화되었다고 진단하고, 따라서 이주자들을 추방하거나 경찰적·행정적 수단에 따라 관리하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처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주자들은 전간기(戰間期) 유럽 특히 독일에서 유태인의 지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민족적 나아가 유럽적 동일성을 위기에 빠뜨리고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불순물로 전시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지난 20년 간 프랑스 정부는 이주자를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직된 비행’으로 간주하면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억압적·굴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경향 쪽으로 점점 더 이끌렸다. 좌우 간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좌우파 간 격렬한 경쟁의 특권적 대상으로 등극했다. 1990년대 후반 미등록 이주자의 거대한 투쟁 앞에서 법과 행정부의 권위를 강압한 것은 다름 아닌 ‘좌파 총리’ 조스팽이었다. 그 이후 좌우 양편에서 ‘세계화’의 경제적 힘, ‘범죄적’ 이주 네트워크, 경제적 또는 문화적 특수주의, 마지막으로 ‘탈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홀린 관념적 지식인과 단체가 뿌리째 흔들고 있는 민족주권 및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확고해진다. 이 이데올로기의 특권적 공격 대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주자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주권이다. 즉 국가가 자임하는 ‘주권’과 경제정책·집단안보·정보기술 등에 관해 국가가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무능력이 대비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극히 무력한 이주자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권위가 건재하다는 허구를 상연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권위적으로 잠재우려는 것이다. ‘폭력’과 ‘치안’ 담론의 득세는 정확히 이 맥락 위에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신자유주의 반혁명이 시민권을 축소시키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다. 이를 시민권의 보편적 확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의 권리가 열등하고 취약하며 기존 사회에 통합되었다는 징표를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따라서 르펜과 사르코지가 말한 것처럼 프랑스를 위협하는 이주자들은 신분증이 있더라도 추방될 수 있다는 것)을, 외국인 특히 ‘남반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국가행정 전반의 ‘제도적 인종주의’를 통해 전시함으로써, 민족 구성원의 시민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안도감을 주려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통합’ 담론의 뿌리로서 식민주의 동화 담론 - 되돌아온 식민주의 유산 현재 국가행정 전반에 확대되는 ‘제도적 인종주의’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유산을 직접적 뿌리로 한다. 우선 현재 알제리와 같은 과거 (반)식민지 영토 출신 노동자들에게, 나아가 이른바 ‘남반부’ 노동자들 전반에게 적용되는 행정적 조치와 관행은, 프랑스 국가장치 형성의 결정적 시기에 식민지 영토에서 ‘토착’ 인구를 대상으로 집행된 정책을 그 기원으로 한다. 방리유에 대한 도시 정책이 그렇고, 무엇보다 이번에 발동된 비상사태법이 그렇다. 또한 이주 문제의 해결책인 양 제시되는 이른바 ‘사회통합’ 담론조차 기실 제국주의적인 동화 담론에서 연원한 것이다.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통합과 차별(화)라는 통념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특수, 공/사의 위계와 유비할 수 있는 위계를 이룬다. 이 위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 ‘공화주의’라 불리는 프랑스 민족성으로, 여기에 통합되는 정도에 따라 ‘문화’와 ‘종족(성)’이 차별적으로 범주화되어, 예컨대 ‘공화국 시민’과 ‘이등 시민’, 그리고 ‘불법 이민’이 분할된다. 역사적으로 이 같은 위계의 목적은 식민지 토착민이 새롭게 해방된 시민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특수하고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집단들에 대한 물리적·상징적 폭력 및 그로 인한 갈등 가능성을 포함한다. 한때 사라지거나 약화된 줄 알았던 이 같은 (재)식민화 경향은 그동안 잠복해 있다가, 80년대 들어 경제적 세계화와 새로운 불평등의 효과를 배경으로 재출현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미디어에 의해 조장되는 세계 및 인류에 대한 고정관념 유포, 특히 남반부 인민들에 대한 체계적 평가절하였다. 세계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다고 여겨지는 위치는 특정 국가 안에서 그들이 점해야 한다고 간주되는 위치로 번역되어 할당된다. 이는 각각의 인종이 고유한 문화를 가지는 바, 이를 보호하려면 문화들이 섞이지 않게 하고 ‘문화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순수주의적 고립주의, 반-인종주의를 후방으로부터 공격하는 이른바 ‘차별화주의적’ 신-인종주의와 결합한다. 이에 따라 남반부 출신 시민들은 주로 도시나 교외의 게토로 분리수용되거니와, 이곳에서는 식민지 점령지에서 실행되는 행정조치가 집행되고, 종종 적나라한 경찰 폭력이 지배한다. 소요가 일어나기 전 클리시 수 부아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남한에서도 전혀 예외가 아니어서, 국가는 이주노동자들을 영장 없이 강제단속하고 고무총으로 탄압하며, 수갑과 쇠사슬을 휘감는다. 이렇듯 화려하게 부활한 식민주의의 인종 분할은 보충적인 사회적 효과를 갖는다. 우선 경제적 면에서 볼 때, 인종 분할에 기초한 노동시장 분할은 상당한 정도의 자국 노동력이 (비록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입헌화’된 사회적 권리와 조절에 의해 보호받는 시기에, 자국 노동자들에게 경향적으로 금지된 과잉착취를 보충하는 한편 이들을 압박하는 전통적인 ‘산업예비군’을 재생산함으로써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연합, 특히 중심국들은 이주의 흐름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유럽연합 중심국과 주변국, 또는 유럽연합에 속하지 못한 유럽의 주변국 간의 생활수준 격차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함으로써, 낮은 임금과 혹독한 규율, 극도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주변국 노동자들이 회원국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게 강제한다. 유럽의 주변국은 더욱 빈곤해지고, 이 빈곤을 피해 중심국으로 들어온 노동자들은 ‘중심 안의 주변’, ‘제 1세계 안의 제 3세계’를 형성한다. 프랑스 방리유보다 이 말에 잘 들어맞는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방리유는 프랑스 곳곳에, 그리고 유럽 도처의 ‘경계지대’에 있다. 이리하여 개별 국가 안에서 ‘소수자’인 이주자들이 전 유럽 차원에서 보면 유럽연합의 ‘16번째 회원국’이라 불릴 정도의 ‘다수자’로 등장한다. 각 국가들이 이주자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 특히 이번 소요사태를 두고 전 유럽이 확대가능성에 대해 긴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주자를 1848년 당시 마르크스가 유럽을 배회한다고 말한 ‘유령’, 각국의 지배계급을 공포에 떨게 만든 ‘위험계급’과 비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정치적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 인종 분할의 정치적 효과다. 즉 외국인 노동자와 국내 노동자 간,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 간의 인종 분할을 통해, 이주자들이 전통적인 계급투쟁 형태에 참여하거나, 사회적 관계가 초민족화하는 맥락에 맞게 새로운 형태를 발명해 내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분할선을 사이에 두고 분할선 이 편에 있는 방어적 대중운동은 현재 위기의 원인뿐만 아니라 그런 위기를 무력하게 겪는 스스로에 대한 절망과 미움을 분할선 저 편의 이주자들에게 투사한다. 이는 현재의 위기를 상상적으로 회피하려는 노력으로, 이 같은 정서가 강력한 한에서 대중들은 국가가 이주자들에게 가하는 물리적․상징적 폭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분할선 저 편에서 이주자들은 공적 영역에의 접근, 표현의 자유와 투쟁의 가능성이 금지되고 게토에 감금되며, 개성화와 사회화를 동시에 억압받고 따라서 식민지 상황에서 그런 것처럼 개인적·집단적 자유의 쟁취를 제약받는다. 이주자들의 정치적 진출이 이들의 억압과 배제 곧 ‘비권리’에 기초한 착취 가능성 및 사회적 다수자의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불의가 프랑스의 공적 생활을 기초하고 있다. ‘진실의 순간’ 운운에도 불구하고 빌팽 총리의 발언이 비길 데 없이 위선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주자들을 끊임없이 불법 상태로 내모는 것이 기존 프랑스의 ‘사회통합’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통합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이주자들의 불법 상태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이들을 다시 한번 배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착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프랑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프랑스와 동일한 불의에 기초한 모든 국가와 사회에 확산될 잠재력을 갖는다.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유럽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바꿔 놓는 거대한 ‘사건’을 막 지난 것인지도 모른다. 갈등의 범죄화는 더큰 불의와 폭력을 부를 뿐이다 프랑스 소요사태는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경제위기와 세계화 속에서 계급간․지역 간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되는 한편 기존의 민족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 그 원인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발본적으로 변혁하기보다 방어적이고 행정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생겨난 극단적 결과다. 신자유주의가 불평등과 배제를 심화시킴과 동시에 이렇게 발생한 문제를 행정적·경찰적으로 다루는 ‘배제에 기반한 관리주의’라고 한다면, 이는 신자유주의를 채택하는 모든 국가가 공통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느 날부터인가 ‘정치논리와 이념’을 배제하고 ‘시장원리와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민생정치’와 ‘사회적 합의․통합’에 주력하자는 담론이 좌/우, 진보/보수세력을 막론하고 세를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프랑스 소요사태의 구조적 원인이 되는 관리주의의 핵심 논리로, 이는 정치를 말의 강한 의미에서 ‘통치’와 ‘치안’으로 타락시킨다. 관리주의는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종언’, 즉 계급투쟁과 여타 갈등 형태의 정당성을 발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치 적어도 민주주의 정치가 갈등의 생산성을 인정한다면, 행정의 논리는 갈등을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가운데 합의와 통합을 지향한다. 그러나 갈등과 근본적 차이에 대한 몰인정 및 법질서적 접근, 결국 갈등과 차이의 범죄화는 자신들을 그 상태로 밀어 넣은 지배계급과 엘리트에게 오히려 쓰레기 취급을 받는 대중들의 격분을 초래한다. 만일 대중들에게 어떤 정치적·공적 해결책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대중들은 종종 극단적이고 자기파괴적이며 ‘주소 없는’ 폭력을 통해 존엄성의 침해에 대한 격분을 표현한다. 이번 프랑스 소요 사태에서 우리는 이 같은 대중들의 분노를 목격한다. 하지만 이 같은 분노는 역설적으로 법질서적이고 경찰적인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으로 흡수된다. 실제로 이번 사르코지의 대응에서 보듯, 경찰논리의 대변자들은 갈등을 범죄화하여 대항폭력을 도발한 후, 그렇게 유발된 대항폭력과 이 폭력에 대해 느끼는 대중들의 불안에 힘입어, 이른바 ‘예방폭력’으로서 자신의 폭력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각종 설문조사 결과 프랑스 시민들의 70% 이상이 정부의 ‘비상사태 선포’에 찬성하고, 법질서적 접근을 지지하며, 르펜당에 며칠 사이 1000명 이상 가입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지배계급들이 취약한 정당성을 보충하는 방식이다. 또한 갈등을 ‘법질서’를 해치는 ‘범죄’로 바라봤을 때, 우리 스스로 빠질 수 있는 반동화의 위험이다. 따라서 가장 우선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 등장한 대중들의 비참한 조건을 법질서와 경찰논리의 이름으로 억압하고 은폐하지 않으면서, 똑바로 대면하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의 비상사태 선포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으로,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절망적인 외침에 응답하면서, ‘사회통합’을 되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배제한 기존 사회를 변혁하고, 그 사회 안에서 안락하지만 불의한 지위를 부여받았던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점점 더 야만적이고 경찰적으로 변하는 국가 개입이 일종의 ‘상수’로서 개입하여, 대중들의 분노 및 폭력의 악순환을 도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과제와 함께 무엇보다 긴급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법질서와 경찰을 앞세워 폭력을 악화시키는 국가와 지배계급의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이는 이미 벌어진 사안에 대한 대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안의 전개를 선제적으로 규정하는 폭력의 구조 자체에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클리시수 부아의 비극, 우리 사회에서 더 비참하게 고통받고 모욕당하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하는 책임이다.
한계에 처한 미국의 점령정책 지난 10월 15일부터 이라크 전역에서 국민투표에 부쳐진 헌법안은 10월 25일(현지시간) 78.6%의 찬성(21.4%의 반대)으로 통과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국민들이 극단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즉각적인 환영의사를 밝혔지만 제헌 국민투표의 성사가 곧바로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더욱 높다. 종교적/종족적 갈등을 조장하는 미국의 점령정책 이번 투표결과는 외형상으로 본다면 찬성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민중들로부터 별로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전체 투표율은 2/3에 못미치는 63%를 기록했다는 점(따라서 이라크인의 과반수는 투표에 불참하거나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비록 헌법 부결 요건에 해당하지는 않았지만 3개 주에서 반대표가 과반수 이상이었다는 점, 가장 중요하게는 종교적/종족적 분할 속에서 이번 헌법은 ‘제헌’에 미달하는 사실상의 임시헌법에 불과하다. 애초 지난 2월 이라크에서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을 실시했으나 이는 수니파의 불참(수니파들의 주요 거주지역인 안바르주의 경우 투표율은 불과 2%였다)으로 대표성이 결여되었고, 5월에 구성된 헌법제정위원회와 헌법제정단에서 이번 헌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연방제를 둘러싼 수니파와 시아파/쿠르드족의 갈등은 아직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 북부 쿠르드족과 시아파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는 유전지대, 관광자원 등을 포함하고 있어 재정과 유전관할에 대해 지방정부의 폭넓은 재량을 요구하는 반면 이를 사실상 ‘분열행위’로 규정하는 수니파들은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는 형국이며, 시아파/쿠르드족이 주도하는 의회와 과도정부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내년 개헌안을 마련하고 이를 다시 국민투표에 부친다고 하여 이번 헌법안은 사실상 올 12월 15일 총선과 대통령 선출에 국한되는 임시헌법이 될 공산이 크다(헌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배제된 수니파들의 반발은 보다 극렬한 형태로 표출될 것이다). 이번 투표결과는 수니파(20%)와, 시아파+쿠르드족(60% + 20%)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라크의 종교적/종족적 분할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인 대립이 이처럼 종교적/종족적 계선(界線)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국이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분할통치 방식을 구사한 데 따른 결과이다. 사실상 미국이 운영했던 연합군임시행정처(CPA)에서 과도통치위원회(과도정부)로 행정권을 이양할 당시,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이라는 협소한 프리즘으로 이라크 사회의 복합적인 세력들을 재단하고 이에 따라 내각구성 비율을 정한 것이다(시아파 13, 수니파 5, 쿠르드 5, 투르크멘 1).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에 따른 자리배분은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어 부총리 4명 중 3명은 각각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에게 돌아가고, 장관직은 시아파 16, 쿠르드 7, 수니파 6, 기독교 1, 투르크멘 1 등으로 분배되었다. 미국과 미국이 후원하는 망명인사들은 CPA 시절부터, 과도통치위원회, 임시정부를 구성하면서 시아, 수니, 쿠르드의 인구 비율에 비례하는 정치적 틀을 마련하려는 것인데, 이러한 시도는 ‘수니 = 바트당 = 후세인 충성파’로 동일시하면서 수니파가 주변화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조성하고 종교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함으로써 종교적/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집단들 간의 갈등과 반목을 수반하게 된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주둔과 개입의 불가피성을 강변한다. 여전히 계속되는 미국의 군사작전 이라크에서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된 날 미군이 사망자수는 이미 2,000명을 넘었으며 지난달까지 일주일 200건 이하였던 저항세력의 공격은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번 달 들어 400건으로 늘어났다. 또한 국민투표가 통과된 지 불과 이틀 후에 발생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무장충돌로 21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지는 등 여전히 이라크는 전쟁 중이다. 미 국방부는 저항세력에 의해 2만 6천명이 2004년 1월 이후 사망했다고 발표하면서도 연합군에 의한 인명피해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지난해 의학잡지 『랜싯』의 추산으로는 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의 점령기간 동안 사망한 이라크인은 무려 10만 명이다). 상당수의 이라크인들은 저항세력의 (미/영) 연합국에 대한 무장공격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45%)(영국군 점령 하의 마이산주에서는 65%에 이른다), 연합군의 주둔을 강력히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82%). 반면 단지 1% 미만의 이라크인들만이 연합군이 치안향상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67%의 이라크인들은 점령으로 치안이 더 불안해졌다고 느끼고 있다(『데일리 텔레그래프』 10월 25일). 서방의 주류 미디어는 이러한 불안은 저항세력의 무차별적인 테러 때문이라고 보겠지만 실상 이라크인들의 시각은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해 팔루자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그 일부만이 외부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미군의 이라크인 대량학살과 고문과 학대는 완전히 이라크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 6월 터키에서 열린 이라크국제전범재판에서의 증언에서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저항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가정집을 급습하여 … 남성들에게 협의가 있다면 그들을 가둔 채로 집을 폭파해 버린다. 그리고 여자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이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다”(하나 이브라임의 증언), “점령 때문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고 일상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 점에 없이 검문이 강화되고 있다”(이만 카흐마스의 증언) 지난 9월에는 미군 4천명과 이라크군 6천명을 동원하여 탈 아파르를 봉쇄, 초토화하였고 불과 며칠 전인 11월 1일 미군 1천명은 헬리콥터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북서부 알사드 지역에 대한 공격을 단행, 4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미국이 국민투표의 성공을 자축하는 동안, 여전히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무수한 이라크인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탄에 빠진 민중의 생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의 군수산업 무엇보다 이라크인들이 느끼는 불만의 근저에는 후세인을 축출한 이후 오히려 민중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점령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이라크에서 의회가 구성되고 과도정부가 출범했음에도 사실상 이라크에 대한 통치는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데, ‘테러세력의 소탕’에 초점을 맞추는 점령정책은 이라크의 재건과정에서 핵심적인 민중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전보다 훨씬 후퇴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라크 경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난관 중의 하나는 후세인 정권 시절 이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서방 각국으로부터 조달한 막대한 액수의 외채이다. 1,20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외채에 대해 지난 해 채권국들의 비공식 협의체인 파리클럽은 80%를 탕감하는 전제조건으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실행과 이에 대한 IMF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세웠다. 여기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사실상 이라크의 모든 부문의 산업에 대해 외국인 투자의 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서 이미 CPA 시절 법령 39조를 통해 보장된 바 있다. 후세인의 축출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선전하면서도 독재정권의 전쟁비용으로 충당된 부채를 이라크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은 형용모순일 뿐더러 부당하다. 더욱이 외채를 부분적으로 탕감하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관철하려는 데서 미국이 강조하는 이라크의 재건이란 초민족적 자본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권의 재분배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인들의 노동과 보건, 기타 공공 서비스의 질은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이다. 전쟁 이전 10.5%였던 실업률은 2004년 현재 18.4%에 달하고 있으며, 생후 5개월에서 6살 이하의 어린이 중 43% 이상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5월 12일 발표된 유엔개발계획(UNDP)과 이라크 과도정부의 공동조사).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 공식적인 통계보다 훨씬 심각한데 이라크국제전범재판에서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 실업률은 80%에 달하고 남성들의 경제능력이 완전 상실된 가운데 여성들의 경제적 수단으로서 성매매가 권장되는 있다(하나 이브라임의 증언). 게다가 석유와 전기, 물의 부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라크 정부는 지난 5월 석유와 전기에 대한 보조를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한 이라크인은 편지에서 “모든 게 날마다 나빠지고 있다. 이라크는 이라크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날마다 사람들은 곧 이 나라를 빠져나갈 생각에 빠져든다. … 이것이 미국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자유와 민주주의다”라고 말한다(www.zmag.org 5/31). 이러한 이라크의 피폐한 상황은 과도정부가 각종 보조금을 중단하고, 특히 석유산업을 사유화하려는 가운데 앞으로 별로 나아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석유가 매장된 이라크의 유전은 이제 이라크의 공유재산으로서가 아니라 미점령당국과 결탁한 초국적 오일자본의 ‘황금시장’으로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날이 악화되는 민중의 생활상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군수자본은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이라크 침략전쟁과 저항세력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공방을 거듭하면서 록히드 마틴, 보잉, 제너럴 일렉트릭 등 대표적인 군수업체들은 매출액과 이익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이중 최대 군수업체인 록히드 마틴은 2001년 이후 3년 동안 무려 50% 매출이 늘었다). 이뿐만 아니라 “육해공의 안전보장”을 내세우며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민간 경비회사는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냉전이 끝난 이후 각국이 병력을 줄이면서 군사업무를 외주화하면서 등장한 민간 경비회사는 현재 전세계에 100여 개가 ‘성업 중’인데, 이 가운데 절반이 현재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주로 무기관리, 요인경호, 물자수송, 시설경호, 식량공급 등의 활동을 담당하는 이들은 일당 1,000달러를 받으며 새롭게 등장한 ‘치안시장’의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들 용병은 무려 2만 명으로서 미군에 이어 사실상 ‘제2의 무장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미국의 점령정책은 실업과 빈곤 속의 이라크 민중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군수업체와 경비회사에게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점령정책의 실패: 내전의 가능성 이라크는 각각의 정치세력들이 민병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로 인해 향후 서로의 정치적 갈등을 군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의 종교적/종족적 구성의 다양함 그 자체가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의 충분조건은 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장기주둔과 정치/군사적 역할을 옹호하는 논리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수도 있다(‘내전의 예방자’로서의 미군). 이라크의 정세에서 내전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의 점령정책 및 그 실패 속에서만 현실화될 것이다. 일단 이라크 경찰과 정규군이 종족적/종교적 갈등을 완화하기보다는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시아파와 쿠르드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부는 수니파에 적대적인 무장단체로부터 충원되고 있다. 일례로 7월 바그다드의 한 병원을 시아파로 구성된 경찰 특공대가 습격하여 13명을 연행했는데 이 중 10명이 싸늘한 시신으로 되어 돌아왔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의 미군 지휘관들은 예전 임시정부 고위관료들과 연계된 민병대에 자금을 제공하고, 이들을 훈련시켜왔다(이들은 저항세력을 색출하는 데 이라크군 및 미군과 협력하며 지난 2월 총선의 진행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과도정부를 주도하고 있는 시아파의 최대정당 이라크혁명최고평의회(SCIR)는 바드르여단이라는 민병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미국과 임시정부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수니파는 각종 무장단체를 결성하며 미군과 경찰, 군대에 대한 저항을 주도하고 있으며 상당수 폭탄테러는 이미 시아파를 겨냥하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북부 유전지대 키르쿠크를 장악하려는 쿠르드족은 민병조직 페슈메르가를 거느리고 있어 앞으로 헌법의 개정과정에서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한, 각각의 지역의 경계 설정 문제, 유전관할문제, 舊바트당 인사들에 대한 배제 여부 등을 둘러싼 정치세력들 사이의 갈등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종교적/종족적 분할에 따른 군사적 대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공산이 크다. ‘재건’되지 않고 있는 이라크의 경제, 연합군에 대한 이라크 민중의 일반적인 불만과 적대감, 향후 이라크 국가의 상을 둘러싼 정치세력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저항세력의 공세와 늘어가는 미군 사상자들은 2년 전의 ‘종전선언’을 무색케 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점령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자이툰 부대를 1,000 감축하는 선에서 이라크 파병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덜어내는 데 급급할 뿐 아직도 이라크 점령이 침략적이고 압제적이라는 점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전쟁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오도되고 기만적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지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파병을 감행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재 전혀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이라크 민중들 스스로가 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가? 미군과 외국군의 도움이 없으면 이라크가 훨씬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발상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 논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펙 바로알기 수업관련, 전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식 여론공세를 규탄한다. 해외 참가자 입국 금지 조치를 철회하라. 한나라당 의원들과 조․중․동의 무리한 ‘전교조 때리기’가 도를 넘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원 총회까지 열면서 전교조의 아펙바로알기 수업과 아펙반대 동영상을 비난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대변인 전여옥은 “전교조의 아펙 반대 영상 상영은 교육을 앞세운 폭력”이라는 망발까지 늘어 놓는 등 무차별적인 정치공세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이러한 정치공세는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왜곡한 엉터리 정치공세일 뿐 아니라, 스스로를 패러디 영상물조차 수용할 수 없는 편협한 수구적 집단으로 비하시키는 우둔한 태도이며, 또한 표현의 자유를 형해화시키는 폭거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문제가 된 그 동영상은 전교조 부산지부가 제작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아펙반대국민행동에서 제작한 시사 패러디 동영상이다. 만일 한나라당이 그 동영상 내용에 정녕 문제를 느낀다면, 5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아펙반대국민행동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나라당에게 이 문제에 대해 우리와 공개토론하기를 제안한다. 한나라당이 문제가 된 아펙반대 동영상을 한번 살펴보기만 하면 쉽게 확인될 기본적 사실관계조차 왜곡하면서, 전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식 여론공세를 퍼붓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사립하교법 개정을 무산시킬 목적으로, 한나라당이 무리한 ‘전교조때리기’에 나선 것이 아닌지 그 저의가 심히 의심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시사 패러디 등을 통해 권력자들을 희화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권력자들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문명사회에서 항용 있는 일인데, 이런 정도를 문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시를 극도로 희화화하고 또 비판한 ‘화씨 911’에 비해서, 이번의 ‘이펙기동대’ 동영상이 더 심하다고 할 수 없는데, 유독 한국에서 마녀사냥식의 여론공세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정도의 표현의 자유조차 못견뎌하는 시대착오적인 수구적 집단들이 아직까지도 국회 권력과 언론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지체 현상 때문이다. 한편 부시의 부도덕한 이라크 침략전쟁에 찬성하고, 바로 그 침략전쟁에의 한국군 파병을 주창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폭력’ 운운하며 전교조를 비난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나라당은 영상에 욕설과 비속어가 등장한다며 악의적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성영 의원의 폭언과 욕설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도 반성하지 않았던 한나라당이 비속어 사용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그리고 한나라당 원내대표 강재섭은 전교조를 비난하며 ‘우리 아이 올바르고 반듯하게 키우기 특위’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사립학교법 같은 개혁입법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하고 사학재단 비리를 감싸고 교육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서 앞장서 온 한나라당이 “아이들의 미래” 운운하는 것은 위선적 태도나 다름없다. 전교조 부산지부에서 추진한 ‘APEC 바로알기 수업’은 사회적 쟁점에 대해 학생들의 균형있는 시각을 기르기 위하여 APEC에 대한 찬반의 주장을 소개하고, 학생들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람직한 국제 협력의 방안을 토의하게 해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APEC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수업에 대해 ‘이념과잉’, ‘정치과잉’, ‘선동과잉’, ‘사상적 인질’ 등등의 표현으로 매도하면서, 전교조를 반교육적 집단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교육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현재 부산시교육청에서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는 APEC 계기교육(유치원용, 초등용, 중등용) 자료나 초등학교에서 이미 실천한 보고서를 보면, 철저하게 APEC에 대한 홍보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홍보 위주의 교육은 문제없고 비판의 소리를 담은 교육은 문제삼는다면 이는 우리나라의 교육목표인 ‘민주시민의 양성’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또한 우리는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강력히 규탄하고자 한다. 11월 2일 경찰청은 아펙 정상회의를 앞두고 ꡒ11월 19일까지 반(反) 세계화 시위로 처벌된 경력이 있는 20여 개 시민단체 외국인 998명에 대해 입국금지했다ꡓ는 국제망신 수준의 발표를 했다. 더 나아가 경찰은 또 APEC 회의를 반대하는 집회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높은 단체 소속 외국인 400여 명의 명단을 자체 작성, 이들과 일행이 입국하면 출입국관리소에서 입국사실을 통보받아 각 지방청에 통보, 국내 활동상황을 예의주시키로 했다고도 발표했다. 또한, 강제추방을 당할 수 있다는 안내문까지 배포하겠다고 했다. 경찰의 이런 외국인 블랙리스트 작성은 완전한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는 졸렬한 행동이다. 우리는 묻고 싶다. 살인이나 테러에 직접 관련되지도 않는 해외인사들에 대해 “단지 반세계화 시위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입국을 금지시키려고 추진하는 어떤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를? 반세계화 시위 참여 경력이 입국 금지 통보까지 받아야 할 반인륜적인 행위인가? 우리는 이런 경찰의 처사는 헌법에 보장된 집회지위의 자유 등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헌법적 태도임이 분명하고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따지자면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 ‘조지 부시’야말로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입국 금지 통보를 받아야 할 자다. 또한 아시아 침략전쟁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이를 미화하면서 새로운 전쟁국가를 추진하고 있는 고이즈미야말로 정의와 역사를 거스르는 반인륜적 태도로 말미암아 입국금지통보를 받아야 할 자다. 한편 정부당국에게 경고한다. 작년 칠레에서 개최된 아펙정상회의 당시 7만 명에 달하는 칠레 국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여 부시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또 금년 11월 2일부터 11월 5일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미주정상회담에 침략자 부시는 발도 들여 놓지 말라며, 아르헨티나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을 상대로 부시의 아르헨티나 방문 반대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실정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에서만 부시반대아펙반대 시위를 터부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우리의 요구> 1.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전교조에 대한 마녀사냥식 여론공세를 즉각 중단하라. 1. 정부당국은 반세계화 시위전력 해외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와 입국금지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1. 경찰당국은 비열한 집회방해 공작을 즉각 중단하라. 2005년 11월 3일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
[편집자주] 이 글을 기고한 아미트 센 굽타(Amit Sen Gupta)는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준비과정부터 세계사회포럼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약학을 공부한 후 <전인도민중과학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50만 명의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회와 과학의 결합'과 관련된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2004년 사회포럼에서는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담당했다. 세계사회포럼 국제위원회에서는 '확장 소위원회'의 소집자 역할을 맡고 있다. 올 해 열린 세계사회포럼이 전한 주요한 메시지는 "제국주의 세계화를 향한 저항은 오늘날 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2년 전, 2003년 세계사회포럼 당시만 해도 인도와 뭄바이는 매우 낮선 곳이었다. 그러나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을 치르고 나서는 인도와 뭄바이가 세계사회포럼의 지도 안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2007년에는 세계사회포럼이 아프리카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세계사회포럼은 날개를 달고 전 세계 구석구석으로 전파되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은 단일한 계획에 따르지 않고,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국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다양한 경험과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실 2001년 1회 세계사회포럼이 조직될 당시만 해도 이를 정기적인 행사로 만들 계획은 없었다. 세계사회포럼의 규모와 영향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 그 방향성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2001년 세계사회포럼을 조직하는 과정에 참여한 단체들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단체들이 주를 이루었다. 2002년부터 세계사회포럼은 탈중심화된 방식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역별 포럼 혹은 주제별 포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200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과 같이 엄청나게 성공을 이룬 경우도 있다. 오늘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지중해, 카리브해, 북미 지역,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지역사회포럼이 열리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의 생명력이 반드시 '세계'사회포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토록 다양한 '지역'사회포럼이 세계사회포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험을 '아시아사회포럼'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2003년 1월 인도 하이드라바드에서 열린 아시아사회포럼이 최초의 시도였다. 아시아사회포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연대모임'이 구성되었다. 이 모임은 2002년 하반기에 방콕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하이드라바드 아시아사회포럼에 많은 참가자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하이드라바드 아시아사회포럼 2003년 1월 2일 ~ 7일, 인도의 하이드라바드에서 열린 아시아사회포럼은 인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사회포럼과 관련된 행동의 첫 번째 국면의 정점을 이루었다. 아시아사회포럼의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전역의 많은 단체들이 협력을 이루었다. 세계사회포럼의 정신에 입각해서 열린 아시아사회포럼은 아시아 전역에 걸쳐 관점과 경험, 그리고 희망을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2003년 아시아사회포럼에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남아시아, 북아시아,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 등지에서 많은 이들이 참가했다. 당시 공식적으로 등록한 참가자 수는 1,500만 명 정도였고 이와 별도로 800여명이 청년캠프에 참가했다. 또한 약 2,000개의 문화행사가 열렸다. 자원 활동가만 해도 1,000여명이었다. 등록을 하지 못한 채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대략 2천만 명~ 2천 5만 명 가량이 된다. 이 중 등록한 해외 참가자 수는 어림잡아 780명 정도다. 42개국 860여 단체가 이 포럼에 참가한 셈이다. 아시아사회포럼은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의 행사들로 구성되었다. 1. 컨퍼런스 (참가자 4,000명 이내) 2. 세미나 (참가자 250명 이내) 3. 워크샵 (참가자 50명 ~ 100명) 4. 1월 2일의 개막식과 1월 7일의 폐막식 5. 2월 7일 30,000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 6. 문화 행사(매일) 7. 영화제 8. 민중의 목소리- 매일 한 시간 동안의 증언대회 또한 컨퍼런스에서 다루어진 아시아사회포럼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평화와 안보 2. 부채, 개발, 무역 3. 민족국가, 민주주의와 배제 4. 생태, 문화, 지식 5. 사회기반시설, 계획과 협력 6. 민중운동과 대안 문화 행사는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많은 거리 연극 집단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연극공연을 펼쳤다.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 극장에서도 많은 무대연극이 상연되었다. 노래공연과 시 낭송도 열렸다. 이와 별도로 영화제가 열렸는데, 다큐멘터리 영화와 극영화 모두가 상영되었다. 네 곳의 상영장에서 약 100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민중의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에는 16개 그룹이 참가하여 발표를 진행했고, 여기에는 6개 아시아 다른 나라의 참가자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사회포럼 확산 과정 심화라는 견지에서 보면, 아시아사회포럼의 경험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시아에서 많은 이들이 참가했지만 인도 참가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해외 참가자를 살펴보면 남아시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참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시아 연대그룹이 구성되긴 했지만 하이드라바드 행사의 많은 부분은 주로 인도 단체들이 기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이드라바드 아시아사회포럼이 인도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는 기나긴 여정이 놓여 있다. 하이드라바드 사회포럼 기간 중에 열린 아시아 사회운동 회의는 큰 의의를 지닌다. 이 회의를 통해 아시아 내의 사회운동들이 연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아시아사회포럼에서 세계사회포럼으로 2003년 1월 하이드라바드에서 아시아사회포럼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다음 인도의 활동가들은 2003년 1월 23일 ~ 28일,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했다.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세계사회포럼 국제위원회는 차기 세계사회포럼 (2004년)을 인도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인도에서 진행된 세계사회포럼 준비 활동 인도 세계사회포럼을 조직 과정은 바탕을 넓게 두고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가는 사회운동 및 대중조직, 그리고 비정부기구들 간의 단결에 기여하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아시아사회포럼을 통해 형성된 연계망을 바탕으로 이를 더욱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지역별, 혹은 주제별 사회포럼과 통합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인도의 여러 주에서 각 주(州)별 사회포럼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립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주별 포럼은 세계사회포럼의 이념에 대해 토론하고 지역 차원의 전략을 조율, 평가하는 한편 각 주마다 사회포럼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또한 인도 내의 다양한 그룹들이 부문별 사업을 진행했다. 여성, 달릿(불가촉 천민), 아디바시(소수 부족) 노동자, 농촌·농업 노동자, 청년 조직들이 2004년 뭄바이 사회포럼에 참가자를 모으는 사업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이들은 인도 전역을 순회하며 보건의료, 교육, 사회적 평등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적 대안을 제안하는 활동을 펼쳤다. 뭄바이 교외에 거주하면서 서부노선을 이용해 통근하는 주민들은 2003년 12월 25일 아침부터 운행을 시작한 여러 색으로 장식된 환상적인 기차를 보고 매우 놀랐다.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기차 외벽에는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기차는 세계사회포럼 국제 조직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한 12월 21부터 여러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장식되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열 네 명의 화가가 함께 아홉 칸 짜리 통근 기차(기차의 양 쪽 모두를 장식해 도합 18면)를 장식하는데 참여했다. 젊은 학생, 나이든 화가, 전문 게시판 제작자들이 함께 모여 능숙한 솜씨로 서로 도우며 기차의 커다란 외벽을 순식간에 장식했다. 이 기차는 세계사회포럼이 뭄바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전하며 한 달 동안 운행되었다.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2004년 1월 16일 ~ 21일, 엿새 동안 세계사회포럼이 진행되었다. 10만 명 이상이 참석했으며 이 중 1만 5천명이 해외 참가자였다. 세계사회포럼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과 자본 주도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포럼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을 토론하고, 경험을 교류하며, 사회운동, 노동조합, 비정부기구들 간의 연계를 형성하는 공간을 제공했다. 세계사회포럼이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인도로 옮겨오면서 빈민운동, 특히, 달릿, 아디바시 운동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운동들이 참여하면서 세계사회포럼의 문화는 크게 변화했다. 2004년 세계사회포럼은 다음과 같은 기본 주제에 초점을 두었다. 1. 제국주의 세계화 2. 종교적 분파주의 3. 정체성의 정치와 근본주의 4. 카스트, 인종주의, 그리고 사회적 배제 5. 가부장제 6. 군사화 나흘 동안 진행된 다음과 같은 형태의 행사들에 위의 주제들이 반영되었다. 1. 4개의 대중 포럼 (참가자 10,000 명 ~ 15,000 명) 2. 35개의 대규모 컨퍼런스 (참가자 4,000명 ~ 8,000명) 3. 1,100개 이상의 세미나와 워크샵 (참가자 50명 ~ 1,000명) 4. 50,000명이 참가한 개막식 5. 25,000명이 참가한 대중 집회와 폐막제 문화제와 영화제 2004년 세계사회포럼에서 더 호소력이 지닌 것은 말이 아닌 시각 매체였다. 평범한 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제국주의 세계화, 가부장제, 군사주의, 카스트주의, 인종주의에 관한 내용을 담은 300편의 후보작 중 83편이 선정되었다. 이 영화들은 대안 탐색보다는 저항에 더 초점을 두었다. 저녁 시간에는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들로 행사장 곳곳이 가득 찼다. 클래식 음악, 춤 공연, 연극, 등 수 많은 개인 혹은 집단들이 다양한 종류의 공연을 펼쳤다. 이러한 공연을 보고 많은 관객들이 감동했고, 열광했다. 문화행사들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진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문화는 사상을 대중적으로 유포하는 무기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50편의 거리 연극, 85편의 영화를 만들고 공연하는데 1.500명 이상의 화가, 시인, 극작가, 소설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등이 참여했다. 어떤 문화행사들은 사회적인 회합의 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도 했고, 인도 참가자들과 해외참가자들 사이의 소통을 목표로 하기도 했다. 이 모든 행사는 열린 장소에서 관람료를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화 행사들을 통해 주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풍부한 문화 다양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시아에서의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 2004년 세계사회포럼이 끝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아시아에서 2003년과 2004년에 두 가지의 커다란 포럼을 성공적으로 조직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가 하나로 조율되지 못하고 있는가?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는 대륙차원에서 세계사회포럼 관련 활동을 조율하는 기구가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는 이러한 기구가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유럽, 라틴 아메리카와 달리 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될 당시인 2001년부터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시아는 다른 대륙과 견주어 볼 때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재미있게도, 제국주의 세계화는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경제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인해 아시아 대륙에서 제국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들간의 연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현재 세계의 자본은 약탈을 강화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에 걸친 경제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시아의 사회운동들이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를 공동의 전략을 모색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공동 활동을 전개하는데 활용해야 하는 때가 무르익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005년 6월 초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세계사회포럼을 확산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콜롬보 회의 참석자들은 아시아에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를 더욱 진척시키고 이를 위한 협력을 이루어 나가자는 데에 동의했다.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는데, 첫째는 세계사회포럼 임시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2006년에 아시아지역에서 두 개의 세계사회포럼 행사를 조직하는데 힘을 모은다는 것이다. 2006년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는 파키스탄의 카라치 (1월),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한 도시 (2/2분기)에서 각각 포럼이 조직될 정이다. 이제 콜롬보 회의의 결과를 바탕으로 아시아내의 소지역에서 세계사회포럼을 조직하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아시아 대륙은 모두를 포괄하는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인류의 절반을 포괄해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시아 사회운동들은 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함께 모여야 한다. 만약 우리의 힘이 제국주의 세계화에 도전할 만큼 충분하다면, 적들은 분명 이를 두려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