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시와 통제, 차별과 폭력의 데이터베이스 우리나라의 현행 국가신분등록제도는 호적제도와 주민등록제도를 양 축으로 하고 있다. 호적제도는 일제시대 때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도입된 것이고, 주민등록제도는 박정희 군사정권 때 국민 감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두 제도 모두 인권의 암흑기에 권력의 노골적인 대민 통제 전략으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제도의 결합으로 유례없이 강력한 감시 통제 시스템이 완성된다.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공고해진 현재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여전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감시 통제 시스템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구의 동태를 파악하여 행정사무의 편리를 추구”한다는 주민등록법의 목적에는 슬그머니 “주민생활의 편익을 증진”한다는 말이 추가되었지만, 몇 마디 말로 감시 통제 시스템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음달 정기국회에서는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심의될 예정이며 이것이 통과된다면 곧바로 호적법 개정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민주노동당에서는 주민등록법 개정안과 개인정보보호법안을 제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러한 법안들이 입법화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이번 계기는 분명 대안적인 신분등록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2. 주민등록제도의 개선방안 21. 주민등록업무의 전권은 지방자치단체로 이전되어야 한다. 현재의 주민등록법은 제1조 목적에서 “주민”의 생활편익과 이와 관련한 행정사무의 적정한 처리를 도모한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체계에 있어서는 주민이 아닌 국민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사무의 관장은 지방정부가 하도록 규정하면서도 사무의 지도 감독은 행정자치부장관에게 맡김으로써 지방정부의 역할은 주민정보의 수집과 기록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지방자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지방정부의 주민직접대면행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뿐만 아니라 주민행정업무가 원격으로 지도 감독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주민정보를 필요로 하게 되어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2. 필요이상의 개인정보가 수집되어서는 안 된다. 현행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주민이 행정기관에 등록할 정보는 불과 십여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행령에 따라서 실제로 수집, 보관되어 있는 개인정보는 백여 가지가 넘는다. 필요이상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서부터 감시는 시작된다. 따라서 주민에게서 수집하는 정보는 주민등록법에서 정한 내용으로 한정하고, 부득이한 경우 법률과 지방정부의 조례에 그 내용을 명확히 해야 하며 규정에 없는 항목의 수집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23. 개인의 자기정보통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정보는 정보주체의 통제 하에 수집, 보관, 이용되어야 한다. 주민등록제도는 100여가지가 넘는 개인정보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민정보를 열람하고 이에 대한 정정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았거나 법률의 근거 없이 수집된 자신의 정보를 삭제, 반환, 폐기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다. 또한 주민등록정보의 유출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도 책임당사자인 행정자치부 장관의 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어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24. 주민등록번호, 지문날인, 주민등록증 강제발급 등 반인권적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는 전국민에게 강제부여되며, 평생동안 변동되지 않을뿐더러 공공기관과 민간영역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 신분확인용으로 활용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강력한 식별번호다. 또한 만 17세 이상 모든 국민의 열손가락 지문 강제 날인 제도는 전국민을 범죄인으로 간주하는 극악한 인권침해이다. 역시 만 17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발급받아야 하는 주민등록증은 그 과도한 신원증명능력으로 인하여 사회활동을 위해서 상시 소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분증이 되었다. 주민등록번호는 선택적으로 부여받고 변경할 수 있는 무의미한 일련번호로 대체되어야 하며, 그 사용처를 법률로서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지문날인제도는 두말할 것없이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 주민등록증은 지방정부의 필요에 따라 발급여부를 결정하되 주민이 자율적으로 필요에 따라 발급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호적제도의 대안, 목적별신분등록제 31. 가족의 개념 삭제, 성씨 선택의 자유 보장 현재 정부가 제출한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은 ①호주 개념의 삭제, ②가(家) 개념의 이성애적 핵가족 개념으로의 전환 ③부성강제조항에서 부성원칙조항으로 전환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나라당 마저 호주제 폐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 국회에서는 민법개정안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가족의 범위를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족에 대한 차별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으며, 자신이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해야할 일은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가족들에게 필요한 정책과 지원이 무엇인지, 또한 수적으로 소수이지만 비혈연공동체나 동성애자의 가족, 장애인 독립 가구 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편 열린우리당 이경숙의원은 100여명의 국회의원의 동의를 받고 가족 개념의 삭제와 성씨 선택의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독자 입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민주노동당과 여러 여성단체는 이경숙의원의 취지에는 대체로 동의하나, 실제 제출될 안을 보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32. 목적별신분등록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관된 주장에 비해서 호주제 폐지 이후의 대안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 거의 이뤄진 바가 없다. 그동안 호적부에 대한 대안으로서는 이른바 가족부와 개인별신분등록부가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현행 호적제도가 가진 문제점은 이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부는 호주의 개념은 삭제하였으나 대신 기준인을 둠으로써 현실적으로 성인 남성이 가족을 대표하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이름만 바뀐 호주제에 불과하다. 조대현 판사가 제시한 바 있던 개인별신분등록부 역시 문제는 마찬가지다. 개인의 신분등록표에 배우자, 부모, 자녀의 정보를 담고 있어서 실제 내용상으로는 가족부와 다를 바 없이 이성애적 핵가족만을 정상가족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둘 다 과다한 정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공시제도로 인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전혀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최근에 목적별신분등록제실현연대는 호적제도의 대안으로서 목적별 공부안을 제시한 바 있다. 목적별 공부안은 첫째 여성에 대한 차별 반대, 둘째 프라이버시권의 보장, 셋째 가족형태별 차별에 대한 반대를 기본 취지로 한다. 목적별 공부안은 프라이버시의 보호와 개인별신분등록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기존의 다른 안이 모두 선택하고 있던 인적편재 방식을 버리고 목적별 편재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출생, 사망, 국적 증명을 위한 신분등록부와 혼인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혼인등록부를 구분하고, 신분의 변동 이력과 현재의 신분 상태를 구분하기 위해 별도의 신분변동부와 혼인변동부를 둔다. 그리고 각 공부는 하나의 검색번호로는 동시에 검색되지 않으며, 서로간의 연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함으로써 프라이버시 문제를 최소화하고 있다. 또한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호적제도와 주민등록제도의 연동과 신분공시제도를 제한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보다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목적별신분등록제는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임에는 틀림없다. 4. 주민등록번호 성별구분 폐지를 위한 만인 집단 진정 운동 주민등록번호는 주민등록제도와 호적제도를 연결하는 번호로서, 국가신분등록제의 근간이다. 게다가 정보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민등록번호의 문제점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기록되어 데이터베이스화되는 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는 각각의 데이터베이스를 간단히 연동시킬 수 있는 고유식별자의 역할을 한다. 인터넷에서 자신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정보와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정보가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정보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의 위험성은 이미 충분히 지나치다. 그중에서도 주민등록번호의 성별표기는 더욱 직접적인 차별과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41.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의 성적 정체성을 단순히 생물학적 기준으로 정의하고 그러한 관념을 고착화한다. 성적 정체성은 생물학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서 변화하거나 형성될 수 있다. 사람들이 제각기 다양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맺음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존재하며, 개인은 자신이 성적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주민등록번호의 뒷번호 성별표기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존재함을 부정하고,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출생과 동시에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42. 개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프라이버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성적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부여할 목적이 아니라면, 개인의 성적 정체성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관리할 이유가 없다. 불분명한 목적으로 필요 이상의 정보를 그것도 강제로 수집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한 감시이다. 더군다나 이를 민간부문에서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에 명시함으로써 정보주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성적 정체성이 공개된다는 것은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이다. 43. 국가신분등록제도의 반인권적 차별적 요소가 제거되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 성별표기의 숫자 부여 방식은 그 자체로 성차별적 관념을 강화하고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주민등록번호의 숫자 부여가 남성이 상위순번, 여성이 하위순번으로 배정된 것은 남성이 먼저, 여성이 다음이라는 성차별적 인습의 반영임과 동시에 성역할의 고정을 유발한다. 이러한 취지하에 제기된 ‘주민등록번호 성별구분 폐지를 위한 만인 집단 진정 운동’은 주민등록번호의 반인권성을 알려내기 위해 국가인권위에 집단진정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분등록제도 중에서도 주민등록번호, 그 중에서도 뒷번호 첫째자리. 그리고 그다지 속시원하지 않은 진정이라는 방식.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다소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다. 이것은 국가신분등록제도에 대한 전면전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앞으로 있을 더 크고 중요한 싸움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가신분등록제도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만인집단진정운동 홈페이지 : www.finger.or.kr/10000
국가보안법, 법전에서 이름만 지우면 되나. 지난 10월 17일 열린우리당은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 형법조항을 수정, 개조하여 '내란목적단체' 규정을 두기로 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방침을 당론으로 결정, 이번 회기 내 처리 의지를 밝혔다.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거나 '찬양, 고무', '불고지죄' 등의 명목으로 56년간이나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둘러온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형법보완안을 살펴보면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법전에서 삭제하는 것 이상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고자 폭동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 또는 "예비, 음모한 자"에 대한 처단이라는 규정을 신설하겠다는 것은 사상, 결사 자유의 제한이라는 기존 국보법의 역할을 고스란히 형법으로 이전, 오히려 형법의 확대해석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북한을 외국으로 규정해 적국규정의 해소라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적대적인 외국은 적국이라 규정한다는 형법조항을 그대로 남겨놓아 북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평가하기 힘들다.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법전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안보와 권력유지의 명분으로 사회구성원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를 온몸으로 수호해왔던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인권탄압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는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와는 하등 상관 없는 것이었으며 식민지배의 정당화, 독재수호와 반공발전주의 관철의 도구였을 뿐이었다는 사회적 선언을 의미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 역사적 선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전 사회적 동의지반을 얻기 위한 노력과 조건없는 전면폐지를 말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여당의 국보폐지발언이 있은 후 보수수구세력은 그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내며 결연한 사수의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보수수구세력의 위기감과 그에 따른 결집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가 서울시내에 울려퍼질 것이라는 망상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점령과 식민지배를 일삼아온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반공발전주의를 내세워 한국사회를 휘둘러온 기존의 지배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균열이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보위협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군사독재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반공발전주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왔던 대한민국에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최후의 안전장치"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의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단지 이들만의 최후 안전장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전면폐지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며 국가보안법의 안보기여도를 긍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폐논쟁이 이렇듯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수십년간 인권과 정치사상의 자유를 유린당해온 민중들의 끊임없는 증언과 투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확장된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사상이념을 검열,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의식의 확장이 있었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이 개정 내지는 폐지 입장의 근거로 작동하는 반면, 전면폐지가 선뜻 동의되기 힘든 조건은 여전히 안보위협의 최대 적으로서의 북한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바로 이 북한을 최대 위협존재로 간주하는 안보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국보폐지 의지는 안보불안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반공발전주의의 그늘아래 민중들을 통제해왔던 지난 56년간의 역사의 평가에 기반한 것인가. 낡은 시대의 유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기 위해서는 낡은 시대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임은 당연한 일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이념/사상 투쟁의 가능성을 인위적인 국토분단의 맹목적 전쟁으로 비화시켰으며, 그러한 국토 참절의 주범은 바로 미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을 본따 만든 국가보안법은 그 태생이 바로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사회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적 수행을 뒷받침하는 체제의 수호신이었던 셈이다. 달라진 시대라 함은 6.15 공동선언 이래 경협 등 남북교류가 점증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를 위해 국가보안법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할 뿐이지, 미·일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 입장의 변화없이 한미일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안보위협의 제일요소로 북한을 꼽는 정부의 관점이 변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북군사력 증강과 경제제재 등의 위협과 한편으로는 북한에 자본주의 질서로의 편입을 강요하고 포섭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현재의 미일동맹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안보위협이란 제국주의 동맹의 외압으로부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적 의미를 띈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력과 한국사회의 반공발전주의 성장의 과정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없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는 한계적이다. 또한 사상, 결사의 자유를 사회불안요소 제거, 안보위협의 제거라는 차원에서 무지막지하게 억눌러온 지난 날의 역사를 계승하여 언제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 민중의 힘으로 이루자. 국가보안법을 과거의 법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과거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한나라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안전장치"로서의 국가보안법은 노무현정부에게도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의 무덤 앞에서 겉으로는 묵념을 하며 속으로는 부활을 부르는 이중성은 야당과의 상생, 여론수렴 등을 빌미로 또다른 괴물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안보논리를 정점으로 하는 지금의 국보법 개폐논쟁은 국보법 폐지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왜곡하고 있다. 이 왜곡된 논쟁구도에 여전히 민중들의 정치사상은 검열당하고 있으며 진정한 안보불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국가안보란 무엇인가라는 전사회적인 성찰을 가로막는 조건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반도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반공발전주의의 역사를 청산하는 과정에 놓여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조건없이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2004.10.20 사회진보연대
이나라를 재벌의 놀이터로 내줄수는 없다. 건설교통부가 21일 민간복합도시개발 특별법(속칭 기업도시법)안을 내놓았다. 기업 투자촉진과 건설경기 활성화가 법안의 주 목적이다. 법안의 핵심적 내용은 기업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도시를 개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를 위해 기업에게 토지수용권과 출자총액 제한 완화 등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다. 애초 전경련에서 지난 해 제출했던 기업도시 구상보다는 약화되었지만 건교부의 기업도시법안은 심각한 문제를 여럿 지니고 있다. 첫째, 기업에게 특혜를 주면 기업투자가 촉진되리라는 예상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우리 기업의 투자가 부진한 것은 소위 '기업환경이 안좋아서'라기 보다는 강화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투기성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의 금융화는 자본회전율이 떨어지는 산업투자보다는 단기 순이익 창출이 가능한 금융투자로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도 산업투자보다는 주로 금융투자를 통해 이윤창출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에 대한 특혜가 산업투자와 고용을 확대시킬 수는 없다. 둘째, 기업에게 부여된 특혜가 너무 과도하며, 이대로라면 한국은 재벌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부동산 거래에 있어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토지수용권을 민간기업에게 준 점, 출자총액 제한 완화 등 각종 기업관련 규제를 완화, 혹은 해제하도록 한 점, 법인세, 재산세, 소득세 등 각종 세제감면 혜택을 준 점 등은 심각한 문제다. 명분은 투자유치를 통한 고용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이나 그 가능성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개발이익에 대한 독점까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런 특혜는 과도하다. 이는 정부가 나서서 고삐풀린 망아지에게 울타리까지 걷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셋째, 교육, 의료, 문화시설 등 사회 간접시설에 대한 정부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이 사회의 공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실 전경련을 비롯한 기업집단들은 교육, 의료, 문화시설등에 대한 규제를 풀어 경쟁과 이윤의 원리로 이 사회를 재조직화하려 해왔다.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기업도시 안에서 대부분 들어주고 있다. 이는 교육, 의료, 문화 등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을 심각하게 침식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이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현재 정부와 기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도시법안은 투자 촉진이란 미명하에 한국을 대기업의 놀이터로 만들려는 구상이다. 기업도시 건설이 이땅 민중에게 가져다 줄 것은 아무도 없다. 이 나라를 대기업에게 통째로 내주려 하고 있는 기업도시 법안은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노동법 개악 강행하는 열린우리당을 박살내자 지난 16일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들이 열린우리당 의장실을 점거했다. 파견법과 기간제근로와 관련한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집권여당으로서 이번 노동법 개악에 장본인이 열린우리당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농성을 정리해야 면담을 들어주겠다며 아예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뜻을 하늘같이 받들겠다'는 집권여당의 눈에 노동자들은 국민으로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이번에 정부와 여당이 제출한 노동법안은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아니라 비정규직 확대, 양산 법안이다. 파견법과 기간제근로관련 법개정안을 보면 거의 전적으로 사용자의 요구가 받아들여졌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불법파견이 판을 치고 있는 마당에 파견업종을 전 업종으로 확대하고 그 기간도 늘리면 대한민국은 착취의 온상, 노동자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법안을 내놓으면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선전하는 정부와 여당의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릴 따름이다. 지금 열린우리당을 점거하고 있는 이들은 단지 비정규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땅 1600만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걸고 이들은 노동법 개악의 주범, 열린우리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의 점거농성은 결코 고립된 투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투쟁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 노동자들의 총단결과 거대한 투쟁이 일어나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삶을 끊임없이 불안정과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맞서 힘차게 투쟁하자.
최근 과거청산 문제제와 국가보안법 존폐 여부를 두고 큰 논란이 일고 있 습니다. 그래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학술단체 홈페이지를 둘러보았습 니다. * 참고로 다음과 같은 사이트가 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http://www.kistory.or.kr/ (역사비평을 내는 곳입니다) 역사학연구소 http://www.ihs21.org/ (역사연구와 함께보는 우리역사를 내 는 곳입니다)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 (역사와 현실을 내고 웹진 을 운영하는 곳입니다) 기대보다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지는 않더군요... 찾을 수 있던 몇 개의 글을 올려놓습니다. 생각을 가다듬거나 논점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혹시 이 주제에 관한 다른 글들을 보신 분들도 올려놓 아 주시길... 국가보안법과 일본군 성노예, 그리고 간도 / 전우용 과거사 규명과 현대사 연구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한국현대사) 현대 한국의 과거청산 / 안병욱(가톨릭대교수 한국사) - 과거사청산범국민 위 기조발제문
정부는 노동법 개악을 즉각 중단하라! -9월 10일 노동부의 파견근로와 기간제 근로에 관한 새 법안 발표에 대해 1. 정부에서 파견근로와 기간제 근로에 관한 새 법안을 발표했다. 근로자 파견업종을 종전의 포지티브 방식에서 네가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고 파견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한다는 것이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정부에서는 비정규직과 파견근로자에 대한 보호를 위해 이 법안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법안은 오히려 파견노동자, 비정규노동자를 법의 사각지대로 내모는 것일 따름이다. 2. 정부의 이번 법안의 내용과 문제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파견 업종의 전면확대는 법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우리 노동법에는 중간착취의 금지(근로기준법 제8조)가 명시되어 있다. 파견업종을 몇가지를 제외한 전 업종으로 확대하는 것은 중간착취를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의 정신마저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사회적으로 파견업종을 확대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의 고용의 불안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또 파견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린 조치는 사용자의 자율성을 더욱 확대해준 것이다. 파견기간의 연장은 결국 파견노동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늘려준 것일 뿐이다. 이런 조치는 파견노동자의 보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니 오히려 파견노동자를 법의 사각지대로 밀어넣는 것이다. 이건 눈가리고 아웅정도가 아니다. 명백한 개악이다. 이러한 개악을 단행하면서 정부는 이번 법안이 파견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보호법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불합리한 차별 금지규정이다. 그러나 파견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규정은 위의 조치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3개월의 휴지기간을 둔다는 것 역시 3년이하로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경우에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규정이다. 지금도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불법파견과 차별도 규제하지 못하면서 앞으로 철저히 규제하겠다는 것은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대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3. 온 사회가 불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들은 불황의 모든 원인이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잦은 파업, 투쟁에 있다며 화살을 노동자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지난 IMF이후 지속적으로 고용과 노동조건에 대한 공격을 받아왔고, 신자유주의는 거칠것없이 노동자들을 짓밟아왔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는 끊임없는 불안정성의 확대를 그 특성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은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며 이번과 같은 노동법 개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정부와 기업은 지속적인 노동의 불안정화를 추진해왔다. 상시적 구조조정과 비정규직의 끊임없는 확대를 통해 이들이 추구한 것은 자본에게 무한대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노동자에게는 끝없는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번 노동법 개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불안정한 노동은 결국 불안정한 삶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실업과 빈곤으로 노동자들을 내몰게 된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그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왔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합의'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를 들러리로 세워 불안정노동의 일반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었다. 더 이상 이런 정부와 '합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손발 다 잘라내고 목을 조여오는 이와 '합의'한다는 건 자멸을 부르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노동의 불안정화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노동자 스스로의 힘찬 투쟁이다. 이제 쓸데없는 기대와 합의의 골방을 박차고 투쟁의 광야로 나서자.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치열한 전선 지난 9월 5일 노무현 대통령이 MBC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해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역사의 발관으로 보내야 한다.”며 폐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선 폐지 뒤에 문제가 있다면 형법을 보완한다든지 하면 된다는 나름대로의 방향도 제시하였다. 그런 뒤 이 사회는 매일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직후부터 자신의 “대표직을 걸겠다.”느니 “한나라당의 명운을 걸겠다.”는 등의 강경발언을 쏟아내더니 급기야 9월 9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같은 날 주로 구정권 시절에 국회의장, 국무총리, 장관, 장성 등 주요 요직에 있던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이 무려 1,400명이나 서명을 받아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구국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4.15 총선 직후부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은 지난 8월 23일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전면 폐지 권고, 8월 26일의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 7조 1항과 5항에 대한 전원 일치 합헌 결정, 9월 2일 대법원의 한총련 대의원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보혁 대결 구도로 나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열린우리당은 폐지와 개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분위기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폐지 후 보완으로 당론이 정해졌고, 한나라당은 총선 직후 박근혜 대표마저 북한을 적국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 2조의 ‘정부참칭’ 부분을 삭제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후퇴하여 불고지죄마저도 존치시키는 소폭 개정의 입장으로 당론을 모아가고 있다. 이런 정치 상황들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1948년 이래 처음 있는 현상이고, 최근에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에서 2001년 사이의 개폐 논쟁이 폐지 운동 진영의 패배로 마무리된 이후에 처음 맞는 상황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재의 정치구도에서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민주당이 폐지 입장으로 정리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청와대와 정부도 대통령의 발언 이후 폐지 입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반면 정치세력 상으로는 열세인 한나라당에는 소수 의원을 가진 자민련만이 우군으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의 입장에는 조중동과 같은 막강 언론들이 붙어 있어 여론을 선도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을 사수하려는 의지로 뭉친 극우집단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국의 301개의 단체로 재발족된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극우집단들의 광적인 국가보안법 사수투쟁에는 비할 바 없이 조용하게 나날을 맞고 있다. 이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고 한다면 현재는 이런 양상들이 뒤바뀌어 기이한 현상을 낳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넘어야 할 산들 4.15 총선 직후 운동진영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더 없이 좋은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올해 하반기 이내에 폐지시켜야 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것은 일단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지지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성격과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이라는 조건, 이들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면에서 이런 예상을 할 수 있었고, 그런 판단은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폐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개정론을 앞세운 의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어지러운 상황은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정리되었다. 국회 의석 과반수를 점한 열린우리당이 폐지 당론으로 정했고, 전면 폐지 당론을 일찍이 정한 민주노동당이 결합하고 있으며, 대체입법론의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민주당이 합세하고 있으므로 단순 계산으로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무난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안하다. 과연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자꾸 드는 것은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보안법 폐지로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무엇인가? 먼저, 한나라당의 결사적인 반발이다. 이들의 입장들을 종합해서 보면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켜온 법률일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마지막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주로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탄압하는데 악용되었다는 점보다는 북한의 적화야욕을 막아온 방파제와 같다는 인식을 실제로 갖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 체제의 수호를 위해서는 헌법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원천이고, 신념의 법률적인 표현으로 보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없앤다고 하는 것은 집에서 주춧돌을 제거하는 것처럼 급격하게 국가를 지탱해온 버팀목을 제거하는 것과 똑 같다고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사항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이분법을 동원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정부와 여당 등을 좌파로 몰아부치며, 나아가서는 용공성을 부각시킨다. 거기에 국가보안법이 해체되면 북한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무장해제’된다고 설레발을 치면서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최대한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 동안 국가보안법이 남용되어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점을 일부 인정하고, 바로 그런 점을 고쳐서 국가보안법을 존속해야 한다는 개정론도 흘려내고 있다. 막연하게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국민들은 이런 한나라당의 주장에 현혹되어 개정론을 지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는 조중동을 비롯한 극우언론과 극우집단들의 저항이다. 물론 이들은 한나라당과 연결되어 폐지 반대 여론을 주도하고 있거나 아니면 선도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9월 5일 발언에 대해 조중동과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은 즉각적인 반대 의사를 격렬하게 표명했다. 이들은 거의 선동 삐라 수준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극우 보수집단들의 여론과 행동을 선동하고 있다. 극우집단들은 9일의 1,400명의 집단 성명 발표에서 보듯이 국가보안법의 사수를 위해 총력 투쟁하는 분위기다.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자신들의 지위와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었던 것이고, 기득권을 근저에서 흔드는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며, 하기에 이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역시 이들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다. 셋째, 보완 또는 대체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여당이 문제다. 국가보안법은 완전하게 폐지시키면 그만인데, 소수에 머무는 폐지 여론과 내부의 개정론자들을 핑계로 국가보안법의 흔적을 형법이나 대체입법안으로 옮기려 한다. 이에 따라 그럴 것이면 굳이 국가보안법을 왜 폐지하려 하느냐는 한나라당 쪽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운동진영으로부터도 불신을 받고 있다. 어땠건 내부에서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지만, 반국가단체의 규정이나 7조의 찬양·고무 조항을 옮기거나 남기는 식의 보완이나 대체입법은 결국 국가보안법 문제를 다시 남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태도는 이후에 한나라당과의 협상과정을 또 불안하게 한다. 넷째, 정세 주도권을 놓치고 있는 폐지운동 진영이 문제다. 지금까지 가장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력투쟁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안들이 워낙 복잡하게 많은 것이 문제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는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다가 친노적으로 비추는 국가보안법 전선에 발을 곧바로 담그기가 곤란하다는 점도 있는 것 같다. 전국의 301개 단체가 결합되었다고는 해도 실질적인 힘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로 힘을 모으기 힘들다면 자신들이 처한 위치에서 가령 1백만인 청원운동을 함께 한다든지 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단지 하나의 법률을 제거한다는 것이 아님은 별도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본다.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수구냉전세력들의 지배가 가능하게 했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에 익숙하게 만든 ‘공포정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빨리 제거되면 될수록 이익이 되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없어진다고 해도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좌파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이미 서구에서는 3백 년 전에 결론이 났다. 사상의 자유와 그에 따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근대시민혁명을 거쳐서 이루어진 근대시민사회로 넘어가기 위한 전제를 이룬다. 비로소 우리도 근대적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국가보안법적 체계에 억눌려서 근대적 가치조차 수용하지 못하였다. 근대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증오하는 사상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고, 사상도 “자유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극우들은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당장 사회주의 세상이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금방 북한이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쳐들어 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공포와 억압을 통한 정치, 국가동원체제의 정치를 극우세력들은 지금껏 해왔던 것이고, 이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상실하게 될 위기에 처하여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투쟁은 민주와 반민주의 투쟁이다. 그런 뒤에 비로소 우리는 통일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의 비현실성이 드러나는 것은 남북교류가 활성화되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남북을 오고가지만 국가보안법은 선택적으로 몇 몇을 처벌하고 있다는 점, 국가보안법이 존재함으로 해서 다른 법률들과 상충하고 어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수구꼴통 집단인 사법부가 그리도 좋아하는 ‘법적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보안법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안보와 관련 있는 중요한 법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깨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연대 차원의 대중 집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과의 접촉국면을 창출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들과 만나가야 한다. 그런 활동으로 궁극적으로는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국가보안법의 완전한 폐지, 그것이 꿈만은 아닐 것이다. pssp
지난 8월 1일, 제네바에서 열린 WTO 일반이사회를 통해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의 기본골격(Framework)이 전격 타결되었다.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의 개시 여부를 판가름하는 회의였던 99년 3차 시애틀 각료회의부터 현재까지, 우루과이라운드의 뒤를 잇는 무역협상은 여러 차례 난항을 거듭해왔다.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개도국, 최빈국들이 우루과이 라운드 농업개방은 초국적 농기업의 전 세계 농업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여 남반구의 농업 생산 기반을 뿌리째 뒤흔들었다며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도국과 최빈국에 자유무역의 혜택을 고루 누리도록 하는 동시에 이들 나라의 ‘개발’을 더욱 촉진시킨다던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미국 등 선진국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더 이상의 자유화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2003년 9월 칸쿤에서 열린 5차 각료회의에서 개도국들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 그룹(G21)', '개도국-최빈국 그룹(G90)'등 여러 의견 그룹을 형성하여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에 강력하게 반발해, 결국 각료회의를 무산에 이르게 했다. ‘개도국 및 최빈국’을 위한 협상에서는 이들의 반발로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무역의 완전한 자유화’를 표방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앞장서서 이러한 원칙을 훼손하는 상황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따라서 지난 몇 년간 협상 진척을 가로막았던 주요 쟁점이 이번 일반의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졌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합의된 ‘기본골격’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산된 칸쿤 각료회의, 그 이후 도하 개발의제 협상을 난항에 빠지게 했던 가장 뜨거운 쟁점은 ‘농업협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의 농업보조금 문제는 ‘자유무역’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쟁점이다. 도하개발의제 농업협상은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매겨진 농산물 관세를 공산품 수준으로 대폭 인하하고 ‘무역왜곡적’ 농업 보조금을 감축/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대규모 농기업이 세계 농산물 시장을 장악하기에 적합하도록 국제무역시스템을 재편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며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자유무역’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 WTO가 출범한 이후에도 미국은 농업보조금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어,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들은 생산비를 절감하여 값싼 농산물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반면 소규모 농가를 기반으로 하는 남반구의 많은 나라들은 관세화와 지속적인 관세감축 조치로 농업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 미국의 농기업이 생산한 싼 값의 농산물은 이렇게 개방된 남반구로 덤핑되고 있다. 남반구의 소규모 농가가 생산한 농산물은 가격 경쟁력에 밀려 미국으로 수출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산기반 자체가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예로, 미국의 면화 생산자들은 1년에 30~40억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다. 이는 면화 수출이 국가 소득의 대부분인 서아프리카 말리의 GDP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며, 미국 농기업의 면화 시장 독점으로 말리를 비롯한 베닌, 챠드, 부르키나파소 등 면화수출국들의 소득은 1년에 10억달러씩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특히, 부시행정부는 ‘관세감축’,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 ‘수출보조금 철폐’를 원칙으로 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개시된 이후에도, 그 원칙을 훼손하며 농업보조금을 대폭 확대할 것을 골자로 하는 2002년 농업법(2002 Farm Bill)을 제정했다. 이에 미국의 일방주의와 무역 불평등에 대한 개도국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2003년 칸쿤 각료회의에서 브라질, 인도 등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은 G21이라는 의견그룹을 형성하여, 북반구의 시장 역시 남반구가 생산한 농산물에 개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대규모 보조금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아프리카 4개국 역시 미국의 면화보조금이 철폐되어야 하고 보조금으로 인한 손실을 미국이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하개발의제의 핵심 이슈인 ‘싱가포르 이슈’와 ‘비농산물관세인하협정(NAMA)’역시 남반구 각국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아프리카그룹(AP),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국 그룹(ACP), 최빈개도국그룹(LDCs)의 연합으로 구성된 G90은 투자, 정부조달, 경쟁, 무역원활화 등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가 엄밀한 의미에서 ‘무역정책’의 범위를 초과하는 ‘자본의 유출입규제 철폐 및 소유권 보장’과 관련된 것이며, 선진국이 시장개방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므로 WTO 내에서 이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품 관세 및 비관세장벽의 완전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비농산물관세인하(NAMA)' 협상은 ’개도국·최빈국의 발전을 돕는다‘는 도하개발의제의 명분과는 정 반대로, 남반구의 취약한 산업구조가 세계적인 경쟁에 직접 노출되도록 하여, 탈산업화를 초래하며 실업과 빈곤을 남반구로 이전시킨다고 비판했다. 결국 칸쿤 각료회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모순을 드러내며 결렬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7월 일반이사회에서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 진 것은 개도국 및 최빈국이 형성하고 있는 여러 의견그룹이 무력화되었음을 뜻한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미국은 미국의 일방주의에 불만을 표한 개도국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협상 결렬에 결정적 역할을 한 G21을 파괴하는데 집중해왔다. 칸쿤 각료회의 직후 미국은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페루,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게 G21에서 탈퇴하면 부분적인 시장개방을 제공하겠다고 사탕발림하여 이들을 G21로부터 이탈시켰다. 뒤이어 지난 4월에는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 브라질과 인도가 여타의 농업수출 개도국과 분리되도록 했다. 미국, 유럽연합, 호주, 브라질, 인도를 ‘이해당사자 5개국(Five Interested Parties)’이라 명명하며 팀 그로서 WTO 농업위원회 의장이 기본골격 초안을 작성하는데 이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은 농산물 관세감축 분야에서 ‘점진적인 감축’을 주장해왔던 인도와, 미국의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을 주장하는 브라질의 요구를 5개국간의 협의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며 G21의 ‘단결’을 파괴했다. G 90에 대해서도, 7월 중순에 열린 G90 회의에 미국과 유럽연합은 죌릭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들을 파견해서 4개의 싱가포르 이슈 중 ‘무역원활화’에 대해서만 협상을 개시한다는 안을 제시해 G90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비농산물시장접근’과 ‘서비스협상’의 진척에 G90이 협조하여 개도국들에게 ‘혜택’을 주는 다자간 무역체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협박하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미국은 이런 식으로 해서 7월 일반이사회에서 ‘농업협상’에 대한 브라질, 인도의 동의와 ‘무역원활화’ 협상 개시에 대한 G90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이다. 7월 일반이사회 도하개발의제 기본골격의 내용 7월에 타결된 협상 기본골격은 개도국 의견그룹의 무력화를 바탕으로 합의된 만큼 미국을 비롯한 북반구의 이해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물론 협상의 최종 결과는 2005년 말 홍콩에서 열릴 6차 각료회의 전까지 진행되는 ‘세부원칙(modality)’ 협상을 통해 좌우될 것이지만, 이후 협상은 이 기본골격이 제시하는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핵심 쟁점이었던 농업협상 기본골격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평가될 만큼 초국적 곡물기업의 농업시장 지배력 확대를 떠받치는 미국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우선 시장접근 분야에서는 ‘구간별 감축’ 방식을 채택하여 선진국과 개도국의 차별을 두지 않고 관세율에 따라 대상품목을 구간으로 분류하여, 고관세일수록 높은 비율로 감축하도록 했다. 또한 개도국에 한해서 관세감축에 신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별품목(Special Product)'제도와는 별도로, 선진국 품목에도 해당되는 ’민간품목(Sensitive Product)'을 새롭게 도입하여, 이에 대해서는 관세를 소폭으로 감축하되 의무수입물량을 확대하도록 했다. 수입국그룹이 요구한 관세 상한 철폐는 추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수출국 그룹이 주되게 주장했던 ‘스위스공식’의 변형으로 한국과 같이 고관세 품목이 많은 나라일수록 대폭으로 관세를 감축하여 개방으로 인한 타격이 커지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국내 보조분야에서 미국은 결국 2002 농업법이 보장하는 국내보조를 감축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는 농업에 대한 모든 국내보조정책을 신호등 분류방식에 따라 ‘철폐대상’(red box), ‘규제대상’(amber box), ‘허용대상’(green box)으로 분류했다. 추곡수매제와 같은 정부관리가격정책, 생산 및 판매에 관련된 농가소득지원, 투자 및 수송 등에 대한 보조가 규제대상에 포함되며, 생산과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소득보장, 재해보상, 식량비축 등은 허용대상에 해당한다. 그밖에 ‘생산제한계획하 직접지불’(Blue Box)과 최소허용보조(De-minimis-총 생산액의 5% 미만의 보조금)에 대해서는 감축의무를 면제했다. 그런데, 이번 합의안이 제시하고 있는 국내보조 감축 방식은 ‘감축보조대상 총량’(AMS), ‘최소허용보조’(De-minimis), ‘생산제한계획하 직접지불’(Blue Box)을 모두 ‘무역왜곡적 보조’로 규정했다. 또한 이를 합한 총액에 따라 구간별 감축방식을 도입하되, 보조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많은 비율로 감축하도록 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미국의 주장에 따라 ‘생산제한계획 없는 직접지불’이라는 새로운 블루박스가 도입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번 합의안이 미국의 대규모 국내보조를 대폭 감축할 것으로 보이지만, 감축대상이 되는 보조금의 총량을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양허된 수준이냐, 현행 수준이냐)에 따라, 그리고 현존하는 보조금을 어떤 종류의 보조금으로 분류할 것이냐에 따라 감축 비율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된다. 미국의 2002 농업법에 따라 새롭게 도입된 보조금들은 신설된 “새로운 블루박스”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지급되고 있는 보조금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연합의 경우 공동농업정책(CPA) 2003년 개정안에 따라 보조금의 상당부분을 ‘허용보조’로 전환함에 따라 현행 수준을 유지하게 될 전망이다. 수출경쟁 분야에서는 수출보조, 상환기간 180일 이상의 수출신용 및 보증보험은 철폐하도록 하고, 180일미만 신용·보증보험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감축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개도국에만 허용되었던 수출보조는 유지하되 ‘모든 형태의 수출보조가 철폐되는 시점을 지나서 합리적인 기간까지’ 인정한다는 단서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철폐 기한은 명시하지 않고 이후 진행될 세부원칙 협상 결과에 맡김에 따라 이러한 원칙이 현실화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들에게는 관세를 대폭 감축하도록 하여 개방의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반면, 농산물 무역에 있어서 불평등을 심화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보조금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취지와 어긋나도록 현행대로 유지할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7월 일반이사회가 끝난 후 미 무역 대표 로버트 죌릭은 “현재 지급되는 보조금 총량이 191억 달러이지만, 기본골격이 제시하는 대로 계산했을 때 허용되는 보조금은 490억”이라며 “2002 농업법에 따른 보조금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에도 불구하고 현행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미국이 잃은 것은 없다”고 했다. 농업협상에 비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비농산물시장접근(NAMA)', ’서비스‘, ’무역원활화‘ 분야에서도 미국이 잃은 것이 없다는 게 대체로 동의되는 분석이다. ’비농산물시장접근‘ 분야에서는 관세가 높은 품목일수록 감축률을 높게 하는 ’비선형 공식‘이 채택되었다. ’개도국에 대한 신축성 부여‘의 문제는 이후 진행될 세부원칙 협상 구체적으로 논의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공식‘을 통해 관세 감축률을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한 개도국이 양허 품목과 감축률을 신축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석된다. 또한 신속한 관세 철폐를 위한 ’분야별 접근‘에도 개도국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취약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 및 최빈국에 큰 타격을 가져다 줄 것이어서 칸쿤 각료회의에서 채택되지 못했던 ’데르베스 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10여개 주요 기업으로 구성된 제로관세동맹(Zero Tariff Coalition)은 ’세계적인 차원의 감세와 규제완화를 이루어 내는데 한걸음 다가서게 되었다‘며 이를 환영했고, G90은 ’남반구의 탈산업화, 실업의 확대, 빈곤의 심화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비스협상에 관해서는 2003년 6월로 양허안 제출 시한이 정해졌으나 제출국이 147개 회원국 중 20여개국에 불과한 상황에서, 그 시한을 2005년 5월로 연장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공공서비스 사유화에 따른 파괴적 효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부분의 개도국이 선뜻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표면적으로나마 서비스 협상을 신속하게 진전되도록 한다는 데에 동의를 얻은 셈이다.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는 4개 이슈 중 하나인 ’무역원활화‘ 분야에 대해서만 협상을 개시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이 신흥 주식시장으로 삼을 나라와 양자간 협상을 통해 추진한다는 입장에 따른 것이다. 도하개발의제 기본골격 타결의 의미 도하개발의제는 ‘실질적이고 완전한 무역자유화’를 달성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도국 및 최빈국의 의무만을 지시할 뿐이다. 진짜 목표는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에 적합한 무역 규범을 세우는 것이고, 이에 따른 비용은 고스란히 남반구에, 그리고 전 세계 민중에게 전가된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산물이 자유무역의 대상이 된 후 고작 10개의 농기업이 세계 농산물 시장의 90%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종자나 생명공학 분야, 농약, 비료 등을 생산하는 농화학 분야, 식품 가공 및 유통 분야 등 농업 및 식량과 관련된 모든 분야들을 통제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되는 동안 남반구의 소규모 농가들은 경쟁에서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WTO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으로 초국적 농기업은 남반구에서 재배되는 품종을 개조하여 특허를 매겨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종자를 채취하고 보관하는 과정에 대한 농민의 권리와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수 천년에 걸쳐 개발하고 보존해온 전통적인 지식에 관한 권리는 초국적 기업으로 이전되고 있다.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나라들은 이제 식량을 초국적 기업들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농민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거나, 값싼 임금에 이 기업들에 고용되어 착취당하고 있다. 한국의 농민들은 WTO가 출범한 이후 농산물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빚더미에 올라 농약을 들이키고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초국적 자본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려는 서비스협정은 교육, 의료, 에너지, 물 등 삶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마저도 박탈하고 있다. 이번 일반이사회에 참여한 회원국의 수가 전체 147개국 중 고작 40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불충분한 동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미국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기본골격’을 타결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개발’이라는 떡고물이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달성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남반구의 불만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토록 불평등한 무역 체계 아래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삶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한다. 이번 9월, 멕시코 칸쿤에서 목숨을 바쳐 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키는 WTO의 수레바퀴를 멈추고자 했던 농민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한국의 100만 민중이 일어서고, 세계의 농민들이 동참한다. 토지와 종자에 대한 권리, 식량에 대한 권리, 지식에 대한 권리, 의료·교육·에너지·문화 등 필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의약품에 대한 귄리를 되찾고자 하는 세계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 민중들의 삶과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화를 쟁취하는 것은 이러한 민중들 스스로의 투쟁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