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이는 지배엘리트들의 배타적인 사교모임인 '다보스 포럼'에 맞서 민중 중심의 대안적 전망을 모색하는 세계 인민들의 연대의 장으로 2001년 1월에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은 올해로 3회를 맞게 되었다. 1월 23일부터 28일까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3회 사회포럼은 놀라울 만큼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올해 세계사회포럼에는 156개국 717개 조직의 대표단 2만763명을 포함하여 10만여 명이라는 거대한 인원이 참석했다. 전체 회의, 세미나, 패널토론 등 공식 프로그램도 대폭 확대되었고, 이외에도 포럼기간동안 참가자들이 다양하게 조직한 워크샵이 1.286개에 이르렀다. 특히 지난 2회에 걸친 세계사회포럼은 유럽사회포럼(2002.11, 이탈리아 피렌체) 아시아사회포럼(2003.1, 인도 하이데라바드), 등 '지역별 사회포럼'과 정세적으로 중요한 특정 주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는 '주제별 사회포럼'('개발도상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영향' 2002. 아르헨티나, '팬-아마존사회포럼')등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세계 곳곳의 더 많은 사회운동들에게 더욱 풍부한 논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양적인 성장만이 아니다. 'Um outro mundo poss vel(또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으로 표상되는 이 거대한 흐름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으로 극복될 수 없는 자본의 구조적 위기속에서 스스로 삶의 대안을 모색해가려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교류하는 장이 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새롭게 분출하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은 상호 적합한 연대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모색해가고 있다. 3회 사회포럼의 개요- 무엇이 논의되었나? 2001년 9.11 사태이후 '대 태러전쟁'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는 미국의 세계 각 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이라크에 대한 공습계획과 북한 핵의혹을 둘러싼 한반도에 대한 전쟁위협으로 최고조에 달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장기적 불황과 이에 따라 민중의 삶의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사회운동 세력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포럼의 시작과 끝은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 반대, 식량 주권을 훼손하고 의료, 전력, 수자원 등 공공 서비스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WTO 도하개발의제와 전미자유무역지대(FTAA), 전 세계 민중의 삶의 위기를 초래하는 외채시스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루어졌다. 특히, 그 동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반전시위의 기운은 개·폐막 행진으로 이어져, 참석자들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처해있는 이라크, 팔레스타인, 베네수엘라 등의 기를 흔들며 각 국 민중들과 연대의 의지를 표명했다. 4일간 진행된 크고 작은 회의들은 짧게는 2003년 한해, 길게는 향후 몇 년간의 공동행동을 계획하는 자리가 되었다. 특히 24·25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세계 사회운동 대회(World Social Movements Assembly)'에서는 오는 2월 15일 30여 개의 주요도시에 동시다발로 '반전평화 국제 행동' 개최할 것을 결의했으며, 3·8 여성의 날에는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에 맞선 투쟁에 함께 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G8 정상회의(6월, 프랑스 에비앙), WTO 5차 각료회의(9월, 멕시코 칸쿤), IMF/세계은행 연차총회(9월, 미국 워싱턴), FTAA 전미 정상회의(10월, 미국 마이애미)를 계기로 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국제금융기구들에 대항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더불어 국제소농조직(Via-campesina)의 '국제농민대회', 주빌리사우스(Jubilee South- 남반구 외채거부 캠페인 네트워크)의 '외채의 부당성에 관한 회의', [우리의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연합(Our World Is Not For Sale-WTO 도하개발의제 반대 사회운동 네트워크)]의 전략회의, '세계 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의 워크샵'등에서는 이러한 행동 계획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세계 정세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각 국에서 혹은 지역별로 이루어진 투쟁들을 보고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의 계획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끊임없는 국가 붕괴와 경제파산을 경험한 남미의 참석자들은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을 외채시스템으로 지적하며, 이는 IMF와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조정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채무국들의 지불 거부를 통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외채 지불거부가 민중들의 삶에 아무런 악영향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였으며, 이를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올해 새롭게 취임한 브라질의 룰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초국적 곡물기업에 의해 토지에 대한 권리와 종자 및 비료 사용에 대한 결정권 등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각 국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미자유무역지대 반대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음이 보고되었고, 이러한 투쟁을 오는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는 5차 각료회의 반대투쟁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이 제기되었다. 2001년 출범한 WTO DDA 협상이 식량, 물, 교육, 의료, 에너지 등의 공공서비스를 상품화함으로써 민중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HIV/AIDS등 심각한 전염병으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민중들의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과 여성들의 건강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고 있음이 증언되었으며, 특히 이를 추동하는 농업협상과 서비스협상이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이와 더불어 현재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에 항의하는 반미시위가, 미국의 군사주의적 전략을 반대하는 국제연대 투쟁으로 급진화 될 가능성에 주목하며, 부시정부의 북한 핵의혹을 빌미로 한 한반도 전쟁위협에 대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한국 참가단의 호소는 많은 호응을 얻었다. 다양한 사회운동의 분출과 연대의 조건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브라질의 CUT(노동조합총연맹), MST(무토지농민운동), ATTAC(금융거래과세운동)등 8개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 조직으로 구성된 '브라질 조직위원회(Brazilian Organizing Committee)'와 100여개의 조직으로 구성된 '국제평의회(Internatioal Committee-자세한 목록은 http://www.forumsocialmundial.org.br 참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도 브라질 조직위원회의 역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2002년에 2차례 진행된 국제평의회 회의에서는 그 역할을 국제평의회로 옮겨올 것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점차 대륙별 사회포럼과 지역별 네트워크들이 활발하게 조직되고 있고 그 규모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이러한 기구들의 역할은 개최 장소를 결정하고 이에 따른 각종 실무사항을 점검하는 정도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동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합의해 가는 과정은 이들 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회운동들간의 수평적인 논의와 교류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미 사회운동들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미국과 인접하여 끊임없는 군사적, 정치적 위협과 반복되는 국가 경제의 파산 상태를 경험하며 폭발적인 민중들의 투쟁이 분출하고 있는 남미는 최근 브라질, 에콰도르 등 잇단 좌파정권의 등장을 맞이하여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극한의 생존의 위협이라는 상황을 맞이한 실업노동자, 무토지 농민, 여성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교육훈련 하며 삶의 터전을 공동으로 형성해 가는 방식의 운동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운동들은 '다양한 운동들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라는 논점을 제출하며 세계사회포럼의 규모와 내용이 풍부해지는데 많은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좌파정당들의 제도화와, 타협을 통한 기득권의 방어로 일관하고 있는 노조운동들을 목도하면서 스스로를 '정당이나 노조에 독립적인 사회운동들'로 표상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노조운동과 사회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논점이 긴요한 논의과제로 제기되도록 하였다. 포럼의 참석자들은 작게는 몇몇 토론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할당된 2개의 마이크를 번갈아 가동하며 논의를 진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각각의 운동이 서로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개조하며 연대의 조건을 창출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계사회포럼은 수많은 사회운동들 간의 다양한 논쟁과 경험의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의 긍정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각 국의 투쟁을 강화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이행의 조건을 제시해 줄 것인지는 단언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한의 민중운동이 전 세계의 민중들과의 수평적인 연대의 장에 뛰어들기 위해 스스로 어떤 조건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이다. PSSP
공적연금체계에 대한 공격 지속적인 팽창을 추구하는 금융의 세계화 과정은 기존의 연금 체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 연금화를 확장하려는 흐름이 추진되어왔다. 공적연금의 비효율성, 재정적자, 세대간의 갈등 유발 등의 문제점이 끈질기게 지적되고 있으며, 1990년대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 요인 중 하나로 거대한 사적 연금기금의 안정적인 투자가 꼽히고 있다. 한 마디로, 공적연금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은 사적연금 도입이고, 사적연금은 경제성장, 특히 자본시장 발전에 톡톡한 기여를 한다는 것이 이들 공격의 주된 논리다. 1994년 세계은행이 각 국의 연금체계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공적연금은 급속한 노령화와 과도한 연금급여, 수익률 저하 등에 따른 재정 불안정, 그리고 노동수요와 공급 행태 변화 등으로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송원근, 2001) 이에 대해 세계은행의 개혁안은 기존의 공적연금만으로는 공적연금 체계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3층 보장체계(Three Pillars)"의 연금체계를 권고했다. 이 개혁안은 연금재정방식 및 내용에 있어서 기존의 공적으로 관리되던 부과방식의 확정급여형(Pay-As-You-Go Defined Benefits) 연금체계를 사적으로 운영되는 적립방식의 확정기여형(funded Defined Contribution) 연금체계로 전환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이 의미는 기존 공적연금이 담당했던 역할 중 상당 부분을 사적 연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공적연금의 축소와 연금에 있어서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사적 연금화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가시화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세계은행은 각 국에서 이러한 연금개혁을 추진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사적 연금화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일례로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계은행의 다층보장체계 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세계은행이 개발자금 지원을 명목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책 결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대까지 3개국에 불과했던 사적연금으로의 개혁이 2000년대에는 20여 개국에서 진행되었으며, 세계은행 및 OECD를 필두로 한 사적연금으로의 전환을 권고하거나 강제하는 흐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제부터 사적연금으로의 전환이라는 연금개혁을 정당화하는 논리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타당하고, 객관적인 듯한 이 논리들이 사실은 연금개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들의 관점에서 동원된 것이라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공적연금 체계를 공격하는 논리들 우선 기존의 공적 연금체계를 공격하는 가장 주된 논리는 사회가 급속하게 노령화되고 있기 때문에 부과방식의 확정급여형 연금체계의 재정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인구구성의 비율상 퇴직한 노령층, 즉 연금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는데 비해 그들의 연금을 부담할 노동인구 층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정부가 연금 수급자들에게 약속된 급여를 제공하려면 엄청난 정부 재정 적자를 감수하거나, 이를 메우기 위해 노동인구 층에게 세금 또는 연금갹출금을 늘려서 더욱 큰 부담을 지워야한다는 것이다. 스웨덴 등 유럽의 선진국들의 경우 공적연금의 재정적자를 보존하기 위해 연금 지급 시기를 65세에서 67세로 상향조정하거나 연금 보험료(갹출금)를 높이는 방안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은행 등은 이런 방식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사적 연금체계로의 전환, 3축 연금체제 구축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국민연금 재정 불안정 상황에 대해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에서 연금 보험료율을 소득의 17~18%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고(현재는 소득의 9% 수준), 연금 수령액은 OECD 국가 평균인 소득의 40%(현재 소득의 60%) 정도로 내리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KDI의 경우에는 세계은행의 3축 연금체제를 근본적인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노령화와 이에 따른 공적연금의 재정 적자 문제가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곧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연금을 도입할 이유가 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사적인 연금 체계가 늘어나는 노인 인구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적인 연금체계는 공적연금의 재정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공적인 책임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노후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 노인의 비중이 늘어나면 그에 따른 부담 비용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증가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의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추세가 되고 있는 사적 연금화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중단 없이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해 온 정부의 체제보다 자본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 극심한 변동성을 보이는 금융시장에 맡겨진 연금기금이 더욱 안정적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적연금화가 이상적인 연금개혁의 방향성이라 주장한다면, 그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적 연금화가 과연 누구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가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다음으로 연금체계가 가지는 경제적 효과에 관한 논의이다. 사적연금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기존의 공적연금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반면, 적립식 확정기여형 연금체계는 경제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에 제출된 세계은행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은행이 제안한 3축 연금체계 중 2축이라 할 수 있는 사적 관리의 적립식 확정기여형은 기존의 체계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극복할 수 있다. 우선 확정'갹출'형은 조기퇴직을 막고 자동적으로 퇴직연령을 높여주게 된다. 그리고 적립방식은 기존 부과방식이 연금 초기에 비용이 은폐된 채 미래로 이전됨으로써 이후 막대한 재정부담을 초래하는데 반해, 처음부터 미래의 조세(사회보장세 등)증가를 막고 현실적인 연금운용을 가능케 한다. 덧붙여 장기적인 국민저축을 형성하고, 저축을 통해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적으로 관리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정부는 자본을 가장 잘 분배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 공적으로 관리되던 연금기금 대부분이 적자였는데, 이는 대부분의 공적 관리자들이 몰락하는 국유기업의 정부채권에 연금기금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으로 관리되는 연금기금은 높은 수익률을 위해 공채, 사채, 증권, 부동산 등에 포트폴리오가 가능하다.(James, 1997a, 1997b) 그러나 사적연금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결과는 분분한 상황이며, 각 국의 자본시장 발달 정도에 따라 상황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경제성장 효과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부과방식의 연금을 적립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거대한 투자기금을 조성하여 자본시장에 든든한 버팀목을 세워준다는 것이며,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연금기금의 경쟁적 투자활동은 금융시장을 매우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적립식 확정기여형 연금이 실제 연금 수령자들과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경제성장(금융세계화 국면에서 이러한 경제성장 자체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을 가져오는가는 매우 불분명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새롭고도 거대한 자금의 원천이 생길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한다는 면에서 아주 커다란 이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미의 연금개혁 사적연금화가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남미의 연금개혁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은 연금개혁을 주장하는 논리가 연금 자체의 문제를 넘어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적연금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약속했던 '더 나은 연금, 더욱 안정적인 노후 소득'이 과연 실현되었는지 또한 알 수 있다. 남미대륙의 연금개혁을 선도한 것은 칠레였다. 칠레는 1981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연금개혁을 실시했고, 뒤이어 남미의 여러 나라가 칠레와 유사한 제도를 채택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연금 체제의 개혁은 국가 예산뿐만 아니라 연금 개혁으로 이익을 본 사람과 손해를 본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연금개혁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가 되며, 따라서 선진국들에서는 기존의 연금 체계를 심각하게 개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1980년대 이전에는 남미에서도 연금개혁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남미 대륙에서 연금개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배후에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이해해야만 한다. 1980년대 남미의 연금체계가 노령화, 실질임금 하락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있었지만, 연금개혁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로 추진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남미의 연금개혁은 외채위기의 결과로 남미 정부들이 추진했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국제적인 금융기관들의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연금개혁에 대한 국제기관들의 압력이 남미에 비해 훨씬 덜한 선진국들은 다른 형태의 개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1970년대 말에 남미 국가들의 연금체계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냈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1980년대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남미 국가들의 연금제도가 보여주었던 특혜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다. 특정 부문의 노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높은 연금을 지급해왔던 기존 연금제도는 높은 사회적 지출과 다른 연금수령자들의 손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종종 연금기여금의 부족분을 재정 적자를 통해 보존하려 했고, 이것은 부채를 늘리는 결과를 낳아 인플레가 높았던 시기에 연금의 재정건정성이 심각하게 위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은 외채위기와 그에 따른 불황의 국면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공식부문의 고용이 감소했고, 연금기여금을 납부하는 노동자의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게다가 실질임금의 감소와 함께 연금기여금의 실질가치 또한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은 기존 연금체계의 원칙과 급여의 실질가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덧붙여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집중된 무역자유화 조치들은 고용주들이 사회보장에 대한 기여 비용을 부담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고용주들은 정치적 압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부과된 규제들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혼합되어, '연금체계의 위기'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연금체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은 사적연금화였다. 신자유주의적 개혁론자들과 국제적 금융기관들은 다른 어떤 처방보다 사적연금화를 선호했다. 그들은 사적연금화가 연금체계의 재정적 생존능력을 보장하고, 연금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며, 기여와 급여 사이에 좀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본시장의 발달을 촉진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개혁에 비해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라 강제적이고, 완전히 적립되며, 사적으로 운영되는 개인계정의 연금 체계가 남미 국가들의 연금개혁의 방향성으로 제시되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노조들과 연금가입자들, 그리고 정당들이 있었고, 이들과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분파들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구체적인 연금형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연금개혁을 주장했던 자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연금개혁이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중장기적인 효과들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적연금이 보상범위를 확대할 것이라는 약속, 사적연금이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라는 약속, 공적연금의 과다한 관리비용을 해소할 수 있다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적연금은 노후소득 보장을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만들면서 오히려 저소득층 등을 보상범위에서 제외시키는 효과를 나았다. 게다가 경제성장을 둘러싼 평가는 분분하지만, 결국 이를 통해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는 경제성장을 이루었느냐는 관점에 서면, 답은 명확해진다. 그리고 사적연금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과도한 경쟁과 개인계정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광고 및 관리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공적연금의 관리비용을 초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덧붙여 사적연금은 집합적인 사회보장체계를 해소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를 파괴시켰고, 소득 재분배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남미는 외채위기 등의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각 국가들의 사회적 필요와 합의와는 무관하게 강제적이고 완전적립식의 확정기여형 연금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남미의 엘리트들과 초민족적 자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면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연금개혁의 효과 우선 현 시기 금융의 팽창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의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조건을 어떻게 악화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금융세계화는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의 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더 이상 고용 중심적인 정책추진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불어 금융의 팽창은 자본파괴를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통해 실업과 소득불평등을 야기하며, 불안정한 노동 층을 양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적연금을 도입하는 것은 금융자본에게는 거대한 시장이 창출되는 것이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령급여의 불안정성은 심화된다. 이것은 계속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매우 분열적이고, 모순적이다. 자본의 금융화에 따라 노동계급 다수는 금융시장에 자산을 투입하게 되고(사적연금의 도입은 연금가입자 모두가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자신의 계좌를 가지는 것이다.), 그 양은 계속 증가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종종 생산부문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금융시장에서의 이해관계가 분열되는 경험을 겪는다. 금융시장은 주주가치의 극대화라는 이름으로 생산과 고용의 파괴를 동반하는 구조조정 추진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과 노후보장의 더 많은 부분을 금융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을 수호하고, 나아가 금융시장의 규율에 맞춰 효율적인 기업통치, 즉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에 기반을 두어 수익률을 높일 것을 요구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금융시장에 투자할 자산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추진하는 노동의 유연화, 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기인한다. 늘어가는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 층은 사적 연금체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기업연금의 혜택을 받을 수도 없고, 개인연금에 가입할 만큼의 여유 재산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후는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사적연금 체계에서 노후보장의 안정성은 판돈의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저소득 불안정 노동 층은 갹출금의 액수도 적을 뿐더러, 직장 및 소득이 불안정하기에 이마저 안정적으로 납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사적연금체계는 연금을 운용하는 기준이 철저하게 시장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저소득층에 대한 보장성 문제 및 소득 재분배 효과는 사적연금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일례로 사적연금들은 여성의 평균수명이 길다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연금지급액수를 낮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적연금은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민중들의 삶과 연대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는 연금개혁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인가? 우선 연금개혁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자본시장 발달의 측면을 짚어보자. 적립식의 사적연금은 적게는 임금의 2%에서 많게는 10%에 이르는 보험료를 강제로 금융기관에 적립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국내외 자본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금원이 된다. 연기금의 금융시장 투입은 자연스럽게 자본시장의 급작스러운 팽창을 가져온다.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장기호황의 기반에는 연기금의 안정적인 자금공급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적립식 확정갹출형 연금을 통해 자본시장의 발달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본시장의 인프라가 충분히 발달해있는 나라였으며, 주식시장 및 금융시장의 전 세계 핵심을 차지하는 나라라는 조건이 있다.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연기금의 자본시장 투자가 기대했던 자본시장 발달과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연금개혁을 통해 자본시장 확대를 꾀하며, 금융의 팽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했던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들어서 또 다시 경제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들 국가에서 연금의 사적 전환이 자본시장의 심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시장 심화는 경제성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개방되고 자유화된 자본시장으로의 변모 속에서 국내 경제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구조조정 정책의 엄격하고 실행을 강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현 시기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금융의 팽창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사적연금의 도입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선진국의 자본시장의 발달뿐만 아니라, 제3세계 및 신흥시장의 자본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것이며, 더불어 자신들의 팽창을 지속하기 위해 사활적인 것이다. 결국 세계은행을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안정적인 노후소득보장, 경제 성장, 세대간의 갈등 완화 등의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연금개혁이 가장 필요한 것은 초민족적 자본 분파다. 2000년대 들어서 보이고 있는 세계경제의 불황의 조짐은 사적연금을 주장하는 논지의 허구성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자본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조차도 지난 2년 반 동안 주식시장 하락으로 인해 미국의 은퇴자들이 준비해놓은 자금 중 6780억 달러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월스트리트 저널, 2002년 9월 9일) 적립식의 사적연금이 다양한 포트폴리오 투자를 통해 높은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가정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990년대 거대한 연기금의 형성과 자본시장에의 투자를 통해 미국이 보여주었던 호황과 높은 수익률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자본시장을 지탱해줄 원천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개혁되지 않은 수많은 국가들의 연기금이 그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연금개혁이 노동자민중의 생계와 노후소득에 가하는 공격이 더욱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남한도 예외일 수 없으며, 이미 연금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진행되고 있다. 기존의 공적연금을 더욱 노동자민중의 이해에 걸맞은 방향으로 재편하기 위한 우리의 논의와 투쟁도 시급히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PSSP <참고자료> 송원근, 2002, 「미국 연기금의 주식투자 현황과 함의」, 『미국자본주의 해부』, 풀빛 주은선, 2001, 「세계의 공적연금 민영화의 쟁점과 동향」, 『사회복지와 노동』 제3호 2001년 가을 Huber, Evelyne and John D. Stephens, 2000, 「The Political Economy of Pension Reform: Latin America in Comparative perspective」, Geneva, Switxerland, United Nations Research Institue for Social Development Minns, R. 2001, 『The Cold War in Welfare Stock Market versus Pensions』, Verso James E. 1997a, "New System for Old Security - Theory, Practice and Empirical Evidence",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s, No. 1766 1997b, "Pension Reform: Is There An Efficiency - Equity Trade-off?",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s, No. 1767
월간 [사회진보연대] 3월호 특집글입니다. 아래 정영섭동지가 모아서 올린 자료글들과 함께 참고하십시요 ps> 내일이 노무현 취임식인데, TV를 켜니 장택상, 유진산과 김두환의 민중학살을 무협활극으로 미화한 쓰 레기같은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이 주욱 나와서 동북 아중심이 어쩌구, 국민참여가 어쩌구하는 꼴깝들을 떠는통에 잠이 확깨네 요.. 앞으로 이 나라꼴이 어떻게 될런지, 안타까운 밤입니다.
1.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 재정경제부, 2002. 7 2. 2002년 경제특구법 통과저지 투쟁시 제반 민중운동 입장 3. 최근 경제특구 추진 관련 각종 뉴스 모음 4. 부산시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계획 5. 홍콩, 싱가폴, 중국 사례
경제자유구역대응팀에서 취합한 자료입니다. 1. [경제특구의 성공적 추진방안], 삼성경제연구소 (2002. 4) : 경제특구관련 상세한 내용과 계획제안을 담고있는 결정판 2. [산업구조의 장기적 변화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화의 개념], 대외경 제정책연구원 (2002. 4) :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비즈니스 중심지 개념을 정리 3. 전경련 자료 두개 : 2002년 9월과 11월에 나온 전경련의 자료인데 하나 는 실태와 개선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외국인기업 설문조사입니다. 4. [산업클러스터의 국내외 사례와 발전전략], 삼성경제연구소 (2002.11) : 산업단지를 넘어 '집적'의 개념으로 제시되는 클러스터에 대해 개관 하는 글입니다.
지난 1월 17일 노무현은 새 정부의 노동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설을 하였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유럽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이날 간담회 연설에서 그는, 한국경제의 기본 틀도 이제 선진국과 같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에 맞추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노사관계에도 지속적인 개혁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특히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조정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기구로 이끌겠다는 것, 경제자유구역에서 의료와 교육을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노동권은 지키되 노사분규는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하게 배려하겠다는 것 등을 언급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 비정규직 보호인가 노동조건 하향평준화인가? 김대중 정권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IMF의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파괴적 구조조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역할을 했다면, 노무현 정권의 경우 동일한 기조 아래 구조조정을 지속하되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탱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 구축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금융화, 개방화 및 구조조정이 위협받지 않도록 기존의 정책에 사회 통합적 조치를 가미한다는 것이다. 이때 강조 점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있다. 일례로 노무현은 내·외신 기자회견 등을 통해 "국내 노동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56%가 넘는 점은 시정해야 하지만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어 정리해고가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은 타협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그간 OECD 등에서 권고했던 이른바 '노동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와 일맥상통하는데, 이들은 특히 2000년 한국의 '노동시장, 사회안전망 및 노사관계 정책' 종합검토에서 정규직노동자 중심의 과도한 고용보호를 완화하는 한편 구조조정 과정에서 증가한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또한 2002년 후속검토에서도 법정퇴직금제 등 정규직 보호 완화와 비정규직 보호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정확하게 노동의 불안정화를 확대·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규직에 대해서는 공격을 지속하는 한편, 이미 과도하게 늘어난 비정규직의 경우 '보호'라는 미명 하에 '합법적·제도적으로 인정하여 활성화'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논의되어 운동진영으로부터 비판받은 바 있다. "정리해고의 요건을 더욱 완화해야 정규직 채용이 늘어날 것이다"라는 주장은 노동유연화가 정규직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임을 염두에 둘 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비정규직 차별해소란, 비정규직 확대·제도화, 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를 좀더 저항 없이 관철시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하다. 관련하여 구체적인 정책을 잠깐 살펴보자. 지난 1월 22일 노동부는 인수위에 보고한 자료에서, 기간제 노동의 경우 3년을 초과하는 경우 해고제한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의 2년 단위 주기적 해고가 3년 단위 주기적 해고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파견노동에 대해서는 불법파견 사용사업주 처벌을 강화한다고 말하면서 파견대상 업무와 기간에 대해서는 범위를 넓힌다고 한다. 이는 중간착취의 근본원인인 파견노동을 확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도 단결권(그것도 노조가 아닌 임의단체)을 일부 직종으로 제한하고, 적용 범위에 있어서도 산재보험 등에 국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주노동자의 경우에는 현행의 산업연수제도 개선과 고용허가제 도입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권침해와 노동착취의 온상으로서 산업연수제도가 철폐되어야 하고, 합법화해서 통제·관리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고용허가제가 아니라 노동3권과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노동운동 진영의 주장에 대해, 단지 양적으로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한다. 이 모든 문제는, 노동유연화 확대와 차별금지가 전혀 양립할 수 없는데도 명분 확보 차원에서 양자를 동시에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유연화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차별금지 조치를 부분적·제한적 수준에서 이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정부가 계속 도입하려 드는 기업연금제(퇴직연금)의 경우 핵심은 노동자들의 노후소득을 기금으로 적립하여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것인데, 이는 자본의 금융화 전략의 일환이자 노동자 분할을 가속화하는 조치다. 기업연금제는 연금과 주가를 연계함으로써 노후소득을 불안정하게 만들뿐이다. 정부가 내놓은 확정급부형이냐 확정기여형이냐는 '기금적립'을 전제로 하여 이를 금융시장의 게임규칙에 종속시키는 것이므로 적립재정방식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문제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계속 추진하되, 다만 방법과 속도를 조정하겠다는 정도다. 그러므로 민영화의 기조는 변하지 않는 방향에서 예컨대 결정과정의 투명성이나 민영화 이후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 등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 재벌이나 외국자본에 넘기는 방식을 지양하고 소액 다수의 투자자 및 기관투자자가 공동으로 소유하도록 하고 경영은 전문가에 맡기는 '책임전문경영제'를 기본 틀로 삼게 될 것"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요컨대 방법과 속도는 다르겠지만 민영화와 이에 따르는 광범위한 구조조정은 그대로 추진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 : 타협으로 포장된 노동운동 관리 한편 노무현은 '사회통합 추진을 위한 노사화합'을 밝히고 있다. 분규와 갈등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비용의 최소화,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를 통한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적극적 노사관계 개입 등이 골자다. 흔히 '사회적 합의주의'라 불리는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이것의 배경은 무엇인가?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각종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정권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 역할을 해 왔다는 점, 그리고 현재 남한경제의 사활이 되는 외자유치에 있어서 결정적 걸림돌로 지목되는 것이 '강한 노동운동'이라는 점, 그렇다고 이들을 무턱대고 탄압하기에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이 여의치 않다는 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 초기에는 노사정위원회의 강화(체계, 권한, 집행력 등)를 통해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적 포섭을 본격화할 것이다. 이미 인수위에서는 노사정위원장을 부총리 급으로 할 것을 언급한 바 있고 노무현은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조정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기구로 이끌겠다고 밝혔다. 또한 중앙노사정위 외에 16개 시·도별 지역조직을 구성하고, 금융·철강·운수·공공부문 등 업종별 노사정위를 두어 운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내 노무현 지지세력인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의 핵심인물들도 정권인수위 사회문화분과 인수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노동계와의 채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 아래서 노사정위원회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첫째,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전지구적 불황이 회복되지 않는 객관적 조건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권과 자본의 기본 노선은 자본주의의 호황기 시절처럼 고용과 임금, 복지 등을 일정하게 양보하면서 생산성 증대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비용을 삭감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이 같은 객관적·정세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서 몇 가지 지엽적인 미끼에 현혹되어 덫에 사로잡힌다면 앞으로 노동운동의 운신의 폭은 심각하게 제약될 것이 뻔하다. 진퇴를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일 뿐이며, 퇴각을 할 때조차 살점을 대가로 치러야만 할 것이다. 둘째, 98년 이후 노사정위가 노동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해온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정리해고와 파견제, 복수노조 금지, 일방적 구조조정, 노동기본권 보장에 대한 외면 등과 관련하여 정권과 자본을 대리하여 노사정위가 어떤 짓을 해 왔는지 다들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판단을 재고할 발본적 근거가 없는 한 노동대중들의 불신을 극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셋째, 노동운동의 계급적 독립성과 자주성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위는 '합의'를 기본적 룰로 하는 곳으로, 그 안에 형식적으로 속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제약을 부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안별로 입장을 자유롭게 제출할 수 있을 만큼 느슨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총론 수준의 대립이 엄존(儼存)하는 상태에서 노사정위에 들어간다면, 한편으로 양보 혹은 맞바꾸기로 다른 편으로 사안마다의 마찰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운동의 독립성을 훼손하거나, 독립성이 '고립성'으로 표상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예컨대 만일 비정규직 보호조치와 정규직 해고요건 완화를 놓고 맞바꾸기를 강요하는 상황이 닥쳐온다면, 참으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참여와 타협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해 '사회적 대타협'의 공간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정권과 자본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공세로 인해 지난 5년 간 민중의 삶이 심각한 고통을 겪었고 노동운동 또한 역량 약화와 계급 내부의 격차 심화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이란 본질적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노동운동의 위기는 타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동운동 역량의 경향적 감소 때문이고, 이는 비정규직/정규직의 갈등으로 상징되는 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전사회적인 쟁점을 공세적이고 적극적으로 영유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전위투사'이지,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는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은 노동의 요구로 인한 갈등과 투쟁을 '비용손실'로 밖에 보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위 역시 이러한 비용손실을 줄이고, 노동에 무언가를 양보하도록 촉구하고, 노동운동을 개입 가능한 틀 안에 묶어두는 기조 하에 움직이고 있음을 명심하자. 개방과 외자유치 : 노동권 종속 약화라는 특별한 배려 김대중 정권이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노무현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과 차별적인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이 들고 나온 '동북아 중심지'는 초민족기업의 세계경영전략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는 남한의 적응책이다(즉 중국의 성장에 따른 중국진출을 위한 일종의 '관문'으로서 남한의 활용가치를 높이자는 구상). 노무현은 향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외자유치 및 동북아 물류기지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자유구역에 대해, 설치는 필요하지만 노동권이나 환경, 의료, 교육부문 등에서 문제를 낳을 수 있는 부분은 재검토하겠다는 것이 공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료와 교육을 외국에 개방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한다. 경제자유구역은 작년 11월 15일 이미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올해 7월부터 발효를 앞두고 벌써 인천, 광양, 부산 등지에서 이를 위한 기반사업이 시작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파견업종을 무제한으로 하고 연·월차, 생리휴가 등을 무급화하는 등 노동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시행될 경우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분규와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권은 엄격히 지키되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진심은 '특별한 배려'에 있다고 보여진다.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매력을 외국자본에 제공해야 하기에 외국자본이 걸림돌로 생각하는 노동비용이나 노동권을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파견법의 경우만 보더라도 파견노동자를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기적 해고를 낳는 등 지금의 노동관련법도 미흡하기 짝이 없는데,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경제자유구역에서 이를 적용하지 않고 특별 배려를 한다는 것은 개방과 외자유치에 노동권을 종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권과 자본측에서 보면 경제자유구역은 향후 각종 투자협정, 자유무역협정, 자유무역지대 등 세계화와 개방을 더욱 심화시키는 조치에 있어 하나의 전초전이기에 성과를 보기 위해 사활을 걸 것이다. 따라서 노동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며 이 영향은 경제자유구역을 넘어 전국에 미칠 것이다. 벌써부터 이러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난 1월 14일에 열린 인수위-재계의 '동북아중심국가'관련 간담회에서 재계 참석자들이 "고용조정, 정리해고, 파견근로제, 연·월차 휴가를 비롯한 노동관계법이 국내 기업에 지나치게 불리하게 돼있다"며 "동북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관계법을 글로벌 스탠더드 화하는 게 핵심과제"라고 요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노동계급 형성과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 민주노총의 경우 현재 조직상태에 대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에 의한 조합원의 감소, 대기업 정규직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로 인해 노동자계급 대표성의 위기, 자본의 현장통제 강화에 따른 현장주도력, 자주성, 민주성의 약화, 산별 운동 미흡, 여성·중소영세·비정규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절박한 요구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노동자 내부의 이질화, 실리적 경제주의의 발호 등 노동운동을 둘러싼 내외적 조건을 볼 때 현재는 집단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넘어 그야말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 거듭나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노무현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개방과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정책의 구체적인 양상을 전사회적이고 전 계급적인 쟁점으로 제기함으로써 안으로는 노동내부의 분할과 격차를 극복하는 노동계급 연대를, 밖으로는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하에서 몇 가지 과제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무현정권 노동정책의 정치적 맥락과 지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균열지점을 파고들어 보편적인 쟁점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에 대해 형식적 보호조치를 취하면서 정규직에게는 해고요건 완화, 기업연금제 등의 공세를 취하는 식으로 분할·고립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노동유연화 공세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적극 폭로하면서 비정규직, 정규직을 아우르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것이다. 둘째,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자행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결과 새롭게 형성된 수탈-착취체제의 성격상, 노동의 불안정화는 이미 장기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이 확실시된다. 이는 곧 운동진영에게는 새로운 계급형성을 위한 전략을 가시화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누차 강조한 바대로 비정규직, 여성노동, 이주노동, 실업 등 기존 노조운동으로 포괄되지 않은 부분 주체형성과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해 노동자 내부에서 위계서열화가 이루어지고 그 격차가 커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모든 분할에 반대하여 여성, 비정규, 중소영세, 이주노동자 등을 포괄하는 새로운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상설적 공투체로서 전국민중연대를 강화하여 전국적 지역적 민중연대전선을 확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개방과 구조조정의 파괴적 효과가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 민중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연대투쟁은 대응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 본 조직 건설을 일정에 올리고 있는 전국민중연대를 실질적인 투쟁의 구심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조삼모사식 관리 정책에 미혹되지 않고 그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여 향후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을 구체화하는데 매진하도록 하자.
신경제론자들은 미국의 경제회생을 이끌 삼두마차로 대개 다음 셋을 꼽는다. 월스트리트,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각각 금융산업, 하이테크(정보통신)산업, 오락(문화)산업을 상징하는데, 이들이 오늘날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막대하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가 버팀목 역할을 하는 캘리포니아 주의 년 총생산이 1998년 한해에만 1조 달러가 넘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GNP 규모 세계 7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역시 지난 몇 년간(앞으로도 몇 년간) 이 흐름을 뒤쫓으려 전력을 다했는데, 월가를 옆으로 밀어놓고 보면, 고부가가치 지식경제란 애초에 한국의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꿈꾼 것에 불과하다. 이 삼두마차가 이끄는 신경제에 대해 몇 가지만 확인해보자. 첫째, 이들이 성장의 원동력이 될 지는 아직 검증된 바 없으며 신경제론자조차도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단시일 내에 자금을 조성할 수 있고 빠르게 회전(혹은 철수)할 수 있는 금융적 투자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자체의 수익(금융적 수익)에 대한 의존도도 커지고 있다는 것, 셋째 이곳의 종사자들은 포스트 노동사회의 (노동)윤리, 가치 체계의 상징으로 표상되는데, 이것은 노동의 불안정화가 야기한 사회적 파장을 은폐한다. 물론, 이 산업 종사자들의 직업수명이 길지 않고, 몇몇을 제외하면 임금도 전체 산업의 평균보다 높다고 볼 수 없으며, 후생복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때, 문화산업의 지위는 좀더 특별한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상징체계 자체가 산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은 단지 경제적 (효과)차원으로 볼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고, 더불어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읽어야만 한다. 이점에서 문화제국주의론은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의 지배계급이 피억압 민족들의 가치·행태·제도·정체성을 제국주의적 계급들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재편하기 위하여 민중계급들의 문화생활에 조직적으로 침투하고 지배해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비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반란진압전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 수탈과정에서 식민지 피착취 인민들의 저항을 제어하려고 문화적 침투(미국적 가치의 외삽)를 시도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산업을 지배세력의 지배수단으로만 보거나, 이 차원에서만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인데, 왜냐하면, (반)주변부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함께 근대적 노동사회의 윤리가 (종속적으로) 일반화되면서 대중의 문화적 판단이 변하고 있고, 더구나 오늘날 문화산업은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넘어 지배세력이 기대할 수 있는 이윤창출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규제완화와 '표현의 자유' - 문화산업 컨텐츠 확보를 위한 전쟁 NWICO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70년대 말에 이미 '정보자원의 불평등', '미디어 생산물의 분배, 유통 구조에서의 양적 불균형과 질적 왜곡'등이 국제적 의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는 '전지구적 미디어의 불균형 종식, 국가 발전 목적에 기여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지지한다는 모호한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동시에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지속적인 보장, 국가의 미디어 독점을 반대하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였으며, 여기에 '채널과 정보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까지 추가하였다. 사실, 중심부 제도권 인사들에게 NWICO는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는데, NWICO가 1970년대 광고시장의 급성장이 주도하는 전지구적인 미디어 시장의 형성을 공개적으로 저지하려는 기구로 보였던 것이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구에서조차 처음에는 국가 혹은 중앙정부의 통제아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작위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자체가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다가, 이 과정은 대체로 공익성이 강조되면서 타협되었다. 2차 대전을 경과하면서 라디오 방송, 영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확인하고부터는 국가차원의 중요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특히, 신생 독립국의 경우 더욱 그랬는데, 민족적(or 종속적) 발전의 길을 제시하는데 이만큼 유력한 수단(국가기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3세계에는 대체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컨텐츠가 부족했고, 더불어 이에 대한 국가의 완강한 통제(규제)는 컨텐츠를 생산하는데 장애요소로 비쳤다. 미디어 시장이 증가하고, 더구나 광고시장의 성장으로 사적인 제작 가능성이 늘어난 상황에서 이 같은 장애요소는 중심국, 주변국 할 것 없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를 빌미로 서구의 미디어 회사들은 NWICO와 유네스코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데, 이들은 NWICO 옹호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언론을 검열하는 독재자라며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험(군부독재정권의 언론·문화 통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말은 꽤 그럴 듯 하게 들렸는데, 여하튼 이 논란을 배경으로 미국과 영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하고, 논쟁점이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이들의 의도는 관철되었다. 1970년대 미국의 탈인플레이션 정책(강한 달러, 고금리)으로 막대한 외채상환 부담(수출적자, 국제금리상승)을 지면서 IMF, 세계은행에 더욱 의존하게된 3세계로서는 더 이상 NWICO를 옹호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3세계 국가에서도 중심부 국가와 마찬가지로 텔레커뮤니케이션의 규제완화, 자유화가 진행된다. 우리나라도 이때부턴데, 영화 및 음반 제작사의 설립제한, 제작사의 수입제한, 금융규제 등등 문화산업에 대한 규제조치가 조금씩 완화되고, 1987년 헌법개정을 통해 '언론 출판에 대한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명문화된다. 유신정권 이래 유보된 표현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것이다. 많은 대중문화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군사독재 치하에서 대중문화는 '질식'상태였는데,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경로가 매우 전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상품)의 적합한 생산 경로란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문화(상품)생산, 그리고 익명의 대중에 의한 소비일텐데, 이것이 시장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생산방식 즉, 경제외적인 압력(연예인 전속, 불분명한 자금, 사전심의제도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적인 통제 따위)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문화의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것인데,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어찌되었든 문화산업의 주체들이 이 같은 전근대성의 극복에 사활을 건 것은 분명했다. 이럴 때 대중문화에서 '표현의 자유'란 창작자의 문화상품 생산의 자유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의 자유(문화예술에 대한 권리)라기보다는 노동력을 제공(구입)하는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 즉, 창작자의 문화 컨텐츠를 소유하고 교환·판매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의 보증에 더 가깝다. 오늘날 창작자 개인의 법적인 권리가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보편적인 권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탓이다. 따라서, 국가의 위협에 맞서는 개인의 권리라는 '표현의 자유'(국가에 대한 의무에 의해 제약되며, 사적 자본의 영향력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한)는 현실적으로 문화산업 규제완화의 지표로서, 문화 콘텐츠의 산업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 1989년 12월 연행예술(연극, 음악, 무용 등)의 공연에서 각본 또는 대본의 검열 폐지를 시작으로 사전 심의 폐지가 조금씩 진행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1980년대 국가적 엄숙주의를 조롱하던 마광수가 1992년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면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 '이념'을 둘러싼 지형이 '성(性)'으로 옮겨간 것이다('사상의 자유'보다 '표현의 자유'). 문화콘텐츠 확보를 위한 국내자본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던 1995년 영상과 음반의 사전심의제도 개폐 논란은 더욱 뜨거워진다. 1996년 서태지의 4집 앨범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에 대한 공윤의 사전심의 논란은 논쟁을 대중화했고, 영화법은 영화진흥법으로 개정되었으며, 헌법재판소는 영상 및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해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영상 및 음반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된다. 1998년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심의제도 역시 위헌 제청을 받게되고, 2000년 방송위원회의 광고방송 사전심의제도도 폐지된다. 음반 및 비디오 게임물에 관한 법률 역시 2001년에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명목으로 이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는데, 게임물도 등급화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실시된다. 이렇게 모든 법률 및 규제조치들이 문화산업의 육성을 지원하고, 문화 컨텐츠 확보에 어려움이 없도록 완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오락으로서 문화산업 1990년대 이후 미디어 시장의 특징 중 주목할 것이 있는데, 영화·텔레비전·음악에서 할리우드의 매력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순위 정상을 차지하는 TV 프로그램이 대체로 자국 프로그램인 것이다. 할리우드 제품과 견주어 동일한 오락성을 가졌을 경우 대중은 자국의 제작물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이제 문화 산업에서 정설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는데, TV 드라마는 물론, 서태지로 상징되는 국내가요 시장점유율은 2000년 현재 70%를 상회하고, '쉬리'를 시작으로 국산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급상승하여 이제는 50%에 육박하고 있다. 이때 전제조건을 눈여겨보아야 할 텐데, 바로 동일한 오락성이라는 전제다. 이는 한국문화의 소비규범이 미국에 동화된 지 오래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국내 문화산업의 컨텐츠가 조금씩 확보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과 주거공간이 분리되고 노동시간의 배치가 주중노동-주말휴무 이렇게 체계적으로 분리되면서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분명해지는데, (대량)소비가 이를 묶는 사회통합의 기제가 된다-'소비에 의해 매개된 노동과 여가의 통합'. 소비가 노동과 여가의 통합을 매개할 즈음 새로운 문화예술이 출현하는데, 산업-디자인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이다. 앞서의 것이 근대적 노동을 찬미하고 이의 판매와 거래를 돕는다면, 뒤의 것은 심미적이며 찰나적인 그리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미를 강조하고 개인의 취향과 (대중적) 선택을 존중한다. 이것이 소비의 대상으로써 상품으로 다뤄지는 것은 미학의 문제라기보다 산업의 문제에 가깝다. 특히 후자의 경우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친화력도 문제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에 걸맞은 예술생산체계(예술생산의 테일러화)를 갖추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생산방식을 선도했던 것이 영화산업인데, 영화산업 자체가 생산과정의 분업화와 전문화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미국 경기 침체로 완전고용이 포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사회-여가생활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탈노동사회로 가는 길이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은 근대적인 노동규율에 더 많은 사람을 묶었다. 고용불안을 선두로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이를 재충전하기 위한 여가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지만, 남성생계부양형 핵가족은 해체되고 있었고, 대량 소비를 통한 길말고는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이에 따라 '소비주의의 열망과 기대가 높아지면서 여가시간마저도 효용을 최대화하려는 노동시간의 생산성 모델을 닮아가고 있었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모든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해소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럴 수 있는 소비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모더니스트들이 주도한 현실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거의 예술형태와 작품의 의미작용을 해체하기 바빴고, 권위에 찬 예술작품보다 참여나 실현, 겉모습에 주목했다. 이런 현상은 대중의 소비 대상인 문화산업에서 더욱 심하게 드러났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부차적이었고, 매체의 이미지, 이벤트, 스펙터클, 헤프닝이 중요했다. '기의'보다 '기표'의 적절한(혹은 다양한) 조합이 관건이었다. 이런 현상은 문화산업에서 생산된 작품의 일시성, 순간성을 더욱 가속시켰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문화산업은 점점 더 짧은 시간 내에 짜릿한 쾌감을 제공할 수 있는 오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금융기법의 활용 : 문화산업의 금융화 따라서, 문화산업에게 다음은 필수적이었다. 스펙터클한 오락과 이미지의 충실한 재현을 위해서는 과거보다 몇 배 더 규모가 큰 재정이 필요했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소비수요를 보장할 수 있는 광범위한 유통·배급 네트워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동일하게 하나의 문제기도 했는데, 작품성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면 이 같은 과정은 하나의 공정으로 통일되어야 했다. 문화산업의 컨텐츠는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응용의 폭이 넓으며, 성공만 하면 영향력은 지속적이었다. 콘텐츠 산업과 유통·배급을 담당하는 네트워크의 통합 필요성은 점점 늘어나고, 이에 따라 문화산업의 수직적 통합이 진행된다. 타임워너, 바이오컴 등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대 미디어기업들은 수 개의 콘텐츠 사업과 수 개의 네트워크를 거느리고 있으며, 지금은 거대 미디어기업들 사이의 합작과 병합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었는데, 최초 투자 재정 규모가 커지는 만큼 성공에 대한 위험부담률이 급증하였고, 문화산업의 기술(특히 디지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제작 초기에 들어간 설비자금은 쓸모 없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사실들은 당연히 미디어 기업들에게 재앙이었는데, 이런 위험을 감소시킬 방법으로 이들은 각종 금융적 기법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에서 이런 현상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과거에는 전적으로 은행 혹은 기업의 후원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금융시장에서 공개적으로 자본을 모으고, 제작자들 사이·미디어 기업들 사이의 합작 투자로 서로의 위기를 줄였다. 나아가 한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투자자금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몇 년간 영화제작계획을 내놓고 투자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상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제작자(감독)의 권한이었던 영화제작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했다. 각본 공모에서 기술 채용, 배우선정, 촬영 및 편집 과정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투자자들(심지어 일반 소비자까지)은 이것을 지켜보며 최종편집과정까지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의 효과는 분명히 드러났는데, 흥행에 실패(과거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명백한)해도 영화 자체의 수익구조는 보장되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소득이 생긴 것이다. 금융적 소득. 이렇게 문화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상품의 포장, 기업의 이미지 제고에 소요되는 잔여적인 것으로 밖에 보지 않았던 기업으로서는 광고산업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산업 자체의 지위에 대해 다시 고려해야 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혹은 이를 지향하는)들의 관심이 특별한데, 이것이 이미지 재고 차원을 넘는 것임은 분명하다. 앞서 대중문화의 질식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문화시장 자체가 빈약했던 80년대 이전에는 한국의 재벌조차 문화산업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TV 광고시장이 성장하고 각종 가전 시장이 커지던 1980년대 삼성, SKC, 대우, 현대 등 재벌 기업들이 문화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가전제품 등 단순히 하드웨어의 판매 촉진을 위해 뛰어든 것이었는데, 상황은 단번에 역전되었다. 1987년 3저 호황에 힘입어 문화산업의 내수시장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급증한 비디오 유통시장이 이를 단적으로 반증했다. 이렇게 국내 문화산업의 시장규모가 확대되자 이들 재벌들이 만들어 놓은 유통조직을 이용하여 미국 영화사의 직접 배급이 시도된다. 1988년 UIP 영화직배로 시작되는 유수의 영화 직배회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과도한 경쟁으로 영화 판권료로 급등하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재벌들은 국내 영화 제작 직접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광고시장으로 이미 멀티미디어 산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데다 직접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1992년 삼성이 [결혼이야기]에 직접 투자하면서 이는 본격화되는데, 직배와 금융실명제로 적절한 투자자를 찾지 못했던 충무로에게 이 같은 지원은 단비 같았다. 이를 계기로 상당한 흥행실적을 올리면서 산업으로써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즈음은 동시에 영상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있던 해이기도 하다(1995). 그 해에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던 영화업이 산업으로 분류됨에 따라 금융자본에게도 투자의 길이 열렸다. 창업투자회사는 영화산업의 자금회수기간이 빠르고(길어야 1년) 막대한 이윤회수가 가능하다는 이점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는데, IMF 관리체제 하에서 재벌들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도 창업투자회사는 투자를 꾸준히 늘렸다. 이런 투자들을 기반으로 충무로는 헐리우드와 비슷한 수준의 재미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에 새로 개정된 종합유선방송법은 한 프로그램 제작회사가 다 채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외국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면서 국내 혹은 국외 미디어기업들 사이에 수직적 합병(투자)의 기회를 연 것이다. 이때 [그 섬에 가고 싶다](1992)에서 시작한 해외자본의 직접 투자를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영화제작에 대한 직접투자는 물론 영화제작사에 대한 해외자본의 투자도 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한·중, 한·일 공동출자에 의한 영화제작도 늘고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외자본의 직접 투자 비율도 조금씩 늘고 있는데, 2002년 한해에만 세편의 영화가 해외 자본으로 제작을 마치거나 계약을 맺었다. 더불어, 문화산업의 소비 유통망-네트워크에 대한 해외자본의 투자도 확대되고 있는데, 전국의 여러 멀티플렉스 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플렉스'는 일본 소니의 계열사 투자를 받아 시작한 것이고, 세계적인 거대 미디어 그룹인 타임워너가 우리나라 케이블 TV 망에 관심을 가지고서 조금씩 투자를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문화산업, 특히 영화산업의 경우 문화상품 자체의 생산성 논리가 제기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흥행 참패가 몇몇 투자사의 어려움으로 이어지자, 영화투자자금이 물밀 듯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일었는데, 직후 영화산업의 거품을 빼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정확한 시장조사와 불필요한 마케팅비, 제작단가 등 거품을 줄여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가 이미 산업이므로 과거 전적으로 감독에 의존하던 것을 산업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체질을 바꾸자는 뜻이다. 또한 영화제작과정에서 투자자들의 권한 역시 대단히 제고되었는데, 투자자들은 생산관리자가 매일 작성해 올리는 보고서를 보면서 촬영 진행도, 감독과 배우의 컨디션, 제작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들으면서 추가투자 여부를 결정하면서, 예산이 과도하게 넘거나 영화의 질(흥행성)을 떨어뜨릴 만한 위기가 발생하면 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영화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투자를 유도함으로써 안정적인 영화제작기반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흥행에 참패했지만, 과거처럼 막대한 손해를 입지는 않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상황까지 발전한 것이다. 물론, 영화산업에 한정되는 문제겠지만, 영화산업이 문화산업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생각할 때 이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이제 문화산업이 대상으로 하는 모든 컨텐츠의 권리는 투자자의 권리로 제한될 것이다. 영화자체의 작품성보다 영화의 마케팅이 더 중요해지고, 제작사의 마케팅과 배급 망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다. 흥행수입의 도박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영화의 오락적 기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대중의 소비패턴 변화는 이를 더욱 강하게 보증할 것이다. 영화 밖의 수입(공동투자 등등에 따른 각종 금융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예술로서 영화보다 산업으로서 영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이에 따라 예술로서 영화는 점점 더 초라해질 것이다. 언제 철수할지 모르는 투자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이런 경향을 강하게 할 것이고, 뜻하지 않은 이유로 이들이 갑작스럽게 철수해 버리면 한국 영화는 그야말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점점 영화제작의 투명성이 제고되고, 모든 컨텐츠의 권리는 더더욱 투자자의 권리로 제한될 것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악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화시장 개방에 맞서는 전략을 다시 사고하기 위해 오늘날 서비스 부문에서는 투자가 무역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띄는데, 최종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소비' 규범을 중심으로 동질화되어감에 따라 서비스의 국제화 과정이 용이해진데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서비스의 제공을 위해 조직되었던 대규모 인프라들이 자유화 및 탈규제 운동으로 투자제한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일하게 직접 소비 시장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막무가내식 교역 확대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까지 추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문화산업의 경우 이러한 곤란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언어와 문화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사업을 확대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모험이고 기회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은 대단히 약한 편이었다. 한국 문화산업의 콘텐츠 부족도 문제지만 문화상품 하나 마땅히 소비할 수 있는 기반이 약하다는 사실도 문제다. 따라서 집중된 자본으로서는 문화산업의 속성상 문화시장 자체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할 수 있다. 사실, 스크린 쿼터 등 자국 문화산업의 성장을 위한 몇 가지 제도들은 지금 현재 시점에서 해외자본에게 꼭 불리하다고만 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다. 이것이 문화적 이질감을 쌓는 장벽이 된다면 그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 동질감(문화산업에 대한 대량소비)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서 스크린 쿼터제도 폐지를 요구한다면 그 말은 진실일 수 있다. 그래야만 어디서든 이들의 문화상품이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문화시장 개방 요구를 문화상품에 대한 선진국 '소비규범'의 확산과 이를 위한 각종 규제의 철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화산업의 무역장벽이라는 '스크린 쿼터' 철폐는 그 중 하나인데, 역시 동일하게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 제한 역시 이들에게는 관건이다. 따라서 이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스크린쿼터' 사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동일하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게) 한국 문화산업에 대한 해외자본의 직·간접(공동)투자와 문화산업의 금융화도 문제삼아야 한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닌데, 스크린 쿼터로 지킨(혹은 지키려는) 우리의 문화는 무엇인가가 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영화 50%, 우리 음악 70%라는 현실은 결코 낙관적인 것이 아닌데, 앞서 잠시 지적했듯 이 말은 거꾸로 우리 영화와 음악이 헐리우드와 동등한 수준의 오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탈 노동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구속되어 노동권이 더욱 박탈당하는 사회에서, 실질적인 여가의 실종과 끝 갈데 없는 소비가 이를 대신하는 사회에서, 소비를 조직하고 신용으로 얻어 쓴 소비를 갚기 위해 더욱 강요된 노동을 해야하는, 이 과정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오락으로서 문화가 우리의 문화라는 것은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오늘 한국의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성격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사고하기 어려운데, 이미 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미국)자본주의의 주체화 양식에 대한 비판과 동시적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사고해야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