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자유구역대응팀에서 취합한 자료입니다. 1. [경제특구의 성공적 추진방안], 삼성경제연구소 (2002. 4) : 경제특구관련 상세한 내용과 계획제안을 담고있는 결정판 2. [산업구조의 장기적 변화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화의 개념], 대외경 제정책연구원 (2002. 4) :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비즈니스 중심지 개념을 정리 3. 전경련 자료 두개 : 2002년 9월과 11월에 나온 전경련의 자료인데 하나 는 실태와 개선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외국인기업 설문조사입니다. 4. [산업클러스터의 국내외 사례와 발전전략], 삼성경제연구소 (2002.11) : 산업단지를 넘어 '집적'의 개념으로 제시되는 클러스터에 대해 개관 하는 글입니다.
지난 1월 17일 노무현은 새 정부의 노동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설을 하였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유럽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이날 간담회 연설에서 그는, 한국경제의 기본 틀도 이제 선진국과 같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에 맞추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노사관계에도 지속적인 개혁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특히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조정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기구로 이끌겠다는 것, 경제자유구역에서 의료와 교육을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노동권은 지키되 노사분규는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하게 배려하겠다는 것 등을 언급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 비정규직 보호인가 노동조건 하향평준화인가? 김대중 정권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IMF의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파괴적 구조조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역할을 했다면, 노무현 정권의 경우 동일한 기조 아래 구조조정을 지속하되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탱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 구축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금융화, 개방화 및 구조조정이 위협받지 않도록 기존의 정책에 사회 통합적 조치를 가미한다는 것이다. 이때 강조 점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있다. 일례로 노무현은 내·외신 기자회견 등을 통해 "국내 노동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56%가 넘는 점은 시정해야 하지만 강력한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어 정리해고가 어려운 대규모 사업장은 타협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그간 OECD 등에서 권고했던 이른바 '노동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와 일맥상통하는데, 이들은 특히 2000년 한국의 '노동시장, 사회안전망 및 노사관계 정책' 종합검토에서 정규직노동자 중심의 과도한 고용보호를 완화하는 한편 구조조정 과정에서 증가한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또한 2002년 후속검토에서도 법정퇴직금제 등 정규직 보호 완화와 비정규직 보호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정확하게 노동의 불안정화를 확대·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규직에 대해서는 공격을 지속하는 한편, 이미 과도하게 늘어난 비정규직의 경우 '보호'라는 미명 하에 '합법적·제도적으로 인정하여 활성화'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논의되어 운동진영으로부터 비판받은 바 있다. "정리해고의 요건을 더욱 완화해야 정규직 채용이 늘어날 것이다"라는 주장은 노동유연화가 정규직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임을 염두에 둘 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비정규직 차별해소란, 비정규직 확대·제도화, 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를 좀더 저항 없이 관철시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하다. 관련하여 구체적인 정책을 잠깐 살펴보자. 지난 1월 22일 노동부는 인수위에 보고한 자료에서, 기간제 노동의 경우 3년을 초과하는 경우 해고제한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동안의 2년 단위 주기적 해고가 3년 단위 주기적 해고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파견노동에 대해서는 불법파견 사용사업주 처벌을 강화한다고 말하면서 파견대상 업무와 기간에 대해서는 범위를 넓힌다고 한다. 이는 중간착취의 근본원인인 파견노동을 확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도 단결권(그것도 노조가 아닌 임의단체)을 일부 직종으로 제한하고, 적용 범위에 있어서도 산재보험 등에 국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주노동자의 경우에는 현행의 산업연수제도 개선과 고용허가제 도입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권침해와 노동착취의 온상으로서 산업연수제도가 철폐되어야 하고, 합법화해서 통제·관리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고용허가제가 아니라 노동3권과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노동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노동운동 진영의 주장에 대해, 단지 양적으로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한다. 이 모든 문제는, 노동유연화 확대와 차별금지가 전혀 양립할 수 없는데도 명분 확보 차원에서 양자를 동시에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유연화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차별금지 조치를 부분적·제한적 수준에서 이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정부가 계속 도입하려 드는 기업연금제(퇴직연금)의 경우 핵심은 노동자들의 노후소득을 기금으로 적립하여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것인데, 이는 자본의 금융화 전략의 일환이자 노동자 분할을 가속화하는 조치다. 기업연금제는 연금과 주가를 연계함으로써 노후소득을 불안정하게 만들뿐이다. 정부가 내놓은 확정급부형이냐 확정기여형이냐는 '기금적립'을 전제로 하여 이를 금융시장의 게임규칙에 종속시키는 것이므로 적립재정방식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문제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계속 추진하되, 다만 방법과 속도를 조정하겠다는 정도다. 그러므로 민영화의 기조는 변하지 않는 방향에서 예컨대 결정과정의 투명성이나 민영화 이후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 등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 재벌이나 외국자본에 넘기는 방식을 지양하고 소액 다수의 투자자 및 기관투자자가 공동으로 소유하도록 하고 경영은 전문가에 맡기는 '책임전문경영제'를 기본 틀로 삼게 될 것"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요컨대 방법과 속도는 다르겠지만 민영화와 이에 따르는 광범위한 구조조정은 그대로 추진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 : 타협으로 포장된 노동운동 관리 한편 노무현은 '사회통합 추진을 위한 노사화합'을 밝히고 있다. 분규와 갈등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비용의 최소화,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를 통한 협력적 노사관계 구축,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적극적 노사관계 개입 등이 골자다. 흔히 '사회적 합의주의'라 불리는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이것의 배경은 무엇인가?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각종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정권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 역할을 해 왔다는 점, 그리고 현재 남한경제의 사활이 되는 외자유치에 있어서 결정적 걸림돌로 지목되는 것이 '강한 노동운동'이라는 점, 그렇다고 이들을 무턱대고 탄압하기에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이 여의치 않다는 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 초기에는 노사정위원회의 강화(체계, 권한, 집행력 등)를 통해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적 포섭을 본격화할 것이다. 이미 인수위에서는 노사정위원장을 부총리 급으로 할 것을 언급한 바 있고 노무현은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조정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합의기구로 이끌겠다고 밝혔다. 또한 중앙노사정위 외에 16개 시·도별 지역조직을 구성하고, 금융·철강·운수·공공부문 등 업종별 노사정위를 두어 운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내 노무현 지지세력인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의 핵심인물들도 정권인수위 사회문화분과 인수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노동계와의 채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 아래서 노사정위원회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첫째,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전지구적 불황이 회복되지 않는 객관적 조건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권과 자본의 기본 노선은 자본주의의 호황기 시절처럼 고용과 임금, 복지 등을 일정하게 양보하면서 생산성 증대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비용을 삭감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이 같은 객관적·정세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서 몇 가지 지엽적인 미끼에 현혹되어 덫에 사로잡힌다면 앞으로 노동운동의 운신의 폭은 심각하게 제약될 것이 뻔하다. 진퇴를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일 뿐이며, 퇴각을 할 때조차 살점을 대가로 치러야만 할 것이다. 둘째, 98년 이후 노사정위가 노동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해온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정리해고와 파견제, 복수노조 금지, 일방적 구조조정, 노동기본권 보장에 대한 외면 등과 관련하여 정권과 자본을 대리하여 노사정위가 어떤 짓을 해 왔는지 다들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판단을 재고할 발본적 근거가 없는 한 노동대중들의 불신을 극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셋째, 노동운동의 계급적 독립성과 자주성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위는 '합의'를 기본적 룰로 하는 곳으로, 그 안에 형식적으로 속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제약을 부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안별로 입장을 자유롭게 제출할 수 있을 만큼 느슨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총론 수준의 대립이 엄존(儼存)하는 상태에서 노사정위에 들어간다면, 한편으로 양보 혹은 맞바꾸기로 다른 편으로 사안마다의 마찰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운동의 독립성을 훼손하거나, 독립성이 '고립성'으로 표상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예컨대 만일 비정규직 보호조치와 정규직 해고요건 완화를 놓고 맞바꾸기를 강요하는 상황이 닥쳐온다면, 참으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참여와 타협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해 '사회적 대타협'의 공간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정권과 자본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공세로 인해 지난 5년 간 민중의 삶이 심각한 고통을 겪었고 노동운동 또한 역량 약화와 계급 내부의 격차 심화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이란 본질적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노동운동의 위기는 타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동운동 역량의 경향적 감소 때문이고, 이는 비정규직/정규직의 갈등으로 상징되는 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전사회적인 쟁점을 공세적이고 적극적으로 영유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전위투사'이지,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는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본은 노동의 요구로 인한 갈등과 투쟁을 '비용손실'로 밖에 보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위 역시 이러한 비용손실을 줄이고, 노동에 무언가를 양보하도록 촉구하고, 노동운동을 개입 가능한 틀 안에 묶어두는 기조 하에 움직이고 있음을 명심하자. 개방과 외자유치 : 노동권 종속 약화라는 특별한 배려 김대중 정권이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노무현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과 차별적인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이 들고 나온 '동북아 중심지'는 초민족기업의 세계경영전략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는 남한의 적응책이다(즉 중국의 성장에 따른 중국진출을 위한 일종의 '관문'으로서 남한의 활용가치를 높이자는 구상). 노무현은 향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외자유치 및 동북아 물류기지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자유구역에 대해, 설치는 필요하지만 노동권이나 환경, 의료, 교육부문 등에서 문제를 낳을 수 있는 부분은 재검토하겠다는 것이 공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료와 교육을 외국에 개방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한다. 경제자유구역은 작년 11월 15일 이미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올해 7월부터 발효를 앞두고 벌써 인천, 광양, 부산 등지에서 이를 위한 기반사업이 시작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파견업종을 무제한으로 하고 연·월차, 생리휴가 등을 무급화하는 등 노동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시행될 경우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분규와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권은 엄격히 지키되 노사분규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진심은 '특별한 배려'에 있다고 보여진다.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매력을 외국자본에 제공해야 하기에 외국자본이 걸림돌로 생각하는 노동비용이나 노동권을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파견법의 경우만 보더라도 파견노동자를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기적 해고를 낳는 등 지금의 노동관련법도 미흡하기 짝이 없는데,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경제자유구역에서 이를 적용하지 않고 특별 배려를 한다는 것은 개방과 외자유치에 노동권을 종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권과 자본측에서 보면 경제자유구역은 향후 각종 투자협정, 자유무역협정, 자유무역지대 등 세계화와 개방을 더욱 심화시키는 조치에 있어 하나의 전초전이기에 성과를 보기 위해 사활을 걸 것이다. 따라서 노동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며 이 영향은 경제자유구역을 넘어 전국에 미칠 것이다. 벌써부터 이러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난 1월 14일에 열린 인수위-재계의 '동북아중심국가'관련 간담회에서 재계 참석자들이 "고용조정, 정리해고, 파견근로제, 연·월차 휴가를 비롯한 노동관계법이 국내 기업에 지나치게 불리하게 돼있다"며 "동북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관계법을 글로벌 스탠더드 화하는 게 핵심과제"라고 요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노동계급 형성과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 민주노총의 경우 현재 조직상태에 대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에 의한 조합원의 감소, 대기업 정규직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로 인해 노동자계급 대표성의 위기, 자본의 현장통제 강화에 따른 현장주도력, 자주성, 민주성의 약화, 산별 운동 미흡, 여성·중소영세·비정규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절박한 요구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노동자 내부의 이질화, 실리적 경제주의의 발호 등 노동운동을 둘러싼 내외적 조건을 볼 때 현재는 집단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넘어 그야말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 거듭나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노무현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개방과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정책의 구체적인 양상을 전사회적이고 전 계급적인 쟁점으로 제기함으로써 안으로는 노동내부의 분할과 격차를 극복하는 노동계급 연대를, 밖으로는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 하에서 몇 가지 과제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무현정권 노동정책의 정치적 맥락과 지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균열지점을 파고들어 보편적인 쟁점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에 대해 형식적 보호조치를 취하면서 정규직에게는 해고요건 완화, 기업연금제 등의 공세를 취하는 식으로 분할·고립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노동유연화 공세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적극 폭로하면서 비정규직, 정규직을 아우르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것이다. 둘째,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자행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결과 새롭게 형성된 수탈-착취체제의 성격상, 노동의 불안정화는 이미 장기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이 확실시된다. 이는 곧 운동진영에게는 새로운 계급형성을 위한 전략을 가시화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누차 강조한 바대로 비정규직, 여성노동, 이주노동, 실업 등 기존 노조운동으로 포괄되지 않은 부분 주체형성과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해 노동자 내부에서 위계서열화가 이루어지고 그 격차가 커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모든 분할에 반대하여 여성, 비정규, 중소영세, 이주노동자 등을 포괄하는 새로운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상설적 공투체로서 전국민중연대를 강화하여 전국적 지역적 민중연대전선을 확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개방과 구조조정의 파괴적 효과가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 민중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연대투쟁은 대응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 본 조직 건설을 일정에 올리고 있는 전국민중연대를 실질적인 투쟁의 구심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조삼모사식 관리 정책에 미혹되지 않고 그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여 향후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을 구체화하는데 매진하도록 하자.
신경제론자들은 미국의 경제회생을 이끌 삼두마차로 대개 다음 셋을 꼽는다. 월스트리트,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각각 금융산업, 하이테크(정보통신)산업, 오락(문화)산업을 상징하는데, 이들이 오늘날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막대하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가 버팀목 역할을 하는 캘리포니아 주의 년 총생산이 1998년 한해에만 1조 달러가 넘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GNP 규모 세계 7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역시 지난 몇 년간(앞으로도 몇 년간) 이 흐름을 뒤쫓으려 전력을 다했는데, 월가를 옆으로 밀어놓고 보면, 고부가가치 지식경제란 애초에 한국의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꿈꾼 것에 불과하다. 이 삼두마차가 이끄는 신경제에 대해 몇 가지만 확인해보자. 첫째, 이들이 성장의 원동력이 될 지는 아직 검증된 바 없으며 신경제론자조차도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단시일 내에 자금을 조성할 수 있고 빠르게 회전(혹은 철수)할 수 있는 금융적 투자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자체의 수익(금융적 수익)에 대한 의존도도 커지고 있다는 것, 셋째 이곳의 종사자들은 포스트 노동사회의 (노동)윤리, 가치 체계의 상징으로 표상되는데, 이것은 노동의 불안정화가 야기한 사회적 파장을 은폐한다. 물론, 이 산업 종사자들의 직업수명이 길지 않고, 몇몇을 제외하면 임금도 전체 산업의 평균보다 높다고 볼 수 없으며, 후생복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때, 문화산업의 지위는 좀더 특별한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상징체계 자체가 산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은 단지 경제적 (효과)차원으로 볼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고, 더불어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읽어야만 한다. 이점에서 문화제국주의론은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의 지배계급이 피억압 민족들의 가치·행태·제도·정체성을 제국주의적 계급들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재편하기 위하여 민중계급들의 문화생활에 조직적으로 침투하고 지배해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비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반란진압전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 수탈과정에서 식민지 피착취 인민들의 저항을 제어하려고 문화적 침투(미국적 가치의 외삽)를 시도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산업을 지배세력의 지배수단으로만 보거나, 이 차원에서만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인데, 왜냐하면, (반)주변부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함께 근대적 노동사회의 윤리가 (종속적으로) 일반화되면서 대중의 문화적 판단이 변하고 있고, 더구나 오늘날 문화산업은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넘어 지배세력이 기대할 수 있는 이윤창출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규제완화와 '표현의 자유' - 문화산업 컨텐츠 확보를 위한 전쟁 NWICO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듯 1970년대 말에 이미 '정보자원의 불평등', '미디어 생산물의 분배, 유통 구조에서의 양적 불균형과 질적 왜곡'등이 국제적 의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는 '전지구적 미디어의 불균형 종식, 국가 발전 목적에 기여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지지한다는 모호한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동시에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지속적인 보장, 국가의 미디어 독점을 반대하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였으며, 여기에 '채널과 정보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까지 추가하였다. 사실, 중심부 제도권 인사들에게 NWICO는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는데, NWICO가 1970년대 광고시장의 급성장이 주도하는 전지구적인 미디어 시장의 형성을 공개적으로 저지하려는 기구로 보였던 것이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구에서조차 처음에는 국가 혹은 중앙정부의 통제아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작위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자체가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다가, 이 과정은 대체로 공익성이 강조되면서 타협되었다. 2차 대전을 경과하면서 라디오 방송, 영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확인하고부터는 국가차원의 중요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특히, 신생 독립국의 경우 더욱 그랬는데, 민족적(or 종속적) 발전의 길을 제시하는데 이만큼 유력한 수단(국가기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3세계에는 대체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컨텐츠가 부족했고, 더불어 이에 대한 국가의 완강한 통제(규제)는 컨텐츠를 생산하는데 장애요소로 비쳤다. 미디어 시장이 증가하고, 더구나 광고시장의 성장으로 사적인 제작 가능성이 늘어난 상황에서 이 같은 장애요소는 중심국, 주변국 할 것 없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를 빌미로 서구의 미디어 회사들은 NWICO와 유네스코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데, 이들은 NWICO 옹호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언론을 검열하는 독재자라며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험(군부독재정권의 언론·문화 통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말은 꽤 그럴 듯 하게 들렸는데, 여하튼 이 논란을 배경으로 미국과 영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하고, 논쟁점이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이들의 의도는 관철되었다. 1970년대 미국의 탈인플레이션 정책(강한 달러, 고금리)으로 막대한 외채상환 부담(수출적자, 국제금리상승)을 지면서 IMF, 세계은행에 더욱 의존하게된 3세계로서는 더 이상 NWICO를 옹호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3세계 국가에서도 중심부 국가와 마찬가지로 텔레커뮤니케이션의 규제완화, 자유화가 진행된다. 우리나라도 이때부턴데, 영화 및 음반 제작사의 설립제한, 제작사의 수입제한, 금융규제 등등 문화산업에 대한 규제조치가 조금씩 완화되고, 1987년 헌법개정을 통해 '언론 출판에 대한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명문화된다. 유신정권 이래 유보된 표현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것이다. 많은 대중문화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군사독재 치하에서 대중문화는 '질식'상태였는데,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경로가 매우 전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상품)의 적합한 생산 경로란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문화(상품)생산, 그리고 익명의 대중에 의한 소비일텐데, 이것이 시장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생산방식 즉, 경제외적인 압력(연예인 전속, 불분명한 자금, 사전심의제도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적인 통제 따위)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문화의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것인데,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어찌되었든 문화산업의 주체들이 이 같은 전근대성의 극복에 사활을 건 것은 분명했다. 이럴 때 대중문화에서 '표현의 자유'란 창작자의 문화상품 생산의 자유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의 자유(문화예술에 대한 권리)라기보다는 노동력을 제공(구입)하는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 즉, 창작자의 문화 컨텐츠를 소유하고 교환·판매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의 보증에 더 가깝다. 오늘날 창작자 개인의 법적인 권리가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보편적인 권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탓이다. 따라서, 국가의 위협에 맞서는 개인의 권리라는 '표현의 자유'(국가에 대한 의무에 의해 제약되며, 사적 자본의 영향력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한)는 현실적으로 문화산업 규제완화의 지표로서, 문화 콘텐츠의 산업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 1989년 12월 연행예술(연극, 음악, 무용 등)의 공연에서 각본 또는 대본의 검열 폐지를 시작으로 사전 심의 폐지가 조금씩 진행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1980년대 국가적 엄숙주의를 조롱하던 마광수가 1992년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면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 '이념'을 둘러싼 지형이 '성(性)'으로 옮겨간 것이다('사상의 자유'보다 '표현의 자유'). 문화콘텐츠 확보를 위한 국내자본의 모든 노력이 집중되던 1995년 영상과 음반의 사전심의제도 개폐 논란은 더욱 뜨거워진다. 1996년 서태지의 4집 앨범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에 대한 공윤의 사전심의 논란은 논쟁을 대중화했고, 영화법은 영화진흥법으로 개정되었으며, 헌법재판소는 영상 및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해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영상 및 음반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된다. 1998년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심의제도 역시 위헌 제청을 받게되고, 2000년 방송위원회의 광고방송 사전심의제도도 폐지된다. 음반 및 비디오 게임물에 관한 법률 역시 2001년에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명목으로 이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는데, 게임물도 등급화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실시된다. 이렇게 모든 법률 및 규제조치들이 문화산업의 육성을 지원하고, 문화 컨텐츠 확보에 어려움이 없도록 완화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오락으로서 문화산업 1990년대 이후 미디어 시장의 특징 중 주목할 것이 있는데, 영화·텔레비전·음악에서 할리우드의 매력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순위 정상을 차지하는 TV 프로그램이 대체로 자국 프로그램인 것이다. 할리우드 제품과 견주어 동일한 오락성을 가졌을 경우 대중은 자국의 제작물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이제 문화 산업에서 정설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는데, TV 드라마는 물론, 서태지로 상징되는 국내가요 시장점유율은 2000년 현재 70%를 상회하고, '쉬리'를 시작으로 국산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급상승하여 이제는 50%에 육박하고 있다. 이때 전제조건을 눈여겨보아야 할 텐데, 바로 동일한 오락성이라는 전제다. 이는 한국문화의 소비규범이 미국에 동화된 지 오래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국내 문화산업의 컨텐츠가 조금씩 확보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과 주거공간이 분리되고 노동시간의 배치가 주중노동-주말휴무 이렇게 체계적으로 분리되면서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분명해지는데, (대량)소비가 이를 묶는 사회통합의 기제가 된다-'소비에 의해 매개된 노동과 여가의 통합'. 소비가 노동과 여가의 통합을 매개할 즈음 새로운 문화예술이 출현하는데, 산업-디자인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이다. 앞서의 것이 근대적 노동을 찬미하고 이의 판매와 거래를 돕는다면, 뒤의 것은 심미적이며 찰나적인 그리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미를 강조하고 개인의 취향과 (대중적) 선택을 존중한다. 이것이 소비의 대상으로써 상품으로 다뤄지는 것은 미학의 문제라기보다 산업의 문제에 가깝다. 특히 후자의 경우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친화력도 문제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에 걸맞은 예술생산체계(예술생산의 테일러화)를 갖추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생산방식을 선도했던 것이 영화산업인데, 영화산업 자체가 생산과정의 분업화와 전문화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미국 경기 침체로 완전고용이 포기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사회-여가생활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탈노동사회로 가는 길이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은 근대적인 노동규율에 더 많은 사람을 묶었다. 고용불안을 선두로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이를 재충전하기 위한 여가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지만, 남성생계부양형 핵가족은 해체되고 있었고, 대량 소비를 통한 길말고는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이에 따라 '소비주의의 열망과 기대가 높아지면서 여가시간마저도 효용을 최대화하려는 노동시간의 생산성 모델을 닮아가고 있었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모든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해소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럴 수 있는 소비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모더니스트들이 주도한 현실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거의 예술형태와 작품의 의미작용을 해체하기 바빴고, 권위에 찬 예술작품보다 참여나 실현, 겉모습에 주목했다. 이런 현상은 대중의 소비 대상인 문화산업에서 더욱 심하게 드러났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부차적이었고, 매체의 이미지, 이벤트, 스펙터클, 헤프닝이 중요했다. '기의'보다 '기표'의 적절한(혹은 다양한) 조합이 관건이었다. 이런 현상은 문화산업에서 생산된 작품의 일시성, 순간성을 더욱 가속시켰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문화산업은 점점 더 짧은 시간 내에 짜릿한 쾌감을 제공할 수 있는 오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금융기법의 활용 : 문화산업의 금융화 따라서, 문화산업에게 다음은 필수적이었다. 스펙터클한 오락과 이미지의 충실한 재현을 위해서는 과거보다 몇 배 더 규모가 큰 재정이 필요했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소비수요를 보장할 수 있는 광범위한 유통·배급 네트워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동일하게 하나의 문제기도 했는데, 작품성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면 이 같은 과정은 하나의 공정으로 통일되어야 했다. 문화산업의 컨텐츠는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응용의 폭이 넓으며, 성공만 하면 영향력은 지속적이었다. 콘텐츠 산업과 유통·배급을 담당하는 네트워크의 통합 필요성은 점점 늘어나고, 이에 따라 문화산업의 수직적 통합이 진행된다. 타임워너, 바이오컴 등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대 미디어기업들은 수 개의 콘텐츠 사업과 수 개의 네트워크를 거느리고 있으며, 지금은 거대 미디어기업들 사이의 합작과 병합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었는데, 최초 투자 재정 규모가 커지는 만큼 성공에 대한 위험부담률이 급증하였고, 문화산업의 기술(특히 디지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제작 초기에 들어간 설비자금은 쓸모 없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사실들은 당연히 미디어 기업들에게 재앙이었는데, 이런 위험을 감소시킬 방법으로 이들은 각종 금융적 기법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에서 이런 현상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과거에는 전적으로 은행 혹은 기업의 후원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금융시장에서 공개적으로 자본을 모으고, 제작자들 사이·미디어 기업들 사이의 합작 투자로 서로의 위기를 줄였다. 나아가 한편의 영화 제작에 필요한 투자자금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몇 년간 영화제작계획을 내놓고 투자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상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제작자(감독)의 권한이었던 영화제작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했다. 각본 공모에서 기술 채용, 배우선정, 촬영 및 편집 과정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투자자들(심지어 일반 소비자까지)은 이것을 지켜보며 최종편집과정까지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의 효과는 분명히 드러났는데, 흥행에 실패(과거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명백한)해도 영화 자체의 수익구조는 보장되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소득이 생긴 것이다. 금융적 소득. 이렇게 문화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상품의 포장, 기업의 이미지 제고에 소요되는 잔여적인 것으로 밖에 보지 않았던 기업으로서는 광고산업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산업 자체의 지위에 대해 다시 고려해야 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혹은 이를 지향하는)들의 관심이 특별한데, 이것이 이미지 재고 차원을 넘는 것임은 분명하다. 앞서 대중문화의 질식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문화시장 자체가 빈약했던 80년대 이전에는 한국의 재벌조차 문화산업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TV 광고시장이 성장하고 각종 가전 시장이 커지던 1980년대 삼성, SKC, 대우, 현대 등 재벌 기업들이 문화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가전제품 등 단순히 하드웨어의 판매 촉진을 위해 뛰어든 것이었는데, 상황은 단번에 역전되었다. 1987년 3저 호황에 힘입어 문화산업의 내수시장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급증한 비디오 유통시장이 이를 단적으로 반증했다. 이렇게 국내 문화산업의 시장규모가 확대되자 이들 재벌들이 만들어 놓은 유통조직을 이용하여 미국 영화사의 직접 배급이 시도된다. 1988년 UIP 영화직배로 시작되는 유수의 영화 직배회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과도한 경쟁으로 영화 판권료로 급등하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재벌들은 국내 영화 제작 직접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광고시장으로 이미 멀티미디어 산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데다 직접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1992년 삼성이 [결혼이야기]에 직접 투자하면서 이는 본격화되는데, 직배와 금융실명제로 적절한 투자자를 찾지 못했던 충무로에게 이 같은 지원은 단비 같았다. 이를 계기로 상당한 흥행실적을 올리면서 산업으로써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즈음은 동시에 영상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있던 해이기도 하다(1995). 그 해에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던 영화업이 산업으로 분류됨에 따라 금융자본에게도 투자의 길이 열렸다. 창업투자회사는 영화산업의 자금회수기간이 빠르고(길어야 1년) 막대한 이윤회수가 가능하다는 이점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는데, IMF 관리체제 하에서 재벌들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도 창업투자회사는 투자를 꾸준히 늘렸다. 이런 투자들을 기반으로 충무로는 헐리우드와 비슷한 수준의 재미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에 새로 개정된 종합유선방송법은 한 프로그램 제작회사가 다 채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외국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면서 국내 혹은 국외 미디어기업들 사이에 수직적 합병(투자)의 기회를 연 것이다. 이때 [그 섬에 가고 싶다](1992)에서 시작한 해외자본의 직접 투자를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영화제작에 대한 직접투자는 물론 영화제작사에 대한 해외자본의 투자도 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한·중, 한·일 공동출자에 의한 영화제작도 늘고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외자본의 직접 투자 비율도 조금씩 늘고 있는데, 2002년 한해에만 세편의 영화가 해외 자본으로 제작을 마치거나 계약을 맺었다. 더불어, 문화산업의 소비 유통망-네트워크에 대한 해외자본의 투자도 확대되고 있는데, 전국의 여러 멀티플렉스 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플렉스'는 일본 소니의 계열사 투자를 받아 시작한 것이고, 세계적인 거대 미디어 그룹인 타임워너가 우리나라 케이블 TV 망에 관심을 가지고서 조금씩 투자를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문화산업, 특히 영화산업의 경우 문화상품 자체의 생산성 논리가 제기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흥행 참패가 몇몇 투자사의 어려움으로 이어지자, 영화투자자금이 물밀 듯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일었는데, 직후 영화산업의 거품을 빼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정확한 시장조사와 불필요한 마케팅비, 제작단가 등 거품을 줄여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가 이미 산업이므로 과거 전적으로 감독에 의존하던 것을 산업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체질을 바꾸자는 뜻이다. 또한 영화제작과정에서 투자자들의 권한 역시 대단히 제고되었는데, 투자자들은 생산관리자가 매일 작성해 올리는 보고서를 보면서 촬영 진행도, 감독과 배우의 컨디션, 제작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들으면서 추가투자 여부를 결정하면서, 예산이 과도하게 넘거나 영화의 질(흥행성)을 떨어뜨릴 만한 위기가 발생하면 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영화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투자를 유도함으로써 안정적인 영화제작기반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흥행에 참패했지만, 과거처럼 막대한 손해를 입지는 않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상황까지 발전한 것이다. 물론, 영화산업에 한정되는 문제겠지만, 영화산업이 문화산업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생각할 때 이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이제 문화산업이 대상으로 하는 모든 컨텐츠의 권리는 투자자의 권리로 제한될 것이다. 영화자체의 작품성보다 영화의 마케팅이 더 중요해지고, 제작사의 마케팅과 배급 망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다. 흥행수입의 도박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영화의 오락적 기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대중의 소비패턴 변화는 이를 더욱 강하게 보증할 것이다. 영화 밖의 수입(공동투자 등등에 따른 각종 금융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예술로서 영화보다 산업으로서 영화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이에 따라 예술로서 영화는 점점 더 초라해질 것이다. 언제 철수할지 모르는 투자자들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이런 경향을 강하게 할 것이고, 뜻하지 않은 이유로 이들이 갑작스럽게 철수해 버리면 한국 영화는 그야말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점점 영화제작의 투명성이 제고되고, 모든 컨텐츠의 권리는 더더욱 투자자의 권리로 제한될 것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악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화시장 개방에 맞서는 전략을 다시 사고하기 위해 오늘날 서비스 부문에서는 투자가 무역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띄는데, 최종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소비' 규범을 중심으로 동질화되어감에 따라 서비스의 국제화 과정이 용이해진데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서비스의 제공을 위해 조직되었던 대규모 인프라들이 자유화 및 탈규제 운동으로 투자제한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일하게 직접 소비 시장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막무가내식 교역 확대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까지 추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문화산업의 경우 이러한 곤란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언어와 문화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사업을 확대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모험이고 기회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은 대단히 약한 편이었다. 한국 문화산업의 콘텐츠 부족도 문제지만 문화상품 하나 마땅히 소비할 수 있는 기반이 약하다는 사실도 문제다. 따라서 집중된 자본으로서는 문화산업의 속성상 문화시장 자체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할 수 있다. 사실, 스크린 쿼터 등 자국 문화산업의 성장을 위한 몇 가지 제도들은 지금 현재 시점에서 해외자본에게 꼭 불리하다고만 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다. 이것이 문화적 이질감을 쌓는 장벽이 된다면 그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문화적 동질감(문화산업에 대한 대량소비)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서 스크린 쿼터제도 폐지를 요구한다면 그 말은 진실일 수 있다. 그래야만 어디서든 이들의 문화상품이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문화시장 개방 요구를 문화상품에 대한 선진국 '소비규범'의 확산과 이를 위한 각종 규제의 철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영화산업의 무역장벽이라는 '스크린 쿼터' 철폐는 그 중 하나인데, 역시 동일하게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 제한 역시 이들에게는 관건이다. 따라서 이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스크린쿼터' 사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동일하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게) 한국 문화산업에 대한 해외자본의 직·간접(공동)투자와 문화산업의 금융화도 문제삼아야 한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닌데, 스크린 쿼터로 지킨(혹은 지키려는) 우리의 문화는 무엇인가가 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영화 50%, 우리 음악 70%라는 현실은 결코 낙관적인 것이 아닌데, 앞서 잠시 지적했듯 이 말은 거꾸로 우리 영화와 음악이 헐리우드와 동등한 수준의 오락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탈 노동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구속되어 노동권이 더욱 박탈당하는 사회에서, 실질적인 여가의 실종과 끝 갈데 없는 소비가 이를 대신하는 사회에서, 소비를 조직하고 신용으로 얻어 쓴 소비를 갚기 위해 더욱 강요된 노동을 해야하는, 이 과정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오락으로서 문화가 우리의 문화라는 것은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오늘 한국의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성격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사고하기 어려운데, 이미 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미국)자본주의의 주체화 양식에 대한 비판과 동시적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사고해야 한다. PSSP
아프리카 위기의 세계체계적 맥락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훌륭한 해답들 중 하나는 197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를 덮친 위기의 본질, 그리고 위기에 대한 헤게모니적 권력 즉 미국의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는 동시에 이윤율과 정당성(legitimacy)의 위기였다. 이윤율의 위기는 주되게는, 일반적인 기업들 특히 공업 회사들에 대한 경쟁적 압력이 범세계적으로 강화된 탓인데, 이는 1950년대~60년대 들어 세계 무역 및 생산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성의 위기는 이윤율의 위기로부터 발생했다. 이같은 팽창으로 인해 더욱 희소해지는 인적, 물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면서, 1950년대~60년대에 무역과 생산의 범세계적 확장을 개시·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책 및 이데올로기 ― 일반적인 용법에 따르자면 이른바 케인즈주의 ― 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반(反)-생산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당성의 위기는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의 도전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이 의존했던 강제력의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증가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위기에 대한 미국의 최초의 대응 ― 베트남전 철수와 중국에 대한 개방, 그러나 국내외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지속적 고수 ― 은 그것을 악화시킬 뿐이었고, 미국의 권력과 위신의 급격한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추락과 불가분이었던 것은, 미국 헤게모니 아래서 개시된 '발전 프로젝트(development project)' ― 필립 맥마이클의 용어 ― 의 성과에 대한 광범한 각성(특히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진다)이었다. 이것은 제3세계에서 경제적 조건들의 악화에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 세계적 위기가 제3세계의 경제적 전망들을 향상시킬 것처럼 보였을 때, 여기에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제3세계 지역의 교역 조건 ― 특히, 하지만 배타적이진 않게, 산유국들에게 ― 은 향상되었다. 게다가, 제1세계 국가들에서 이윤율의 위기는, 서구 은행들과 '영외'(領外)의 금융시장들에 정기적으로 위탁되었던 석유 수익들의 인플레와 결합되어, 과잉 유동자본을 창출했다. 다음으로, 이러한 과잉 유동자본은 제2세계와 제3세계 국가들 ― 아프리카 국가들 또한 포함된다 ― 게 매우 유리한 조건의 대부자본 형태로 재순환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초반 남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제3세계 지역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표 Ⅱ> 참고). 그러나 바로 이 시기는, 제3세계 국가들이 더 이상 '발전 프로젝트'를 견딜 수 없게 된 나머지, 새로운 국제경제질서(NIEO)의 설립을 통해 세계적 정치경제로의 통합 조건을 재협상하려 했던 때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분명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첫째, 최고의 경제 성과를 보이던 제3세계 지역들에서조차, 경제적 진보가 탈식민화와 일반화된 산업화 혹은 근대화가 불러일으킨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다는 것. <표 Ⅳ>와 <표 Ⅴ>가 보여주듯이, 제1세계와 비교해볼 때, 모든 제3세계 지역들의 산업화의 정도(GDP에서 제조업 비율로 계측된) 및 도시화의 정도(전체 인구에서 비농촌인구 비율로 계측된)는 1인당 GNP 성장 정도에 비해 훨씬 높다. 바꿔 말하자면, 제3세계 국가들은 점증하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사회적 비용을 경제적인 이득 ― 제1세계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거둬들일 수 있다고 예상하였던 ― 없이 감내했던 것이다. <표 Ⅳ> '세계적' 평균 대비 지역 GDP에서 제조업 백분율 자료: <표 Ⅰ>과 같음. (*) 표시 지역은 중국을 포함. <표 Ⅴ> '세계적' 평균 대비 지역 비농업인구 백분율 자료: <표 Ⅰ>과 같음. (*) 표시 지역은 중국을 포함. '발전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한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연관되는데, 경제성장이 제3세계의 빈곤을 경감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1970년에 세계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R. McNamara)는, 저소득국가에서 높은 GNP 성장률의 달성이 유아 사망률의 '상승', 예상수명의 '하락', 문맹률의 '확대', 실업의 '토착화와 증가', 그리고 소득과 부의 분배의 '심각한 왜곡' 등의 문제를 남겼음을 인정했다. 1970년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제3세계 국가들의 소득이 절대적으로·상대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국가 인민들의 복지는 느린 속도로 향상됐거나 아예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제1세계와 비교해 볼 때 제3세계 지역들 혹은 최소한 몇몇 지역들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이, 널리 인지된 정치 권력 차원에서 세계적 균형의 이동 ―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에서의 패배, 1973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곤란들,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의 UN 안보리 가입 등에 뒤이어 발생한 ― 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제1차, 2차 오일쇼크는 부분적으로 권력의 세계적 균형에서 인지된 변화의 효과이자 동시에 원인이었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자본의 남-북 흐름이 증가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NIEO에 대한 제3세계의 요구는 이렇게 진행 중이던 자원의 재분배를 확대함과 동시에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1980년에 아프리카 국가원수들이 서명한 라고스 계획은 여전히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로부터 나타난 제3세계 정부들의 세력화라는 관점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또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상황들을 반영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부분적으로 세계 무역과 생산의 경기후퇴의 효과였는데, [이는] 1975년 이후 대부분의 비산유국 제3세계 국가들의 무역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력과 위신의 지속적인 추락에 맞서 미국이 취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응이었다. 이러한 추락은 1970년대 후반 이란혁명, 석유가격의 가파른 상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미국 달러의 신인도에 대한 새롭고도 심각한 위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터 행정부의 말년 ― 레이건 하에서는 더욱 결의에 차 ― 에 미국의 정책에 대담한 변화가 발생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의 패인이 된 지상전 따위를 회피하기 시작했고, 대신 대리전(니카라과,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치루거나, 상징에 불과한 가치들을 둘러싸고 대단치 않은 적들과 대치하거나(그레나다, 파나마), 혹은 하이테크 전쟁기계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공중폭격(리비아)을 진행했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의 단계적 확대에 박차를 가해, 후자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경제 정책들을 수정 ― 화폐공급의 급격한 긴축, 높은 금리, 부유층에 대한 감세, 자본주의 기업 활동에 대한 잠재적으로 무제한적 자유 등 ― 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이는 국내적인 뉴딜의 유산 뿐만 아니라 특히 1949년 트루만이 명목상 발주한 빈국을 위한 페어딜(Fair Deal) 유산까지 청산한 것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정책들을 통해서, 미국 정부는 전세계의 자본과 공격적인 경쟁을 시작하고, 그리고 국제수지에서 점증하는 무역 및 자본 거래 적자에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실질 금리의 급격한 상승과, 세계적인 자본 흐름의 방향에 거대한 역전을 야기하였다. 그래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세계 자본유동성과 직접투자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미국이, 1980년대에 세계의 주요 채무국이자 동시에 해외자본의 대규모 수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경제적] 역전의 규모는 국제수지에서 자본 거래의 변화로부터 측정될 수 있다. […] 이것은 역사적인 비율의 역전인데, 즉 세계 전역으로부터 자본을 추출할 수 있는, 이례적이고,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미국 정치경제의 역량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의 경제적 번영에서의 동시대적 역전 및 제3세계 지역의 경제적 번영에 있어서의 분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은 북아메리카의 유효수요와 투자 모두를 팽창시켰고, 반면에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을 수축시켰다. 동시에, 이러한 방향전환으로 인해 미국은 무역수지 상의 거대한 적자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북아메리카의 기업들로서는 생산해 봐야 이윤을 남길 수 없게 된 제품들을 수입하자는 팽창하는 수요를 창출했었다. 경쟁압력이 제조업 분야에서 특히 격렬해지면서, 이러한 수입상품들은 농업분야보다는 산업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반된 효과들은 세계의 지역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분할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저렴한 제조업 상품들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수요 팽창의 몫을 다툼에 있어 강한 우위를 갖고 있던 지역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들은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경향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국제수지의 향상이 세계금융시장에서 미국과 경쟁할 필요를 경감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수요 팽창에 따른 몫을 다투는 경쟁에서 거의 우위를 갖지 못한 지역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들은 국제수지 상의 곤란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세계금융시장에서 미국과 경쟁하는 가망없는 위치로 내몰렸다. 내가 볼 때 이러한 사실들은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1980년대에 완전히 고착된 제3세계 지역들의 번영의 분기의 일차적 원인인 것 같다. 이차적이긴 하지만 그 분기의 중요한 원인은 군사 및 금융의 영역들에서 미국의 정책들의 변화에 수반되었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의 등장이다 ― 존 토예(John Toye)는 매우 적절하게도 그것을 발전이론 안에서의 '반혁명'이라고 일컬었다. 버그 리포트와 아프리카에 관한 일련의 세계은행 보고서들, 뿐만 아니라 NPE까지도, 이러한 반혁명의 결정체였다. 지난 30년간의 발전친화적 체제는 공식적으로 청산되었고 제3세계 국가들은 전혀 다른 게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 즉, 세계시장의 격렬한 경쟁이라는 삭풍에 자신들의 국가경제를 개방할 것,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업의 운동과 활동에 자신들의 사법권 내에서 가능한만큼 거대한 자유를 창출하기 위해 여타 국가들 및 제1세계 국가들과 경쟁할 것.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러한 '구조조정'이라는 새로운 전략은 불신받는 국가주의적 모델 ― 지난 30년간 우세하였던 ― 에 대한 해독제로서 제시되었다. 실제에서, 그 치료는 종종 질병보다도 더욱 나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발전이라는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음에도, 새로운 전략은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에 따라 세계적 규모에서 창출된 축적의 새로운 조건에 관한 자신들의 경제학을 수용하도록 제3세계 국가들을 설득하는데 (부지불식간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워싱턴 콘센서스는 제3세계 지역들의 번영의 분기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비교 관점에서 본 아프리카의 위기 그러나, 왜 동아시아 ― 그리고, 그보다 덜하지만, 남아시아 ― 가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비해, 그리고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비해 더욱 발전하였는가? 적어도 그 해답의 일부는 바로, 1970년대 동안, 동아시아에 비해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해외 자본에 더욱 종속적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이 추진력을 얻음에 따라, 이러한 종속은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1982년 멕시코의 채무불이행 사태로 인해 이전의 [발전] 방식이 이제 어떻게 실행불가능하게 되었는지가 극적으로 드러나자, 197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그리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험했던 자본의 '홍수'는 1980년대의 갑작스런 '가뭄'으로 전환됐다. 아프리카의 경우, 말 그대로 사막의 가뭄(Sahelian drought)은 사태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멕시코 식의 위기가 사막의 가뭄 이전에 아프리카를 강타했고, 연이은 자연재해와 인재(人災)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심각할 정도로 감소시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해외자본에 대한 거대한 종속은, 1980년 무렵 발생한 세계-경제 환경들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남아시아나 동아시아에 비해 보다 취약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새로운 환경 하에서,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1980년대 이전보다 더욱 훌륭한 경제적 발전을 달성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및 특히 아프리카의 붕괴와 비교할 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적 맥락의 변화가 왜 제3세계 지역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균등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지역들을 종별적인 식민지 이전 시대, 식민지 시대, 식민지 이후 시대들의 유산들 ― 상이한 변화 대처 역량들을 부여했던 ― 을 갖는 지리-역사적 '개별성들'(individuals)로 관찰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에 대한 우리의 에세이들[{아프리카의 정치경제론}]의 주된 약점들 중 하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여타 제3세계 지역들이 물려받은 것들과 비교할 때, 식민지 이전 시대 그리고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천연 자원에 대해서도, 정치-경제적 형세들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3세계 지역들 간의 관계가 확연하게 비-경쟁적이었던 시기, 그러니까 대략 1970년대 초반에도, 이러한 상대적인 유산들이 물론 중요하긴 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처럼 [제 3세계 지역들 간의] 관계가 압도적이고 점증적으로 경쟁적이게 되었던 때보다는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나에게 더욱 익숙한 지역인 동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우리의 분석의 대상이 되는 시기에 각각 최상/최악의 경제 행위자였던 ― 두 지역에 대한 몇 가지 논의들을 통해서 요점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칠 것이다. 세 가지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연관된 질문들: 노동, 기업가 정신, 그리고 국가-경제 및 민족-경제의 형성. 저발전된 지역의 특징은 '무제한적인 노동력의 공급'이라는 아더 루이스(Arthur Lewis)의 고전적인 주장은 아프리카에는 결코 실제로 들어맞지 않았고, 이 지역의 노동력은 언제나 공급부족 상태였다. 식민지 이전시기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서양 세계와의 주요 상호작용―총기류의 수입과 노예들의 수출―는 그러한 교류 이전에 존재하였을 천연자원에 대한 노동력의 구조적 결핍을 분명히 악화시켰다. 에릭 울프(Eric Wolf)가 지적했듯이, 심지어 노예 무역이 개시되기 전에도, '아프리카는 … 인구가 급증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 희귀한 요소는 … 땅이 아니라 노동력이었다.' 직·간접적으로 노예들의 포획과 수출과 연관되었던, 계속된 인구감소와 생산활동의 와해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들에서 식민지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낮은 인구밀도와 소규모 지역시장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식민주의 하에서 노동력 공급은 확실히 확대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에 대한 착취가 증대함에 따라 노동력 수요도 증가했다. 대규모의 잉여인구는, 공식부문들에서 얻을 수 있는 [고용]조건으로 쉽게 직업을 구할 수 있었던, 도시 지역에서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노동인구 중 사적·공적 고용주들이 자신들의 기업조직에 안정적인 방식으로 통합하기 위해 선택한 소수에게만 유효했다 ― 즉, 그것은 '내부 노동시장'의 조건들이었다. 이 부문에서 노동력의 잉여가 분명 존재했을지라도, 일반적이고 지속적으로 수요 부족에 시달리던 '외부' 노동시장의 공급을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건들 하에서만 그랬다. 탈(脫)식민화 기간 및 그 후, 노동력의 심각한 결핍은 일부는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남아있던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에 대한 수요에 의해, 그리고 다른 일부는 새롭게 독립된 국가들의 근대화·산업화의 노력들에 의해 재생산되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구조적인 노동력 결핍이 노동력 잉여로 돌아선 것은 1980년대의 몰락 이후였다. 도시의 '내부노동시장'의 붕괴와 도시-농촌 간의 소득 격차의 감소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국가들에서 1980년대에 이주민들이 급증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하다.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우 연간 6-7%의 성장률을 보였고, 농촌지역과 비교해서 오직 2% 정도 앞설 뿐이었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완전히 대조적으로, 식민지 이전과 식민지 시기로부터 동아시아는 다른 어떤 제3세계 지역들에 비해 루이스의 이념형에 보다 근접한 저발전의 조건을 물려받았다―확실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동 또는 북아메리카에 비해 훨씬, 그리고 최소한 남아시아만큼 말이다. 동아시아의 구조적인 천연자원 대비 노동력의 풍부함은 다양한 기원들을 갖는다. 부분적으로, 그 지역에서 쌀농사라는 물질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분적으로, 16-17세기 서양세계와의 상업 및 여타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인구 폭발'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산업들에서 노동집약적 기술들의 퇴화와 점진적인 포기에 기인하였는데, 그것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유럽중심적 세계 체계의 구조들 내로 그 지역이 통합됨에 따라 촉진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그 지역에서 천연자원 대비 저렴한 노동력의 구조적 풍부함은 서양의 산업화에서 전형적이었던 자본집약적, 자원집약적 기술들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에 일반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유지되었다. 노동력 잉여가 흡수되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노력들이 더욱 노동집약적이게 되고 더욱 성공적이었던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노동력의 잉여는 제3세계 지역들 중 가장 풍부했다. 특히, 중국에서, 일관된 경제성장은 팽창의 중심으로의 이주하는 흐름―절대적 숫자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유사한 과정들을 훨씬 능가하였던―의 격화와 관련되었다. 이 첫 번째 차이점이 결정적인데, 왜냐하면 1980년대 제3세계 지역들 간의 경쟁의 격화라는 조건에서 풍부하고, 유연한, 그리고 저렴한 노동력 공급은 새로운 정세의 비용들을 감내하기보다는 이익들을 거두려는 국가의 역량에 있어서 주요한 결정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 지역 내에서 자본축적을 위한 노동력 공급을 동원할 수 있는, 이를 통해 세계 시장과 세계적 유동성에서 자신의 몫을 확대하려는 토착적인 기업가 계층의 존재였다. 동아시아에게는 행운일 것이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게는 불운일 것인데, 과거 식민지 및 식민지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지역의 기업가 자원들의 불일치는 동아시아에게 훨씬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실상, 동아시아의 자질은 진정 예외적이었다. 그 지역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한 기업 네트워크들은 해외의 화교들로부터 배태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 지역을 지배해온 네트워크였다; 19세기 후반기 동안, 제국주의를 방패 삼아 성장했던 서양과 일본의 라이벌들에 의해 퇴색될 때까지, 이는 계속 유지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민족주의의 확산은 동아시아의 모든 부류의 초민족적 기업가들이 확장되는 것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온실과 같은 방식으로 민족적 수준에서 새로운 기업가 계층의 형성을 유도했다. 게다가, 천연자원 대비 구조적 노동력의 풍부함은 무역과 산업에서 그러한 계층의 등장을 위한 호의적인 환경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구(新舊) 기업가 계층들이 지역적인 노동력 공급을 국경 내외에서 동원하여 이윤을 낼 수 있었던 엄청난 기회들은 정확히 1970년대의 위기와 그것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풍부하고 유연하며 저렴한 노동력 공급을 제조업 생산품들에 대한 미국의 확장된 수요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강력한 지렛대로 전환해 냈을 때 도래했다. 이와 같은 어떤 것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관찰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지역의 천연자원 대비 노동력의 구조적 결핍은 무역과 산업에서 기업가 계층의 부상과 재생산에 대해 불우한 환경을 만들었다. 식민지 이전 시기에, 노예 무역은 곧장 노동력과 기업가의 결핍 모두를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부족한 기업가 자원을, 프레드릭 레인(Frederic Lane)의 용어를 빌자면, '보호-생산 산업'('protection-producing industry')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보호-생산 활동들이 식민지 행정부서들과 군대들에게 인수되었는데, 무역과 생산에서 기업가적 기능들은 외국인들에 의해 지배적으로 수행되었다―사실상 아프리카인들은 종종 기업운영으로부터 제외되었다. 베이츠(Bates)가 지적했듯이, '전체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빠르게, 활발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식민지 시장들을 위한 제품 쪽으로 선회했'고, 토착 농업사회들의 구성원들은 심지어 사적 소유권의 대의를 옹호해야만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지역의 자본주의의 주요한 행위자들 ― 식민지 권력의 정부들 ― 은 '공동'(communal) 소유권을 지지하고 강화함으로써 종종 이러한 경향들을 방해했다. 독립 후, 경제적 민족주의 ― 자본주의적이든 반(反)자본주의적이든 간에 ― 는 새로운 아프리카 기업인들의 수를 보충하지 않고 대다수의 비-아프리카 소기업들을 쫓아 버렸다. 이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초기의 경쟁적인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유연하고 저렴한 노동력 공급의 구조적 결핍 때문 뿐 아니라, 설사 유연하고 저렴한 과잉노동력이 존재했다손 치더라도 이윤을 창출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역 기업가 계층이 희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몰락 이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나타난 유연하고 저렴한 노동력 잉여의 엄청난 풍부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토착 기업가 계급의 성장에 보다 호의적인 환경을 창출하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당분간, 국내 시장들 내의 날카로운 축소를 자극함에 따라, 그러한 몰락은 그러한 발전의 전망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악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동아시아의 경쟁적 유리함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불리함은 국가-형성과 민족-경제적 통합의 범위들에서 물려받은 각각의 매우 상이한 유산들에 의해 합성된 것이다. 널리 알려진 통념과는 달리, 18세기 전(全)기간 동안 동아시아는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느 지역들 보다 앞서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그 다음 세기 동안, 이러한 초기의 우세는 국가들과 민족경제들의 중국 중심적 체계가 유럽 중심적 체계의 구조 내부로 종속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중심적 체계의 역사적 유산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양 체계의 구조들 간의 이종교배의 과정을 유도하였다. 즉, 2차 세계대전 후 (그리고 특히 1970년대의 위기 이후), 자본 축적의 특히 유리한 조건들이 창출한 결과였다. 동아시아와 첨예하게 대조적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식민지 이전 그리고 식민지 시기로부터 생존가능한 민족경제들 또는 강건한 민족국가들의 건설을 위한 여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정치경제적 형세를 물려받았다. 모든 난점들에 대항하여 이러한 것들을 구축하려는 시도들은 독립 당시에 그들이 향유하였던 상당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에, 마흐무드 맘다니(Mahmood Mamdani)가 강조했듯이,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의제는 세가지 기본적 과업들로 압축될 수 있다: '시민 사회의 탈인종화(deracializing), 토착적 권위의 탈종족화(detribalizing), 그리고 불균등한 국제관계라는 맥락에서 경제의 발전'. 모든 정치적 신념 중에서 민족주의 체제는 시민사회의 탈인종화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거뒀지만, 농촌 권력(rural power)의 탈종족화에 대해서는 거의 해결한 것이 없다. 맘다니의 관점에서, 이것은 '왜 탈인종화는 유지될 수 없었으며 왜 발전이 완전히 실패하였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 논문이 전개하는 주장에 따르자면, 만약 아프리카 국가들이 탈종족화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마 경제적으로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생존가능한 민족국가들을 창출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지배계급들이 식민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사회구조를 탈종족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은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 때문에 창출된 격렬하게 경쟁적인 환경에서 또 다른 취약점을 구성했다. 우리는 두 지역의 발전 잠재력 사이의 불일치는 위기 이전에, 미국이 냉전 초기 단계에 자신의 동아시아 동맹국들에게 부여한 특혜 조치에 의해, 확대되었다라는 점을 추가해야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강조했듯이, 이러한 특혜 조치는 그 지역의 경제적 르네상스의 '이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은 '일본의 마샬플랜'으로서 기능했다. 전쟁물자조달은 '일본이 자신의 세계를 향해 산업적으로 쇄도하도록' 하였다. 1950-70년의 20년 동안, 미국은 일본에 연평균 5억 달러를 원조하였다. 남한과 대만에 대한 원조는 더욱 액수가 컸다. ... 게다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도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보호주의, 국가 개입주의, 그리고 심지어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의 배제를 묵인하면서, 미국이 자신의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수출품들에 대해 미국 국내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허용하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개시되자, 냉전은 다가올 다음 20년간의 경쟁적 투쟁에서 동아시아가 성공할 기회들 그리고 아프리카가 실패할 기회들을 더욱 증대시켰다. '불운'과 '올바른 통치'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워싱턴 컨센서스―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발전 이론들의 변용들―의 교의들과 반대로, 시공간을 초월한 그 자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 긍정적인 것이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고, 혹은 시기가 다르다면 같은 지역에서도 그럴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인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는, 상이한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최근에 매우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스털리는 1990년대 초반 '올바른 정책이냐 행운이냐?: 국가의 경제 성과와 일시적 충격'이라는 제목의 공동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개별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그 정부들이 같은 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훌륭한 경제 성장은 '올바른 정책들' 보다는 '행운'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최근의 논문에서, 이스털리는 이러한 주장을 가일층 전개하여, 1980년 이후 발전중인 국가들의 분명한 '정책변수들의 개선'―다시 말해, 워싱턴 컨센서스의 의제에 대한 더한 집착―이, 개선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 상황의 심각한 악화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그 국가들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의 평균값은 1960-79년간 2.5%였던 것이 1980-98년간 0%로 하락하였다. 이스털리는 워싱턴 콘센서스에 의해 지지되는 정책들의 장점들에 대해 분명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책들이 약속한 것들의 실패에 대하여 그가 제공하는 두 가지 주요 설명들은, 워싱턴 콘센서스의 포교자들이 유지하고 있는 그 정책들이 '올바르다'라는 생각에 대해 어떤 완벽한 관점에서 통렬한 비판을 구성한다. 첫째, 그는 그들이 수확체감에 종속되어 있다라고 제안하고 있다: 즉, 그 정책들을 특정 국가에 의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추구될 때, 또는 점증하는 수의 국가들에 의해 동시에 추구될 때, 그러한 정책들은 '좋은' 결과들을 산출하기를 멈춘다. 두 번째, 그리고 이스털리의 견해에서 보다 중요한 설명은 바로 '세계적인 금리의 상승, 발전도상국가들에서 외채부담의 증가, 산업 세계에서 경기후퇴, 숙련-편향(skill-bias)의 기술적 변화 등과 같은 범세계적인 요인들이 아마도 발전국가들의 경기침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아프리카 국가들을 위해 정식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목적에서 보자면 이러한 이중적 설명에서 분명한 사실은 버그 보고서와 NPE에 의해 제시된 것이라기 보다는 라고스 계획의 기저에 깔려 있는 아프리카 위기에 대한 진단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 설명은, 만약 그것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프리카 지배계급들의 '나쁜' 정책들과 '허약한' 통치력은 아프리카 위기의 주요한 원인들이라면서 세계은행과 NPE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것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오히려 그것은, 라고스 플랜의 조인국가들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의 위기가 세계 경제의 전적으로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과정들로부터 주로 기인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구조적 과정들이 이스털리의 첫 번째 설명과 대략 일치하는데, 바람직한 속성들 ― 국부, 복지 그리고 권력 등과 같은 ― 과 결합된 정책들과 행위들은 아마도, 그리고 종종, [자본의] '구성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한 일반화는 자칫하면 자신의 원래 목표들을 잠식하게 되는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반대로, 세계경제의 정세적 과정들은 이스털리의 두 번째 설명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구조적 과정들이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를 해결해나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1980년 무렵 세계-체계 환경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일차적으로 그것에 대한 미국의 대응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다른 무엇보다도, 범세계적인 금리 상승의 유발,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심화,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부담의 증가와 같은 반작용이었다. 워싱턴 콘센서스의 대리인들에 의해 장려된 '정책변수의 개선'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이러한 변화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응하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미국의 권력과 부를 다시 팽창하게 하는 경향을 강화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재 <뉴욕타임즈>의 칼럼들에서조차 환영받고 있다. 이 신문의 기고자인 요셉 칸(Joseph Kahn)은 최근에 멕시코 몬트레이에서 열린 금융과 발전에 관한 UN 국제회의를 보도하였다: 아마도 중국을 제외하면, 범세계적인 시장개방의 추세로부터 가장 분명하게 혜택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으로의 엄청난 자본 유입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저축한 것 이상으로 소비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이 수출하는 것보다 많이 수입할 수 있게 한다. '세계화의 추세는 잉여자본이 주변부 국가들로부터 중심국가, 즉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조지 소로스는 말했다. 그는 몬트레이 회의에 참석하여 금융 발전을 위해, 특히 사적 자본의 증발에 대비하여 270억 달러의 풀을 만들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도자들에게 설득하려 하였다. … '미국 정부의 견해는 시장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라고 소로스씨는 말했다. '나의 견해는 시장은 거의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이고, 그들은 제대로 규제되어야 한다'. 이른바 세계화의 희생자들이라면, 무엇보다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인민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시장은 거의 언제나 옳지 않고, 따라서 그들은 올바르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몇몇 국가들 또는 지역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시장이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 반대로 다른 국가/지역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비용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크게 보아 이스털리와 그의 공저자들이 '행운'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본 논문에서 발전된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상 어느 때이건 나타나는 행운과 불운은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의 위치들이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세계 체계 내부의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과정들과 관련되는 특정한 역사적 유산들에 깊은 근원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프리카의 비극은 진정 엄청난 불운들 때문이다―즉, 1970년대의 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 인해 격렬하게 경쟁적으로 변모한 세계적 환경에서 엄청나게 불리한 조건을 갖게 한 식민지 이전 그리고 식민지의 유산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미국의 책임들이나, 새로운 조건들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불운이나, 둘 다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통해 1980년대의 몰락이 더욱 심화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몰락의 재앙인 사회적 결과들을 경감하는 데 실패했던 아프리카 지배계급들을 면죄해주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세 가지 가장 분명한 실패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아프리카의 지배집단들이 1980년대 그 지역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던 [세계-]체계의 환경들의 변화를 막아낼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지역의 이전 경제성장 패턴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보다 현실주의적이었다면 그들은 그 몰락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는 더욱 거대한 억제로 나아갔어야 했다―단지 확실한 소비 진작뿐만 아니라, 특히, 체계적 상황의 변화에 관한 그 지역의 취약성을 확대했던 외채의 추정수준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집단적 자급자족이라는 라고스 플랜의 요청은 올바른 목표였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너무 늦게 나왔고, 결국 아무런 행동도 독려할 수 없었다. 둘째, 일단 변화가 발생하였고, 아마도 세계은행에 의해 제시된 조건들에 따라 외채[상환일정]을 재조정하는 것보다 채무 불이행이 타격이 적었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 그 몰락은 더욱 심각했겠지만, 워싱턴 콘센서스의 대리인들에 의해 부과된 '올바른 정책들'의 해악의 장기적인 영향들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UNPAAERD는 처음부터 아프리카에게는 나쁜 계약이었다―무엇보다도, 일단 아프리카 국가들은 계약을 지켰지만 부유한 국가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의 지배 집단들이 1980년대의 경제몰락을 대체하거나 완화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경제몰락의 영향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국부(國富)와 국가 복지 사이의 관계라는 쟁점을 제시한다. 지난 반세기 이상, 1인당 GNP로 측정된, 세계적인 부의 위계구조가 상당히 안정적이라는 점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는 거의 예외가 없는데, 저소득 국가들은 계속 가난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고소득 국가들의 경우 계속 부유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중간소득 국가들의 경우는 양자 사이에 위치한다. 동시에, 또한 [부의 위계구조에서] 각각의 층 내에서 상이한 국가들의 시민들이 향유하는 복지 수준(다양한 사회지표들로 계측된)에 확연한 편차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명백해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계적인 부의 위계구조에서 민족 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빈곤 혹은 부의 수준이 어떻든지 간에 그 국가의 시민들의 복지를 증가(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보면, 아마도 맘다니가 지지하는 탈종족화와 같은 것은 다른 어떤 전략보다도 거대한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배 집단들은 아마도 권력에 있다는 것 말고는 한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미국을 포함하여, 여타 국가들과 지역들의 지배 집단들에 비해 무엇이 그리고 얼마나 부족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와 권력의 차이들을 고려한다면, [더군다나] 그들이 한 일은 상대적으로 더 적은 것처럼 보인다. [끝]
민노당 자료실에서 퍼왔습니다. 1. 미국은 실패한 신자유주의 실험에서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인가? 2.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화의 효과와 비금융 기업의 증대된 경쟁
경제의 위기 그리고 금융화 90년대 중반이후 그리고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시장은 매우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냉전 상황에서 남한경제는 미국의 시장개방에 힙 입어 산업-무역 정책을 중심으로 수출 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내실 있는 경제 기초여건을 조성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이후 남한경제는 전세계적 자본축적의 위기, 경제불황 상황에서 자본투자를 더욱 증가시키는 전략을 선택했고, 냉전해체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보호의 해제가 맞물리면서 객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재벌 체제로 표상되는 기존의 성장전략은 (해외 차입을 통해) 자본의 과잉축적을 낳았으며, 이는 자본의 이윤율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교역조건이 악화되고 대내외적 경제상황에 악화되면서 97년 외환위기 상황에서 금융시스템이 붕괴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98년 이후 남한경제는 미국-IMF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억압되었던 금융에 자유를 부여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결과적으로 자본시장, 상품시장이 해외자본에 전면 개방·자유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추진되고 있는 경제개혁 조치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금융적 확장'을 위한 제도적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금융세계화다. 세계적 수준에서 투자,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는 미국경제의 향방에 세계경제가 매우 깊숙이 얽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금융의 세계화는 1990년대 세계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무역과 투자의 확대가 미국경제의 불황을 세계경제 전체의 불황으로 만들어버릴 조건을 만들어놓았다. 세계 각 국의 금융시장의 운동은 미국금융시장에 지독히도 종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2002년 세계경제는 광범위하고도 깊은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즉 사상최대로 미국주식시장 거품의 붕괴와 세계경제를 장기불황의 늪으로 몰아넣을지 모를 남미를 비롯한 신흥시장의 도미노 금융위기 사태에 직면해있다. 동시에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매력적이고 차별화 된 투자처라고 자임하던 남한경제도 비정상적인 성장의 거품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지난 몇 년간 남한경제는 수출과 투자의 침체, 그리고 생산자본의 수익률 하락 속에서도 저금리정책을 통한 소비거품과 부동산 거품, 금융시장의 수익률 증대를 통해 성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국민들의 소비가 신용경제의 유지에 위험스러운 지경에 도달했고,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천장부지로 치솟고 있는 실정에서 주식시장에서는 부르주아들의 심리적 저지선인 600선마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2002년 10월 초 중순) 이 때 국내외 기관투자가들과 정·재계는 호들갑스럽게 정부가 주가안정을 위해 시급히 기대(대책)를 창출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화답하듯 정부는 2002년 마지막 국회를 앞두고 노동·자본시장 관련한 개혁 법안들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노동권 말살을 포함하여 외국자본에 대한 조세권을 포기하고 교육·서비스·의료분야를 외국자본에게 개방하는 경제자유구역법 제정, 은행-보험-증권회사를 아울러 자유로운 상품판매와 겸업, 자산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방카슈랑스의 도입, 국내외 보험회사의 팽창에 장애가 되던 규제들을 풀어 영업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험업법 개정,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등에서 개인투자자들로부터 저축을 받아 간접투자를 하는 수탁회사(예:뮤추얼펀드)의 역할강화와 자산운용산업의 규제완화를 위한 자산운용업법, 노동자의 노후소득을 보장하던 퇴직금제도를 대체할 기업연금제도가 국회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민간의료보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국가가 책임지고 있는 현행 건강보험의 기능을 잠식하고, 금융의 이해에 복무하는 민간의료보험의 도입 흐름 역시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재정안정화를 운운하며 다수 의료서비스에 대해 보험혜택을 제외하여, 민간보험에 의존해야만 항상적인 질병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실상 비펀드형에서 펀드형으로의 계획전환은 생명보험사에게 엄청난 이익을 제공하고 금융시장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 뿐만 아니라 WTO 도하개발 아젠다-서비스 부분의 개방·자유화 협상{{) 2002년부터 2005년까지 WTO에 가입한 회원국가들은 금융, 법률, 의료, 교육, 시청각, 통신, 에너지 부문의 개방(대외적인 자유화)일정 및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양자간 협상인 한-일 투자협정, 한-미 투자협정,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현재 체결되었거나 체결될 예정에 놓여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경제의 금융화를 촉진하는 한편 자본의 소유권을 전적으로 보장하는 자본의 구조개혁으로서 향후 한국사회의 (나쁜 방향을 향한) 구조화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자명하다. 그리고 현 시기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경제의 금융화와 세계화에 조응하며, 친기업적·반민중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음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시장의 자유화·새로운 제도 입법 조치를 통한 소위 기관투자가의 육성에 대한 것이다.{{) 기관투자가란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저축 및 여유자금을 끌어모아, 이를 금융시장(주식과 채권)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법인형태의 투자자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연기금, 투자은행(뮤추얼펀드), 보험, 헤지펀드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관투자가의 부상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1990년대 이루어진 전세계적인 금융적 팽창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소위 사회보장기금이 기관화되어 스스로 초국적 금융자본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주가를 부양하는 장치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 이러한 국내외 부르주아의 구상속에서 사회보장체계로 불리던 의료시스템, 연금, 보험 영역의 개혁은 금융자본에게 집중된 화폐자본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적으로 사회보장기금은 민영화 과정을 통해 금융시장의 규모를 키우고, 주식시장의 호황에 버팀목이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의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막대한 부를 집중시켜주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IBRD), 미국 워싱턴과 뉴욕의 싱크탱크와 언론들이 각종 보고서를 통해 한국경제의 개혁 전망의 핵심으로 계속 지적하고 있는 연금제도의 개혁은 이들이 공을 들이는 만큼 계급적 이해가 걸려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연금제도의 민영화, 연금의 금융자본화 먼저 세계의 연금제도 개혁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적 사회보장에 유리하도록 법정사회보장을 단계적으로 제한하는 것. 둘째, 재정방식(재원조달방식)의 전환. 즉 부과방식(일정한 기간-보통은 1년-중에 지불해야하는 급여지출비용을 그 기간 내에 사회 보험료 수입에 의해 조달하며 어느 정도의 손실은 공적 재정수단으로 메워진다)은 적립방식(연금급여비의 재원을 장기간에 걸쳐 자본스톡을 형성시켜 조달하는 방식)으로 대체된다. 셋째, 급여방식의 변화추세. 일정 시점 이후 참여자에게 '정해진 금액의 퇴직 급여'를 제공하는 확정급여형에서 노동자 개개인을 위한 개인 계정에 '정해진 금액의 기여'가 이루어지는 확정기여형으로 점진적인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기업의 단기적인 이윤추구 이해에 조응하는 반면, 사회보장체계의 민영화, 적립재정방식은 거대 기관투자가에게 직접적으로 유리하다. 같은 맥락에서 현 정부가 추진중인 연기금 개혁도 신흥시장의 육성을 위해 국제기구가 제시한 연금제도 민영화 모델인(공적연금-기업연금-개인연금으로 구성되는) 3층 연금모델{{) 이들이 권고하는 모델은 이른바 '3층 보장체계(Three Pillars)'라 불리는 것이다. 이 모델은 기존의 공적연금이 담당하던 소득재분배와 저축기능을 다음과 같이 분리시켜서 정리한다. 1층(1st pillar)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는 기초연금으로 국가가 담당해야하는 공적연금의 역할과 범위를 극빈자들의 최소생계비 보장 수준에 한정하는 것이다. 2층(2nd pillar)은 저축기능을 담당하는 민간 강제적용연금이다. 3층(3rd pillar)은 자발적인 민간연금 및 저축가입이다. 이 모델에 대해 부르주아들은 예측불가능한 위험을 3층으로 나누어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전사회적으로 인구노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적자가 증폭하였기 때문에 금융시장이 과거 국가의 역할을 분점하여 효율적으로 자본을 재분배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연금의 금융시장 유입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전제인 완전 적립식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남한의 연금개혁정책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연금체계 민영화, 연금의 금융자본화 경향을 노골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 최근 남한사회의 연금개혁은 기업연금제 도입, 개인연금제도의 활성화, 그리고 국민연금의 투자자유화 조치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그 방향은 퇴직소득의 안정적 보장이라는 사회보장적 차원보다는 금융시장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되며, 공적연금제도의 역할 축소와 사적 연금제도(기업연금, 개인연금)의 활성화로 나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국민연금의 경우 1999년 전국민을 가입대상으로 확대하면서부터 기금운용위원회를 설치하여 기금운용의 방향을 금융시장 투자자금으로서 효율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후 연기금 주식투자 비율과 해외투자비율은 계속 확대되었으며, 상품에 대한 규제도 지속적으로 완화시켜 벤쳐캐피탈, 파생상품과 같은 위험성 자산으로 투자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한편 개인연금의 경우 1994년부터 시행되어 2001년 2월부터 주식투자 등 선택이 자유로운 개인연금상품의 판매가 시작되었고, 정부의 입·출입 세제혜택 등에 힘입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시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기업연금은 정착과정에서부터 매년 1조∼5조원씩 주식시장에 투자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연금의 금융화 경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동시에, 전체 연기금 체계에서 사적 연금의 비중이 확대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대부분 '사외적립'되어 있지 않은 퇴직금을 '기업연금'으로 전환시켜 (다층체계 중) 2층 구축의 출발점으로 삼고, 개인연금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편 이러한 추세는 세계은행(IBRD)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연금제도 개혁안이 제기한 방향과 크게 맞닿아있다. 이들 국제기구는 공적연금제도가 급속한 노령화와 과도한 연금급여, 그리고 수익률 저하에 따른 재정 불안정 등으로 인하여 변화되어야 하는데, 적립재정방식이든 부가방식이든 기존의 공적 연금체계가 노후 소득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가정에 따르면 선진국들이 인구노령화와 재정 적자로 고생하고 있고, 개발도상국 역시 인구노령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이 제도가 필연적으로 파산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인 사회보장에 있어서 국가역할을 축소하고 연금제도에 있어 시장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립형 기업연금체계, 특히 확정기여형 연금체계를 도입하고 개인 퇴직계좌 도입 등을 통해 개인연금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이들은 마치 '객관적'인 차원에서 공적연금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구의 노령화와 같은 인구학적 문제를 푸는데 있어 공적시스템보다 사적시스템(주로 금융시장)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사실 부르주아들은 극심한 변동성과 작전을 동원한 부패커넥션을 제외하면 다른 특징은 별로 없는 금융시장이 바위처럼 견고한 것으로 묘사한 반면, 오랜 기간 기능중단도 없이 노령자에게 연금을 지급해 온 정부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재정방식에 초점을 찍어보자. 이들이 주장하는 데로 '적립방식'의 사연금제도로 바꾸는 것이 과연 공적연금 재정적자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적립재정방식을 전제로 하는 공적연금 민영화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부담감소가 아니라 노령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해소, 노후소득보장의 개별화를 의미한다. 한 사회에서 노인비율이 늘어난다면 그 사회의 산출 중 노인인구를 위해 쓰이는 것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부과방식'이냐 '적립방식'이냐 하는 연금재정 방식의 변화로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과방식에서 적립방식으로의 연금재정방식의 변화로 달라지는 것은 필요자원의 양이 아니라 단지 자원조달의 경로이다. 노후보장 비용이 연금제도를 통해 곧바로 노인들에게 주어지느냐, 아니면 자본시장에서 장단기적인 투자과정을 거친 후에 주어지느냐이다. 그럼에도 시장주의자들이 연금재정방식을 '적립'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면 이는 재정문제를 객관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연금기금 형성ㆍ투자가 야기하는 이해관계 때문임을 반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연금개혁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연금민영화를 통해 누가 막대한 이익을 챙길 것이며,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국내외 투자기관 및 보험회사, 은행들은 과연 어느 정도로 이득을 볼 것인지, 주식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얼마나 커질 것이며, 국내외 투자가들은 과연 어느 정도 규모로 이익을 보았는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연금개혁의 실질적인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전경련, 보험개발원과 증권연구원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기업연금제 도입에 따른 예상 수익, 경영전략의 변화지점{{) 기업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전경련은 현재 퇴직금과 국민연금 모두에 사용자가 부담해야 하는 비중이 너무 커서 신규채용 등 기업활동에 제약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경감하고자 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기업연금 도입은 자금조달의 용이함, 부채비율 감소를 통한 재무건전성 도모, 사내 노동력관리, 기업의 금융화 촉진 등과 같은 이해가 걸려있는 사안이다. 보험회사와 증권업계가 직면한 이해는 더욱 직접적이다. 이들에게 기업연금제도 도입은 새롭고도 거대한 시장이 생기는 것이다. 이 시장을 둘러싸고 보험과 증권을 비롯한 비은행 금융권의 공세적인 활동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보험회사의 경우는 현행 법정퇴직금 제도의 개선 방안까지 제안하면서, 확정기여형 기업연금제도가 도입되면 보험회사가 기업연금 전문기관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전망을 수립하고 있다. 덧붙여 보험회사가 기업연금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 진출에 유리한 서비스 형태에 대해서도 이미 자세한 연구를 진행했다. 증권업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기금의 주식투자, 채권투자를 증진시키기 위해 각종 상품을 개발하고,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한다. 기업연금 상품을 선점하기 위한 각종 로비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기업연금시장을 둘러싼 이들의 치열한 경쟁은 민중들의 소득을 자본시장에 더욱 깊숙이 연계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개혁의 직접적 영향 현시기 연금제도 개혁은 노동시장과 노동자의 분할을 가속화하며 불안정 노동층을 배제, 빈곤을 심화시킨다. 대표적인 예로 기업연금이 도입된다면 월평균 임금의 8.33% 이상을 기업이 일률적으로 적립해 퇴직할 때 지급하는 퇴직금제도와 달리 기업의 '경영성과'와 '노동자의 능력'에 맞춰 연금을 적립하게 된다. 즉 기업은 노동자 개개인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노동자가 미래에 수령할) 급여액수와 기여액을 조정(통상 3-5년 단위)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에 대한 통제는 용이해지며, 노동자간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킬 수 있다. 한편 사적 연금의 확대와 공적 연금의 상대적 축소는 여성, 임시일용직 노동자, 영세사업체 종사자, 비공식경제부문 노동자의 노후를 더욱 빈곤화한다. 즉 노동시장 참여시기의 빈곤이 노후에도 재생산되어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연금제도의 개혁(민영화)을 실시한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사적 연금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보장성 문제와 재분배 효과를 지적하고 있다.{{) 사연금화는 여성이 평균수명이 길다는 이유로 연금지급액수를 낮추기 때문에 여성에게도 불리하다. 따라서 연금민영화는 저임금여성노동자에게 최악의 효과를 낳을 것으로 판단된다. }} 서구의 경우 과거 복지국가 전성기의 공적연금제도가 전사회적인 단위로 집합적 노후보장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그 이상(理想)으로 했었다면, 최근 확산되는 강제개인저축 방식의 연금제도는 '자신의 노후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지도록' 개별화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더구나 후자의 경우 연금급여액은 항상 투자수익과 연계되기 때문에 재분배 효과를 염두에 두고 급여를 설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연금급여는 판돈의 크고 작음에 따라 보상 또한 천차만별이 되는 게임이 되어 버린다. 또한 연금기금의 금융자본화를 핵심으로 하는 민영화는 불안정 노동층의 노후소득보장에 더욱 큰 곤란을 야기한다. 대부분의 저임금·불안정 노동자의 경우 일천한 투자경험으로 인해 적절한 투자기관을 선택할 확률이 낮다. 광고나 판매원에 현혹된 투자기관 선택은 개인의 노후보장의 기반을 붕괴시킨다. 이는 영국의 공적연금을 대신하는 사적연금의 급격한 확대과정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점이다. 게다가 사연금은 가입과 탈퇴가 반복되면 가입자에게 운영수수료 부담을 높인다. 실제로 불안정 노동자는 불안정한 고용으로 인해 보험료를 꼬박꼬박 부담하는 것이 어려워 사연금 가입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한 연금액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통상적인 경우에도 영국과 미국의 개인연금 운영비는 보험료의 약 35%에 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금을 민영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연금액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그야말로 '최소한'이다. 칠레에서는 민간연금운용회사의 투자수익이 너무 낮거나 보험회사가 망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최저연금보증제도를 정부부담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20년 이상 가입한 노인들에게만, 대체로 평균임금의 12%에서 20%사이를 지급하는 것으로서 매우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결국 노동자 내 계층 분리의 심화와 전반적 소득분배의 악화는 필연적인 효과이다. 연금제도 개혁, 기업연금제도의 도입에 맞선 대응방향 첫째, 사적연금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 사적연금의 확대는 한편으로 공적연금제도의 재정부담을 덜기 위한 방책으로 작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부문의 축소, 자본 영역의 확충을 낳는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책입안자들이 선전하듯 사적 연금의 확대는 기금의 안정성과 거의 관련이 없고, 실제 비용과 위험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책임, 소유, 그리고 선택의 원리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그리고 민영화의 실질적인 피해는 여성들, 저임금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따라서 연금제도의 원래 취지인 소득재분배 문제,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노후보장 달성이란 문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연금제도 민영화-사적 연금의 확대를 막아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둘째, 연기금의 투자를 위한 적립을 반대해야 한다. 적립형 사적 연금제도의 도입 및 전환을 통한 재정부담의 축소, 자본시장의 발달, '더 빠른 경제성장', 그리고 주식 투자 수익을 통한 '노후소득의 안정적 보장'이라는 연금 개혁의 목표는 실제 객관성을 동원한 허구에 불과하며, 적립재정방식은 연기금의 금융자본화를 위한 기본 전제로 작동한다. 혹자들은 재정을 적립해서 사회적 투자를 할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오늘날 금융화·세계화 국면에서 노동자들의 저축으로 형성된 거대한 자본의 집합은 사회적 가치에 기반을 둔 게임규칙이 아니라 금융시장의 게임규칙을 따라 움직인다.시장은 그들의 안마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대한 금융자본의 집합을 만들어낸다는 생각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셋째, 기업연금제의 도입을 원칙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이 말은 현재의 논의지형에서 협상의 여지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노후안정 저축기금'으로서 연금제도의 본래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제도의 도입을 실천적으로 저지시켜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현재 기업연금 도입에 대한 논쟁 지형에서 정부가 제시한 (안)의 특징상 적립재정방식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확정기여형이냐 확정급여형이냐'에 한정된 선택을 거부해야 한다. 강요된 선택 이외에도 '보험'방식을 버린다거나 부과방식을 전제하는 새로운 방안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민중들이 연기금의 금융화·민영화에 반대하여 공동으로 싸우지 않는 한 현실적인 정책선택을 지배하는 쟁점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넷째, 연기금의 시장자유화 조치를 반대해야 한다. 연금시장에 대한 규제완화 조치들, 대표적으로 공적연금의 주식투자비율 확대, 투자대상 금융상품에 대한 자유화, 해외투자 액수의 증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연금을 전문펀드에 용역하청의 형태로 위탁하는 것 등 연기금의 금융자본화에 힘을 불어넣고 있는 조치들, 이외에도 연기금, 뮤추얼펀드, 보험사 등 기관투자가에게 자산운용의 자유를 부여하는 보험업법과 민간의료보험 도입, 자산운용법 등의 개정과 제정을 반대해야 한다. PSSP 그림 1 (nasdaq 이란 간판앞에 서있는 사람들) 금융자본이 전후의 '노동계급-산업자본-국가'의 우위와 공적 통제에서 벗어나 헤게모니를 확고하게 복원한 것으로 묘사되는 현 국면에서 부각되는 정치적 주체는 역시 거대 금융자본이다. 연금제도 등 복지제도에 대한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와 역할은 산업자본에 비해 조명을 받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용'이란 차원에서 산업자본이 복지제도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는 만큼이나 금융자본 또한 '시장'창출면에서 국가복지체계 민영화에 개입할 수 있는 더욱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림 2(노인들이 일렬로 앉아있는 모습) 경제개발기구(OECD)를 필두로 각국 정부와 초민족적 자본은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는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고용·임금·연금·보험 정책의 개혁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전망에 금융자본의 이해를 철저히 결합시켜왔다. 그림 3 (ibrd- 세계은행 사진) 연금개혁은 비단 선진국에만 국한된 이슈가 아니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 등을 망라하는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이에 세계은행은 강제적립부분 도입을 강조하는 다층체계개혁을 전세계적인 벤치마크로 제시해왔으며, 이러한 입장은 1990년대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남미와 동유럽 국가들의 공적 연금개혁이 가속화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