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했다. 민주노동당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 비판을 많이 했던 사람들조차도 격세지감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여기저기서, '혁명'을 위해서든 아니면 그냥 '복지사회'를 위해서든 혹은 다른 시민운동적 과제의 실현을 위해서든 어쨌거나 민주노동당과 함께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늘어나는 건, 투쟁 중인 노동조합에서 '국회의원이 왔으면 좋겠다'는 요구와, 먹고살기 힘든 노동자인데 노조도 없는 상황이라 당이 와서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요구,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를 당이 나서서 해결해달라는 무대뽀 스타일의 민원성 요구들이다. 이런 요구들을 접하면 중앙당 활동가들은 굉장히 곤혹스러워진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사람들을, 그렇다고 모른 체 하고 전화를 끊을 순 없기 때문에 "네, 네.."하면서 그냥 열심히 전화를 받을 뿐이다. 이런 전화가 하루에도 수백 통은 족히 오는 것 같고, 중앙당 활동가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민원 상담'에 매달리고 있다. 가끔은 자기 이야기를 잔뜩 적은 문서를 가지고 와서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에 '민원실'이 없기 때문에 천상 처음 눈이 마주친 사람이 상담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찍힌 사람은 30분이고 1시간이고, 대부분은 같은 얘기를 서너 차례 씩 하는 민원인들 앞에서 그 얘기를 다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 먹고살기 진짜 팍팍한데 노동조합도 없고 당이 좀 나서줬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냥 안타깝기만 하다. 전화해서 회사 욕 실컷 하고는 자기 회사가 어딘지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전화한 것 알면 잘릴 게 두려워서란다. 그래 놓고는 또 당이 나서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당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법제도를 고치거나, 법에 나와 있는 걸 안 지키는 사업장을 전국적으로 몽땅 조사해서 처벌받도록 조치하겠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냐는 불만을 하곤 한다. 처음에는, 직접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노조와 함께 단결해서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몇 번했지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당은 못 하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로 듣는다. 이래저래 참 어려운 일인데, 이런 건 뭐 어차피 활동가가 감당해야 하는 거라 불만은 없다. 이런 것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투쟁 중인 노동조합에서 국회의원이 왔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군데에서 그런 요청이 들어온다. 특히 오랫동안 투쟁했으면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곳의 경우 국회의원이 한번 와주고, 또 사측과 면담도 한번 하면 문제가 금방 풀리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많다. 근데 이게 참 난처하다. 우선은 몇 명 안 되는 국회의원들의 일정이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빡빡하다는 점이 문제다. 한 일주일 정도 일정은 하루에 30분 단위로 약속이 이미 잡혀 있는 식인데, 마음 급한 노조야 하루 이틀 전에 연락하는 게 보통이고 이러다 보니 당활동가들은 본의 아니게 "안되겠는데요", "조금만 더 일찍 연락하셨어도...", "다른 일정이 있어서.."등의 말을 하게 된다. "국회의원 생기니까 뻣뻣해졌다"는 소리 듣기 딱 좋은 분위기인 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원이 가서 사측 면담 한번 하면 문제가 풀리는 곳도 있긴 할테다. 그런데, 걱정되는 건 현안이 해결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국회의원 몇 명 생겼다고 갑자기 바뀌는 사람들의 태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었던 우리의 태도가 문제다. 그리고 정말 걱정되는 건 이런 상황이 점점 커지면 민중운동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열심히 투쟁하고 당은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당 활동이 대중운동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발전한 대중운동이 당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그런 식이어야 한다. 이 원칙은 선거전이나 후나 달라질 게 없다. 연대 투쟁의 방식이나 내용이 국회의원이 생긴 상황에서 좀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께 싸워야 할 동지가 느닷없이 민원을 요청하는 민원인이 되고, 연대투쟁 해야 하는 당이 갑자기 대민 업무나 보는 꼴이 되어서는 안될 말이다. 안 그래도, 국회의원 배출 이후 의원 세비다, 국고보조금이다, 늘어난 당원들로부터 들어오는 당비다 해서 수입이 대폭 늘어나고 정책보좌관을 100명 가까이 뽑으면서 인력도 당으로 집중되는 상황인데, 이것이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투쟁하는 것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영향을 미쳐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국회의원이 나왔다고 해서 한국 노동운동이 그 간의 문제를 모두 극복하고 새롭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일 뿐만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당의 성장이 노동운동 쇠퇴의 반작용으로 이루어질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기존의 다른 진보정당과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대중운동과 결합'했다는 것일텐데,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어떤 동지가 왔다 가셨는데, 자기들 집회하는데 당에서 '격려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공문을 들고 왔다. 그 전까지 민주노동당이 가면 주로 '연대사'를 했었는데, 갑자기 '격려사'를 해달란다. 노동절 114주년이 되는 올해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노동자 운동의 진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그 길에서 당연히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연대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PSSP
총선결과 분석 1/ 불안정한 양당체제의 등장과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모순 -총선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해소했는가? 17대 총선은 외형적인 양당체제를 낳았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탄핵심판의 민의를 확보했다며 압승을 선언했고, 121석을 확보하여 기사회생한 한나라당은 그들 나름대로 자축 분위기다. 언론은 이 같은 결과를 두고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생산적 견제의 황금분할이라 평하고 있다. 우선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이번 선거를 당연한 탄핵심판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선거결과를 놓고 보면, 탄핵선두라 할만한 김기춘, 정형근, 박희태 같은 인물들이 모두 살아남았고, 한나라당은 무려 121석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를 탄핵심판론의 압도적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호남의 지역주의는 개혁적이지만 영남의 지역주의는 수구보수적이라고 매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역주의적 투표 행태의 실제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하더라도 영남대중 전체를 수구보수로 매도하거나, 어떤 지역주의가 이념적으로 구분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사후적인 비약이고 억측이다. 호남 지역주의가 열우당을 선택하고 민주당을 버린 것이 수구보수 한나라당에 대한 정서적 거부의 결과라면, 영남 지역주의는 노무현 정권의 국정수행 1년에 대한 거부를 정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주의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현실의 불만이 합리적 대안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이데올로기적(모든 이데올로기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다) 투표 행태다. 지역주의적 형태를 띤 투표결과를 호남과 영남에서 누가 얼마만큼 당선되었는지의 사후적 결과로만 평가한다면, 성격상 무한히 변태가능하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지역주의는 스스로 '모든 지역에서의 각 정당의 균등한 득표'라는 불가능하고 제거할 수 없는 목표의 함정에 빠진다. 더욱이 영남에 출마한 수구보수적인 지역수장들이 선거과정에서 "그래 나 수구꼴통이고, 계속 차때기할테니 찍어 달라"며 선거를 했을 리 없고, 열린우리당이 호남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햇볕정책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를 설득하여 당선되지 않았다. 한편 한나라당의 자축분위기는 훨씬 기만적인데, 이들이 내놓은 주된 평가는 '국민의 놀라운 균형감각'이 표현됐다는 것이다. 정말 놀랍도록 뻔뻔한 해석이다. 하지만 152:121:10:9라는 분명한 양당 구도가 확정되자마자 노무현과 정동영은 '상생과 통합의 정치'를 운운하기 시작했고, 언론들은 진보가 가미된 '중도(수구)보수 vs 중도(보수)개혁 간의 황금분할'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한나라당의 아전인수격 평가는 어떤 현실적인 근거를 얻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17대 총선의 의미는 "정치를 바꿔 경제를 살리자"는 모토로 요약되는 정치개혁의 기만성과 '안정적인 위기관리'라는 지배계급의 모순적 과제가 가지는 고유한 난점을 통해서만 옳게 파악할 수 있다. "정치를 바꿔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자유주의 여야정당의 약속은 피착취 대중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고 동시에 지배계급 또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상황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겠다"는 읍소로 모면하려는 하나의 기만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기만 속에는 집권여당의 통치력 위기를 넘어 지배정치일반(국가)의 위기로 변태중인 경제위기를 오로지 여야 간, 국가기구 간의 책임전가를 통해 관리해야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즉 지배체제의 위기를 봉합하기 위해서는 지배정치 스스로 지배체제의 정치적인 안정을 허물어야한다. 때문에 보수정당들 간의 차별성이 없어지고, 이들 간의 중도주의적인 수렴이 진행될수록, 지배계급 내 정치적 대결은 경제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다른 정치 수단'(부패 비리수사와 각종 스캔들, 정치이미지 마케팅)이 총동원되는 가운데 점점 더 극단적인 양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대통령 탄핵은 그 정점이었다) 그로 인해 17대 총선은 전적으로 탄핵심판론과 거여견제론이라는 네거티브 선거게임전략에 의해 치러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여야 각 정당은 상대를 배제하고 내부 숙청을 단행해야 자신이 살아남는 절박한 지경에서,(막상 서로 간의 정책-이념적 차별성이 없었기 때문에 인기몰이에 성공한 뉴리더를 내세워) 그저 울고, 사과하거나, 엄살 이벤트를 벌이며 서로의 다수의석 확보를 저지하자는 읍소(게임전략 대 게임전략)로 일관했다. 이러한 양상의 선거캠페인은 결국 여야 서로를 향해 책임을 몰아 묻는 투표행위로 표현되었고, 외형적인 양당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의 의석배분 결과는 여야가 분할한 '두개의 승리'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떠넘겨진 '두개의 패배'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대중적 불신과 분노에 편승한 선거 캠페인의 결과, 대혼란과 무능에 빠진 위기관리체제는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또 다른 대립과 붕괴를 잠시 보류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끓어오르기 시작한 분노한 민심 위에 얹어진 '상생과 통합의 정치'라는 이름의 살얼음판과 같은 운명일 것이다. 총선결과 분석 2/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전망 지난 김대중 정권 말기, 1,2차 구조조정과 상시 구조조정 시스템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로 집권세력의 통치력 상실을 불러온 이후로 여야를 막론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남겨진 대안은 정치개혁뿐이었다.(그리고 그와 긴밀히 연관된 언론, 교육, 가족개혁) "깨끗한 정치, 일하는 정치로 경제를 살리자", "사회적 정치적 통합과 참여개혁"이라는 선동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연출하느냐가 선거 승패의 관건이었고, 결국 '노무현의 눈물'이 '엘리트 이회창'을 제압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승리는 채 1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지지율은 나날이 곤두박질 치고 측근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왔다. 더 높은 강도와 더 많은 베팅만이 탈출구였고, 그것은 재신임과 연계된 전면적인 대선자금 비리수사, 그리고 그에 뒤이은 대통령 탄핵사태와 '총선 올인'전략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선거가 끝난 뒤에도 크고 작은 부패비리수사와 정치이미지 마케팅과 같은 '다른 정치 수단'들에 의한 무한캠페인이 계속되는 기이한 정치 행태를 낳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치루어진 총선은 변형된 정치캠페인을 제도화하는 개정된 선거법으로 치러진 최초의 선거였고, 17대 국회는 개정된 정치관계법에 의해 운영되는 최초의 국회가 될 것이다. 이 개정된 선거법과 정치관계법의 핵심은 금권-부패정치를 청산한다는 명분 아래 대중동원 선거를 봉쇄하고 미디어-정책 선거를 강제하며, 원외 법정지구당 폐지를 골자로 하는 원내 정책정당화를 추진하는 것에 있다. - 주어진 정책적 합의와 정치개혁 우리는 우선 이번 총선 이후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날 '정책'(국가행정)과 '정치'간의 역전된 위계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0세기적인 행정혁명과는 또 다른) 신자유주의시대에 위기관리적 국가기구 내에서 다루어지는 대부분의 정책은 세계화된 시장의 신호와 그에 대한 행정기구의 반응, 또 그 역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의회와 정치정당은 이 정책 형성 결정과정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에 있다. 이미 대부분의 주요 정책들은 의회나 각 정당들의 정치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의회의 법안심의와 의결이란 기껏해야 이미 결정된 정책들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역할(시행시점과 집행순서, 속도, 강약 조절의 방법으로)에 그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주요 집행자는 의회나 정당이 아니라 행정이고, 행정은 언제나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며, 공익의 이름으로 스스로 효율적인 차선과 차악의 선택조정체계 안에 머문다. 반면 치열한 보수정쟁으로 일관했던 야대여소의 16대 국회(여야정당들이 민생법안이라 부르는)조차 주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관련 안건에 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통법부(通法府)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했을 따름이었고, 하물며 17대 국회는 여대야소로(근소한 차이의) 의석비율이 바뀐 처지다. 더욱이 그나마 여야정당과 의회에 주어진 그 같은 역할의 많은 부분은 보다 전문적인 매스미디어 기관과 NGO로 이전되었다. 한편으로는 '작지만 강한 국가'의 사회 정책적 기능을 '국가와 사회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또 다른 위기관리기구인 NGO에 넘기고, 대표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정당정치를 매스미디어 기관(주로 TV와 인터넷)의 역할을 극대함으로써 보완토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NGO와 지배적 매스미디어 매체야말로 오늘날의 지배정당이다.(뉴스앵커를 그만 두고 여당대표로 자리를 옮긴 정동영이 아니라) 이에 따라 행정부-정당-미디어-NGO로 이어지는 불안정하지만 효과적인 제휴/갈등관계가 신자유주의적 위기관리체제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된다.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착취의 한계에 내몰린 노동자 민중의 격렬한 저항은 이 위기관리체제의 내부적인 갈등과 제휴관계로 흡입됨으로써, 주어진 '정책'의 실행을 위한 효율적 행정적 관리와 협소한 집단적 이익의 조정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여야정당이 총선이후 내놓은 '상생의 정치'란 '싸움 않고 일하는 정치', '대화합의 정치'가 아니라(앞서 살펴본 대로 이들 간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주어진 '정책'에 대한 예정된 합의의 충실한 이행을 지칭하는 것일 테고, 이 합의의 대전제는 IMF협약의 형태로 직수입된 '워싱턴 컨센서스'(199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정책개혁에 대한 세계적 합의로 신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와 글로벌 스탠다드인 것이다. - 원내 정책정당화 : 정치의 미디어화, 정당의 운동적 요소 제거, 의사(擬似)정치의 일반화 정책정당화가 정당정치의 탈이념화, 실용주의화, 미디어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원내정당화는 그나마 존재해온 정당조직의 운동적 요소들을 조직적 법적으로 제거하는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핵심적인 정책과제이다. 원내정당은 한마디로 국회의원이 중심이 되는 정당체제를 말한다. 법정 지구당은 모두 폐지되고, 당의 이름을 건 일상적인 지역-현장의 원외사업은 모두 불법이다.(광역단위 시도지부 정도가 소규모의 연락사무소정도를 유지한다) 나아가 열우당은 휴가철을 제외하고 연중 국회가 열리는 상시국회제도 도입을 국회개혁안으로 제시했으며, 중앙당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당의 모든 주요 기능을 국회 안으로 옮기자는 식의 안도 내놓았다. 그런데 이 정책정당화에서 말하는 정책이란 앞서 서술한 주어진 '정책'이 아니라, 주어진 정책들의 틀 내에서 다루어지는 부분적인 이슈들을 법안으로 손질한 것들을 의미하거나, 주어진 정책들의 실행을 위한 법안과 선전방안들을 말하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의 정책이다. 오히려 정책정당에서 말하는 정책의 주요한 측면은 인구의 특정 계급계층을 대표하고 그러한 대표성에 맞는 정당성의 원천인 이념을 폐기하고, 이를 정책(이슈)중심으로(그것도 여론조사결과와 표심에 따라 춤을 추는 주요 이슈) 대체하는 것에 있다. 이에 따라 정당은 당의 이념을 원자화된 유권자들의 표심에 맞춘 정책-이슈파이팅 정당, '모두를 위한 정당(Catch all Party)'으로 또 모든 계급계층, 모든 이념을 포괄하는 '무지개 정당'으로(혹은 담합Cartel정당) 재편된다.(계급이념정당, 대중정당의 폐기) 결국 '정치'는 정치연예인과 전문가-관료출신 정치인들의 원내 활동을 TV, 인터넷을 통해 지켜보거나(비추어지거나), 이들이 수시로 던지는 설문과 물음에 답하고 그 결과 수치를 확인하는 의사(擬似)정치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금권 부패 보스정치의 폐해를 청산한다는 미명아래 '개혁'의 이름으로 도입된 원내 정책정당화란 더욱 축소된 의회의 정책적 영향력과 탈냉전시대에 약화된 보수이념정당의 일반적 위기를 표현하는 의회주의 쇠퇴, 대중 조작적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총선결과 분석 3/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의 운동사적 의의와 쟁점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은 91,92년 투쟁이후 본격화된 정치세력화(진보정당)운동 10년의 한 순환을 매듭지은 일대 사건이다. 87년 6월과 노동자 대투쟁, 91/92년 패배가 그렇듯이 우리는 아직 2004년의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한 역사로서 파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쟁점들은 이후 평가의 놓칠 수 없는 출발점들이다. - '진보 vs 보수'로의 역사적 진화라는 관념의 오류를 통해 본 민주노동당 의회진출의 운동사적 의의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은 분명 지난 민주화 운동과 특히 10여 년간 지속되어온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성과 위에 위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민주화운동세력의 신자유주의적 타락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반복되어온 패배의 성과라는 운동사적 특이점을 갖는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이번 총선에 이르는 운동사에는 91,92년 계급투쟁 패배와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실행조건인 문민정부라는 단절점이 존재한다. 논란의 핵심은 이 단절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민주노동당의 우경화 문제에 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지는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민주노총의 좌파는 이 단절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묘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반민주' 전선이 '보수 vs 진보'구도, 혹은 '총자본 vs 총노동'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는 어떤 초역사적인 진보주의적 관념이 그것이다. 93-95년 문민정부와 민주노총의 출범은 91-92년의 패배-붕괴의 속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은 진보주의적 역사관으로는 인정되거나 포착하기 어려운 '운동사적인 역행'이었다. 좌측이 무너진 냉전체제의 반공-발전독재 세력이 문민화를 통해 뒤늦은 신자유주의의 전면도입을 꾀했다면, 냉전의 붕괴를 세계사적 패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냉전적 좌파(당-좌파)는 피지배 계급대중운동으로부터 이탈하거나 배제되었으며, 대중운동은 국가를 지렛대로 조직대오의 실리적 동원과 방어를 추구하는 코포러티즘적인 체계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으로 인한 잇따른 패배는 노동자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했고,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코포러티즘적인 전략과 체계(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건설)는 더욱더 공고화되었다. 이러한 운동사 인식에 입각해 볼 때, 2004년에 거두어진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87년에 뿌리를 두고 이로부터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운동사적인 역행에 다름 아니었던 (93-95년의) 역사적 단절의 진화이며, 역전된 운동사의 진보라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이 역사적 단절의 의미를 보지 않을 때에만, '민주 vs 반민주'전선의 소멸이 '진보 vs 보수'로 전진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전선 해체의 반성과 혁신, 복구의 과제(재편이 아니라)를 '패배의 성과'의 열광에 묻힌 부차적이고 열등한 쟁점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주노동당의 틈새진출 전략의 문제점 이번 선거의 양대 구도를 이룬 탄풍과 거대여당 견제론인 박풍은 여론조사를 유일한 객관적 근거로 하는 바람정치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대중의 민주화와 생존권적 요구를 오로지 이번 선거에서 누가 얼마만큼의 의석을 획득하느냐의 문제로 가두어 놓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선거 게임전략에 불과하다. 탄풍과 박풍이 구분될 수 있다면, 그 구분점은 바람의 주역이 노무현이냐 박근혜냐, 즉 정당정치를 갈음하게 된 여론-미디어정치에 사용된 장식물이 더 이상 자신의 과업을 잃고(대통령직선제로 봉쇄된 채) 타락한 민주화의 기억이냐, 아니면 IMF위기로 무너진 박정희식 반공발전주의냐에 있다. 현 시기 제기되는 사회운동적인 쟁점들을 대의하기보다는 이미지적으로 착취하기에 급급한 정당정치가 가지는 유일한 진실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정략적 해석과 이를 통한 의석경쟁 캠페인이다. 내건 장식물의 색채가 어떤 이념적 정책적 내용을 가지느냐는 장식물로 치장된 이념과 정책의 이미지로만 판단되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기간 중에 정동영은 과거 개발독재의 발전을 재연하기 위해서는 그 원동력이었던 과반여당을 열우당에게도 허용해줄 것을 호소했고, 동시에 박근혜는 한국정치의 정통성은 발전주의세력과 4·19, 5·18 민주화세력에게 있다면서 보수세력의 혁신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접어든 보수정치를 심판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민주노동당은 막상 이번 총선에서 탄핵심판론, 거여견제론에 뒤이은 또 다른 선거게임전략인 야당교체론 혹은 진보야당론을 총선전략으로 삼았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치가 대중의 요구를 운동이 아니라 정책공약을 통해 대리(대변)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좌파정치의 근본적 곤란에 대한 대안창출이 아니라 지배정치의 위기진행과정에서 만들어진 틈새를 분점하는 원내진출 전략의 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원내진출 전략은 전선복구와 운동재개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절박한 운동적 과제들의 현실적인 착수를 계속 지체시키고, 부차적인 쟁점으로 억압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선거과정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입장하나는 바로 탄핵무효운동이 오히려 민주노동당 지지의 폭을 넓혔다는 아전인수격인 주장이다. 이는 탄핵무효투쟁에 대한 비판의 대안을 민주노동당 지지로 사고했던 입장에 대한 반비판으로는 유효하다. 또 사실 민주노동당은 '탄핵무효범국민행동'에 공식참여하지 않았다.(NGO중심의 범국민행동은 정치정당이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열우당을 타격-견인의 대상,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큰 틀에서) 하나의 파트너로 보는 기본적인 태도의 동일함이 유지된다는 의미에서 촛불과 진보야당론이 서로 수렴되는 것은 나름의 논리적 전략적 일관성을 지닌다. 이로써 탄풍 속에서 보수정치 심판, 민생정치라는 소극적이고 모호한 형태의 틈새전략을 택했던 민주노동당이 공식선거전 개시이후, 탄핵무효 촛불에 동원되었던 다수파와 탄핵심판론에 비판적이었던 당권파가 진보야당론을 접점으로 제휴하는 길로 나갔던 것이다. (탄핵에 대한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입장은 헌재에서의 조속한 기각요구, 국회개원이후 탄핵취소였다) -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의 쟁점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주요한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게된 것은 세계대전 등 '국가의 위기'를 매개로 하여 노동자대중을 민족국가로 통합하는데, 매개 역할을 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른바 '사회 민족적 국가'의 형성과 '자유주의의 쇠퇴'라는 역사적 조건이 그것인데, 이러한 역사적 조건과 경향에 따라 사민주의 정당의 의회진출은 피지배계급운동의 성과를 정치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양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러한 20세기적인 역사적 경향과 조건을 역전시켰고, 사민당-정부는 1980-90년대 들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구분되는) '대안강령'의 일반적 실패 속에서 해체되거나, 위기관리 국가의 또 다른 관리자로 역할을 재조정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과 전농 등의 계급대중조직이 주축이 되어 건설된 현재의 민주노동당은 1980년대 남미의 좌파운동들(특히 전선체들)이 군부독재의 종식과 '민주화 이행'(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행조건으로 타락한) 이후 합법정당으로 이전하는 양상과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1990년대 초반 일부 국가에서 이들 정당들은 부분적인 성공(중앙의회 진출, 지방정부 장악 등)을 거둠으로써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정당이 대중운동 또는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곤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정당이 노동자운동과의 역할분담 관계 속에서 인적-조직적 연계망을 형성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시대에 쇠퇴하는 노동자운동의 곤란과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악순환 관계를 이루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때 이제 막 의회진출이라는 부분적인 성공을 이룬 민주노동당이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과연 이들 서구 사민주의 정당이나 남미의 진보정당들과 달리 어떻게 전진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야말로 이후 민주노동당의 성패를 가름할 핵심쟁점이다. - 신자유주의적 정치위기와 정치개혁의 흐름 속에서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몇 가지 현실적인 딜레마 원외 운동조직으로부터 성장하여 독자적인 힘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외생 정당의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않은 경우이다.(독일녹색당과 브라질PT정도다) 그러나 이들 외생 정당들은 거의 비슷한 패턴과 과정을 통해 원외 운동조직으로서 고수해왔던 '근본적 반대파로서의 원칙'을 점진적이긴 하지만 원천적으로 폐기해왔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한 옷 입기와 말투 같은 라이프스타일 상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원외 대중운동과의 관계, 근본적인 운동철학과 양식, 이행전략과 이념에 이르기까지 그간 체계화되지 못하고, 구체적인 쟁점으로 사고되지 못했던 운동의 근본 문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강제되는 부르주아적 규율과 사상에 부지불식간에 침식당해온 결과다. (현재 이 규율지도의 가장 엄하고 부지런한 교사는 장기화된 구조적 경제위기와 전쟁, 그리고 방송기자들이다.) 이러한 결과는 지배체제의 통제범위 외곽에서 성장해온 반체제적인 사회운동세력이 사회운동과의 전진적인 관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체제내부, 그것도 그 핵심부위에 진입했을 때 피치 못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매우 당연한 결과였으며, 비록 적은 규모이나마 최초의 성공을 이룬 민주노동당으로서도 피해갈 수 없는 시험코스일 것이다. 1> 우선 민주노동당은 거대 여야정당간의 짧은 밀월이 깨지고 이들 간의 정쟁이 본격화될 경우, 원내에서 독자적인 의제설정능력이 없는 소수정당의 고역을 겪을 수 있다. 짜여진 의제 안에서 최선의 답안을 제출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진보를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보수와 한 쌍을 이루는 체제적 위험요소들을 거세한 '관리된 변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이 짜여진 원내 대립구도 안에서 진보적인 정책(공약) 개발에 주력하는 것은 반체제적인 의제를 독자적으로 세팅하여 제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컨대 탄핵찬반이나 경제성장(분배)론에 종속된 민생-경제법안과 (예산분배정책심의) 같은 의제로 짜여진 여야 간의 대립구조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NGO를 버퍼로 하는 보수개혁 여당과의 사안별 공조를 (안팎으로) 강요당할 위험이 크다. 2> 그동안 민주노동당의 조직 골간을 이루고 있던 지역 지구당이 폐지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정책정당화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아무런 대안 없이 진행될 경우, 민주노동당은 운동정당적인 성격을 잃고 중앙당 혹은 의원단 차원의 민원창구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당 발전 전략상의 노선적 대립을 넘어서는 운동성 자체의 존폐위기이며, 당의 민원해결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주객관적 요인들을 감안해 보았을 때도 운동성을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막다른 길임을 직시해야한다. 그동안 당의 골간이었던 지역당 조직들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당 외곽의 대중조직들과의 코포라티즘적인 상층연대만이 강화되는 퇴행적인 사태를 막아야 한다. 지역 지구당조직들이 다양한 사회운동조직으로 갱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되어야하며, 이러한 재편을 지속가능한 운동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노선과 이념의 개조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민주노동당, NGO, 개혁주의적 집권여당과의 사안별 '정치적 연대'와 노-정(勞-政) 및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의 역할이 증대될 경우, 전국민중연대가 상층연대기구라는 한계 속에서나마 고수해왔던 공동투쟁연대 대표체로서의 독자적 지위와 통합력은 상당한 정도로 손상될 위험이 있다. 4/ 이후 사회운동의 전망과 과제 수립을 위하여 2004년 총선으로 변화한 사회운동의 조건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의 보수적인 정치지형이 전반적으로 좌로 이동하여 중도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또 역으로 변혁지향적인 사회운동이 우경화되어 중도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 앞서 살펴본 총선결과에 관한 몇 가지 쟁점들은 주로 의회 내 의석분배 결과에 관련된 것이었고, 그것은 이후 사회운동의 변화된 조건을 분석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고 협소한 판단의 근거들이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신자유주의적인 '위기관리'와 '관리된 변화'를 진보로 보는 착시효과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자신의 과업을 잃어버린 채 운동하지 않는 정지된 과거는 단지 하나의 '기억에 대한 신앙심'일뿐이다. 즉 역사의 전진을 이루어갈 피어린 전투의 발판은 어느새 전투의 기억에 대한 편협한 신앙과 틀에 박힌 보수주의로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이로써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실행조건으로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문민정부들은 각기 자신의 이해관계와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87년의 정지된 스냅사진을 팔아, 민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전투의 기억을 편협한 신자유주의적 신앙과 틀에 박힌 보수주의로 전락시켰다. 이번 총선결과, 외형적인 양당체제의 등장으로 지배계급 내 정쟁은 일시적으로 봉합됐으나 그 내적 불안정성은 증대되었고, 보수개혁세력의 의회권력이 교체되고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성사됨으로써 진보적인 사회운동의 일정한 여건이 확보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파쇼민주화 전선 해체 이후 지체되어온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와 혁신의 과제가 '관리된 변화'와 '사회적 합의'의 틀로 봉쇄될 위험 또한 존재한다. 지난해 말 재신임-열사투쟁국면 이후 정세는 대선 자금 비리-정치개혁, 노동조합탄압-민중생존권, 이라크 추가파병과 같은 핵심사안들이 각각 (대선 자금 수사와 재신임, 탄핵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갈등과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반미반전투쟁으로 이루어진 피지배계급투쟁의 양편으로 분리되어 전개되었다. 더 내줄 것이라곤 목숨밖에 남지 않은 피지배계급의 절망적인 생존권적 저항과 통치 정당성의 한계에 다 달은 지배계급 내 정쟁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동시에 진행되었던 정세는 일종의 이행기적 상황을 떠올릴 법한 비상시국이 분명했다. IMF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 양자가 공히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는 통치할 수 없고,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받으며 살아갈 수 없는 일종의 준이행기적 상황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면정세의 위기적인 소시기 국면은 4·15 총선을 통한 지배계급 내 파워시프트(권력변동)와 재편으로 외형적으로나마 재안정화되어 점차 닫혀 가고 있으며, 체제이행(위기의 혁명적 전화)을 예비하게 될 새로운 주객관적 조건의 창출을 억압하고 있다. 지배체제의 위기심화가 피지배계급의 주체적 태세 없이 계급투쟁의 폭과 수위, 그 역동적 발전방향의 진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사실만으로는 이후 계급투쟁의 양상이 매우 격렬해질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외에 어떤 것도 확정된 것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과 기존 지배질서의 내적 붕괴가 배제된 자들의 절망과 포섭된 자들의 불안감속에서 대중 간 연대의 파괴와 무너진 중산층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허구적 동경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위기의 심화는 오히려 새로운 이행조건의 등장을 억압하는 주역이 되고 말 것이었다. 말 그대로 "무엇도 가능하지만 어느 것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 2004 총선에서 누가 어떻게 안정적 다수파를 형성하여 혼란에 빠진 위기관리시스템을 수습해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현재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자본주의 지배체제의 위기로 발전시켜낼 것인가의 갈림이야말로 본모습을 드러나지 못한 채 묻혀버린 당면 정세의 계급대립핵심지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구성했던 개개의 핵심사안들은 각각의 참여주체와 쟁점들로 분할되어있었고, 지배계급 내 권력분쟁이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피지배계급투쟁의 의제들을 압도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사활적인 생존권적 저항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로 인한 균열을 통로로 삼아 독자적인 역사적 행위로 분출되기보다는 (주어진 정치 일정 상에 존재하는) 개개의 핵심현안들에 대한 격렬하지만 방어적인 요구행위의 형태로 계급대립지점의 갈림길에서 동요하다 소멸되었고, 조기 레임덕에 빠졌던 노무현 정권은 재신임 선언과 전면적인 대선 자금 비리 수사를 거쳐, 일정한 정세적인 주도권을 복구해내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지난해 말의 재신임-열사투쟁은 이후 별다른 평가와 계승 없이 탄핵-촛불시위로 휩쓸리고, 다시 야당교체론으로 표현된 총선국면으로 빠르게 순치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위기비판의 관점에 입각한) 노동자 민중생존권과 반전-반신자유주의적인 운동의 의제들은 '정치'에 의해 억압되거나, 자기과제를 '정치'에 위탁하여 스스로 비정치적인 쟁점으로 제한된 가운데 자기 검열되고, 분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냉정히 직시해본다면, 이제까지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지배체제의 위기로 인한 작금의 생존권적 민주주의적 위기를 정상화하고 수습해야할 '비정상국면'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그 외적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지배계급과의 대척점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선 양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과 자본은 시시때때로 분출되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반미반전투쟁과 집요하게 분리시키고, 반신자유주의적 생존권투쟁 속에 녹아있는 투쟁의 보편적 성격들을 폭력/비폭력, 합법/비합법, 정치/경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교묘하게 분할 타격하는 성공적인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번 촛불-총선 국면에서 여실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정당성과 대표성을 상실한 지배 정당정치는 사회운동적인 쟁점들, 피착취계급 대중운동의 의제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법적 물리적으로 억압할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정치캠페인의 도구로 착취하기 시작했다.(정치수사적인 좌익화) 결국 또다시 관건은 '닫힌 정세'를 열어낼 대중의 정치적 통합과 행동의 전망일 것이며, '열린 정세'를 결정짓게 될 대중운동의 발본적 혁신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의 대중적 기반 형성, 그리고 이를 통한 반신자유주의 전선복구는 더욱 현실적이고 사활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전쟁과 경제위기로 점철된 이행의 시대이념으로 개조해야 할 것이며, 코포러티즘적인 당과 노조를 사회운동기관으로 개조해야한다. 이로써 노동자 민중의 새로운 연합과 자기통치로 가는 교두보들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 수행의 현실적인 착수는 총선 이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합의'의 외곽에서 ('사회적 합의'의 일각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대중적 표상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관통하는 별도의 대중적인 운동의 흐름을 형성해내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관통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 흐름이 기존 노조-정당의 다수파(지도부)와 대립하는 소수파연합이나 분리주의가 아니면서, 기존 운동질서를 관통하여 그 권위와 체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형태의 맹아가 되어야한다는 의미이다. 지난 10여 년간 민중운동을 지배해온 코포라티즘적인 산별-진보정당 노선은 점차로 증대한 노동자 대중운동과 노동자운동 조직사이의 괴리, 노동자운동 조직과 진보정당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기보다는 이에 부합하는 대응방식이었다.(실리적 동원과 실용적 역할분담, 나아가 의사擬似동원 구조로 진화중이다) 극한의 생존 위기 속에서 수동화된 대중은 날로 우경화되는 노동조합의 알리바이가 되었고, 다시 우경화된 노조는 진보정당의 우경화의 알리바이다. 그리고 점차 이러한 연쇄의 탈운동적인 결과가 대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대중, 운동, 조직, 정당 사이의 불신과 괴리는 더욱 더 깊어지는 끊기지 않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태 해결의 방식은 역전된 운동사적인 진행방향을 아래로부터 역주행하는 역전전략이어야 한다. 우선은 지역, 업종, 당, 노조, 사회단체를 막론한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지역적 소모임 들의 구축이 시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조직 형태들은 잠정적으로는 '완성된 사상적 통일을 전제하지 않는 공동행동', 완성된 형태의 행동통일 없는 사상적 토론과 공유가 가능한 '자발적인 사상학습 소모임', 혹은 그들 간의 자발적인 연계망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혁신의 흐름이 복구되지 않는 대중운동의 침체와 패배를 (다른 정파의)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대중의 정치/대의제 자체에 대한 불신에 영합하면서, 당과 노조의 소수파연합이나 분리주의로 귀결될 경우, 이는 노동자 운동의 대중적 표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그것과 부당 대립(고립)하거나 내부의 즉자적인 정파적 갈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지배정치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운동조직 내에서 지체되어온 페미니즘적 문제와 환경 (지역 간 불평등과 결합된), 문화적 갈등 등의 첨예한 사회적 쟁점들이 (기존 대중조직과 당내에서) 분리주의적인 형태로 표출될 경우, 사태는 (전진적인 혁신의 방향과는 동떨어진) 자기 파괴적인 '르 상티망의 정치'(약자의 강자에 대한 원한의 정치)의 양상으로 진행될 위험이 크다. 이러한 양상의 진행은 착취와 차별의 조건과 원인에 대한 투쟁을 착취/차별의 효과 및 결과에 대한 부인과 거부, 이탈로 머물게 하여 더 이상의 전진을 봉쇄하는 자멸의 길이다. 소수자 운동의 관점에서 다수자 운동의 관점으로, 문제 해결자-대변자의 관점에서 억압된 다수대중의 이해와 요구의 목소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발언하고 행동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운동으로 나가야하며, '관리된 변화'의 틀을 개방시켜내려는 노력, 즉 '봉기의 정치'적인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PSSP
1. 총선 이후 정세 변화 개괄 탄핵 이후 정치지형 변화 정권을 잡은 지 단 17일 만에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을 위시로 '탄핵'이 거론될 정도로 노무현은 의회 내 지지 세력이 거의 바닥인 상태였다. 그러나 2004년 3월 노무현은 이른바 부패 정권에 의해 대통령직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이는 '탄핵 무효'를 외치며 광화문에 몇 십만의 대중들을 동원할 정도로 핵심적인 정세가 되었다. 광화문 촛불 집회를 비롯하여 '탄핵'을 둘러싼 입장들을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하나는 의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 비판의 폭발, 다른 하나는 발 빠른 기회주의 세력에 의한 정세의 희석화(탄핵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친노/반노, 탄핵반대/찬성으로 몰았던 흐름)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진보운동 안에 존재하는 개량주의 세력의 색깔이 드러난 점이 의외의 성과였다면 좌파는 정치행동에서 무능력함을 반복했다. 총선에서 사실상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헌법개정안과 아주 특별한 의안 처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반 법률안은 무조건 통과시킬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에 군소 정당으로 몰락한 '민주당'과 '자민련'은 말 그대로 '몰락' 그 자체이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라는 날개로 당당히 제 3당으로서 당당히 위치하면서 제도권 내의 정치투쟁을 기획하고 있다. 반신자유주의 전선 해체 우려 의회정치의 다양한 정치지형 변화와는 달리 대조적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적극 동의했던 노무현-열린우리당은 총선 이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할 것이며, 이라크 파병은 국책 사업으로 재론의 여지없이 진행될 것이다. 반전-반세계화 전선은 이러한 정세에서 자칫하면 붕괴, 희석될 우려가 있다. 탄핵 정세에 의해 기간 묻혔던 반 WTO/FTA 반대 투쟁은 힘있는 대중투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WTO/FTA 반대 투쟁은 벌써부터 그 핵심 전략을 의회 내로 집중시킬 우려가 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거리의 정치'이자, '거리의 대중 투쟁'이다. 민주노동당이 약 15%의 정당지지를 기반으로 10석의 의석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헌정사상 47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꿈같은 일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어떠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299:10이라는 구도 속에서 한줌도 안 되는 민주노동당의 입지는 오히려 의회 내적으로도 약화될 수 있는 불안 요소가 엄연히 존재한다. (합리적인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그러나 실재로는 선명한 '자유주의 정권'인 열린 우리당의 과반수 의회 점유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지닌 기본노선인 신자유주의반대 입장의 정책들이 번번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여전히 중요한 것은 제도권 내의 완전한 진보정치 실현, 진보정치 투쟁에 있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리의 정치'이자 '거리에서의 대중 투쟁'이다. 2. 총선 이후 교육정세 교육 시장화, 개방화 안정적 궤도 구축 신자유주의 정권인 노무현 정권,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 해줄 명실상부한 '거대 여당'으로 부상한 열린우리당은 신자유주의 질서를 이전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강제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치명타를 입을 분야가 노동과 더불어 교육이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가 물류와 전통적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형 경제 중심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이란 우리가 말하는 인류사회의 발전적 지향을 갖는 지식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기존의 국가가 어느 정도 공적 책임을 지고 있던 교육에 대한 재정의 일부분을 지방으로 이양하여 (그것도 차등화 하여) 중앙 정부의 공적 책임을 분산, 방기하면서 이와 함께 전개되는 것은 지식과 학교장치의 철저한 차등화 전략이다. 차등화 전략의 가장 큰 기준은 '얼마나 단기간에 보다 많은 자본을 유인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이다. 이는 철저하게 차등화 되어 있는 지식을 소유한 자와 이를 상징하는 대학을 졸업한 자 간에 노동시장의 차등화로 귀결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사교육비 절감 대책'이라기보다 '학교 학원화 정책'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전체 교육정책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기반하여 만들어지고 작동되는 현 메커니즘을 그대로 둔 채 단기적이자, 임시방편적 처방에 그치는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한국의 사교육비의 증가를 들어 학교를 학원화하여 교사 노동을 유연화하고 통제하려는 일련의 음모이다.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이 나오자마자, 교사 평가제와 수석교사제 등 교원평가에 대한 일련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사교육비 증가의 주된 요인은 교사의 무능력함으로 몰아가려는 저들의 전략에서 우리는 시장화가 아닌 진정한 민중교육권 실현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련의 자발적 자유화 조치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째로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있고, 둘째로 사립학교청산법, 세 번째로는 학벌주의 종합극복대책에서 자신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낸 국립대 법인화 정책이 있다. 물론 국립대법인화 정책은 '대학 구조조정'의 큰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우리는 자발적 자유화 조치를 국내 교육 시장화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교육부에서 교육개방 교양 자료에서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은 국내 교육 법안이므로 WTO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는 순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비스 협상 분야인 통신 분야는 97년 통신협상 이후 자발적 자유화 조치로 (국내 규제 완화) KT의 외국인 지분을 49%까지 확대하였다. 이는 바로 2003년 양허안에 포함되어 2003년 당시 33%까지 제한되어 있는 KT 지분을 49%까지 확대한 바 있다. 이를 교육과 유비해 본다면,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으로 인하여 초중등외국교육기관까지 학력인정, 과실송금허용, 내국민입학허용이 이어진다면 이후 몇 차례의 협상 조건에 포함되어 양허 수준이 점차 자유화될 것이다. '외국교육기관특별법'으로 인한 교육시장화 흐름은 GATS 협상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우리가 외국교육기관 특별법이 자발적 자유화 조치라고 부르는 이유다.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의 문제점은 어느 정도 인지가 되었으니 넘어가자) 한편 '사립학교청산법'은 학교 청산시 재산의 30% 정도를 설립자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인데, 이것은 교육개방의 가장 쟁점이 되었던 '과실송금허용'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WTO 조항은 외국기업, 혹은 교육기관과 국내 기업과 교육기관간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바로 '내국민대우조항'이다. 만일 '사립학교청산법'이 법제화된다면 외국교육기관이 청산(파산)할 경우 잔여재산 중 일부가 학교 설립자 즉, 본국으로 송환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과실송금 허용'이 '손 안 되고 코 푸는 격'으로 쉽게 풀리게 되는 것이다. 개혁 입법 추진 가시화 진보정당의 성공적(?) 원내 진출은 대중운동단위에 이러저러하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기존의 수세적 저지 투쟁을 넘어 공세적인 개혁 입법 추진이 다소 탄력을 받을 것이라 보인다. 현재 교육운동 단위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 입법으로는 ▶사립학교법의 민주적 개정 ▶공공성에 입각한 유아교육법 시행령 제정과 개정 ▶민주적 교육과정을 위한 법령 정리 ▶급식법 개정 ▶학교자치, 교장선출보직제 ▶학벌/대학서열 완화를 위한 서울대 설치령 폐지 및 학력차별 금지법 제정 ▶농어촌교육특별법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정세적 중요도에 따라 몇 가지가 쟁점화 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혁입법 추진 과정이 의회 내, 외를 둘러싸고 가시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3.교육운동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교육운동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제 범국민교육연대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진영은 'WTO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 공공성 실현'을 위하여 결집한 상태이다. 범국민교육연대를 중심으로 교육의 문제가 단지 교육현장으로 국한되어 풀어지는 것이 아닌 전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어야 됨을 교육운동주체가 각인하고 있음은 너무나 중요한 점이다. 그러나 범국민교육연대에서 투쟁계획을 잡고 있는 일련의 흐름들은 상층부를 중심으로 한 '정책 만들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뼈아픈 사실이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구체적인 정세를 통한 구체적 분석이 실천 투쟁에 있어 기초 작업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과학적 분석, 즉 이론에 가까운 정세 분석 안은 지면 안에 갇힌 박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면 안에 박힌 서술된 글자를 빌려 구구 절절히 정세를 분석한 것은 현실 정치 안에 뛰어들어 살아 넘쳐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정책이 대중 이데올로기화하여 실천 투쟁에 적극 개입해 들어가야 됨을 이른다. 구체적으로 보자. 범국민교육연대에서 구체 대안 지점으로 제출된 '공교육개편안'이 몇 번의 토론회, 그리고 범국민운동 차원에서 선언운동으로 현실 정치에 개입해 들어 갈 수 있는가! 혹은 대학 평준화 방안, 국립대 네트워크 방안, 대학 서열화 철폐와 학벌사회를 넘어서려는 이러한 정책들이 몇몇의 교수들과 몇몇의 대중들이 한 방에 모여 토론회를 한 들 이것이 현 정세를 공세적으로 개입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가! 또는 개혁입법 추진 투쟁이 원내 진출한 10명의 진보인사들이 의회 내에서 잘 싸워서 될 수 있는 문제인가! 혹은 수많은 개혁입법들이 원내와 거리의 투쟁이 잘 조합된 다하여 진정으로 개혁 입법이 될 수 있는가! 만에 하나 민중 주도 몇 가지의 개혁입법이 제도화된다고 한다면 민중운동진영 또는 시민사회운동에서는 그 제도가 꾸준히 민중적으로 전개되기 위하여 하나의 '감시단' 역할을 떠맡게 되지는 않을런지..... 차가운 시선으로 보면 대강 이러한 문제의식이 머리에 떠오른다. 자본의 숨통을 끊는 핵심 의제를 도출하여야 한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자. 아래로부터의 현실 정치 투쟁, 좁혀서 교육투쟁, 운동이 개별 사안에서 출발하여 단계적인 대중의 인식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좀 더 분명히 대중의 의식은 어떤 투쟁에 동참할지라도 보다 다른 투쟁으로 연결될 만큼 단계적으로 변화,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대학사회에서 매년 등록금 투쟁이 학부제 반대 투쟁, 또는 지방대발전법안 반대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등록금 투쟁을 전개하면서 인지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우리까지 포함하여)의 의식의 변화는 반드시 단절을 겪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선명한 착취의 모습을 가시한 자는 (때론 자본과 타협하는 일상을 겪게 되지만) 결단코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못할 것이라 본다. 이것을 우리는 확실히 부여잡아야 될 것이다. 요는 어떻게 하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과 선명하게 단절할 수 있는 점을 이제는 우리가 답을 해야 한다. 교육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하여 자본주의가 재생산되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훌륭한 이론가들을 빌어 알 수 있었다. 자본주의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학교장치가 아닌 전혀 다른 가치와 구조를 가진 질서는 무엇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핵심 투쟁 의제를 무엇으로 사고해야 될 것인가! 4. 사회운동과 교육운동의 접합 지점 교육투쟁이 학원 내의 문제제기로 그치지 않기 위하여 반드시 사회운동과 교육운동이 접합되어야 된다. 즉, 사회운동의 과제와 교육운동의 과제가 서로 교집합 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사회운동의 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서 의회 내로 안주하는 투쟁 방식에 집중하기보다 대중투쟁의 복원에 힘써야 됨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교육운동도 학교 내를 넘어서는 전체 사회문제를 짚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 벌어지는 노동의 유연화 문제와 접합해야 한다. 노동의 유연화는 두 가지 방식에서 벌어진다고 판단한다. 다기능숙련 노동자를 육성, 고용하여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는 흐름, 정규직 노동자를 지속적으로 비정규직화 하는 것. 전자의 문제는 교육운동 과제와 결부한다면 학부제 문제로 연결되겠고, 후자는 대학 서열화와 학문 서열화를 통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갈라치기 하는 것의 문제로 연결이 된다. 구체 교육정책을 들면, 실상은 학문의 서열화와 학문의 시장화를 촉진하는 학부제 추진 방안, 선택과 집중의 원리로써 '지방대학 육성방안'과 '산학교육진흥법'을 들 수 있다. 학문의 서열화, 대학의 서열화-학벌 문제 재조명 좋은 대학과 나쁜 대학의 기준이 어느 샌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가'로 바뀔 만큼 청년 실업의 문제가 실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학벌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학벌 좋은 직업을 가질만한 토대가 되는 학교를 졸업하여 탄탄대로를 걷는 이들이 '군'을 형성하고, 학벌을 중심으로 형성된 '군'은 계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문제를 우리는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놓고 자유주의자들은 학벌이 아니라 '능력'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능력'있는 학생들을 '선택'하여 '집중'지원하자는 신자유주의개혁세력들의 절대절명의 과제에 힘을 싣게 된다. 능력있는 대학을 살리고 잔챙이 대학들은 싹 정리, 능력이 되는 학문들만을 살리고 그렇지 못한 학문은 통합과정을 거쳐라! 라는 그들의 논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능력주의'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대학서열과 학문 서열 구조가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분할 질서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보자. 육체노동과 지식노동 분할 구도를 강화하는 대학서열 철폐, 학문 서열 철폐를 외치는 우리들에게 개개별의 능력을 키우라는 말은 돈 많은 자본가들은 성실하게 일하여 돈을 많이 모든 것이며 반면 노동자들은 게을러서 자본을 못 키운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을 가지게 된다. '사회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존재 한다'라는 맑스의 말처럼 대학이 서열화 되고 학문이 위계화 되는 것은 결단코 개인의 능력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본가 계급이 철저하게 학교와 학문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계급투쟁이다(온전한 착취를 위하여). 자본주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분할하기 위한 그들의 치밀한 전략이다. 요는 학벌은 학력차별 철폐 그 자체로 선명한 우리의 구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명한 구호는 지식의 차별로 인한 노동의 위계화 철폐이다. PSSP
월간 pssp 5월호 특집글로 실릴 예정인 [총선결과 분석과 사회운동의 과 제] 입니다. 참고하십시요
월간 사회진보연대 2003년 12월호에 실렸던 [노무현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어떻게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이니셔티브 를 거세하는가? -‘참여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反민주주의적 성격] 이 란 글입니다. 한글97 파일입니다.
2004 총선은 그들의 위기를 증폭하고 있다. 정동영 의장은 현재 지역구 판세가 110대 110의 박빙이며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했다. 한겨레는 사뭇 비분강개한 어조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안일하게 대처하여 차떼기 부패와 대결정치에 골몰한 한나라당에게 면죄부를 주게 생겼다며, 망국적인 “묻지마 지역주의”가 결국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고 질타하고 있다. 만약에 한나라당이 스스로 설정한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겨레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낡은 국민의식을 한탄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열린우리당이 1당을 차지하게 되면, 정동영 의장이 말해온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으로 간주해야 되는가?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거여(巨與) 또는 권력 단점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을 보장하리라 기대해야 하나?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어느 한편만이 지역주의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편만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개혁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야 정당 모두가 이라크 파병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고, 검찰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에는 침묵으로 환영 의사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아끼는 친구” 같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상생의 정치”를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지금도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 - 거짓 희망을 조작하기 위한 지역주의의 동일한 과정 한겨레는 “심판 없는 지역주의 우려된다”는 사설에서 한나라당의 영남권 싹쓸이는 지역주의 탓이라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고, 호남권에서 민주당의 재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규정하였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높은 충청권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한 유일한 사례인가). 그러나 지역주의는 왜 재생산되고 있는가? 사실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지역발전”이라는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선 DJ의 계승자로, TK에서는 YS 이후 이 지역을 대변할 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제시했다. 노무현의 등장은 지역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안배하거나 조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주의를 승인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현재의 경제개혁이 낳은 지역경제의 파탄과 불균형에 따른 것이다. IMF 이후 지역산업의 공동화가 심화되었고, 주식■부동산 시장 팽창에 따라 자금의 역외 유출도 커져서,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몰렸다. 지자체는 산업특화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거나 소비■레저산업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바닥을 향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 철회를 단지 “망국적 지역주의”, 또는 “지역주의=지역이기주의”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실리적인 희망을 실현하거나 새롭게 조직하지 못한 결과를 반영한다. 이런 지반 위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민주당)이 격돌하고, 그 결과가 드러나는 동일한 과정이다. "박근혜”? - 보수의 편에 선 개혁으로의 수렴? 물론,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나 지역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적인 의제에 대해 유연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이다.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출신인 박세일을 선대위공동위원장으로 내세우거나, 지금까지의 한나라당 당론과 달리 “호주제 폐지”를 정책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나, TV 광고에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장면을 삽입하려 했던 계획 등등은 중요한 사례다. 또한 “대한민국의 세 가지 상징은 현충원, 4.19묘지, 광주 5.18묘역이며, 나름의 정통성이 있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연설도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생략한 교묘한 발언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세력이 선도하거나 독점하려 했던 의제들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연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노선이 과거 이회창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회창의 철저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 행태에서 큰 강점이다. 물론 시도해보겠다는 의지와 반대로, 호주제 폐지 공약은 당 내 입장을 수렴하여 총선 이후에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북한방문 영상도 기존 반공단체의 의견을 수렴했으나 결국 조금의 역풍도 있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으로 중도 포기한 것도,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마스크를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파퓰리즘을 향한 큰 방향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는 이처럼 여러 얼굴을 지녔으므로, 여러 모로 유리한 점도 많을 것이다. 미디어 파퓰리즘? - 미디어가 정치를 제시한다. 모든 언론은 이번 선거가 “정책선거”의 상식적인 틀을 벗어났다고 앞다투어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마저 “선거전이 막판까지 천박하고 표피적인 전술과 정치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울분에 찬 듯 주장하고 있다. 언론이 나서서 이번 선거가 “감성정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이 그러한 흐름에 편승해 특정 정당 편들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서로 극한 패싸움을 펼치고 있다. 물론 각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특히 TV라는 막강한 매체를 중심으로 이미지 조작에 치중해 지지자들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려는 행태를 미디어 파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제 미디어가 정당의 역할을 대행한다는 사실이다. 곧 미디어가 위로부터 사회질서를 부과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또한 전략이나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대처할 방법을 제시하고, 지지자들에게 어떤 상황에 대처할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현실 전체를 가리킨다. 어쩌면, 언론이 현재의 정당정치를 일관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관된 노선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곧 정당정치를 완전히 대체하리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정당이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것, 곧 기존의 대중 동원체계를 스스로 제거하고, 이를 전문가주의와 미디어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방향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개가 가능한 것은, 이미 어떤 정책들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세계 경제기구들이 제안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경제, 사회정책은 세계 공통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제 각 나라에서는 전문가들을 육성해 미디어와 정당이라는 기구를 통해 그것을 제안하고 실현하고 지지를 동원하는 체계를 작동하면 된다. 각론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세가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대연합? - 거여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준비할 수 없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정책전환도 예고하지 않고 있다. 단지 천재일우와도 같은 “탄핵심판론”에 기대 기사회생을 바라며, 정동영 의장과 386출신 초선의원이 농성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여가 되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어떠한 포부에 찬 말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이미 집권 1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간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노무현을 위기로 몰아넣었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즉 사회 재건을 동반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책, 즉 그들이 위로부터 부과하려는 사회의 질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하여 소수의 집단만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모순된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관리의 실패는 항상 내재한 것이고, 어떤 우발적인 문제로도 쉽게 전면화될 수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과 미디어 파퓰리즘에 의존하는 여야정치는 특정한 이념과 정책에 바탕을 둔 안정된 지지연합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항상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지만, 그 결과가 뚜렷한 정책전환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만성적 위기다. 그것은 “현직”, 즉 집권세력인 열린우리당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정당의 어떤 시도도 단지 위기를 미래로 연장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야의 악무한 대립은 연장된다. - 민중운동의 입지점은? 물론 IMF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행정부와 사법부로의 권력집중 현상은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겠다는 욕망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 사회개혁을 신속하고 파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이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후 의회에서조차 세력을 크게 신장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안정적인 정국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무현 정권 1년이 보여준 악순환이 더 큰 형태로 반복될 것인가?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은 집권세력에게 모든 화살이 꽂히는 것을 분산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그의 발언이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책이 원래부터 실현 불가능했다는 현실을 국가기구의 일부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였다면, “정규직 노동자 이기주의” 발언은 민중 생활의 위기를 노동자 대중 일부에게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집권과 정치적 위기관리를 위해 내놓은 거짓 약속이 파탄나면, 그것은 남의 탓이었던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정치 행태는 의회에서 세력을 신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내기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야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고, 민중운동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넣기 위한 전략을 동반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은 대거 의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에게 큰 시련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국면들의 연속 속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꽃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보다는, “차악”의 선택을 항상 강요당하는 고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법률안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최근까지의 “노동법 개악”의 흐름처럼, 특정한 정책묶음의 교환을 선택하라는 상황이 인위적으로 조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적으로 최근 대통령 탄핵사태에 같이, 여야정당의 악무한적 대립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이냐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어떤 편에도 설 수 없는, 그리하여 무대에서 조연자 역할에 머물라는 어정쩡한 위치를 강요당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탄핵사태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치였던 듯하다. “탄핵기각, 진보정치 실현”으로 요약되는 모호한 태도는 현재의 “진보야당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차악의 선택이나 “진보야당”의 모호한 입지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사회운동들과의 밀접한 연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의 지지율의 상승은 이러한 요구를 가리키고 있다). 진보정당이 “정책정당”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 정책은 어떤 이론적 구축물에서 도출된 것이거나 위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부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투쟁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