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인터뷰 | 2024.05.27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증인, 양경규 의원이 말하는 22대 총선 평가

"정의당의 패배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함께 가는 구조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 "민주연합 노선과 정확히 선을 긋고 갈 기회를 실기해"

사회진보연대
 
5월 21일 수요일 늦은 오후 《사회운동포커스》에서 4개월간의 짧고 굵은 임기를 보내고 있는 양경규 정의당 국회의원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21대 국회의원 임기가 막바지라 한산한 의원회관에서 양경규 의원실만 유독 분주해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준 양경규 의원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인터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싣는다. (-> 인터뷰 2부 보기)
 
임필수 정책교육실장(이하 임): 큰 틀에서 인터뷰 주제를 다섯 가지로 나눴습니다. 1. 양경규 국회의원의 활동 2.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평가 3. 녹색정의당 총선 평가 4. 진보정당 간 관계 설정 5.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본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장래입니다. 큰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양경규 국회의원의 활동에 대해서
 
임: 저는 양경규 의원을 1997년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으로 활동하실 당시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첫 만남은 정치연대와 간담회를 할 때였죠.
 
 
양경규 정의당 국회회의원(이하 양): 그 자리에 계셨군요. 97년이면 거의 30년 전이네요. 당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이 상당했기에 민주노총이 주도해서 정치세력화를 이뤄보고자 했던 것인데, 사실 노총 내부에서도 논쟁이 많았습니다. 크게 보면, 현장 투쟁이 곧 정치운동이라고 얘기하는 블록, 노동운동의 현안이 중요한 시기라 정치세력화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블록, 1996~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지금이라도 노동자 정치운동의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블록, 거기다 50년 만에 정권 교체가 가능한 시기니 민주당과 연대해야 한다는 블록까지. 오히려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세력이 소수인 상황에서도 민주노총이 중앙에서 강하게 이끌어가며 정리했던 것이죠.
 
민주노총이 죽어도 하겠다고 하니 전국연합도 결국 합류는 했는데, 아마 내부적으로는 당시 후보 사퇴 방안까지 열어두고 결합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렇게 정리가 되는 중에, 좌파 블록이 정리가 잘 안되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산별들 중에는 단병호 위원장이 이끌던 금속연맹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노동운동 현안 중심으로 가자는 입장이었죠. 이러한 입장이 일종의 탈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현장파는 노동자 정치에는 동의했지만 그 정치란 곧 현장 투쟁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현장파를 설득하기 위해 간담회 자리를 가졌던 것이죠. 결국 대다수 함께하기로 했지만 청년 진보당처럼 일부는 결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국민승리21에서 김세균 선생이 교육위원장을 맡았고, 오세철 선생이 공동대표였습니다. 당시 진보민중청년연합 김봉태 의장이 정보통신위원장, 노회찬 선배가 기획위원장, 제가 조직위원장이었죠.
 
임: 그 후로 지금까지 의원께서는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에 줄곧 헌신하셨습니다. 올해 1월 의원직을 승계하면서 등원하시게 되었는데요, 소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양: 좀 더 빨리 갔으면 굉장한 소회가 있었을 텐데, 임필수 실장도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어봤기 때문에 아실 테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민승리21 때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보겠다는 자신감과 열정이 충만했다면, 지금은 운동의 흐름 속에서 내가 기여할 바를 찾거나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임기가 끝나고 뭐 하실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질문이 의미가 없는 것이, 어차피 운동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고 어떤 직을 맡든 안 맡든 그건 변함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남다른 소회는 별로 없는데, 다만 뭘 어떻게 해야 이 시기에 국회의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많이 합니다. 물론, 가끔 ‘내가 진보정당 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하는 소회가 들 때도 있습니다(웃음).
 
임: 그럴 리가요, 많은 분이 의원의 공로를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4개월 정도 의원 활동을 하신 셈이 되는데, 어떤 활동에 주력하셨나요?
 
양: 저는 노동자운동과 정치운동이 어떻게 하면 병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화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도권 정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한편으로 제도권 정치를 현장운동보다 과도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전형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도권 정치가 그렇게 폄하될 만한 운동이 아니라는 점도 보여주고, 제도권 정치만이 모든 것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좀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제도권 정치와 현장 정치, 정치운동과 사회운동, 여의도 정치와 광장의 정치를 어떻게 엮어야 할까. 저는 결국 정의당의 실패가 이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데서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하더라도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자기 전망이 없으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4개월간 투쟁사업장을 참 많이 방문했는데요, 등원하자마자 갔던 곳도 한국옵티칼지회 투쟁 현장이었습니다. 투쟁사업장을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 안는 것, 정치적 제스처라 할지라도 진정성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현장 정치와 제도권 정치를 결합하는 초석이라 봅니다. 예를 들어, 가서 연설만 하는 게 아니라 오체투지도 함께 하고, 1박 2일 농성도 하면서 정의당 양경규 의원 이름으로 천막을 따로 꾸렸을 정도로 밀착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몇 년 더 지속됐다면 정의당과 사회운동의 접점이 형성되면서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동력이 있다면 의회정치가 지나치게 제도권 정치라는 한계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어떤 요청이 의원실로 들어오든지 간에 물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기 중에 결국 해결하지 못한 투쟁사업장 현안이 30건이 넘는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했고, 해결을 못 했더라도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확인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에게도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움직였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접점을 확장해 나가는 경험을 책임 있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연구단체나 시민사회단체와도 마찬가지고요.
 
 
2.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평가
 
임: 2004년경,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실현된 후, 정영태 교수는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역할 다섯 가지, 즉 법안 저지와 같은 저항집단, 민원 해결자, 이익 표출자, 다른 정당들과 입법 협력을 통한 온건화 전략, 대중운동을 세력화한 정치적 동원을 꼽았었습니다.
 
양: 정영태 교수가 얘기한 것은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 와 보니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문제인 거죠. 예를 들어, 이익 표출자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정당들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안을 제출하려고 해도 10명의 의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 역시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일정하게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고,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의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소수정당으로서 진보정당이 사회운동과 같이 갈 수 있는 구조나 철학이 사상되면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정의당의 패배는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데 원인이 있습니다.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인물로 유지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고 그 단맛에 취해있었던 거죠, 그 단맛이 빠지자마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한 마디로 노동자 정치운동을 여의도 의사당으로 가두었던 것이죠.
 
임: 양경규 의원은 민노당 분당 사태부터 노동정치연대가 정의당으로 통합할 때까지 당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7년 국민승리21부터 2024년 녹색정의당까지 역사를 볼 때,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단절성,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시는지,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양: 노동운동 내 좌우파만 있었을 때 처음에 저는 좌파로 분류되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중앙파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 이 구상이 얼마나 정교한 이론적 토대에서 나왔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기관지 한 번 내본 적도 없고, 나중에 만들어진 전진 역시 따지고 보면 노동운동 내의 중앙파라기보다는 정당 내의 조직이었죠. 개인적으로 노동운동은 생래적으로 개량적 속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산별적 구조도 아닌 기업별 노조 기반으로 출발한 운동이다 보니, 조직의 존재 양식이 노동자들의 계급성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노협 시절만 해도 사업장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을 함께 올릴 수 있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면, 즉 단위노조의 임금투쟁이 사회화, 계급화되는 변혁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노동운동이 일정한 궤도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개량적 양상을 갖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조건을 넘어서는 제도를 만들지 않고서는 그러한 양상으로 급격하게 쏠릴 수밖에 없는데, IMF를 거치면서 급속히 개량화된 것이죠. 한편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87년에 시작한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결국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역전하기 위한 운동들, 한편으로는 산별운동의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요. 그나마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정치운동이, 가속화되는 개량화의 속도를 늦추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마저 없었으면 훨씬 더 빠르게 개량화되었을 거라 봅니다. 상반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제가 갖고 있는 철학은 그렇습니다.
 
 
저는 민주노동당 분당과 함께 노동자 정치운동이 일정하게 단절되었다고 봅니다. 이왕 제도정치에 들어갔으면 민주당과의 연합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시각이 대두했고, 결국 분당까지 가게 되었는데요. 분당의 계기는 노선 문제도 있었고, 북핵 같은 사안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패권주의 문제가 컸습니다. 사실 탈당파 역시 민주당과의 연합에 있어서 강고한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분당 이후에는 진보정당이 계급운동과 사회운동의 통합을 통한 정치적 급진주의 운동이나 사회운동 정당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분당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을 주도하는 세력과의 동행도 쉽지 않아 탈당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왕에 이렇게 된 김에 분당그룹이 만든 진보신당을 통한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왕에 고꾸라졌다면 새롭게 판을 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진보신당이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보다는 다시 제도권 중심의 정치운동으로 가는 걸 보면서 진보신당에서도 손을 뗐습니다. 그렇게 당적도 갖지 않은 채 살다가, 이 단절점을 극복해 보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노동정치연대입니다. 손을 완전히 놓을 것이 아니면 한 번 더 해보자, 이제 민주노총이 주도해서 판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 없다, 그렇다면 시민사회, 정치세력에서 새로운 계급정치가 필요하다는 관점에 동의하는 집단을 모아내 정의당과 함께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때 이현대 동지였나요? 사회진보연대도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에 사회진보연대가 함께하지 않는 통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생각해 보니 공공연맹 위원장 시절에도 저와 많이 부딪혔던 것 같네요(웃음).
 
많은 사람이 민주노동당의 창당을 96~97년 총파업의 성과라고 잘못 생각하는데, 정확하게는 한계라고 말해야 합니다. 총력투쟁에서는 승리했는데 결국 의회에서는 단 두 줄 고쳐져서 통과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의회 권력을 진지하게 사고해 본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민노당 초창기에 이 당의 기본적인 이념과 전망에 관한 생각이 아주 깊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노동당은 매우 조합주의적인 관점을 수용한 정치세력이었다고 봅니다. 민노당은 96~97년의 투쟁이 만들었지만, 동시에 96~97년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영글지 않은, 그 실험을 복구하기 위해서 정의당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등바등 분투했지만 결과적으로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현재는 마침내 정확하게 두 번째, 완벽한 단절의 시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3. 녹색정의당 총선 평가
 
임: 그 당시에 민노당 탈당그룹도 민주연합에 대해서 그렇게 공고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 역시 2010년대 진보정당 역사를 봤을 때 통진당이 몰락한 이후, 진보정당의 주류가 된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표상하는 진보정당 노선은 전략적 야권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선거법 개정이라는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야권연대가 필요하다는 논리였고, 실제 2019년 패스트 트랙으로 선거법이 개정되어 앞으로 꽃길만 남았다, 자체적으로 원내 교섭단체도 꾸릴 수 있다고 큰 희망을 품었었죠. 하지만 이 노선이 정의당이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결국 2020년 총선 때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면서 방향 상실 상태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아닐까요?
 
양: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운동과 제도권 정치를 책임 있게 결합하지 못한 데 정의당 실패의 근본적인 요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민주연합 문제는 정의당의 태생적인 한계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래도 노회찬 의원보다는 심상정 의원이 민주당과 일정하게 선을 긋는 위치였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 의원이 철저하게 계급정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요. 지금은 전환이라고 불리는 좌파 블록이 정의당에 들어와서 적응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내부 의견 지형은 노 의원과 심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연합에 대한 가능성의 경중을 가늠하며 [대립구도가] 형성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심 의원과 인천연합, 참여계를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인 당내 좌파 그룹과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2019년에 당대표를 놓고 경쟁할 때만 봐도 우리는 세력이 작은 좌파 그룹이라 주류 노선과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임: 이번에 녹색정의당의 총선 평가를 보면, “가치에 기반한 정권 심판노선을 부각하려고 했지만 설득력 있게 유권자들에게 어필되지 못함”,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의 정치활동에 대한 대중적 평가가 작동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이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의원께서는 어떤 문제에 주목하시는지요?
 
양: 이번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이 정치적 구도로 주목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역대 모든 선거가 정권심판론 구도에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권심판론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지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왜 실패했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너무 심해서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그게 결정적인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실패가 10%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가 아닌 거잖아요. 3%를 넘지 못하고 원외정당이 되었다는 것이 실패라면 3% 정도의 지지기반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정권심판론으로만 실패의 원인을 지적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운동과 연결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운동으로서 진보정당의 자기 전망 상실과 이념 구축의 실패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고, 이 부분이 2020년 이후 지난 4년 동안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정의당은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회 안에서 이것저것 딴지도 걸고 싸우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얘기하면 속수무책의 소수파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혹자는 의원들의 역량에 대해 지적하는데, 실제로 같은 기재위로 출발한 장혜영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 초선으로서 실력 차이가 크게 달랐을까요? 2004년에 심 의원은 주목을 받았지만, 2020년에 장 의원이 그렇지 못했던 것은, 시대적 조건의 차이가 큽니다. 2004년 당시에는 노동운동이 국민에게 주는 이미지가 분명했다면, 노동운동이 혁신에 실패하면서 개량화된 측면이 있고 진보라고 하는 영역이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활동 자체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발언의 수위나 발의 법안의 개수는 큰 차이가 없어요. 단지 심 의원은 운동적 인프라가 주어진 조건에서 의원활동을 한 것이고, 장 의원은 인프라가 부족했기에 이것까지 책임을 져야 했는데 인프라를 구축할 만큼의 역량은 한계가 있었던 거지요. 의원 개인을 비교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임: 제가 보기엔, 정의당이 전략적 판단을 두고 우왕좌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정의당이라는 구호가 2010년대 야권연대의 전략이었고, 당시 정의당이 누렸던 일정한 득표율에 안주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닐까요. 조국 사태, 위성정당 문제를 거치면서 완전히 그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안정적인 득표 세력을 잃을 수는 없으니, 민주당과 협력 노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면서 보였던 민주당에 대한 차별화 노선과 정권심판 사이에서 진동했던 것 아닌가 합니다. 제도정치와 노동운동 사이의 인프라 구축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중앙 정치 무대에서 정의당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 세력인지, 어떤 구도 하에서 우리는 왜 양당을 비판하는지에 대해 유권자가 수긍할 만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4월 4일 김준우 대표와 심상정 의원 등 출마자들이 광화문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현수막을 들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김준우 대표는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커져만 가는데 사력을 다해 싸우지 못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저희가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러한 시도가 적절했는지,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시는지요?
 
양: 말씀하신 대로 정의당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개 사과 형식의 퍼포먼스는 처음에 지역구에 출마한 심상정 의원이 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심 의원이 [지역구 득표를 고려하여 그런 퍼포먼스를] 했던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얼마 전에도 한 시민이 자기는 지금껏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정의당에 투표했는데 이번에는 안 찍은 이유는 딱 하나라고, 심 의원 때문에 윤석열이 집권했기에 용납이 안 된다는 이유였어요. 이런 얘기를 이번 선거 때 제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 차원에서 했던 2차 퍼포먼스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저는 당차원의 사과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었고, 당일에도 참여하지 않았고요. 당일에 퍼포먼스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그런 형식의 퍼포먼스를 한다는 사전 인지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 차원의 사과는 당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행동이기도 했고, 당원들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정의당이 이번 총선에서 보였던 여러 문제는 당내의 묘한 구조를 반영합니다. 당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있어 발언권이 있는 의원들의 경우, 배진교 의원은 위성정당에 참여하지 않은 당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었고, 저와 장혜영 의원은 위성정당 참여에 반대했습니다. 녹색당 관계자들 역시 절대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위성정당 불참 결정으로 정리가 되었고 지역구 연대 역시 지역구 차원에서의 연대를 열어 놓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위성정당 불참 기자회견 말미에 중앙당이 지역구 연대는 열어둔다고 했던 게 언론에는 진보당은 비례연대, 정의당은 지역구 연대라는 식으로 나갔습니다. 사실 지역구 연대는 그동안 지역별로 알아서 논의해서 했던 경우도 있기도 했고, 집행부는 전체를 묶어 몇 군데라도 지역구 협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서는 심 의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는데,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누차 얘기했었고요.
 
당이 위성정당 불참 결정을 했다면 이 기조로 이번 선거를 치른다는 것을 정확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지도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죠. 저는 원칙 때문만이 아니라 당의 실리를 고려하더라도 지역구 연대를 열어두지 말아야 한다, 어정쩡했다가 실리도 잃는다고 설득했지만 의견을 관철하진 못했고요. 결국 민주노총 내에서 처음에는 위성정당에 참여한 진보당 측 인사들이 수세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정의당도 한다더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나오게 되었죠. 결과적으로 지역구 연대를 열어둔 것을 철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왕좌왕은 정의당 밑바닥에 민주연합 노선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정서가 강하게 흐르기 때문인데요, 이번에야말로 당이 민주연합 노선과 정확히 선을 긋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실기했습니다.
 
 
주제어
정치 노조
태그
정치세력화 정의당 노동자 정치세력화 양경규 22대 총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