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퓌레, 코반, 마르크스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재검토

마빈 콕스 |

(번역: 이아림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저자인 마빈 콕스(1934~2020)는 프랑스혁명을 연구한 역사학자로, 1966년에 교수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코네티컷 대학교의 역사학과에 재직했으며 은퇴하기 1년 전에 이 논문을 발표했다. 

콕스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수정주의적 해석과 정통주의적 해석이 오랜 시간 대립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정통주의자나 수정주의자 내에서 연속성보다는 연구자의 시대적 배경이 더 중요한 요소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수정주의가 발흥한 역사적 맥락을 거슬러 올라가서 수정주의의 기원을 검토하는 것이 이 논문의 주된 내용이다. 콕스는 수정주의의 대가 알프레드 코반, 프랑수아 퓌레와 정통주의의 대가 조르주 르페브르, 알베르 소불이 생각보다 공유하는 지반이 많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입장 차이만 아는 독자에게는 다소 낯선 시각일 수 있다.

저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수정주의 역시도 암묵적으로는 정통주의가 기반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에 상당 부분 이론적 자원을 빚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정주의가 발흥한 1950~60년대에는 학계 전반에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영향력이 상당했다. 특히나 역사학계는 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퓌레 역시 젊은 시절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었다. (퓌레는 1949년에 입당해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당을 떠났다.)

콕스는 수정주의가 정통주의와 공유하는 지반이 있는 만큼이나, 정통주의 역시 수정주의와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지금은 정통주의의 대가로 알려진 르페브르조차도 1959년 사망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옹호자라기보다는 기존의 해석에 수정을 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르페브르나 소불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까지 통용되던 마르크스주의 혁명사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르페브르는 농민에 관한 실증적 연구로 농민 봉기가 자본주의를 추동했다는 관점을 비판했고, 소불도 파리 시민은 프롤레타리아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밝혀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구체적 사료들을 발굴한 것에 가깝기에 수정주의만큼 학계에 논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구체성과 설명력을 제공한 르페브르와 소불은 알베르 마티에를 대신해 정통주의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르페브르, 소불과 수정주의를 개시했다고 평가받는 코반과 퓌레의 본질적인 차별점은 무엇인가? 콕스가 보기에 코반과 퓌레는 르페브르의 연구를 포함해 당대 최신 연구를 종합해 그 함의, 즉 마르크스주의가 상정하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틀(“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콕스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코페르니쿠스가 당시 지배적인 천동설과 상충하는 중세 후기 천문관측을 종합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켰던 것처럼, 퓌레와 코반 역시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기에 사학계에 파장을 일으킨 셈이다. 사실 수정주의가 태동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막대했기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일종의 ‘역사 종교’ 교리였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간접적으로라도 도전한 역사가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따라서 콕스가 보기에 1960년대에 특히 프랑스인인 퓌레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일은 그의 지적 용기를 보여준다. 

정리하면, 1950~60년대 들어 프랑스혁명 당시 부르주아는 어떤 존재였는지, 프랑스에 자본주의적 발전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역사학계에 내용적 연구가 진척되면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서 상정하는 도식에 맞지 않는 사례들이 등장했고, 이를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틀 내에서 통합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했던 정통주의자와 기존의 틀 자체를 의심하는 수정주의자로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해석이 대립하는 것 못지않게,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역사적 사실이 상당히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서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모습은 산업자본가였다. 그런데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는 산업자본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부를 축적한 계층이 대부분 사치재를 납품하는 수공업자, 금융자본가, 세금 징수원, 고위 관료, 지주였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르페브르는 이 중에서 혁명 전후에 국유재산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신인류’에 주목한다. 이들이 수적으로는 소수더라도 혁명 이후 큰돈을 벌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기에 이들을 부르주아 혁명의 주체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퓌레는 르페브르와 동일하게 ‘신인류’에 주목했지만, 이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은 퇴행적인 투기 거래였으며, 이들이 얼마나 앙시앙레짐의 지배계급과 닮았는지를 설명한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추동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시 프랑스는 그렇게 말하기 어려웠다. 혁명 과정에서 특히 영국과의 전쟁 이후로 해외 무역이 차단되었으며, 주식회사가 불법화되었고, 전국적 은행이었던 할인은행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아씨냐 지폐의 발행으로 졸지에 상당수의 부를 잃은 계층도 생겨났다.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였다. 이에 대해 르페브르는 많은 특권층이 부를 잠식당한 것은 맞지만 그 와중에도 ‘신인류’는 떼돈을 벌었고 이들이 이후 산업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코반은 프랑스가 산업화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제2 제정에 이르러서였기에 사실상 혁명과는 큰 상관이 없으며, 혁명이 오히려 프랑스 경제에 끼친 해악을 강조했다. 퓌레도 프랑스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로 발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르페브르와 퓌레, 그리고 코반은 바람직한 이행의 모델로 영국 자본주의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의견이 같았다. 르페브르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을 새로운 경제체제로 전환할 일만 남은 상황에서 프랑스혁명이 이 대기 시간을 끝냈다고 설명한다. 코반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환이라는 도식에 회의적이었으나, 적어도 영국에서는 중세 경제의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받아들였다. 퓌레는 영국 방식의 도입이 무기력한 프랑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으나, 공포정치기에 부르주아지와 농민이 영국 방식을 부정하고 농촌의 낡은 관행을 지속하는 동맹을 맺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추동했느냐는 질문의 답은 결국 영국 모델을 얼마나 제대로 이식했는가로 판가름 날 것이라는 데 세 학자 모두 의견을 같이한다. 단지 그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이 갈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수정주의에 대한 콕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수정주의의 궁극적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틀을 넘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완성하는 데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선 콕스가 보기에 수정주의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코반이 비판한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은 정확히 말하면 르페브르의 이론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수단 및 교환수단의 관계 속에서 계급을 정의하는 데 반해, 르페브르는 부르주아지에 이익을 얻은 소수의 기업가뿐만 아니라, 부를 거의 소유하지 않은 전문직과 귀족층으로 보이는 수많은 지주를 포함했다.

또한, 계급의 구분에서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예를 들어 퓌레는 혁명 이후 지배계급이 앙시앙레짐 당시의 지배계급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그들이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든다. 혁명 이후 지배계급은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자본가도 아니었고 상품을 유통하는 무역 상인도 아니었다. 또한, 퓌레는 혁명 이후 지배계급의 재산이 영주세를 바탕으로 한 앙시앙레짐 지배계급의 투기적 재산과 본질적으로 같기에 이들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퓌레 역시 생산 과정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와 재산이 봉건제적이냐 자본주의적이냐는 성격을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 짓는다는 것이다. 

콕스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의 발전이론, 즉 역사의 특정한 단계가 있고 도약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수용하고 있다. 물론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에 결단코 반대했지만, 실제 수정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가정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다. 코반과 퓌레의 해석은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모든 곳에서 혁명적인 영국의 패턴을 따라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콕스는 수정주의자들은 무심코 정통주의 역사가들이 이미 풍부하게 제공한 자료에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추가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간단히 “거꾸로 뒤집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역자는 콕스가 수정주의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부분을 “거꾸로 뒤집어” 수정주의의 현재성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콕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해석이 일종의 세속 종교인 역사철학이며, 인류 발전 법칙에 대한 필연적 결론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역사해석을 비단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다. 1960~70년대를 거쳐 소련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현실적 비판을 통해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을 기각하고 역사과학을 복원하려는 알튀세르의 혁신 시도가 존재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인간 역사가 진화해온 과정을 합리적, 개념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에 대한 실제적 평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에 반대했던 수정주의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콕스는 (코반의 표현을 빌려)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의 역사가 몇 개의 크고 동질적인 단계로 나뉘며, 이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순서와 형태로 반복된다”고 보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세계사적 차원에서 생산양식이 노예제에서 봉건제, 그리고 자본주의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더라도, 민족사적 차원에서 반드시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맹아가 등장하고 여기서 자본주의가 싹트는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르페브르처럼 혁명 과정에서 벼락부자가 된 ‘신인류’가 자본가의 원형임을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는 혁명의 결과로 프랑스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오히려 후퇴했다는 수정주의의 평가를 수용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다른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콕스가 수정주의가 마르크스주의 개념틀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영국 패턴”을 기준으로 프랑스혁명을 분석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한계라기보다 부르주아 혁명의 모델로서 영국혁명을 다시 재평가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콕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수정주의자는 정통주의 역사가가 이미 풍부하게 제공한 자료에 “합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추가했다. 100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은 프랑스와 달리, 영국과 미국에서는 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경제, 정치제도가 빠르게 정착했다. 프랑스혁명 당시 추구했던 경제정책 역시 중상주의로,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와 대비된다.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수정주의자조차도 결국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개념틀을 극복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현재도 여전하다. 이는 콕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콕스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이렇게 강고하게 유지되는 이유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라는 조건이 사회계급과 자본주의 생산수단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심지어는 “반공주의자 선언”인 로스토우의 『경제 성장의 단계』조차도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역사를 이론적, 체계적으로 해명하려는 마르크스 시도의 과학성을 증명해주는 게 아닐까. 혁명은 그 자체로 폭력을 내재하고 있기에 폐기해야 한다는 수정주의의 입장까지 모두 긍정할 수는 없겠지만, 역설적으로 수정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자장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하다. 게다가 수정주의의 비판은 비단 프랑스혁명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20세기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도 직결되기에 혁명의 비극을 성찰하기 위해서라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 
 
* [ ]과 제목, 소제목은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했다. 원문의 [ ]는 저자가 인용 시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으로, 여기서는 〈 〉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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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블래닝은 프랑스혁명을 다룬 최근 저술 선집 서문에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30년간의 격렬한 논쟁 후에” 이 분야는 “오래된 … 견해가 여전히 청동처럼 굳건한” 마르크스주의 “정통주의자”와 “고전”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자신의 비판으로 약화해왔다고 확신하는 수정주의자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사학사의 30여 년의 발전을 익히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진술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에 걸친 혁명 연구의 진정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정통주의나 수정주의 내에서의] 연속성이 아니다. 블래닝 자신이 관찰한 것처럼, 수정주의자의 “초점”이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비판에서 혁명적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에 대한 연구로 변화했음이 뚜렷하다. 반대쪽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도 그윈 루이스는, 수정주의자가 “정통주의” 해석을 반영한 엄격한 “결정론적(즉 마르크스주의적) 발전 법칙”의 결함을 발견한 점은 옳았다고 인정한다. 또한 루이스는 부르주아 혁명의 개념을 복잡하고 섬세하게 재평가하자고 주장한다. 조지 콤니넬은 “유물론적” 연구로의 복귀를 요청하면서, 마르크스가 기조(Guizot)나 다른 복고적 역사가로부터 부르주아 혁명 사상을 차용하면서 이를 왜곡했을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더 놀라운 일은 비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다양한 신“정통주의” 해석의 등장이다. 예를 들어 콜린 존스는 혁명이 사회적 과정의 일부였다는 “정통주의”의 믿음을 포스트수정주의의 표현 양식을 통해서 재확인한다. 윌리엄 스웰은 수정주의자와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도, 그들의 정치문화 혁명 개념 속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수사법”을 포착한다.

양 진영의 돌연변이는 [학계의] 부족한 합의와 동시에 높은 수준의 지적 활력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블래닝의 진술은 프랑스혁명 연구 실상의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수정주의자와 “정통주의” 역사가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상대방에 대한 인식은 대립 초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정주의자는 부르주아 혁명 개념이 냉정한 탐구보다는 이념적 필요에서 탄생한 망상, 즉 소렐적인 의미에서 “신화”라는 확신을 여전히 공유한다. 반대로 현대 “정통주의” 및 신“정통주의” 역사가는 수정주의자가 명백한 사실을 망각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수정주의자가 “정통주의”를 신화로 바꾸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프랑스혁명의 발발 자체도 부인한다는, 조르주 르페브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상호 비난이 지속하는 현실은 논쟁이 “귀 먹은 자들의 대화”로 전락했다는 블래닝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느 쪽도 상대방 주장의 근거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논쟁은 커녕 의미 있는 의사소통조차 어려워졌다. 블래닝이 덧붙였듯, 불통은 “사실적 지식”에 대한 인식 차이보다는 “현대사의 경로, 사회적 관계, 인간 본성과 같은 모호한 사안의 전제”와 관련이 더 크다.

근시(近視)는 귀 먹은 것만큼이나 문제다. 근시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자의 설명에서 뚜렷히 나타난다. 콜린 존스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설명은 “우스꽝스러운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예시는 프랑수아 퓌레가 “정통주의”의 연대표를 “[혁명을 전후로] 앞은 봉건제, 뒤는 자본주의”라는 단순 공식으로 환원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정통주의자의 수정주의 인식 역시 흐릿해졌다. 데이비드 벨이 퓌레를 향한 [정통주의자의] 공격에 관해 최근 논문에서 썼던 내용은 수정주의자 전체를 향한 비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공격은 “다소 무례하고 지식이 부족한 … 경향이 있다.” 존스가 수정주의를 “백마 탄 왕자가 … 사악하고 비열한 스탈린주의자 남작 … 알베르 소불의 손아귀에서 공주를 구출하려는 … 일련의 팬터마임”이라고 표현한 것은 딱 들어맞는 희극적 사례다. 그윈 루이스는 더 분명하게, 수정주의자가 “봉건주의의 폐지와 혁명이 가져온, 법과 사법제도 변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며 “역사적 진실을 이념적 이익과 물물교환한다”라고 비난한다.

[블래닝이 불통의 원인으로 지적한] 전제의 문제와 달리, 근시는 사실적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더 정확히는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역사가가 한 세대 전에 이미 말했던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 부족을 해결하려면 결국 프랑스 격언인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가 필요하다. 이 격언을 현재의 교착 상태에 적절한 용어로 거칠게 번역하면, 더욱 건설적인 대화로 나아가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논문의 목표는 수정주의의 기원을 재검토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을 개시하는 것이다. 핵심은 1950년대와 1960년대다. 이때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우리는 “정통주의”에 반대했던 본래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수정주의자의 원래 목적도 드러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초과한다. 이 시기를 철저히 검토해야 수정주의가 발생한 역사적 맥락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정주의자가 비판한 “정통주의” 문헌 대부분이 수정주의의 등장 전후에 출판되었다는, 잊힌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정통주의”의 궁극적 형태에 비추어봤을 때 그 문헌의 수명이 짧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통주의”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정통주의가 30년 동안의 비판 후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를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처음으로 형성된 20세기 초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인 수정주의에 대한 평가를 통해 현재의 교착 상태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고찰을 제시할 것이다. 
 

1. 수정주의의 등장: 
1950~60년대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논쟁

 
이 논문의 제목은 세 명의 구체적인 참조 대상을 특정했다. 퓌레와 마르크스(그리고 더 나아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는 물론 친숙하고 예측 가능한 인물이다. 다른 한 명인 알프레드 코반은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최근의 저작들은 코반을 정식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일부 독자, 특히 40세 미만의 독자는 왜 그렇게 상대적으로 무명인 인물이 프랑수아 퓌레와 같은 유명한 역사학자와 함께 묶이게 되었는지 궁금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꽤 간단하다. 코반이 수정주의를 개시했고, 두 번이나 그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도는 1954년에 열린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발표 당시 프랑스혁명사 분야 주요 학자의 관심을 끌었지만, 역사학계 전반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정주의는 10년 후, [코반의 두 번째 시도인]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하 『사회적 해석』]이 출판되면서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코반의 강연을 한 권 분량으로 엮은 이 책은 영어권 역사학자가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재평가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퓌레의 주요 사학사서인 『프랑스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자』(1978)는 거의 25년 후에 나타났다. 이 책은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적 해석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혁명 자체를 재해석하는 “신”수정주의로 전환하는 시작점이었다. 이를 위해 퓌레는 담론의 초점을 사회사에서 정치사로 바꾸었다. [프랑스혁명의 가장 큰 업적이 봉건적 정치제도를 억압한 것이라고 봤던] 토크빌을 따라 퓌레는 현대 국가를 확장하는 혁명의 역할에 집중했다. 퓌레는 [사회적 해석 대신] 새로운 지평을 열며 혁명적 “정치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강조했던 이 개념은 훗날 현실의 급진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퓌레의 책은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이들에게까지 비판을 확대했다는 점, 그리고 마르크스 자체를 비판하는 데서는 말을 아꼈다는 점에서도 코반의 저작과 달랐다. 

코반과 퓌레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둘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려면 또 다른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가 필요하다. 특히 1963년, 퓌레와 그의 매부 데니스 리셰가 화려한 삽화로 가득한 두 권짜리 혁명사를 완성했을 때로 돌아가 보자. 퓌레가 훗날 너무 당파적이었다고 자기 비판한 이 책은, 자신의 “정치문화” 개념의 함의를 밝힌 『혁명의 장기 지속』보다는 덜 알려져 있다. (《르몽드》는 그의 부고란에서 뒤의 책을 “[프랑스혁명] 200주년 베스트셀러”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1963년 당시에 퓌레와 리셰의 작업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은 여러 판이 출간되었고,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프랑스혁명에 대해 생각해보자』를 출간하기 훨씬 전에 퓌레의 역사적 견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퓌레와 리셰가 쓴 책은, 특히 퓌레가 쓴 부분이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퓌레의 비판은 코반도 지적했던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게다가 이 책은 퓌레가 수정주의자로서 진정으로 이름을 알린 책이었고, “앵글로색슨” 가정과 달리 영어권 세계와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 수정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퓌레와 리셰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제기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리고 더 놀랍게도, 코반을 자세히 읽다 보면 그 역시 공격받고 있는 [정통주의의] 사회적 해석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정주의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정통주의”에 대한 재검토로 이어진다. 여기서 초점은 조르주 르페브르와 알베르 소불이다. 두 사람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수정주의자가 의문을 제기하는 명제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여기서는 르페브르에 초점을 맞추겠다. 수정주의가 본궤도에 올랐을 시점에 걸출한 “정통주의”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이는 소불이었지만, 국제적 명성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정통주의”를 만든 자는 르페브르였다. 
 

1) 혁명의 주체: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자본가인가

르페브르의 유명한 책[『프랑스혁명』]의 서문은 혁명이 “부르주아지의 부상”을 초래했다는 잘 알려진 믿음을 포함하여 “정통주의”의 기본 명제를 가장 명확히 서술한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이 명제가 자본주의 기업가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추정했고, 이 “코르세어” 유형의 기업가는 혁명 이후 사회에 대한 르페브르의 설명에 정식으로 등장한다. 사실 자본가는 부르주아지 내에서 뚜렷한 소수였으며, 소불의 지적대로 “동질적인 계급을 구성하기에는 너무 다양했다.” 또한, 혁명 이후의 부르주아지는 많은 전문직과 지주를 포함했는데, 이들은 그 부(富)와 세계관을 볼 때 현대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구체제[앙시앙레짐]와 연관이 있었다. 주요 전문직은 왕실의 부패한 전직 고위 관료였다. 주요 지주 가문은 과거에 “자기 재산으로 고귀하게 사는 부르주아”로 불린, 공인된 지위는 없는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인된 지위가 있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농업적 시도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승자 계급의 면면은 “정통주의”의 기본 가정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789년 이후 부르주아지가 경험한 일에 대한 설명은 [정통주의의] 통념을 뒷받침한다. 이 계급 전반은 부상했으나, 실제로는 그 안의 전자본주의적 인자는 토대를 잃었다. 지주가 확실히, 그리고 예상대로 그런 사례였다. 지주는 귀족처럼 저수익의 봉건적 재산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봉건적 세금에 의존했고, 귀족과 경제적으로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부패한 고위 관료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의 일부가 나왔던” 주식회사가 억압된 탓에 타격을 받았다. 르페브르는 “산악파 집권기”에는 혁명 이전의 상인 계급조차 “미래를 위태롭게 보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집단들의 쇠퇴와 동시에, 한 부르주아 분파가 혁명의 혼란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이 분파의 일부는 적응력이 뛰어난 앙시앙레짐의 사업가였다. 그러나 성공한 부르주아의 대부분은 테르미도르 반동 전후에 큰 부를 축적한, 1789년 이전에는 별다른 지위가 없던 “신인류”였다. 구질서의 잔재를 갉아먹은 역사의 ‘자칼’은 사기가 떨어진 전문직이나 사회적 체면만 남은 지주와 뚜렷히 대조됐다. 이 신인류는 모험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르페브르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적당한 형편에 있다가 “엄청난 부”를 “획득한 ... 코르세어”에 주목했다. 이들이 누구보다도 “정통주의”를 입증했다. “사납고 파렴치하며 순수한 이익 추구”에 고무된 이 새로운 “경제 경영자”들은 제3신분의 이전 지도자들을 대체하여, 이 계급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내부 균형”을 조정했다.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무리 다양해도 코르세어가 그 안에서 헤게모니를 얻었고, 따라서 [이들의 영향력은] 프랑스 사회 전체로 확장되었다.

코반은 1954년에 르페브르의 약점에 이의를 제기하며 수정을 개시했다. 코반에게 혁명적 부르주아지란 실제로 혁명을 일으킨 부르주아지를 의미했다. 이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었으며 주로 고위 행정부에서 귀족층의 지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영달을 누리고자 했던 부패한 고위 관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2년 후 르페브르는 코반의 도전에 응수했다. 르페브르는, 자신이 부르주아 관료의 혁명적 역할을 광범위하게 인정했다고 코반이 지적한 것은 옳았다고 평했다. 그러나 르페브르는 혁명을 이끈 것으로 보이는 전문직이 자본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코반이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르페브르는 코반이 “혁명의 의의는 단지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의 의도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결론짓는다. 

8년간의 침묵 끝에 코반은 『사회적 해석』에서 보다 자세하고 엄밀한 비판을 전개했다. 그는 여전히 자본가가 아닌 관료가 혁명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에 대한 최종 분석에서는 르페브르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보다 혁명의 승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소불처럼 코반은 부르주아지가 너무 다양해서 동질적인 지배계급을 구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코반은 당연히 전문직, 심지어 일종의 자본가도 지배계급에 포함했다. 그러나 [코반이 보았을 때] 지배계급의 상위를 차지한 것은 지주였다. 이 주제를 다룬 장(章) 제목이 단언하듯이, 그들은 “지주 부르주아지”였다.

퓌레와 리셰는 [자본가인 부르주아가 혁명의 주체라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의 결함을 저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혁명 이후 지배계급의 구성을 검토했던 초기에, 퓌레와 리셰는 코반보다는 르페브르의 입장과 가까웠다. 지배계급의 핵심은 엄격한 정의에 따르면 자본가라 볼 수 있는, 금융가와 납품업자(contractor)다. 그러나 퓌레와 리셰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사료를 잘못 해석했다고 보며 그 계급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했다. 혁명 이후의 부르주아는 “ … 국가 재정이 혼란스러운 상태를 이용하여 … 전통적인 투기 거래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이러한 “방식은 자본가의 투자 즉, 현대 자본주의의 이익 추구 방법인 … 생산적 분야에 투자하거나 저축하고자 자금을 대는 체계와는 …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은 코반의 지주 부르주아지와 객관적으로 동일하진 않지만, [이들과] 가치를 공유하는 비전통적인 자본가였다.
 

2) 혁명의 의의: 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발전했는가

수정주의는 또한 역사에서 혁명의 위상에 대한 “정통주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주제에서 소불이 요약한 기본 생각은 “자본주의, 특히 자본주의적 산업의 길을 닦은” 부르주아지의 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불의 저작을 포함해] “정통주의” 저작의 많은 증거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혁명의 격변은 앙시앙레짐 자본가의 부를 감소시켰고 프랑스의 초기 자본주의 기반 시설 대부분을 파괴했다. 영국과의 전쟁은 해외 무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줬다. 산악파 집권기 동안에는, 르페브르가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형태”를 대표한다고 표현했던 주식회사를 불법으로 만드는 협약이 체결됐다. 게다가 앙시앙레짐의 임시변통 은행이었던 “할인은행의 실종”이 프랑스 상업의 미래를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혁명이 프랑스 자본주의에 명백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의 의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석과 무관하다. “정통주의”는 통상적으로 혁명은 경제적 진보의 “길을 닦은” 것이며, 실제로 이 진보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공고히 한 7월 제정 하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르페브르는 광범위한 전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내에서 상승하는 엘리트 자본가를 식별했으며, 또한 앙시앙레짐 상업경제의 폐허 속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임박했다는 시사점을 포착했다. 

르페브르의 주요 논지는 기존의 부르주아 엘리트를 약화한 격변이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특권적 부류가 의존했던 [토지·채권·연금 등의] “취득자산”, 즉 고정 수입을 창출하면서 가치가 거의 고정된, 특이하고 오래된 형태인 자산의 가치를 잠식했다는 것이다. 그는 농촌에서도 이런 잠식의 증거를 발견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주와 많은 부르주아 대부업자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거의 변하지 않는 임대료로 돈을 벌었다고 주장하며 말이다. 1789년 이후 인플레이션의 영향 아래, 농민 채무자는 채무를 평가절하된 통화로 갚을 수 있었고, 이 탓에 채권자가 가난해졌다. 인플레이션은 또한 도시 지주를 강타했는데, 부르주아 투자자 중에 가장 다수였던 국채 소유자만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경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자본주의적 방향을 가리키는 측면은 이러한 취득자산의 잠식과 반대편에 있었다. 아씨냐 지폐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매매 광풍이 불어닥쳤다. “몰수된 국유재산에 투기한 사람들만이” 혁명 이후 사회에서 제 몫을 했다.

코반은 『사회적 해석』의 「혁명의 경제적 결과」에서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코반은 프랑스가 경험한 산업화는 실제로 제2제국 때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논리적 결과라기엔 너무 늦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자본주의의 조건이 갖춰졌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코반은 혁명이 프랑스 상업에 끼친 해악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경제를 지배하고 있던 농업 부문의 낙후성에 주목했다.
 

3) 혁명의 원인: 
혁명은 자본주의 정신과 봉건제 형식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나

“정통주의” 반대의 핵심에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의 사회경제 상황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정주의는 혁명의 원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의문은 소불이 간결하게 말했던, “경제운동과 사회운동 간의 모순”에 관한 것이었다. 다소 복잡한 이 개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가져온 사상을 유물론적으로 재구성한 데서 비롯했다. “정통주의” 역사가 중 한 명인 알베르 마티에는 이 개념을 비교적 단순하고 그럴듯한 명제로 축약했다. 마티에는 혁명이 18세기의 상황에서 “정신과 형식”의 불협화음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했다.

르페브르는 [『프랑스혁명』] 서문에서 이 부조화는 “약화한 봉건제의 품 안에서 부르주아지가 부상”한 궁극적 결과라고 말한다. 혁명 전야에 부르주아지가 사실상 지배적인 위치에 올랐고, 경제의 정신은 분명히 자본주의적이었다. 신생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표지(標識)는 자본 그 자체인 귀금속의 방대한 축적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금과 은의 비축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자산은 특히 해외 무역에서 축적되었으며, “혁명 전야에 10억 <리브르>에 달했다.” “또한, 국가 재정은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국가로부터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할인은행은 현대 은행 제도를 예시(豫示)했다. 자본주의는 또한 “장인의 생산 활동을 자본주의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여기저기서 자본주의적 농업의 맹아도 발견된다.

그러나 알맹이가 제거된 봉건제의 잔재가 자본주의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이 잔재는 귀족층의 우월감(그리고 비자본주의적 가치)을 존속시키는 공식적인 사회적 위계질서를 포함했다. 귀족층에 국가장치를 통제할 권한을 부여하는 정치적 특권의 집합도 봉건제의 잔재 중 하나였다. 게다가 봉건적 경제제도의 존재, 특히 장원제도와 그중에서도 영주권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장애물이었다. “<농촌> 마을의 모든 주민은 영주권의 지배 아래 있었고, 따라서 사적이고 실질적인 의무”를 져야 했다. 이 부담 탓에 농민은 “생산 방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비축분이 부족했다.”

상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앙시앙레짐 제도의 봉건적 형식 사이의 불협화음을 고려할 때, 경제는 중세적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농업적, 수공업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1789년의 실제 사건을 촉발한 것은 이러한 모순의 역설이었다. 봉건제에 얽매여 쇠퇴하는 방어적인 귀족사회는 중요한 정치적, 행정적 지위를 독점하고 동시에 영주세(seigneurial dues)를 통해 수입을 극대화하고자 시도했다. 귀족층이 이처럼 대응하면서, 당시 부상하던 부르주아지가 소외되었으며 사면초가의 농민들이 격분했고, 두 계급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맺게 되었다. 결국 고루하고 억압적인 지배계급에 대항하고자 제3신분 전체가 움직였다.

혁명의 발발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혁명이 자본주의의 길을 닦았다는 생각만큼이나 수정주의자의 표적이 되었다. 퓌레와 리셰는 18세기 후반 귀족층이 “봉건적인 세금을 과중하게 물어” 농민들을 착취했다는 르페브르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앙시앙레짐 경제가 어엿한 자본주의 발전의 직전에 있었다는, “정통주의”의 보다 근본적인 전제를 부인했다. 부르주아지는 르페브르와 소불이 주장하는 자본가의 원형이 아니라 “전(前)자본가”에 불과했다. “국가 경제를 정체하도록 내버려 둔” 탓에, “앙시앙레짐 경제는 생존 원리에 기반한 상태”였고, “낙후된 기술”과 “낮은 노동생산성”을 특징으로 했다. 따라서 성장을 가로막는 봉건적 잔재만큼이나 프랑스의 내적 후진성이 자본주의를 좌절시켰다. 코반은 거의 같은 주장을 했지만, 주로 봉건적 잔재 그 자체를 지적했다. 코반에 따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반적인 “종사제도”(從士制度)와 특정한 “영주권”은 “양도할 수 있게 되었고”,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이 이를 소유했다. 1789년까지 “봉건적 재산과 봉건적이지 않은 재산을 구별하는 것은 … 거의 불가능했다.” 영주권은 쇠락하는 귀족사회를 위한 버팀목이자 부르주아적 투자 대상이었다.
 

4) 1950~60년대 역사연구의 맥락에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혁명의 원인이] 어느 경우든, “정통주의” 역사가는 자신의 논지에 모순되는 증거를 꼼꼼하게 저술에 담았다. 르페브르와 소불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만큼이나 철저한 사회사를 집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창시자 장 조레스와 알베르 마티에와는 차별화되는 점이다. 이들은 혁명 이후 지배계급과 18세기 사회경제 상황을 다소 피상적으로 다루었다. 르페브르와 소불의 작업은 혁명사학사의 또 다른 중요한, 그러나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 측면을 분명히 보여준다. “정통주의”의 전통에서 르페브르와 소불은 수정주의자였다. 1932년 소르본에서 열린 강연에서 르페브르는 조레스와 마티에가 농민봉기를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적 공세라는 경직된 틀로 해석한 것을 비판했고, 혁명적 농민을 자율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계급으로 파악했다. 25년 후 소불은 마티에에 반대하면서, 파리 시민은 프롤레타리아와 공통점이 거의 없었고, 1794년에 생쥐스트가 진행한, 겉보기에는 사회주의적인 실험은 실제로는 비현실적인 부르주아적 빈민 구제 실험이었다고 주장했다. 르페브르와 소불은 부르주아지를 사회적으로 다양한 출신의 계급으로 해석하면서, 부르주아지가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통념을 반박했다. 따라서 1959년 사망 당시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옹호자라기보다는 수정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주장을 비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퓌레와 코반이 수행한 비판의 효과다. 이 비교는 제럴드 카바노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카바노는 수정주의에 대한 초기 평가에서, 코페르니쿠스가 과학혁명에 끼쳤던 영향처럼 수정주의의 옹호자가 혁명사학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평했다. 코페르니쿠스가 당시 지배적인 천동설 “패러다임”과 상충하는 중세 후기 천문관측을 종합했다면, 퓌레, 리셰, 그리고 코반은 부르주아 혁명에 의문을 제기한 당대의 최신 연구의 함의들을 밝혀냈다.

퓌레와 리셰는 몇몇 코페르니쿠스적 통찰을 제시한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인 전자본주의적 금융가는, 앙시앙레짐 하의 개신교 은행가를 연구하면서 허버트 루티가 확인한, 역사적으로 독특한 유형의 궁정 자본가를 떠올리게 한다. 직관에 반하는 루티의 연구와 수정주의의 밀접한 연관성은 코반의 『사회적 해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코반은 지주의 우위를 증명하는 [루티의] 계급연구에 기대어 혁명 이후의 부르주아지를 설명한다. 

최근 연구를 활용하는 코반의 능력은 영주세에 관한 논의에서 빛을 발했다. 여기서 그는 1960년대 조지 테일러가 개발한 “비자본주의적 자산”이라는 개념에 의지했다. 테일러는 자본주의적 투자와 마찬가지로 비자본주의적 자산도 사고 팔 수 있으며 불로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러나 진정한 자본주의적 자산과 달리, 비자본주의적 자산의 수입은 언제나 낮았다. 그리고 봉건적 자산과 마찬가지로 성장 잠재력이 없었다. 테일러는 주로 비생산적 토지와 다양한 구식의 채권 및 연금에 대한 투자를 염두에 두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자산은 혁명 이전에 가장 일반적인 부르주아적 자산의 형태였다. 코반은 비자본주의적 자산 개념을 장원제도까지 포함하도록 설득력 있게 확장했다.

이 비판을 면밀히 살펴보면 (코반을 지지하는 카바노의 또 다른 주장처럼) 수정주의자가 “정통주의” 역사가가 제공한 증거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코반은 종종 조르주 르페브르의 권위를 내세웠다. 르페브르의 대표작인 『프랑스혁명기 북부농민』은 18세기에 귀족과 부르주아 지주 모두 농민으로부터 추가 수입을 착취하기 위한 매개로 영주세를 사용했음을 밝혀냈다. 마찬가지로, 르페브르는 혁명이 자본주의의 원형인 앙시앙레짐의 제도를 파괴했다는 점을 시인했는데, 이는 수정주의자의 주장을 분명히 뒷받침했다.
 
 

2. 코반과 퓌레의 대안적 해석

 
코반의 비판은 상당한 개인적 성취였다. 코반은 수정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보다 …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에드먼드 버크에 대한 감탄스러운 1929년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18세기 후반의 혁명전쟁들과 냉전을 비교한 1951년 논문에 이르기까지, 코반은 주로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 사상, 무엇보다도 인민주권이라는 사상의 폐해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코반은 “프랑스혁명의 신화”와 『사회적 해석』에서 인상 깊은 사회경제사 지식을 보여줬다.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집중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는지를 알 수 있다.

퓌레의 후기 저작을 돌아보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적 해석에 대한 퓌레와 리셰의 비판은 코반만큼이나 중요한 업적이다. 《르몽드》가 퓌레의 부고란에서 평했듯, 퓌레는 “혁명의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말하자면 혁명적 열정과 운명에 대한 긴, 실제로는 매우 긴 <역사>, 즉 혁명의 정치문화라는 역사”를 집필했기에 유명했다.

1960년대에 퓌레가 “정통주의”를 비판한 일은 그의 지적 용기를 보여준다. 1960년대는 오랜 전후(戰後) 시대의 마지막 10년이었다. 이때 프랑스 좌우파 지식인 모두, 퓌레의 표현으로는 “역사 종교”에 가입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종교 숭배의 이론적 지주였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중요한 교리 중 하나였다. “정통주의”에 간접적으로라도 도전한 역사가는 이단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코반과 퓌레의 업적을 완전하게 평가하려면, 이들의 비판뿐만 아니라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해석도 평가해야 한다. 코반과 퓌레의 대안을 항상 순조롭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실, 쉽게 간과된다. 제럴드 카바노는 코반이 자신이 타파한 “패러다임”을 아무것으로도 대체하지 않았다고 최종 평가했다. 그러나 코반과 퓌레의 저작을 신중하게 연구하면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사회적 해석을 대면할 수 있다. 퓌레와 리셰의 경우, 더욱 뚜렷한 정치적 문건 역시 살펴봐야 한다. 코반의 경우, 비판의 모든 요점의 이면에 혁명 사회사의 특정 측면에 대한 대안적 독해가 있다.

코반에게 새로운 사회적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정통주의”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는 징후가 있다. 코반의 의도는 스스로 밝혔듯, “사회적 해석을 … 구체적인 역사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문제”와 질문들(예를 들어, “소위 부르주아 혁명의 실상은 무엇인가?”)로 다루는 것이었다. 사회계급에 관한 “전통적인 사회학적 클리셰에서 … 벗어나 …”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식별과 분류로 대체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애초에 코반이 프랑스혁명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계기인 “사회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코반은 이 사회사 문제를 복잡한 문제라고 설명했지만,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에서 비롯된 사회학의 영향이 있다고 파악했다. 요컨대, 코반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르크스주의의 개념틀을 넘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퓌레의 가장 유명한 책의 제목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코반의 임무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혁명을 다시 생각해보자’였다.
 

1) 혁명 이후 지배계급: 앙시앙레짐 지배계급과 유사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해석과 “정통주의” 해석의 차이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혁명 이후 지배계급을 어떻게 묘사하는가다. 퓌레와 리셰는 지배계급이 얼마나 기업가적 엘리트와 닮지 않았는지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얼마나 앙시앙레짐의 지배계급과 닮았는지를 강조했다. 벼락부자가 된 금융가와 납품업자는 쇠퇴하는 군주제의 궁정 자본가 및 납품업자에 필적했다.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급과 함께 “앙시앙레짐의 사회적 쾌락이 재현”되고, 이는 “새로운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 부여하려고 했던” “귀족적 분위기”를 제공했다. “구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들”은 국외나 지방에 은둔해 있었지만, “신사회 한가운데에 구 귀족층의 탈영병이 다수 존재했다.” 이들은 전자본주의적 금융가와 납품업자의 모범이 되었다. 탈레랑, 그리고 누구보다도 “바라스 자신은 그전에는 자작(子爵)이었고 지금은 요지부동한 총사령관이자, 왕이 없는 프랑스의 새로운 섭정이었다.”

이 지점에서 코반은 정통주의와 훨씬 더 멀어졌다. 혁명 이후 지배계급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면서, [『사회적 해석』의 장 제목인] “지주 부르주아지”는 아이러니한 용어가 되었다. 코반은 “만약 그러한 계급을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이 바로 혁명적 부르주아지였다”라고 서술했다. 허나, 코반은 이들을 분명히 다르게 정의해야 한다고 말하며 만약 우리가 그 용어를 포기한다면 “토지 귀족층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산업혁명을 헛되이 찾아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옛 귀족층의 생존자를 지배계급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19세기 중산층에 대해 [공동 연구한] 엘레노어 오보일과의 교류 이후, 지주 부르주아지 개념은 사실상 사라졌다. 혁명 이후 프랑스를 통치한 계급은 “국유재산 구매와 … 성공적인 투기로 <만들어진> 새로운 특권계급이었다.” 


2) 혁명 이후 경제: 농업국가 존속

수정주의자는 또한 혁명 이후의 경제 상황에 대해 대안적 해석을 제공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들의 해당하는 설명과 비교했을 때, 퓌레와 리셰의 특징은 [혁명 이후의 경제에] 임박한 산업화의 징후가 없다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농업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 그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경제 측면에서 지방은 그대로였다”라는 사실이다. 도시와 농촌 모두, “새로운 프랑스는 사람들이 믿었던 것보다 더 많은 면에서 옛 프랑스와 닮았다.” 코반의 평가도 거의 동일하다. 즉 “프랑스는 본질적으로 농촌 국가로 남았고 오래된 농업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3) 혁명의 원인: 
이례적 소수가 만든 새로운 경제적 조건이 가한 충격 때문에 발생

수정주의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주제는 앙시앙레짐과 혁명의 관계였다. 마르크스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자는 이 관계를 역사적 모순의 관점에서 설명했지만, 자본주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잔존하던 봉건제도의 상부구조 사이의 부조화 탓이라고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경제 현대화가 완전히 전통적이던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결과, 부조화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퓌레과 리셰는 이러한 초기 변혁의 주체를 부르주아지 내에서 찾았다. 프랑스 사회의 다른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대부분 보수적이고 후진적이었다. 변화의 주체는 이례적인 소수였다. 그러나 이 특별한 시점에 이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대한 방직산업의 후원자” 도푸스와 오버캄프, “철의 왕” 디트리히, 그리고 “더딘 기술 진보와 인플레이션 덕분에 이익을 얻은” 크루조의 웬델과 같은 사람들은 제3신분의 “지배적 집단”을 형성했다. 혁명 전야에 이르러 이들이 시작한 “영국 기술의 점진적인 도입”은 “민간 기업의 성장”을 자극했고, 전 사회적 규모는 아니지만, 그 진동이 “하층 부르주아지인 소매상, 상인, 장인” 사이에서 느껴졌다. “혁명 운동에 자극”을 준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퓌레와 리셰의 저작의 다른 많은 부분과 마찬가지로, 앙시앙레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전형적인 “정통주의”의 주제를 역설적으로 변형한 것처럼 읽힌다. 반면, 이 시기에 대한 코반의 묘사는 “정통주의”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코반에게 변화의 주체는 이례적인 소수 부르주아가 아니라 아웃사이더와 사회적 부적응자의 잡탕이었다. [그 중] “신인류”가 단연 돋보였다. 신인류는 엄밀히 말하면 평민이었지만, 제3신분이나 실제 프랑스 사회 구조의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신인류는 코반이 귀족층에 대한 로버트 포스터의 연구를 바탕으로 “중간계급 귀족층”으로 분류한 이들을 포함했다. 이들은 비교적 최근에 귀족사회에 편입된 사람들로서 그 가문은 본래는 상업적 관점을 지녔다. 코반은 탐욕스러운 자영농을 언급하며 중간계급 귀족층에 대한 묘사를 마무리했다.

코반에 따르면, 이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경제 변혁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가장 전도유망한 조건은 “신인류”가 파리를 유럽의 금융 수도로 만듦으로써 외국 자본을 유입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장원제도의 변화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장원제도를 이해하는 방식에 반대하여, 코반은 영주권이 탈봉건적 형태의 투자 자산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앙시앙레짐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새로운 경제적 조건이 등장하면서, [영주권으로] 이름이 잘못 붙여진 봉건제의 잔재가 더욱 변모했다고 주장했다. 코반이 언급한 탐욕스러운 평민과 “중간계급” 귀족은 고정 수입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주권의> 새로운 소유주들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조짐이 보였다.”
 

4) 혁명의 결과: 현대 자본주의의 궤도 이탈

퓌레와 리셰는 새로운 경제적 힘이 구(舊) 프랑스를 산업화의 초기 단계로 이끌었다고 해석했고, 코반은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단계로 이끌었다고 보았다. 둘 다 현대화가 프랑스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예상대로, 그 결과는 혁명을 빙자한 대규모 저항이었다. 퓌레와 리셰가 보기에 이 저항은 1791~92년, 혁명이 “궤도를 벗어난” 이탈(dérapage) 기간에 시작되었다. 이 이탈이 가장 눈에 띄는 측면은 정치 분야였다. 군주제가 붕괴하자 자유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질서를 확립하려는 온건한 혁명가들의 노력이 끝이 났고, 공포정치를 바탕으로 급진적인 공화주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탈은 또한 퓌레와 리셰가 말한 “사회적 돌연변이”을 수반했다. 이탈 기간 파리의 농민과 장인이 권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간신히 해방된 활기찬 자본의 힘”을 “중세의 가난하고 도덕적인 공동체의 굴레”로 다시 속박하도록 강요하는 불행한 시도가 일어났다. 동시에, 정권 내에서 권력이 부유한 자유방임주의 옹호자[즉, 입헌군주파]로부터 “부르주아지의 보다 소박한 계층”인 지롱드와 자코뱅으로 하향 이동했다. 마침내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앙시앙레짐의 조건이 부활하고 “전쟁과 투기로 부자가 된” 새로운 집단이 부상했다. 퓌레와 리셰는 “전쟁과 … 파리의 폭도” 때문에 혁명이 “18세기의 지성과 부”가 추격하던 거대한 궤도에서 이탈했다고 결론지었다. 

이 점에서 보면, 귀족적 지배계급이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재등장하고, 정체한 농업경제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앙시앙레짐이 지속한다는 토크빌의 주장을 초과한다. 이 주장은 혁명을 프랑스 사회 스스로가 앙시앙레짐의 자본주의적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결과이자, [프랑스 산업의] 장기적인 저발전 역사를 연 첫 번째 장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수정주의의 사회적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담론을 넘어서는 효과적 수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혁명 이후 지배계급에 대한 수정주의의 인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혁명의 결과에 대한 수정주의의 판단도 포함한다. 코반은 경쟁하는 두 학파의 차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지배적 사회이론[즉,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역사의 단계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퓌레와 리셰와 같이 코반은 “<혁명은> 전혀 전진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했을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가속하는 대신 그것을 지연시켰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3. 수정주의에 대한 평가: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극복하는 데 실패

 
코반이 인식했듯이, 유의미한 수정주의는 역사가가 비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혁명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수정주의는 “역사에 대한 다른 모든 철학처럼 … 인간 존재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관점을 지닌”, 따라서 “일종의 세속 종교”인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을 거부한다. 또한 겉보기에 문제가 적어 보이는 [역사]철학의 필연적인 결론, 즉 “인류 발전의 법칙에 대한 과학적 진술을 제공하는 모습”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1) 수정주의가 비판한 정통주의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 및 발전이론과 다소 거리가 멀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은 프랑스혁명 연구의 주요한 장애물이다. 장애물을 초월하려면 코반은 역사가가 “최소한의 요금을 지불할 수 있는 승객이라면 사실상 어떤 승객이라도 받아들이도록 계산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거대한 옴니버스식 사회계급”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적 범주들을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추정”은 “실제 부와 그 성질, 사회적 지위와 명성 … 당대의 존경, 개인적 열망 등 여러 측면의 조사”에 근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역사가는 마르크스의 발전이론에서 파생된 지나치게 단순한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역사가 몇 개의 크고 동질적인 단계로 나뉘며, 이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순서와 형태로 반복된다”라고 설명한다. 즉 “17세기 영국, 18세기 프랑스, 19~20세기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이 중세 초기부터 그 각각의 시점까지 계속된 봉건제를 전복했다”라고 이해한다.

코반의 목표는 사회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가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 명확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에 대한 코반의 정의는 불완전했다. 익숙한 공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자는 생산수단 및 교환수단의 관계 속에서 계급을 정의한다. 마르크스의 역사분석에 관한 당대 표준적인 참고서의 저자인 맨델 모튼 보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급은 실제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고 이미 오래전에 언급했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지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경제에 속하는 은행, 공장 및 기타 사업의 소유를 의미하고 봉건 귀족층의 경우에는 토지였다.

이 추상적 해석에서의 부르주아지와 귀족층은 코반이 지녔던 [마르크스주의 계급개념을 비판적으로 지칭한 말인] 거대한 옴니버스식 범주들이라는 상(像)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고전은 코반의 견해와 일치한다. 르페브르는 혁명 이후의 부르주아지에 기업가적 “코르세어”뿐만 아니라, 부를 거의 소유하지 않은 전문직과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볼 때 자본가가 아닌 귀족층으로 보이는 수많은 지주를 포함시켰다. “정통주의” 판 설명은 앙시앙레짐 귀족층에 토지 소유와는 똑같이 거리가 먼 부류들 즉, 고위 관료, 심지어 혁명 이후의 부르주아지를 예시하는 징세 청부업자와 금융가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이질적 집단이 생산수단과의 관계로 정의된 계급개념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알기 어렵다.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공통분모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식”, 그리고 아날학파의 역사가들이 말하는 “심성”(mentalité)과 관련 있다. 혁명 이후 지주는 혁명 이전 귀족보다 더 세속적이었다. 혁명 이전 금융가는 르페브르가 귀족층과 연관 짓는 심미적이고 영적인 가치들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작동했던 경제적 조건에 대한 르페브르의 설명은, 이질적인 범주들이 두 지배계급[즉, 혁명 이전 지배계급과 혁명 이후 지배계급]에 들기 위해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물질적 대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혁명 이후 시기에 전문직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수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토지를 소유한 부르주아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은 당시 파괴적인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자본주의 경제를 출현시킨 “사회적 격변”을 가속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앙시앙레짐의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다양한 범주는 봉건적 침체가 영원하기를 바랐다. 

마르크스의 발전이론은 더 복잡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럼에도 르네 레몽이 이 시기에 쓴 발전에 관한 연구가 제안했듯이, 마르크스의 역사적 시나리오를 유의미하게 구분할 수 있다. 시나리오가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계급 갈등과 격변을 통해 인류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자유의 상태로 발전하는 목적론적인 진보이다. 다른 하나는 코반이 염두에 뒀던,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경제>체제들의 연속”이다. 두 차원은 상호 연결되어 있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 “각 체제는 … 생산관계와 생산자의 법적 지위(노예, 농노, 임노동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각 체제는 구분되며, 각각은 고유한 사회 격변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경제적 차원[즉, 후자]에서 진정한 변화와 중요한 발전은 생산수단의 증가로 특징지어지는 격렬한 변화의 와중에 [법적 지위의 변화보다] 더 일찍 나타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발전의 의미와 그 안에서 프랑스혁명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순수한 상업적, 금융적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속국들을 파멸시킨 로마와 같은 운명을 경험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개시한 경제 혁명 때문에”, “유럽의 패권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라는 희망이 정당하게 존재했다. “석탄과 철은 목재를 대체하고, 증기 및 기계는 노동 생산량을 증식하고, 농업은 … 그 과정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유럽을 새로운 경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러나 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르페브르는 프랑스혁명이 이 대기 시간을 끝냈다고 설명한다. 승리한 부르주아지는 산업 자본주의를 대륙으로, 그리고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전달할 수단을 제공했다. 허나 이 설명의 암묵적인 메시지는, 그러한 전환 없이는 유럽경제가 과거로 회귀할 위험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즉, 영국의 세계사적 경제 변혁을 모방해야만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2)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과 발전이론을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프랑스 역사의 요건에 맞춰 재정립한 마르크스주의 발전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적 범주들[즉, 계급이론] 못지않게 “정통주의”를 이루는 일부이다. 수정주의를 평가할 때 중요한 지점은 퓌레와 리셰의 저작과 코반의 『사회적 해석』에서 그 범주들과 이론이 재등장한다는 점이다. 수정주의자가 혁명 이후의 지배계급과 앙시앙레짐의 귀족층 사이에서 유사점을 도출하는 것은 실로 마르크스주의의 방식이다. 퓌레와 리셰에게 혁명 이후의 지배계급은 귀족사회를 닮았는데, 이는 단순히 이들이 테르미도르 반동기에 사회에 부여한, 혁명에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주로 그들의 새로운 재산이 “공포정치 기간 날아갔던 앙시앙레짐의 투기적인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는 점이 근거였다. 특히 앙시앙레짐의 궁정 자본가와 같이, 총재정부의 금융가와 납품업자는 정체한 농업경제를 유지하는 낙후한 농민으로부터 돈을 걷어갔다. “루이 16세 때 징세청부인(tax farmer)의 탐욕도 이들의 후손인 공화국 납품업자의 탐욕에는 못 미쳤다.” 동시에 코반도 부르주아지를 토지 귀족층으로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핵심에 귀족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이들이 토지 소유권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생산 과정에서 그들의 위치 때문에, 또는 위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 부르주아는 앙시앙레짐 귀족과 유사했다. 코반이 지배계급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 농민의 통속적 용어인 ‘관심 없는 자’나 르페브르의 표준 프랑스어인 ‘부재(不在)한 자’는 이들을 기생적 계급으로 인식시킨다. 게다가 르페브르의 저작에 나온 계급들처럼, 이것은 “옴니버스” 범주다. 이 범주는 전자본주의적 조건이 지속하면서 지분을 최소한 조금이라도 가졌던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즉 땅을 소유한 귀족, “연금수령자와 고위 관료”, 즉 “대형 물고기, 적당한 크기의 많은 물고기, 그리고 그들과 같이 수영하고 있음을 아는 많은 피라미”를 망라한다.

마르크스 발전이론의 흔적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수정주의는 “정통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에 반대한다. 수정주의는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순서에서 결정적인 사건[혁명]이 발생한다는 개념을 부인한다. 코반은 자신을 영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17세기 역사가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초기 현대 유럽에는 급진적인 사회 격변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부르주아 혁명이 부정되면서, 필연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사라졌다.

경제체제의 연속이라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관해서는 상황이 더 복잡하다. 코반은 역사가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순서와 형태로” 반복되는, 크고 동질적인 단계로 나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고, 특히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환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퓌레와 리셰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영국에서는 중세 경제의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역사적 근거가 많은 사실은 받아들였다. 중요한 사실은 [코반과 퓌레라는] 수정주의 사회적 해석의 두 버전 모두, 이러한 변화에 관한 두 가지 마르크스주의적 가정을 담았다는 점이다. 첫째,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모든 곳에서 혁명적인 영국의 패턴을 따라야 한다. 둘째,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이다. [콕스가 이를 문제 삼는 것에 관해서는 역자 해설을 보라.]

두 가정은 앙시앙레짐에 대한 수정주의자의 분석에서 나타난다. 중세 이후의 변화가 프랑스를 산업화 직전까지 끌고 갔다고 믿었던 르페브르의 설명 이상으로, 수정주의의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게] 프랑스 경제의 후진적인 농업적 특성이 중세 이래로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역으로 영국 해협을 넘어 오는 급진적 기폭제만이 상황을 진전시킬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는 “영국 방식”의 도입이 무기력한 18세기 프랑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를 낳았다는 퓌레와 리셰의 설명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가정이 코반에 미치는 영향은 더 미묘하기는 하지만,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코반은 앙시앙레짐의 도시들이 로마 제국의 도시처럼, “지방으로부터 부를 빨아들였다”라고 주장했다. 코반은 이 상황이 영국의 인클로저와 유사한 과정 즉, “농촌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급진적이고 역설적으로 영주권을 몰수하는 과정”과 유사한 방식을 통해서만 바뀔 수 있다고 암시했다. 

마르크스주의 발전이론의 영향은 혁명 이후의 조건에 대한 수정주의자의 해석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수정주의자에 따르면] 이제 막 시작된 영국식 경제의 부정은 단순히 변화의 속도만 늦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는 기존의 덜 역동적인 성장 패턴으로 문제를 되돌리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혁명의 결과 프랑스는 서구의 발전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퓌레와 리셰는 소규모 재산 제도를 강화하고 공유지를 지키기 위해 “혁명력 2년[1793년]”에 부르주아지와 농민이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이 “19세기에 … 농촌의 낡은 관행”을 지속시켰으며 장기적으로 “자본주의적 팽창”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코반도 제2제국 치하에서 상당한 산업화가 있었지만, “폐쇄적이고 변치 않고, 보수적이며, 반복적인” 부르주아적이고 귀족적인 삶의 방식은 19세기 프랑스가 북쪽과 동쪽의 [자본주의적으로] 팽창하던 이웃 나라들 보다 남유럽 국가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3) 신수정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 역시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발전이론을 초월하려는 노력은 마르크스주의 계급개념을 넘어서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수정주의자는 무심코 “정통주의” 역사가가 이미 풍부하게 제공한 자료에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추가했다. 보다 새로운 이 해석은 [정통주의만큼] 체계적으로 수정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정통주의자의 해석 못지 않게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수정주의에 크게 기여한 로버트 포스터는 1967년 초에, 혁명 이후 지배계급이 본질적으로 앙시앙레짐의 귀족층과 동일하다는 코반의 주장을 문제 삼았다. 포스터가 보기에 코반의 묘사는 비교적 무사안일했던 혁명 전의 지주와 왕정복고 이후 신흥 사회의 “자신감 넘치고 끈질긴 중소지주” 간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코반이 “경제적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나머지 혁명 이후 상류사회에서 일어난 “좀 더 미묘한, 법적 심리적 변화”를 소홀히 했다는 점이라고 포스터는 주장했다. 코반은 토지 소유권의 수익률이 낮았다는 점을 중시한 나머지 19세기, 심지어 18세기에서조차 토지 소유주가 시골의 영주가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연금생활자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나아가 코반은 영주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옛 귀족층의 정치적 행정적 잔존 특권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래서 거꾸로, 이 특권을 억압한 것이 19세기에 더 탐욕스럽고 적극적으로 변한 농민과 토지 소유주의 관계에 차이를 만들었다는 점도 간과했다.

코반이 인용한 또 다른 역사학자 프랑수아 크루제는 혁명이 경제 발전을 저해했다는 수정주의자의 주장에 맞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양쪽을 균등하게 평가했다.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자본가는 아니었지만, 궁극적으로 “19세기의 균형 잡히고 적당히 성공적인 성장률”에 기여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더 중요한 점은 크루제가 부르주아지와 귀족층을 넘어 사회적 시야를 확장함으로써, 영주세를 억압한 것이 자본주의 발전에는 하찮은 것이었더라도 농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라는 점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개념틀을 극복하지 못한 사실은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코반과 프랑스 학자들[퓌레와 리셰]은 계급을 재정의하거나 혁명의 사회적 중요성을 평가하는 새로운 관점을 여는 대신, 1965년 리처드 콥이 코반의 책을 비평하면서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간단히 “거꾸로 뒤집었”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정주의자는 데이비드 해켓 피셔가 말한 “… 무의미한 전도나 근본적인 가정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 이전 해석의 수정 시도 … 즉 반문(反問)의 오류”를 저질렀다. 

“정통주의” 가정에 대한 유효한 비판은 여전히 부족하고 “정통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수정주의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가정은 변함없이 이 분야에 만연하다. 퓌레를 계승하는 신수정주의자도 분명히 그러한데, 이들은 스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분야에 대한 적(敵)들의 정의”을 받아들여, “똑같이 편협하고 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은연중에 사회를 정의한다.” 그러나 스웰의 혹평은 마르크스주의자와 수정주의자 모두의 한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비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혁명의 사회사를 재인식하려고 시도하는 신“정통주의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러한 [신정통주의] 경향은 티모시 타켓의 “국민의회의 혁명적 동역학에서 귀족층과 제3신분”이라는 잘 알려진 논문에서 눈에 띈다. 타켓의 목적은 신수정주의자와는 달리, 혁명적 폭력이 단지 “기호학적 또는 이념적 차이”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사회적 갈등”을 반영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1789년 제3신분 국민의회 의원들을 소환한다. 이들은 분명히 자본가는 아니었지만 “중소 지방 도시”의 번창한 대표자였고, 따라서 현대의 인식에 따르면 대표적인 부르주아였다. 이들의 적대자는 전형적인 토지 귀족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혈통으로 공인된 귀족, 그들의 편에 서 있는 검”인 귀족 대표자였다. 두 의원 집단 사이의 충돌은 계급 갈등과 아주 흡사했다. 그러나 타켓의 결론은 “귀족 대부분과 대부분의 … 부유한 평민은 … 기본적으로 생산수단과의 관계가 동일했기에[즉, 생산수단을 소유했기에] 여기서 작동한 사회적 차이가 계급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신“정통주의” 역사가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 가정의 현재성에 대한 더 복잡하고 더 중요한 설명은 앞서 인용한 콜린 존스의 논문에 나타난다. 타켓과 마찬가지로 존스는 초점을 “정통주의”가 상정하는 이례적인 자본가의 원형으로부터 현대 프랑스인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부르주아, 즉 1789년에 제3신분 중심에 있던 엘리트 전문직으로 옮긴다. 존스는 코반이 전문직을 쇠퇴하는 “부르주아지의 고위 관료”로 묘사하는 것에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전문직 사이에 “특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도덕관념과 “<국가> 서비스, 합리적인 조직, <그리고> 공공 책임”을 수반하는 행정 개혁의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다고 기록한다. 이 모든 변화는 분명히 “정통주의”의 상상 속 자본가의 행위만큼이나 앙시앙레짐에 전복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의 영향을 조사하면서, 존스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수정주의자가 대체로 무시하는 혁명의 중요한 측면들을 인식한다. “… 관료제의 어마어마한 강화, … 국가의 후원 아래 권위 있는 과학 전문직의 출현, … 국가의 유용성에 관한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존스는 전문직을 그 자체로 하나의 계급, 새로운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서비스 부문”에서 중심적인 인물들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 개혁에 대한 전문직들의 급진적인 “헌신”을, 존스는 앙시앙레짐 정부가 확장하여 새로운 공적 기능들을 인수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상업 자본주의의 침투와 잠재력”을 반영한 것으로 인식했다. 역사에서 혁명의 위치에 대한 존스의 최종 평가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선입견으로 물들었다. [존스에게] 행정 개혁이 몰고 온 잘 알려진 사회 변화는, 경제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존스는 혁명이 산업화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상업화”를 가속했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인정한다.
 
 

4. 나가며:
지속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과 마르크스 고전 저작 탐구의 필요성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프랑스혁명을 다룬 역사가 사이에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어째서 영향력이 지속되는지는 다소 미스테리다. 최근의 사회이론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스웰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과학”은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계급과 생산양식 개념”에 대한 풍부한 대안을 제공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 말해서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식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처럼 좋은 개념이 너무 많아서 하나만 고르기 힘들 정도라고 하더라도 자동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쉽게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스웰이 제안한 “인간과학자” 3명은 베버, 그람시, 푸코인데, 이들도 마르크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수정주의자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의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에 저항하는 사상가들조차 결국 희생양이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학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데,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가정들은 특히 냉전 초기, 즉 버크의 숭배자였던 코반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화신들[즉, 정통주의자]에게 도전했던 시기에 강력했다. 실제로 냉전 시기 민주정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 블록이 옛 유럽 식민지 국가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면서 발전과 저발전이 시급한 문제로 부상했다. 발전 개념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들은 단순하고 일관되며, 당시에는 지적으로 명성이 높았기에 동양은 물론 서양의 다른 개념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심지어 발전이라는 주제에 관해 가장 유명한 저서로 “반공주의자 선언”인 로스토우의 『경제 성장의 단계』도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로스토우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부르주아지를 연상시키는 기업가적 엘리트와 정체된 농업 상황을 지속시키는 데 전념하는 지주계급 사이의 갈등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유명한 용어인 “이륙”(take-off)은 마르크스가 인류의 진보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종류의 극적인, 영국식 변형을 가리킨다. 이러한 가정은 코반과 퓌레의 글에도 반영되었는데, 프랑스 경제를 후진적으로 인식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서구 사회사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대공황과 20세기를 거쳐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영향은 1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코반은 자신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지속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목적론적 역사철학의 종교적 매력과 과학적으로 보이는 발전이론의 지적 매력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로, 코반이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광범위한 일반화”는 “사회학적 사고”와 “현재의 사회적 조건”의 여러 변형된 판본의 개념들을 모두 반영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시대적 조건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한 조건 역시 사회계급과 자본주의 생산수단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속적인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수정주의의 궁극적인 약속, 즉, 계급을 재정의하고 프랑스의 발전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혁명을 재해석하는 일을 누구라도 쉽게 완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의 과정을 더욱 넓히는 방법이 남아 있다. 즉 19세기 후반을 넘어서, 프랑스혁명을 다루는 역사학이 시작되었던 때로 [19세기 초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때 [역사학자들의] 정신세계는 대부분 잊힌 상태다. 이는 마르크스의 세계였는데, 19세기 프랑스를 다루는 마르크스의 고전저작은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 역사학자들의 여러 가정(假定)에 대한 유용한 대안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는 다른 여러 역사학자들의 세계이기도 했다. 즉 왕정복고기의 부르주아 역사학자들, 미슐레, [미슐레가 손꼽은] 토크빌의 세계이고, 이들 중에서 “정통주의”가 출현했다. 이는 [즉 19세기 초중반의 역사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왜곡하기 전에, 프랑스혁명이 어떤 것으로 보였는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위치를 제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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