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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1999.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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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와 IMF, 그리고 이어진 구조조정과 빅딜

이봉래 | 쌍용자동차 노조 교육선전부장
솔직한 표현으로 지긋지긋한 이 단어들은 사실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들이었으며, 사실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치가들이나 자본가들 또는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 쯤으로 여겼다. 우리 사회가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그런 진정한 평등의 사회는 아니더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땀흘려 일하면 이 위기가 그냥 비켜가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참으로 순진하다 못해 우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와는 전혀 상관 없을 것 같던 그것들은 지금 우리 노동자들의 생활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이런 것들을 실감나게 한 것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동료들이 한 둘 우리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곳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평생직장이라는 사명감으로 청춘을 다바쳐 온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는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쫓겨나는 그들의 뒷모습... 퇴근후 소주 한잔의 여유와 정이 흐르던 직장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동료는 생존 경쟁의 치열한 전장에서 밟아야할 경쟁상대에 불과했다. 사용자들은 이런 것을 두고 신경영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삭감과 각종 복지제도의 폐지 그리고 노동강도를 강화하려는 고도의 통제수단으로 밖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실제로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휴일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고 평일에도 최고 말딴이라 해도 수당없는 평균 근무시간이 14시간 이상이다. 어느 사무직 노동자는 월차휴가를 사용하고 싶어도 책상이 없어져 버릴까봐 쉴 수가 없다는 푸념을 했다. 정말 그는 98년 1년동안 월차휴가는 고사하고 일요일도 몇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이나 관리직이나 인원은 IMF이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반대로 사용자들이 늘상 임금인상의 기준으로 삼는 생산성은 2배 가까이 향상되었다. IMF 불황기에 작업분량이 그만큼 늘었을 리가 없지만 떠나간 동료들의 몫까지 고스란희 떠안아야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임금은 1인당 연간 몇 백만원씩 감소되었으며, 여기에 엄청난 물가상승까지 따진다면 가정경제에서 느끼는 임금삭감액은 돈천만원에 가까울 것이다. 그동안 쥐꼬리만한 임금에서 조금씩이라도 떼어서 저축을 하던 것은 이제 꿈도 꿀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적금을 해약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들의 사교육(그래봤자 피아노 학원이나 속셈학원 한두개 정도지만)을 전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빠듯한 살림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어느 노동자가 팍팍한 살림을 얘기하며 젖먹이에게 다섯 숟가락 먹이던 분유를 세 숟가락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했을 때는 누구도 대꾸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칠줄 모르고 IMF동안에도 계속되는 과다한 사교육비 지출에 관한 언론의 보도들은 도대체 어느나라를 두고 하는 이야기들인지 우리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노동자들을 서글프게 하는 것은 메말라가는 동료애와 사회의 기초단위로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쉴수 있는 가정이 무너져간다는 것이다. 요즘들어서 노동조합 법규담당자에게 가장 많은 상담내용은 보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이혼 절차를 묻는 내용들이다. 동료간에 보증을 섰다가 본의아니게 가정파탄을 겪는 조합원이 부지기수이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보증을 부탁하는 일은 얼굴에 웬만한 철판을 깔았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벼렸으며, 어느 노동자는 보증을 설 때는 이혼도장을 같이 찍기로 부인과 약속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다. 거기다가 회사에서는 능력급이니 성과급이니 하며 인사고과를 강화하고 서로를 경쟁시키고 감시하게까지 한다. 부서실적에 따라서 개인의 고과도 정해지고 임금도 정해지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이를두고 ‘5호담당제’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활동은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권리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딴에는 우리 노동자들의 힘으로 국가경제를 살려보고 지금 당장 조그만 권리들을 유보함으로써 더 큰 것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또 한번의 순진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래서 무쟁의에다 임금동결이나 삭감 등을 주 내용으로 한 노사화합선언이 유행처럼 번져가기도 했었다. 반면에 지난 1년 동안 재벌들과 보수기득권 세력들은 입으로는 국가경제 위기를 외치며 노동자들에게 합리적 노사관계, 노사평화를 주장하면서 이 시기에 자신들에게 다가온 상대적 이익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IMF나 빅딜이나 구조조정이나 이런 말들은 우리 노동자들의 삶과는 먼 사치스러운 것들로만 여겨진다. 단지 우리가 뼈져리게 깨달은 것은 우리만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되찾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데 누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인 데 한 쪽에서는 벌써 꽃놀이를 즐긴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도 포기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한꺼번에 다 되찾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사회가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그동안 잘못되었던 것들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지극히 소박한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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