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4 여름.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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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평화공존’을 위한 연대를 모색하며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우리가 알아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

김민정 | 보건의료회원모임 회원


1. 들어가며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다수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납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마스를 궤멸시키겠다며, 6월 현재까지도 가자지구 폭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피난민이 몰려있는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까지 지상전을 전개하여, 민간인 사상자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건국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낸 원죄가 있고,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인을 탄압해온, 현재에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며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왜 하마스는 민간인 살해와 납치까지 불사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했을까?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관한 답을 찾으려면 좀 더 깊게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이 두 책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수천 년 된 종교 갈등으로 절대화하는 대신 ‘현대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렇기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이 되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흐름과 주요 쟁점을 조명한다. (책의 집필 시점 상, 아브라함 협정과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2020년대의 사건은 다루지 못했다.) 또한, 특정한 서사를 제공하는 대신, 해법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어 온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80년 가까이 지속된 이 문제가 결국 그 긴 역사 중에서도 전례 없던 규모의, 최악의 테러와 전쟁으로 귀결된 지금에는, 이렇게 역사를 되짚어보는 노력이 필요하겠다고 느꼈다. 

첫째 책은 2030 국제정치 독서모임 <책으로 여는 세계>에서 함께 읽은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2015)다. 저자인 우스키 아키라는 일본의 현대 중동 정치 전문가로, 이 책은 근현대사에 걸친 유대인 문제의 결과물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생겨났고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시각에서 출발해 종교적인 기원에서부터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2010년대의 상황까지 시간 순서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둘째 책은 『우리가 알아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도브 왁스만, 2024)이라는 책이다(이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 저자인 도브 왁스만은 이스라엘, 유대인에 관한 연구를 다수 진행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로, 이 책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적인 쟁점에 대해 양측의 관점을 풍부히 소개하는 입문서 역할을 한다. 아래부터는 두 책이 다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와 쟁점이다.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종교 때문에 일어났을까?

흔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교 갈등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와 유대교의 야훼는 동일한 신이다. 신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기로 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가나안)과 예루살렘은 이들 모두에게 중요한 곳이다. 다만, 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슬람은 서자이나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로,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나 적자인 이삭으로 내세운다는 차이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는 오랜 시간 동안 한 지역에서 같이 어울려 살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과 아랍인은 그때까지 수 세기 동안 평화롭게 지내왔으므로 당시에는 이들 사이에 폭력적인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당시에는 아랍어를 모어로 쓰는 유대인도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을 ‘아랍인’으로 여기기도 했다는 점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이 분쟁이 시작된 시점은 언제였을까? 두 책 모두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본격화되면서부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우생학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요한 논리로 부상하며, 유럽 등지의 ‘반유대주의’로 이어졌다. 1881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의 배후로 유대인이 지목되자, 동유럽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포그롬’이라 불리는, 유대인을 향한 폭력과 학살, 추방이 일어났다. (포그롬과 홀로코스트는 이후로도 유대인이 아랍 국가나 국제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 고립감, 공포를 내세우는 계기가 된다.) 이는 유대인의 집단 탈출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유입으로 이어진다. 이때부터 점차 이주민과 아랍인 사이의 긴장이 생겨난다. 

유대인을 향한 극단적인 폭력은 유럽 국가 속에서 살아왔던 유대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유럽 국가에 동화되려는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유대인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대응, 즉 시오니즘이 등장했다. 모든 유대인이 시오니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고, 유대인 국가를 어디에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에 대한 의견도 다양했지만, 테오도어 헤르츨은 강대국의 협력을 얻어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주장을 펼치고 실제로 여러 국가의 수장을 만난다. 그의 주장은 시오니즘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계속되어, 1882년에만 해도 팔레스타인 인구의 8%를 넘지 않았던 유대인의 비중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에는 30%에 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아랍 내에서도 식민 지배를 겪으며 아랍 국가를 설립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흐름이 커지고 있었으므로, 시오니즘과 아랍 민족주의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3. 문제의 시작은 영국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은 서로 모순되는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고, 이는 이스라엘 건국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첫째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이다. 아랍인이 영국 측에 서서 오스만 제국과 싸운다면 아랍 독립 국가를 수립시켜 줄 것을 약속했다. 

둘째는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다. 1차 세계대전에 승리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동부 아랍 지역을 각각 나누어 통치하자고 합의하였다. 이에 아랍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셋째는 ‘벨푸어 선언’으로, 유대 국가 설립의 기틀을 마련해준 조약이다. ‘팔레스타인 안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가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영국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지만, 유대 국가를 지원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수에즈 운하 인접 지역의 입지를 확보하고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목적,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을 프랑스보다 시오니스트에게 맡기는 편이 영국에 이롭다는 전략적 판단에 의해 체결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산레모 회의는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 중 완전한 독립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여겨진 지역에 대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연합국 중 한 나라가 통치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을 위임통치하게 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준비하는 동시에, 벨푸어 선언으로 약속한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반된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권력을 공유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참가하는 입헌평의회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랍 측 대표는 위임통치 자체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거부하였다. 이후 팔레스타인의 아랍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는 각각의 지도부가 영국 위임정부와 논의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복지, 의료서비스, 교육을 제공하는 등 국가의 역할을 하며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반면, 아랍 공동체는 가문끼리의 세력다툼으로 소통을 이어나갈 강력한 중앙 기관이 부재했다. 영국이 분할통치의 방식으로 아랍 내부의 갈등을 부추긴 측면도 있었다. 이렇듯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 공동체가 별도의 사회를 발전시키도록 허용하면서 이들 사이의 민족주의적 갈등이 발생할 여건을 만들었다. 

영국은 나치즘, 파시즘을 피해 도망친 유대인 난민의 유입과 토지 매입을 허용하여, 대규모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아랍 공동체는 폭력을 동원하며 유대인의 유입을 강력히 반대했다. 유대인 이민자가 늘어나면 아랍 국가를 세우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산발적인 시위와 폭력은 아랍 총파업과 대반란으로 이어졌다. 시위의 물결이 점점 커지자 영국은 시온주의자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천 명의 아랍인이 사망했다.

그런데 1939년 독일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태도가 180도 변한다. 유대인들이 나치와 손잡을 리 없으니, 아랍 국가들이 독일 나치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되었다. 아랍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안한 팔레스타인 백서는 영토 분할 계획을 철회하고 10년의 과도기를 거쳐 아랍인이 다수인 단일 국가를 세우고 유대인 이민자 수와 토지 매입을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벨푸어 선언 폐기에 반발한 시온주의자는 중동 지역 최고 관리인 월터 모인 경을 암살하고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하는 등 테러를 벌였다. 

영국은 더는 이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팔레스타인에 유대 난민 10만 명을 받아달라는 미국의 요청도 영국이 수용하기 어렵다며 1947년 유엔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넘겼다.
 
 

4. 이스라엘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유엔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를 종료하고,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통치하에 두자는 분할 계획을 발표한다. 아랍인은 이것이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에 위배되며, 자신들의 영토를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시온주의자는 이를 국가를 수립할 기회로 보고 받아들였고, 유엔 회원국과 미국에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여 찬성표를 던지게 했다. 이 분할 계획은 결국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엔 결의안 181호로 채택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파업에 들어갔고, 분노한 폭도와 무장 갱단이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온주의 민병대도 보복에 나서며 폭력은 격화되었고 내전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국은 개입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시오니스트는 유대인 국가 지역을 분할결의안보다 넓히기 위해 ‘달레트’ 계획에 따라 군사행동을 실시했다. 특히 성지 예루살렘 점령에 전력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9일 ‘데이르 야신 학살’이 발생한다. 시오니스트 무장단체가 예루살렘 서쪽의 팔레스타인인 마을을 공격해 250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는 유대인 지배지역 내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을 패닉에 빠뜨려 대규모 피란민이 발생했다. 일시적으로 피란할 목적으로 떠났던 피란민은 종전 후 귀환 관련 교섭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며 다시 원래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난민 발생을 팔레스타인의 ‘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쟁점은 시오니스트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쫓아냈는지 여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수정주의 역사학자 베니 모리스의 연구를 인용하여, 팔레스타인인이 자발적으로 떠난 것뿐이라는 이스라엘 주류의 입장과 달리 이들은 시온주의자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리스는 또한 유대인 국가 예정지에 되도록 적은 수의 아랍 주민만 남길 것에 대한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명확한 방침이 있었다기보다는 각각의 전선에서 지휘관의 상황판단에 따라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한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 추방은 군사적 비상 계획이었을 뿐 정부의 정책은 아니었으며, ‘종족 청소’라는 주장은 과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종족 청소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이스라엘에 남은 팔레스타인인은 극소수였을 것인데, 실제로는 약 15만 명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획적이었든 아니든 전쟁 중 민간인 추방은 국제법상 전쟁범죄다.)

이미 유대인 국가 예정 지역을 점령해 관리 하에 두었던 이스라엘은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일의 하루 전날인 1948년 5월 14일 독립을 선언했고(미국과 소련은 이를 즉시 인정했다), 다음날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군하여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두 책 모두 이 전쟁은 겉보기에는 아랍 국가들이 연합하여 유대 국가 수립을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대신하여 전쟁을 벌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분열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가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여, 이스라엘에 할당된 지역을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영토를 이스라엘과 나누어 가지려고 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의혹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지만 명시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는데, 두 책은 이를 기정사실로 설명한다.)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역시 각자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계획이 있었고, 요르단을 견제하고자 했다. 

특히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수정주의 국제정치학자 아비 쉬라임의 연구를 인용하며, 팔레스타인은 압둘라와 시오니스트의 이러한 공모에 희생되어 쪼개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1956년 2차 중동전쟁 직전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비밀 평화교섭 논의가 있었듯,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이 전면적인 군사 대결을 펼쳐왔다는 지금까지의 역사 인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랍 국가들의 진짜 목적은 ‘팔레스타인 해방’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내정과 아랍 세계 내 패권 경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도 결국 영토에 대한 탐욕, 아랍 내 권력 경쟁이 전쟁을 시작한 큰 이유였다는 점에서, 이미 1차 중동전쟁 당시부터 ‘아랍의 단합 및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는 실제라기보다 수사적 표현에 가까웠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당시 아랍 세계의 여론은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하고 시온주의를 격렬히 반대한 것이 사실이므로, 아랍 국가 정권들이 이를 방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결국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엔 분할안보다 넓어졌고, 이집트는 가자지구, 요르단은 서안지구를 통치하게 된다. (이 두 곳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다.) 이 시기는 팔레스타인인에게는 그야말로 재앙, 비극의 시기였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수립되지 못했고, 팔레스타인인은 고향을 떠나 서안지구나 가자지구의 난민 텐트촌이나 요르단, 이집트 등에서 살아야 했다.
 
 

5. 평화를 위한 시도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평화 프로세스의 실패는 단순히 어느 한 쪽의 잘못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팔레스타인은 분쟁의 궁극적인 해결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 회담의 방식이나 절차에 대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타협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랍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두 사회에 쌓인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지면서 평화 조성은 제자리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저자 후기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문제를 강조했지만, 본문에서는 팔레스타인 측의 실책도 짚고 있다.  

먼저, 몇 차례의 중동전쟁을 거치며 아랍과 이스라엘의 태도가 변화하여 ‘영토와 평화의 교환’으로 나아가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① 1956년 2차 중동전쟁과 나세르주의의 부상
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범아랍주의, 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이스라엘과 서방의 간섭에 각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대규모 무기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자, 이스라엘이 선제적으로 공격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영국과 프랑스도 (이들 국가가 소유해왔으나, 나세르가 국유화를 추진하는) 수에즈 운하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보낸다. 그러나 소련의 중동 개입을 우려했던 미국이 압력을 가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철수하게 된다.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 이스라엘과 서방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는 중동 내 서구의 영향력 제거, ‘반동적인’ 아랍 정권 교체,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창했다. 나세르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후 중동 전체는 쿠데타, 내전 등 격변의 시기를 겪는다. 
 
② 1967년 3차 중동전쟁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재부상
3차 중동전쟁은 주로 나세르의 도발적인 행동으로 촉발되었다. 그러나 나세르는 실제 전쟁을 일으킬 의도가 없었고, 단지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이스라엘이 물러나 아랍 국가 간 경쟁에서 자신의 입지가 올라갈 것이라고 믿고 도박을 벌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1967년 5월 소련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곧 시리아를 침공할 계획이라는 거짓 정보를 이집트에 흘렸다. 나세르는 이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유엔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면서 이스라엘 남쪽 국경까지 군대를 배치했다. 그 후 타란 해협을 봉쇄해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을 막음으로써 이스라엘에 각종 수입품과 석유가 공급되지 못하게 했다. 이집트는 요르단, 시리아 간 군사동맹을 구축했고, 이라크, 쿠웨이트, 알제리 등 다른 아랍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스라엘 내에서 커져 결국 전쟁을 결정했다. 

이스라엘은 개전 6일 만에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서안지구, 시리아 남서부 골란고원까지 정복하여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주는 농담들을 소개한다. 3차 중동전쟁 직전만 해도 경제 불황, 아랍 국가들에 대한 공포로 이스라엘을 떠나는 사람 수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람 수보다 훨씬 많아, “공항 출국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나라를 떠나는 최후의 이스라엘인은 부디 전기를 꺼주십시오’”와 같은 농담이 나왔다. 반면, 전쟁에서 대승한 뒤 나온 농담은 이렇다. “두 명의 이스라엘군 장군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뭘 할까? 카이로를 얻으러 가볼까?’ ‘좋은 생각이야. 그럼 오후에는 뭐하지?’”

이스라엘의 승리는 미국-이스라엘 관계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관계를 영원불변의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두 책은 실제로 이스라엘이 미국에 ‘가치’를 증명하여 동맹이 긴밀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3차 중동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2차 중동전쟁의 배경만 하더라도,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이집트의 무기 공여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스라엘의 무기 공여 요청을 거절한 것이라고 짚는다. 그 여파로 강대국과의 협력, 외교를 통한 아랍과의 평화를 주장한 샤레트 총리가 실각하고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통한 생존권 확보를 주장한 벤구리온이 정권을 잡으며 전쟁을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상기했듯, 2차 중동전쟁 중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보다 소련의 중동 개입 차단을 우선시했다. 반면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입증한 3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미국 존슨 행정부는 중동 내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할 교두보로 이스라엘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이에 따라 전쟁 다음 해인 1968년, 처음으로 미국과 이스라엘 간 대규모 무기 거래가 이뤄졌음을 지적한다. 

반대로, 3차 중동전쟁의 패배는 아랍인에게 엄청난 정신적 상처를 남겼으며, 나세르 개인의 실패를 넘어 나세르주의, 시리아의 바트주의 와 같은 아랍 사회주의, 범아랍주의, 세속주의 이념의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중동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주의의 재부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3차 중동전쟁은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아랍 국가들이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를 느끼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1967년 1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영토와 평화의 교환’(land for peace) 원칙을 명시한 결의안 242호를 통과시키고,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이 이를 받아들여 국경을 획정했다. 이로써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원칙이 이후 모든 아랍-이스라엘 평화협상의 기초가 되었다. 

반대로 그때까지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가려있었던 팔레스타인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랍이 이스라엘에 처참히 패배한 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현실에 직면한 팔레스타인인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 것도 역설적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재부상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전과 달리 두 지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소속감과 조직력이 커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당국이 팔레스타인인의 자유에 억압을 가할수록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오히려 강성해졌다. 

이는 파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등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속한 다양한 무장단체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무장투쟁전략을 채택하고 1960~70년대 다수의 테러공격을 감행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동시에 논란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1970년 ‘검은 9월’ 사건과 1972년 ‘뮌헨 학살’ 사건이 있다. 먼저 '검은 9월' 사건은 요르단 내 자치권을 부여받은 PLO의 세력이 커지면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갈등은 PLO일부가 국왕의 암살을 시도하거나 요르단 왕정의 전복을 기도할 정도로 첨예했다. 이런 가운데 1970년 9월 PLO 산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 민항기 네 대를 납치하고 그 중 세 대를 폭파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후세인 국왕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요르단군과 PLO간 심각한 교전이 발생한다. 교전 끝에 PLO가 레바논으로 쫓겨났는데, 이것이 ‘검은 9월’ 사건이다.

그런데 PLO 일부가 이 사건에서 이름을 딴 ‘검은 9월단’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대표팀 11명을 인질로 잡았다가 전원 살해한다. 이 ‘뮌헨 학살’은 전 세계로 방송되어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PLO의 영향력은 점차 국제적으로 승인받아, 1974년 아랍연맹 회의는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하면서 정당한 대표로 PLO를 인정하고 아랍 세계 내 국가와 동등한 지위로 간주하기로 약속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PLO가 유엔 옵서버 지위를 획득해 유엔 총회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연설을 한다. 

한편 이스라엘인은 서안지구 등에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종교적 시온주의자들이 주도하였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지금도 정착촌 문제는 중요 쟁점이다.
 
③ 1973년 4차 중동전쟁과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0년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사다트는 국내 경제 성장을 위해 국방비를 줄이고 수익성이 높은 유전이 있는 시나이반도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이스라엘은 사다트의 평화 제의를 무시했다.

이에 사다트는 이스라엘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또 한 번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방심하던 이스라엘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이집트 본토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소련이 이집트군을 구출하겠다며 개입 의사를 밝혔다.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유엔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압박했고 전쟁은 종료됐다.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 늘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느꼈다. 사망자도 많았고, 아랍인들이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졌다. 이는 이스라엘인들도 현실적인 평화 방안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3차 중동전쟁이 이슬람주의의 재부상으로 이어졌듯 유대인 일각에서 과격한 종교적 시오니즘이 부상하는 효과도 낳았다.) 

1977년, 사다트가 아랍 국가 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 연설을 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스라엘 내에서도 시나이반도를 반환하고 평화협상에 나서야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미국 카터 대통령이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미국 대통령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해 협상을 주도하고 압박했다. 사다트는 시나이반도 반환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일정 정도 합의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베긴은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결국 사다트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5년간 유지하고 이후 영토의 최종 지위 문제를 협상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은 향후 영토 문제에 관한 협상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것에 동의했고, (의미가 모호하지만) ‘팔레스타인 국가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결론적으로 베긴과 사다트는 이집트-이스라엘 간 평화조약과 이와 별개의 협정인 ‘중동 평화를 위한 프레임워크’에 동의한다. 후자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이 두 협정을 합쳐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라고 한다. 이때 미국은 이집트, 이스라엘에 각각 연간 약 21억 달러, 3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약속한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대한 두 책의 평가는 초점이 다르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이어졌다는 의미가 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는 구체적 진전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예루살렘이나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이 논의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인은 독립이 아닌 ‘자치권’ 부여를 거부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사다트가 팔레스타인을 버렸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실제로 사다트에게는 이집트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이스라엘의 양보도 이끌어내어, 아랍인이 적대시하는 이스라엘과 협상하는 대외명분을 얻을 필요가 있었고, 카터도 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가장 강력한 아랍 국가였던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대규모 전쟁의 위험이 크게 줄어, 그 이후 40년 동안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로 인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가장 큰 성과라고 강조한다. 

사다트와 베긴은 19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집트는 아랍의 적인 이스라엘과 협상을 했다며 아랍 세계에서 한동안 배척당했고, 사다트는 1981년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④ 1993년 ‘오슬로 협정’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에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양자 간 직접 협상을 거부했다. 협상 자체가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이 유화 국면에 접어들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1990년 8월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쟁에 개입하며, 아랍 국가들에 전쟁이 끝나면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다. 중동에서도 냉전 구조를 해체하고 아랍 국가들을 미국 주도의 새로운 질서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91년 10월, 미국과 소련은 공동의장국을 맡아(2달 후 소련은 해체한다) 마드리드에서 아랍-이스라엘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을 초청한다.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열세인, 이러한 방식의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미국이 참가를 압박했다. 마드리드 회의는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 첫 공식 대면 평화회담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컸다. 

더구나 여기에는 팔레스타인도 초청되었다. 이스라엘이 끝까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자체 대표단이 아닌 팔레스타인-요르단 공동 대표단의 형식이었고, PLO와 공식적으로 연계된 팔레스타인인의 참가도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참가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대면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독립적 대표성을 부정하거나 팔레스타인을 평화회담에서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어차피 마드리드 회의에 참가한 팔레스타인 대표단은 PLO 지도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그럴 거면 PLO와 직접 대화하자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아래의 상황과 맞물려 1993년 오슬로 협정까지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로, PLO의 변화였다. 이 시기 PLO는 레바논 전쟁에서 패하며 아프리카 북부의 튀니지로 쫓겨난 상태였다. 팔레스타인 땅과 멀어지면서 자연히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지도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스라엘 접경지역에 전투기나 무기를 배치할 수 없어 무장투쟁 노선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1차 인티파다’가 발생한다. 1987년 12월, 이스라엘 군용 차량에 의해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는 자발적인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총파업,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 납세 거부 등 비폭력시위를 이어나갔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억압과 그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킨다.

돌파구로 PLO는 역사적 타협을 결정한다. 1988년 11월, PLO 아라파트 의장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만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알제리 선언’)을 발표한다. 그동안 거부하던 1947년 유엔 결의안 181호(팔레스타인 분할)를 공식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였다. 한 달 후 아라파트는 ‘두 국가 해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테러활동을 포기하며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인티파다 시작 직후 설립된 하마스(‘이슬람 저항 운동’)는 ‘두 국가 해법’을 단호히 거부하고, 유대 국가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성전(지하드)을 주장했다. PLO의 완화된 전술과 대비되는 비타협, 폭력 전술을 내세운 하마스는 PLO의 경쟁자로 부상했다. PLO 주도 세력인 파타가 세속주의 노선인 것과 달리, 하마스의 이념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와 급진적 이슬람주의의 결합이었다. 

PLO는 이러한 정치적 압박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파산 직전에 있었다. 인티파다 지속 비용을 점점 감당하기 어려웠고, 소련의 지원도 줄었다. 두 책 모두 결정적인 원인에 걸프전쟁 때 PLO가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지했던 대실책이 있다고 지적한다. 전쟁 당시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팔레스타인에는 이라크를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고, 이는 PLO의 후세인 지지로 이어졌다. 그러나 걸프전쟁은 후세인이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일으킨 것이라 국제사회에서 정당성이 없었다. 마침내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만 산유국들은 PLO에 자금 지원을 중단했고 PLO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정치 조건이 바뀌었다. 1992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며 이츠하크 라빈이 총리가 되었다. 라빈은 PLO의 세력이 약해진 때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마스가 부상하는 시점에서, 하마스보다는 PLO와 협상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이며 이를 통해 PLO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계산도 있었다. 또한 라빈은 국방부장관 당시 인티파다를 진압하는 이스라엘군에 시위대의 ‘뼈를 부러뜨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결국 인티파다를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이스라엘 내에서도 인티파다를 목도하며,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철수하거나 PLO와 협상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로써 1993년 9월,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PLO 아라파트 의장이 만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와 이스라엘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한 ‘오슬로 협정’에 서명한다. (두 사람과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199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1993년 1차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설립 계획을 담았다. 또 향후 협정에서 해결해야할 주요 쟁점으로 팔레스타인 국가의 성격과 국경,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 보안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예루살렘의 지위(‘최종 지위 문제’)를 확인했다. 신뢰가 쌓이고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 타협의 여지가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논의를 나중으로 미뤄두긴 했지만, 2년 이내에 협상을 시작하고 5년 안에 포괄적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로 한다.
1995년 2차 오슬로 협정은 서안지구를 3가지 구역, 즉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관할하는 지역,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이 공동 통치하는 지역, 이스라엘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나누었다. 이는 5년을 넘기지 않는 한시적 조치로 마련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⑤ 평화 프로세스의 붕괴
오슬로 협정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서로 신뢰관계를 쌓아가며 점진적으로, 장기적으로 평화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될 것이라 기대 받았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1995년 11월 라빈 총리는 평화 프로세스를 지지하는 집회에서 연설을 마친 후,  “신이 주신 땅을 이교도에게 팔아넘긴 배신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한 이스라엘 우파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아라파트 의장은 이 소식을 듣고 “평화 프로세스는 오늘로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는데, 실제로 이는 평화 프로세스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유대교 교리를 들먹이는 유대인에 의해 이스라엘 지도자가 암살됐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는 평화 프로세스와 노동당에 대한 지지 상승으로 이어졌지만, 새 총리 선거 직전에 “신이 주신 땅을 이교도에게 팔아넘길 수 없다”는, 정확히 똑같은 논리로 오슬로 협정을 극렬히 반대해온 하마스의 폭탄 테러로 이스라엘인 5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리쿠르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2만 900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노동당의 페레스를 누르고 승리한다. 
 

네타냐후는 오슬로 협정을 비난하며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가자지구의 공항과 항구 건설을 반복적으로 미루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자금 이체를 장기간 중단시켰다.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건설 동결 조치를 해제했고, 예루살렘과 ‘통곡의 벽’으로 이어지는 고대 지하 터널을 개통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압박으로, 네탸냐후는 서안지구 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확대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추가로 철군하는 등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네타냐후는 우파 지지층의 지지를 잃었고, 역설적으로 1999년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에게 총리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바라크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장군 출신이었지만,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하고(당선 이후 실행) 팔레스타인, 시리아와 평화를 이루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세계는 다시 한 번 평화 프로세스의 성공을 기대했다. 

그러나 2000년 7월, 클린턴의 주선으로 만난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의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결렬되었고, 두 달 뒤, 오슬로 협정에 반대하는 리쿠드당 지도자 샤론의 도발(팔레스타인인의 성지 알-아크사 모스크에 경찰 1000명을 대동하고 방문)로 2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는 1차와 달리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약 1000명의 이스라엘인과 32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양측의 여론은 악화했고, 2001년 3월 샤론이 총리로 당선되며 평화 프로세스가 붕괴되었다. 9·11 테러 반년 뒤인 2002년 3월, 샤론은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며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공격을 지시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캠프 데이비드 회담 당시 바라크는 역대 모든 이스라엘 지도자 중 가장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바라크는 미국의 조정안을 받아들여, ‘서안지구의 91%, 가자지구 전체, 동예루살렘 일부’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대한 어떠한 조정안도 거부해왔는데, 처음으로 예루살렘 분할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동예루살렘 전체를 수도로 삼겠다는 태도를 끝까지 고수하여 회담이 결렬되었다.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PLO를 지원한 아랍 국가들도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라파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보면, 회담 결렬이 바라크의 정치 생명을 끝장내어 2차 인티파다와 샤론의 집권으로 이어졌으며, 그 이후로 다시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 수준의 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러나 두 책은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의 붕괴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 결렬 이상의 문제라고 평가한다. 즉, 오슬로 협정 자체에 한계가 있었으며, 협정을 진행하는 과정은 신뢰를 쌓기보다는 오히려 불신을 쌓는 경험으로 점철되었다.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는 오슬로 협정은 ①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예루살렘 관련 중대 쟁점 논의를 뒤로 미뤘다 ② 팔레스타인 자치구 설정은 이스라엘 뜻대로 이뤄졌고, 이스라엘은 이마저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③ 양자 간 힘의 차이로 인해 PLO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두 책 모두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목하는 것은, 평화 프로세스 기간에도 유대인 정착촌 건설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스라엘 정착민 수는 11만 5000명에서 20만 명으로, 약 70%나 늘었다. 정착촌 문제는 오슬로 협정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도 대단히 중요한 쟁점으로, 팔레스타인인의 분노와 불신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스라엘인에 대한 테러를 늘렸고, 이스라엘이 그 대응으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봉쇄하면서 팔레스타인인의 자유가 제한당하고 경제적으로도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은 이런 상황에서 바라크가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 내놓은 ‘관대한 제안’은 팔레스타인인에게 오히려 모욕으로 느껴졌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아라파트가 하마스와 이슬라믹 지하드의 테러 활동을 용인했으며, 바라크의 제안을 아무 역제안 없이 거부했듯 (이집트의 사다트에 비해) 평화대화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스라엘의 지적도 사실이라고 짚는다. 

저자는 지도자들의 이러한 행보는 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평화 대화에 정치적 제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격렬한 갈등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로, 극복을 위해서는 풀뿌리 수준에서부터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화 프로세스를 무너뜨리려는 양측 극단주의자의 폭력적 행동(정치학 용어로 ‘스포일러’)은 그러한 작은 노력을 압도하고 정세를 흔들어놓았다. 앞서 언급한 라빈 총리 암살, 하마스의 폭탄 테러와 1994년 이스라엘 극단주의자가 팔레스타인인 29명을 살해한 ‘헤브론 모스크 총기 난사’ 등이다. 두 책 모두 이러한 폭력이 평화 프로세스가 실패한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고 평가하지만, 적어도 평화 프로세스를 더 이르게, 더 참혹하게 붕괴시킨 책임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의 극단주의자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6. 하마스의 가자지구와 자치정부의 서안지구로 분열된 팔레스타인

2005년, 샤론 총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분리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철수시킨다. 가자지구의 경제는 이스라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실업, 빈곤율이 올라가는 등 경제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이때 가자지구 내 하마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 ‘두 국가 해법’을 거부하며, 유대 국가를 파괴하여 팔레스타인을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7년 강령 개정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이슬람의 땅’이 아닌 ‘팔레스타인인의 땅’으로 정의하고, 유대교가 아니라 시오니즘이 적이라고 규정하는 등의 완화가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자살 폭탄 테러를 서슴지 않았으나, 가자지구 내 주민들에게 자선, 의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며 세력을 키워왔다.

하마스가 결정적으로 권력을 차지하게 된 계기는 선거였다. 하마스는 2차 인티파다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종료되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2006년 1월 지방선거에 참여하기로 한다. 결과는 하마스가 134석 중 74석을 차지한 대승이었다. PLO와 자치정부를 주도해온 파타를 비판하는 표가 하마스로 집중된 덕분이었다.

선거 이후 파타와 하마스의 권력 투쟁이 심화하여, 암살 시도와 유혈충돌까지 발생한다. 2007년 6월 (파타 소속의) 압바스 자치정부 대통령이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하마스를 비합법 단체로 선포하자, 팔레스타인은 파타가 통치하는 서안지구와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로 쪼개져 오늘날에 이른다.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봉쇄를 더욱 강화했다. 하마스는 이러한 상황 자체를 타개하기보다 무기 구입, 지하 터널망 구축, 이스라엘을 향한 군사공격에 집중했다. 아랍 국가들의 후원으로 가자지구 내 치안과 필수 사회서비스는 제공했지만, 정치적 반대세력, 언론, 비정부기구를 탄압하고, 주민 납치, 구금, 초법적 살인까지 저지르고 있다. 이렇다 보니 하마스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점차 약화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와 대립하는 파타 주도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선뜻 대안으로 내세우기는 어렵다. 자치정부는 오랜 부패와 무능, 권위주의적 행보로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뢰를 잃어, 하마스의 영향력 확대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2006년 이후로 파타, 하마스가 몇 번이나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결국 팔레스타인 전역의 선거가 지금까지 열리지 않았는데, 여기에도 권력 상실을 우려하여 선거를 회피하는 압바스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팔레스타인이 이와 같이 분열된 상황에서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자체도 무의미한 소모전이 길어지며 민간인 희생자만 늘어날 수도 있다는 어두운 전망이지만, 전쟁 이후에도 누가 어떻게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고 가자지구를 통치할 수 있는가는 미지수인 상황이다. 
 
 

7. 나가며

역사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군사력을 포함하여 그 어떤 수단으로도, 유대인이든 팔레스타인인이든 어느 쪽을 완전히 몰아내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현실이다. 아랍 국가들은 이미 1967년에 이 사실에 직면했다. 현재 이스라엘 시민의 약 20%는 팔레스타인인이며, 이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스라엘 유대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고 원내에 진출한 정당도 있다. 동예루살렘, 서안지구,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의 현실, 500만 명 가량이나 되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과 점령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세계 각지에서 터져 나오고 있으며, 미국 대학생들의 캠퍼스 점거 시위가 상징하듯 이는 세계 정세의 갈림길이 될 11월 미국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문제의 소재를 명확히 드러내 해결의 방향을 찾아내려 했지만, 쓰면 쓸수록 한층 더 깊은 물속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썼듯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두 책이 설명하는 역사를 되짚으며 든 생각은, “‘공존’이 불가피하다면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다. 즉, 어느 쪽이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시도, 혹은 그러한 바람을 드러내는 세력은 선택지에서 배제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 자체가 자동으로 해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평화공존의 필요조건이 아닐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것도 이런 의문들이었다. 만약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치가 더 일찍 시작되었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만약 라빈 총리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조금 더 진전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만약 아라파트 의장이 표면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하마스 등의 테러를 적극적으로 억제했더라면, 평화 프로세스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여론이 유지되고 이것이 이스라엘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쟁점은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 이 순간에도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 백여 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에서, 하마스의 폭력 행동에 대해 ‘모든 수단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은 것일까? 팔레스타인 대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하마스가 10월 7일 공격을 통해 방해하려고 한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관계 정상화를 꼭 반대해야 하나? 사다트가 추진했던 이스라엘-이집트 관계 정상화를 반대했던 이들처럼? 이러한 시도가 팔레스타인 해방에 역행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근거는 무엇일까?

물론 이러한 쟁점을 따지기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진 이스라엘에 짓눌려 고통 받는 상황에서 나온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모든 민간인 살해와 납치, 구금에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일반 원칙 또한 절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태도가 진정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위하는 것이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특히 하마스가 이러한 주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하마스와 네탸냐후 정권이 이런 식으로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온 것이다. 

안타깝고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태도는, 당사자의 모든 주장과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 압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치적 행위로서 연대는 자신의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이뤄지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 문제 해결에도 더 이롭다. 모쪼록 이 글에서 소개한 두 책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에 관한 토론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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