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4 여름.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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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변화할 수 있는가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⑤

박준형 | 회원,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 이번 글은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연재의 결론을 담은 마지막 글이다. 전체 글 목록은 다음과 같다.


민주노조 운동이 분출한 80년대 후반 이후 30여 년이 지났다. 2025년은 이 운동의 조직적 중간결산이라고 할 민주노총의 창립 30주년으로,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준비 중이다. 따라서 그간 민주노조 운동의 성취와 실패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시기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사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현재 위치를 돌아보고자 한다.
 
 

1.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흐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그 해 민주화운동의 분출과 6.29 선언 직후에 전개되었지만, 이 사건의 결과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70년대 중화학공업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80년대 후반 3저 호황기를 맞으면서 젊은 노동자층이 대거 형성되었다. 그러나 군사독재 하에서 억압적 노동환경과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한편,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급진화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직할 수 있는 이념과 조직형태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할 수 있었다. 

특히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 있었던 85년의 두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4월의 대우자동차노조 파업과 6월의 구로동맹파업이다. 상당한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전자의 투쟁은 점차 규모가 커지고 있는 중공업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후자는 중소 제조업을 중심으로 지역(공단)에 기반한, 여성노동자가 상대적으로 주류인 투쟁이었다. 사업장을 넘어 정치적 요구까지 내건 이 투쟁은 이후 지노협 건설로 이어지는 지역연대 투쟁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흐름은 이후 노동자 투쟁의 역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계승된다.

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요구는 급진적이기는 했으나 다분히 경제적이었다. 물론 높은 임금인상 요구만이 아니라 억압적 현장관리의 척결 요구도 있었고, 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얼마간 당연한 요구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업장 내에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7~9월에 남동해안 공업지대의 중화학공업 대공장에서부터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이 폭발했으나, 이에 나섰던 노동자들이 그 이후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까지 머릿속에 어렴풋하게라도 그리고 있던 상태는 아니었다. 이 방향을 제시한 것은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흐름이었다. 이 흐름이 노동자들의 폭발적 투쟁과 만나, 전노협 건설로 이어지는 민주노조의 전국적 단결과 투쟁, 민주노조 운동의 이념과 가치를 주조해갔다. 그러나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긴밀한 결합은 전노협 결성 이후 민주노총 창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 약화한다.

80년대 말 폭발적으로 성장한 민주노조 운동은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사용자의 공세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임금인상을 쟁취한다. 그러나 90년대 초 호황국면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급격한 임금인상에 부담을 느낀 자본 측의 대응도 본격화된다. 정부는 전노협 탄압과 임금 가이드라인 제시, 자본은 기업 구조조정과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을 행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1990년 1월 전노협이 건설된다. 전노협의 주력이던 중소 제조업 노동조합은 탄압과 구조조정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임금인상은 물론 ILO 협약 비준 투쟁과 같은 제도개선 투쟁, 대정부 정치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전노협이 사무전문직 중심의 업종회의와 대기업노조연대회의를 포괄하는 “민주노조 총단결”의 문제에 대해 이들을 전노협에 가입시키는 방향으로 주도하기는 점차 어려워졌다.

전노협 창립대회가 열린 90년 1월 22일과 같은 날,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된다(이른바 “보수대연합”). 이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일거에 역전하고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투쟁을 견제할 수 있는 정국 주도권을 확보한다. 3당 합당은 국내 계급투쟁에 대한 대응만이 아니라, 90년대 초반 냉전의 종결과 같은 국제정세의 급변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여당인 민자당은 92년 대선에서 재집권한다. 한편 91년의 소련 붕괴는 노동운동 안에서 급진적 지식인, 학출 활동가가 대거 이탈하고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더욱 약화하는 계기가 된다. 80년대 후반 노동현장의 민주노조 건설과 함께 변혁적인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형성되면서 양자가 동반 발전하던 과정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그 결과, 이후 97년 대선과 민주노동당 건설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운동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기보다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한편,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과 노·경총 임금합의에 반발하는 투쟁에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이른바 ‘중간노조’들도 한국노총을 이탈하는 흐름이 가속화했다. ILO공대위(91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93년), 민주노총 준비위(94년)을 거쳐, “민주노조 진영”의 단결이 확대된다. 이 결과로 전노협은 물론 업종회의와 대기업노조(그룹별 협의회), 그 외 한국노총을 이탈한 공공부문 노조(한국통신노조 등 “공노대” 상당수) 등을 포함한 민주노총이 1995년에 건설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전노협의 확대라기보다는 그 조직·이념의 “청산”을 낳았다.

새로 출범한 민주노총은 전노협과 비교하여 이념적 급진성이나 투쟁의 전투성을 덜 중시하고 사회경제적 노동조합운동의 성격을 강화했다. 민주노총은 출범 직후 당시 김영삼 정권이 제안한 사회적 협의기구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참여한다.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OECD 가입, 금융시장 개방을 추진하던 김영삼 정부 입장에서는 노동시장, 노사관계의 제도개혁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집단적 노동법 개혁과 개별적 노동법 개악을 교환하는 구도를 그렸다. 그러나 정권 차원의 마지막 제도개혁 시도이기도 했던 이 논의는 노사정의 입장 차이로 결렬된다. 노사정 합의가 불발하자, 정권은 공익안보다 후퇴된 정부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악수를 둔다. 결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96~97년 총파업을 일으켰다.

총파업의 결과, 정부 여당이 강행한 날치기 법안은 여야 협의를 거쳐 재개정된다. 그러나 재개정된 법안 역시 공익안에 가까운 것으로 민주노총이 만족하기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기성 정당에 입법 협상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 탓이라 평가한 민주노총은, 이듬해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선에 출마시키고,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나아가는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 이 과정에 90년대 초중반을 거쳐 상당히 축소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활동가들이 참여했으나, 이때의 정치세력화는 과거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계승이라기보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단절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 운동이 민주노총 건설과 총파업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와중에, 한국경제와 노동시장의 상황은 이미 상당히 변화하고 있었다. 수출 재벌 대기업은 과잉투자를 이어가는 가운데 임금 수준도 꾸준히 상승했다.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생산직 노동자도 “마이카 마이홈”을 실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해외로 이전하거나 대기업의 다단계 하청 구조에 편입되고 임금수준도 상대적으로 제한됐다. 노동시장의 분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고성장이 지속하며 일자리의 이동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모순이 전면화하진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은 재벌 대기업의 과잉투자, 준비되지 않은 금융시장 개방, 단기 외채 의존 등 경제구조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갑자기 반전된다. 97~98년 IMF 구제금융 위기는 직전에 총파업을 통해 저지했던 노동법 개악을 모두 다시 불러왔다. 심지어 민주노총도 참여한 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를 통해 법이 개정됐다.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탄력근로제의 노동유연화 제도가 시행된다. 불과 1년 만의 상황 역전은 민주노총 역시 한국 경제구조의 문제점과 위기의 전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제학적 현실 이해와 비판이 부재한 상황에서 경제 위기의 결과(정리해고와 구조조정 등)에 대한 투쟁을 넘어 원인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은 1998년 현대자동차노조의 정리해고 저지 파업 등 단위노조의 투쟁을 지원하고 이를 전국적 투쟁 전선으로 확산하려 했지만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는 실패한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마저도 규모를 축소하기는 했지만 막지 못한다. 총파업(선언)과 노사정 교섭을 병행하던 민주노총은 결국 99년, 노사정위를 최종적으로 탈퇴하고 이후 사회적 대화기구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노동 유연화만이 아니라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포함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기업 민영화에 대응하는 철도, 발전, 가스 3개 노조의 연대파업이 2002년 2월에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당시 막 집행부가 민주화된 철도노조 등 기간산업 공기업노조가 민주노총에 합류했다.

금융위기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정리해고도 있었지만, 하청, 계약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가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와 투쟁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IMF 구제금융 체제를 벗어난 2001년 이후 경기회복 과정에서도 기업들은 고용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기 위해 정규직 고용은 억제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사용 방식을 취한다. 한편, 앞서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정규직 노동자 중 99년에는 무급휴직자가, 그 이듬해인 2000년에는 해고 노동자 전부가 복직한다. 그러나 정리해고와 함께 외주화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끝내 복직하지 못한다. 성별화된 구조조정과 이에 대한 노동운동의 소극적 대응이 문제로 부각된다. 경기가 호전되었지만 현대자동차는 정규직이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를 채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과 총연맹, 산별 차원의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이 확산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조직화와 투쟁이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증가한다. 산별이나 업종노조와 같은 초기업적인 조직화도 진행되기는 했지만, 비정규직 투쟁 역시 기업별 투쟁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 이랜드, 재능교육, 기륭전자, 광주시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과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투쟁은 기본적으로 기업별 사용자를 대상으로 했다. 한편, 건설노조나 화물연대, 지자체 비정규직처럼 초기업적인 조직화와 투쟁 양상을 보여준 사례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사업장을 넘어선 노동조건의 통일과 제도개선 투쟁으로의 발전 등, 기존 기업별노조의 조직형태를 그저 전환한 정규직 중심 산별노조와는 또 다른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산별노조도 미조직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이들의 투쟁을 초기업적 조직과 투쟁형태로 조직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 산업에 걸친 고용불안에 맞서 기업별노조를 넘어서 대응할 필요성과 국회 입법 등 정치적 대응의 필요성으로 산별노조 운동과 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한다. 이른바 “양날개론”은 민주노총의 여러 정파가 모두 대체로 공감하는 노선으로 자리를 잡는다. 우여곡절을 거쳐 2006년 금속노조가 대기업노조를 포함한 산별노조 전환을 완료하고 공공노조, 운수노조 등 여러 산업에서도 산별전환이 촉진된다. 그러나 이미 2004년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에 대한 내부 반발과 조직분열로, 산별노조 운동이 자리잡고 산별 노사관계와 산별 노동시장 형성으로 나아가는 게 만만치 않은 과제라는 점이 드러났다. 결국 노조 조직형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초반이 되면 산별노조 대부분은 산별교섭 구조를 구축하기 어렵다는 점을 실감한다. 노동시장 구조 측면에서도 대기업이 정규직 고용을 최소화하고 내부 노동시장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외주, 하청, 특수고용을 활용하는 방식이 고착된다. 대기업, 공공부문과 그 외 부문의 임금격차도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산별 노사관계 형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세계적으로 타격을 주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출 제조업을 통해 비교적 조기에 경기가 호전됐지만, 한계기업의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쌍용자동차(2009), 한진중공업(2011) 등에서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다. 그러나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로 조직 전환한 이후인데도 산업적 차원 혹은 전체 노동시장 차원의 대안을 요구하거나 실현하지는 못했으며, 단지 해당 기업별노조의 전투적 투쟁을 지원하거나 연대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곧 경기가 호전되자 수출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의 이윤을 기업별 노조 차원에서 배분받는 것이 유리한 선택이 되었다. 기업별노조 차원 노사관계의 지양은 더욱 어려워졌다.

산별노조 운동이 한계에 봉착하던 시기에, “양날개”의 다른 한 축이던 진보정당, 정치세력화도 삐걱대기 시작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NL활동가가 대거 진입한 민주노동당은, 2008년에 정파 간 갈등으로 분당된다. 이후 통합진보당으로 재통합이 이뤄졌지만, 2012년에 또다시 (진보)정의당과 분당한다. 한편 2008년 이명박 정권부터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집권기에 민주노총은 대정부 투쟁에 집중한다. 특히 2011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진보정당(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 등 “반보수 전선”이 형성된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은 분당했음에도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행보가 일치했다. 민주노총은 이를 적극적으로 추동했다. 당시 정부의 반노조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후 민주당과 연대관계는 더 심화한다.

201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대중국 수출 호조에 힘입어 경기가 호전된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98년 노동법 개정 이후 더 진행되지 못한, 노동시장 법제도의 개정을 시도한다. 민주노총은 총파업과 민중총궐기(2014), 성과연봉제 반대 공공부문 공동파업(2016)으로 대정부 투쟁을 전개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에 민주노총도 역량을 투여한다. 결국 조기 대선이 벌어지고 문재인이 당선된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국정과제에 민주노총이 요구하던 노동정책들이 상당히 반영된다.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이 추진되고 지난 정권 시기의 해고자도 대거 복직한다. 정부가 시급 1만원 조기달성을 약속한 가운데 최저임금도 급격하게 인상된다. 또한,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노사정 대화기구의 복원이 구체적으로 추진된다. 이에 노사정위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변경하고 구성과 운영을 바꾸는 노사정 협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새로운 노사정 기구 참가를 결국 반대한다. 대의원대회 당시 정부가 탄력근로제 확대를 추진하는 상황이었기에 투쟁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부각된 법안 탓이었다기보다 사회적 대화 참여 자체가 쟁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다시 추진하지만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 잠정합의안은 의결기구에서 부결되고, 위원장이 책임지고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 탄탄한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이런 합의를 만드는 것이 이후에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 역시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곧 한계에 봉착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불거진 최저임금 산입범위 논란에 이어, 최저임금 인상률 자체가 낮아져 결국 지난 박근혜 정부 동안의 인상률조차 하회한다. 그 외에 노동운동에는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산별 노사관계의 형성,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보장 등 노사관계 제도의 개혁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민주노총의 법제도 요구 중 가장 중요했던 노조법 2·3조 개정과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이른바 “전태일법”)은 민주당 집권기에 방치된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의미있는 변화는 일어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이라는 2022년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초반에는 화물연대나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 등 노동조합 투쟁에 대해 과거 보수정권과 달리 다소 온건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물연대의 2차 파업을 계기로 노조에 대한 대응이 강경하게 변화한다. 이후 건설노조 수사 등 노동조합 탄압도 진행한다. 정부는 핵심 정책 과제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와 같은 노동개혁을 제시했지만, 조직된 노동자와의 대화나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정부가 단독으로 주도하는 방식을 택했다. 노동시장 정책 말고 노사관계 분야에서는 정리된 정책이라 보기 어려운 “노사관계 법치”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이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구체적인 노동정책 방향의 수정을 요구한다기보다 민주당 등 야당이 주도하는 반윤석열 정권(또는 정권 퇴진) 운동에 몰두했다. 이런 상황은, 2024년 22대 총선에서 현 민주노총 집행부와 연계가 깊은 진보당만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해 국회 의석을 확보했을 뿐, 정의당 등 독자 진보정당은 의석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98년부터 시작된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 운동도 한 순환이 끝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현재를 어떻게 결산해볼 수 있을까. 민주노조 운동은 헌신적 투쟁과 많은 희생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기본권의 점진적 확대라는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과거 군사독재 세력의 정치적 독점과 재벌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 독점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노동자 자신의 권리 확보만이 아니라 국민경제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80년대 말 이후의 발전은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과 이를 통해 가능해진 경제구조의 개혁을 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모종린·배리 와인개스트, 2013). 이 과정과 결과에는 노동운동의 몫이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실패도 민주노조 운동의 결산서에 남아있다. 무엇보다 노동시장과 소득의 양극화, 노동계급의 분할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의 주력이었던 제조업 재벌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상당한 고임금을 실현한 반면, 다단계 하청 구조의 아래에 있는 중소영세 사업장이나 특수고용노동자와 이들의 격차가 커졌다.

이를 해결하려면 산별 노사관계 등 초기업적 교섭·투쟁, 사회적 협의를 통한 제도개선, 이를 의회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정치세력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만, 세 가지 측면 모두 큰 한계에 부딪힌 것이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도 노동운동 안에서 거의 합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한국 노동운동은 지난 10여 년 간, 즉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놓쳤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 직후에 진행된 IMF 구제금융위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IMF 구제금융 이후 2000년대에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대응 과정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전략조직화 및 투쟁과 같은 전략적 방향 설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2008년 이후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도 적절한 보완이나 방향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다. 더구나 2010년대에는 보수정권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민주당과 긴밀한 야권연대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결국 야권연대를 매개로 민주노총이 포퓰리즘 정치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이전 시기 정치적 민주화와 재벌 독점에 대한 투쟁을 통해 한국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던 노동운동의 성과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된다.
 
 

2. 균열된 노동시장이라는 결과

현재 노동시장 상황을 특징짓는 기업별 격차와 양극화는 경제 환경 변화에 자본이 대응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성공 혹은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이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특히 어느 지점에서 성공했고 어느 지점에서 실패했는지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겠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OECD 평균의 90%를 넘었다. 그러나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두 배 이상으로 벌어져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OECD, 2024). 대기업 임금수준은 OECD 평균을 넘고 있다. 엔화 약세를 고려하더라도 대기업의 임금수준은 한국이 일본을 이미 추월한 상황이다(경총, 2024). 이런 상태를 보면 대기업에서 노동자의 임금인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한국 임금체계의 연공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50대 이상에서는 그 성과가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투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듯, 원청 정규직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다. 대기업은 핵심 인력만 정규직 직접고용(내부 노동시장)으로 유지하고 광범위한 업무를 외주화, 하청 계열화해 활용했다(외부 노동시장). 이러한 이중 노동시장 구조와 고용체제의 모순을 잘 보여준 사례가 대우조선해양이다. 여기서 그 모순은 2010년대 조선 산업의 부침에 따라 심하게 표출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심각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잘 이루어지지 못 한다는 점이다(상당수 정규직 노동자들은 오히려 대우조선해양 파업에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인 태도도 보였다). 그러나 이는 정규직 노조가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한국 노동운동사에 다른 사례들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80년대 조선업에는 이미 ‘사외공’으로 불린 임시직 노동자가 많이 존재했는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87년 대투쟁 과정에서 사측이 급조한 어용노조의 퇴진, 임금인상, 병영적 인격 통제의 폐지 등과 더불어 사내하도급의 직영화를 요구조건으로 걸고 임시직 노동자와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90년대에 신경영전략의 확산, 민주노조의 퇴조와 어용노조의 타협 속에서 사내하청이 다시 확대되었고, 정규직은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방어했는데 반해 하청 노동자들은 성과를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원하청 분할과 격차는 87년 이후 한국 제조업에서 가장 큰 변화였던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나 윤석열 정부 공히 임금격차 해소의 방안으로 직무급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직무급 수용 여부를 떠나, 원하청의 임금과 고용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임금정책이나 산업정책, 노동시장 정책은 정부나 노조 모두 별로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도 정규직의 현재 조건을 방어하는 가운데, 비정규직을 정규직에 근접하게(상향평준화) 만들면 된다는 요구만 제시한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 정규직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이미 일본 등 선진국을 추월한 상황이므로 국민소득이 이들 국가보다 낮은 한국에서 그런 방식이 실제로 가능할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내용이 물론 투쟁을 위한 ‘요구안’일 수는 있겠으나 현실의 거시경제와 노동시장에서 작동 가능한 대안이기는 어렵다. 실현 가능한 대안보다는 선명한 구호를 앞세우는 사이, 임금 격차의 변동에 노동운동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500명 이상 대기업 노동자 평균임금은 1인당 국민소득 대비 1.91배로, 80년대 1.05에서 87년 대투쟁을 계기로 1.25, 97~9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1.35로 커진 후 2007~09년 경제위기를 거쳐 1.7배로 확대되었다. 물론 수출대기업을 중심으로 높은 수익성을 기록하고 있지만, 고임금의 상당 부분은 생산성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소속 기업과 고용형태에 따른 ‘신분의 지대’에 가깝다고 비판할 수 있다(윤소영 외, 2020).

2010년대 들어 기업 규모 간, 소득분위 간, 노동자 간 임금격차 추세를 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춤하던 격차 확대 추세는 2014~15년에 다시 심해지며 최고점을 기록하고 이후 횡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성재민 외, 2020). 이렇게 격차가 더는 벌어지지는 않는 현상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극소수 수출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업의 수익성이 제한되어 임금인상도 감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남종석, 2021), 최저임금 인상 추세로 인해 하위 분위에서는 임금액이 비슷하게 올랐다는 점도 원인으로 들 수 있다(성재민 외, 2020).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은 대체로 노동운동의 실천과 무관한 국제시장과 경제구조, 기업 대응의 변화에 따른 것에 가까워, 노동운동의 성과라고 제시하기 어렵다. 물론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에는 노동운동이 영향을 주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부터 평균임금 이상의 최저임금 인상 추세가 계속 있어왔다. 최저임금 인상은 임금격차를 축소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불황기에 저임금 부문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오히려 가계소득격차를 확대시켰다는 비판이 있으며, 소득수준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이동을 볼 때 사실상 노동자계급에 가까운 영세자영업자의 위기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형편이다.

물론, 한국 노동자운동이 시장경제에서 작동 가능한 대안보다는 최대치의 요구안을 제시하며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관행은, 과거 민주노조 운동의 출발 시점에서 군사독재와 억압적 노동체제, 탄압에 대응해야 했던 정세, 저임금 상황과 높은 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 속에서 급격한 임금인상을 쟁취해야 했던 과제에서 비롯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방식은 87년 이후 97년까지는 어느 정도 타당하게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8년 IMF 구제금융위기와 2000년대 노동체제의 변화 속에 기업별 전투적 경제투쟁을 통해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한다”라는 공식이 점차 통하지 않게 되었다. 총연맹·산별 차원의 제도개선 투쟁은 정부와 국회, 사회적 합의와 여론의 영향을 반영하기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96년 노개위 합의의 실패와 총파업, 98년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제 수용의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조정과 타협의 복잡한 과정을 겪기보다는 사회적 대화에서 철수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러나 기업별 투쟁이나 총연맹·산별 차원의 사회적 투쟁에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달라진 과제(균열된 노동시장과 격차)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돌아보아야 할 상황이다.
 
 

3. 민주노조 운동의 기존 전략 실패와 새로운 실험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총파업과 IMF 경제위기의 97년까지 10년은 산업, 노동시장의 조건이 매우 특수했던 정세였다. 지금의 노동운동의 형태와 노선은 당시의 조건을 반영하여 형성되었다. 그런데 98년 IMF 구제금융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확산 위기 이후, 90년대와는 매우 다른 조건이 형성된다. 기업별 전투적 경제투쟁은 90년대에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성공 공식이었을 수 있지만, 이후 정세 변화 속에서 모든 노동자에게 확장될 수 있는 방식이 아니게 됐다. 오히려 임금격차가 심화하는 200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변화 과정을 막을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 안에서 합의된 노선이라고 할 수 있던 산별노조-진보정당 노선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분명해졌으나, 이 이후에 노동운동에 어떤 합의된 전략적 노선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 지속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초심’, 90년대 형성된 추상적 운동원칙으로서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계급성을 다시 복원하면 된다는 주장만으로는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변화와 보수정권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정세에서도 기존의 기업별 대응과 다른 방식은 시도되지 못했다. 오히려 기업별 방어투쟁이 강해지고, 정치적으로는 야권연대를 통해 민주당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2008~12년 사이의 결정적인 시기에 노동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존 노선은 한계 속에서 해체되는 상태로 나아갔다고 평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 초기에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조합 운동은 정부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 인상과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주52시간제 정책이다. 이후 최저임금 인상폭 축소와 산입범위 개악, 정규직 전환의 지체와 왜곡, 탄력근로제 확대를 거치면서 정부의 노동정책과 갈등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를 정책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초반에는 여러 제도개혁이 추진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노동조합 운동은 여전히 노동시장의 변화를 추동하기보다는 방어적 대응을 중심으로 했다. 임금체계 개편의 경우 직무급제로의 변화를 반대하는 입장이 주류이나, 그렇다고 이들이 다른 초기업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도 기존 정규직의 지위를 건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계의 요구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외에는 민간부문 비정규직 감소에 실효성 있는 정책을 추진한 것은 없었다(이창근, 2021). 공공기관에서는 정규직 전환도 직접고용보다는 자회사로의 전환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일부 재벌 대기업은 법원 판결로 인해 사내하청 일부를 정규직화(신규채용)하거나, 상시 용역을 자회사로 전환(SK브로드밴드 등)했다. 이는 결국 2차 노동시장에 대한 대안이 부재한 가운데 1차 노동시장을 부분적으로 확대하는 식으로 타협한 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권현지, 2021) 그러나 1차 사내하청을 넘어 2차 사내하청 이상의 범위에서 불법파견 소송으로 인한 정규직 전환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현대자동차에서 ‘2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직접고용 대상이 아니라는 내용의 대법원 판결이 2023년 10월에 있었다.) 현대모비스의 하청 노동자들(금속노조 현대모비스 모듈·부품사지회)은 논란 속에서도 본사에 대한 불법파견 소송보다는 별도의 생산 전문 통합계열사로 고용을 전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2022년). 이는 기존 불법파견 소송과 정규직화 투쟁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앞으로 노란봉투법(노조법 2조 개정)으로 집약되는 원청의 사용자 책임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진전된다면, 직접고용 정규직으로의 전환 요구만이 아닌 대안들도 나타날 수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한계가 있었지만, 노동운동이 요구해온 정책을 수용한 지점도 많았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실패는 민주노총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추진 의지가 불충분했다고 평가할 뿐이다. 민주노총 자신의 요구에 대한 내용적 재검토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권 집권 이후에 민주노총은 구체적인 노동정책의 요구는 제쳐둔 채 “불평등 체제의 교체”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나 정권 퇴진 구호를 중점에 두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 시기 양대노총 조직은 크게 확대되고 노조 조직률이 상승해, 2021년 14.2%로 최고를 기록한다(이후 2022년에는 13.1%로 하락하기 시작한다). 양대노총 모두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나 공공부문 인력 증원 과정에서 조직을 확대했다. 한국노총은 공노총 등 외곽에 있던 노조를 포괄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민주노총의 경우 공공부문 외에도 의미있는 조직화 성과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건설, 서비스 등에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이 확대했다. 이 중에서 특히, 규모는 작았지만 특고-플랫폼 영역에서의 조직화 시도는 기존 기업별노조와는 다른 운동방식과 가능성도 보여주었다(건설, 화물, 라이더 등의 조직화 사례).

요약하자면 2020년대 중반의 노동자운동은 변화의 부분적인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운데에서도, △변화하는 정세에 대한 인식을 쇄신하지 않은(못한) 상황에서, △구래의 전략 노선(산별노조-진보정당 등)은 한계에 봉착했고, △기업별 경제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형성은 지체되고, △노동운동 주류는 사회·경제 정책에서 민주당과 다르지 않은 정책방향(포퓰리즘 정책과 소득주도성장론 등)을 수용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보수전선(촛불정신, 촛불연합)을 반복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이 노선을 혁신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정세적 계기는 이제까지 크게 두 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계기는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였다. 이때 산별노조, 진보정당, 비정규직 조직화, 사회공공성 등 (이후에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새로운 운동적 방향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실천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형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어려움에 부딪혔다.

두 번째 계기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였다. 기존의 운동노선을 계속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있던 때이다. 산별교섭 실현은 여전히 멀었고, 정치세력화는 2008년부터 잇따른 진보정당 분열과 동시에 야권연대 강화로 민주당에 종속되고 있었다. 연대임금론이나 사회운동노조와 같은 새로운 운동방향도 제기되었지만, 실천적으로 확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2010~12년경부터 민주노총은 야권연대와 ‘반보수전선’, 이를 통한 대정부 투쟁을 주도한다. 박근혜 정권 집권 이후에는 2014년 총파업과 2015년 민중총궐기를 주도한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운동은 2016~17년 촛불시위를 통한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자신의 승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돌이켜봤을 때 이는 ‘대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후 위기의 시작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시위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며 민주노총의 요구도 어느 정도 수용되나, 이 탓에 정작 민주노총은 기존 운동전략을 쇄신하지 못하고 정치, 경제, 노동시장, 노사관계의 변화된 조건에 적합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2008~12년 사이의 결정적인 시기에 노동자운동은 혁신하지 못했고, 기존 노선이 한계 속에서 해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20년대 이후 세 번째 계기도 가능할까? 객관적 조건으로 코로나19 위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한계,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의 권위주의와 대만 위협, 북한의 퇴행적 3대 세습 체제와 핵무장, 윤석열 정부의 집권이 2010년대와는 또 다른 정세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수 있다.

주체적 상황도 변화했다. 노동운동 내 노선논쟁과 토론이 실종됐다. 특히 전투적 경제투쟁에 대한 비판이 사라지거나 터부시되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조 조직화와 정당 조직화를 일치시키는 정파노조화 경향을 심하게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정책적으로는 촛불과 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포퓰리즘 정당화한 민주당과 점점 구별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객관적, 주체적 요인의 변화 탓에, 2020년대에는 2010년대와도 또 다른 정세가 펼쳐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뒤늦은 2010년대의 개혁을 이제라도 완수하기보다는, 2020년대에 적합한 개혁방향을 찾아야 한다.

기업별 임금극대화 노선은 상대화하고, 이제라도 교섭·투쟁의 모든 수단을 통해 임금격차 축소, 연대임금 실현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의 “양날개” 전략이 그 당시로서는 물론 정세인식의 한계는 있었지만 최선의 시도였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애초 구상대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노조와 진보정당 관계에서 과거의 배타적 지지 방식은 더 이상 어려운 상황이므로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현실적이다(유럽에서도 노조-정당의 관계는 약화되었다). NL 정파의 “당 중심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정파에 종속시키고 정파에 따라 분할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노동조합 운동의 단결을 오히려 해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노동조합 운동과 정당운동을 넘나드는 활동가가 (복수의) 진보정당과 연대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운동 경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일종의 새로운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가능성도 나타날 것이다.

산별노조와 산별교섭도 과거에 구상했던 유럽식 모델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해당 국가들에서도 이는 해체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다양한 방식을 열어놓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미 건설노조, 공공운수노조 산하조직의 실험(이창근 외, 2018)이 보여주듯 초기업 노동기준을 불안정 노동자층에서 가능한 한 형성해가고, 대산별노조는 여러 업종-부문의 이런 시도를 활성화하는 방향이 현실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별노조의 조직형태, 교섭형태도 훨씬 유연할 필요가 있다.
 
 

4. 노동운동의 혁신은 가능할까?

노동운동은 지난 과정을 평가하며 이번에는 정말 쇄신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30여 년에 걸쳐 형성된 노동운동의 노선과 정책의 변화는 가능할까. 몇 가지 쟁점을 생각해보자.

먼저 변화된 정세에 맞는 노동조합 운동노선의 쇄신이 가능할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의 변화만이 아니라 코로나19와 경제위기, 기후위기, 국제관계 변화 등 정세의 변화는 노동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특히 현재는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거시경제 상황과 산업구조, 정부 정책의 방향이 80~90년대 및 2000년대 초반과도 다른 상황이므로, 2020년대에 노조가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정세가 변화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책과 노선의 쇄신을 위한 출발점이다.

기업별 노사관계의 극복과 노동자 간 격차 축소, 즉 연대임금 정책이 IMF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의 과제다. 기업별 노사관계와 기업별 격차가 고착된 상황을 노동조합 운동이 당장 급격히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어렵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초기업적, 산별적 시도를 연대임금-연대고용 정책과 결합하면서 노동시장 불평등을 감축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노동운동이 전면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운동관행과 자원 배분의 방식을 변화하고자 노력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고임금-고용안정을 방어하는 조직(이른바 “귀족노조”)으로 표상된, 노동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바꾸어내야 한다. 노동운동이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감축해갈 때, 노동조합의 사회적 표상도 변화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기업 정규직에서 초기업 임금체계 형성이나 수출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별 고임금 구조를 당장 바꾸기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이를 극복해가는 방식으로, 중소영세 비정규직, 특고-플랫폼 등에서부터 먼저 초기업적 노동조건을 형성해가면서, 부문 간 비교 가능한 임금체계를 형성하고, 부문 간 단계적으로 격차를 축소해가는 방안을 제안해 왔다.

금속노조에서는 유사한 구상을 「금속노조 임금정책 전략적 목표와 단계적 계획」(2020)과 같이 실제 추진하기도 했다. 건설노조와 화물연대는 적정임금제·안전운임제와 같은 초기업적 임금기준을 형성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성과를 실현하기도 했다. 보건의료노조는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중소 병·의원 노동자를 포괄하기 위한 ‘모든 보건의료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교섭’을 요구한다. 이러한 시도와 성과를 여러 산업 부문으로 넓히고 끈질기게 추진하는 노동조합 운동 내 흐름을 확산할 필요가 있겠다.

부분적이지만 업종별 초기업 교섭의 발전,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의 산업정책 대응은 앞서의 흐름과 결합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지난 수년간 발전해온 특고-플랫폼 등 불안정노동 영역에서는 초기업적이고 사회적인 노사관계·노동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실험이 펼쳐져 왔다. (최근 사례로는 배달 라이더 플랫폼 노동자의 지역협약을 들 수 있겠다.) 일종의 의제별 사회적 협의기구라고 할 수 있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근 노동운동이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등 사각지대에 최저임금을 적용하기 위한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점은 의미 있다. 

이렇듯 사회적 대화도 사회적 투쟁과 병행하여 유연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정세의 문제로 봐야 한다. 물론 윤석열 정부 집권 시기에 경사노위를 통한 노사정 대화가 제대로 진행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산업별, 업종별, 지역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시도를 “타협적”이라고 터부시할 필요도 없다.

운동노선만이 아니라 더 심층에 있는 관행과 정서의 차원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80~90년대 형성된 익숙한 노동조합 운동의 경로의존성을 탈피하는 논의를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586세대와 87년 노동자 대투쟁 세대가 퇴직하면서 물리적으로 인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존 관행이 여전히 남아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점점 더 공감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먼저 전투적 경제주의를 바꿔야 한다. 역사적으로 저임금과 억압적 현장관리에 저항하면서 폭발한 민주노조 운동은 기업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투적 투쟁을 특징으로 했다. 이렇게 형성된 전투적 경제주의 정서는 기업별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투쟁이 곧 정치적으로도 정당하다고 간주한다(임금이 높든 낮든 모든 노동자는 자본에 착취당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안에서는 여전히 80~9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전투성이 변혁성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아예 노동조합 활동의 “원칙”으로 격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기업별 투쟁을 이렇게 이상화할 경우 초기업노조와 초기업적 교섭-투쟁의 노사관계로만 가능한 임금격차 축소, 연대임금 실현을 위한 고임금 부문의 조정은 수용하기 어렵게 된다. 80~90년대 전투적 경제주의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냈던 것은 한국경제의 고성장이라는 조건, 대-중소기업 일자리 이동이 지금보다는 활발했던 상황 덕분이었다는 정세적 조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러한 기업별 투쟁으로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경제적 이익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업의 담을 넘어 성과를 확장하기 어럽다. 이미 산별노조 운동을 통해 기업별 경제투쟁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로의 집중을 강화해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노동운동 안의 “범민주진보” 이데올로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를 거치며 야권연대가 일상화되면서 “범민주진보” 진영론이 더 강화됐다.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를 걸고 비정규직 입법, 한미FTA, 이라크전 파병 등 쟁점에서 민주당 정권과 대결했던 2000년대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물론 80년대 후반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형성된 민주노조 운동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다. “범민주진보” 진영은 80년대 후반 형성된 586세대를 공통분모로 하는데, 이와 같이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민주당이 여전히 인적 네트워크를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도 이러한 관념이 강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을 ‘2중대’로 전락시키는 야권연대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조국 사태’ 를 계기로 민주당이 자임하는 ‘진보’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2024년 22대 총선에서 진보당이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며 촉발된 민주노총 내의 논쟁은 이러한 상황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운동은 거시적인 상황(거시경제와 국제적 추세, 이들 조건의 장기적 변화)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단기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을 누적해왔다. 물론 변화가 시작된 90년대 혹은 IMF 위기 이후에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면 좋았겠지만, 노동운동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이런 전환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80~90년대 민주노조 운동이 형성됐던 조건인 노동시장, 노사관계의 변화,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는 분명해졌다. 90년대 말 IMF 구제금융위기와 2000년대 말 세계금융위기와 구조조정이라는 최소한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2020년대의 출발점부터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시작된 변화를 추가할 수 있겠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기존의 운동방향이 가진 한계에 대한 성찰 역시 활동가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경로의존성, 기존 노선을 고수하는 힘은 강고하다. 노동운동의 변화를 위해서는 ‘운동 내 운동’ 주체들의 세력화 역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본래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활동가들의 역할이었지만, 이 흐름은 이미 소련 붕괴를 거쳐 90년대 중반까지 붕괴하고 말았다(물론 NL운동도 진보당과 ‘민주노동자전국회의’라는, 정당과 노동조합 활동가조직을 가진 일종의 정치적 노동자운동 세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의 노선은 기존 노동시장, 노사관계 구조의 변화에 대체로 무관심하므로 논외로 하자). 80년대 말 급진적 노동자운동 정파들의 형성에서 시작된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30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보정당이라는 조직형태만 남기고 소멸한 상황인데, 이제는 그 진보정당마저 어려운 조건에 처했다.

정치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한 축이 부재한 상황에서 장기적 관점과 운동노선의 변화,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노조)을 사회운동노조로 변화시켜가는 과정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 운동의 활동가들이 만들어가는, 반드시 정당지향 운동이라는 의미만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복원과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정당에 기대지 않더라도 노동조합 자체가 정치·사회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좀 더 이념지향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가는 활동을 뜻한다.

역설적으로, 현재 드러나는 노동운동의 한계를 계기로 변화의 가능성이 얼마간 더 형성됐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난 30여 년의 노동운동을, 어제와는 다른 내일에 맞게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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