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대안연대,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 노선을 비판한다
논쟁 / 개혁-진보세력 경제정책 비판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개혁, 진보세력 내부에 한국경제에 대한 상반된 시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은 양측 모두 재벌개혁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 속내는 천지차이다. 전자가 ‘시장주의’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노동자의 기업소유’라는 전망에 천착한다. 이에 반해 대안연대는 재벌개혁론을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한 투항’으로 몰아 세운다. 이 단체에 따르면 민주노동당마저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철없는 자칭 보수세력들에겐 모두가 ‘빨갱이’로 보일 뿐이겠지만 그 내부의 편차는 이토록 크다. 그런데 이하의 글은 참여연대, 민주노동당, 대안연대의 견해들을 싸그리 ‘근본 모순과 관계없는’ ‘아름다운 방황’으로 비판하고 있다. 참여연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의 변종, 대안연대의 견해는 자본과 재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민주노동당의 전망은 자본주의의 경계선에서 오락가락하다 쓰러져버린 자기모순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각 단체의 경제노선을 이해한 방식과 입장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무관함을 미리 밝혀둔다. 이 글은 경제정책과 관련된 본지 기사들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편집자 주)
전현준 본지 편집위원
한국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자본주의를 둘러싼 일련의 대안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국경제를 망친 재벌의 불투명한 소유지배구조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기실 ‘자본주의 체제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 ‘한국사회가 과거 개발독재나 개량적 (신)자유주의와 다른 어떤 대안사회의 방향을 지향할 수 있는 ‘그 모델은 무엇인가' 등 근본적인 쟁점을 깔고 있다.
또한 현재의 대안 논쟁은 1980년대 진보진영의 한국사회성격 논쟁에서 제기된 ‘경제 위기를 한국 자본주의 변혁의 징후로 간주하고 변혁의 전략, 전술을 어떻게 짤 것인갗라는 문제의식과 달리, ‘과도기에 처한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갗라는 다분히 정책 대안적인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때문에 자본 측이 논쟁의 틈을 비집어 ‘재벌역할론’을 흔들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은 ‘대안 논쟁’과 관련된 각 진영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건설적 대안전략에 관한 논쟁의 촉매제를 제공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에 정당성 부여한 참여연대식 재벌개혁론”
먼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소액주주운동은 한국사회의 ‘타도되지 않은 권력’인 재벌권력을 감시, 견제해 나가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고, 구조개혁을 추진한 전문가 중심의 운동이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이 과거 고도성장을 이룩했던 체제 내부에서 형성되었으며 재벌체제가 결국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소수 특정인이 경제력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극복을 위한 개혁의 핵심은 재벌개혁이며, 한국 재벌들에게는 합리적인 기업지배구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들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중요한 목표이며 그런 차원에서 소액주주운동은 소액주주만의 권익보호 운동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미식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있지만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는 자본가들도 부정할 수 없는 운동수단으로서 가장 효율적인 운동 중 하나”라고 내세운다. 그러기에 소액주주운동은 소수주주의 권리옹호란 성격 이외에 재벌개혁, 나아가 경제개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액주주운동가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대표되는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자본의 국적구분은 불필요하며, 외국 투자자의 고배당에 의한 국부유출보다 한국 기업가치가 국제시장에서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기업은 주주의 것이고 이사회와 경영자는 기업투명성을 통해 주주이익의 극대화를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영미식 개혁을 사실상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결국 재벌을 해체하고 이를 통해 ‘사유재산권(주주권)의 신성함을 보장’하는 주주자본주의 확립을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노선은 신자유주의적, 보수적 경제이념이라고 분류해야 한다.
하지만 소액주주운동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 자본시장을 합리화하려는 해외 초국적 자본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요구와 신자유주의적 정부 정책에 ‘재벌개혁’이라는 대중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기업지배구조 개혁 뒤에 가려져 있는 내외자본과 정권의 의도를 대중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액주주운동이 자본의 이익실현에 종속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는데 기여할 뿐,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나 대안체계를 제시하지 못하며 단기실적과 노동배제적 새로운 기업지배구조 이데올로기로 한국사회의 구조를 더욱 왜곡시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자본과 재벌에 대한 대안연대의 무지”
반면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을 비판하며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성장한 재벌은 사유재산인 동시에 국민적 자산이므로 재벌이 경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국민경제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안연대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여 ‘대안적 세계화’를 주장한다는 이들은 ‘한국경제의 내적 모순이 아니라 금융자유화라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1997년 위기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IMF와 김대중,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제위기를 더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 한국의 구조개혁이 영미식 신자유주의에 따라 진행됐고, 외국자본 지배에 따른 주주이익 극대화가 결국 국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본의 국적성을 매우 중시하며 “(한국)재벌의 효용성을 일정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재벌체제라는 악은 분명 경제성장이라는 선을 산출하였다. 그렇다면 그 성장 시스템을 토대로 (해체하기보다는 그 긍정적 측면을 보존하면서) 그 위에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복지 자본주의를 만들어나가는 상상을 해 보는 것도 ‘도덕적 죄’일까?”
이런 입장을 가진 이들은 “주주뿐 아니라 종업원과 지역주민, 소비자, 협력업체, 나아가 사회전체의 이익을 존중”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s capitalism)를 추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우리 사회에 '사회적 자유주의'와 같은 '한국판 제3의 길'이 절실하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경제의 성장 동력을 되찾고 사회적 형평성을 높일 수 있도록 보수와 진보진영 사이, 대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개방의 필연적인 대세를 인정하면서도, 국민경제가 안정화될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조절장치를 마련하자는 주장이다.
결국 대안연대는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자본을 규제함으로서 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또 자본의 세계화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타협과 ‘줏대 있는’ 개혁을 통해 계급협조적 복지 자본주의라는 대안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얘기다. 자본민족주의, 일국주의,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가 착종된 대안연대의 신재벌개혁론은, 그들이 보기에 저 ‘사악한’ 시장숭배주의를 '안정적인' 발전국가론으로 돌리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할지 모르나 , 여전히 자본의 합리성을 극복하기에는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이러한 대안연대의 주장에 기왕의 여러 비판들이 있어 왔지만, 필자가 보기엔 특히 이들의 재벌관이 가장 큰 문제이다. 현재 한국의 4대재벌은 초국적 자본 그 자체이며 한국의 10대 재벌 역시 초국적 자본의 하위파트너란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외국투기자본만을 문제삼다보니 상대적으로 국내생산자본은 덜 문제적이거나 심지어 고쳐 쓸 수 있다는 불철저하고 모호한 생각, 국민국가의 자본가적 기능에 대한 인정, 자본의 세계화를 인정하는 위로부터의 발전개혁 론 등은 여전히 자본의 합리성 안에서 이들의 인식과 운동이 이뤄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들의 불타는 우국충정(?)에도 불구하고 애초 공언하던 ‘반신자유주의 선언’은 어느 새 ‘외국투기자본 반대’로 축소되더니, 다시 ‘외국투기자본 반대’는 ‘국내생산자본(재벌)활용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때문에 이들의 재벌활용론과 부르주아 민족경제학에 대한 안팎의 비판이 쏟아지자, 최근 대안연대가 내외투기자본을 감시하고 추적하기 위한 ‘투기자본감시센터’를 만드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어쩌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대안논쟁에 덩달아 춤추는 언론
다음으로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드러나는 우리 언론들의 때 아닌 ‘스웨덴 예찬’ 신드롬을 비판해 보자. 최근에 스웨덴 모델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계기는 지난해 7월 삼성 이 건희 회장이 에릭슨, 사브 등을 소유한 스웨덴 재벌그룹 발렌베리를 방문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대안연대의 이찬근 교수는 월간『말』에 재벌과 한국사회의 대타협을 주장하는 내용의 기고문을 게재했고 이후 중앙일보와 친재벌적 경제신문들을 중심으로 낯 뜨거운 재벌찬양과 ‘아주 인내심이 많은 노동계급이 만든 최선의 복지국갗인 스웨덴 모델의 전범을 따라 우리도 재벌체제를 인정하자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기이한 열풍의 뒤에는 시급히 대안을 마련해야한다는 초조감, 신자유주의적 광풍에 대한 일정한 무력감, 사민주의에 대한 상상적 판타지, 새것 콤플렉스에 의한 언론의 이슈 따라잡기적 속성 그리고 개혁적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때문에 한 편의 소극으로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은 재벌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노자간의 계급타협이 필요하다는 대안연대 일부 이론가들의 도발적 주장과 연대임금제 도입 주장이 한겨레신문과 자매지 이코노미21, 오마이뉴스 그리고 말지를 통해 자꾸 확대 재생산되었다.
「발렌베리는 삼성의 미래다?」(이코노미21, 201호)정도의 제목은 얌전한 편이고,「사회적 대타협: 삼성전자, 에릭슨에게 배워라」,「한국적 계급대타협을 모색하자」,「알고 보면 치 떨리는 외국계 투기자본의 기업약탈」(이상 월간 말지 6,7월호),‘노․사․정 대화 복원 ‘사회통합’ 길로‘, ‘부도회사 살린 ‘한마음’, ‘고임금 기업-노사 저임금층 돕기 나설 때‘(2004년 8월 <성장의 기본틀 바꾸자 >는 제하의 한겨레-참여연대 공동기획 기사물들)등 실로 엄청난 양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지적해 보자. 먼저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은 사민당정권과 좌파노총으로부터 기업 지배권을 정말 보장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은 대개 이중이사회 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발렌베리 가문의 후손들은, 소수 지분에도 불구하고 순환출자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세습적으로 경영권을 장악하고 기업을 지배하는 한국재벌들과 달리, 기업경영에는 개입하지 않고 내부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감독이사직을 맡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노자간 계급대타협과 연대임금제의 실행으로 과연 해결가능한가? 연대임금제는 알려진 것처럼 저임금 노동자의 처지개선과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위한 아름다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정책목표를 겨냥한 임금정책이었다.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의 측면도 있었지만 ‘경쟁력 있는 스웨덴’을 위한 임금억제적 수요관리의 성격이 본래부터 더 강했다. 또한 동일임금을 감당 못 하는 저수익 기업을 퇴출시켜, 고부가가치 산업에 자본과 노동력을 집중시키는 산업합리화정책의 역할도 수행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연대임금제는 자본보다 특히 고수익부문 노동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지탱되는 정책이다. 따라서 고수익부문 노동자들로부터 연대임금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까지의 임금 총상승분 중 절반 정도가 임단협 이후에 임금불만을 달래기 위한 임금보전책의 일종인 ‘임금유동’에 의해 달성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합의는 지켜질 수 없었고 1983년부터 사실상 계급타협은 끝이 났다. 그러므로 일부 언론의 사실왜곡과 무비판적 ‘받아쓰기’(dictation) 습관은 실로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동자의 기업소유를 주장하는 민노당의 경제정책
이제 마지막으로 4.15 총선을 통해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론을 재벌개혁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당 강령과 16대 대선, 17대 총선 공약자료집을 통해 본 민노당 경제정책론의 합리적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강령에 의하면, 민노당은 ‘민주적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민주적 경제체제’란 “소유의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다양한 소유와 시장적 조절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재벌체제란 과다차입, 과잉투자, 부실 확대에 의해 경제위기를 증폭시키는 기업지배구조“라고 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재벌총수의 소유 경영독점체제를 해소하는 등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독립전문의 민주적 참여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적 참여기업이란 “총수 일족의 지분을 … 강제로 유상 환수하여 재벌을 해체하고, 또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을 비롯해 다수 국민들이 소유에 참여”하는 기업이다. 즉 해당 기업의 노동자가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기업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강제적, 일시적 재벌해체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이 아직 미약한 지금의 현실에서는 추구하기 어려운 과제”라고 판단하며 그래서 “재벌해체가 달성될 때까지 순환출자 규제, 출자총액 제한 등 재벌규제는 계속되어야 하고 노동자의 소유참가와 경영참가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이상의 내용은 지난 8월 19일 열린 야4당의 최근 경제위기토론회에서 부유세 설치와 함께 한 치의 수정 없이 그대로 반복하여 주장되었다.
한편 기업지배구조와 관련 민주노동당은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펼치고 있다. “노동자 주주들이나 노동조합이 추천한 노동자 이사나 감사가 경영에 참여하여 정리해고와 기업의 도산을 예방하고 기업의 안정적인 존립과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노동자 소유참가의 방식으로서 기업 이윤의 일부를 출연하여 노동자소유기금을 설치하고 이 기금으로 기업주식을 사들여 경영을 견제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최대주주가 되는 노동자 소유확대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선거 공약자료집을 통해 ‘노동자소유기금의 설치와 포괄적 경영참가의 확대’에 대해 적대적 노사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함으로써 마찰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실질적인 민주적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로 재편하는 효과적인 해법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왜곡”
이런 민노당의 ‘민주적 경제체제’와 ‘민주적 참여기업’은 노동자들의 소유․경영 참여 강화라는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왔다. 먼저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은 이를 사회민주주의적 치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아무리 사회화와 사회적 조절을 우위에 둔다는 둔사를 거듭하더라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전제하는 한, 따라서 시장을 전제하는 한, 그 소유의 양도권을 부인할 수 없고, 시장의 경쟁은 소유를 집적․집중시키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사민주의적 치장에 불과하다.“
김성구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의 지배질서에 안주할 뿐이라고 혹평했다.“민노당의 우리사주 사회주의론(노동자 소유경영참여 민주적 참여기업)은 마르크스의 발전단계론과 이행론에 대한 납득할 수 없는 왜곡을 통해 ‘우리사주 사회주의’라는 그럴듯한 선전 구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진정한 사회화로 나아가는 길을 왜곡하며 현실자본주의의 개혁대안에서는 자본주의의 지배질서에 안주하고 있다.”
그런데 민노당의 민주적 소유참여기업론은 필자가 보기에 개별 기업 단위의 전체 노동자 혹은 노조를 소유와 참여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설사 개별 기업들을 소유참여기업론에 따라 변혁하더라도 기업과 기업 사이에 존재하는 노동-자본 간 경쟁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모순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또한 민노당의 경제정책론은 국가 혹은 금융자본과 민주적 소유참여기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혹은 노동자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어떻게 창출하지 등에 대해서도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진보정당의 대안적 전망으로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근본모순을 해결하려는 대안논쟁 필요
고용 없는 성장, 사회와 산업양극화, 외국자본의 국내시장 잠식과 고배당, 자본파업의 상황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발전적 내일를 위해 우리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도, 재벌체제도 넘어 서야한다. 또한 아무리 급해도 노동자의 이해를 소유와 참여라는 미명하에 이윤의 논리에 내맡길 수도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삼성은 발렌베리가 아니며 4800만 인구의 한국 사회는 850만의 스웨덴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두려워 환상으로 도피하고, 삶이 무서워 모순을 회피해선 안 될 것이다. 때문에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근본모순을 놔두고 다른 곳을 헤매는 ‘아름다운 방황’은 이쯤에서 끝을 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근본모순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대안논쟁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월간말 2004년 2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