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주변 4대국 또 한번 '한반도 힘 겨루기'
저자: 한홍석 (광운대 교수)
출처: 주간조선 2000.6.22 /1608호
지난 6월 13일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은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던 한반도문제를 한민족이 주도적 위치에서 해결하려고 한 첫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남북 정상회담은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 질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미ㆍ일ㆍ러·중 등 주변 4대 강국들은 모두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내심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과 역할에 미칠 영향에 대해 분주한 계산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번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배경과 주변 4대 강국들의 향후 동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향후 대북정책 방향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의 전략적 우선순위 변함없어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 후 북한은 지난 6년 동안 역사상 가장 심각한 식량난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정치ㆍ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조기붕괴론’의 예측과는 반대로 북한은 큰 흔들림 없이 어려움을 극복해 왔으며 지난해부터는 경제 회복의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런 만큼 지금 와서 북한이 경제난(경제난) 때문에 남한의 경제 지원을 받아내려고 남북 정상회담에 응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북한은 지금도 여전히 체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미국으로부터 온다고 판단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여러 가지 정치·경제적인 제재 조치가 해제되고 북ㆍ미 수교를 포함하여 정상적인 국가관계가 정립되지 않는 한 급진적인 개혁ㆍ개방은 북한 지도부가 보기에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래서 북한은 지금까지 줄곧 체제 안전 보장을 자신들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왔으며 이를 위해 핵과 미사일 카드를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북한이 지금까지 한국보다는 미국과의 협상에 주력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미국도 자국의 세계 전략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단독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 카드’ 전략에 말려든 미 행정부의 큰 실수는 2003년까지 경수로를 건설해 준다는 약속을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 써넣고 나서도 오랫동안 확실하게 대북 정책기조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심지어 애초부터 ‘제네바 합의’ 자체가 북한의 조기 붕괴를 염두에 둔 미국의 임시방편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김일성 사망 직후의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북한 조기 붕괴론’이 크게 유행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이 그동안 경수로 건설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체제가 그리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지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해 발표한 ‘페리 보고서’는 그동안 ‘북한 조기 붕괴론’의 환상 때문에 미국의 대북한 정책 기조가 우왕좌왕하던 데서 벗어나 어차피 북한과 장기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미 행정부의 현실적 인식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금창리 의혹’ 등을 제기하면서 북한의 ‘제네바 합의’ 준수 여부를 문제삼기도 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북한이 핵 개발을 재개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를 잡은 것은 하나도 없다.
미국이 당초 ‘제네바 합의’에 없었던 미사일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인다. 반대로 미국이 약속한 경수로 건설은 기한 내 준공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결국 미국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미국은 경수로 건설 일정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가로 북한과의 협상에서 새로운 보상 요구와 심지어 ‘제네바 합의’ 무효화 압력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올해 대통령 선거와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의 반발 때문에 미 행정부는 더 이상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미·북 협상을 추진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 미국이 미·북 회담에서 한 발을 빼면서 남북 회담을 적극 유도해 온 것은 바로 자신의 이러한 처지 때문이라고 보인다. 북한도 미·북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이를 우회적으로 타개할 수단의 일환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나온 것이지 결코 미·북관계 개선이라는 최우선 과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북한 경제 회생의 출구는 대일 수교
북한은 설령 체제 안전이 보장되어 외부 환경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사회간접자본시설의 부족과 그동안 지속되어 온 심각한 국내 경제위기의 영향 때문에 자체의 힘만으로는 본격적인 경제 회생 궤도에 오르기 어렵다. 한국을 포함하여 외국의 정부나 기업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북한과의 경제교류에서 단기간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상업적인 투자 분야는 별로 없는 반면, 적어도 수년간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장기적인 투자나 일방적인 경제 지원이 불가피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IMF사태’를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으로서는 설사 거액의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대폭적인 양보가 없는 한 대북 지원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지금도 남북간에 체제 대결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 많기로 소문난 북한 지도부가 절대 정치적인 양보를 하면서까지 남한의 대규모 경제 원조를 구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고난의 행군’을 강조해온 북한 지도부가 지금에 와서 경제 회생을 전적으로 남한의 대규모 지원에 의존하겠다고 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다.
한편 북한은 가까운 시일 내에 국제사회로부터의 장기 차관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설사 가능하다 해도 채무 상환 위험 때문에 그 규모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문을 통해 북·중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격상시키면서 대규모 경제 원조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중국의 경제 능력으로 보아 중국의 대외 전략에 유리하기만 하면 북한 경제를 정상적 발전의 궤도로 올려 세우도록 원조를 해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식 사회주의’를 고집하는 북한 지도부는 중국의 대외전략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중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북한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경제의 본격적인 회생을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금원은 일·북 수교시 일본이 지불해야 할 대북 배상금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의 배상금은 북한의 청구 요구가 전적으로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북한 지도부가 큰 정치적 부담 없이 대외 경제정책의 전환을 주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배상금이 북한 경제의 회생에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국 경제의 본격적인 ‘이륙’이 한ㆍ일 수교 이후에 시작됐고 당시 대일 청구권 자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전쟁배상금은 절대 적은 규모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쟁배상금은 북한이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이나 직접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최초의 물질적 담보 역할을 하면서 경제 회복의 결정적인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
■정상회담 통해 일·북 수교 가속화 속셈
북한은 일본이 지금까지 법적으로 유일하게 전쟁 상태를 종식하지 못한 나라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일·북 수교가 성사되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일본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조기 붕괴론’이 성행한 지난 90년대 후반에는 일본도 대북 수교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 경제가 회복 단계로 들어서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도 일본은 여전히 미국의 눈치만 보면서 미·북관계에 결정적인 진전이 없는 한 될수록 일·북 수교를 지연하는 책략을 쓰고 있다.
일본이 대북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주장하는 이른바 ‘실종자 해결’ 문제는 그 누가 보아도 국내 여론을 빌미로 일·북 수교를 지연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일본이 북한을 보고 ‘실종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북한더러 스스로 납치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인데 북한이 이를 승인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원래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이 없이도 미국과의 ‘벼랑 끝 협상’이 성공하고 그 뒤를 이어 일본과의 수교 문제도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ㆍ일과의 협상이 예상 외로 계속 지지부진하자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국제 이미지 개선을 강화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의 대북 수교 무드를 촉진시키려고 계획했다고 볼 수 있다.
■동북아 전략 판도에 새로운 변화
물론 김대중 정부의 지속적인 대북 포용 자세와 북한이 이미 가장 어려운 시기를 벗어났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자신감이 이번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복잡한 사정이 뒤얽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1994년 ‘제네바 합의’의 순조로운 실행을 보장하고 경수로 건설 지연에 대한 북한의 추가적 요구를 무마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반대로 북한은 정상회담이 미국 국내에서 미·북관계 개선의 새로운 정치적 압력이나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이상 일·북 수교문제에서 공은 일단 일본 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남북이 앞에 나서기를 바라는 만큼 일본으로서는 미·북관계 개선을 일·북 수교의 전제로 삼을 명분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남북간 화해 분위기는 앞으로 일본 언론과 일본 국민 정서를 일·북 수교 쪽으로 몰고 가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
남북 정상회담을 두 주일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에 중국이라는 정치적 ‘동맹자’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동안 한ㆍ중관계가 북ㆍ중관계보다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은 정치적으로 역시 북한과 중국이 특수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물론 지금의 북·중관계는 과거 모택동ㆍ김일성 시대의 혈맹관계와 크게 달라 기본적으로 전략상 서로 이용하고 협조하는 관계이기는 하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의 모호한 태도에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북한 카드’를 미국에 암시한다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장 가까운 전략적 우방인 한국에도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최근 ‘마늘 파동’ 등 한ㆍ중간 통상 마찰 문제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 한반도문제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왔던 러시아도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최근 몇년간 ‘강대한 러시아’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러시아는 경제적 원인 때문에 한국에 치우치던 전략을 수정하고 북한에 재접근을 시도하는 균형 전략으로 나가고 있다. 이는 북한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남북 정상회담이 비록 역사상 처음으로 한민족이 주도적으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는 회담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완전히 주변 4대국의 영향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남북 정상회담은 명분상 민족의 화해를 위한 회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여전히 체제간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고 있으며 화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서로의 힘과 지혜뿐만 아니라 주변 동맹국들의 관계 여하에 따라 회담 결과와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한은 어렵게 마련한 협상의 주도권을 이용하여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한민족에게 가장 유리한 동북아 국제 질서를 정립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현재 한국 내에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경제협력의 전망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고 해서 한국 기업들에 유리한 투자와 무역의 기회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북 경제교류는 동북아 국제 질서의 재편과 안정 속에서만 실질적으로 진전될 수 있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 게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약력
-- 중국 북경대 경제학부 졸업
-- 일본 경응의숙 경제학 박사
-- 중국 길림성 대외경제무역위 과장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홍석 광운대 교수 / hxhan@daisy.kwangwo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