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의 글은 제가 작년에 <현장에서 미래를>에 기고한 글입니다. 조금 오래된 글이지만, 등록합니다.
<노근리, '군사작전'으로서의 양민학살>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한반도위원회)
지난 9월 30일 오후 2시 AP통신은 자체 웹사이트에 [전쟁의 숨겨진 장(章): 한국전쟁에서의 피난민 살인(killing)에 대한 퇴역 미군병사의 증언]라는 제목의 특별 취재기사를 게재하였다. 이 기사의 공개는 이미 이틀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바로 당일 30일자 {뉴욕타임즈}가 [한국전쟁에서의 미군의 학살(massacre)에 대한 미군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1면 기사로 보도한 것을 비롯하여, 미국내의 CNN 등의 텔레비젼 뉴스와 주요 언론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는 미국 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다. 미국의 국무부 대변인 제임스 폴리, 국방부 대변인 케네스 베이컨, 육군 대변인 에드윈 베이거 등 미국 고위관리 등이 "뒷받침할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사건을 회피하기 위한 진술에 나섰다. 그렇지만 결국 9월 30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직접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미국정부의 입장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노근리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이번 AP통신의 기사가 처음이 아니다. 가장 멀게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측에서 발행하던 {조선인민보}의 1950년 8월 10일 및 19일자 기사들이 - 그 격양되고 과장된 문투를 논외로 한다면 - 최근 밝혀진 자료 및 증언의 내용과 근접하게 사건을 서술한 바 있다. 또한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94년 7월에는 월간 {말} 이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명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과 현장검증을 토대로 남한 지역 내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을 보도하였다.
한편 당시 사건으로 인해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씨는 과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1960년 10월 노근리 사건을 소상히 기록해 미국이 설치한 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바 있으며 (이때, 소청사무소의 법무대위는 회신문을 통해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소청사무소는 배상을 심의할 권한이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1994년에는 노근리 사건을 기록한 소설형식의 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학살에 참여한 미군이 증언한 노근리 사건
그러나 최근들어 노근리 사건이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보자유법]에 따라 비밀해제된 미국측의 문서들과 함께, 학살에 직접 참여한 '가해자' 미군병사의 증언이 큰 역할을 하였다. 다음의 내용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노근리학살을 증언한 12명의 미군병사 중의 하나인 에드워드 데일리(66세)가 {뉴스위크}와의 또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당시 19세의 상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전장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50년 7월 한국 땅을 밟기 전부터 이미 미군이 몹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단편적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점령군으로 일본에 주둔해 있다가 한국行 수송선을 탔을 때만 해도 우리는 낙관적인 확신에 차 있었다. 조지 커스터 장군의 명성으로 유명한 제7기갑연대 소속이었던 우리 부대는 60일 정도면 북한군을 패퇴시키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7월 21일 상륙한 우리는 전선에서 몇km 떨어지지 않은 황간으로 진주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 감돌던 고요한 적막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난 며칠 동안 떠들썩하던 19세 병사들의 호기와 농담은 간 데 없었다.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던 데다 훈련도 별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몇 시간 후면 적과 낯선 이국 문화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마치 19세기에 머물러 있던 것처럼 아주 이상해 보였다. 나같은 켄터키州 출신 소년에겐 한국의 냄새와 소음이 너무나 낯설었다. (…)
황간 부근의 기찻길에서 몇km 떨어진 곳에 진을 친 우리는 7월 26일 자정 직후 이동 명령을 받았다. 적에게 포위돼 철수 중인 제8기갑연대를 영동에서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로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수천 명의 피난민과 미군 병사·트럭·장비들이 뒤엉켜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수많은 한국인에게 둘러싸인 우리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전통 농부 복장으로 위장한 북한 정규군이 민간인들 속에 끼여 있으며 그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도로와 논 할 것 없이 사방에 늘어선 피난민 대열 속에서 적군을 구분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북한군 탱크 두 대가 가까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포가 엄습했다. 탱크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미군 전투기들이 길가의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사방에서 산발적인 소총 사격 소리도 들렸다. 인근 노근리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피난민 대열은 미군 전투기의 공습과 북한군으로부터 숨을 곳을 찾아 달리기 시작하면서 수라장으로 변했다. 약 2백 명의 피난민이 콘크리트 철교 아래로 모여들었다. 대다수가 부녀자와 어린이였다. 우리도 그 부근으로 후퇴했다.
곧 민간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적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교의 양쪽 끝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나는 30구경 수냉식 브라우닝 기관총을 철교 아래 터널의 서쪽 끝에서 약 90m 떨어진 곳에 설치했다. 또 한 대의 기관총은 터널의 동쪽 끝에 배치됐다. 땅거미가 지기 직전 산발적인 적군의 소총 공격이 있은 뒤 전령이 다리 밑에 있는 사람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나는 그에게 “도대체 누구 명령이냐”고 소리쳤다. 그는 제7기갑연대 제2대대 선임참모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관총을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 소리가 나자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렸다. 나는 그곳에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적군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떠올렸다. 군대에서 사살 명령이 떨어지면 명령대로 할 뿐 불복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산개해 엎드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아래쪽으로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사격 시간은 약 30분 정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됐다. 요란한 총소리 속에서도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죽어가는 그들의 목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 퍼졌다. 정말 끔찍했다. 우리중 일부는 상황을 살피려고 터널 쪽으로 갔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조용한 밤이면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하느님께 죄를 고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날의 악몽과 기억은 결코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부대 출신 중 일부는 그 후 오랫동안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부녀자와 아기들을 죽인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될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점령군'의 입장에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어린 병사가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낯선 땅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서 직면한 전쟁에 대한 공포, 학살의 '무기'가 되었던 한 인간의 고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지난 50년 전에 벌어졌던 노근리 사건의 추악함과 비극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었다.주1)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한편, AP통신을 통해 노근리 사건에 대한 미군병사의 증언이 세계로 타전된 이후,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전후로 한 또다른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한국측 피해자들과 미국병사들의 증언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에컨대, `노근리 학살'을 증언한 미국 병사들은 그 사건이 벌어졌던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노근리 인근에서 미군이 피란민으로 가장한 북한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다음날 철길을 따라 피란중이던 한국 양민 수백명을 발견, 박격포와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고 증언하였다.`
특히, 미군이 1950년 8월 낙동강 최후방어선 구축 시기를 전후해서 이 지역 주민에 대해 집중적인 인명피해를 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증거들이 포착되고 있다.주2) 일례로 1950년 8월 3일에는 북한군 3개사단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후퇴하던 1기갑사단장 호바트 개이 소장과 장교들이 북한군을 낙동강 이북에서 저지할 목적으로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왜관교 및 경북 고령군의 덕승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때 다리 위에 있던 수백명의 피란민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사천시 조장리, 마산시 곡안리, 함안군 장지리, 의령군 정동리 등지에서 미국 폭격기의 기총소사 또는 보병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수많은 양민들이 목숨을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지금까지는 전혀 무시되어 왔지만, 북한측은 1950년 10월17일 미군이 점령한 황해남도 신천 지역에서 50여일 동안에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의 주민 학살이 있었다는 자료를 제시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3천여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 평양에서 1만5000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9072명 등의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군사작전'으로서의 학살, 그리고 조직된 은폐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근리 사건이나 지금까지 보고된 양민학살들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 혹은 전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의 차원이 아니라, '군사작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노근리 사건을 취재한 AP통신 한국지부의 기자는, "처음에는 그저 현장에 있었던 미군 사병들이 실수로 저지른 일인 줄 알았으나, 미군 사단의 사살명령서가 발견되자 본사에서도 큰 기사로 판단하고 총력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비밀해제된 문서들은 노근리에서의 학살이 군사작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노근리 양민학살 당시 현장에 배치되어 있던 미 육군 제 1기갑사단의 복무규정은 피난민 포함해 방어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장병들이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있게 대처하라."] 그리고 1기갑사단의 오른쪽에 이웃한 25보병사단에서 한 장군은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반도에 투입된 모든 부대를 관할하고 있는 8군 본부는 1950년 7월 26일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라는 명령을 내렸다.주3)
또한, 비밀해제된 미공군 자료들에 따르면 당시 양민들에 대해 기총소사를 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백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런 명령은 그들 속에 북한 인민군들이 위장해 숨어있다는 이유로 내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전투기들이 민간인들을 종종 '고의로' 공격했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준다.
한편, 이와 같이 미국측에 의해 주도된 양민학살은 지금까지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왔다. 이에 대한 단편적인 예는 노근리 학살사건과 관련된 기존의 문서에서 발견된다. 육군사관학교가 발간한 {한국전쟁사}의 미국 1기병사단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7월 26일 여명 북괴 제9연대는 수백명의 선량한 피란민을 횡대로 벌려세우고 전차와 총검으로 위협하여 지뢰지대로 내몰아 지뢰를 폭파시키면서 접근하는 사상 유례없는 잔인무도한 작전을 전개하여 왔으나 미 5기병연대는 7월 28일까지 완강히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술은 최근 밝혀진 진실에 비추어 볼 때, 실상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노근리 학살을 은폐하고, 오히려 북한측에 전가하려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또한 10월 8일 미국 CBS TV는 미국 육군이 노근리외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에 참여한 미군병사의 증언을 은폐해왔다고 보도하였다. 이 방송은 미국 육군이 51년 북한 포로가 됐다 풀려난 레스터 토드 이병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그가 "킬러 작전이 시작됐으며, 우리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고 여자 어린이 할 것없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모두 죽였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것은 모두 죽였다"는 발언을 청취했으나, 미국 육군은 토드 일병의 증언을 극비로 분류해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게 했으며, 토드 일병이 이런 주장을 다른 곳에서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토드 이병은 미국 육군이 오래전에 킬러작전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며, CBS와의 회견에서도 킬러작전의 내용과 그 시기 및 장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 그 윤곽이 밝혀진 노근리 사건과 여타의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은 단순한 실수나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미국이 당시 한국전쟁에서 수행했던 군사작전이라는 차원에서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펼쳤던 '군사작전'의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미국의 한반도와 한국민에 대한 '정치적' 태도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중대한 질문을 낳는다.
한국전쟁 정전 50년, 거대한 역사적 은폐의 시간
이번 노근리 학살사건의 처리 전망을 둘러싸고, 종종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밀라이' 양민 학살사건' 및 그 처리 결과가 비교되고 있다.주4) 현재 노근리 사건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조사의 '필요성'을 인정한 수준이며, 한국과 미국 양측이 모두 참가하는 '공동조사단' 구성이 좌절되면서 미국측이 보유하고 있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자료나 관련자들에 대한 증언에 대한 한국 측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조사 작업이나 배상 문제가 밀라이 사건과는 달리 순탄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미국 측의 태도는 한국정부에 의해 보강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AP통신의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 한국 정부의 첫 번째 반응 역시 "정확한 진상파악을 통한 사실관계의 파악"이었다. (그러나 보도는 정부 관계자들이 이로 인해 '전통적인 한미 우호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을까 우려하였다는 점을 덧붙였다.) 김대중 대통령도 10월 19일 {워싱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먼저 사실관계를 규명, 진실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한국민과 정부의 입장"이라면서, "미 정부의 신속한 진상 규명 자세를 환영한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한국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의미 및 현재 한·미 양국간 협력과 동맹관계의 중요성을 혼동해선 안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한국정부와 대통령은 과거의 한때 '불행했던' 사건보다는 현재의 한미 (군사)동맹 관계에 몹시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주5) 이처럼 한국정부 조차 노근리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사태를 조용히 수습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노근리 사건 및 이와 유사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며, 노근리 사건에 국한되어 '적절한' 수준의 사태 수습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업 조차, 단지 과거 '불행한' 사건의 피해자 개인들과 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 및 한국 정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면,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번 사건과 같은 계기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한국사회에서 봉쇄된 쟁점으로 묻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주6) 그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펼쳤던 '군사작전'의 논리와 그것의 기반이 되는 미국의 한반도와 한국민에 대한 '정치적' 태도에 대한 질문은 이미 배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과 한미 군사동맹 관계를 자연사(自然史)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역사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스 커밍스를 비롯한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역사 해석들이 이미 밝혀낸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미국이 구상한 냉전 질서의 핵심적 개념이 되는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봉쇄'(containment)와 '실지회복'(rollback)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시험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 전략 차원에서 한미 군사동맹 관계 (그리고 미일 군사동맹 관계)를 지속적으로 확대·강화하면서 냉전 질서를 완성해왔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은 한국인들의 정치적 의사와는 별도로, 미국이 2차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냉전을 '생산'한다는 정치적 구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동아시아에서의 온전한 의미에서의 냉전 질서의 해체와 평화의 구축을 희망하는 이들이 그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 한미 군사동맹관계 (그리고 미일 군사동맹관계)의 지양과 해소를 요체로 삼고 있다면, 그것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도 당연히 동반되어야 마땅하다.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온 2000년은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이자, 한국전쟁이 개시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새로운 세기로 맞이하기 위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상과 이념에 대한 모색은 오늘날의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처세술'이 아니라, 오리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제한없는 토론으로부터 형성될 수 있을 것이이라 생각한다. <끝>
주1) 재미 사학자 방선주(66)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근리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 7월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빨치산 문건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 관련 자료만 미국에서 100만건 이상을 발굴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미군이 대전에서 패배하기 직전인 7월 2일에만 해도 인민군이 현대적인 전투경험이 없기 때문에 쉽게 이길 것이 라고 장담한 미군측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인민군은 중공군이 만주지역에서 국민당을 몰아낼 때 사용한 전법인 `사방에서 밀려들기식' 전술을 구사해 미 25사단 딘 소장이 이끌던 미군 주력부대를 괴멸시켰고, 이 패배로 미군 3천명이 실종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전 전투 패배 이후 미군의 인민군에 대한 평가는 “제1의 군대”로 바뀌었고, '노근리 사건'이 발생하게 된 시점은 미군이 인민군에 대한 공포감이 매우 높은 수준에 달한 때였다는 것이다.
주2) 1950년 8월 초 한·미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하여 최종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1개월 이상 대치선을 펼치게 된다. 이 동안 일본 큐우슈우에서는 15분에 1대 꼴로 미군 비행기가 이륙하여 작전을 펼쳤고, 한반도의 주요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교량 파괴, 평향 병기고, 원산 석유정제공장, 흥남 화학공업지대 등에 대한 공중 폭격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주3) 그런데, 이와 같이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발포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법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명령을 미 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 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재가했는지 여부가 쟁점으로 부각된다.
주4) 밀라이 사건이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3월 16일 한 미군 부대가 베트남 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린 후, 4시간에 걸쳐 기관총·수류탄 등을 통해 양민 504명을 학살했던 사건을 말한다. 미군은 사건 직후 진상을 철저히 은폐했으나, 몇달 뒤 학살에 참여했던 중대원들과 맥주를 마시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얘기를 접한 어느 미군 병사의 조사작업과, 베트남 종군기자였던 {뉴욕타임스} 세이무어 허시 기자의 보도가 맞물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결국 학살을 은폐에 개입했다고 기소된 14명 중 단 1명만이 재판을 받았고 무죄방면 되었으며, 학살과 관련하여서는 윌리엄 켈리 중위 단 한사람만이 기소되어 22명의 양민을 `개인적으로'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받으나 닉슨 대통령의 개인적인 지시에 따라 3일만에 석방되었다.
주5) 한편, 현장 조사에 나선 한국측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다음의 글을 주목해보자: "지난 5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이 학살의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당연한 방문은 진상규명과 배상을 향한 첫걸음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 몇몇 의원들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한 의원은 `이거 별 것 아니잖아, 우리 고향 오산에서는 2000명이 미군에 죽었어'라고 말하고, 다른 한 의원은 주민대책위원장이 `절대 오인사격이 아니다'고 하자 `에이 그럴 리 없어, 가자'며 아예 의원들을 끌고 가려 했다는 것이다." [하늘엔 평화, 그러나 땅에는], 홍성태, {한겨레}, 1999.10.8
주6) 한편, 노근리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 및 유가족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병사와의 '화해의 만남'이 추진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앞서 인터뷰를 인용했던) 에드워드 데일리를 비롯한 1기갑사단 소속으로 참여했던 6명의 미군 병사와 정은용씨(노근리 학살사건 진상규명대책위원장) 등 다섯명의 피해자 가족이 11월 8일 클리브랜드에서 열리는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50주년 행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참가를 수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