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8일~20일까지 제 5회 인권활동가 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평화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통일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워크샵이었고, 이자리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과 관련한 평화의 권리와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투쟁과 평화의 권리가 발제되었습니다.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평택투쟁이 시사했던 폭력/비폭력 논쟁의 기만성과 무능함을 제기하며 평화를 '전유하고자' 하는 민중의 권리와 그 수단에 있어서 민중 스스로의 통제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러한 논점은 거의 논의되지 못하였으나, 향후, 인권운동 진영과 지속적으로 토론해가야 할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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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과 평화에 대한 권리

이소형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투쟁의 의미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으로써, 주한미군의 동아시아 신속 기동군 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 중 하나이다.
2004년 겨울,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정 개정안(LPP)가 국회를 통과하여, 강제적인 행정집행만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존권(농사, 거주권의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미국의 군사패권과 전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이 결합되었다.(평화적 생존권) 주한미군의 신속 기동군 으로의 재배치의 문제,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으로 드러났고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대중적인 요구로 확장될 수 있었다. 주민들이 농지와 대추 초등학교를 점유한 상태에서 행정대집행에 대한 법적인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며 주한미군의 재편에 대한 대중적 거부를 표명하는 것으로 투쟁에 있어 얼마간 유리한 입지에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3, 4월 이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강제집행이 강행되었고 5월 4일 이후, 대추 초등학교와 농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국민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자행하며 전쟁기지 건설을 강행하려는 미국과 한국의 지배세력과 이를 반대하며 농민의 평화적 생존권을 제기하는 반전평화운동 간의 대립은 보다 극명해졌다.
평택미군기지 사업은 단순히 한국정부의 졸속적인 군사안보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과 이에 따른 한-미군사동맹의 현대화의 핵심 내용으로서 미국과 지배세력의 사활적인 과제로서 가차없이 추진되었다. 따라서 주민과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행정대집행은 무리하게 강행될 수 밖에 없었으며, 국가의 물리적 힘으로 이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진압해야 했다.
이러한 가시적인 국가의 폭력은 결국 미국의 새로운 군사재편전략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거부’라는 역사적인 투쟁의 기록을 만들어 냈으며, 이 투쟁을 통해 전쟁을 책동하는 한-미 동맹의 본질이 만천하에 폭로될 수 있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예비하는 미국의 전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투쟁과 이에 연대하는 운동은 ‘평화’라는 보편적인 상징을 획득할 수 있었고, 평화운동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확장 하였다. 국민의 동의없이 추진되는 한-미동맹의 전략들과 주민들의 평화적 권리들을 구체적으로 훼손하는 문제는 평화운동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 평화를 향한 새로운 사회운동을 열어갈 수 있었다.


평화를 향한 대중들의 운동들

* 팽성 주민들의 투쟁
대추리 150가구, 도두리 40가구가 주축이 되어 2003년 팽성 지역 차원에서 넓은 범위로 주민대책위가 결성되었다. 900일에 가까운 주민 촛불집회가 진행되고 있으며, 전국 트렉터 순례, 농성, 항의방문, 집회 등 평택범대위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주민들은 언제나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미군기지반대운동 중 가장 많은 주민들이 그 어떤 투쟁보다 더욱 강력한 단결로 결속됨.

* 평택지킴이 활동
평택투쟁의 새로운 주체로서 주민들과 함께 현지에서 생활하며 주민들의 투쟁의 독려하고 조직하는 역할. 대부분 기존의 운동단체 활동가들이 아닌 평화주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들로 구성됨. 2005년 2월 평화바람의 거주를 시작으로 30여명의 상주인원이 주거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음. 새로운 방식의 평화운동의 방식.

* 불복종 운동
정부의 ‘불법/합법’의 규정을 인정하지 않는 일상적인 실천으로 농시 짓기. 평화촌 건설
평화캠프, 등 현지에서 ‘불법적 행위’로 규정된 다양한 실천들을 조직함.

* 대중 집회
4차례의 평화대행진과 매달 범국민대회를 통해 평택투쟁을 전국적인 집중을 꾀함.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위력을 드러내고자 함. 노동자, 농민, 학생 등의 기존의 민중운동 주요 대중조직들의 집중적인 참여와 이를 넘어서는 다양한 각계각층 시민들이 조직됨.


평화운동이 넘어서지 못했던 경계선.

: 2006년 초,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는 이 싸움의 보편적인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의 땅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요구를 제기함으로써 행정대집행을 저지하고 주민의 생존권과 전쟁기지 건설의 대립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 투쟁의 보편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3,4월 농토의 용수로 파괴가 강행하고, 마침내 5월 4일 투쟁의 상징적 거점인 대추 초등학교를 붕괴시키며, 농지에 철조망을 세우고 군부대를 주둔시킨다.

: 5월 5일 즉각적으로 개최된 범국민대회에서 대중들은 자발적인 결의와 합의를 거쳐 철조망을 넘어서 거리낌 없이 농토로 진입하는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는 평택 범대위 지도부의 통제와 지침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대중들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국가가 그어놓은 저지선을 돌파한 것이다.

: 정부는 이에 즉각적으로 ‘대추리 사태’를 불법, 폭력시위로 매도하며 불법/합법의 경계선으로서 철조망과 군사보호시설을 규정하였다. 5월 4일에만 524명 연행, 37명 구속영장 청구되었고 5월 5일 100명이 연행, 23명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이때부터 정부는 체계적인 탄압을 통해 투쟁을 진압하려 하였다. 첫째, 주민들의 생존권을 경제적 보상에 대한 요구로 축소시켰고, 범대위 등 반전평화운동을 철저한 ‘외부세력’으로 규정하여 불법폭력 집단으로 매도하였다. 두 번째로 농토와 마을 전체를 ‘군사보호구역’으로 규정하여 농사와 관련한 모든 행위, 마을 진입 자체를 불법 행위로 규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사안과 관련한 모든 대중 집회를 불법집회로 정의내리고 불허를 통보하였으며, 집회 참가 및 일체의 시위를 불법행위로 천명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대중들의 결집을 집요하게 가로막았다.

: 한편 운동진영은 5월 5일 이후, 정부의 광폭하고 체계적인 탄압에 맞서 투쟁을 완강하게 이어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추 초등학교와 농토를 빼앗기면서 그 이전의 다소 유리했던 투쟁의 조건과는 객관적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우리는 5월 4일 군사 작전까지 동원되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폭력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고 준비하지 못했고, 단 하루 만에 뒤바뀌어 버린 투쟁의 조건에 대한 적합한 대응은 빠르게 계획되지 못하였다. 정부의 체계적인 탄압이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운동진영은 ‘불법과 폭력 / 합법과 평화적 해결’ 이라는 이분법에 갇히게 되었으며 정부가 그어놓은 합법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공포가 조성되었다. 5월 14일 범국민대회는 전국에서 모인 8천여 명의 광범위한 대중들의 공분이 모아져 조직되었지만, 대추리에 진입하지 못한 채 철조망의 경계선 안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이어 6월 18일 범국민대회는 각고의 노력과 투쟁으로 농토로 진입하고 철조망 앞까지 진입할 수 있었고, 5월 5일에 이어 한걸음을 전진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대중 집회의 위력적인 힘은 그 이후 완강하게 이어지지 못하였고 주민들의 고립감은 더욱 심해졌으며, 운동진영의 패배감과 무기력은 가중되었다. 800여명이 연행되고 구속, 수배되는 사상최대의 공안탄압의 과정에서 대중들의 분노는 질식되었고, 불법/합법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다양한 평화적 실천들이 기획되고 시도되었으나 소수의 선도적인 이슈파이팅의 제한적인 파장 이상으로 확장되지 못하게 되었다. (대중조직들의 위축, 운동진영의 수세적인 전술 판단)

: 이러한 투쟁의 구도 속에서 평택 투쟁에 대한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일련의 흐름들이 존재하였다. 5월 5일의 철조망 진입투쟁이후, 즉각적으로 조성된 공안정국 속에서 5월 8일 범대위와 시민사회단체들은 “평택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비상시국회의”를 진행하였다. 5월 5일 농토에서 진행된 대중들의 저항의 형태와 방식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운동진영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였고, 일부 시민운동 단체들과 각계인사들은 사태의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흐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은 5월 4일, 5일의 상황을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양대 진영이 불필요하고 비정상적으로 충돌한 문제”, 따라서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수습되어야 하는 문제”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정부의 ‘불법 폭력 Vs 평화적 해결’ 이라는 구도를 사후적으로 승인해주는 효과 이상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상황의 본질적 성격은 미국과 지배세력의 사활적인 군사안보전략이 가차 없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짓밟혀버린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평화운동의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어 “민중의 평화 Vs 전쟁기지”의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합법=평화”라는 주장은 이 운동의 정치적 의미를 탈각시키고 정부가 의도적으로 규정한 불법/합법의 경계 속에 평화운동의 보편적 가치를 가두는 ‘反평화적’ 입장에 불과하다.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정부의 체계적인 ‘불법 폭력 세력’의 규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운동의 보편적 상징을 획득하며 발전해 왔는가?
가장 치열한 운동이 전개되었던 2006년 한 해 동안 평화운동 진영에서는 투쟁 형태와 방식에 있어서 폭력/비폭력, 합법/비합법 논쟁이 진행되었다. 지배세력의 물리적 힘이 구체적으로 투영되어 평화를 향한 대중들의 운동이 폭력과 불법으로 규정되고, 결국 평화운동이 ‘평화’를 훼손하는 갈등으로 취급되어버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넘어서지 못한 경계선, 즉 이 진정한 폭력은 농토에 처진 철조망에 대한 대중적인 공포와 무기력감이었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위력적인 싸움이 전개된다 해도 전쟁기지를 세우려는 지배세력의 물리적 힘을 쉽게 꺽을 수 없을 것이겠지만, 운동진영 스스로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평화’인지에 대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평화운동은 더 많은 대중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에 대한 권리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평화에 대한 대중의 권리는 주어진 정세 속에서 무엇이 평화를 훼손하는 폭력인가를 정확하게 규명해내고, 이를 위해 대중들이 스스로 폭력에 대한 적합한 저항의 수단과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즉 평화에 대한 대중의 권리란 다음과 같은 과정을 옹호하는 것이다.
첫째, 국가 권력의 체계적인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가해지는 대중들의 공포가 현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둘째, 무엇이 폭력이며 反평화인가를 규정해내고, 대중들 공동의 집단적인 토론과 성찰, 결의를 통해 합법/불법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행하는 것.
셋째, 그럼으로써, 대중에게 가해지는 혹은 대중들 스스로 행하는 ‘폭력’을 대중들 스스로가 통제하고 극복하는 행위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