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노운협 정세동향 7월 3일호에서 퍼온 글입니다. 현 정국을 압축적이며 핵심적으로 다룬 것으로 평가 됩니다.김대중 정권, 독재로 내닫는가!
이 성 경
최근 남북정상회담이니 이산가족 상봉이니 하며 떠들썩한 잔치분위기를 뒤로 한 채, 우리 노동자·민중에게 있어 역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게 아연실색할 상황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마치 지난날 광주사태, 연세대 사태와 흡사한 TV 화면을 보며,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 명백하고, 또렷했다.
백골단이 욕설을 퍼부으며 쇠파이프와 곤봉을 마구 휘두르고 있고, 노동자들이 줄줄이 팔을 뒤로 꺾인 채 쪼그려 앉아 땅에 머리를 박힌 상태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 서너 명의 경찰에 에워싸인 채 발길질에 나뒹굴어지는 노동자의 모습들. 이는 군사독재 시절에나 자주 볼 수 있었던 처참한 장면들이 아닌가.
지난 6월 30일 신새벽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롯데호텔 진압작전은 아침햇살이 훤히 비추는 오전 8시까지 무려 4시간 동안 살인적 공포와 분노의 전율에 치를 떨게 만든 살인폭력 행위였다. 전기톱, 쇠톱, 쇠망치로 잠긴 문을 뜯어내고 가스총을 난사하며 질식할 듯한 36층 호텔 창 밖으로 '공권력 철수', '연행 중지'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내 걸렸다. 이에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뛰어내릴 것만 같아 건물 아래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심장이 멎어 버리는 듯했다. "임산부와 장애인이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루탄과 공포탄을 쏘며,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는 경찰들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80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과정에서 구타를 당해 양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머리를 15바늘 꿰매고, 눈 위 부분을 25바늘 꿰매는 등 70여 명의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었고, 연막탄을 마신 10여 명의 임산부와 장애인이 경찰서에서 밤을 지새야 했다. 그리고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은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는 집회 대오에까지 이어져 수십 명이 다치고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롯데호텔에 이어 1일, 마포 의료보험관리공단에 3,000여 명의 경찰특공대가 페퍼포그와 물대포, 매트리스, 엠블란스 등을 동원해 강제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고가사다리를 이용해 아래, 위층에서 토끼몰이해 농성 중이던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오리걸음 시켜 끌고 나왔다. 이에 앞서 27일부터 금감위 앞에서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위한 농성을 시작하고 하던 금속노동자들도 수백 명의 경찰들에 의해 사정없이 구타당하고, 천막을 빼앗기고, 매일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지난 1일 민주노총 구미시협의회 김성현 사무처장이 지역의 투쟁사업장을 적극 지원하였다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연행, 구속되었다. 또 지난 28일 평택시청 앞에서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과 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50여 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은 출동한 전경들에 의해 곤봉과 방패에 찍히고 짓밟혀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10여 명의 학생들과 장애인이 크게 다쳤다.
법도 여론도 무시한 무단적 탄압!
물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노동자들이나 철거민들에 대한 물리적 탄압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며칠 동안 이어진 탄압은 그 이전과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예컨대 사회보험 노조의 경우 작년에 37일 동안이나 이른바 '불법파업'을 벌였음에도 공권력을 투입하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합법적인 파업'에 돌입한 지 불과 3일 만에 전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형식적인 합법성조차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의 진압 양상도 예전과는 달리 아주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다.
여론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다. 롯데호텔 공권력 침탈 이후 제도언론, 심지어 방송에서조차 의사들의 폐업사태 때는 힘도 못쓰고 질질 끌려 다니더니 힘 없는 노동자들만 때려잡는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등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바로 다음날 의료보험공단에 또다시 공권력을 투입했으며, 시내 한복판에서 열렸던 규탄집회마저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았다. 김대중 정부는 지금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해 사안별로 강·온 전략을 병행하던 데서 탈피해 무단적인 탄압으로 기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그런 입장을 분명히 했다. 롯데호텔에 공권력을 투입하기 직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불법 집단이기주의는 결코 용납해선 안되며 관련자들은 법에 따라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어 전국 지방경찰청장 회의에서 이무영 경찰청장은 "최근 있었던 일련의 불법 폭력 집회, 시위는 국민생활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것으로 단호히 대처해 주동자들은 철저하게 사법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의사들의 집단폐업과 고엽제 전우회의 한겨레신문사 폭력 난동사태를 구실로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면서 오히려 노동자·민중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신공안'은 '통일 공안'이다.
사람들은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공안탄압이다' '공안정국이 다시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 김대중 정권은 무단적인 탄압의 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대중 정권은 왜 이렇게 갑작스레 공안탄압으로 선회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야말로 정권을 흔든 의사들의 폐업사태에 대해서는 이제껏 의사협회 회장을 소환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기껏해야 단위 사업장의 임단투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는 비난 여론을 무릅쓰면서까지 무단적인 탄압으로 나오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의 정세를 규정하는 가장 큰 맥락은 정상회담 이후 조성된 통일정세이다. 최근의 공안정국 역시 이 통일정세와 관련해서 보아야만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일시적으로 보면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권의 정국 주도권은 비상하게 강화되었다. 특히 제도정치권에서 보면, 비(非) 한나라당 공조체제가 확고해 지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수세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정세와 김대중 정권의 정국주도권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수십년 동안 권력과 부를 독점해 온 수구세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버티고 있다. 의사들의 폐업사태와 고엽제 전우회의 한겨레 신문사 난동사건은 이들 수구세력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더구나 이들 수구세력 뒤에는 정상회담으로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데 대해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미국이 있다. 미국과 남한 수구세력이 합세하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나선다면 김대중 정권은 정상회담의 성과를 지속시켜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 정권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노동자·민중세력과 제휴하여 자주통일과 민주개혁으로 나아가든가, 미국 및 수구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정상회담의 결과를 인정받고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이다.
최근 정세의 흐름은 김대중 정권이 후자의 길을 택했음을 보여준다. 통일정세 속에서 미국 및 수구세력과 타협하는 대신 노동자·민중운동은 철저히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을 택한 이상 노동자·민중의 진출에 의해 떠밀려갈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무단적으로 탄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우리는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의사들의 폐업사태와 소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한 고엽제 전우회의 신문사 난입사건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노동자·민중 투쟁에 대해서는 무단적인 탄압으로 나선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신공안정국'은 바로 '통일공안정국'인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미국에 굴종하면서 독재로 치닫고 있다.
최근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외교통상부 장관과 공동성명까지 발표하고 돌아갔다. 정상회담 직후에 이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미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의 결과를 직접 설명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국무장관을 한국에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통일 선언'까지 채택하면서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데 대해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 경고를 보내고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이 무엇을 요구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미국은 정상회담을 전후해서 통일열망이 고조되고 반미의식과 반미투쟁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제기하면서 노동자·민중운동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이렇게 김대중 정권을 압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 한전, 대우자동차 등을 확실하게, 빨리 넘기라고 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최근 들어 노동자·민중에 대해 무단적인 탄압으로 정책기조를 전환하고 대우자동차 해외매각과 금융 구조조정, 나아가 한전 분할 매각까지 밀어붙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은 지금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구세력과 타협하면서 독재로 치닫고 있다.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해 무단적 탄압으로 선회했을 뿐 아니라 국회에서도 비(非)한나라당 연대로 안정 다수를 확보한 것을 기반으로 경제식민지화-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등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김대중 정권이 이처럼 독재로 치닫는 한 노동자·민중은 김대중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권은 미국·초국적 자본에 포위되어 있다. IMF를 극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미국·초국적 자본이 돈을 빼버리면 경제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김대중 정권이 노동자·민중에 적대하면서 미국에 굴종하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이렇게 미국·수구세력에 끌려가는 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의 성과도 무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7천만 겨레의 자주통일에 대한 열망은 다시 한번 배반을 당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으로 민주변혁을 이루지 못하는 한 자주와 통일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