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5월 26일(토) -27일(일)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는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국제회의에서 발표될 글입니다. 26일 1시부터 시작되는 본 토론회 1부에서 맨 처음으로 읽힐 한국측 발표문입니다.
2.13 합의 이후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잦아들어지만, 과연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반추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냉전이 최절정에 달했을 때에 비해 (핵)전쟁의 가능성이 줄었다고 낙관할 근거가 과연 있는 것인지 검토해보자 했습니다.
모쪼록 회원 여러분께서 참석하셔서, 한국과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과연 우리 운동이 무엇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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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6일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국제회의 발표문]
동아시아 핵 위험과 반핵평화운동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
1. 한국의 ‘핵주권’?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했다고 발표한 직후, 신동아 2006년 12월호는 특별부록으로 <한국의 핵주권>을 발행했다. 이 책의 부제는 “비핵화선언은 파기됐다, 우리도 농축하자!”였다. 이 책에는 신동아의 필진뿐만 아니라 한국수력원자력, 각종 원자력 관련 연구소 연구원, 원자력공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한국의 핵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 책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한국의 ‘핵주권’을 제약하는 세 가지 요소는 ① 1956년 이승만 정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원자력협정(한국의 재처리와 농축을 허용하지 않았다), ② 1975년 박정희 정권이 비준한 핵확산금지조약(NPT)(박정권은 NP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중수로 도입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NPT에 가입했다), ③ 1991년 노태우 정권이 북한과 합의한 한반도비핵화선언 (“남과 북은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허용한다, 남과 북은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다. 이 중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북한의 NPT 탈퇴(1994년), 농축우라늄 계획(2002년), 핵실험을(2007년)을 통해서 파기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맺은 한미원자력협정만 개정하면 NPT가 허용하는 ‘핵의 평화적 이용' 내에서 우라늄 농축과 핵재처리를 통해 ‘핵연료주기 완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은 일찍이 ‘비핵3원칙’을 선언했지만 1988년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해서 핵무기를 갖지 않고도 플루토늄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1988년 일본은 건설이 시작되지도 않은 제2의 재처리시설(로카쇼무라)의 건설 및 가동허가를 받아내면서 명실상부하게 핵연료주기를 완성했다. 일본이 무기급 플루토늄을 보유하지 않았고 따라서 핵무기 보유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하지만, 일본만이 수십 톤의 플루토늄을 축적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다. 따라서 한국도 최소 일본 수준의 핵개발을 달성해야 하며, 미일원자력협정 개정은 한미원자력협정의 미래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보유의 가능성이 열린다.)
셋째, 2001년 미국 부시 대통령은 국가에너지정책에 대한 성명에서 원자력 이용 확대 정책을 천명했다. (클린턴 정부는 핵무기용 플루토늄과 우라늄 제조 반대, 플루토늄의 상업적 이용에 반대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여기에는 미국 원자력발전소 산업에 대한 각종 특혜를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4세대 원자로와 첨단 핵연료주기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포함된다. 미국이 새로운 정책을 통해 원자력 연구개발을 확대할 것이므로, 한국도 원자력 핵심기술을 확보하여 세계적인 원자력 재확산 추세에 적극 편승해서 원자력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과 일본의 ‘잠재적’ 위협을 강조하며 미국과의 동맹관계 확장을 주장하는 지극히 상투적인 한국 보수 세력의 논리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즉 북한이 핵개발에서 앞서 나가고 있고, 일본은 잠재적 핵보유국이므로,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해서 핵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핵주권’이라는 호전적이며 국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선동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핵무기 보유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철저히 원자력 발전 확대라는 외양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의 주장에 대해 “핵발전이 핵무기 개발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위안하며 그 주장을 맹종하다보면 결국 언젠가 우리는 핵무기 개발의 문턱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 볼 때, 여러 국가가 원자력발전에 관심을 보인 이유에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기술축적과 원료획득이라는 의도가 반드시 동반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경험적 사실이다. (공통의 핵물리학적 기초, 공통의 과학기술 연구, 동일한 화학적 원자력산업, 공동의 경제적 예산, 실제적으로 공동의 정부조직 등등).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의 명확한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핵의 평화적 이용’ 범위를 확대하자는 모든 주장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의 잠재적 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2002년 발표된 <핵태세보고서>에서 미국은 핵전력의 새로운 삼중점(New Triad)으로 핵공격체제(미사일, 잠수함, 폭격기), 방어체제(미사일방어망), 국방인프라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국방인프라’는 핵 복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미국은 핵무기 공장의 연간 핵탄두 생산량을 현재 350기에서 600기로 늘리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적 생산시설’에는 새로운 대량의 플루토늄이 필요하며, 이에 관한 계획도 추진될 것이다. 따라서 부시 정부의 새로운 핵무기 전략과 원자력 산업 발전 계획이 깊은 연관성을 맺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이 핵무기 공격․방어․생산 능력을 확장하고 원자력산업의 부흥을 꾀하고 있는 현실, 세계 각 국의 추세와 상반되게 일본이 고속증식로와 핵재처리시설을 통한 플루토늄 이용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의 핵 정책을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는 경향은 한국의 반핵평화운동이 경계해야 할 우선적 쟁점이 아닐 수 없다.
2. 미국과 동아시아 핵무기 경쟁
냉전 붕괴 이후 핵무기 경쟁이 드디어 종식될 것이라는 대중의 기대는 철저히 배신당했다. 핵군비 철폐라는 희망이 무산된 후, 오히려 핵무기 경쟁은 더욱 냉정한 핵무기 논리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미국의 ‘실현 가능한’ 핵전쟁 구상에 따라 핵무기의 실전 사용 가능성이 더 높아졌음을 자각해야 한다. 현재 핵전쟁의 위험은 지난 과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아지지는 않았는지 자문해야 한다.
현재 미국의 세계전략은 세계경제를 삼극 중심으로 재편․집중함으로써 배제된 지역을 창출한다. 미국은 배제된 지역에 대해 의도적 무관심을 보이거나 민중의 상호절멸을 조장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세계의 새로운 분할(“원한의 경계선”)은 폭력의 확산을 자극하며, 이는 세계적 핵확산이라는 추세와 조응한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핵패권주의를 통해 핵무기의 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를 자국 핵 군사력의 확장을 통해 억제하려는 모순적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핵패권주의와 세계 각국의 핵민족주의 간 상호작용을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적 핵확산의 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동아시아 핵경쟁 구도의 특히 다음과 같은 현실 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첫째, 미국은 ‘절대적인 핵우위’ 정책을 고수하며, ‘승리하는 핵전쟁’이라는 미망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핵 감축에 대한 세계적 압력에 직면하여, 핵무기 감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핵무기의 타격력과 파괴력을 높이고, 미사일방어망(MD)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핵전쟁에서의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2002년 부시행정부는 STARTⅡ(2차 전략무기감축협상)을 실행하는 대신에, 러시아와 ‘전략적 공격무기 감축 협정’(모스크바조약)을 체결했고, 미국 상원은 2003년 비준했다. 이는 조약 발효 후 10년 이내에 미국과 러시아의 전략핵탄두 보유상한을 1,700-2,200기로 제한하는 것으로, STARTⅡ보다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스크바 조약은 미국의 예비용 전략핵탄두 보유와 다양한 전술핵무기 개발, 보유를 제한할 수 없다. 특히 STARTⅡ는 모든 다탄두 대륙간미사일을 제거하고, 잠수함발시탄도미사일(SLBM) 핵탄두 상한을 1750개로 제한했지만, 모스크바조약은 핵탄두의 수만 제한하기 때문에 다탄두미사일을 계속 보유할 수 있게 하며 미국이 강점을 지닌 SLBM을 다탄두체계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미국 상원은 모스크바 조약이 미국 핵무기 보유의 유연성을 보전할 수 있게 한다며 높게 평가했다. <핵과학자회보>에 따르면 2006년 현재 미국은 국내 12개 주와 유럽 6개 국가(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영국)에 거의 10,000기의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 (러시아는 4,978기의 전략핵탄두, 3,500기의 전술핵탄두, 11,000개의 예비 전략핵탄두와 전술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어서 핵탄두 보유량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버금간다.)
둘째, 최근 미국의 군부, 정보기관, 보수적 싱크탱크와 언론이 중국의 핵무기 능력을 지극히 과장하는 양상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은 새로운 미사일, 구축함, 잠수함, 전투기 도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잠수함과 미사일 능력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기관들이 2004년 중국의 핵잠수함이 일본 영해를 침입한 사건을 문제로 삼으며, 이를 중국의 태평양 진출 시도의 전조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미국 정보기관은 중국이 2015년까지 미국 대륙 영토를 75-100기의 탄두로 공격할 수 있다고 줄기차게 경고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2015년까지 새로운 동풍 미사일(DF-31A) 45-55개를 배치할 수 있다는 가정을 당연시한 결과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중국이 제2의 ‘진주만 공습’을 준비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중의 기억을 회상시키는 교묘한 이데올로기적 술책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따르면,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중국 잠수함은 아직까지 1981년에 건조된 단 한 척에 불과하며, 핵무기를 탑재하여 원거리 정찰을 시도한 적은 없다. 또한 DF-31A는 아직까지 비행실험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미국의 핵공격 능력 향상을 근거로 자신의 핵무기 능력 현대화를 합리화하며, 이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작용-반작용 경쟁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한편으로, 미국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중국에 대해 압도적 핵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01년 미국 국방부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은 100여 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와 다르게 중국이 새로운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중국은 비핵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과 핵무기로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언론이 말하는 중국의 ‘진주만 공습 준비’는 아직까지 지극히 허구적인 시나리오다.
다른 한편으로, 핵무기의 절대적 파괴력을 고려할 때 양적, 질적인 측면에서 미국의 핵우위와 중국의 핵열세라는 비교는 허구적이라는 점이다. 중국이 미국 핵공격을 가하기 위해 필요한 핵탄두는 단지 20기일 수도 있다. 20개의 장거리 핵미사일이 20개 도시를 공격하면 4000만 명의 사상자를 낳고, 미국과 캐나다를 뒤덮는 방사능 낙진을 유발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미국이 20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중국의 격납고을 정밀타격하면 1,100만 명의 사상자를 낳고, 중국 3개 성에 걸쳐 방사능 낙진을 뿌릴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중국의 핵위협을 과장하는 것의 문제점을 심각히 우려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논리가 미국과 중국의 작용-반작용을 통해 중국이 (아무리 중국의 핵능력이 미국에 비해 비대칭적이라고 하더라도) 핵경쟁의 단계적 상승에 편승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셋째, 과거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공격에 대한 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단지 암시적으로만 드러냈지만, 부시 정부가 채택한 새로운 국가전략은 이를 공식화했다. 따라서 NPT의 소극적 안전보장조차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NPT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 흔들림으로써 NPT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또한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핵정책은 새로운 비핵무기지대 창설 구상을 실현 불가능하게 한다.
핵무기 비보유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은 NPT가 시작된 후 항구적 쟁점이었다. 소극적 안전보장은 핵무기 비보유국가가 핵무기 보유를 추구하는 것을 막는 유인이자, 세계적 핵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단계로서 간주되었다. 하지만 핵무기 보유국가는 NPT에서 소극적 안전보장을 성문화하는 것에 반대하고, 구속력이 없는 선언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미국은 2002년 <핵태세보고서>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등에 대해 미국이 처한 긴급 상황에서 핵능력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핵태세보고서> 이후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와 싸우기 위한 국가전략>을 발표했고, 부시는 이를 공식화하는 <국가안보명령 17호>에 서명했다.
한편 비핵무기지대(Nuclear-Weapon-Free-Zone)는 NPT의 외부에서 지역적, 세계적 안전을 개선하려는 시도다. (물론 NPT는 비핵무기지대 창설을 허용한다.) 그러나 비핵무기지대 창설에서도 핵보유국의 ‘소극적 안전보장’은 사활적 쟁점 사항들 중의 하나다. 미국이 NPT 틀 내의 소극적 안전보장을 무효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핵전략은 비핵무기지대 창설의 미래까지도 지극히 어둡게 한다. (덧붙여 기존의 비핵무기지대 협정은 ‘핵의 평화적 이용’을 수용하거나 권장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비핵무기지대의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넷째, NPT 체제는 핵무기 보유국의 핵감축 의무나 ‘소극적 안전보장’ 의무를 거의 사문화하므로,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자신의 배타적 이익에 따라 이중적으로 NPT의 잣대를 들이대는 태도는 결국 NPT 자체의 정당성을 더욱 침식하며, 궁극적으로 세계 각국의 핵개발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3월 미국과 인도는 핵협력협정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인도의 22개 핵시설 가운데 민수용시설에 대해서는 국제사찰을 실시하는 대신 8개 군수용시설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도는 미국의 승인 하에서, NPT에 가입하지 않고도 여섯 번째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특별지위를 누리게 된 셈이다 (인도는 현재 75~115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는 세계적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 경향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미국의 핵공격 능력은 미국-러시아 핵감축 협정의 외양 속에서 정밀성과 파괴력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의 핵무기 능력 확대를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미국은 ‘절대적 핵우위’와 ‘승리하는 핵전쟁’이라는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소극적 안전보장이라는 NPT의 핵심적 요소들 중 하나를 명시적으로 와해시키고 있다. 미국은 NPT에 대한 독단적 태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이는 NPT의 근본적 결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3. ‘북한 예외주의’?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한국 사회에서 핵문제에 관한 복잡한 논쟁을 폭발시켰다. 초기에는 북한의 핵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북한을 (NPT 외부의) 핵무기 보유국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핵실험에 실패했으며 아직 핵무기 보유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할지, ‘사실 확인’ 차원의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하지만 논쟁은 즉각적으로 북한 핵실험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지, 한국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로 넘어갔다.
한국은 1980년대 민중운동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한반도 핵전쟁계획, 핵무기 배치, 핵전쟁훈련(팀스피리트훈련)이 극히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최소한 민중운동의 핵무기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최근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지지 의사를 밝힌 바가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민중운동 내에서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북한의 핵보유 시도에 대해 방어적, 변호론적 태도를 보인 경향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미국의 핵독점, 핵패권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미국의 대북 전쟁계획에 대한 최소한의 억지력이자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용 수단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북한의 핵보유는 ‘정의의 전쟁’(just war)을 위한 수단이거나, 최소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핵위협에 대비해 일차적 비판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호론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첫째,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실행된 핵폭격은 총력전의 완성이자 초월로 간주할 수 있다. 핵전쟁이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 군사시설과 비군사시설의 구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절대적 파괴, 절멸의 극한을 현실화했다는 의미에서는 총력전의 완성이다. 하지만, 핵전쟁은 근대전쟁이 수반했던 민족적․민중적 동원 체계를 상대화한다는 점에서는 총력전의 초월이다. 핵전쟁은 대중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배제하며, 모든 권한을 지배자에게 집중시킨다. 핵전쟁 발발 여부는 최고 지도자의 배타적 권한에 속하게 되거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자동화된 반응으로 진화한다.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민중의 절대적 소외로서의 핵전쟁에서 더 이상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은 무의미해진다.
둘째,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보유가 핵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은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핵무기는 그 자체로 ‘절대무기’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핵무기의 개발, 배치, 이전 등 매 국면마다 이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충돌 위험과 긴장이 발생했다.
셋째, 북한의 핵 개발 의도가 세계적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향후 10년 후 세계적 핵보유국의 숫자는 지금과 사뭇 다를 것이라는 예상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핵보유 시도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지금까지 모든 핵개발 국가가 궁극적인 목표가 비핵화라고 주장하는 것과 몹시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비핵화가 아니라 바로 당장의 비핵화 문제를 다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핵위협을 막는 수단은 ‘핵무기 보유’가 아니라 대중적인 반핵평화운동의 힘이라는 관점을 확고히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4. 반핵평화운동과 일방주의적 군비축소
그렇다면 반핵평화운동은 어떤 요구를 내걸고 대중적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냉전시기 핵경쟁의 메커니즘과 반핵평화운동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 냉전이 가장 첨예해진 시기에도 미국과 소련은 의례적 협상을 진행했고, 군비통제와 군비축소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협상이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몇몇 제한적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따라서 핵무기와 여타 군사정책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은 다자간, 양자간 협상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밝혀야했다. 일부는 협상의 성공을 위해, 또는 협상에서 특정한 입장을 격려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평화운동이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내린 일반적 결론은 이러한 협상이 군비를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비증강의 변명이나 눈가리개로 주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화운동 집단은 미소 협상을 통한 상호 군축합의를 넘어서, 자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 단독의 군비축소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특히 1980년대 초 정점에 이른 유럽의 반핵평화운동은 핵실험의 중단, 군사기지의 제거, 특정 군사전략의 폐기 등 자국정부의 일방주의적 행동을 촉구했다. 일방주의적 행동을 위한 요구는 원칙적으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통해 쟁취될 수 있으며, 정부의 행동은 뉴스 미디어와 여론에 의해 감시될 수 있다. 반면 운동이 다자간, 양자간 협상을 요구한다면 협상과정을 자세히 파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우며, 협상 과정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협상의 실패에 대한 비난은 상대편에 대한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군비통제나 군비축소를 위한 국가간 협상에 기대하기에 앞서 한국에서부터 반전반핵 평화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할 것이다. 최근 6자회담 2․13 합의는 발표되자마자 초기 이행조치가 미궁에 빠졌고, 협정 구조의 근본적 불안정성 때문에 그 누구도 장래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우선적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무현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고, 한국에서부터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펼쳐나가자. 최근 노무현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한강 이남으로 이전)와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허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전쟁 개시 가능성을 더 높이려는 미국의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노무현정부는 이지스함,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을 암묵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빌미로 한국의 무기증강을 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고 전쟁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주둔미군의 철수, 호전적 한미동맹의 해소, 한반도 군비감축을 통해 전쟁유발요인을 한국에서부터 제거하는 것이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다. 그것은 적대국이나 경쟁국이 ‘먼저 해야 한다’ 또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세력균형 논리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부터 일방적인 군비축소와 전쟁태세 해소가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을 확실하게 천명해야 한다.
둘째,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자. 2005년 8월 미국의 핵폭격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해외기관과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핵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그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의 86%, 독일의 93%가 핵보유에 대해 반대의견을 피력했지만, 한국은 52%가 핵보유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0, 40대 응답자들은 20대나 50대 이상에 비해 한국의 핵무기 보유 찬성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각각 58.5%, 58.7%, 46%, 46.35%),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비율은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흐름은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북한의 핵보유가 궁극적으로 ‘통일한국’의 핵보유로 이어져서 동아시아에서 일본, 중국과의 핵무기 경쟁에서 한국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는 대중적 환상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 한국, 일본, 중국 각국별로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적으로 증폭되고 있으며, 이는 각국에서 호전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기류는 동아시아의 핵무장화에 크나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핵무기주의는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와 절대적인 정치적 소외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바로 지금도 핵전쟁은 진화하고 있으며, 현재의 시점이 과거 냉전 시기보다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더 적다고 낙관할 근거는 없다고 강조하고자 했다. 반면 반전반핵 평화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요청은 너무나 긴급하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오늘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국제회의를 지지하고, 참여한 모든 분들이 이러한 우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