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투쟁은 비에께스에서 매향리까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출처 : 자주민주통일 미주연합 (http://chaju.org)
< 차 례 >
(1) 비에께스 점거농성투쟁 마지막 날
(2) 푸에토리코 민중의 항미자주독립운동
(3) 매향리는 매향리가 아니다
(4) 쿠니폭격훈련장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1) 비에께스 점거농성투쟁 마지막 날
2000년 5월 4일 새벽 다섯시.
대서양의 섬나라 푸에토리코에 딸려있는 비에께스섬(Isla de Vieques). 9천3백명 밖에 살지 않는 작은 섬. 바로 그 섬 앞바다에서 몇 일동안 대기하고 있었던 미군 함정 두 척에서 상륙정과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륙정과 헬리콥터로 기습상륙한 미연방수사국(FBI) 무장요원 2백명은 그 섬에 있는 미 대서양 함대 폭격훈련기지인 캠프 가르씨아(Camp Garcia) 정문에서 16킬로미터 들어간 지점으로, 그러니까 폭격훈련기지 한복판으로 소리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무장요원 2백명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들처럼 다가서고 있는, 16킬로미터 들어간 목표지점에는 지난 한 해동안 점거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는 푸에토리코 사람 1백50명이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밀려드는 사위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자기들을 덮칠지 모르는 긴장감이 숨막히도록 팽팽하게 대기를 옥죄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느닷없이 나타난 미국인 무장요원들이 현장을 덮쳤다. 치열한 몸싸움, 그리고 비에께스섬 새벽 공기를 찢은 날카로운 외침과 비명. 미국인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는 섬사람들의 손목에 굵은 포승줄을 묶었다. 비에께스섬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섬사람들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자꾸 쓸어올려주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무장한 미국인 요원 1백명은 그 폭격훈련기지 출입문 앞에서 지난 한 해동안 점거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는 섬사람 마흔명을 체포하였다. 이로써 지난 한해동안 끈질기게 이어졌던 푸에토리코 민중의 죽음을 각오한 점거농성투쟁은 막을 내렸다. 저들의 체포작전이 끝난 직후에 워싱턴에 있는 미 국방부 관리는 앞으로 여섯 주가 지나면 그 폭격훈련기지에서 다시 폭음이 들리게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하였다.
푸에토리코 민중의 비에께스 미군 폭격훈련기지 점거농성투쟁.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채 지난 한 해동안 워싱턴을 궁지에 몰아넣은 이 위대한 투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미국은 비에께스섬을 미 대서양 함대의 항공기와 함선들이 실탄으로 폭격훈련과 사격훈련을 하는 매우 중요한 훈련기지로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해 4월 푸에토리코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군이 고용한 푸에토리코 사람 안전요원이 그 폭격훈련기지에서 미 해병대 소속 에프(F)-18 전투기가 떨어뜨린 방향을 잃은 폭탄에 목숨을 빼앗기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 분노한 섬사람들은 미군폭격훈련기지를 폐쇄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수십년이 넘게 겹쌓여온 원한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듯한 투쟁의 폭발력은 평소에 그토록 양순하기만 하던 섬사람들을 용맹한 투사로 만들었다. 섬사람들의 투쟁은 치열하고 용감했다. 언제 미군기의 폭탄이 떨어져 터질지 모르는 파괴와 죽음의 폐허인 폭격훈련기지 한복판에 초막이 세워졌다. 허술하게 지은 초막 앞에 모인 섬사람들은 기지가 폐쇄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아메리카 대제국을 향하여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거인과 어린애가 맞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섬사람들에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이었다. 푸에토리코 민중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하고 잔인한 대제국의 거대한 폭력 앞에 맨몸으로 부딪히는 싸움이었다. 섬사람들에게 점거당한 자기들의 폭격훈련기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쓰겠다고 하면서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군이 점거농성을 하고 있는 섬사람들의 머리 위에 언제 폭탄을 떨어뜨릴지 모르는 숨막히는 위기의 순간이 일분일초 이어졌다. 미국인들이 언제 쳐들어와서 그들을 잡아갈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날이 지새고 해가 바뀌었다.
미 해군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비에께스섬 훈련기지가 섬사람들의 점거농성투쟁 때문에 거의 한 해동안이나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당황하기 시작한 쪽은 미국이었다. 올해 1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직접 이 사건을 해결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훈련기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푸에토리코 자치정부에 9천만달러를 주겠다는 보상안을 제시하기까지 하면서 회유책을 써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클린턴이 달러의 힘으로 푸에토리코 민중의 투쟁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섬사람들은 클린턴의 회유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인들과 푸에토리코 민중 사이에서 눈치나 슬슬 살피면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푸에토리코 자치정부가 발벗고 나섰다. 섬사람들이 미군기지 철거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조건으로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을 사용하여 폭격훈련을 재개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해달라는 타협안을 워싱턴과 섬사람들에게 모두 제시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그 따위 타협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타협안은 거부당했다.
완강한 점거농성투쟁에 밀려 기가 꺾인 클린턴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가 차츰 불리해지자 하는 수 없이 지난 2월 1일 섬사람들에게 화상전화를 걸어 직접 호소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클린턴은 미 해군이 더 이상 실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만일 섬사람들이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폭격훈련기지를 폐쇄하라는 결정을 내린다면 앞으로 삼년 안에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설득하면서 제발 폭격훈련기지를 다시 쓰게 해달라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미국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푸에토리코 민중들이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사탕발림 회유책에 속고 또 속아왔던 세월은 얼마나 오래 흘러왔던가. 민중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으며, 미국인들은 더 이상 속임수를 쓸 수 없었다.
점거농성자들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단 한 가지였다. 끝까지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쪽에 있는 워싱턴에게 남아있는 선택도 단 한 가지였다. 점거농성자들을 체포하여 강제해산하는 것 밖에 없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제국과 푸에토리코 민중 사이에서 타협과 절충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의 정치적 결단은 단호하며 민중의 투쟁은 비겁함을 모른다는 변함없는 역사의 진실, 바로 그것이다. 민중이 단결된 조직력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대제국 아메리카의 심장부에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이름 없는 섬사람 2백명이 단결하여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을 때, 대제국 아메리카의 오만을 꺾고 그 비열성과 교활성을 폭로함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푸에토리코 민중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아메리카 군대가 그 폭격훈련기지에 예전처럼 폭격기를 출동시켜 점거투쟁자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는데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던 까닭이 있다. 만일 푸에토리코 민중을 죽이는 참사가 일어나면 미국에 건너와서 살고 있는 수백만 푸에토리코 이민자들과 그들을 동정하는 수많은 중남미계 이민자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고, 전세계 양심적인 인민들로부터 빗발같은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올해 11월에 있을 대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지둥대고 있었다. 만일 올해 안에 대선이 없었다면 아메리카 대제국은 비에께스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지난 한 해동안 비에께스 섬사람들은 목숨을 건 치열한 점거농성투쟁을 지속하였건만, 미국의 언론은 이 사실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점거농성투쟁은 세계의 관심을 끌어모으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5월 4일 미국인들이 기습체포작전을 벌이면서 비로소 미국 언론은 비에께스섬 현장으로 달려갔으며, 그로써 프에토리코 민중의 영웅적 투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 날 새벽녘, 무장한 미국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손목을 묶인 채로 끌려가면서도 구호를 외치고 있는 섬사람들. 미군 호송트럭에 오르기 전, 손목을 묶인 채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소리치고 있는 섬사람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들의 장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눈시울이 자꾸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그들의 싸움이 끝내 승리하기를 빌었다. 푸에토리코 민중의 피눈물 어린 항미자주독립운동이 최후 승리를 선언하는 그 날까지 쓰러지지 말고 꿋꿋하게 잘 싸워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2) 푸에토리코 민중의 항미자주독립운동
푸에토리코는 대서양에 떠있는 작은 섬나라다. 인구는 1999년 7월 현재 3백88만명을 조금 넘는다. 영토는 8천9백59 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한(조선)반도 전체의 넓이가 21만8천6백 평방킬로미터이며, 미국 영토의 넓이는 9백15만8천9백60 평방킬로미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푸에토리코 영토의 넓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외래침략자 스페인 함대가 이 섬나라에 쳐들어오기 이전에 섬사람들은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 그리고 수풀 우거진 섬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오래 전에 이 섬나라가 자기들에게 전략적 가치가 있는 요충지라고 생각하여 불법적으로 점령하였다. 섬주인이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미국의 점령은 이 작은 섬나라가 견디기 힘든 고통과 불행과 재난을 몰고왔다. 지금 푸에토리코의 대통령은 클린턴이다. 푸에토리코 헌법은 미국 연방의회에서 비준하게 되어있다. 이 섬나라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열여덟살이 되면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국기도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본따서 만든 것이며, 국경일도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지키도록 되어있다. 통화도 미국 달러화를 그대로 쓰고 있다. 미 중앙정보국의 자료에 보면 푸에토리코의 방위는 "미국의 책임"이라고 적혀있다. 이 작은 섬나라는 사탕수수, 커피, 파인애플, 바나나 같은 농산물을 수출하여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총수출의 88퍼센트가 대미수출이며 총수입의 68퍼센트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한다. 한사람 당 국내총생산은 1998년 현재를 기준으로 9천달러이며, 실업률은 13퍼센트나 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푸에토리코는 이른바 '세계화'를 떠들어대는 21세기에 와서도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예속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미국의 지배와 약탈을 받고 있는 푸에토리코 민중들 속에서 항미자주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 중앙정보국의 자료에 따르면, 푸에토리코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혁명적 무장세력은 푸에토리코 민족해방군(FALN), 푸에토리코 혁명지원군, 보리쿠아 인민군, 인민저항군이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푸에토리코 민중의 항미자주독립운동에 대해서 매우 제한된 정보 밖에는 가진 게 없는데, 이 글에서는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1987년의 체험 한 조각을 꺼내어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니까 남(한국)에서 6월 민중항쟁이 불길처럼 치솟았던 바로 그 해의 일이다. 그 해 가을 어느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시카고에 있는 푸에토리코 학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시카고의 푸에토리코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살고 있는 지역에 세워진 고등학교였다. 그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낡은 창고건물을 사들인 뒤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서 그 창고건물을 훌륭한 고등학교 건물로 개조하였다.
그 학교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게시판에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남(한국)의 6월 민중항쟁을 자세하게 소개한 영문자료가 사진과 더불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은 그 때만해도 푸에토리코 민중의 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와 무관심에 가까운 처지에 있었던 게 사실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형편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데 푸에토리코 민중은 6월 민중항쟁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가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13년 전에...
그 학교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미자주독립운동 사적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1백년이 넘도록 푸에토리코의 항미자주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혁명가들의 사진, 옥중편지, 유품들이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린 커다란 푸에토리코 깃발 아래 정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푸에토리코의 자주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미국인들에게 붙잡혀 이른바 테러범, 정치범으로 몰려 평생을 독방에서 보내고 있는 혁명투사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들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는 갓 스무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자 대학생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그 여성은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여대생이었다. 샘물처럼 맑은 눈매에 엷은 웃음이 어린 그 여성의 가냘픈 손에 들려있었을 항미투쟁의 총. 그 무엇이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던 그 손으로 혁명의 총을 잡게 하였는가. 눈물겨운 사연이 세월의 나이테만큼이나 겹쌓여있는 혁명투사들의 사진과 유품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장기수 어른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 너른 하늘 아래 곳곳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이름 없는 영웅들을 생각했다.
우리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에 푸에토리코의 혁명조직이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묵고 있었던 워싱턴의 블레어 하우스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햄버거를 파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인 버거킹이 푸에토리코 땅을 마구 사들여 거대한 목장을 꾸려놓았는데, 그로써 푸에토리코 민중들은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나는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미국인들은 푸에토리코 사람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수많은 푸에토리코 여성들에게 불임약을 먹게 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나는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2억6천만 미국인들이 버거킹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저멀리 섬나라에 살고 있는 3백88만 푸에토리코 민중은 땅을 잃어버리고 가난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자본주의의 야만적 약탈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나를 안내하였던 그 학교의 교장 선생 자신도 항미자주독립운동에 참가한 것 때문에 미국에서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그의 동생은 아직도 미국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칠판 옆에 붙어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로 말하면 학급훈을 써붙인 셈이었는데, 거기에는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호치민의 어록이 적혀있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푸에토리코 학생들은 학업성적도 우수하여 미 전국에서 선발하는 최우수 고등학교로 두 차례나 뽑힌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학교시설은 방과후 저녁시간에는 지역주민들의 교육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 몇 해 전에는 미 연방수사국 요원들이 밤에 쳐들어와서 학교기물을 마구 파괴하였는데, 지역주민들이 한결같이 복구작업에 나서서 몇 주 안에 원상복구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교장선생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푸에토리코 민중의 항미자주독립정신이 곳곳에 배어있는 그 학교를 돌아보며 나는 미국땅에도 이런 훌륭한 곳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 전 그 학교에서 항미자주독립정신으로 자라난 학생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미국땅 어느 곳에서, 아니면 자기들의 사랑하는 조국 푸에토리코 어느 곳에서 지배와 약탈의 원흉에 맞서싸우는 혁명투사가 되어 있을까? 우리 민족자주운동 보다 앞서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럽기도 하였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였다.
(3) 매향리는 매향리가 아니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이곳은 비에께스 섬사람들이 미군폭격훈련기지를 폐쇄하라고 요구하며 목숨을 건 점거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던 기간 동안 매향리 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이곳에 미 공군 폭격훈련기지가 자리잡은 것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곳은 오키나와, 태국, 괌, 필리핀에서 날아온 미 공군폭격기들이 연간 2백50일 동안이나 쉬지 않고 폭탄을 퍼붓는 곳이다. 6·25전쟁 때 양민들과 피난민 대열에 폭탄을 떨어뜨려 학살한 그 미군기의 폭격이 오늘도 50년째 폭격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폭격훈련기지는 모두 7백28만평이나 되는데, 미국인들은 매향리 사람들이 대대로 일구어오던 논밭을 징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자기들의 폭격훈련기지를 만들어버렸다. 매향리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폭격연습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농사를 짓고 살아오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기의 오폭이나 불발탄 폭발로 목숨을 잃은 매향리 사람들은 12명이나 된다.
내가 매향리 미군폭격훈련기지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아마도 1986년 여름이 아닌가 싶다. 기록을 찾아보니까 '매향리 미공군 폭격연습장 피해대책 추진위원회'라는 주민조직이 생겨난 때도 바로 1986년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칠천만 겨레의 운명이 미국의 핵전쟁 위기 속에 놓여있음을 알았다. 충격과 분노를 삭이면서 궁리를 거듭한 끝에, 우선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 계획을 폭로·규탄하는 선전사업을 추진하기로 마음 먹고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모은 자료들 가운데서 한(조선)반도의 지도 위에 미군 기지 위치를 표시해놓은 자료를 읽다가 영문으로 '쿠니 사격장'이라고 적힌 미군폭격훈련기지를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쿠니 사격장'의 위치는 경기도 어디쯤인가 매우 명확하지 않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사격장이 그저 단순한 사격훈련장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다. 1986년 여름에 만들었던 선전물 겉표지에 '조국을 핵전쟁 위기에서 구하자'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던 일, 그리고 미국의 한(조선)반도 핵전쟁 계획을 반대하는 환등필름을 어렵사리 만들어서 미주동포들 앞에서 상영했던 일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로부터 어언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우리 민족민주운동도 멀리 전진의 길을 걸어왔다. 매향리 사람들은 1989년에 '쿠니 사격장' 점거시위로 폭격훈련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도 매향리는 여전히 미군의 땅 '쿠니'로 남겨져 저공비행하는 미군기의 폭격으로 끝없이 파헤쳐지고 있다. 폭탄을 실은 미군기가 날아오는 날이면 폭격연습을 알리는 신호깃발이 허공에 매달려 바람결에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는 그곳 매향리는 매향리가 아니다. 매향리는 한·미관계가 자리잡고 있는 고통과 불행과 재난의 현주소다. 아메리카 주둔군의 한 관계자는 얼마전 매향리 주민들의 투쟁에 대해서 빈정거리면서 이런 섬뜩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폭격을 연습하는 표적 주위에 민간인이 있어야 실전 같은 훈련을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노여움이 벌컥 일어선다.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저들이 남긴 그 말을 잊지 않으리라. 아메리카 주둔군의 눈에 우리 동포들은 사람이 아니라 저들의 실전훈련을 위한 값싼 보조물품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리라.
이 글을 읽는 이들이여,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민족의 양심을 흔들어 깨워다오. 매향리는 매향리가 아니라고 소리쳐다오. 매향리는 미군기의 폭탄에 갈갈이 찢기고 부서지고 파헤쳐진 칠천만의 가슴팍이라고, 매향리에서 미군기의 폭격이 파괴하고 있는 것은 칠천만 겨레의 보드라운 흙가슴이라고 소리쳐다오. 매향리는 아메리카 주둔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되찾아야 할 칠천만 겨레의 존엄과 양심이라고 피를 토하듯 소리쳐다오.
그리고 역사의 모진 시련을 헤쳐가는 이 땅의 양심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아다오. 우리에게도 비에께스섬의 이름 없는 투사들이 있는지를 물어보아다오. 미군기의 폭격 아래 무참히 짓이겨지는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살려낼 민중항쟁의 영웅적 혈통을 그대들 몸 속에 이어받았는지를 물어보아다오.
(4) 쿠니폭격훈련장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위의 글은 지난 5월 10일에 써두었으나 그 무렵에는 바쁜 일정 때문에 미처 발표하지 못한 글이었다. 위의 글을 써놓은 다음날 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초청을 받은 국제대표단에 합류하게 된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대표단의 일원으로 뉴욕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5월 13일부터 '반제자주를 위한 2000년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한 바있다. 이 대회일정에는 광주민중항쟁 2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는 일, 매향리의 쿠니폭격훈련장을 현장답사하는 일, 경상남도에 있는 6.25전쟁 중 미군의 양민학살지역을 현장답사하는 일,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에 관한 국제토론회에 참석하는 일, 진해의 미 해군기지와 서울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주한미군철수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대표단 성원들은 전국연합이 마련해준 전세버스를 타고 오늘은 서울, 내일은 광주 하 식으로 옮겨다니며 시위투쟁, 정치집회, 토론회에 참석하고 여러 현장을 답사하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대표단 성원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당하고 있는 분단과 예속의 고통과 비극을 체감하며 함께 울었고, 주한미군 철수운동의 전투대오가 뿜어내는 무쇠도 녹여버릴 것 같은 투쟁열기를 체감하며 함께 싸웠다. 그것은 해외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바로 그 귀중한 체험의 한복판에는 매향리의 쿠니폭격훈련장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대표단 성원을 태운 전세버스가 광주를 떠나 매향리로 향한 날은 5월 15일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쿠니폭격훈련장에 도착한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을 넘긴 때였다. '매향리 투쟁의 선봉장' 전만규 대책위원장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쿠니폭격훈련장에서 미군이 무슨 짓을 저질렀으며 지금 이 시각에도 저지르고 있는가를 낱낱이 밝혀주는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름다운 서해 바닷가 마을 매향리. 갯벌에 나가 조개를 잡고 푸른 들판을 논밭으로 가꾸며 평화롭게 살아갔던 매향리. 거기에서 아메리카 주둔군이 제 마음대로 퍼부어대는 무지막지한 폭격과 기총사격의 폭음이 들리고 있었다.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는 민족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의 동반구에는 매향리가 서반구에는 비에께스가 그렇게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주둔군의 야욕과 폭력이 어떻게 민족의 존엄을 짓밟으며 민족의 양심을 농락하고 있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이 보려거든 매향리에 가야 한다. 비에께스에 가야 한다.
전만규 대책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근처에서 급히 점심을 먹은 우리가 폭격훈련장으로 통하는 철문을 지나 갯벌로 나선 시각은 오후 4시를 막 넘긴 때였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까지도 개벌 위쪽의 언덕 위 곳곳에는 폭격훈련을 알리는 주황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 국제대표단이 현장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파악한 주한미군사령부가 갑자기 폭격훈련을 중지시켰으나 쿠니폭격훈련장 현지까지는 아직 중지사실이 통보되지 않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 대표단이 갯벌에 들어선 뒤로 약 5분이 지났을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언덕 위에서 펄럭이던 그 주황색 깃발을 황급히 끌어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데 더욱 놀랄만한 사건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그 갯벌에는 폭격훈련장에서 모아들인 각양각색 폭탄 파편들과 모의탄 껍데기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우리 국제대표단은 그 파편더미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파편더미를 내려다보던 나는 그 속에서 나뒹굴고 있는 파편 한 개에 영문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비디유(BDU)라는 글씨였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그것이 열화우라늄탄을 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전류처럼 흐르면서, 삼년 전에 읽었던 열화우라늄탄에 관한 신문기사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 가운데 '비디유'라는 영문글씨가 열화우라늄탄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브라이언 윌슨, 그리고 디아드라 그리스월드 세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 미국의 침략전쟁범죄를 반대하는 국제반전평화운동가인 브라이언 윌슨과 디아드라 그리스월드는 군사부문에 대해서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5월 하순 주한미군사령부를 곤경에 몰아넣고 폭격훈련을 중지시켰던 사건, 민중의 쿠니폭격훈련장 폐쇄투쟁에 불을 당기며 아메리카 주둔군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했던 이른바 열화우라늄탄 사용을 폭로하는 투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열화우라늄탄은 재래식 폭탄이 아니라, 무서운 방사성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저준위 핵폭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작은 핵무기(little nuke)라고도 부른다. 이 폭탄의 탄심에는 한 개당 1백47그램의 열화우라늄(depleted uranium)이 들어있다. 열화우라늄은 천연우라늄을 농축하여 원전의 연료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핵물질이다. 그런데 가소롭게도 미국은 열화우라늄탄이 핵무기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그 폭탄에서 나오는 방사능은 안전수치 기준인 70래드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약해서 사람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떠들고 있다. 거짓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미국 본토에서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 폭격훈련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땅에서만 열화우라늄탄으로 폭격훈련을 하고 있는가?
둘째, 주일미군사령부는 수직이착륙 공격기인 해리어가 1995년 12월 말과 1996년 초에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백킬로미터 떨어진 무인도 도리시마의 폭격훈련장에서 열화우라늄탄 1천5백여발을 '잘못 발사했다'는 사실을 거의 한 해가 지난 1997년 2월 10일에야 일본 외무성에게 통보한 적이 있다. 미군의 통보를 받은 일본 외무성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왜 그렇게 늑장을 부렸을까? 그것은 주일미군사령부와 일본 정부가 열화우라늄탄의 방사능 오염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걸프전 때 이라크 탱크로 오인되어 미군 공격기의 열화우라늄탄을 맞은 미군 탱크는 미국 본토로 수송되어 방사성 폐기물 취급을 받으며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걸프전에 동원되었던 미군 병사들이 겪고 있는 이른바 걸프전 증후군의 주범이 열화우라늄탄이라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있다.
셋째, 주한미군은 막대한 분량의 열화우라늄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한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이라크군의 전차부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인민군의 전차군단이다. 인민군의 전차군단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에이(A)-10 지상공격기가 열화우라늄탄으로 공격하는 것 밖에는 없다. 이처럼 주한미군은 원래 막대한 분량의 열화우라늄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키나와 폭격훈련장의 열화우라늄탄 발사문제가 일본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자 주일미군사령부는 황급히 주일미군이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분량의 열화우라늄탄까지 주한미군기지 탄약고로 옮겨놓았다. 1997년 5월의 일이다. 지금 남(한국)은 저준위 핵무기인 열화우라늄탄으로 뒤덮혀 있는 거대한 핵폭탄 저장창고가 되고 말았다.
주일미군사령부가 오키나와 폭격훈련장에서 열화우라늄탄 1천5백여발을 '잘못 발사했다'고 밝혔던 바로 그 무렵인 1997년 2월 주한미군사령부는 경기도 연천군 폐폭발물 처리장에서 1백20밀리미터 크기의 열화우라늄탄을 잘못 폭발처리했다고 인정한 바있다.
넷째, 주한미군은 매향리의 쿠니폭격훈련장에서 열화우라늄탄을 실제로 사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주간지 『한겨레21』 1997년 3월 18일자는 주한미군이 열화우라늄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 기사에서 주한미군사령부는 열화우라늄탄을 한 차례도 폭격훈련에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 바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다. 일본땅에서는 수천발을 사용한 열화우라늄탄을 남(한국)땅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발도 사용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 조국이 통일되어 주한미군이 떠나간 뒤에도 매향리의 땅과 바다는 열화우라늄탄의 방사능오염 때문에 영원히 죽음의 땅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다섯째, 방사능 오염에 의한 이른바 '매향리 증후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병리현상이 매향리 주민들 속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에 걸린 매향리 주민들도 많을 뿐아니라, 갯벌에 나가 조개를 줍는 일을 하고 있는 매향리 주민 여성들 가운데 선천성 기형아를 낳은 일이 여러 건이 된다고 한다.
얼마전 미군의 폭격을 알리는 저주스런 주황색 깃발을 끌어내려 찢어버리며 용감하게 싸웠던 전만규 대책위원장은 이른바 '군사시설보호법' 위반이라는 죄목에 걸려 지금 쇠창살 안에 갇혀있고, 주한미군사령부가 시키는대로 굴종하는 남(한국) 정부는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매향리 쿠니폭격훈련장 폐쇄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을 경찰을 동원한 악착같은 통제작전으로 몰아부쳤다. 매향리는 해와 달조차 빛을 잃어버린 듯한 짙은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땅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미국 연방정부에 꼬박꼬박 내고 있는 세금의 일부로 만들어진 저준위 핵폭탄이 내 조국의 보드라운 흙가슴을 마구 파헤치며 죽음의 방사능을 휘뿌리고 있는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 나는 치떨리는 분노를 느낀다. 주한미군이 이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짓밟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투쟁에 나선 자기 동포들을 탄압하면서 주한미군사령부의 비위나 맞추고 그 발앞에서 굴종하는 아메리카 주둔군의 앞잡이들의 민족적 배신행위 앞에서 나는 치떨리는 분노를 느낀다.
이번에 전국연합 동지들에게 배운 노래가 있다. 이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짓밟고 있는 진해의 미 해군기지 앞에서, 매향리의 쿠니폭격훈련장에서, 그리고 서울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동지들과 함께 분노의 심정을 담아 불렀던 노래 '주한미군철거가'가 다시 생각난다.
"몰아내자 몰아내자 주한미군..."
태평양 건너 미주대륙에 돌아와 있는 우리는 지금 그 노랫말을 이렇게 바꾸어 부르고 있다.
"끌어내자 끌어내자 주한미군..."
이 노래를 부르며 싸우고 또 싸우리라. 아메리카 주둔군이 성조기를 걷어내리고 태평양을 건너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이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되살리는 그날까지. (2000년 6월 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