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화와 노동] 36호 (2000.4.11) 기사용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구조적 조건
<편집자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전격적으로 발표됨에 따라 이 결과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이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이글에서는 이번 남북정상회담 발표에 따라 일차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는 한국의 정치지형에 직접적으로 끼칠 영향, 최근까지 신문지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라고 불리우는 미국의 대북정책과의 상호 연관성 문제, 이번 정상회담의 주요의제로 부각되고 있는 남북 경협사업의 실제 추진 가능성,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 전후로 한 남북관계의 변화 전망 등에 대한 간략한 분석과 평가를 담고자 한다.
1. 사실
4월 10일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다. 올해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개최하고, 이를 위한 준비접촉을 4월중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3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의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의 1차 비밀접촉을 시작으로 단 몇차례에 걸친 협상을 통해 이 같은 중대한 합의를 이루게 된 것이다.
2. 남북 정상회담의 정치적 파장
그렇지만 이 사실이 한국의 총선거가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발표되면서 한나라당을 비롯한 모든 야당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11일 서청원 한나라당선대본부장과 조부영 자민련선대본부장은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양당 공동합의문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투명한 절차와 국민적 합의도 없이 발표한 것은 민주당을 정부가 노골적으로 돕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한나라당-자민련이 공동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김한길 민주당선대위대변인은 "오히려 이런 중차대한 문제일수록 선거 이전에 알려서 국민들의 의견이 투표에 반영되도록 하는 게 옳다"면서 보다 공세적인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합의가 투표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김대중정부는 야당의 반발 역시 익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급박한 비밀협상→총선투표 직전의 전격발표→야당의 거센 반발이라는 수순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자동적인'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만약 이러한 수순대로라면 앞으로 진행될 남북 정상회담의 준비과정과 그 정치적 성과로부터 야당들은 체계적으로 배제될 것이다.
반대로 그만큼 김대중정부는 정상회담을 반드시 성공적인 형태로 마쳐야 할 정치적 부담도 커지게 된다. 실제 성사에 만약에 실패할 경우 이번 정상회담이 총선용 '정치쇼'에 불과했다는 야당의 강력한 정치공세는 차치하더라도, 정상회담 지지세력들로부터도 김대중대통령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예컨대 분명한 의제설정도 없이 조급하게 정상회담을 추진함으로써 국가대사를 그르쳤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곧장 심각한 레임덕 현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언론에 공개된 바와 같이 실제로 본회담의 의제에 대한 세부적인 합의사항들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접촉이 진행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준비과정에서 그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에 따라 김대중정부는 정상회담에 대한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남북 정상회담 그 자체의 정치적 의미를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지지를 실물적인 형태로 조직화하기 위한 시도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는 김대중정부의 출범 초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식인을 비롯한 여론 주도층에 대한 조직화로부터 총선 이후 남북정상회담 성공을 위한 거국내각의 구성 등 다양한 수단들이 강구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남북정상회담과 '페리 프로세스'
지난해 9월 공개된 '페리보고서'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다루어질 의제들의 대략적인 범위를 예고하고 있다. 페리보고서의 주관심사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완전한 중단'을 목표로 한 북미간의 단계적 협상에 대한 미국의 구체적인 협상전략이다. 공개된 요약본에서는 각 단계별 협상전술과 관련된 부분은 빠져 있으나, 큰 기조는 '북한이 압박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조치들을 지렛대로 삼은 정치협상과 함께, 정치협상의 성공/실패 유무에 구애받지 않는 방식으로 대북 군사억지력의 강화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리보고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이외의 남한의 '독자적' 관심사인 이산가족 상봉과 기본합의서 이행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지만, 북미 포괄협상의 의제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한편, 4월 11일 김대중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재결합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앞서 김대중대통령이 '북한특수'를 계속 언급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의 초점은 이산가족 상봉, 남북경협 활성화와 특히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규정한 '남북 경제공동위원회' 구성에 맞춰질 전망이다.
결국 남북간의 직접적인 정치회담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그 한계범위를 확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해결과정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남북회담 의제의 폭과 수위가 북미협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북미협상 과정에서 과거 김영삼대통령이 요구했던 바와 같이 남북관계 개선문제를 무리하게 협상 의제로 삽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미국은 부담을 덜면서 북미협상에 임하겠다는 것이다.
4. 남북 경협사업의 객관적 조건
그렇다면 김대중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서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은 어느 수준에 이를 것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객관적인 조건들을 볼 때, 김대중 정부가 비료지원과 같은 부분적인 대북 경제지원을 넘어서서 독자적인 역량으로 경제협력 사업을 확대할 여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본격적인 경제협력을 가능해지려면 그 기본전제로서 북한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기 위한 각종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함은 물론이거니와, 북한의 전력에너지, 교통 및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 투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김대중정부가 이 막대한 재원(財源)을 독자적(!)으로 동원할 역량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현재 이 자금원으로는 한국정부의 직접 지원금 북한의 대일청구권 자금 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으로부터의 차관 조달 등이 주로 꼽히며, 한국기업의 자체자금, 외국기업과의 컨소시엄 참여 등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원은 북일수교에 따르는 일본 배상금이 될 것인데(50~80억 달러로 추정됨), 당연하게도 북일수교 문제는 한국정부의 소관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현재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하면서, 각종 국제금융기관의 대북차관 제공을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미국과 북한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리스트로부터의 제외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직접지원금의 경우에는 이헌재 재경부 장관이 "정부가 당장 남북경협을 지원하는데 쓸 수 있는 재원은 대외협력기금·남북협력기금·한국국제협력기금 등 약 9천억원"이라고 말한 바 처럼 그 규모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 또한 이중에서 대부분은 이미 개발도상국과의 협력이나 각국 원조를 위해 그 용도가 정해진 자금이다.
이처럼 경협확대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 매개고리들을 미국과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이상, 이들 정부 각각의 '독자적' 관심사를 비롯해 핵-미사일 협상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목표가 만족되기 이전에 무언가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남북관계의 변화 전망
이번 합의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부터 91년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올해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추세를 살펴본다면 기존 남북관계의 변화 양상을 예고하는 징후들을 읽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7·4 공동성명에서 남북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 3대원칙이라는 고도로 정치적이며 포괄적인 합의를 도출했으나, 그 구체적인 실행과정은 오히려 파국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에 비해 기본합의서는 7·4 공동성명의 3대원칙을 다시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이 각각의 원칙을 실행할 방도를 찾기보다는, 정치·군사·경제 각 부문에서 남북간의 교류를 증진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수단과 그 항목들을 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나아가 이번 정상회담 개최 합의는 목적이나 원칙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매우 구체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남북관계가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타결을 통해 급변하게 될 가능성보다는, 각각의 사안들을 중심으로 실물적인 조치들을 수반하면서 점진적인 방식으로 바뀌어갈 수 있는 상황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의미한다.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 양측이 그러한 조치들의 한계선들을 시험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