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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경제연구원]
정상회담 이후 ‘북한특수’의 5대 조건
김석진
주간경제 567호 2000.4.19
'북한특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 북일수교 성사와 △ 우리 정부의 대북지원 기금 설치를 통해 재원이 마련되어야 하고, △ 육상운송로 개통 △ 경제특구 확대설치 △ 투자기업 경영권 보장을 통해 경협 여건이 개선되어야 한다.
오는 6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반 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과 북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만나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게 된 만큼, 이번 회담의 의의는 실로 역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북 쌍방 간에는 여전히 입장과 견해 차이가 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정상회담을 연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 차분히 따져보는 작업이 절실하다.
정상회담은 포괄협상의 일환
우선, 이번 정상회담이 그간 한·미·일 3국이 보조를 맞추어 추진해 온 대북 포괄협상의 일환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98년 8월 북한의 ‘로켓 발사체’ 발사 후, 미국은 대북정책 재검토를 통해 포용정책의 확대 추진 방침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바 있다. 이른바 ‘페리 보고서’에서 표명된 대북 포괄협상안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과 일본도 이 안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대북 포괄협상안이란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한·미·일 3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대규모 경제지원도 해주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99년 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의 방북 이래 이 안을 놓고 북한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으며, 일본도 99년 연말부터 북일수교 회담을 개시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남북회담이 된다.
올해 초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경제공동체’의 건설을 주요 국정과제로 제시했으며, 3월에는 ‘베를린 선언’을 통해 북한과의 대화·협력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간접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같은 정책에 대한 북한 당국자들의 반응은 전에 없이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총선 이후 남북회담의 본격화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간과정 없이 곧바로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대외관계 및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상당히 달라질 것임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북한당국은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교류·협력을 이끌어내야만 체제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대북 포괄협상이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이 협상안 수용의 대가가 충분치 않고 그 이행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북한은 포괄협상안을 수동적으로 검토하는 데 머무르기보다는 능동적으로 협상 판도를 바꿔 나감으로써 최대한 이익을 챙겨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아도 이번 정상회담의 초점은 경제협력 문제에 맞춰질 것으로 판단된다.
재원마련 및 경협여건 개선시 특수 가능
이와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정상회담 이후 ‘북한특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북한의 경제재건이 본격화되고 남북경협 여건이 개선되면, 우리 기업들의 사업기회가 크게 확대된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에게 특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정부와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재건 사업에 우리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북교역 및 투자사업의 대폭 확대이다. 첫 번째 방식의 특수가 실현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대북지원 재원 마련이고 두 번째 방식의 특수를 위한 전제조건은 북한당국의 정책 변화에 의한 경협여건의 개선이다. 여기서 재원 마련을 위한 핵심 조건 두 가지와 북한의 정책 관련 핵심 조건 세 가지를 합해 ‘북한특수’의 5대 조건을 설정해볼 수 있다.
200억 달러 대북지원 필요
5대 조건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선, 북한경제를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정상화하려면 대북지원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가부터 따져보자.
첫째는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는 데 드는 돈이다.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수요량에 비해 매년 200만톤 이상 모자란다. 이 부족분을 채워주는 데 드는 돈은 매년 4억∼5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둘째는 에너지 공급에 필요한 돈이다. 최근 북한이 외부에서 구입하거나 또는 지원받는 원유 및 석유량(미국의 대북지원 중유 포함)은 연간 100만∼150만톤 정도다. 경제위기 이전인 80년대 후반 북한의 원유 구입량이 연간 300만톤 이상이었음을 감안할 때, 200만톤 이상의 원유 또는 석유 추가 공급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드는 돈은 국제유가에 따라 심하게 변동하겠지만, 매년 2억∼4억 달러는 족히 될 것이다.
셋째는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즉 교통·통신망과 발전소 및 송배전망 등을 경제 정상화를 가능케 할 수준으로 개선·확충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이 비용은 계산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관해서는 ‘긴급투자’ 비용만으로도 수백억 달러는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는 남한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기본적인 건설공사는 북한 자체 능력으로도 가능하고 북한의 인건비가 싸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비용을 이보다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비료, 정유, 제철, 기계, 화학 등 주요 기간산업 부문의 재건에 드는 비용이다. 참고로 북한은 2개 비료공장 정상화에 필요한 자금을 1억 달러로 평가한 바 있다.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 정상화에 필요한 자금은 최소한 100억 달러 이상 필요할 것이다. 10년 계획으로 사업을 진행하면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다는 계산이다.
이제까지 분석한 바를 정리하면, 북한경제 재건을 위해 외부에서 투입되어야 할 자금은 연간 2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지원 기간은 10년 정도는 잡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필요한 대북지원 자금은 총 200억 달러 정도라는 결론이다. 이는 최소한 이 정도 경제지원은 받을 수 있어야 북한이 포괄협상안을 수용할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제1조건: 북일수교 성사
그렇다면 이 돈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우선, 국제사회에서 나올 대북지원 가운데서는 일본정부의 지원이 가장 유력하다. 일본정부는 북일수교가 성사될 경우 북한에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일국교 정상화 때의 경험과 90년대초 북일수교 교섭과정에서 나왔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대북 배상금은 50억∼100억 달러라는 게 통설이다.
그밖에 미국이나 국제기구의 지원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규모는 훨씬 작을 것이다. 최근 수년간 미국정부는 대북 중유 지원과 식량 지원에 매년 1억∼2억 달러를 내왔다. 미국 정치의 속성과, 과거 제네바 합의 후 경수로 건설비를 한국과 일본에 떠넘긴 경험을 고려할 때, 미국정부의 대북지원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국제기구는 어떤가?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의 차관 제공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 조건은 여러 모로 까다롭다. 본격적인 차관 제공은 북한이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경제체제 개혁에 나서야만 가능하며, 그 경우에도 시일이 오래 걸린다. 이런 저런 편법을 쓰면 단시일 내에 자금 지원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런 식으로는 대규모 자금은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제2조건: 우리 정부의 대북지원 기금 마련
그렇다면, 대북지원 필요 자금에서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우리 정부가 낼 수밖에 없다. 이를 10년 계획으로 총 100억 달러로 보면, 매년 1조원 정도의 대북지원기금을 재정자금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앞에서 계산한 대북지원에는 경수로 지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 정부는 경수로 소요공사비의 70%인 3조 5천억원(9년간 매년 약 4천억원)을 부담하기로 되어 있다. 결국 이를 포함하면, 매년 1조 5천억원 가까이 필요하다. 국민 1인당 매년 3만원 이상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세저항이나 정치적 논란이 있겠지만, 우리 경제가 앞으로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우리 경제규모상 이 정도의 부담을 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제3조건: 육상운송로 개통
경협여건 개선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육상운송로의 개통이다. 현재 남북교역은 인천-남포, 부산-나진 등 항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에 따른 물류비 부담이 너무 크다. 이를 도로, 철도 등 육상운송으로 바꾸면, 물류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대북사업을 해온 업체들도 한결같이 이 점을 강조해 왔다. 현재 우리 기업의 남북경협에서 주된 사업방식은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위탁가공이다. 당 연구원이 대북 위탁가공 사례를 기준으로 비교 시산해 본 결과, 육상운송로가 뚫리면 물류비를 현재의 1/3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위탁가공 제조원가 절감효과는 의류제품의 경우 10%에 가깝고 전자조립 부문은 2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자조립 부문의 원가절감 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전자조립의 경우 물류비 비중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남북간 물류여건이 개선되면 경협 유망사업 부문이 현재의 의류 및 기타 섬유제품 일변도에서 전자조립 등 기타 부문으로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상운송로 개통을 위해서는 주요 철도와 도로 중 휴전선 때문에 끊어진 부분을 이은 다음 북한 지역 내 부분을 보수해야 하는데, 일단 경의선 철로와 서울-평양 간 도로만 개통하면 된다. 그리고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는 지점인 판문점 부근 휴전선 지역에 교류센터 또는 물류센터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북한당국과 합의만 볼 수 있다면, 이를 위한 투자자금은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공동으로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조건: 경제특구 확대 설치
남북경협이 크게 활성화된다는 것은 북한이 개방의 폭을 확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개방의 방식은 여전히 경제특구를 통한 제한적 개방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 유일한 경제특구인 나진·선봉은 남한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에 투자대상지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본격적인 남북경협이 이루어지려면, 황해도나 평안남도 등 남한과 육로 연결이 용이한 곳에 제2, 제3의 경제특구가 추가로 설치되어야 한다. 경제특구 방식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효율적인 개발모형이다.
첫째, 경제특구에 투자를 집중시킬 경우 북한당국의 입장에서 관리가 용이하다. 둘째, ‘군집효과’를 통해 해당 지역에 모이는 기업들 간의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셋째,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을 경제특구 중심으로 진행함으로써 개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제5조건: 투자기업 경영권 보장
‘북한특수’의 마지막 핵심조건으로, 투자기업 경영권의 실질적 보장을 들 수 있다. 북한의 외국인투자 관련 법규상으로는 대북투자 기업이 경영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제도와 실질적 관행이 괴리되어 있는 것이다. 또 남한 기업에 대해서는 제약이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제약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대북사업은 수익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제대로 대북사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우리측 경영진과 기술진이 북한에 상주하면서 북한측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촉하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북측 근로자들의 채용과 해고, 제품 판로의 결정, 추가 설비투자 또는 투자사업 청산 등 경영 관련 주요 의사결정에서 적어도 투자지분만큼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경제특구에서만이라도 이러한 사항이 보장된다면, 대북 비즈니스는 해볼만한 사업이 될 것이다.
노동집약 제조업과 사회간접자본 유망
이제 우리 기업들은 정세의 급진전 가능성에 대비해 경제성 있는 대북 프로젝트들을 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안은 많은 기업들이 이미 갖고 있다. 제네바 합의 이후인 지난 95∼96년 한창 남북경협 붐이 불었을 때 많은 기업들이 대북사업안을 들고 북한측과 협의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의 미비로 그 중 극히 일부밖에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북사업에서 일차적으로 유망한 분야는 노동집약적 제조업 분야이다. 의류, 신발, 완구 등 전통적인 경공업 분야와 가전제품 및 전자부품 등에서 노동집약적인 공정은 모두 북한 진출을 통해 이익을 낼 가능성이 크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대형 장치산업에 비해 초기 투자자금이 작게 들어간다는 장점도 있다. 제품 판로는 일부는 남북한 내수, 일부는 제3국 수출로 잡을 수 있다. 북한의 대외관계가 정상화되면 수출 길은 쉽게 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이후 대북지원이 본격화된다면,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도 역시 유망할 것이다. 재원만 마련된다면, 이 부분에서 건설자재와 장비 및 기계설비 수요와 설계 및 엔지니어링 수요를 기대할 수 있다. 관련 자재와 장비를 현지생산하는 프로젝트도 고려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북한 경제재건 기간인 10년 정도는 주로 노동집약적 제조업 투자와 사회간접자본 및 기간산업 재건 프로젝트 참여가 주된 대북사업 방식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정치적 타협과 결단 필요
앞에서 말한 5대 조건이 충족된다면, 대북 비즈니스는 해볼 만하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모두 우리 정부가 쉽게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들이다. 이들 조건의 충족을 위해서는 북한과 한·미·일 4개국 정부의 정치적 타협과 결단이 요구된다.
더욱이 이들 조건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며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진다 해도 대북 비즈니스가 수익성을 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해외사업이란 제반 사업여건이 잘 갖추어진 국가를 상대로 해도 쉽지 않은 법이기 때문이다. ‘북한특수’에 이르는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하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