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논문이 발제되었습니다. (발제 순서 순)
1. '젠더화된 계급투쟁 : 성정치와 계급정치의 조우" / 권현정 선생님
2. 여성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 이미경 선생님
(파일이 따로 두개이니 모두 다운받으시기 바랍니다.)
각각의 내용은 발제문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질문으로 나왔던 부분도 중간 중간에 녹여넣지요) 대충 설명을 하겠는데, 발언자의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으니 주의해보시압.
권현정 선생님의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실린 [외채-자연위기에 대한 법인자본적 해법: 남성적 협상과 젠더화된 계급투쟁/ 테리사 터너, 크레이그 벤저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터너의 글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진행되는 계급투쟁과 여성들의 투쟁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터너가 언급하는 대로 '행복한' 만남이 가능할지는 속단할 수 없으며 또 다른 젠더맹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권현정 선생님의 글에서 가족 임금 논쟁과 관련해서는, 이전에 권현정 선생님이 아침해 가득핀땅 월례특강으로 강연한 내용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이 홈페이지 자료실에도 자료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터너의 입장은 SF의 이중체계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권현정 선생님은 '가부장제'라는 개념이 한계가 많다는 점을 누차 지적하고 있습니다.
(권현정 선생님은 가부장제 개념이 페미니즘 정치를 궁지에 몰고 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초역사적인 가부장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억압의 양상이 분석되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개조된' 정신분석학적 방법이 유효할 것이라는 논지로 말씀하시더군요.)
19세기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남성)노동자들은 가족임금-여성과 아동에 대한 보호입법을 쟁취하려합니다. 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자본주의=가족의 해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역사적 한계를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비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봐야한다는 뜻이겠죠) 당시 상황에서 페미니즘적 성정치의 부재 속에서 BG적 성정치가 주도하면서 공장입법을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쟁점은 현재에도 재연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럼 보호입법에 대한 페미니즘의 입장은 어떠해야할 것인가라는 질문. 이에 대해서 보호입법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남성들에게까지 확장해야한다는 입장을 가져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답변. 유해위험 사업장에 대한 여성노동 규제를 풀어준 노동법 개악 조치 같은 경우에, 오히려 여성들에게 유해위험한 것은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그것을 확대하는 투쟁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말씀이죠. (정리자 주 -- 작년 노동법의 모성보호 조항 관련 논쟁을 상기해보시면 될 듯합니다..)
8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은 분할되면서 주변화(레즈비어니즘, 문화적 페미니즘 등)되거나 주류화(신자유주의와 공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후퇴와 페미니즘적 성정치의 부재 속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거세게 이루어집니다. 가족의 해체, 가족임금의 소멸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 위기의 원인을 무시하고 페미니즘과 복지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여성을 다시 가족으로 돌려보내고 복지국가를 해체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인데, 현실성이 없는 것이죠. 하지만 가족의 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이 이를 지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페미니즘의 후퇴와 신보수주의에 의한 공백 메우기 -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싫어한다')
이를 비판하는 데 주류화된 페미니즘은 무력합니다. (따라서 다른 페미니즘 전략이 필요한 것이겠죠.)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의미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의 결론을 내립니다. 페미니즘 운동의 후퇴 속에서 주류화한 페미니즘은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노동자 계급(남녀)의 이해를 위해 제대로 투쟁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한편, 이미경 선생님은 에콰도르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발제문의 1페이지) 에콰도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운동을 위한 행동"이라는 조직을 통해 3.8여성의 날에 시위를 주도하고 초민족적 금융기관들에 대해 항의투쟁을 합니다. 금융세계화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였던 셈인데, 한국의 여성운동의 모습과 비교해보자는 겁니다.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의 3.8여성의 날 행사, 일부 여성단체들이 주도한 IMF 금모으기는 에콰도르와 극명하게 비교됩니다. 한국에 페미니즘 운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있냐는 질문까지 하게 만드는 상황이죠.
주류 여성운동의 국제주의가 베이징 여성대회(95년)도 문제적입니다. 여성들간의 연대보다도 힐러리의 역할(민주당-신자유주의-주류여성운동 이라는 연결.)이 부각된 이 대회에서 "인간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이다. 여성의 권리는 확고하게 인간의 권리이다"라는 선언이 채택됩니다. 성차의 페미니즘(이리가레)와 명확하게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신자유주의와 공명하는 주류여성운동은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중심에 놓고 사고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부-성평등부-의 창설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미경 선생님은, 하지만 '기회'자체의 축소 속에서 그런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중간계급의 세계화의 하나의 계기로서 진행된 이 대회에서 제3세계 여성운동은 주변화되었다고 합니다.(주변, 반주변의 여성운동이 중심국 주류여성운동에 지원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도 연관됩니다)
한편, "위안부" 문제도 이 대회에서 언급이 되었는데요, 이렇게 되면서 여성운동계는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데, 이렇게 되면서 민족주의 세력이 이탈하고 이 운동은 국내에서 쇠퇴하게 되었다는군요.
한편, 글에 보다 보면 여성들에게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불가능하며 세계적 연대(global solidarity)가 필요하다고 제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nationalism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inter-nationalism는 아니라는 것이죠.
중심부 국가들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페미니즘에 도전이라는 챕터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노동조합 페미니즘, 제도화된 주류 여성운동을 언급합니다. 여기서는 각국에서 전투적인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2세대 페미니즘의 재출현에 선행한 현상을 언급하는 데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노동자 계급 페미니즘은 경제주의-개량주의적 경향을 띄게되는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역시 그 한계라는 것도 전체 노동자 운동의 경향 속에서 봐야합니다만.), 제도화된 주류여성운동은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피착취자인 노동자 계급 여성이 누구에 대해서 평등해야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남성노동자'를 타겟으로 합니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도 이미 피차취자였던 것이죠.(따라서 '평등'은 불충분한 목표가 됩니다.) 게다가 이들이 선호한 법정투쟁은 노동자 운동 일반의 매커니즘(노동조합을 통한 집단적 투쟁으로 요구를 쟁취하는 방식)을 형해화하였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답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이 '여성화'되는데요, 이 말은 이전에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이 일반화된다는 이야깁니다. 중심의 노동자도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주변화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제1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제3세계가 발견됩니다.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운동에는 주변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오히려 시사점을 줍니다.
결론에서 제출되는 것은 남한의 '페미니즘 유행'은 '뒤늦은 것'이라는 지적을 합니다. 이전에 진행된 강좌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중심부에서 이미 쇄퇴한 2세대 페미니즘이 유행한다는 것,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들이 처하는 문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뒤늦은 '유행'은 학부교양 강좌에 여성학이 확산된 것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에 편승, 신자유주의와 공명하면서 성공적으로 상품화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있는가라는 질문까지도 제기될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이 새로 출발해야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모델을 남한의 현실에서 찾기는 쉽지 않은 것같다고 하시더군요.(시사적인 제3세계 여성들의 투쟁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아직 과천연구실의 작업도 '비판'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족제도에 대한 문제에서는, 가부장제 가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더군요. (미셀바렛,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등 참고) 가족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으로 존중될 수는 있겠지만 일반화된 대안으로 제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가족의 역사성에 대해서 사고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노동력 재생산 단위로서 존재하는 가족을 다른 것으로 변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밖에 [평등이냐 차이냐]라는 쟁점은 허구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생리휴가 논쟁) [평등/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차이]의 대당이 맞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죠. 동일성에 입각한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입각한 평등이라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럼 발제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