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삼성전자 연쇄 투신사망 사건을 통해 본 전자산업 노동실태와 개선방안
다단계 생산시스템에 갇혀 버린 전자산업 노동자들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국내 전자산업 대기업들은 4개의 세트로 이뤄진 생산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국내 생산’과 ‘국외 생산’, ‘국내 위탁가공생산’과 ‘국외 위탁가공생산’이 그것이다. 국내외 동시 생산이 가능한 구조인 셈이다.
이는 자국 생산을 포기하고 대만이나 동유럽 국가 등에 위치한 전문위탁생산업체(EMS)에 생산을 맡기고 있는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의 행보와는 다른 것이다. 이들 국가들이 기술개발과 영업에만 주력하면서 이른바 ‘공장 없는 제조업체’로 탈바꿈하고 있는 동안에도 국내 업체들의 국내외 공장들은 거침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국내 전자산업 재벌기업들이 ‘해외의 저임금·무노조 지역’과 ‘국내의 저임금·무노조 지역’으로 볼만한 산업단지들을 배후 생산지로 이용해 국내외를 아우르는 생산체계를 구축한 것이 이러한 차이를 낳는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세계적인 휴대폰 업체인 노키아가 자국인 핀란드에서의 저임금 생산은 불가능하지만, 삼성전자는 기업 내 수직계열화와 생산단가 절감을 위한 다단계 하청구조, 무노조 등의 조건을 활용해 얼마든지 국내 저임금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삼성대책회의와 금속노조 공동 주최로 9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삼성전자 연쇄 투신사망 사건을 통해 본 전자산업 노동실태와 개선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최근 잇달아 발생한 삼성 노동자들의 투신자살의 배경에는 국내 전자업체들의 ‘쥐어짜기 식’ 생산시스템이 버티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쥐어짜기 생산시스템이 부른 노동자의 죽음
자동차산업의 생산물은 자동차다. 하지만 전자산업의 경우 생산물을 특정하기 어렵다. 한국표준산업분류(KSIC)에 따르면 정보통신산업(ICT)은 크게 반도체 제조업·전자부품 제조업·컴퓨터 및 주변장치 제조업·통신 및 방송장비 제조업·영상 및 음향기기 제조업·마그네틱 및 광학매체 제조업 등으로 구분되고, 분야별로 다시 세분된다. 손톱만한 반도체칩부터 양문형 손잡이 냉장고까지 최종 생산물이 매우 다양하고, 수출 효자 종목이 다수 포함돼 있다. 세계 제조업 시장에서 국내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IT제품(10.0%)은 자동차(10.4%)와 자웅을 겨루는 수준이다. 반도체(4.0%)·디스플레이(0.3%)·전자부품(0.8%)도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생산체계는 다단계 공급사슬로 얽혀 있다. 대표적인 수출 효자 품목인 휴대폰 업종의 경우 핵심부품의 80%가량을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하고, 나머지 부품은 대기업 계열사나 중소제조업체에서 만들어진다. 해외 부품에 대한 의존 비율이 높다보니 휴대폰 한 대를 만들더라도 국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많다. 이 때문에 대기업들은 하청업체들에게 저가 납품을 요구하며 비용을 상쇄하는 실정이다.
대기업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사이에는 다단계 하도급구조가 형성돼 있다. 수많은 하청업체들이 규격화된 부품 덩어리인 ‘모듈’을 생산하면, 조립전문업체(EMS)에서 반조립제품으로 가공되고, 삼성전자나 LG전자·팬택 같은 세트업체가 완제품을 시장에 선보이는 식이다. 모듈 생산과정에서 핵심 모듈은 대기업 계열사가 직접 생산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부품 모듈 조립 과정 대부분에 계열사가 포진해 있다. EMS 업체의 비중도 커지고 있어, 최근에는 EMS업체에서 완제품을 납품하는 비중이 늘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대기업 전자업체
기술집약적 성격과 노동집약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전자산업 제조업체에는 젊은 여성노동자의 취업비율이 높다. 섬세한 손작업을 하는 데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지난 2006년 전기전자 밀집 산업단지의 임금 수준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반월공단 평균 월급 131만원, 시화공단 119만원, 남동공단 127만원 등 임금 수준이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에 초과근로수당이 붙은 액수가 이 정도다.
장시간 노동은 원청업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월 투신자살한 삼성전자 노동자 고 김주현씨는 입사 1년 만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인은 하루 12~14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식사를 거를 정도로 휴게시간을 보장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휴일에도 쉬지 못할 때가 많고, 밤에도 일이 있으면 회사로 달려가야 했다. 고인의 기본급은 100만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초과근로수당이 붙어 매달 300만~400만원의 월급이 지급됐다. 노동계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자살은 명백한 산업재해이고 삼성의 책임”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전자산업의 노조 조직률은 높지 않다. 국내외 동시생산시스템과 외주하청시스템은 전자산업 밀집 산업단지를 저임금·무노조 지역으로 고착화하고 있다. 자동차업종보다 훨씬 앞선 70~80년대 모듈 생산체계가 정착돼 범용 모듈과 규격 제품이 대다수인 전자산업의 특성상 하청업체는 원청업체에 대한 교섭력을 갖기도 어렵다. 하청업체에 노조가 생겨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원청업체는 공급선을 교체하면 그만이다. 노조의 싹조차 트기 어려운 토대인 것이다.
노조 조직화, 대형부품업체를 공략하라?
이처럼 원청업체가 자사의 노무관행을 납품업체에 강요하는 경우, 납품업체 노조는 간접적인 탄압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와 관련 한지원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원청업체 노조의 민주화를 바탕으로 대형 부품하청업체를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노조를 설립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전자나 LG전자의 노동자수는 소수에 불과하고 노조 조직화 양적 확대는 부품 하청업체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재벌 대기업의 생산과정에 직접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대형 부품업체에 노조가 설립되면, 원청을 상대로 일정부분 협상력을 가질 수 있고 전자산업 노조 조직화의 주요한 고리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캠페인성 활동만으로는 노조 조직화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성희 교수(고려대 노동대학원)는 “대공장 직·간접 노동자에 이어 중견부품업체를 조직화했던 자동차 산업의 진로를 따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섭력이 없는 하청업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조직화 전술은 사회적 캠페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며 “삼성전자의 산재사망 사건과 노조 조직화 탄압, LG와 하이닉스의 실질적 무노조화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와 함께 인력구조의 중층적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자산업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이정호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사업실장은 “중소기업의 절반가량이 부품을 제조·납품하는 하청업체인 상황에서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 거래관행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며 “불공정한 거래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구은회 기자 press79@labortoday.co.kr
2011-03-10 오전 8:33:09 입력 ⓒ매일노동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