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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24일에 이집트는 역사적인 첫 자유대선을 치렀다. 무슬림 형제단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자유와정의당(Freedom and Justice Party)의 후보인 마호메트 모르시(Mohamed Morsi)와 독립 후보로 출마한, 공군 장군이며 무바라크 시절 총리였던 아흐메트 샤피크 (Ahmed Shafik)가 각각 24.78%와 23.66%의 득표율을 획득해 1위와 2위를 차지하였다. 두 후보는 6월 16~17일에 치를 결선에서 대통령직을 위해 경쟁하게 된다. 이집트 국민은 이슬람교 정치와 무바라크 시절의 보수지도자 중에 한쪽을 선택할 것이다.


진보 후보의 실패

압도적으로 득표한 두 후보 외에 패배한 후보들에 대한 언론보도는 별로 없다. 특히 노동계가 지지한 4명의 진보후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변호사와 인권활동가인 카리드 알리(Khaled Ali), 진보선거연합인 혁명은지속된다(Revolution Continues Alliance)의 후보인 아부 알-이즈즈 알-하리리(Abu Al-Izz Al-Hariri), 나세르주의 존엄당(Dignity Party)의 후보인 함딘 사바히(Hamdeen Sabahi)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타가므무당(Tagammu Party)의 후보인 히샴 바스타위시(Hisham Bastawisy)는 여론조사에서 크게 뒤떨어졌고 5월 23~24일 선거에 20% 이상 득표한 사바히 후보 외에는 모두 2%도 득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 이집트독립노조연맹(EFITU)에 의해 창당된 민주노동당(DWP)은 계급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금지하는 현행 정당법 하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아예 후보를 내지 못했다. 작년부터 시작된 이집트 노동계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아직까지 많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으며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의 민주화와 노동운동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의 노동자가 현재 진행 중인 민주화에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1~2월에 무바라크정권을 전복한 1.25혁명에 노동자의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2월 9일부터 다양한 업종(섬유, 군용품, 우편, 운송, 병원, 행정 등)에 종사하는 공공, 민간부문 노동자들 수만 명이 작업을 중단하고 길거리에 나섰다.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국민은 이러한 노동자의 행동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권을 압박하는 데 파업이 갖는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파업이 한창 진행 중인 2011년 2월 11일에 무바라크는 사임해 카이로를 떠났다.

대부분의 파업은 공식 노조 틀 밖에서 진행되었다. 작년까지 유일한 노총이었던 이집트노조총연맹(ETUF)과 그의 산하조직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표하기보다 독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노동자의 투쟁을 통제하고 탄압하는 기능을 하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노동자들과 국민들이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는 가운데서도, ETUF는 “인민과 조국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지지”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25혁명 전부터 시작된 노조 민주화운동

2월 9~11일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총이라는 공식체계 밖에서 그들을 대표할 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지도를 따랐다. 이러한 투쟁방식은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해 왔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정책들, 예를 들면 의료보험과 연금의 임금 공제액이 두 배로 상승한 데 반대하며 도로를 막고, 방화를 하거나 열차를 부수는 등 극단적인 전술을 동원하여 투쟁한 바 있다.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는 17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1,900건이 넘는 파업 등 쟁의 행위에 참여하였고, 이때에도 2월 9~11일 파업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4년부터 이어진 파업은 2008년 4월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절정에 달해 1.25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 4.6 청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대중투쟁과 더불어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집트사회에 저항의 문화를 심었”고, “시민권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FITU의 결성과 확대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행동은 민주노조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 5만 5천 명의 지방세무원 파업의 결과, 경제적 요구를 쟁취했을 뿐 아니라 부동산세무원 독립노조라는 이집트노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노조가 사상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25혁명의 초기인 1월 30일, 독립 노조들과 사업장위원회가 이집트노총으로부터 독립된 이집트독립노조연맹(EFITU)의 결성을 발표했다. EFITU의 설립과 독립적인 발전은 이집트 민주화 과정의 핵심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개의 작은 독립노조와 비공식 노동자모임으로 시작된 EFITU는 현재 160만 명 조합원과 100개 이상의 산하조직을 포괄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미조직 어업노동자, 화물트럭노동자, 슈퍼매점노동자, 간호사와 보건의료노동자, 온라인기자, 도자기 장인, 채석장 노동자들이 독립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수천 명의 노동자는 ETUF에서 탈퇴하고 있다. 지난 3월에 버스 노동자, 요금징수 노동자, 기사 등은 ETUF에서 탈퇴해 대중교통당국노동자 독립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지난 일 년 간 노동자의 투쟁도 활발했다. 2011년에 민간부문, 공공부문, 비공식부문에 걸쳐 200회 이상의 파업이 기록되었다. 이 중에 교사, 의사, 운수와 섬유노동자의 파업은 특히 중요했다. 또한 수많은 노동자대회, 행진, 단식투쟁, 점거투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투쟁에 EFITU와 다른 독립노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노동자의 요구

노동자의 요구는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 체계적 문제를 포함한다. 대부분 파업은 임금인상, 체불임금 지급, 노동안전 조건 개선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라는 요구로 시작했다. EFITU는 출범부터 215달러의 최저임금과 최저임금 10배로 최고임금을 제한할 것을 요구해왔다. 최근에 1984년부터 6.5달러에 머물었던 최저임금은 125달러로 정해졌고 최고임금 제한(최저임금 35배)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EFITU의 요구가 부분적으로 쟁취되었지만 싸움은 지속되고 있다.

이집트의 독립노조들은 또한 민영화저지와 주요산업 재국유화, ETUF 해체와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앞의 두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에 법원 투쟁을 통해서 무바라크 시절에 민영화된 여러 기업에 대해 재국유화 판결을 쟁취하였다. ETUF은 아직까지 정부의 보호 아래 존재하지만 많이 약화되었고 많은 노동자의 신뢰를 잃었다.

노조탄압 중단은 사활적인 요구다. 2011년 3월에 과도군부정권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파업이나 집회를 불법화하고 위반자에 대한 징역형과 벌금을 규정하는 법을 시행했다. 1.25혁명 후에 수많은 노조활동가들이 재판을 받게 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이에 더해 정부가 통제하는 주요 언론은 노동운동에 대한 악선전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의 탄압과 언론의 공격은 노동운동의 정당 활동 시도가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다.


조직화와 노동운동 강화, 정치세력화로 가는 길

이집트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와 선거운동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강화되기 전까지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 정부의 탄압에 맞선 투쟁,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와 독립노조 설립과 강화는 보다 우선적인 과제다. 이 분야에서 이집트노동자들은 이미 많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보다 더 발전해야 의미 있는 정치세력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노총을 건설해 어용노총에 도전하고 보다 평등한 경제적·사회적 체계를 추구함으로써 벌써 이집트 민주화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실패한 역사를 평가하고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시작하려는 한국노동운동은 이제 막 민주노조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한 이집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