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특파원리포트]일본 '입맛대로' 역사해석 출처 : 한겨레신문 2000. 8. 23 -------------------------------------------------------------------- "과거청산은 배상아닌 경협방식 마땅” 역사에서 가정은 공허해 보이지만 무의미하지는 않다. 만일 2차대전 뒤 한국이 대일 교전국 및 연합국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면 한민족의 역사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북일 국교정상화교섭 10차 본회담이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다. 회담 핵심의제는 일본의 과거청산문제이며 그것은 곧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문제다. 일본은 배상은 교전국간의 문제로 북한은 교전국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배상은 안되며 보상도 불가능하다고말한다. 대신 청구권이나 경제협력 형식을 고집한다. 이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교섭 방식을 그대로 북한에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배상이냐 경제협력이냐는 문제는 지불자금의 규모와 성격은 물론 과거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이 대북교섭에서 원용하려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앞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에서 미국은 처음엔 한국을 대일 교전국이자 연합전승국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49년 12월에 작성된 조약 초안의 연합국 명단에는 한국이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최근에 비밀해제된 미 국립공문서관 자료에는 그 이유가 기록돼 있다. "한국=10년 이상이나 저항운동이 있었던 해방영토로서 일본과 활발하게 싸운 공적이 있다. 조약이 중요한 이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참가권리가 당연히 있다고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조약체결 직전 한국은 교전국 및 전승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체결 5개월 전인 51년 4월23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총리는 미국쪽 조약초안 담당 존 포스터 덜레스 특사를 만난다. “일본 국내의 조선인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다. 그들이 평화조약의 수혜자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일본 국내 조선인은 재산, 손해배상 등에 대해 연합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획득, 행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이 백만명 가까이 있는 일본은 터무니없는 규모의 청구금액에 묻혀버릴 것이다.” 3개월 뒤인 7월9일 덜레스 특사는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를 불러 한국이 샌프란시스코조약 조인국에서 제외됐다고 통보했다. 양 대사는 항변했다. “왜 우리가 조인국이 못되는가. 우리 (상하이)임시정부는 2차대전 전부터 줄곧일본과 싸워왔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공산화에 이어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미국은 공직에서 추방했던 일제 전범자들을 대부분 복귀시키고 경찰예비대를 창설해 일본의 재군비 길을 텄다. 미국은 이런 정세변동을 기화로 일본을 점령국이 아니라 동서냉전 아시아전략의 거점이자 동맹국으로 성격을 전환했고 이 일본거점 강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을 그 종속체제로 전락시켰다. 한일 국교정상화교섭이 그해 10월20일 도쿄 점령군총사령부(GHQ)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이를 상징한다. 그로써 한민족의 항일투쟁은 깨끗이 묵살당했다. 일본은 한때 청구권은 양국 모두 서로 주장할 수 있는 만큼 상쇄됐다고 주장하다가 강화조약 체결 뒤 비로소 자국의 청구권을 포기하고 자금제공 교섭에 나서지만 식민지 사죄는 동아시아 냉전교두보 구축에 다급했던 미국의 강요로 마지못해 응했고 자금도 청구권보다는 경제협력적 성격을 강조했다.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과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대한 `배상'은 현금이 아니라 물품과 용역 위주여서 이들 나라의 일본 시장화 및 대일 경제종속을 구조화하고 일본의 전후부흥을 뒷받침했다. 한민족 근현대의 불행과 고통은 내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이처럼 대국들간의 일방적 흥정에 의해 초래된 면이 강하다. 중국, 시베리아 항일무장세력들이 중심이 된 북한은 지금 이런 과거를 자국에게도 꼭같이 적용하려 하고 있는 일본에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이 현재 약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과거역사 자체를 아예 그들 입맛대로 조작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다. 도쿄/한승동 특파원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