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와 노동> 55호 2000. 8. 22
2000년 통일대축전, 무엇을 남겼는가
사회화와노동 편집팀
올해 8·15 행사는 최근 여느 해에 못지 않게 그 준비과정에서 많은 논란을 거쳤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행사 명칭과 준비체계의 구성, 그리고 정부·민화협 등과의 공동행사 참여 문제 등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논란을 반영한 듯, 8·15 전야제에는 최근 몇 년간 열렸던 어느 집회보다 많은 3∼4만명의 인원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일날 행사에는 전야제에 운집했던 인원들이 각기 흩어져 별도의 프로그램에 따른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8·15 행사의 명칭은 모두 네차례에 걸쳐 변화되었다. 최종적으로 7월 24일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00년 통일대축전'에서 '남북공동선언 관철과 민족의 자주·대단결을 위한 2000년 통일대축전'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는 민주노총의 견해가 크게 반영되었다. 민주노총 측은 당시 시점에서 롯데노조·사회보험노조 등과 같이 커다란 현안에 직면하여 있었다. 따라서 김대중정부가 총력투쟁의 핵심적 표적인 마당에, 남북공동선언의 지지(이행)를 표명하거나 나아가 정부·민화협 등과의 공동행사를 마련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가 8·15 민화협 행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러한 준비위 공동의 최종적 결정 사항은 실제로 퇴색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8·15 행사의 전체적인 과정을 살펴볼 때, 이러한 명칭 변경이 갖는 정치적 함의에 대한 토론은 매우 불충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노총이 밝힌 근거들은 단지 노동조합의 처지에 따른 '현실적'인 이유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김대중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본격적인 논거로까지 이해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만약 김대중정부가 對노동정책을 유화적으로 구사한다면, 대북정책도 지지 가능한가?)
남북공동선언, '지지·이행' Vs '관철'?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까지, 민중운동 진영은 대체적으로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공유하였다.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이 '페리프로세스'로 집약되는 바, 미국의 대북정책의 큰 틀 안에서 작동된다는 점이 비판의 결정적인 논거가 되었다. 페리보고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것을 댓가로 하는 '프로세스'의 구체적인 과정은 사실상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도리어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반북反北적인 논리구조를 내장한 것으로 평가된 것이었다. (또한 이는 남한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와 직접적으로 결합된다.)
그렇다면, 김대중정부는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함과 동시에 이와는 역방향을 지향하는 정책을 구사하게 되었는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대통령 본인이 주요 석상에서 말한 내용들을 살펴본다면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당장에, 김대중대통령이 서울공항에 도착하여 밝힌 '방북성과 대국민보고'에서 남북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2항은 우리가 주장해 온 남북연합입니다"라고 단언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한미일 3국공조와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이전의 정책을 강력하게 재확인하는 발언들이 매우 의도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남북공동선언이 기존에 김대중정부가 추진하던 대북정책의 맥락에서도 충분히 성립가능하다는 점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문제이다. 그리고, 그만큼 이번 선언은 남북 양측의 현실적인 이해 타산이 교차하는 다의적인 텍스트로 이해하는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김대중정부 역시 자신의 논거에 따라, 남북공동선언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산가족상봉이나 경의선 철도 복원 등의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그러한 여론의 분위기를 선도하고 있는 양상이다.
따라서,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이 마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오직 유일한 방안으로 대세화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남북공동선언의 지지 또는 관철 등의 구호는 보다 엄밀한 의미로 제시되는게 요긴한 문제였다. 다시 말해, 이번 8·15 행사에서 지지(이행)를 주장하건 혹은 관철이라고 주장하건, 그 정치적 또는 전술적 함의가 분명하게 제기되지 못한다면, 이는 '자주적 평화적 민족통일'을 지지한다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 이상을 의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면한 투쟁 대상 및 목표의 초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며, 어떤 슬로건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의 모호함.)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이번 8·15 행사는 외형적으로 통일운동에 있어서의 통일성의 기운을 높인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더욱 어려운 과제를 확인시켰다는 점이 짚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은 움직이기 어려운 나라이다"?
"대북관계 개선에서도 보듯, 미국은 움직이기 어려운 나라이다." 이는 미국과의 SOFA(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협상의 수석대표였던 송민순 외교통상부 북미국장의 발언이다. 최근 몇 일 간격으로 연쇄적으로 발표된 'SOFA 개정협상 한·미 공동발표문'(8.3)과 '매향리 종합대책'(8.18)의 성격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얼마전 김대중대통령 본인이 "반미는 결코 국익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한미관계 상의 오랜 기간 동안 잠복되어 왔던 쟁점들이 일거에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래지향적인 한미관계의 수립"을 위해서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몇가지 낙후된 요소들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한국정부 측의 요구에 대해 미국은 매우 완고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다. 중요한 우방국가인 한국정부에 대해,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어찌보면 부차적인 양보조치를 의미하는 사안에 대해서조차 물러설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심지어 적대관계 하에 있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미국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왔으며 또한 앞으로 취할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리보고서와 미국의 대북정책이 기본적으로 반북적인 논리구조에 입각하여 매우 까다로운 협상의 로드맵을 설정한 것이 분명할지라도, 북한이 이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데에는 역사적이며 구조적인 원인들이 존재한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한 측의 핵심적 관심사는 북미관계의 정상화(미국의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와 북일수교(대북배상금 지불) 문제가 될 터인데, 이러한 사안들이 미국-일본-한국의 공조체제 하에서 고리와 고리로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미-일 공조체제 하에서는, 북한이 그 협상의 틀을 거부할 경우 북일수교 협상의 진행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심적으로 요구하였고, 남북공동선언의 지지(이행) 촉구에 담긴 뜻은 이 점에 무게중심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북미관계 정상화로의 순조로운 진행.)
하지만, 그만큼 이 과정은 한반도문제에 있어서의 미국과 한국 측의 주도력을 구조적으로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동북아 주둔 미 군사력의 구조조정에 따르는 조치들을 그것으로부터의 종속성의 탈피의 징후로 혼동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자료읽기>를 참조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민중운동 진영의 투쟁전술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인식의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북미 외교관계의 정상화와 미국의 헤게모니의 강화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하에 이를 단계적·점진적 과정으로 실현해나가자는 주장이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 부각될 가능성도 클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최근 전국연합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폐기라는 전제조건을 달긴 하였으나, 북미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지위 변경된 미군의 한국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적인 토론회에서 개진한 바 있다. 미군 지위변경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결국 이러한 정황적 조건들은 김대중정부와 미국이 추진하는 대북정책에 대해 민중운동 진영이 분명한 찬성 또는 반대를 표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며 정치적 발언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김대중정부의 구조조정 정책과 대북정책이 전략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구성되었다는 측면을 희석시키게 될 위험성도 내포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