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2차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OECD 기업지배구조원칙의 眞·實
지난해 4월 지주회사 설립이 허용되었고 뒤이어 정부는 2차 기업개혁을 본격화하였다. 폐쇄된 재벌그룹 회장실과 기획조정실들은 구조조정대책반으로 전환되어 지주회사를 이미 설립하였거나 설립의 구체적 계획들을 속속들이 발표하고 있다. 올초부터 각 금융기관들은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개시하였다. 도데체 무슨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진실은 무엇인가.
김대중 정부의 2차 기업개혁 추진경과와 특징
정부의 2차 기업개혁은 99년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통해 선언됨으로써 개시되었지만, 1차 기업개혁과 구분되는 정책의 실내용이 드러난 시점은 같은해 8월 재정경제부의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이하 모범규준)'과 2000년 1월 '기업지배구조 개선 법무부 자문단 권고안(이하 권고안)'이 발표됨으로써 2차 기업지배구조개선안이 마련된 이후의 일이다. 1차 기업개혁이 97년 12월 3일 체결된 IMF-김대중정부간 협약에 의해 매우 급박하게 이루어진 것에 비한다면 매우 더딘 진행이다. 그러나 정부의 2차 기업개혁이 한국경제와 기업지배구조에 미칠 변화는 보다 근원적이고 폭이 넓다. 1차 기업개혁의 핵심이 주로 재벌지배체제의 비합리적 측면들에 대한 단기적인 시정조치들로 이루졌다면, 2차 기업개혁의 핵심은 소유-경영의 분리와 주주권리 보장을 통한 자본시장의 활성화 또는 아메리카화에 분명하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부채비율조정과 상호채무보증 금지와 같은 재무구조 개선방안과 빅딜등의 사업구조조정의 두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온 기업개혁은 이제 재벌의 지주회사로의 전환과 같은 보다 근원적이고 전반적인 기업지배-소유 구조상의 변화를 초점으로한다. 또한 정부의 2차 기업개혁은 IMF 구제차관의 조건을 매개로 한 김대중정부와 재벌간의 단선적인 줄다리기로 이루어졌던 1차 개혁과 달리 OECD, IBRD를 비롯한 세계기구들의 직간접적 개입과 국내 시민운동 및 초민족 자본들의 참여가 함께 어우러지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된다.
이같은 정부정책 추진의 기본방향은 '2000년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재경부가 밝힌 바와 같이 '기업들이 그 규모에 관계없이 투명하고 책임있는 경영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제도를 국제기준에 부합되도록 정비'하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첫째, 2차 개혁의 대상이 '기업의 규모에 관계없는' 보다 전반적인 기업지배-소유구조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과 둘째, 투명성과 책임성을 기준으로 한 국제기준이 개혁의 핵심내용이라는 점이다. 즉 IMF 구제금융 조건상의 재벌개혁안이 가지는 징벌적인 성격으로 인한 김대중정부와 재벌간의 허구적인 대립은 이미 한 고비를 넘어 1차적으로 해소되었으며, 개혁의 본래적인 기준과 내용에 관한 정권과 자본간의 한발 나아간 합의가 이른바 '투명성과 책임성을 기준으로 한 국제기준'을 매개로 하여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과 2차 기업개혁 정책의 대강
이같은 정부의 2차 기업지배구조 개혁정책상의 국제기준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우선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OECD Principles of Corporate Governance, 이하 'OPCG')에 대해 살펴야만 한다. OECD는 이미 95년경부터 세계경제의 글로벌화를 뒷받침하기위한 기업지배구조 개혁안 마련을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였으며, 지난 99년 5월 각료회의에서 'OPCG'을 제정하였다. OPCG는 국제법적인 강제력을 가지거나 어떤 구체적인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식 기업지배구조의 원칙적 우위아래 일본/독일식 지배구조와의 일정한 타협에 의해 마련된 국제적 최소규범인 바, IBRD(세계은행)와 IMF등이 이를 자금지원의 조건과 정책권고에 원용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여느 국제법보다 더욱 더 강력한 규제수단으로 작용되고 있다. 실제로 재경부의 '모범규준'과 법무부의 '권고안'은 모두 기본틀과 방향성에 있어 OPCG에 근거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올해 1월에 발표된 법무부 자문단의 '권고안'은 지난해 9월경 IBRD의 지원아래 준비되어 발표된 안으로서 재경부안과 큰 줄기면에서는 거의 동일하지만 개별 각론에 있어서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강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OPCG는 크게 5개부분으로 나뉘는데 그것은 ① 주주의 권리 : 주주의 권리보호 강조, ② 주주의 동등대우 : 모든 주주의 동등한 대우와 주주권리 침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소수주주의 권익강조), ③ 기업지배구조에서 이해관계자의 역할 : 기업과 이해관계자간 적극적 협력 촉진(종업원 및 채권자의 참여), ④ 공시 및 투명성 : 주요 기업정보의 적절한 공시를 통해 경영투명성 확보, ⑤ 이사회의 책임 : 기업전략 제시, 경영진 감독, 주주 및 기업 이익대변등 이사회 책임강조등이다.
한편 법무부의 권고안은 총 8개항의 권고사항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① 주주의 권리강화, ② 이해관계자 거래에 대한 감독, ③ 이사회 권한 강화, ④ 주주권행사의 실효성 보장, ⑤ 공시요건, ⑥ 인수합병 및 기업지배권 시장, ⑦ 기관투자자의 기업지배관여 권장, ⑧ 기타 권고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조항의(주로 상법과 증권법) 신설과 개정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재경부 모범규준의 내용은 주주, 이사회, 감사기구, 이해관계자, 시장에 의한 경영감시 등 본문 다섯 부문과 권고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OPCG의 5개 항목에 준하여 정부 기업지배구조 개혁 정책의 주요 내용과 방향성을 항목별로 살펴보자.
1> 주주의 권리 강조 : 기업지배구조는 주주의 권리를 보호해야만 한다.
OPCG에서 기업지배권 시장의 효율적인 운영에 대한 강조는 OPCG의 기본정신이다. 기업지배권 시장이란 주식시장과 같은 자본시장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의 효율적 운영이란 곧 American Corporation Capitalism(법인 자본주의)의 핵심가치인 소유분산과 소유경영분리를 통한 자본시장 기능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김대중정부가 추진하는 2차 기업개혁의 기본정신과 원칙 역시 이같은 자본시장 중심의 기업지배구조에 있다. 자본시장이 기업의 경영성과를 적절히 반영한다면, 시장 견제적 감시기능이 강화됨으로써 소유경영자 중심의 기업경영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주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리의결권행사의 활성화와 출자총액제한과 자사주 취득한도 폐지 제고등의 정책개혁을 추진중이다. 주주권리에 대한 근원적인 규제가 폐지되는 것이다.
소수주주의 보호가 전제되는 가운데 국가독점기업이 국민주의 형태로 공개(민영화)되고, (주식)소유의 분산에 따라 독점은 사라질 것 처럼 보인다. 소유-경영의 분리에 따라 이른바 '정당한 자본가'와 '성공한 노동자'의 신화가 범람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매우 다르다. 정부 정책상의 주주권리 제한폐지와 확대보호 정책들은 자본시장 중심의 투기경제와 재벌의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통하여 미국식 법인자본주의를 도입하기위한 다른 목적을 지닌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화는 우리의 대안일 수 있는가. 1890년대 이래 미국자본주의는 가장 철저한 반독점법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미국 자본의 약탈성과 독점성은 누구도 의심하지않는 세계최강을 자랑한다. 1980년대에 미국은 AT&T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산산히 해체시켰지만, 그 결과 AT&T와 미국의 통신산업은 망하거나 민주화되기는커녕 세계적인 시장 장악력과 기술적 자본적 독점력을 키워내는데 성공했다.(최근에는 MS가 반독점국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있다.) 미국 자본주의는 신경제의 신화를 일구었지만 미국노동자들과 주변국들에게 신경제는 남의 잔치일뿐이며, 미국경제의 호황은 종종 주변의 사막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에 비유된다. 주주권으로 대체된 국민의 기본권은 국가 책임의 시장철수와 국가공공성의 해체, 경제의 투기적 금융화를 의미한다. 매우 비좁고 우연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성공'을 선사받은 노동자들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몰락한 자본가들의 빈자리를 메꾸지만, 그대신 성공하지못한채 남겨진 다수의 노동자들은 단결과 투쟁의 무기를 스스로 내놓거나 폭력적으로 강탈당하여 개별화됨으로써 극도의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된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미국과 같은 성공(?)을 이룰 수도 없겠지만(이는 매우 분명하고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다.), 미국의 성공조차 자본시장에 의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제와 민주화의 결과라기 보다는 투기적 야만에 내던져진 민중의 절망과 투기적 소유권의 승리일뿐인 것이다.
2> 주주의 동등대우 : 기업지배구조는 외국인주주와 소수지분 주주를 포함하여 모든 주주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보장해야만 한다.
이 원칙은 기업지배구조 체계에서 상대적 약자인 소수주주의 권익이 보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주주이익을 중심으로 기업경영을 평가하는 자본시장중심의 기업지배구조를 실현하기위해서는 주주권리의 일반적 강조를 넘어 소수주주권에 대한 특별한 보호가 전제될 필요가 있기때문이다. 실제로 미국등 자본시장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시장중심적 기업지배구조를 선도하는 요체는 바로 소수주주운동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관투자자들과 외국인 주주의 주주행동주의가 있다. 지난 2월 미국 기관투자가인 템플턴그룹이 5대 재벌 주주총회에서 참여연대와 함께 소액주주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LG-데이콤과의 합의를 이끌어낸 사례는 이같은 동등대우원칙에 입각한 주주행동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소수주주운동은 법인자본화에 대하여 재벌개혁(혹은 해체)라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마저 부수적으로 제공해주는 一石二鳥(일석이조)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3> 기업지배구조에서 이해관계자의 역할 : 기업지배구조는 재이해관계자의 권리가 법적으로 성립된 것임을 이정해야하며, 부, 고용 및 재무적으로 건전한 기업의 지속가능성등을 창출함에 있어서 기업과 이해관계자간 적극적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어야한다.
OPCG에서 세 번째로 서술되고 있는 이해관계자 항목은 이해관계자(Stakeholders)의 역할을 강조하는 독일/일본식 기업지배모델이 직접 반영된 부분으로 전체 OPCG의 체계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성격을 가진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OPCG의 전반적인 미국 지향성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이는 오히려 주주의 이해를 중시하는 영미식 기업지배구조에서도 이해관계자의 권리보호와 이해관계자간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이해관계자란 주주를 제외하고 회사에 이해관계를 가진 자를 통칭한다. OPCG와 정부 정책에서는 보통 채권자와 종업원의 참여문제가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OPCG에서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중의 하나로서 Employee-종업원을 거론하고, 노동자란 말은 쓰지않는다.) OPCG는 기업지배구조에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형태에 대해 이것이 각 국가의 법률이나 관행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뒤에 종업원대표의 이사회 참여나 종업원 지주제도, 특정의사결정에 이해관계자의 의사반영과 파산절차에의 채권자 참여등을 제시한다.
이중 종업원의 참여문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기업지배구조개선위원회나 노사정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자주 언급되면서 우리사주제나 스톡옵셥등의 형태로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사회적 통제의 확대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집단적, 개별적 성과급 임금제 도입의 일 형태일뿐이다. 연봉제로 대표되는 성과급 임금제란 성과에 따라 임금을 배정하는 임금체계로서 이 제도의 도입은 노동의 양극화/개별화와 불안정화를 초래한다. 우리사주제나 스톡옵션제는 이같은 성과급 임금제의 특성과 투기적 금융화, 참여적 기업지배모델의 절묘한 결합체이다. 실제로 우리사주제는 1968년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1997년에는 증권거래법에 이관되어 규율되는 제도이다. 관련 법률의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우리사주제는 개발시대에 자본시장 활성화 또는 기업공개의 촉진방안으로 출발하였고,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구조조정과 대량해고의 대안으로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진보진영의 다수는 우리사주제의 참여적 성격과 우리사주제가 가지는 소유통제의 잠재력(?)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못하고 있다.
부루조아 이데올로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베버의 지배정당성론에 의하면, 합리·합법적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은 규칙의 제정에 참여함으로써 형성된다. 즉 이해관계자로서의 노동자는 종업원의 지위에서 기업지배에 참여함으로써 기업지배의 정당성에 복무하고 민주적 투쟁력과 이단적인(?) 자주적 전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종업원 경영참가나 종업원 이사제가 본래의 노동자통제와 전혀 다른 근원을 가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일부 진보적 식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독일식 근로자 대표 이사제의 경우, 노동자/자본가 대표동수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파격적인 모델임에는 틀림없지만, 노동자 대표가 참가하는 이사회는 이원적 이사회구조를 가지는 독일 이사회구조의 특성상 감독기능만을 수행하며, 주주들에 의해 선출된 이사회의장이 2표의 의결권을 행사하여 노동자들의 결정적인 의견이 이사회대표단의 힘만으로 관철된 예는 한번도 없었다. OPCG와 정부개혁안의 참여모델이 이러한 독일식 참여모델에 크게 미치지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사민주의의 역사적 성과인 노동자대표 이사제 또한 기껏해야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자유주의의 상대적 진보성의 굴레에 머무르다가 현재에는 그나마 서서히 아메리칸 법인자본주의로 흡수되가고 있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s Capitalism)의 철지난 변명꺼리일뿐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채권자 참여는 보다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는데, IMF외환위기에 의한 강제적인 기업구조조정이 채권금융기관들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채권시장(주거래은행) 중심의 기업지배구조는 국가개입이 자유롭다는 측면에서 국가성격에 따른 정경유착/부패/독점의 문제와 국가책임에서 연원하는 사회적 공공성이라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문제는 정부의 기업개혁은 이른바 '은행주인 찿아주기'식의 민영화와 대형화-겸업화의 추세에 따른 금융지주회사 설립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기존의 채권자 중심적 기업지배구조가 가져왔던 한 단면(부패한 국가독점이지만)인 국가민주화 투쟁의 영역(사회적 통제의 가능성)은 사라지는 반면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주주이익 극대화의 또다른 주체로 거듭난 거대 기관투자자들이 오히려 자본시장 중심의 기업지배질서재편을 책임지게되는 것이다.
4> 공시 및 투명성: 기업지배구조는 기업의 재무상태, 성과, 소유, 지배등을 포함한 기업에 대한 모든 중요 정보에 대해서 적절한 시기에 정확한 공시가 이루어지도록 보장해야한다.
OPCG는 네번째로, 강력한 공시제도가 시장중심의 기업감독 체계에서 핵심적인 사항임을 지적한다. 얼핏보아 공시제도의 강화, 공시내용의 확대, 국제회계기준의 적용, 감사인의 독립성 강화와 전자공시제도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OPCG의 공시-투명성의 원칙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내용들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식시장 중심적인 기업지배구조를 갖추는데 있어 강력한 공시제도와 투명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기업지배구조의 핵심 인프라(설비)이다. OPCG에서는 기업지배의 주요 주체들을 투자자, 경영진, 이사회, 이해관계자로 나누는데, 이들 모두가 기업관련 행위에 관하여 자본시장의 투자자들에게 모든 것을 평가받고 주주이익의 극대화만이 기업활동의 유일한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주변부 국가들에서 종종 이러한 원칙들은 부패척결/정경유착 해소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강제되곤 한다. 예를 들어, 뉴욕 월가 헤지펀드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 앉은 큰손들의 입장에서 한국시장은 마음놓고 배팅하기에 아직도 불투명하고, 예측할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부패와 정경유착 근절이라는 이름으로 해소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5> 이사회의 책임: 기업지배구조는 회사의 전략적 방향설정, 이사회의 경영에 대한 효과적인 감독, 기업 및 주주에 대한 이사회의 책임등을 보장해야 한다.
OPCG는 이사회의 경영진으로부터의 독립과 사외이사제의 도입을 특별히 강조한다. 경영과 감독의 분리를 통해 기업경영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와 기업 및 주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위함이다. 이를 위해 정부의 기업개혁정책에서는 이사회의 경영감독기능을 강화하고, 사외이사 선임의 확대(1/4이상) 및 역할제고에 관한 조치들이 담겨졌다. OPCG는 일원적 이사회 구조와 이원적 이사회구조를 모두 포괄하지만, 이사회의 경영감독기능을 강화한다는 기본정신은 '감독과 경영의 분리'에 입각한 미국식의 일원적 이사회 구조의 기본원리와 상통한다. 그래서 일원적 이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OPCG의 이사회 관련 원칙들이 더욱 직접적인 규정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감독/경영의 분리는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가. 이사회의 경영기능은 CEO(최고 경영자)와 CFO(재무담당임원)등의 집행임원(executive officer)에게 이전되고, 이사회 회장(Chairman)과 사외이사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는 집행임원들의 경영을 감독하는 기능만을 가지게된다. 정부 기업개혁의 이데올로그들이 강조하는 바는 이사회의 독립이 소유경영자의 전횡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기업개혁에 적극적인 일부 시민운동들은 이점에 착안하여 대기업의 사외이사 선임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OPCG와 정부 기업개혁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주주이익을 기업경영 평가의 유일기준으로 삼고자 함이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CEO는 임금을 받는 피고용자이지만 그의 임금과 이미지는 기업주가의 바로미터가 되고, 경영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게된다. CEO는 이사회의 철저한 감독을 받지만 이사회의 평가기준은 오로지 주가이다. 주주들의 소유권이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유일한 통로 역시 자본시장에서의 평가뿐이다. 기업내외의 노동자나 국가경제와 소유경영자/(기존)이사회간에 존재해온 긴장과 갈등의 공간은 공익을(주주의 공익이긴하지만) 대변한다는 사외이사들의 이미지와 명성에 의해 가려지고 노동자들의 지위는 개별화된다. 새로운 불평등 구조도 생겨난다. 한해동안 수천억원을 벌지만 그것이 자기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이라고 주장하는 CEO가 미국에는 허다하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이미 노동자 평균임금의 600배를 넘어섰다. 8,90년대 미국의 살인적인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의 칼을 잡은 자들 역시 기업소유주가 아니라 이들 CEO들이였다. 이들의 칼질에 주주들은 환호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소결
우리는 이상 OPCG의 5가지 원칙과 이에 준한 김대중 정부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정책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핵심이 자본시장 중심의 기업지배질서로의 재편임을 수차례 반복하여 확인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것의 진실을 다음의 세가지 효과를 통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효과는 금융세계화에 부합하는 기업지배구조의 아메리카화이다. 국제적 기업지배구조 정책의 모태가 되는 OPCG는 표면적으로는 각국간의 상이한 지배모델을 모두 수용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식 모델의 원칙적 우위아래 놓여있으며,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않은 우리나라의 경우 OECD 원칙의 도입은 보다 직접적인 아메리카적 지배모델의 수용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자본의 금융화라 함은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투기적 자본재분배에 다름아니며, 기업지배구조의 개혁은 이같은 재편의 조직적인 하부구조를 마련하고자함이다. 재벌해체나 합리화, 투명성 확보등의 지배이데올로기, '정당한 자본가'와 '성공한 노동자'의 신화가 울려퍼지는 동안 소유분산과 경영분리에 의해 독점자본의 힘은 오히려 더욱 거세어지고 세계화된다. '성공한 노동자'는 있어도 '노동자의 성공'은 없는 야만의 시장질서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업지배구조의 아메리카화, 혹은 법인자본화의 진실이다.
두번째 효과는 자본시장의 활성화와 경제의 투기화이다. 경영 투명성의 제고와 소수주주권의 보호, 사외이사제 확대등의 정책들은 결과적으로는 기업경영 평가의 유일기준을 장·단기적인 주주이익에 도맡기게된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같은 변화는 기업경영의 사회적 통제 가능성과 공공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일 수 있다.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의 위험은 이제 어떠한 사회적 통제로부터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방된 꼬삐풀린 시장의 위험으로 한단계 발전되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효과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기업내 의사결정구조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체계적인 배제이다. 우리사주제나 소수주주운동을 통한 노동자의 기업경영-소유참가는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자의 일주체로서 이루어지는 일이지 노동자들의 단결에 기초한 운동이 아님이 보다 분명히 확인되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