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금융세계화와 석유위기
석유위기로 대표되는 자원위기는 토지처럼 재생산이 불가능하지만 또 토지와는 달리 고갈 가능성이 높은 광업자원, 그보다는 좀 덜 하지만 임업 및 어업자원의 문제다. 이 점에서 석유위기는 이윤율 저하로 인해 자본이 축소재생산되는 문제인 경제위기와는 일단 구별된다.
환율과 유가의 불안정성
1973년 1차 석유위기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동전쟁의 재발로 인한 석유수출국기구(오펙)의 유가 인상이다. 그렇지만 이는 미국의 경제위기로 인한 국제화폐체계의 붕괴라는 맥락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 유가의 불안정성과 환율의 불안정성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 이후 이윤율의 저하와 유로달러시장의 팽창으로 닉슨이 71년 달러의 금태환 중지, 73년 고정환율제 포기를 선언하면서, 금-달러본위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후 국제화폐체계는 붕괴하고 만다. 이후 유가는 국제정치경제의 상황에 따라 동요한다. 73~75년 공황 이후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추월에 실패한 것도 환율과 유가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고갈 가능성이 높은 석유의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같은 이유로 유가는 선물시장의 투기에 의해 결정되는 `페이퍼 배럴' 가격이 선도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초민족적 자본인 석유메이저는 거대한 초과이윤을 실현한다. 농업메이저에 의한 토착농업의 파괴와 이른바 `녹색혁명'이 초래한 세계적 식량위기의 가능성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석유위기가 금융세계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사실은 유로달러시장과 초민족적 은행을 통한 이른바 `석유달러의 환류'(리사이클링)에 의해 극적으로 확인된다. 남미의 신흥공업국이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을 본받아 외채의존적 수출지향공업화를 시작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렇지만 유가 인상으로 인한 교역조건 악화는 석유수입에 의존하는 신흥공업국(`노펙') 전체를 달러 강세와 금리 인상에 취약하게 만든다. 78년 오펙의 유가 재인상에 따른 2차 석유위기와 81~82년 공황에 대응한 레이건의 강한 달러-고금리 정책으로 조성된 이른바 `3고'가 노펙의 외환-외채위기와 석유위기를 초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외환-외채위기와 석유위기가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가 초래한 금융세계화 속에서 경제위기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양상을 드러낸 셈이다.
레이건식 신보수주의가 퇴조하고 클린턴식 신자유주의가 형성되던 과도기인 86~88년 조성된 `3저'는 몇가지 상황을 반영한다. 85년 플라자 협정과 87년 루브르 협정에서 세계경제 중심 3국의 환율 조정이 합의됨에 따라 달러가 평가절하된다. 또 반주변-주변의 외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85년 베이커 플랜과 89년 브래디 플랜에 따라 저금리 기조가 정착된다. 게다가 중심에서 대체에너지 개발과 반주변-주변의 자본축적 둔화로 인해 석유수요가 급감해 86년부터 유가가 인하된다. 그렇지만 3저에 대한 `노펙'의 대응은 상이하다. 예를 들어 남미경제가 이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은 반면, 한국경제에서 이는 시대착오적인 재벌체제와 코퍼러티즘적인 재벌 노조를 강화한 계기가 된다.
3고의 가능성과 재벌 체제의 위기
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 96년 오이시디 가입으로 금융세계화에 통합된 재벌체제가 위기에 빠진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97~98년 공황은 이윤율 저하에도 과잉자본을 처리하지 못한다. 95년 이후 지속되는 달러 강세 속에서 91년 걸프전 때와 유사한 중동 정세로 인한 유가 불안과 미국경제의 경착륙 가능성으로 인한 금리 불안이 새로운 3고를 예고하는 상황이지만,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은 중도반단되고 재벌체제 위기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라도 97~98년 공황은 내년, 내후년 공황의 예고일 뿐인지도 모른다. 마치 74~75년 공황이 79~80년 공황의 전조였던 것처럼 말이다.
spinmax@chollian.net 윤소영/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