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경제개혁의 어제와 오늘
윤소영/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
17년 개발독재 끝에 박정희 정부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진 것은 1978년에 이르러서다.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로 인해 외채가 급증하고 수출 채산성이 악화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말 총선에서 박정희 공화당은 근소한 차이지만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런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개각이 단행된다. 특히 이제까지의 경제성장 기조에서 경제안정 기조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신현확이 기용된다. 79년 4월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이 나오고 5월에는 그 일환으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 시도된다. 그렇지만 정권 말기적 난국은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만다. 결국 10·16 부마항쟁으로 인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는 10·26 사건이 발발한다.
전두환 정부가 시작한 경제개혁
12·12 쿠데타에서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80년 봄'은 동상이몽 격이던 두 김씨가 아니라 오히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79∼82년 세계경제의 불황 속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부에서 김재익-강경식 경제팀은 신현확 경제팀의 경제안정론을 경제개혁론으로 급진화한다. 관치금융과 재벌체제로 왜곡된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거시적 불안정성을 야기한다는 것이 그 핵심 논리다.
그렇지만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금융·재벌 개혁은 좌절된다. 재벌의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83년 아웅산 사건 이후 새로이 구성된 사공일-김만제 경제팀은 일보 후퇴하여 얼마간 타협적 자세를 취한다. 게다가 86∼88년 이른바 `3저 호황'이 조성되는데, 이는 85년 플라자 협정, 87년 루브르 협정과 80년대 초·중반 다른 신흥공업국들의 외채위기 등 금융 세계화 이행과정에서 유발된 일시적 상황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근거 없는 경제 낙관론이 유포되어 금융·재벌 개혁이라는 의제 자체가 기각되고 만다.
87년 6·10항쟁을 6·29선언으로 무력화하고 두 김씨의 끝없는 대권경쟁을 활용해 정권을 재창출한 노태우 정부는 확고한 경제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3저 호황이 퇴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직 경제 낙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90년 3당 합당과 공안정국을 틈타 수출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 아래 구조조정을 시도하지만 이미 때늦은 것이다. 노태우 정부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과는 88∼89년 미-소 탈냉전 분위기 조성에 따른 남북관계 개선 정도일 것이다.
반면, 이 시기에 재벌과 함께 재벌 노조의 정부에 대한 저항이 크게 부각된다. 88∼89년 현대중공업 파업투쟁과 9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의 대선 출마가 그 증거다. 여러모로 보아 노태우 정부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각각 3당 합당과 디제이피 연합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역사적 성격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두 김씨 정부가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라 사활적인 목표로 내건 금융·재벌 개혁은 전두환 정부가 실패한 과제를 완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또 김영삼 정부 때부터 단속적으로 제기되는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미국의 포용정책에 따라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작업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닐까.
모든 걸 다 바꿔?
차이가 있다면 두 김씨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이 군사정부에 비해 정통성 문제로 덜 시달리는 만큼 재야 진보세력에 대해 더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93년 이후 진보세력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자유·진보 대 보수 구도로 전환하자고 화답하면서 문민화 과정에 통합된다. 문민정부 아래서 각종 이익단체가 활성화하고 노조는 하나의 비정부기구로 격하된다. 구조조정에 금융·재벌 개혁뿐만 아니라 노동개혁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라고 외치고 흔들며 사람들 정신을 빼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