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투신사태가 던지는 사회적 함의
1. 현대투신사태의 과정과 의미
현대투신 사태의 도화점은 4월24일 '참여연대, 현대투신운용 펀드 불법운용 제기'와 뒤이은 정부의 '현대투신 지원방안 유보 방침 발표'였다. 곧이어 외국인들의 집중적인 현대주 매각이 있었고, 현대 관련주의 동반 폭락과 현대 유동성 위기설이 블랙먼데이의 재연을 예고하는 듯 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리고 지난 5월4일 현대측이 발표한 정몽헌회장의 사재출자와 계열사 주식담보 제공안에 대해 정부와 시장이 긍정적인 OK사인을 보냄으로써 말많고 탈많던 현투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금방이라도 현대그룹을 동강낼 것 같았던 정부는 현대측의 자구조치를 최선이라고 평가했고, 곤두박질치던 현대 계열주가도 모두 동반상승하였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자 정부
의 행보는 빨라졌다. 6월중에 한국투신, 대한투신에 대한 5조원의 공적자금 추가투입이 개시될 예정이고,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 도입·운영과 관련된 증권·투신운용사들의 경영지배구조 개혁을 위한 법제개편 계획이 속속 마련되고 있다.
이처럼 일단락된 현투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 사태는 과연 종결된 것인가? 애초에 현투사태는 지난 3월말에 있었던 현대그룹의 경영권다툼으로부터 촉발되었으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동안 누적되어온 투신사 전반의 부실화 문제가 현대그룹개혁과 맞물리면서 미루어져 있던 '2차 금융구조조정'의 사전정지 작업 차원에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투사태의 일정한 마무리와 타협은 뒤로 밀려나있던 2차 금융구조조정의 개시여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금융지주회사 설립과 대형화·겸업화로 대표되는 2차 금융구조조정의 개시는 다시금 기업, 노동, 공공부문에 이은연쇄적인 '2단계 구조조정'의 재개로 이어질 것이다. 반복적인 위기의 재연과 구조조정, 그 결절점을 이루는 지배세력내의 긴장과 타협, 이미 현투사태는 한 금융기관의 부실화와 해법을 둘러싼 일회적인 공방전의 의미를 뛰어넘은 사안이며 아직 종결되지않았다. 이는 현 정세상의 중대한 특징과 본질을 드러내주는 표본적 평가대상인 것이다.
2. '밑빠진 독', 투자신탁운용회사
1차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작년까지 조성되었던 64조원의 자금이 바닥났다. 남겨진 5-6조의 자금이 올해 6월경에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에 투입되면 남은 돈은 없다. 그러나 서울, 제일은행등의 국유은행과 다수 투신(운용)사들의 부실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도리어 지난주말에 이기호 청화대 경제수석은 2차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40조원의 추가공적자금을 조성해야한다고 밝혔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에 쓰여졌고 어떻게 사라졌는가.
99년 회계연도에 23개 투신(운용)사들이 기록한 당기순손실은 5조3천억원이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대우채 손실때문이었다. 그러나 투신사의 부실이 꼭 작년의 일은 아니었다. 정부가 한국, 대한, 현대(옛 국민)등 3대 투신사에 지원한 자금은 89년 이후 총 18조원에 달한다. 올 6월이후 한국투
신과 대한투신에 추가 지원할 공적자금 약 5조원을 포함하면 이들 3대 대형투신사에 들어간 공적자금만 모두 23조원 안팎으로 늘어나게 된다. 한투와 대투는 올초에도 3조원의 돈이 투입되었던 바있다.투신사는 확실히 '밑빠진 독'이 분명하다. 사정은 투신보다 훨씬 거대한 몸집에 걸맞게 수십조원의 자금이 투입된 서울, 제일, 한빛은행등 시중은행 부실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진단은 '관치금융'에 의한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실경영책임을 묻지않고, 지배소유구조 개혁을 늦추고있는 정부의 모럴헤저드도 포함된다. 89년 노태우정부에 의해 취해진 '12·12조치'가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는 그 기원이다. 당시 정부는 떨어지는 주가를 떠받히기위해 투신사에 무제한 주식 매입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계속 미끄럼을 탓고, 투신사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투신사들은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대출금을 상환하고 지원금을 갚기위해 또다른 정책자금을 빌리는 악순환을 겪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들 투신사들에 대한 정부(산업은행등 포함)
지분율은 현재 한국투신 95%, 대한투신은 90%에 이른다. 신탁계정과 고유계정간의 편출입문제나 낙하산 인사에따른 경영능력 부실화 역시 자주 지적되는 관치금융의 주요사례들이다. 이번 현대 투신사태 정상화 방안을 둘러싼 해법 공방전에서도 역시 이같은 문제점들이 다시 거론되었고, 이에따라 공적자금 찬/반이나 해묵은 시장주도/정부주도론들간의 논쟁이 재연되었다.
3. 공적자금 투입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의 재연
현대투신사태는 공적자금을 둘러싼 해묵은 신자유주의적 논란을 재연해냈다. 2차 구조조정을 추진하기위한 보다 안정적인 시장여건형성을 책임지고있는 정부의 입장에서 볼때 추가적인 공적자금 투입은 불가피한 최소한의 시장개입으로 항변되었고,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보수언론들은 시장중심적인 저비용 개혁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합세한 시민단체들은 대주주의 부실경영책임과 공적자금 사용처에 대한 민간 감독기구설치등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이들 시장, 재벌, 정부, 시민단체들간의 공적자금 찬/반, 시장/정부 주도 개혁론을 둘러싼 대립은 '자본시장 중심의 투명한 기업지배소유구조 개혁과 금융화'라는 정책 총론을 둘러싼 대립이 아니라 그 방식과 속도에 관한 대립일 뿐이다.
우선 (고객예금이 기관임원의 판공비나 월급지급에 쓰일 수 있는) 각 계정간의 편출입문제나 낙하산 인사등 관치금융에 따른 부실경영의 문제는 '국가개입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부패와 비민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국가개입의 축소와 시장주도적 개혁은 부실경영의 대안이 아니라 국가책임의 실종과 시장불안정성의 확대심화만을 야기한다. 또한 지난 12·12조치 이후 악순환을 거듭해온 투신사 부실을 야기한 정부의 증시부양책은 시장개입 정책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증시부양'이라는 경제정책 방향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같은 정책방향 아래에서 주주이익보호는 국가의 민중생활보호 책임을 대체하게 되는데, 이 둘간의 연관은 극히 희박할뿐만 아니라 그 관념상의 연관이 현실화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민중착취의 사슬을 따라 이루어지게된다. 증시붕괴→경제파탄→민중생활의 위기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의 불안정성을 통제하거나, 민중생활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타개, 지원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지않은 가운데 이루어지는 정부의 증시부양책은 대주주의 경제적 파탄을 최소화해 줄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시장개입은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와 노동자계급간의 역사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자본의 위기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일차적인 징후는 '자본의 금융적 이탈'로 나타났다. 국민경제와 생산을 떠받히는 투자와 저축이 투기자본화되고, 기관투자가들은 투기의 주요주체가 되었으며, 이를 규제해야할 정부경제정책은 오히려 투기화(생산으로부터의 금융적 이탈)의 여건을 위한 '금융자유화'와 '증시부양책'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현대투신 정상화를 위한 정부정책과 신자유주의적 대안들이 결과할 바는 투신의 부실을 가져온 금융적 불안정성의 심화를 심화, 구조화시키는 반복되는 구조조정과 위기의 수렁속에 몸을 던지는 꼴임은 자명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공적자금이란 말은 정부가 지출하는 세수인 듯 쓰이고있지만 이 용어는 사실 IMF구제금융을 지원받는 대가로 김대 중정부와 IMF간에 맺어진 협약에 따라 마련된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위한 'Public Fund'를 직역한 말이다. 즉 공적자금 추가투입의 비효율성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말이지 이것이 곧 국가개입정책의 비효율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반시장주의적 대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 입각했을 때, 추가공적자금 투입을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대주주의 책임을 묻고, 소수주주의 이익을 옹호하기위한 대주주, 이사회, 소유경영자간의 투명한 소유지배구조 개혁을 주장하는 시민운동과 몇몇 진보진영 논자들의 입장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언뜻 보기에 이같은 주장은 대주주의 책임을 따짐으로써 소수주주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총체적 재구조화를 둘러싼 현재의 계급대립전선의 성격상 이들의 불분명하고 공상적인 발상과 주장은 '배신'에 가깝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대해 반대한다면서도, 소수주주=서민=민중이라는 공상적 관념에 근거하여 국가책임의 해체(관치금융타파와 시장 중심성 확보)와 금융화·기업지배구조의 아메리카화(투명성확보를 통한 자본시장 중심적 기업개혁)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핵심을 그 누구보다도 앞서 주장하고 옹호한다. 경기가 회복되는 시기에 보편적인 민중의 이익과 소수주주의 이익은 일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형태로나마 그 일부가 일치할 수는 있겠지만, 현재와 같이 경제시스템 전반의 재편이 거세게 이루어지는 시기에 그 우연적 일치는 근본적인 재편 방향간의 대립을 둘러싼 돌이킬 수 없는 갈림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4. 금융화 저지와 민중적 통제를 위한 투쟁
이번 현대투신사태에서 보여지듯이, 신자유주의는 말로는 시장중심성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시장개입과 통제의 방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자기모순을 다시한번 드러내었다. 공적자금 투입 찬/반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논점에서 재생산되는 금융화논리와 허구적인 시장 중심론에 맞서기위한 투쟁을 본격화해야 할 것이다. 막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은 민중생활의 위기와 국민경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킬뿐인 구조조정의 비용이 아니라 실질적인 '금융기관의 사회화와 민중적 통제'의 자산임을 명확히해야한다. 사회화없는 공적자금 투입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금융불안정성을 야기하는 금융자유화와 자본 시장중심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즉각 중단/통제되어야한다.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관리해줄뿐인 관념적인 민중, 소수주주의 이익 옹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의 위기로부터 조직되어, 위기의 확대/심화만을 불러올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 대항하는 노동자 대중의 보편적 이해와 요구에 입각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