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3.09.04
①노동자가 지지해야 할 정당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요?
<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 무엇이 문제인가 10문 10답>
1. 노동자 국회의원을 더 많이 배출하고, 보수양당 구도를 깨기 위해선 노동자가 지지할 정당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요?
진보정당이 여러 개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은 20여 년에 걸친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위기에 빠진 결과입니다. 왜 위기에 봉착했는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당위만으로 급하게 추진하는 선거연합정당은 실패를 반복할 게 뻔합니다. 민주노총 내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대변하는 선거연합정당을 막무가내로 추진한다면, 그것은 역으로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분열을 부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담지 못한 채 기존 진보정당들의 표를 한데 모아보자는 식으로 추진하는 선거연합정당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에게 어떠한 긍정적 전망도, 감동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실패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는다면
진보정당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특히나 최근 10년 안에 민주노총에 가입한 조합원이라면, 민주노총의 지지 정당이라는 노동당·녹색당·정의당·진보당을 보며 서로 무엇이 그리 다르기에 따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위만을 내세워 급하게 추진하는 진보정치의 통합은 반드시 역효과를 부를 것입니다.
현재 민주노총 집행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지지부진한 이유를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과관계를 뒤집은 설명입니다. 진보정당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노총이 추진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20여 년에 걸쳐 실패를 반복했기 때문에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은 아픈 실패의 흔적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기성 정당이 대변할 수 없는 사회변혁이란 지향을 노동자 스스로 세력화하여 실현해보겠다는 민주노총의 포부를 담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진보정당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은 앞으로 이어질 문답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결별한 커플에 비유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더는 같이 못 살겠다며 헤어졌는데, 몇 년 뒤에 나타나서는 해결된 것 하나 없이 억지로 붙잡는다고 관계가 유지될 리 없습니다. 같이 사는 동안 성격 차이(북핵을 둘러싼 갈등), 거짓말(당내 선거부정), 심지어 물리적 폭력(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치세력화는 연인이나 부부 간의 문제를 뛰어 넘는 거대한 기획입니다. 100만이 넘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마음을 모아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왜 위기에 빠졌는지 성찰 없이 ‘다시 한 번 모여보자’는 식으로는 누구도 혹하지 않을 겁니다. 실패를 반복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통합을 말하지만 실제론 분열을 부르는 길
진보정치 세력이 다시 하나의 정당으로 모이는 일은 그 필요성, 방향성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있더라도 실제로 성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은 현 시점에 진보정당들은 각기 다른 조건에 놓여 있고, 전혀 다른 전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장 진보당 외에 어떤 진보정당도 민주노총이 제안하는 선거연합정당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선거연합정당이 추진된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민주노총 내 다양한 세력들을 포괄할 수 없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말뿐인 선거연합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자고 민주노총 내 특정 세력이 무리해서 밀어붙인다면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단결을 해칠 게 분명합니다. 민주노총을 위해서 한다는 일이 역으로 민주노총의 분열을 재촉하는 셈입니다.
진보정치 운동이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좌절했습니다. 선거연합정당에 우려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진 게 아니냐고요? 실제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패배했고, 여러 정치세력의 상호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상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말로 겸허하게 역사를 돌아봐야 합니다. 민주노총 대의원의 많은 수를 차지한 정파가 ‘선거연합정당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정치방침·총선방침을 밀어붙이는 지금 상황이 과거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내에서 벌어진 패권주의 논란을 떠오르게 한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논의하는 과정이 진보정치 세력들의 상호 불신을 또 한 번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동 없는 선거연합, 운동의 방향이 될 수 없다
무너진 것은 운동 내 세력들의 상호 신뢰만이 아닙니다. 진보정치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무너졌습니다.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여러 진보정당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은 진보정치가 기성 정당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당내 선거에서 조직적으로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한반도 평화 문제나 핵 문제를 두고 침묵하거나 말을 돌려 북한을 옹호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저들이 진보세력이 맞느냐고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특히 어려운 문제는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입니다. 반복되는 야권연대는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많은 진보정당이 보수 정권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주당의 손을 잡아 왔습니다.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서겠다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꿈이 흐려지고, 민주당이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2중대’가 되어버린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역사를 평가하며 답해야할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진보정당 의석 수 늘려보자는 선거공학적인 목표밖에 없는 채로 추진하는 선거연합은 민주노총 조합원뿐 아니라 민주노총 바깥에 있는 많은 대중에게 어떠한 긍정적 전망도, 감동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보정치가 이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제시하지 않은 채 추진되는 선거연합은 사회를 바꾸는 ‘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