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보다
| 2023.09.04
④다수파가 주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패권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나요?
<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 무엇이 문제인가 10문 10답>
4. 과거 진보정당의 역사를 볼 때, 다수파가 주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패권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나요?
우리는 단순히 다수파가 주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패권주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 세력이 다수파가 되기 위해 불법이나 편법을 자행하고, 승자독식의 정치문화로 당직과 공직을 독점하려 하고, 권력의 교체와 순환을 의미하는 책임정치의 원리를 거부함으로써 진보정당 운동의 생명력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를 패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패권주의란 무엇인가
과거 진보정당의 역사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말이 ‘패권주의’입니다. 도대체 패권주의가 무엇이고,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패권주의가 어떻게 나타났기에 이토록 회자되는 것일까요? 패권주의는 특정 세력이 상대방을 힘으로 누르고 자신들의 입장과 방침을 강요하면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은 여러 원리 중 하나이고, 소수의견 존중도 중요한 원리로 다뤄져야 합니다. 어떻게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갈등을 해결해나가냐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핵심 잣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다수파, 당권파는 민주주의에서 이 두 가지 측면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갈등을 폭발시켰고, 패권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승자독식의 정치문화
그들이 보인 패권주의는 먼저 승자독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민주주의의 대의제는 비례성의 원리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 내 집단 간에 지지세가 6:4라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당직자, 공직자의 구성도 대략 6:4의 비율로 나와야 비례성이 작동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 세력이 선거제도의 맹점을 활용해 승자독식의 결과가 나오도록, 예컨대 9:1의 결과가 나오도록 한다면 비례성의 원리가 파괴됩니다. 누군가는 ‘과잉’ 대표성을 누리고, 누군가는 ‘과소’ 대표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진보정당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비례성 원리를 강화함으로써 기존 정당이 과잉대표성을 누리는 현실을 바꾸자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이른바 ‘정파세팅’ 선거가 바로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누군가가 과잉대표성을 누린다는 사실 자체가 ‘소수파 존중’이라는 원리를 가장 극적으로 파괴합니다. 소수파의 대표성 자체를 크게 잠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내 책임정치 원리의 부정
나아가 승자독식의 정치문화는 권력의 교체, 순환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달리 표현하면 ‘책임정치’라는 원리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행부가 주도하여 선거를 치렀는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집행부가 물러나고 새 집행부가 서는 게 바람직할 때가 있습니다. 기존 집행부는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길을 찾고, 새 집행부는 자신의 정견을 실행할 기회를 얻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책임정치’ 원리가 작동할 때, 조직의 피가 돌고 생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존 집행부가 ‘실패를 인정하면 모두 잃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권력의 순환, 교체를 거부하면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은 2007년 대선에서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둡니다. 사회양극화라는 시대 인식을 반영하여 새로운 진보정치의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는 당내 의견도 만만치 않게 강했지만, 다수파인 자주파는 자신들의 노선과 방침을 민주노동당에 강요하려는 태도를 고수하며 시대착오적인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대선의 슬로건으로 채택하려 했습니다. 당시 정세에서 이러한 슬로건이 적절한가에 대한 반문이 내부에서 강하게 있었고, 이에 민주노동당 선대위는 공약집에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소략하게 반영하는 선에서 논쟁을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자주파인 김선동 사무총장이 당의 공식 결정을 어기고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대선 슬로건으로 담은 포스터를 찍도록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일파만파의 후폭풍을 낳았고, 일상 시기도 아닌 선거 시기에 조직이 마비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대선 참패를 수습하기 위한 비대위가 출범하고 혁신안을 내놓지만, 자주파의 거부로 부결됩니다. 이는 자주파가 보인 패권주의적 정치 행태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고, 그 결과는 분당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부정경선 사태로 파국을 맞이합니다. 당권파(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잔류해있던 자주파)는 당권과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불법과 부정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러한 불법, 부정이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권파는 진보정치가 끝장나는 한이 있더라도 정파의 이익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던 셈입니다.
패권주의 청산은 진보정당운동의 시작
정리하면, 우리는 단순히 다수파가 주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패권주의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특정 세력이 다수파가 되기 위해 불법이나 편법을 자행하고, 승자독식의 정치문화로 당직과 공직을 독점하려 하고, 권력의 교체와 순환을 의미하는 책임정치의 원리를 거부함으로써 진보정당 운동의 생명력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를 패권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부르주아 정당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진보정당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나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시민들이 진보정당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진보정당이 어떤 사회비전을 제시한들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패권주의에 대한 반성은 진보정당의 새로운 걸음에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