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동향
| 2023.11.17
소책자를 펴내며
<반핵·반권위주의 국제민중연대를 위하여>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생각이 갈리더라도, ‘변화의 시대’라는 것만큼은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짧게 보아도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길게 보면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며 탄생한 ‘전후(戰後) 세계질서’ 자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2020년대는 이러한 변화를 일상에서 체감할 수밖에 없는 격변들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19 위기가 전 세계를 타격했지만 국제사회의 공조는 미미했고, 각국은 자국의 위기를 관리하는 데 급급하거나 원조를 체제홍보와 경쟁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역사 속의 일로 치부되던 전면적인 침략전쟁과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 시도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침략에 나선 것은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였고, 또 다른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UN총회 결의안에 기권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전쟁의 재발을 막고 국제 안보를 보장한다는 UN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한반도는 특히 잠재적인 위험이 큰 지역입니다. 2022년 북한 당국은 남한 공격을 염두에 둔 핵무기 개발 노선과 핵 교리를 발표하였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로, 전 세계는 중국의 대만 침공이 ‘다음 전쟁’이 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대만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여파는 즉시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할 것이며, 이는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급변사태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전후(戰後) 세계질서의 위기가 한반도 민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가까운 나라끼리 상시적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지역 내 강대국이 주변국들을 통합하거나 복속시키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서구 열강과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조선과 같은 약소국 민중들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전쟁을 낳았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945년 세계대전 종료 이후 성립한 세계질서는 명목상으로 모든 민족국가의 주권과 평등을 명시하였고, 강대국들의 무력행사를 공동으로 통제하는 집단안보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이득이라거나 보편적 진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현재보다 더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진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제시하는 질서란, 현대 이전의 지역 강대국 중심 질서로의 복귀입니다. 그 실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 ‘일대일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고대사를 현실 정치에 소환하는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고대 러시아 땅으로 항상 러시아 민족의 일부였다”며 침공을 정당화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2017년 미중정상회담 당시 “한반도는 실제로 중국의 일부이곤 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한반도 핵위기, 대만 위기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고, ‘신(新)애치슨라인’에 한국이 과연 포함될지 아닐지가 곳곳에서 논의됩니다.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탓에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망국의 교훈을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는 주문도 많습니다.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사회운동이 국제정세를 방관하거나 잘못 해석하지 않고, 누구보다 적확한 인식으로 상황을 주도해야 함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운동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전 세계 핵무력 반대’라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조차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NL(민족해방파, 자주파, 자민통) 강경파의 태도는 문제입니다. 이들의 강경한 입장은 사회운동이 일관된 반핵평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사회진보연대는 2023년 5월 12일 “전국민중행동은 민중운동 공동투쟁체로서 위상과 역할을 상실했다” 성명에서, 전국민중행동이 일부 NL 활동가들의 반대로 ‘북한의 선제적 핵공격 법령화 반대’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핵무력 반대’ 수준의 입장조차 채택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현실과 괴리된 입장으로 21세기를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통일 문제나 한반도 문제는 이른바 NL그룹들의 전문분야, 전유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NL은 과거 19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 당시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는 ‘민족 모순’(분단)과 미국에 대한 종속이며 사회운동의 핵심 기치는 ‘반미’(反美), ‘통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사회성격논쟁은 한국 사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혁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사회운동 내 대토론이었습니다.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도 합니다.) 이들 중에는 북한을 분단 해소와 한반도혁명의 ‘민주기지’로 여기며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수용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와 한반도 분단과 전쟁위기라는 현실은 많은 대학생, 노동자가 NL이 호소하는 ‘반미반일’과 ‘조국통일’을 수용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당시부터 NL노선은 김일성 1인 독재와 경제 실패, 비과학적 ‘주체사상’에 빠진 북한 체제에 무비판적이라는 문제가 이미 지적되었습니다. 또한 NL 혁명론은 남한 민중을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혁명의 주체로 설정하지 않고 북한의 대남노선에 종속시켜, 남한 사회운동을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는 사회운동을 분열시킬 뿐입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세계적인 냉전 종식의 흐름에서 북한은 여타 현실 사회주의 국가처럼 개혁·개방에 나서는 대신 고립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에 따라 북한의 권력세습, 핵무장, 인권 문제 등이 제기되었지만, NL은 이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거나, 도리어 이를 문제삼는 것은 ‘군부독재, 국가보안법의 잔재’, ‘주류 언론의 곡해’라며 북한의 권력세습, 핵무장을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대중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협소해졌습니다.
북한 핵실험에 대해 무비판적인 입장은 민주노동당 분열도 초래하였습니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권파이기도 했던 NL 주류는 북한 핵실험 규탄 성명을 당론으로 채택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또 NL 주류는 북한 공작원에게 남한 정치 동향과 민주노동당 당직자 정보를 누설한 ‘일심회 사건’에 대해, 관련자 제명 및 북한 당국에 대한 엄중한 항의 내용이 담긴 혁신안을 부결시키기도 했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당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권파만의 주장을 담은 ‘코리아연방공화국’ 공약을 무리하게 부각시키려다 당내 반발 및 분열을 자초하고, 결과적으로 대선 참패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 군부, 아프간 탈레반이 한국 사회운동의 동지입니까?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는 모든 국민의 권리다. 정치활동이 보장된 미얀마에서는 군부도 할 수 있다. 모든 군사적 항거를 천편일률적으로 악이라고 보는 것은 집단적 광기이며 내정간섭이다. - “유일상 교수의 미얀마 사태 바로보기 4탄”, 유일상 건국대 명예교수, 《민플러스》, 2021년 3월 4일
아프간 민중들이 미제국주의를 축출하고 나라의 자주권을 되찾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중략) 이와 같은 (인권) 문제들은 아프간이 자주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지, 인권 탄압을 우려해 훈수를 두거나 개입을 시도하는 것은 불필요한 내정간섭이라 할 수 있다. - “아프간의 최근 상황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안광획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민플러스》, 2021년 8월 25일
검증되지 않은 젊은 지도자(김정은)에 대해 세간의 우려는 컸다. 그러나 북녘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을 혁신하고, 무엇보다 군사외교적인 면에서 5년 여의 집중적인 (핵)개발과 대결을 통해 2017년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북미관계 정상화의 길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현재 사회주의 강국 건설, 비핵화와 국제평화 선도, 대등하고 평화적인 북미관계 지향을 내세우고 있다. - 2018년 민주노총 소책자 『평양, 모른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2018 노동자가 알아야 할 북녘 이야기』
심지어 NL 강경파들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NL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 《민플러스》는 “반(反)서방제국주의를 주도한”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는 정당하며, 이를 한국 사회가 한국의 군부 쿠데타와 같은 결로 혼동하고 반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실었습니다. 탈레반은 반서방 민족해방 자주투쟁의 모범이고, 아프가니스탄 인권 문제는 내정(內政)이므로 외부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는 물론 국제 사회와 한국 시민의 상식이나 그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만들어 온 연대사업과는 거리가 멉니다. 진보, 좌파의 가치로 여겨지는 민주주의·인권·평화의 관점에서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이들의 정세인식, 즉 ‘미국 패권의 위기와 반서방연대의 부상을 통해 다극화로 나아가는 세계’라는 틀 안에서는, 미얀마 군부, 아프간 탈레반뿐만 아니라 중국 시진핑 정권, 러시아 푸틴 정권, 이란 이슬람 신정일치 정권 등이 모두 인류를 더 평등한 다극화 세계로 인도할 긍정적 세력으로 제시됩니다.
양경수 집행부가 등장한 뒤, NL 강경파의 정세인식은 민주노총 사업 전반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노총 통일위원회는 이들의 정세인식을 ‘120만’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정책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 반전평화통일’ 운동을 한다며 북한의 핵무력 완성이 ‘북미관계 정상화’의 길이라고 설명하고, 시시각각 실체적 위협으로 떠오르는 북한의 핵 위협 동향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기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관념과 단호히 단절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할 때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인 태도는 NL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를 ‘분단체제’의 틀에서 파악하는 인식론이나 북한, 중국, 러시아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과오를 직시하기 어려워하거나,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낫다’고 방어하는 태도는 일부 사회운동도 공유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이 길로 계속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로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 길은 ‘미국 패권에 대한 반대’와 ‘일극이 아닌 다극 주도의 세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과 같이 진보세력 일반이 긍정하기 쉬운, 일견 아름다운 전망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정권들을 대안으로 호명하는 길이며 북한의 핵무장과 세습정권을 옹호하는 길입니다. 사회운동이 대중의 지지와 명예를 잃을 것이 확실시되는 길이며, 세계 곳곳에 더 많은 혼란과 폭력을 불러오는 데에 일조할 길입니다.
이 소책자는 사회운동에 몸담은 활동가 혹은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시민이 한반도·국제정세에 관해 할 법한 질문들에 답을 하는 ‘7문 7답’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먼저 <1부 북한 체제,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북한의 핵무장, 인권위기, 권력세습 문제와 관련된 질문들을 다룹니다. 사회운동의 통상적인 태도, 즉 북한의 핵무장과 모든 군사행위를 ‘미국의 책임’으로 두고 면죄부를 주는 논리나 북한의 인권위기를 부정하고 3대 권력세습을 옹호하는 모습과 거리를 두고, 북한 체제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비판해야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적합하게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2부 NL의 국제정세 인식, 무엇이 문제인가>에서는 최근 국제정세의 화두인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갈등, 대만 위기에 대한 질문들에 답하며, 북한 정권의 이해관계를 수용한 NL 강경파의 국제정세 인식이 우리 사회운동을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 NL 강경파를 비롯하여 일부 사회운동 세력이 응원하는 “중국과 러시아가(그리고 북한이) 주도하는 다극 세계로의 전환”이 결코 노동자민중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살피고, 사회운동은 오히려 시진핑 정권, 푸틴 정권에 맞서 싸우는 중국, 홍콩, 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민중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동자민중과 함께 한반도와 세계의 미래를 책임지려는 이들이 과거의 관념과 단호히 단절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 소책자가 그러한 토론을 여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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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전체 요약문
Q1.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의 위협 때문인가요?
북한이 핵무장에 나서게 된 책임은 미국의 대북위협에 있다는 NL 주류의 주장과 다르게, 실제 역사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세계가 탈냉전과 핵군축,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고, 한반도에서도 남한 내 미국 핵무기 철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한미군사훈련 중단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즉, 북한의 핵무장은 세계적인 탈냉전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한반도 1차·2차 핵위기, 6자회담 등 실제 비핵화 협상에서도 북한은 약속을 지속적으로 어겼으며 북미합의의 파기에 앞서 물밑에서 지속적으로 핵개발을 진행한 정황이 있습니다.
현재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공화국의 국체”라고 부를 만큼 비핵화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미국이 아니라 남한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할 의사를 드러내며, 대남용 전술핵무기를 개발하고 선제핵공격을 합법화하는 핵무력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북한 당국이 밝히는 대남‘통일전쟁’ 계획, 즉 전술핵을 남한의 주요 군사거점에 투하하고, 전략핵 사용 위협을 통해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는 시나리오와 일치합니다. 진보당, 한국진보연대, 《민플러스》 등 NL 주류는 북한의 이러한 행보를 ‘국방력, 비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민주노총 통일교과서는 NPT(핵무기비확산조약) 체제는 강대국들의 핵 독점 체제일 따름이며 북한의 핵무장이 이에 균열을 냈다고 서술하지만, 대부분 비핵국가와 세계 반핵평화운동은 NPT 평가회의, 비핵지대조약, TPNW(핵무기금지조약) 등 비핵평화의 수단을 통해 강대국들의 핵 패권 해체와 모든 핵무기의 철폐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비핵평화의 길을 택하는 대신 핵무장을 선택한 북한의 행보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비핵화 대화의 조건으로 들었던 “대북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의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최근 북한 당국의 태도는 결국 핵무장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영구적인 정권 안전보장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Q2. 북한 체제에는 진보적인 면도 있지 않나요?
북한의 핵무장, 인권탄압, ‘3대 세습’을 고려하면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라거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어떤 진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북한인권은 여러 교차검증을 통해 심각한 위기가 실존한다고 밝혀진 문제로, 사회운동은 북한인권 문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이라고 방어하는 것도 부적절합니다. 인류가 보편적인 합의를 추구해 온 인권을 개별 국가가 침해한다면 국제사회와 사회운동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정치적 자유 대신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인권 담론을 내세우지만, 자유 없이는 평등도 없었던 것이 현실입니다. 북한의 인권위기는 ‘혁명 수호’를 명분으로 ‘혁명적 폭력’을 정당화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결함에서 비롯하였으며, 북한 세습정권의 통치를 보장하기 위해 민중을 통제하고 핵무장을 고도화하여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과정에서 심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규모 정치범수용소·즉결처형·공개처형과 같은 극단적 인권위기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북한 민중의 식량권·건강권도 위태롭습니다.
민주노총 통일교과서 등은 남북통일경제를 한반도 노동자민중의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북핵 문제의 해결 없이는 남북경제협력 사업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혈통승계를 정당화하는 수령론과 후계자론을 통해 집권한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딸 김주애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동시에 공개하며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권력세습과 이를 보증할 핵무장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의 민족’(우리민족 제일주의) 담론보다는 남한과 구별되는 북한의 특수성, 즉 ‘우리국가(북한) 제일주의’, ‘김일성 민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Q3.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대리전인가요?
여전히 북한 정권을 한반도 ‘민족해방’과 변혁의 지도세력으로 바라보는 NL 주류는 현재 국제정세의 주요 지점인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전략적 경쟁, 대만 문제를 해석하는 데에도 북한 정권의 입장을 따릅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이 유도한 대리전으로, 우크라이나 민중을 미국 대신 전쟁을 수행할 따름인 존재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푸틴 정권이 장기통치를 위해 지지율 상승을 노리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시작되었고, UN헌장과 국제법, 기존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맺은 합의와 조약들에 위배되는 명백한 불법 침략입니다. 러시아군의 침략과 폭력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은 정당합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고 해서, 침략과 그에 맞선 항전이라는 이 전쟁의 기본 성격이 바뀌지 않습니다.
Q4.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일까요?
NL 주류 세력은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러시아와 중국의 반감을 사서 국익을 훼손할 뿐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마치 전쟁범죄에 동참하는 일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가의 안보를 집단적으로 지키는 것이 UN의 원칙이므로, 침략을 당한 나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앞으로 세계를 뒤흔들 일이며 한반도의 미래와 연관이 깊으므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단순히 멀리 떨어진 나라에 대한 ‘오지랖’이나 미국의 압박에 의한 ‘굴욕외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야욕을 저지하여 크든 작든 모든 국가의 평등과 자유를 명시한 전후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국, 러시아의 대국중심질서보다 인류의 실리에 부합합니다.
Q5. 미국이 신냉전을 조장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민주노총 통일교과서, 《민플러스》 등은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전쟁을 유도하고 공급사슬 디커플링을 추진하며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해 신냉전을 조장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국내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제질서를 위협하면서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사실이지만, 중국경제는 미국을 추월하지 못하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중국과 러시아는 그 대신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 공격적 대외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위기가 바로 그 결과입니다.
Q6. 대만 위기에 개입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일까요?
대만 위기는 중국공산당이 권위주의적 통치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대만 통일’을 제기하면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홍콩 민주화운동 진압 등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목도한 대만 시민들의 ‘통일 반대’ 여론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변경’ 반대는 ‘내정간섭’이 아니라 주권적 실체를 가진 대만 시민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며, 중국의 대만 침공이 불러올 동아시아 전쟁 위기를 막기 위함입니다.
Q7.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다극체제가 세계 질서의 대안일까요?
중국과 러시아, 북한, 이란 등 반미국가들이 평등과 호혜의 새로운 ‘다극체제’ 국제질서를 견인할 것이라는 NL 그룹 일각의 주장과 달리,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 “일대일로” 등 중국의 대표 정책들이 낳은 결과나 러시아 정치·경제의 “마피아 관례”를 보면 이들 국가의 정치·경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된다거나 진보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강제노동수용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여성·성소수자 억압과 같은 폭력, 인권탄압 행태를 단지 ‘반서방국가’라는 이유로 정당화하거나 못 본 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권위주의 정권들을 지지하는 대신, 이들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대만, 홍콩, 이란 등지의 민중이 벌이는 투쟁에 주목하고 연대하는 것이 사회운동이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