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2024.05.28
민주노총이 내셔널 센터로서 우뚝서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도 열린다
"노총 차원의 교섭이 있어야 진보정당도 대중 투쟁과 제도권 투쟁을 결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
5월 21일 수요일 늦은 오후 《사회운동포커스》에서 4개월간의 짧고 굵은 임기를 보내고 있는 양경규 정의당 국회의원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21대 국회의원 임기가 막바지라 한산한 의원회관에서 양경규 의원실만 유독 분주해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준 양경규 의원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인터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싣는다. (-> 인터뷰 1부 보기)
4. 진보정당과의 관계 설정
임필수 정책교육실장(이하 임): ‘협동하는 진보정치’ 노선은 정의당의 공식 방침으로 수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선, 특히 진보당과 협력노선은 사후적으로 보더라도 유효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나아가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양경규 정의당 국회의원(이하 양): 노선 자체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누구냐는 문제일 텐데요, 이제는, 지금 시점에서는 진보당은 진보정당이라는 범주에서 정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더라도 진보당이 포괄되느냐의 문제는 다른 차원입니다. 협동하는 진보정치 노선은 당이 진보정치로서 자기 전망을 그리려면 당내 좌파 블록이 추구해야 할 노선이라고 봅니다. 당이 자기중심을 못 잡으면서, 정의당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그룹이 등장했고, 아예 밖에서 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습니다. 그 와중에 못 해도 3~5%의 지지율은 나올 텐데 왜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하느냐는 입장도 있었죠. 주로 당권을 쥔 주류그룹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전환은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을 유지할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끝에, 진보정치 세력을 정의당 중심으로 모아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세력 중에는 진보당이 포함된 것이죠.
물론, 진보당의 본질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민족문제라는 것이 일정하게 유용성을 갖고 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 뒤로 그 필요성이 사상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미망을 갖거나 자신들의 노선에 대해 자기반성이 없는 점에 관해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3대 세습, 북한 인권, 북핵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개입해야 합니다. 운동은 세상과 부딪히면서 바꿔나가는 것이고, 진보당도 부딪히면서 바꿔야 하는, 투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해서든 발목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쉽게 민주연합 노선으로 휩쓸릴 테니까요.
너무 순진한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협동하는 진보정치를 내세웠던 맥락은 좀 더 폭넓게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실제로, 강서 보궐선거에서 작은 계기를 만들었으면 해서 선거운동까지 중단하는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총선 가기 전 징검다리를 만들어서 진보정치의 연대연합을 이뤄내고, 발을 한 번 묶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당시 권수정 후보가 당 대표단을 포함한 테이블을 만들고 진보정당이 협력할 방안을 논의해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었던 것이고,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막판에 비상한 대책을 취했던 것이죠. 다시 원상 복귀해서 선거를 치르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진정성을 갖고 접근했던 건 사실입니다.
임: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판단에 대해 폄하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회진보연대는 진보당의 국제정세 인식이 매우 심각하다는 판단을 과거보다 훨씬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에 민노당에 민족해방파가 참여하고 사회진보연대 역시 전국민중연대에서 민족해방파와 함께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가 진척되면 남북 간 평화공존 체제가 정착될 가능성이 있고, 그럴 경우 민족문제나 북한 문제에 관한 정파 간 인식 차이가 완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북한이 통일노선을 폐기하고 민족해방파에서는 무력 통일까지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라 더 이상 협력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런 정세인식을 민주당과 진보당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더 엄중하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양 : 정세인식에 저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미국에 대한 진보적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발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왔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반미가 곧 진보로 통하던 시대와는 다른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음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대북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책도 고민이 필요하고요. 저는 다만 이러한 문제를, 엄연히 진보라는 테두리에 존재하는 저들을 디폴트로 놓고 운동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디폴트로 놓는 순간 대중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여하튼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5.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본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장래
임: 사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로, 선거 때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선거방침 논의는 그때그때마다의 방식으로 진통을 겪었습니다. 통합진보당을 배타적 지지해야 하느냐, 민주노총이 진보대통합을 강제해야 하느냐 등등에다가, 이번엔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한 진보당을 민주노총 지지 정당에 포함해야 하느냐는 문제도 불거졌습니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을 정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다른 접근법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일례로, 이탈리아 CGIL의 경우 이탈리아 공산당이 분열한 이후 양 정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특정 정당에 치우치면 노동조합의 단결을 해친다고 본 것이죠.
양: 협동하는 진보정치를 통해서 진보정치 영역이 일정하게 정리되는 구조라면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가능할 수 있다고도 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특정 정당 중심으로 단일한 정치방침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에 국민승리21을 만들 때 저는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었습니다.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1%의 지지를 받았고, 이후 3년이 걸려 당 창당까지 가게 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그 과정을 제가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공공연맹 위원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1999년 수배 중에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맡게 되고 동시에 민주노동당 창당작업을 총괄하는 정치위원장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민주노총은 정치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를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통해서 추진한다’라는 소위 배타적 지지방침을 준비합니다.
2000년 1월에 당이 출범하고 2월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배타적 지지방침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사회당 등 좌파정당 운동을 하는 그룹도 있었고 배타적 지지방침에 대해 반발이 있었지만, 제가 배타적 지지방침을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당시에 배타적 지지방침이 원론적으로 옳다기보다는, 대중적 기반을 가진 노동조합의 책임 있는 자기 역할이 없으면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바로서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꼭 필요한 시기라고 설득했던 것이고, 그 이후 민노당 성장에 배타적 지지방침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누구든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재판단이 필요한 것이고, 더군다나 당이 분당된 상황에서는 배타적 지지방침으로 대중조직 질서를 훼손해서는 안 될 일이죠.
제가 노동정치연대 활동을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치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이 선 노동자들의 정치 부대가 필요한 거지, 2000년 당시 민주노동당을 만들던 시절처럼 결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진보정치 전체의 판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어려운 상황이기에 민주노총의 방침으로 정리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대중 조직과 정치운동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선은 ‘협동하는 진보정치’를 통해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이 앞으로 진보정치의 판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숙고를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진보정당들만으로는 역부족이고, 사회운동단체와 노동운동 내에서 진보당과는 선을 긋고 활동하는 그룹들과 이후를 모색해야죠. 시민사회운동 역시 민주당에 완전히 투항한 상황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영역을 꾸려갈 것인지 모색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무슨 통합이니 뭐니 이런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말고, 어떻게 연대하면서 장기적으로 신뢰를 쌓아가고 운동 전반을 다시 소생할 수 있을지 이런 논의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임: 이탈리아 CGIL의 경우 한국처럼 총선 시기 정당들에 정책요구안을 제시하는 식의 활동을 따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상적으로 중앙교섭을 내셔널 센터로서 하고 있기에 총선용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민주노총 일각에서는 노사정은 개량이지만 현안은 민주당 을지로 위원회랑 같이하는 것은 괜찮다는 사고가 만연한데, 이처럼 민주당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진보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없으면 민주당에 급속히 쏠려갈 것이라는 우려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노총 차원에서 내셔널 센터로서 역할을 수립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 제가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민주노총 대표로 참여했었는데요, 사실 노사정, 경사노위 등등을 통틀어봐도 한국에서 노사정 모델이 제대로 기능했던 것은 노개위가 전무후무했습니다. 노사정에서 합의 도출에 실패한 사안으로 결국 96~97년 총파업까지 가게 된 것이죠. 저는 노사정에 대해 우리 운동이 경로 의존적으로 가지는 급진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래서 당시 노사정 중앙 테이블에 소극적이던 사회진보연대와도 의견충돌이 있었었죠.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상황에서도 대화의 창구와 노사정 중앙교섭 틀을 갖는 것을 꾸준히 시도해야 합니다. 실제로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도권에 순치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춘다면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극복할 문제라고 봅니다.
플랫폼 노동자 얘기만 하더라도, 진보정당을 통해 의원입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플랫폼 노동자가 250~350만 명이나 되는 상황에서 노동 양극화가 심각해지는데, 어떤 형식으로든지 중앙교섭 없이 이 문제를 극복할 재간이 없습니다. 정규직들이 비정규 운동을 열심히 연대한다고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어림도 없습니다. 산별 중앙교섭이 이뤄진다면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어느 산별도 제대로 실행하는 데가 없는 것이 현재 상태죠.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운동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는 와중에, 민주당에 흡수되는 상황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민주노총 조합원의 7~80%는 민주당에 투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노사정 중앙교섭과 같은 노총 차원의 교섭이 있어야 진보정당도 일정하게 대중 투쟁과 제도권 투쟁을 결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수 있겠죠.
사람들이 스웨덴 사민주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한국의 구조에서 사민주의 정당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스웨덴식 노사관계와 그 속에서 형성된 조직률이 받쳐주고, 한국과 지정학적인 조건도 다르겠죠. 우리는 옆에 중국, 북한이 있고 미국에 일정하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끼리 쏙닥쏙닥해서 할 수 있는 사민주의적 토대라는 게 주체적으로나 객관적 조건으로나 형성되기 쉽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조건들을 만들어가는 정치운동을 장기적으로 숙고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임필수 실장이 한 얘기를 되풀이 했는데요, 함께 사회운동,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전망 모색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임: 이번 총선을 계기로 진보정당 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한 순환이 끝났다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합니다. 저도 그런 인식에 동의하고요. 아까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정치세력화 운동의 1등 공신은 양경규 의원이 아닐까 합니다. 그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으로서 그 시작을 함께 했고, 가장 어려운 순간이라 할 수 있는 현재도 최전선에서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세력화 운동의 한 순환이 마감했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서 의원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보는데요, 그에 대한 소회나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는 독자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바가 있으신지요?
양: 처음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이 무용하다고 얘기했었는데요. 저는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시대가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고, 그에 복무하는 것이지 내가 특별하게 어떤 계획을 갖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개인의 결단을 자극할 만큼 운동의 역동성이 충만한 시대가 아닙니다. 시대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그 소임이 뭐냐 했을 때, 노동운동, 사회운동이 민주당에 많은 부분 잠식당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일 텐데요. 진보정치 운동으로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이 남아 있지만 정치적 변수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정치운동의 각 영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 흐름을 어떻게 같이 모색할 것이냐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저는 기존에 해오던 경로를 탈피하는 사고가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물론 이를 의도적으로 너무 심하게 해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야 한다는 정념에 불타는 사람들도 있지요.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운동이 지나치게 경로 의존적인 경향이 있기에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진보연대 역시 나름대로 시대가 요구하는 운동에 대해서 그동안 해왔던 운동의 경로를 돌아보며 변경한 부분도 있다고 보이는데요,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깊은 토론을 해주셨으면 좋겠고 그 과정에서 같이 토론할 부분을 찾았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