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공공성 파괴와 7차 교육과정
공교육의 신화와 실상 - '위대한 평등장치' v.s '사회불평등의 재생산 기제'
얼마 전 접했던 통계치가 생각난다. 올해 서울대 신입생 조사결과 서울출신 학생 중 강남의 특정 3개구 출신이 50% 이상을 차지했다는 내용. 이제 잘 사는 애들이 공부마저 잘 하는 모양이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하게 파급되어 일반화된 생각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 사회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 교육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교육권을 균등하게 보장함으로써 사회는 좀더 평등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육에서의 차별은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이런 생각은 학교교육의 확대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국가마다 초등-중등-고등으로 이어지는 공교육체제가 구축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교육받을 권리'의 보장은 '교육기회', 즉 양적인 측면에 집중되었고, 어느새 중등교육 정도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공교육은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양적 팽창을 이룩(!)했다.
급속한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강력한 국가독점과 '합리적인 개인'들의 치열한 학력경쟁이 함께 있었다. 국가는 교육 위에 군림할 뿐 공공성 확대 책임에는 소홀하였고, 개인들은 이기적 동기를 충족시키는데 교육열을 발산하였다. 덕분에 우리의 공교육은 본래 개념에 충실하기보다는 국가(더 정확하게는 정권)와 관료의 독점으로 굴절되고 개인간 내지는 가문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일그러져 초라하게, 그러나 여전히 강력하게 우리 앞에 서 있다.
'위대한 평등 장치'라는 학교교육에 대한 상식적 믿음과 달리, 실제로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은폐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학교에서 다루는 공식적 교육과정은 실제로는 중산층 이상에게 유리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학교의 잠재적 교육과정은 순치된 노동력을 기르는 구실을 한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학업성취도는 아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반영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가 마치 능력주의 사회인 양 포장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학교로 대표되는 공교육은 '위대한 평등의 장치'라는 허상과 '불평등의 재생산 기제'라는 실상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공교육의 '재생산' 기능은 학교가 처한 불평등한 사회현실의 반영이다.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소신을 밝힐 때는 학교교육(공교육)의 질이 보다 좋아져서 사교육비부담이 줄어야 된다고 그리고 모두가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게 막상 자기 자식의 일이 되면 가족이기주의가 발동을 한다. 경쟁에서 유리한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부모가 너무 많다. 이네들이 우리의 중산층 학부모들이다. 과외 금지 위헌 판결이 났을 때, 당장은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과외 허용이 대세로 굳어지자, 저마다 적응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손해 안 보려면 그래야 한다는 게 사람들 생각이다. 새로운 환경이 오면 조금 비판하다가도 금방 적응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교육 때문에 이러는 게 괴롭다고 하고 교육이 좀 바뀌기를 기대해왔다.
1990년대 들어 공교육에서도 '경쟁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육 대통령'을 자임하는 수장 밑의 사람들은 기존의 공교육을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신교육체제'를 구축하겠다고 교육개혁방안을 국민 앞에 깜짝쇼하듯 발표했다. 기존의 교육은 공급자 위주의 획일적이고 질 낮은 것이며, 지식기반이자 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경쟁력 없는 교육이라고 진단했다. 이제 교육소비자들에게 폭넓은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공급자들끼리는 다양한 교육을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럼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개혁이 시작된 후 학교현장은 많이 흔들렸다. 1999년에는 급기야 '붕괴'라는 끔찍한 말마저 등장했다. 교사들은 교실, 학교, 나아가 공교육이 이대로 붕괴된다면, 없는 집 자식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건 사실 오래된 문제이다. 학교교육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에 위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 그나마 1980년대까지는 없는 집 자식들도 교과서 내용을 성실하게 공부하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고, 대학에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 그런 희망은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도 이걸 너무나 잘 안다. "집안이 어느 정도 되야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어요"라며. 어떤 교사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도 생각난다. "요즘은 장학생 추천하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추천 조건이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서 학업이 우수한 학생인데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아이들은 요즘 거의 찾기 어려워요."
이미 1990년대부터 공교육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를 시작으로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킬 교육과정이 실시된단다.
7차 교육과정의 기본 구조와 문제점
7차 교육과정은 현재 초등학교 1, 2학년에 적용되고 있으며 내년에 초등학교는 4학년/ 중학교는 1학년까지, 내후년에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단계별로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과활동과 재량활동, 특별활동의 3가지로 구성된다. 7차 교육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단계형, 심화보충형, 과목선택형의 3가지가 있다. 학생 개개인은 학년에 따라 그리고 과목에 따라 각각의 수준별 교육과정을 전국적으로 정해진 룰에 따라 혼합하여 배워야 한다.
둘째, 10학년제를 도입하였고 10개 국민공통기본교과를 설정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를 10학년으로 구분하여 10개 국민공통기본교과(수학, 영어, 사회, 과학, 국어,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실과)를 설정하여 운영하는 체제이다.
셋째, 재량활동을 신설하였다. 초등학교는 주당 2시간, 중학교는 4시간, 고등학교는 6시간의 재량활동시간이 생겼다. 재량활동은 다시 교과 재량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으로 나뉜다.
넷째, 특별활동 영역이 정비되어 자치활동과 클럽활동이 두 영역을 위한 별도의 시간규정이 없어졌으며, 특별활동과 특기적성교육을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였다.
이중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개정내용은 '수준별 교육과정'의 도입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1995년 5·31 교육개혁안에서 "가장 좋은 교육은 학생의 개인차가 충실히 고려되는 교육이며, 개별화는 교육선진 정도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므로, 학생들의 잠재능력의 발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근거에 의해 등장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과별로 수준을 달리하여 학생 개개인의 학습능력에 맞춰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개별화 교수·학습의 한 형태이다.
학문 중심 교육과정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학습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습능력이 뒤진 아동들은 학교에서의 6시간을 아무 의미없이 정박아처럼 보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학습자들의 능력에 맞는 수준으로 교육을 하면, 보다 높은 수업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학습부진아들 때문에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주장과, 성적이 부진한 아동들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보다 쉬운 것을 가르치면 흥미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여 잘하는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수준별 교육과정에 더욱 매력을 갖게 만들었다.
최근 수준별 교육과정 연구학교 또는 연구발표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첫째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했더니, 전보다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학원을 다닌다는 것이다. 둘째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수준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세분화되는 수준으로 나눌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다. 넷째,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적어도 10분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이는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해 기대하던 긍정적인 효과와 반대되는 결과들이다. 제7차 교육과정을 개발했던 학자들은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점차적으로 수준의 차가 줄어들어 마침내는 수준을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열심히 하기 때문에 수업분위기가 매우 좋을 것이며, 학교에서 자기 수준에 따라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원에 갈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수준을 더 늘려놓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이다. 또, 수준별 교육과정에 의해 교육을 하면 학생들의 성적과 관련된 사항보다 더 심각한 심리적, 정서/행동상의 문제점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수준별 교육과정이 도입되는 7차 교육과정에서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원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 학업성취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어 있다. 또한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는 열반에 배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교육으로 더욱 많이 몰려가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더욱 소외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학습부담이 더욱 커진다. 교과내용의 수준을 현실화하고 양도 많이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교육과정 개편 때마다 제기되는 데도 불구하고 학자 집단의 이해에 밀려 이번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교사 입장에서는 과밀학급 뿐 아니라 가르쳐야할 내용이 많다보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인 획일적인 강의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정해진 진도 나가기에 바빠서 아이들이 진짜로 배웠던 아니건 교과서를 끝내는 데 급급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7차에서도 이런 문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단위, 교사단위의 교육과정을 구성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국적인 시험으로 잘 가르치고 배웠는지를 따져보겠다고 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다 다루어야만 한다. 학생들이 정말로 성취를 했건 안 했건.
7차 교육과정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특징 중의 하나는 '선택권'의 확대이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래야 옳은 걸까? 7차 교육과정대로라면 고등학교 2, 3학년 단계에서 학생들은 10년 간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서 확인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심화시켜나갈 수 있는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양화했다는 것이, 기존의 교과서를 분철하고 대학 수준의 내용을 중등에 내려보내서 여러 개의 강좌를 넓게 나열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정말로 선택이 보장되어야 한다면 학생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대해 선택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 대학진학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할 것이 뻔한 교과활동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려면 선생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교사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은 7차 교육과정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어디 이 뿐인가? 아이들이 그나마 같이 부대낄 수 있었던 '학급'의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이제 아이들은 자기와 취향이 맞고 성적대가 비슷한,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는 수준이 비슷한 집단으로 분류될 것이다. 서로 이질적인 아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조율해갈 기회는 앞으로 사라질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저 교사의 수준은 상', '저 아이의 수준은 중' 하는 식으로 점수 말고는 아무 것도 매개되지 않는 건조한 만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7차 교육과정은 공교육에서 실현해야 할, 그러나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기본 이념과 가치와는 점점 더 먼 방향으로 우리 교육을 이끌어갈 것이다. 7차 교육과정은 한마디로 80의 아이들을 과감히, 노골적으로 소외시키면서 20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생산성 중심, 효율성 중심의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철저히 개체주의적인 인간관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반공동체적 교육과정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원정책과 자립형 사립학교와 짝을 이루어 '공급자'간의 경쟁과 '소비자'의 선택-그것도 구매력에 따라-에 교육을 내맡기는,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결정적 위기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육시장화의 한국형 버전이다.
자, 이래도 7차 교육과정에 대해 기대할 것이 남아있는가? 여전히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가? 단순히 우리의 교육여건이 7차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리기는 역부족이라고 답할 건가? 신중하게 다음 물음에 답한 후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7차 교육과정은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해줄까? 7차 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가? 7차 교육과정은 모든 아이들이 자기 실현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는가? 7차 교육과정은 학교를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 것인가? 7차 교육과정은 교육의 공공성을 지금보다 확대해 주는가?
대안과 투쟁
대부분의 상식을 갖춘 사람들은 7차 교육과정 역시 기존의 교육과정 개편 - 개편해봤자 별 변화도 없던 - 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교사들은 교육과정의 개편을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며, 바뀌더라도 대충 뭉개면서 형식적으로만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적 상식이 있다.
7차 교육과정 등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교육정책들은 대부분 앙상하게나마 유지되던 교육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들이었고, 7차 교육과정을 계기로 그러한 위기는 전면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초·중등 교육의 구조조정은 7차 교육과정의 본격적 실시와 더불어 더욱 강도높고 폭넓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공교육은 철저히 불평등의 재생산과 소수의 경쟁력을 키우는 20대 80 사회에 걸맞는 모습으로 재편되어 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과정 투쟁은 사회적인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전교조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7차 교육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7차 교육과정이 공교육의 해체로 귀결되리라는 문제의식에서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을 유보시키는데 투쟁력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대안은 아직 한번도 이 땅에서 제대로 실현된 바 없었던 '공교육', 교육의 공공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우리교육을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수준과 경제력에 따른 차별적 교육이 아니라, 누구나 배워야 될 필수적인 내용과 수준이라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을 모든 아이들이 배우고 도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7차 교육과정을 건 투쟁은 교육의 공공성을 담보로 하는 투쟁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아마 공교육이라는 개념은 한국 땅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얼마 전 접했던 통계치가 생각난다. 올해 서울대 신입생 조사결과 서울출신 학생 중 강남의 특정 3개구 출신이 50% 이상을 차지했다는 내용. 이제 잘 사는 애들이 공부마저 잘 하는 모양이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하게 파급되어 일반화된 생각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 사회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 교육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교육권을 균등하게 보장함으로써 사회는 좀더 평등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육에서의 차별은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이런 생각은 학교교육의 확대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국가마다 초등-중등-고등으로 이어지는 공교육체제가 구축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교육받을 권리'의 보장은 '교육기회', 즉 양적인 측면에 집중되었고, 어느새 중등교육 정도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공교육은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양적 팽창을 이룩(!)했다.
급속한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강력한 국가독점과 '합리적인 개인'들의 치열한 학력경쟁이 함께 있었다. 국가는 교육 위에 군림할 뿐 공공성 확대 책임에는 소홀하였고, 개인들은 이기적 동기를 충족시키는데 교육열을 발산하였다. 덕분에 우리의 공교육은 본래 개념에 충실하기보다는 국가(더 정확하게는 정권)와 관료의 독점으로 굴절되고 개인간 내지는 가문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일그러져 초라하게, 그러나 여전히 강력하게 우리 앞에 서 있다.
'위대한 평등 장치'라는 학교교육에 대한 상식적 믿음과 달리, 실제로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은폐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학교에서 다루는 공식적 교육과정은 실제로는 중산층 이상에게 유리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학교의 잠재적 교육과정은 순치된 노동력을 기르는 구실을 한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학업성취도는 아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반영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가 마치 능력주의 사회인 양 포장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학교로 대표되는 공교육은 '위대한 평등의 장치'라는 허상과 '불평등의 재생산 기제'라는 실상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공교육의 '재생산' 기능은 학교가 처한 불평등한 사회현실의 반영이다.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소신을 밝힐 때는 학교교육(공교육)의 질이 보다 좋아져서 사교육비부담이 줄어야 된다고 그리고 모두가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게 막상 자기 자식의 일이 되면 가족이기주의가 발동을 한다. 경쟁에서 유리한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부모가 너무 많다. 이네들이 우리의 중산층 학부모들이다. 과외 금지 위헌 판결이 났을 때, 당장은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과외 허용이 대세로 굳어지자, 저마다 적응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손해 안 보려면 그래야 한다는 게 사람들 생각이다. 새로운 환경이 오면 조금 비판하다가도 금방 적응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교육 때문에 이러는 게 괴롭다고 하고 교육이 좀 바뀌기를 기대해왔다.
1990년대 들어 공교육에서도 '경쟁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육 대통령'을 자임하는 수장 밑의 사람들은 기존의 공교육을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신교육체제'를 구축하겠다고 교육개혁방안을 국민 앞에 깜짝쇼하듯 발표했다. 기존의 교육은 공급자 위주의 획일적이고 질 낮은 것이며, 지식기반이자 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경쟁력 없는 교육이라고 진단했다. 이제 교육소비자들에게 폭넓은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공급자들끼리는 다양한 교육을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럼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개혁이 시작된 후 학교현장은 많이 흔들렸다. 1999년에는 급기야 '붕괴'라는 끔찍한 말마저 등장했다. 교사들은 교실, 학교, 나아가 공교육이 이대로 붕괴된다면, 없는 집 자식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건 사실 오래된 문제이다. 학교교육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에 위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 그나마 1980년대까지는 없는 집 자식들도 교과서 내용을 성실하게 공부하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고, 대학에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 그런 희망은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도 이걸 너무나 잘 안다. "집안이 어느 정도 되야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어요"라며. 어떤 교사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도 생각난다. "요즘은 장학생 추천하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추천 조건이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서 학업이 우수한 학생인데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아이들은 요즘 거의 찾기 어려워요."
이미 1990년대부터 공교육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를 시작으로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킬 교육과정이 실시된단다.
7차 교육과정의 기본 구조와 문제점
7차 교육과정은 현재 초등학교 1, 2학년에 적용되고 있으며 내년에 초등학교는 4학년/ 중학교는 1학년까지, 내후년에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단계별로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과활동과 재량활동, 특별활동의 3가지로 구성된다. 7차 교육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단계형, 심화보충형, 과목선택형의 3가지가 있다. 학생 개개인은 학년에 따라 그리고 과목에 따라 각각의 수준별 교육과정을 전국적으로 정해진 룰에 따라 혼합하여 배워야 한다.
둘째, 10학년제를 도입하였고 10개 국민공통기본교과를 설정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를 10학년으로 구분하여 10개 국민공통기본교과(수학, 영어, 사회, 과학, 국어,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실과)를 설정하여 운영하는 체제이다.
셋째, 재량활동을 신설하였다. 초등학교는 주당 2시간, 중학교는 4시간, 고등학교는 6시간의 재량활동시간이 생겼다. 재량활동은 다시 교과 재량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으로 나뉜다.
넷째, 특별활동 영역이 정비되어 자치활동과 클럽활동이 두 영역을 위한 별도의 시간규정이 없어졌으며, 특별활동과 특기적성교육을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였다.
이중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개정내용은 '수준별 교육과정'의 도입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1995년 5·31 교육개혁안에서 "가장 좋은 교육은 학생의 개인차가 충실히 고려되는 교육이며, 개별화는 교육선진 정도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므로, 학생들의 잠재능력의 발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근거에 의해 등장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과별로 수준을 달리하여 학생 개개인의 학습능력에 맞춰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개별화 교수·학습의 한 형태이다.
학문 중심 교육과정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학습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습능력이 뒤진 아동들은 학교에서의 6시간을 아무 의미없이 정박아처럼 보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학습자들의 능력에 맞는 수준으로 교육을 하면, 보다 높은 수업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학습부진아들 때문에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주장과, 성적이 부진한 아동들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보다 쉬운 것을 가르치면 흥미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여 잘하는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수준별 교육과정에 더욱 매력을 갖게 만들었다.
최근 수준별 교육과정 연구학교 또는 연구발표에서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첫째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했더니, 전보다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학원을 다닌다는 것이다. 둘째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수준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세분화되는 수준으로 나눌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다. 넷째,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적어도 10분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이는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해 기대하던 긍정적인 효과와 반대되는 결과들이다. 제7차 교육과정을 개발했던 학자들은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점차적으로 수준의 차가 줄어들어 마침내는 수준을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열심히 하기 때문에 수업분위기가 매우 좋을 것이며, 학교에서 자기 수준에 따라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학원에 갈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수준을 더 늘려놓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이다. 또, 수준별 교육과정에 의해 교육을 하면 학생들의 성적과 관련된 사항보다 더 심각한 심리적, 정서/행동상의 문제점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수준별 교육과정이 도입되는 7차 교육과정에서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원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 학업성취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어 있다. 또한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는 열반에 배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교육으로 더욱 많이 몰려가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더욱 소외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학습부담이 더욱 커진다. 교과내용의 수준을 현실화하고 양도 많이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교육과정 개편 때마다 제기되는 데도 불구하고 학자 집단의 이해에 밀려 이번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교사 입장에서는 과밀학급 뿐 아니라 가르쳐야할 내용이 많다보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인 획일적인 강의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정해진 진도 나가기에 바빠서 아이들이 진짜로 배웠던 아니건 교과서를 끝내는 데 급급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7차에서도 이런 문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학교단위, 교사단위의 교육과정을 구성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국적인 시험으로 잘 가르치고 배웠는지를 따져보겠다고 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다 다루어야만 한다. 학생들이 정말로 성취를 했건 안 했건.
7차 교육과정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특징 중의 하나는 '선택권'의 확대이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래야 옳은 걸까? 7차 교육과정대로라면 고등학교 2, 3학년 단계에서 학생들은 10년 간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서 확인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심화시켜나갈 수 있는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양화했다는 것이, 기존의 교과서를 분철하고 대학 수준의 내용을 중등에 내려보내서 여러 개의 강좌를 넓게 나열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정말로 선택이 보장되어야 한다면 학생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대해 선택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 대학진학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할 것이 뻔한 교과활동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려면 선생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교사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은 7차 교육과정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어디 이 뿐인가? 아이들이 그나마 같이 부대낄 수 있었던 '학급'의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이제 아이들은 자기와 취향이 맞고 성적대가 비슷한,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는 수준이 비슷한 집단으로 분류될 것이다. 서로 이질적인 아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조율해갈 기회는 앞으로 사라질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저 교사의 수준은 상', '저 아이의 수준은 중' 하는 식으로 점수 말고는 아무 것도 매개되지 않는 건조한 만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7차 교육과정은 공교육에서 실현해야 할, 그러나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기본 이념과 가치와는 점점 더 먼 방향으로 우리 교육을 이끌어갈 것이다. 7차 교육과정은 한마디로 80의 아이들을 과감히, 노골적으로 소외시키면서 20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생산성 중심, 효율성 중심의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철저히 개체주의적인 인간관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반공동체적 교육과정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원정책과 자립형 사립학교와 짝을 이루어 '공급자'간의 경쟁과 '소비자'의 선택-그것도 구매력에 따라-에 교육을 내맡기는,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결정적 위기이다. 7차 교육과정은 교육시장화의 한국형 버전이다.
자, 이래도 7차 교육과정에 대해 기대할 것이 남아있는가? 여전히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가? 단순히 우리의 교육여건이 7차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리기는 역부족이라고 답할 건가? 신중하게 다음 물음에 답한 후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7차 교육과정은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해줄까? 7차 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가? 7차 교육과정은 모든 아이들이 자기 실현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겠는가? 7차 교육과정은 학교를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 것인가? 7차 교육과정은 교육의 공공성을 지금보다 확대해 주는가?
대안과 투쟁
대부분의 상식을 갖춘 사람들은 7차 교육과정 역시 기존의 교육과정 개편 - 개편해봤자 별 변화도 없던 - 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교사들은 교육과정의 개편을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며, 바뀌더라도 대충 뭉개면서 형식적으로만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적 상식이 있다.
7차 교육과정 등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교육정책들은 대부분 앙상하게나마 유지되던 교육의 공공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들이었고, 7차 교육과정을 계기로 그러한 위기는 전면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초·중등 교육의 구조조정은 7차 교육과정의 본격적 실시와 더불어 더욱 강도높고 폭넓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공교육은 철저히 불평등의 재생산과 소수의 경쟁력을 키우는 20대 80 사회에 걸맞는 모습으로 재편되어 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과정 투쟁은 사회적인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전교조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7차 교육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7차 교육과정이 공교육의 해체로 귀결되리라는 문제의식에서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을 유보시키는데 투쟁력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대안은 아직 한번도 이 땅에서 제대로 실현된 바 없었던 '공교육', 교육의 공공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우리교육을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수준과 경제력에 따른 차별적 교육이 아니라, 누구나 배워야 될 필수적인 내용과 수준이라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을 모든 아이들이 배우고 도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7차 교육과정을 건 투쟁은 교육의 공공성을 담보로 하는 투쟁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아마 공교육이라는 개념은 한국 땅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