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폐·파업사태, 왼쪽에서 보는 법
의사파업을 의약분업 문제로만 한정해선 안된다
의약분업의 실행으로 야기된 의사들의 폐·파업사태에는 의약분업만이 아니라 의료체계와 의료보험 전반에 관한 많은 쟁점들이 뒤섞여 있어, 무엇보다 이 사태의 핵심적 쟁점을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집단이기주의적인 폐·파업이라는 무차별적인 '의사들 때리기'나 의약분업의 정착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개혁과제로 설정해서 밀어붙이는 태도는,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쟁점들을 억압함으로써 진보적인 방향에서의 사태해결을 왜곡시킨다.
내 생각으로 이번 사태는 의약분업의 실행을 계기로 불거져 나왔지만, 의약분업만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약간의 이해 대립, 즉 의사와 약사간의 밥그릇 싸움을 포함하여 의약간의 영역다툼이라든지 의약제품의 유통비리, 약가마진과 과잉진료에 의존해온 의사들의 편법수입, 그리고 이를 위한 병원경영의 불투명성 등의 문제는 의약분업 도입과 관련한 고유한 쟁점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실상 한국의 기형적인 의료보험제도의 모순에 그 뿌리를 갖는 것이어서 기존의 의료보험제도의 근간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사항들이다.
우리의 의료보험제도는 말로는 국가의료보험제도이면서도, 실제로는 의료보험의 급여대상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급여수준도 충분치 못할 뿐 아니라 의료보험재정까지 개인부담에 크게 의존한다. 이 점에서 개인의 질병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장주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시장주의 원리에 따른 개인 부담은 당연히 고소득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낮은 부담을, 저소득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료보험제도 하에서 의사들의 수입을 결정짓는 의료보험수가도 낮은 수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수가-저부담-저급여로 특징지워지는 기형적인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된 것이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한다면, 저수가-저급여에 대해 저부담이 대응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균적인 관계에서 그런 것이고 저소득계층에게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임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제도 위에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수입과 생존을 불법과 편법으로 지켜왔던 것인데, 이제 의약분업의 실행으로 이런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수입보장이 침해받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들은 대중들로서는 낯설게 들리겠지만 생존권 투쟁으로 나서게 되었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잘못된 분석, 그리고 황당한 결론
현행 의료보험제도를 전제하는 한, 의약분업의 실행에서 비롯되는 이해당사자간의 대립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정부가 의사들의 2차 폐·파업의 위협에 굴복해서 의료수가 일부의 대폭 증대, 대중들로의 전적인 비용부담 전가, 의사정원의 감축과 특권적 지위보장 등 황당한 양보안을 발표했던 것은 다름아닌 이런 모순의 표현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황색선전을 따라 의사들 때리기에만 눈을 돌렸던 대중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물론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에게 어떤 책임도 질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하건대, 의약분업은 진보적 방향에서의 의료보험제도의 전면적 개편과 함께 도입될 때 비로소 이해당사자의 갈등을 해결하고 정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공익을 대표하겠다고 자칭하고 나선 시민단체들도 이러한 쟁점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현행 의료보험제도 위에서의 의약분업 중재안을 관철시켜 현재의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다.
이들은 폐·파업 기간 중에 언론들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절호의 조건에서도 이런 근본적인 쟁점을 결코 제기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의 기만적인 의료정책에 시민여론이라는 외양을 부여하였다. 이들의 운동은 늘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지난 4월 총선 때 총선연대 등의 낙천, 낙선운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의 대중적 심판이라는 핵심쟁점을 왜곡시키고 총선을 개별인물논쟁으로 가져가 집권당의 선거전략에 유리한 지형을 형성시켜 주는 등 집권당의 제2중대 역할을 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낙천낙선운동의 성과, 즉 부패, 비리, 반인권의 낡은 정치인들을 의회에서 쫓아냈다는 그 성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새로 구성된 국회의 거듭되는 파행과 장기 공전 등 비참한 현실에서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그 낡은 정치가들이 쫓겨난 자리는 낙천낙선운동의 탈락기준에서 벗어났지만 그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은 행태와 작태를 보이는 새 정치가들로 채워졌을 뿐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잘못된 운동이었다는 것을 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시민단체들은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에게 책임을 느끼고 운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이제는 또 다시 의사들의 폐·파업사태에 개입하여 그 진정한 해결책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제해결은 의료보험의 진정한 의미를 강화하는 것
물론 폐·파업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내가 의사들의 편법, 불법적 행태들을 변호하거나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의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업주의적 의료현실과 빈약한 의료보험제도의 모순에 대항해 의료개혁을 요구하기보다는, 그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적 생존권의 수호에 집착하였다. 그로 인해 결국 대중들로부터 이번 폐·파업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획득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고 의사들의 자기비판과 내부개혁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번 사태가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성격과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의료보험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것이고 이런 방향에서 쟁점을 제기하고 여론화해야 한다.
이를 요약한다면, 먼저 의료보험의 혜택, 즉 급여의 대상과 수준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그를 위해 보험재정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또 보험재정은 지금처럼 역진적인 성격의 개인부담에 의존해서는 안되며 보험재정을 통해 소득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용자의 보험료부담 증대 및 국가재정을 통한 의료보험재정의 지원증대와 자산소득세, 누진세를 강화하는 방향의 조세개혁이 뒤따라야 하고 또 개인보험료 부담에서도 고소득층의 부담률을 인상하고 저소득층의 부담률은 경감, 면제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곧 부유한 계층의 비용으로 빈곤계층의 질병을, 건강한 사람들의 비용으로 병든 사람들의 치료를 보장하는 연대적인 방식을 보장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의료보험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
의료자본 중심의 상업주의 의료정책을 전환시켜야
이를 토대로 적정한 의료수가를 책정하여 의사들이 정당한 의료행위로 적정한 수입을 영유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의사들에게 투명한 병원경영과 수입내역 그리고 세금납부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사들과 정부간의 협상이나 시민단체들의 이에 대한 개입방안을 보면, 이른바 의료보험의 개혁은 급여의 수준과 대상을 확대한다는 미명하에 의사들의 보험수가 인상과 대중들에게로의 비용부담의 추가 증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또 한번 기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해법 이외에 다른 해법은 있을 수 없다. 정부와 언론의 '의사들 때리기'란 결국 진보적인 해법을 피해가기 위한 기만적인 수법인 것이다.
의료제도 개혁문제에 있어 의료보험의 개혁 못지 않게 더욱 중요한 과제는, 민간의료자본 중심의 상업주의 의료체계와 그에 대비되는 공공의료 포기정책을 공공의료체계와 정책으로 전환시키는 문제이다. 국민의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공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이를 기본적으로 상업적 이윤의 대상으로 열어 놓았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이 차지하는 비율(10%)이라든지 총의료비에 대한 공공지출비중(45%)은 OECD국가들(전자의 비율은 유럽 50-100%, 일본 31%, 민간의료 중심인 미국도 19%이며 후자의 비율은 유럽 60-90%, 일본 80%, 미국 46%) 내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열악한 수준이다. 상업주의 의료정책은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강화되고 있는데 정부 일각에서는 현재 빈약한 국가의료체계의 근간마저도 흔들어버릴 수 있는 민간의료보험(사보험)의 도입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부는 공공의료와 보험정책을 포기하고 돈 없는 자들은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결정적인 국면, 쟁점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들도 이미 다양한 의료서비스의 욕구와 선택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미명하에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을 선동하고 있다. 의사들의 폐·파업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파렴치한 집단행동'이라고 그렇게 몰아 세우던 정부와 언론은, 사실 그 뒤에서 '국민의 생명을 체계적으로 죽이기 위한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들의 폐·파업으로 죽어가는 몇몇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던 정부와 언론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지금도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에 대해서는 결코 분노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어찌 기만이 아니고 위선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의 황색 선전선동을 넘어서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을 끌어내 싸워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에 있다.
의사들의 집단적 폐·파업으로 의료정책 문제가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전면화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이런 결정적인 국면에서도 개혁의 쟁점을 의제화할 수 없다면, 또는 이번에는 의약분업이고 그 다음에는 의료개혁이라는 식으로 의제화를 연기한다면, 또는 폐·파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문제제기를 모색해야 한다고 물러선다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도 이 문제를 쟁점화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같은 사회적 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앞으로 어느 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논자들(시민단체들 또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같은 시민운동지향적 의료운동단체)은 운동의 역동성이 어떤 것인지, 그 운동정세에서 누구와 연대해서 무엇을 제기하고 어디를 쳐야 하는 건지를 알게 모르게 왜곡하고 있다. 물론, 의사라는 특권계층이 진보적인 세력과 연대해서 진보적인 의료개혁으로 나가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의사들로 하여금 공공의료 중심의 정책전환이나 진보적 방향의 의료보험제도를 수용케 하는 것, 즉 진보적인 제도와 타협케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쟁점을 전환시키고 운동의 요구를 고양시키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개입하는 진보운동의 올바른 방향이라 할 것이다.
의사들의 폐·파업사태, 왼쪽에서 보는 법
이번 사태는 이 밖에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의사라는 특권층의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친척형제들의 행동이라고 자제하거나 용인할 수 있다는 것, 노동자들의 파업과 달리 경찰의 물리력은 행사되지 않았다는 것, 검찰권도 요란하기만 했지 솜방망이라는 점…. 이번 사태는 이런 것을 통해 국가와 정부의 계급성을 대중들에게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또 자산계층이고 특권층인 이들의 지위와 여유, 폐·파업에 대한 지배계급의 자제를 감안하더라도 그 투쟁력과 단결력은 노동조합의 그것보다도 더 강고했다는 것, 이들에게서도 투쟁에서 승리하고 정부의 양보와 대화를 얻어낸 동력은 바로 강력한 연대와 단결력이었다는 점("우리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다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공의들의 놀라운 의지), 경제정치적으로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들보다 더욱 강고한 단결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폐·파업반대 시민대책위에 참여해서 의약분업의 진정한 쟁점을 가두어 둔 채 황색선전에 동참했다는 것, 의사들의 폐·파업을 집단이기주의로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집단이기주의 선동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은 지난 총선에서 신자유주의 낙천낙선운동에 결합했던 과오와 함께 두고두고 반성할 문제이다.
* 이 글은 KBS노동조합 부산시지부 노보인 『KBS 부울노보』, 제 39호(2000년 9월)에 실릴 예정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의약분업의 실행으로 야기된 의사들의 폐·파업사태에는 의약분업만이 아니라 의료체계와 의료보험 전반에 관한 많은 쟁점들이 뒤섞여 있어, 무엇보다 이 사태의 핵심적 쟁점을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집단이기주의적인 폐·파업이라는 무차별적인 '의사들 때리기'나 의약분업의 정착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개혁과제로 설정해서 밀어붙이는 태도는,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쟁점들을 억압함으로써 진보적인 방향에서의 사태해결을 왜곡시킨다.
내 생각으로 이번 사태는 의약분업의 실행을 계기로 불거져 나왔지만, 의약분업만의 문제로 한정해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약간의 이해 대립, 즉 의사와 약사간의 밥그릇 싸움을 포함하여 의약간의 영역다툼이라든지 의약제품의 유통비리, 약가마진과 과잉진료에 의존해온 의사들의 편법수입, 그리고 이를 위한 병원경영의 불투명성 등의 문제는 의약분업 도입과 관련한 고유한 쟁점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실상 한국의 기형적인 의료보험제도의 모순에 그 뿌리를 갖는 것이어서 기존의 의료보험제도의 근간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사항들이다.
우리의 의료보험제도는 말로는 국가의료보험제도이면서도, 실제로는 의료보험의 급여대상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급여수준도 충분치 못할 뿐 아니라 의료보험재정까지 개인부담에 크게 의존한다. 이 점에서 개인의 질병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장주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시장주의 원리에 따른 개인 부담은 당연히 고소득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낮은 부담을, 저소득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료보험제도 하에서 의사들의 수입을 결정짓는 의료보험수가도 낮은 수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수가-저부담-저급여로 특징지워지는 기형적인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된 것이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한다면, 저수가-저급여에 대해 저부담이 대응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균적인 관계에서 그런 것이고 저소득계층에게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임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제도 위에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수입과 생존을 불법과 편법으로 지켜왔던 것인데, 이제 의약분업의 실행으로 이런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수입보장이 침해받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들은 대중들로서는 낯설게 들리겠지만 생존권 투쟁으로 나서게 되었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잘못된 분석, 그리고 황당한 결론
현행 의료보험제도를 전제하는 한, 의약분업의 실행에서 비롯되는 이해당사자간의 대립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정부가 의사들의 2차 폐·파업의 위협에 굴복해서 의료수가 일부의 대폭 증대, 대중들로의 전적인 비용부담 전가, 의사정원의 감축과 특권적 지위보장 등 황당한 양보안을 발표했던 것은 다름아닌 이런 모순의 표현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황색선전을 따라 의사들 때리기에만 눈을 돌렸던 대중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물론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에게 어떤 책임도 질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하건대, 의약분업은 진보적 방향에서의 의료보험제도의 전면적 개편과 함께 도입될 때 비로소 이해당사자의 갈등을 해결하고 정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공익을 대표하겠다고 자칭하고 나선 시민단체들도 이러한 쟁점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현행 의료보험제도 위에서의 의약분업 중재안을 관철시켜 현재의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다.
이들은 폐·파업 기간 중에 언론들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절호의 조건에서도 이런 근본적인 쟁점을 결코 제기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의 기만적인 의료정책에 시민여론이라는 외양을 부여하였다. 이들의 운동은 늘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지난 4월 총선 때 총선연대 등의 낙천, 낙선운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의 대중적 심판이라는 핵심쟁점을 왜곡시키고 총선을 개별인물논쟁으로 가져가 집권당의 선거전략에 유리한 지형을 형성시켜 주는 등 집권당의 제2중대 역할을 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낙천낙선운동의 성과, 즉 부패, 비리, 반인권의 낡은 정치인들을 의회에서 쫓아냈다는 그 성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새로 구성된 국회의 거듭되는 파행과 장기 공전 등 비참한 현실에서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그 낡은 정치가들이 쫓겨난 자리는 낙천낙선운동의 탈락기준에서 벗어났지만 그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은 행태와 작태를 보이는 새 정치가들로 채워졌을 뿐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잘못된 운동이었다는 것을 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시민단체들은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에게 책임을 느끼고 운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이제는 또 다시 의사들의 폐·파업사태에 개입하여 그 진정한 해결책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제해결은 의료보험의 진정한 의미를 강화하는 것
물론 폐·파업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내가 의사들의 편법, 불법적 행태들을 변호하거나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의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업주의적 의료현실과 빈약한 의료보험제도의 모순에 대항해 의료개혁을 요구하기보다는, 그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적 생존권의 수호에 집착하였다. 그로 인해 결국 대중들로부터 이번 폐·파업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획득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고 의사들의 자기비판과 내부개혁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번 사태가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성격과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의료보험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것이고 이런 방향에서 쟁점을 제기하고 여론화해야 한다.
이를 요약한다면, 먼저 의료보험의 혜택, 즉 급여의 대상과 수준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그를 위해 보험재정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또 보험재정은 지금처럼 역진적인 성격의 개인부담에 의존해서는 안되며 보험재정을 통해 소득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용자의 보험료부담 증대 및 국가재정을 통한 의료보험재정의 지원증대와 자산소득세, 누진세를 강화하는 방향의 조세개혁이 뒤따라야 하고 또 개인보험료 부담에서도 고소득층의 부담률을 인상하고 저소득층의 부담률은 경감, 면제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곧 부유한 계층의 비용으로 빈곤계층의 질병을, 건강한 사람들의 비용으로 병든 사람들의 치료를 보장하는 연대적인 방식을 보장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의료보험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
의료자본 중심의 상업주의 의료정책을 전환시켜야
이를 토대로 적정한 의료수가를 책정하여 의사들이 정당한 의료행위로 적정한 수입을 영유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의사들에게 투명한 병원경영과 수입내역 그리고 세금납부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사들과 정부간의 협상이나 시민단체들의 이에 대한 개입방안을 보면, 이른바 의료보험의 개혁은 급여의 수준과 대상을 확대한다는 미명하에 의사들의 보험수가 인상과 대중들에게로의 비용부담의 추가 증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또 한번 기만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해법 이외에 다른 해법은 있을 수 없다. 정부와 언론의 '의사들 때리기'란 결국 진보적인 해법을 피해가기 위한 기만적인 수법인 것이다.
의료제도 개혁문제에 있어 의료보험의 개혁 못지 않게 더욱 중요한 과제는, 민간의료자본 중심의 상업주의 의료체계와 그에 대비되는 공공의료 포기정책을 공공의료체계와 정책으로 전환시키는 문제이다. 국민의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공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이를 기본적으로 상업적 이윤의 대상으로 열어 놓았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이 차지하는 비율(10%)이라든지 총의료비에 대한 공공지출비중(45%)은 OECD국가들(전자의 비율은 유럽 50-100%, 일본 31%, 민간의료 중심인 미국도 19%이며 후자의 비율은 유럽 60-90%, 일본 80%, 미국 46%) 내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열악한 수준이다. 상업주의 의료정책은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강화되고 있는데 정부 일각에서는 현재 빈약한 국가의료체계의 근간마저도 흔들어버릴 수 있는 민간의료보험(사보험)의 도입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부는 공공의료와 보험정책을 포기하고 돈 없는 자들은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공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결정적인 국면, 쟁점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들도 이미 다양한 의료서비스의 욕구와 선택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미명하에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을 선동하고 있다. 의사들의 폐·파업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파렴치한 집단행동'이라고 그렇게 몰아 세우던 정부와 언론은, 사실 그 뒤에서 '국민의 생명을 체계적으로 죽이기 위한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들의 폐·파업으로 죽어가는 몇몇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던 정부와 언론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지금도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에 대해서는 결코 분노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어찌 기만이 아니고 위선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의 황색 선전선동을 넘어서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을 끌어내 싸워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에 있다.
의사들의 집단적 폐·파업으로 의료정책 문제가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전면화된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이런 결정적인 국면에서도 개혁의 쟁점을 의제화할 수 없다면, 또는 이번에는 의약분업이고 그 다음에는 의료개혁이라는 식으로 의제화를 연기한다면, 또는 폐·파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문제제기를 모색해야 한다고 물러선다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도 이 문제를 쟁점화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같은 사회적 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앞으로 어느 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논자들(시민단체들 또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같은 시민운동지향적 의료운동단체)은 운동의 역동성이 어떤 것인지, 그 운동정세에서 누구와 연대해서 무엇을 제기하고 어디를 쳐야 하는 건지를 알게 모르게 왜곡하고 있다. 물론, 의사라는 특권계층이 진보적인 세력과 연대해서 진보적인 의료개혁으로 나가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의사들로 하여금 공공의료 중심의 정책전환이나 진보적 방향의 의료보험제도를 수용케 하는 것, 즉 진보적인 제도와 타협케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쟁점을 전환시키고 운동의 요구를 고양시키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개입하는 진보운동의 올바른 방향이라 할 것이다.
의사들의 폐·파업사태, 왼쪽에서 보는 법
이번 사태는 이 밖에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의사라는 특권층의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친척형제들의 행동이라고 자제하거나 용인할 수 있다는 것, 노동자들의 파업과 달리 경찰의 물리력은 행사되지 않았다는 것, 검찰권도 요란하기만 했지 솜방망이라는 점…. 이번 사태는 이런 것을 통해 국가와 정부의 계급성을 대중들에게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또 자산계층이고 특권층인 이들의 지위와 여유, 폐·파업에 대한 지배계급의 자제를 감안하더라도 그 투쟁력과 단결력은 노동조합의 그것보다도 더 강고했다는 것, 이들에게서도 투쟁에서 승리하고 정부의 양보와 대화를 얻어낸 동력은 바로 강력한 연대와 단결력이었다는 점("우리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다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공의들의 놀라운 의지), 경제정치적으로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들보다 더욱 강고한 단결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폐·파업반대 시민대책위에 참여해서 의약분업의 진정한 쟁점을 가두어 둔 채 황색선전에 동참했다는 것, 의사들의 폐·파업을 집단이기주의로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집단이기주의 선동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은 지난 총선에서 신자유주의 낙천낙선운동에 결합했던 과오와 함께 두고두고 반성할 문제이다.
* 이 글은 KBS노동조합 부산시지부 노보인 『KBS 부울노보』, 제 39호(2000년 9월)에 실릴 예정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