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평의 시간
2000년 9월 2일, 63명의 사람들이 판문점을 넘어섰다. "남으로 다시 올테니, 건강하라"며 "어머니, 다시 오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는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검이 된 동지들의 원혼을 오른발에, 악랄하게 자행되었던 전향 고문의 상처를 왼발에 싣고는 갸냘픈 땅허리에 그 무게를 모두 전하려는 듯 꾹꾹 눌러가며 건넜다. 휠체어, 앰뷸런스, 구부진 허리, '고향…' '신의주…' 몇구절 안되는 어눌한 중얼임을 뒤로 한 채, 통한과 기쁨의 눈물로 0.75평-40여년 그 긴 시간을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그리고 몇가지 사실들
이번에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가운데 51명은 북쪽에 가족을 두고 있으며, 가족이 없는 12명은 남쪽 출신으로 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죄목은 조국전쟁-6.25전쟁 때는 국방경비법 32조(부역죄, 이적죄), 33조(간첩죄) 위반이었으며, 전쟁직후에는 반공법 6조 3항(적성단체 수괴죄) 혹은 국가보안법 3조 1항(반국가단체 수괴) 6조 1항(간첩죄) 위반이었다. 형량은 대부분 무기형(사형에서 감형된 경우 포함)이었으며, 15년 형량의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10여년씩 추가된 사람이다. 무기형이 선고된 다른 형사범들의 경우 감옥에서의 생활이 양호(?)하면 감형되거나 석방되었지만 이들은 예외였다. 그들에게는 1장의 전향서가 필요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직후 격변하는 한반도정세에서 전향서 강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비전향 사상범(특히 6.25 전쟁 때 체포되었지만, 이후 다시 간첩죄가 적용되어 수감된 경우)은 제네바 협정 등 각종 국제 협정에 의해 자동으로 북으로 이송해야 했지만(추방을 빌어서라도), 남한 정부는 법적 근거도 없는 법(국방경비법)과 무작위로 적용되는 법(국가보안법)으로 강제 억류, 수감하였다.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최소한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남한 정부는 전향서가 필요했었고, 7·4 남북 공동성명이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6.26 전쟁 당시의 자유송환원칙에 빚댄 전향서, 이 한 장을 위해 그들은 고문과 전향 테러를 했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장기수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1973년 8월부터 전향공작반이 구성돼 전향공작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동지들을 죽음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비인간적인 엄청난 만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방법을 통해 수천명의 선생(장기수분들의 표현)이 사망하거나 전향하였다. 굶주림과 학대 그리고 모멸감 속에서 수십여명만이 저항하고 전향을 거부했을 뿐이다. 1980년대 민주화투쟁의 양적 성장을 한 축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면서 비공식적으로나마 확인되고, 몇차례 대대적인 특사로 소수나마 석방이되었던 것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여하튼 이번 북송을 계기로 그간 베일에 싸여왔던 몇가지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북파간첩 문제이며, 남한에 남아있는 인민군포로문제이다. 그간 침묵으로 일관해 온 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그리고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었으나 남한법으로 처벌받아 남쪽에 억류되어 있던 이들이 북송을 위해, 경직된 남북관계의 균열틈새를 비집고 발언하고 나선 것이다.
북파간첩의 존재는 세가지 사실을 제기하는데 첫째, 남측 역시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특수공작원을 대거 북파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둘째, 순 형식논리에 입각한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하더라도 이번 북송에 상응하는 조처는 북파간첩의 남송이며, 셋째, 기본적으로 북파간첩의 성격이 무엇이며 이번에 북송된 장기수 중 상당수인 남파된 이들(통일사업을 위해)과 어떻게 다른가이다.
인민군포로문제는 또다른 사실 두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당시 전쟁포로를 남한이 어떻게 대우했는가. 이는 동시에 포로송환의 기준이었던 자유송환원칙이 인도적이었는가의 문제까지 나아간다. 자유송환원칙은 제네바 국제협정(자동송환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인데, 이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대로 평가된 적도 없는 역사의 비극으로 잠재해 있는 진실이다. 둘째, 동시에 국군포로 송환문제 역시 인민군 포로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법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이다. 북에 억류되어 있다고 추정되는 국군포로의 숫자를 실종자(41,971)에서 남쪽에서 확인 가능한 사망자(22,562)를 뺀 나머지(19,000여명)로 본다면, 몇배는 더 될 수 있는 억류된 인민군 숫자가 나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유송환이라는 미명에 따른 회유공작,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방출된 포로들과 북한의 교화에 따른 인민군 재편입, 귀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남기 때문이다.
0.75평의 시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이 남북관계에 매우 많은 효과를 낳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적어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의 시간에도 무게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도 비극적이겠으나, 40여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역사적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 기억을 탐색하면서 당신의 존재는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시간에서 무엇을 질문하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물론,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말이다.
<0.75평 - 온전한 시간>
정확히 5·60여년 전에 대한 기억이다.
일제시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사회주의운동진영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는 사실 하나. 야학과 브나르도 운동, 신간회, '소년'이라는 잡지 모두 사회주의 사상의 전달 역할을 하였고, 농토에서 공장에서 초과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항한 이들도 그들이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1930년대 이후 지식인, 국내파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라는 등식이 가능할 정도로 사회주의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며,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라는 등식이 가능할 정도로 그들의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막중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온전히 기억하며, 당시 몸으로 체화한 그대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는 곧 북한이라는 사실 둘. 조선일보(!)건, 동아일보건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기사에서 김일성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전투성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인민들에게 자주적 독립국가의 희망이었음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북에서의 사회 건설이 자주국가 건설의 모범이라는 사실 셋. 일제의 잔재 청산과 관련하여 남과 북은 기본적으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남은 일제고등경찰과 고위관리자들을 그대로 다시 채용한 반면, 북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북의 인민민주주의 조국 건설과정에서 보인 당관료의 성실함과 대중에 대한 믿음과 존중은 한없는 신임의 대상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전후 자주국가 건설의 유일한 방해자는 미국과 그 앞잡이라는 사실 넷. 이는 남쪽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더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남쪽의 경우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가 미군에 의해 해산되고 미국에 반하는 모든 정치활동은 음으로 양으로 탄압받았으며, 심지어 미국은 일제 고등 관료들의 진출을 종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분단 고착화를 위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 배후에 미국이 막후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분노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일체의 변함없이 기억하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판문점을 넘는데, 은폐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몇가지 사실은 오직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0.75평 - 정체된 시간>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 혹은 현 정세에 대한 인식으로 그대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0.75평의 폐쇄된 시간이 급변하는 밖의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전후 속에서 체화된 모습과 그 존재가 현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사에 있어 이 비극은 더더욱 비참하게 드러난다. 30, 40여년간의 시·공간의 단절은 문득문득 멈춰서는 발걸음에서, 어색한 계단걸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안감에서 분명히 보인다. 이 문제는 단지 개인사적인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화된 모든 시선이 불행의 연속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에도 없는 이 인간승리에 대한 드라마, 이 드라마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외심이 그같은 불행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북의 주장대로 "비전향 장기수들을 `통일의 불새'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북송으로 `통일투쟁'은 더욱 고무될 것"인가? 아울러 북송된 장기수들의 말대로 "남한은 `장군님 세상'이라면서, 대학가와 가정에서 김 총비서의 명저들이 널리 애독되고, 그를 칭송하는 노래가 울리고 있으며, 상점에서는 그가 입은 `인민복'이 최고 인기를 모으고, 남한 곳곳에서 김 총비서를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칭송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인가?
50여년 전의 시각과 정세인식의 기본틀이 지금도 올바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다른 일이다. 0.75평 공간에서 시간은 그렇게 흘렀을지 모르나,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에서는 분명 다르게 흐르고 있다. 과거의 시각으로, 0.75평의 시간 속에서 현재를 읽을 수도 없는 것이요, 그것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가 재현하고 있는 과거의 모습-50여년 전의 자주국가 건설에 대한 상과 구현방법, 실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존재가 현실의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닫힌 시간과 공간에서 재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의 존재가 과거의 연속이기는 하나, 과거의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북의 '정책'에 대한 평가를 50여년전 북한의 '정책'에서 유추해내어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0.75평 - 역동적인 시간>
이상의 시각은 모순적이며,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이런 냉정한 평가를 전제하더라도 우리에게 남는 답답한 질문, 그래도 고개숙여지는 질문 하나가 있다. 도대체 40여년 동안 그 잔혹한 테러 앞에서도 전향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신념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궁금함에 성급히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다음의 질문을 해본다. 0.75평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혁명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강제로 지우고 부정하면서 당신의 위치를 역이용해 이데올로기적인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저들의 폭력에 당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의 여지가 오직 한가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계를 아니, 상황을 전복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무엇인가?
그들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또다른 수많은 동지(인민)들을 두번 죽이지 않기 위해, 남조선의 정책보다 북조선의 정책이 옳기에, 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전향테러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그 신념을 지키는 투쟁이 감옥안에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투쟁이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는 우리곁에 있다. 옥중에서나마 몇가지 전향적인 조치도 얻었으며, 주위사람을 감화시켜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꿈에도 그렸던 북에 가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몇가지 질문을 세상에 던졌다. 탈이념의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 당신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이념과 사상이 밥먹여주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시대에 사상과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지 괴롭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들의 대답이 0.75평의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자, 진실이라 믿는다. 그들은 옥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최고의 실천가였다. 그들이 바꿔놓은 0.75평과 세상에 던진 질문이 그 증거이다.
0.75평 뒤의 그림자 - 인간에 대한 예의
모든 휴먼드라마가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고이 간직한, 자유에 대한 의지와 가족과 조국을 향한 귀거래를 그린 것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이 휴먼드라마에는 낯선 그림자가 두어개 서있다. 그 그림자는 서로 모순된 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만큼 더더욱 우리에게는 낯설다. 통한과 기쁨의 눈물은 그렇게 비추어졌다.
인간의 얼굴에 맺힌 눈물이 아니라, 역사에 반추된 눈물을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눈물이 단지 영어의 몸으로 인해 잃어버린 동지들, 친구들, 가족들에 대한 회한을 담은 눈물만이 아니라, 40여년을 사상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통일을 위해, 자주국가의 건설을 위해 0.75평의 그 엄혹한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고 싸워왔던 과거에 대한 통한과 기쁨의 눈물이기에 그렇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던 때에도 불사르지 않았던 이 시 앞에서, 이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설마
설마 그러랴만 만약 그리는 영상들을 지금 그렇듯이 망막에
거미줄을 친 채 만약에 만약에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
만약에 사람의 소리를 지금 그렇듯이 가슴에 누질러 둔 채
만약에 전하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또 만약 동강난 산천을 부둥켜 안은 채 만약에
만약에 터도 없는 무덤이 되고 만다면….
아 설마가 사실일 날이 내일일지도 모르니 만약 그렇더라도
지금 그렇듯이 비겁하지 말고 어리석지 말고
죽음이여! 담담하라. 미소지어라!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그리고 몇가지 사실들
이번에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가운데 51명은 북쪽에 가족을 두고 있으며, 가족이 없는 12명은 남쪽 출신으로 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죄목은 조국전쟁-6.25전쟁 때는 국방경비법 32조(부역죄, 이적죄), 33조(간첩죄) 위반이었으며, 전쟁직후에는 반공법 6조 3항(적성단체 수괴죄) 혹은 국가보안법 3조 1항(반국가단체 수괴) 6조 1항(간첩죄) 위반이었다. 형량은 대부분 무기형(사형에서 감형된 경우 포함)이었으며, 15년 형량의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10여년씩 추가된 사람이다. 무기형이 선고된 다른 형사범들의 경우 감옥에서의 생활이 양호(?)하면 감형되거나 석방되었지만 이들은 예외였다. 그들에게는 1장의 전향서가 필요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직후 격변하는 한반도정세에서 전향서 강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비전향 사상범(특히 6.25 전쟁 때 체포되었지만, 이후 다시 간첩죄가 적용되어 수감된 경우)은 제네바 협정 등 각종 국제 협정에 의해 자동으로 북으로 이송해야 했지만(추방을 빌어서라도), 남한 정부는 법적 근거도 없는 법(국방경비법)과 무작위로 적용되는 법(국가보안법)으로 강제 억류, 수감하였다.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최소한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남한 정부는 전향서가 필요했었고, 7·4 남북 공동성명이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6.26 전쟁 당시의 자유송환원칙에 빚댄 전향서, 이 한 장을 위해 그들은 고문과 전향 테러를 했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장기수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1973년 8월부터 전향공작반이 구성돼 전향공작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동지들을 죽음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비인간적인 엄청난 만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방법을 통해 수천명의 선생(장기수분들의 표현)이 사망하거나 전향하였다. 굶주림과 학대 그리고 모멸감 속에서 수십여명만이 저항하고 전향을 거부했을 뿐이다. 1980년대 민주화투쟁의 양적 성장을 한 축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면서 비공식적으로나마 확인되고, 몇차례 대대적인 특사로 소수나마 석방이되었던 것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여하튼 이번 북송을 계기로 그간 베일에 싸여왔던 몇가지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북파간첩 문제이며, 남한에 남아있는 인민군포로문제이다. 그간 침묵으로 일관해 온 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그리고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었으나 남한법으로 처벌받아 남쪽에 억류되어 있던 이들이 북송을 위해, 경직된 남북관계의 균열틈새를 비집고 발언하고 나선 것이다.
북파간첩의 존재는 세가지 사실을 제기하는데 첫째, 남측 역시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특수공작원을 대거 북파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둘째, 순 형식논리에 입각한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하더라도 이번 북송에 상응하는 조처는 북파간첩의 남송이며, 셋째, 기본적으로 북파간첩의 성격이 무엇이며 이번에 북송된 장기수 중 상당수인 남파된 이들(통일사업을 위해)과 어떻게 다른가이다.
인민군포로문제는 또다른 사실 두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당시 전쟁포로를 남한이 어떻게 대우했는가. 이는 동시에 포로송환의 기준이었던 자유송환원칙이 인도적이었는가의 문제까지 나아간다. 자유송환원칙은 제네바 국제협정(자동송환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인데, 이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대로 평가된 적도 없는 역사의 비극으로 잠재해 있는 진실이다. 둘째, 동시에 국군포로 송환문제 역시 인민군 포로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법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이다. 북에 억류되어 있다고 추정되는 국군포로의 숫자를 실종자(41,971)에서 남쪽에서 확인 가능한 사망자(22,562)를 뺀 나머지(19,000여명)로 본다면, 몇배는 더 될 수 있는 억류된 인민군 숫자가 나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유송환이라는 미명에 따른 회유공작,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방출된 포로들과 북한의 교화에 따른 인민군 재편입, 귀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남기 때문이다.
0.75평의 시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이 남북관계에 매우 많은 효과를 낳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적어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의 시간에도 무게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너무도 비극적이겠으나, 40여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역사적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 기억을 탐색하면서 당신의 존재는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시간에서 무엇을 질문하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물론,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말이다.
<0.75평 - 온전한 시간>
정확히 5·60여년 전에 대한 기억이다.
일제시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사회주의운동진영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는 사실 하나. 야학과 브나르도 운동, 신간회, '소년'이라는 잡지 모두 사회주의 사상의 전달 역할을 하였고, 농토에서 공장에서 초과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항한 이들도 그들이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1930년대 이후 지식인, 국내파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라는 등식이 가능할 정도로 사회주의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며,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라는 등식이 가능할 정도로 그들의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막중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온전히 기억하며, 당시 몸으로 체화한 그대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는 곧 북한이라는 사실 둘. 조선일보(!)건, 동아일보건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기사에서 김일성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전투성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인민들에게 자주적 독립국가의 희망이었음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북에서의 사회 건설이 자주국가 건설의 모범이라는 사실 셋. 일제의 잔재 청산과 관련하여 남과 북은 기본적으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남은 일제고등경찰과 고위관리자들을 그대로 다시 채용한 반면, 북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북의 인민민주주의 조국 건설과정에서 보인 당관료의 성실함과 대중에 대한 믿음과 존중은 한없는 신임의 대상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전후 자주국가 건설의 유일한 방해자는 미국과 그 앞잡이라는 사실 넷. 이는 남쪽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더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남쪽의 경우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가 미군에 의해 해산되고 미국에 반하는 모든 정치활동은 음으로 양으로 탄압받았으며, 심지어 미국은 일제 고등 관료들의 진출을 종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분단 고착화를 위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 배후에 미국이 막후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분노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일체의 변함없이 기억하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판문점을 넘는데, 은폐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몇가지 사실은 오직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0.75평 - 정체된 시간>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 혹은 현 정세에 대한 인식으로 그대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0.75평의 폐쇄된 시간이 급변하는 밖의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전후 속에서 체화된 모습과 그 존재가 현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사에 있어 이 비극은 더더욱 비참하게 드러난다. 30, 40여년간의 시·공간의 단절은 문득문득 멈춰서는 발걸음에서, 어색한 계단걸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안감에서 분명히 보인다. 이 문제는 단지 개인사적인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화된 모든 시선이 불행의 연속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에도 없는 이 인간승리에 대한 드라마, 이 드라마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경외심이 그같은 불행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북의 주장대로 "비전향 장기수들을 `통일의 불새'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북송으로 `통일투쟁'은 더욱 고무될 것"인가? 아울러 북송된 장기수들의 말대로 "남한은 `장군님 세상'이라면서, 대학가와 가정에서 김 총비서의 명저들이 널리 애독되고, 그를 칭송하는 노래가 울리고 있으며, 상점에서는 그가 입은 `인민복'이 최고 인기를 모으고, 남한 곳곳에서 김 총비서를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칭송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인가?
50여년 전의 시각과 정세인식의 기본틀이 지금도 올바른가 하는 문제는 분명히 다른 일이다. 0.75평 공간에서 시간은 그렇게 흘렀을지 모르나,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에서는 분명 다르게 흐르고 있다. 과거의 시각으로, 0.75평의 시간 속에서 현재를 읽을 수도 없는 것이요, 그것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가 재현하고 있는 과거의 모습-50여년 전의 자주국가 건설에 대한 상과 구현방법, 실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존재가 현실의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닫힌 시간과 공간에서 재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의 존재가 과거의 연속이기는 하나, 과거의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북의 '정책'에 대한 평가를 50여년전 북한의 '정책'에서 유추해내어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0.75평 - 역동적인 시간>
이상의 시각은 모순적이며,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이런 냉정한 평가를 전제하더라도 우리에게 남는 답답한 질문, 그래도 고개숙여지는 질문 하나가 있다. 도대체 40여년 동안 그 잔혹한 테러 앞에서도 전향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신념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궁금함에 성급히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다음의 질문을 해본다. 0.75평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혁명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강제로 지우고 부정하면서 당신의 위치를 역이용해 이데올로기적인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저들의 폭력에 당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의 여지가 오직 한가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계를 아니, 상황을 전복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무엇인가?
그들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또다른 수많은 동지(인민)들을 두번 죽이지 않기 위해, 남조선의 정책보다 북조선의 정책이 옳기에, 조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전향테러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그 신념을 지키는 투쟁이 감옥안에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투쟁이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는 우리곁에 있다. 옥중에서나마 몇가지 전향적인 조치도 얻었으며, 주위사람을 감화시켜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꿈에도 그렸던 북에 가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몇가지 질문을 세상에 던졌다. 탈이념의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 당신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이념과 사상이 밥먹여주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시대에 사상과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지 괴롭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들의 대답이 0.75평의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자, 진실이라 믿는다. 그들은 옥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최고의 실천가였다. 그들이 바꿔놓은 0.75평과 세상에 던진 질문이 그 증거이다.
0.75평 뒤의 그림자 - 인간에 대한 예의
모든 휴먼드라마가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고이 간직한, 자유에 대한 의지와 가족과 조국을 향한 귀거래를 그린 것만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이 휴먼드라마에는 낯선 그림자가 두어개 서있다. 그 그림자는 서로 모순된 얼굴을 하고 있으며, 그만큼 더더욱 우리에게는 낯설다. 통한과 기쁨의 눈물은 그렇게 비추어졌다.
인간의 얼굴에 맺힌 눈물이 아니라, 역사에 반추된 눈물을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눈물이 단지 영어의 몸으로 인해 잃어버린 동지들, 친구들, 가족들에 대한 회한을 담은 눈물만이 아니라, 40여년을 사상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통일을 위해, 자주국가의 건설을 위해 0.75평의 그 엄혹한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고 싸워왔던 과거에 대한 통한과 기쁨의 눈물이기에 그렇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던 때에도 불사르지 않았던 이 시 앞에서, 이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설마
설마 그러랴만 만약 그리는 영상들을 지금 그렇듯이 망막에
거미줄을 친 채 만약에 만약에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
만약에 사람의 소리를 지금 그렇듯이 가슴에 누질러 둔 채
만약에 전하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또 만약 동강난 산천을 부둥켜 안은 채 만약에
만약에 터도 없는 무덤이 되고 만다면….
아 설마가 사실일 날이 내일일지도 모르니 만약 그렇더라도
지금 그렇듯이 비겁하지 말고 어리석지 말고
죽음이여! 담담하라. 미소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