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9-10.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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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운동과 여성 ② 로자 룩셈부르크

이유미 | 사무국장
다른 세상을 향한 꿈

“내 이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나는 언젠가 증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8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7세의 로자가 친구들과 사진을 나눠가지며 뒷면에 남긴 글귀이다. 그녀는 함께 했던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누군가의 부인이자 어머니로 살아갈 것을 꿈꾸는 소녀들 가운데서 범상치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태인 여성으로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인 바르샤바 제2 여자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가 이러한 꿈을 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러시아 짜르 제국의 통치아래 있던 폴란드는 어떠한 비판적 행위도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정치활동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일 짜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에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처해지거나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사라지고 때로는 교수형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폴란드의 젊은이들은 민족 억압의 문제에 분노하고 비합법 노동운동과 접촉하면서 사회비판적인 인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로자 역시 비합법 학생조직에 가담해 금서였던 <공산당 선언> 등을 읽으며 다른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졸업 후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당의 비밀 세포조직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활동을 하면서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태인, 더구나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삶은 억압과 착취 받는 자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혀갔다. 그러한 확신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해 그녀를 스위스를 향해 떠나게 한다.

동지이자 연인

취리히는 온갖 나라로부터 온 망명자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취리히일반대학은 남녀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1889년 넬켄가에 있는 뤼베크의 집에 방을 구한 로자는 곧 취리히 대학에 등록했다. 로자는 동료 학생들과 추운 다락방에 모여서 밤늦게까지 뜨거운 토론을 나누고는 했다. 그곳에서 로자는 폴란드 빌나에서 온 청년 레온 그로소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로자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청년 레오 요기헤스가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로자는 학교 동료들의 소문을 통해 레오를 주목했다. 전설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비밀스러움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는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혁명에 헌신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비합 지하활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군대로 징집명령이 떨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빌나를 탈출하여 취리히로 왔다. 그는 철두철미하고 과묵했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동료들로부터 권위적이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런 레오 역시도 로자에게 매료되었는데,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는 지적이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인과 대화를 즐기는 성격에다 매력과 열정을 통해 청중을 사로잡는 재능까지 있었다. 레오는 그녀와 함께라면 불패의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레오의 직감은 적중했다. 식민지 폴란드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로자와 레오는 <스프라바 로보니차>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레오는 당의 숨은 두뇌로서 지도력을 발휘했고 로자는 열정적인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활약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던 폴란드 사회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893년 8월 취리히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3차 총회에서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은 공식 정당으로 승인되었다.

뤼베크 박사, 베를린을 정복하다

1898년 취리히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로자는 베를린에 도착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서 외국인이 정치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로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하숙하던 뤼베크 가의 아들과 위장결혼을 해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이제 거침없이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녀의 데뷔무대는 슐레지엔 북부 지역의 선거였다. 로자는 뛰어난 연설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해 독일사회민주당에 큰 성과를 안겨주었다. 그 성과는 독일에 오기 전부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던 로자의 존재감을 사민당 내에서 다시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로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존경받던 베른슈타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에 로자의 이름이 길이 남게 될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현실에서 적합성을 가지는가라는 의구심에서 시작되었다. 1890년대 후반에 영국은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금융을 팽창시켜 일시적 호황을 누렸고, 유럽 대륙에서는 중상주의적 산업화가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1899)에서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물질적 조건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뛰어넘으며 대불황의 시대는 종결되었고 붕괴이론도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식시장을 통해 부가 공평히 분배되고 실질임금도 상승하고 있으니 궁핍화 경향은 역전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생산의 점진적인 사회화로 인해 일시적인 과잉생산과 과소소비에 기인하는 위기도 덜 빈번하고 덜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적극적인 의회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베른슈타인이 당의 기본입장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사민당은 이렇다한 대응도 못하고 기존의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입장이 마르크스에 대한 근원적 부정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899)를 출간해 그를 논박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녀는 <자본축적>(1913)을 쓰면서 자신의 이론을 보다 체계화했다. 로자는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부문 간의 불비례는 주기적 경기순환을 낳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더라도 자본주의는 과소소비라는 장기적 경향에 의해 궁극적인 붕괴에 도달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구조적인 소비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항상 필요로 한다.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모든 비자본주의 사회들이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로 전환되면 자본주의의 붕괴는 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이 된다. 이처럼 로자는 경기순환상의 위기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적 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파국적 위기가 사회주의 이행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자생주의에 입각한 실천만이 사회주의로의 길을 보장함을 주장하면서 의회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같은 로자의 문제의식은 수정주의자들이 영국헤게모니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팽창이 야기한 일시적 호황을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로 인식하여 구조적 위기를 부정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녀는 영국헤게모니 붕괴와 유럽 자본주의의 일반적 붕괴 경향에 부합하는 분석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붕괴가 제국주의적 충돌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이라는 점 또한 역사적으로 타당한 분석이었다.
수정주의 논쟁은 격렬했으며 로자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사회민주당 전당대회의 대의원 자격을 획득하고, <작센노동자신문> 편집장 자리를 제안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단시간 안에 독일 사민당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게 된 로자의 출현은 혜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세요 죠죠

로자와 레오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다. 레오는 공식적인 위치에 나서지 않은 채 지도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로자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레오는 로자의 스승으로서 그녀의 활동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독일에서 예상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로자는 성장해 버렸고 그는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실 로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녀를 독일로 보내 독일사민당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레오도 로자의 성장과 성공을 바라보면서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점차 로자는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치려는 태도를 고수하는 그의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순간순간 그보다 자신이 더 적확한 판단을 하고 있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레오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자부심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통제의 고삐를 더 죄려했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될 수는 없었다.
1900년에 레오는 폴란드 당을 재건하고 베를린에 당 지도부를 건설하기 위해 독일로 간다. 치슈카라는 가명을 쓰며 열정적으로 과업에 매진한 결과 폴란드 대도시에서 파괴된 그룹들을 소생시키고 당 지하 세포조직 확립을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다.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치슈카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젊은 세대들은 그 가명이 로자의 새로운 필명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였다. 레오의 정체를 감추는 지하활동의 공적이 로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둘의 관계구도가 변화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으나 로자는 ‘죠죠’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연인이 베를린에 와서 함께 살기를 끊임없이 바라면서 이렇게 편지했다. “우리는 참으로 서로를 필요로 해요! 정말이에요. 다른 어떤 커플도 서로가 서로를 통해 한 ‘인간’이 된다는 삶의 과제를 우리만큼 절실히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당시 결혼 전 사랑이 비밀과 치욕으로만 가능했음에도 부르주아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공동의 삶의 형태를 찾고자 했다. 비록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이 먼 미래의 것이라도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이뤄지길 원했다. 그것은 대등한 개인들의 결합이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둘 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고자 했다. 그리고 독일사민당 동료들이 부르주아적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 역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레오는 가까이 있길 바라는 로자의 갈망을 줏대 없는 모습으로 치부해버리곤 해서 로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부르주아적인 가정생활을 꿈꾸는 그 무엇도 그는 이미 10년 전 빌나에 벗어던지고 떠나왔다. 부르주아적 삶은 도망, 망명, 체포,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직업적 혁명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 시대의 사랑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제국 도처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러시아령 폴란드까지 퍼져나갔다.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당원은 1년 전만 해도 천 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삽시간에 3만 명으로 늘어났다. 레오는 혁명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코라코프로 달려갔다. 그는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당 수뇌부로서 당의 활동을 지도했다. 로자는 베를린에 남아 폴란드와 독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망명자들과 밀사들이 그녀의 집을 끊임없이 거쳐 갔다. 이렇게 격무에 시달리던 그녀가 늑막염으로 몸져눕게 되면서 그녀는 둘 사이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로자는 두 사람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자는 레오가 그녀와 떨어져 자율적인 활동을 하고 멀리서 그가 요구하는 것을 조달하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삶을 바랬고 정열적이었던 로자는 곁에서 다정하게 애정을 표하는 연인이 필요했다. 이에 로자는 25세 청년과 연애를 시작했다. 숨기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던 로자는 레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오는 충격으로 거의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로자는 그의 충격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청년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레오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여전히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둘의 관계는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해 10월 레오는 오토 엥겔만이라는 가명으로 바르샤바로 갔고, 로자는 독일사민당 기관지 <전진> 편집국의 정치적 지도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에 대해 보도하기보다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로자는 안나 마취케라는 사민당 당원의 신분증을 가지고 바르샤바로 떠난다. 그들은 같은 하숙집에 머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신문 <체르보니 스탄다르>를 발행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의 새로운 강령을 작성했으며 당 활동을 지도했다. 이후 로자는 당시가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비밀활동능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레오와 예리한 지성과 문장력을 가진 로자의 능력은 각각 빛을 발했다. 그들은 위대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은 절정기를 지나 패배로 돌아서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결국 1906년 3월 독일로 귀환을 준비하던 중 로자와 레오는 체포되었다. 동지들은 시청 감방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을 탈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둘은 요새 구금형이나 시베리아 강제노역, 어쩌면 사형까지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탈옥 계획을 실행하기 하루 전에 파비악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다시 바르샤바 요새의 제 10성루에 이감되었다. 구출계획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독일사민당 역시 로자를 구출하는 데 적극적이어서 그녀가 병세가 위중하여 요양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아내기 위해 관리를 매수하고 보석금을 지불하였다. 바르샤바 당국 역시도 로자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저명한 인사여서 외교 분쟁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레오는 러시아인으로서 탈영병이었고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보석금으로도 석방되지 않았다. 그는 요새에 남게 되고 로자는 요양을 명목으로 핀란드로 망명했다. 실제로 로자는 위와 간에 생긴 병과 신경쇠약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자는 요양지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파업과 당, 노동조합>을 썼다.
로자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레오가 없는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며, 관계를 정리하기 원했다. 그 무렵 로자는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스물한 살의 코스챠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시베리아 강제노역을 구형받고 가까스로 탈출한 레오가 돌아왔을 때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2년 전과 달리 그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로자를 괴롭혔다. 심지어 권총을 보이며 그녀와 그녀의 정부 그리고 자신을 쏘겠다고 협박했다. 로자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총을 마련해 두었다. 이처럼 둘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공동의 업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1907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 대표단으로 함께 참석했다. 로자와 레오는 혁명이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며 러시아당의 역할은 무엇이고 마르크스주의를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공동으로 구상하고, 로자가 대표로 연설하였다. 세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격정과 흥분은 무서운 속도로, 마치 회전목마처럼 상승과 하강을 거듭했다. 이를 계기로 코스챠가 로자를 떠나게 되고 레오와의 관계는 정상적인 동지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투쟁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해 8월 독일사민당은 전쟁예산을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독일군 사령부가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인터내셔널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독일사민당의 배신은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음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기초하여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던 독일사민당으로서는 어찌 보면 일관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주의를 이행의 정치적 수단으로 공고화하면서 국제주의적 세계혁명은 기각되고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세기 전환기 유럽 자본주의의 특수성과 제국주의의 필연적 연관성을 간과했다. 제국주의를 국내 정치 세력관계의 변화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난 정책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치 세력관계의 역전을 통해 제국주의적 팽창에 소요되는 자본을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자 역시 독일사민당의 배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바로 전시공채 재결의안 투표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칼 리프크네히트 등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전쟁에 반대하고 독일사민당에 대항하는 느슨한 연합체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 그녀는 자본주의 붕괴경향이 제국주의 열강 간 전쟁의 필연성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동시에 혁명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갈림길에 서있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촉구했다.
반전투쟁을 앞장서서 이끌던 로자는 1915년에서 1916년까지 투옥되었다. 1913년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만약 우리들이 프랑스나 그 밖의 나라의 형제를 살해하라고 명령받는다면 단호히 ‘하지 않겠다’라고 답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반전투쟁을 지도하고 <사회민주당의 위기>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 무서운 광란과 지옥에서 온 피투성이의 유령은 독일, 프랑스, 영국 및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마침내 발광하는 흥분 속에서 깨어나 정답게 손을 잡고, 제국주의 귀신들의 축제를 노동자의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몰아낼 때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16년 메이데이 날 베를린에서 격렬한 반전투쟁을 벌이다가 칼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로자 역시 1918년까지 보호구금을 당한다.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자 로자는 레오에게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를 맡겼다. 그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비밀활동 방법을 익혀주었고, 단기간에 지하조직 체계를 만드는 등 활약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로자는 이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10월 혁명의 의미와 독일 사민당이 취해야할 입장, 독일 혁명의 전망에 대해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레오와 로자는 먼 거리를 뛰어넘어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녀는 러시아혁명이 사회주의의 명예를 되살린 것으로, 독일사민당이 취하고 있던 의회주의 전략을 보기 좋게 극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볼셰비키혁명을 방어하려면 무엇보다도 세계의 노동자들,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독려하기 위해 러시아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 혁명세력들은 볼셰비키의 정치적 조치를 비판 없이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경계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로자는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통해 토지문제와 민족자결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정책방향은 반혁명세력에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로자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인 계급독재를 전면화하지 않고 소수의 독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로자는 인민대중들이 능동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교육되어 각성되어야만 혁명의 길이 열리고 사회주의가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독일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강령에도 반영된다.
1918년 10월 독일 해군본부가 8만 명의 목숨이 달린 북해항전을 결행하려고 하자, 킬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파업과 병사들의 항명이 이어졌고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에 황제가 퇴위하고 독일의 실질적인 권한을 노동자병사평의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병사평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독일사민당은 혁명을 진압하고 헌법제정을 위한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국가를 의회주의적 공화국으로 확정하려 했다. 결국 그해 12월 전국노동자병사평의회 총회에서 독일사민당의 뜻대로 1월에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진행한다고 결정되었고, 이에 대해 로자는 평의회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비판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볼셰비키처럼 단기적인 봉기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노동자 대중에 대한 교육과 조직 그리고 실질적인 혁명 과정에 대중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은 정치권력을 장악할 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베를린에서 1919년 1월 봉기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농촌지역 역시도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미 1918년 12월에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살해하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정부는 혼란과 굶주림, 지속되는 불안의 책임이 스파르타쿠스단에게 있으며 이들이 독일을 볼셰비즘에 내맡기려 한다고 악선동 했다. 1월 15일 민병대가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찾아냈다. 그들은 그녀를 근위기병대 저격병 사단본부로 끌고가 팝스트 대위가 심문을 하고 노스케와 협의해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로자는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있다가 포겔 중위가 쏜 총을 맞고 강물에 던져졌다. 레오는 체포되었다가 다시 풀려났지만 로자의 소식을 접하고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로자를 잃은 것을, 나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1919년 2월 12일 <스탄타르>에 주목을 끄는 기사가 났다. 레오가 로자의 죽음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폭로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여론을 동요시켰고 결국 당국은 정식 조사를 벌이고 재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레오가 로자에게 해준 마지막 봉사였다. 그러나 대가가 그의 목숨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레오는 체포되어 그날로 살해되었다.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녀가 남긴 말처럼 로자는 점점 밝게 빛나면서 더욱 더 빠르게 사라져 가는 양초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사회주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평가받았고, 혁명을 향한 신념을 끝가지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대단한 혁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자 역시 같은 시대 여성혁명가들이 처했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활동 주 무대였던 독일에서 당시 남성들은 여성이 회합에 참석하거나 정치 클럽에 가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여성이 조직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발적인 논쟁을 일으키는 로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더군다나 로자가 외국인이고 유태인이고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은 멸시와 배척을 감당해야만 했다. 화려한 그녀의 명성 뒤에 고통스러움과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음에도 로자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가 해방될 것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여성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여성문제는 여성노동자 조직화 관점에서 투표권 운동과 결합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여성운동 역시 1세대 페미니즘의 전성기였으나 여성의 고유한 억압에 관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로자는 여성문제의 고유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와 여성억압을 연관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로자가 한편으로는 안정된 가정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가족형태의 문제를 인식하고 도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로자 같이 탁월한 여성도 그 때문에 평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우리에게는 엘러너나 로자와 같은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다. 또 콜론타이 이후에 결혼, 가족, 여성억압에 대해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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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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