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아셈투쟁의 진실
기억해야 할 것들
지난 8월 24일 민주노총 집행간부들과 [신자유주의반대·민중생존권쟁취 민중대회위원회], [투자협정·WTO반대 국민행동]의 핵심 활동가들은 간담회 형식의 연석회의를 가졌다. 10월 20일로 예정된 아셈 회의와 저항 투쟁을 어떻게 공동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논의의 주제였다. 논의 핵심쟁점은 시민단체들이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아셈2000 민간단체 포럼]이 10월 20일경 [아셈2000 '시민행동'의 날]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 시민행동을 준비·기획하는 단위가 바로 민주노총이었던 상황에서 기인했다.
즉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핵심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민간포럼의 시민행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아셈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저항투쟁을 자신의 주요한 사업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지만, 민간 포럼의 10월 20일 시민행동과 다른 별도의 민중연대집회를 상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셈에 대한 '비판적 개입'인가 아니면 '전면적 투쟁과 비판'인가라는 현실인식·투쟁수위-방식을 둘러싼 '아셈민간포럼'과 '민중대회위원회 및 국민행동'간의 상이한 입장차이는 민주노총을 경계로 하여 매우 불분명한 형태로 봉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인식 차이를 조율하고, 사업 계획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 바로 8월 24일 간담회였던 것이다.
여기서 모아진 결론은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이 공동의 이름으로 아셈민간포럼에 '10월 20일 세 연대기구의 공동집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론은 세 연대기구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상황을 고려하여 민주노총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의결단위에서 승인되고, 민간포럼에 대한 공동 제안이 이루어지고, 몇차례의 우여곡절과 조정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아셈2000 신자유주의반대 서울행동의날 준비위원회'이다. 그리고 서울행동 준비위원회는 민간포럼과 민중대위원회, 국민행동 각 3인씩으로 구성되는 기획단을 의견 조정단위로 구성하였고, 그 산하에 실무소위를 두어 구체적 업무와 사업계획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아셈민간포럼의 핵심 사업은 13개 분과회의와 전체 회의로 이루어지는 18~19일의 민간포럼 행사이고, 이것은 민중대회위원회, 국민행동과는 무관한 민간포럼의 독자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민간포럼 내부적으로는 인권분과의 절대 다수인 13개 인권단체가 아셈민간포럼에서 공식 탈퇴를 하였다.정부지원금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반대하고 민간포럼 진행과정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였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민간포럼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진기구인 아셈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비판적 참여'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면서였다. 이러한 민간포럼의 상황과는 별개로, 10월 20일 서울행동을 준비하고 대중을 교육·선전하는 독자적 사업계획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에게 과제로서 요구되었다.
더군다나 아셈민간포럼의 사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강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아셈에 대한 민중진영의 공통된 인식을 확립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공동의 투쟁기획단을 꾸리고, 이 단위에서 공동으로 아셈투쟁에 대한 계획과 실천사업을 논의·추진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말뿐인 행동으로서의 '시민행동'이 아닌 '민중행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아셈 투쟁이 10월 18~19일의 아셈민간포럼으로 대표되거나 10월 20일 2시의 집회 하나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곧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며, 다양한 실천사업들을 규모와 수위를 조절하여 배치하는 것이라는 것이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이었다. 세 연대기구 공동으로 진행하는 10월 20일 오후의 서울행동과 이를 사전에 목적의식적 실천사업으로 배치하고 준비하는 두 연대기구의 민중행동은 이러한 점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직적 논의와 의결, 조정 과정을 거치는 공식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행동의 맥락과 기조에서 아셈 교육자료집(국민행동 자료집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을 발행하였고, 아셈 투쟁문화제 '시애틀, 프라하 그리고 서울'을 10월 8일 개최하고 참석하였다. 또한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대중화시키기 위해, 서울행동의 날 공식 포스터와 별도로 아셈 대자보를 두 연대기구 공동의 명의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 서울행동 이전에 민중행동의 의의를 알려내고 투쟁의 결의를 모으기 위해 민중행동 문화제를 서울행동 전날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서울행동의 날 오전, 아셈 정상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한국 민중들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의 결의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기로 한 것이다. 이 투쟁들은 어느 한 부문과 몇몇 단체의 투쟁이 아니라 민중행동을 결의한 우리 모두의 투쟁 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난 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투쟁을 평가하고 한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무엇을 결의하고 합의하였는지를 부정할 때 또는 망각할 때,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투쟁 경험이 성과적으로 축적되고 일보전진을 위한 기반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셈투쟁의 과정에 대한 개요
◆10월 19일 이전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셈 투쟁의 준비는 실질적으로는 9월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셈 투쟁이 한 번의 집회투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아셈과 투쟁의 의미에 대해 교육하고 선전, 조직하는 사업을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집회 투쟁 또한 소규모로 연속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아셈 투쟁을 투쟁사업, 정치사업, 교육선전사업, 문화사업, 기타사업 등으로 나누어서 사업을 계획하고 배치하기로 하였다.
투쟁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19일 전야제와 20일 오전투쟁과 서울행동의 날이 가장 큰 사업이었지만, 소규모 투쟁으로 16일 오므론 집회와 18일과 19일의 경총규탄 집회, 파견철폐공대위 집회 등에 결합하여 아셈 투쟁의 의의를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외에도 아셈공식회의의 하나였던 세계지식포럼(이랜드 협찬)에 대한 규탄과 항의투쟁, 시티은행과 같은 초국적자본이나 외자기업에 대한 상징적 투쟁을 추진하였지만 주·객관적 사정으로 인해 철회하거나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평가의 한 지점이 되어야 한다. 아셈 투쟁이 어느 날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아셈반대라는 정치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라면 사전에 투쟁을 조직하고 확산시켜가는 사업들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되고 조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으며 그 원인을 진단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정치사업과 관련해서 시민단체의 아셈민간포럼과는 다른 축으로, 민중행동의 투쟁과 정치적 방향을 알려낼 수 있는 사업으로 국제토론회를 추진하였다. 아셈에 대한 저항을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현실과 서울을 주시하고 있는 국제적 운동세력들에게, 한국 민중운동의 태도와 입장을 정식화해주는 정치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존재하였는데,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 대부분이 아셈민간포럼에 의해 초청받은 인사라는 점, 이와 별도로 국제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재정적,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아셈민간포럼에 온 외국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민중행동의 실천계획을 알려내고, 민중행동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소규모 국제토론회를, 아셈민간포럼 일정과 겹치지 않게 잡아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사회진보연대가 주최하는 국제포럼이 전야제 장소에서 대여섯명의 외국 활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2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행사 자체는 외형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제포럼이 정치사업의 한 맥락에서 배치되었고, 포럼에서 다루려던 내용 또한 한두 단체의 간담회가 아니라, 민중행동이 시민운동과 별도로 구성되고 다양한 실천을 전개하는 정치적 의미와 투쟁의 방향을 알리고 논의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 기준에 미달하였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다. 정치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벤트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교육선전사업과 관련해서는 국민행동에서 발행한 아셈 투쟁 자료집이 유효적절하게 제출되었고, 활용 또한 대중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국민행동 자료집은 주로 아셈과 국제기구에 대한 분석과 비판, 국제적 민중 투쟁의 흐름을 소개하고 反신자유주의·反세계화 투쟁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반면,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국내 민중들의 현실을 연관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토대로 노동·농민·빈민·실업과 교육 등 현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민중을 파괴하고 피폐화시키고 있는가를 선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국민행동 자료집의 내용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이 발행된 시점과 배포를 위한 물리적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소수 분량만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파일을 통한 지역과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활용되기를 바랬다. 비교적 아셈 투쟁의 다른 측면에 비해 교육선전사업이 외형적으로는 성과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 자료집이 대중 교육과 조직화의 매개체로, 적극적이고 효율성있게 사용되었는가는 별도로 확인되고 평가되어야 할 측면이다.
선전사업과 관련한 다른 한 측면에서, 서울행동 포스터와 민중행동 대자보가 평가되어야 한다. 포스터와 대자보의 내용적 형상화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정치적 판단과 입장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조직에서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 아셈민간포럼에서는 포스터가 서울행동과는 다른 성격이 가미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단체에서 자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사전 통제가 행해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민중행동이 취한 태도는 민중행동의 독자적인 내용을 집약하는 선전대자보를 제작하여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을 집행하고 단위별로 배포하였다.
그러나 민중행동의 독자적 대자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현실적 이유는 민주노총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대자보의 필요성과 의미, 배포과정은 민주노총과 공유되지 못했다. 이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아셈 투쟁을 선전하는 민주노총의 자체 포스터에 10월 20일 서울행동 장소로 '건국대'가 인쇄된 점이다. 물론 민주노총에서는 인쇄 과정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지워서 내려보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대는 아셈민간포럼이 진행되는 장소이며, 민중행동이나 서울행동과는 전혀 무관한 장소이다. 결국 민주노총의 고민과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었는지는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이다.
문화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8일 국민행동의 문화제와 10월 19일의 민중행동 전야제가 배치되었다. 참석자의 숫자나 관객들의 반응 그리고 문화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던 정치적 의미의 형상화하는 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민중행동은 예측되는 경찰측의 방해를 방지하고 10월 20일 서울행동 집회를 강력하게 전개하기 위해 아셈회의장 주변 몇군데에 미리 집회신고를 내기로 하였다. 9월 8일과 9일 사회진보연대와 공공의료강화를 위한 연대회의 명의로 집회 신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중복신고를 이유로 집회 금지를 통고하였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를 통해 경찰이 불법부당하게 아셈행사장 주변의 기업과 관변단체를 강요하여 집회 신고를 내도록 한 것이 드러났다. 이 시점에서 문제는 집회신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아셈투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경찰의 불법 행위가 폭로되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정세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행동은 이 쟁점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면서 아셈 투쟁의 선제공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신고 주최단체의 개별적 문제로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민중행동의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9월 22일 국민행동 아셈자료집 발간 → 10월 6일 아셈 집회금지와 관련하여 강남경찰서 항의방문 → 10월 8일 국민행동 문화제 → 10월 9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 발간 → 10월 12일 민주노총 '한일 한미투자협정' 토론회 → 10월 16일 사무금융노련 주최의 한국오므론 관련 집회 → 10월 17일 민중행동 기자간담회 → 10월 17일 서울경찰청장 강남경찰서장, 직권남용과 집회 방해로 고발 → 10월 18일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개악에 대해 경총 항의 집회 → 10월 19일 이랜드노조, 경총 항의집회 / 학생들 아셈관련 선전전과 가두행진 / 민중행동 국제포럼 / 민중행동 문화제
◆10월 19일~20일
10월 19일 전야제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혼선이 존재하였다. 애초 민주노총이 상경투쟁의 핵심을 20일~21일로 잡았을 때는 19일 전야제에 노동자대오가 결합하기 힘들다는 판단 속에서, 학생과 사회단체 중심으로 민중행동 전야제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수가 많지 않고 노동자대오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더라도, 20일 오전투쟁을 위해서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민중행동의 판단이었다. 민주노총이 19일 상경으로 방침을 바꾼 이후에도, 상경 대오의 규모와 전야제에 결합하는 정도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오전 투쟁에 대한 민주노총의 결합 수위는 전혀 예측되지 못했다. 이것은 투쟁의 주체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민중행동의 맥락에서 전술을 배치하고 운용하는 것인지, 민중행동과 별개로 민주노총이 투쟁 계획을 잡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후적으로 평가한다면 상당한 혼란과 동요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숭실대 봉쇄 여부(20일 오전투쟁에 대한)에 대한 경찰측의 움직임도 정확하게 분석되지 못하였다.
전술운용의 핵심은 경찰측의 대응 방향과 주체의 준비 정도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판단하에, 전술운용의 기조에 근거하여 몇가지의 전술을 결정하고, 현장의 상황 변화에 맞추어 이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0.19~20 투쟁의 전술 지도부는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전술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와 수립된 전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전술운용의 주체가 누구였는가? 과연 민중행동이 아셈투쟁의 중심 주체였는가 아니면 민중행동이 민주노총 투쟁에 대한 지지 지원자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아셈 투쟁전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평가 과정에서 던져져야 한다. 그 질문과 대답에서 이번 투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20일 투쟁의 흐름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9일 전야제(민중행동) ― 20일 8시 아셈저지 투쟁(민중행동) ― 20일 10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아셈 진격투쟁(민중행동) ― 20일 오후 2시 서울행동의 날이 그것이다.
전야제의 참석 규모는 정확하게 점검되거나 예측되지 못했다. 특히 노동자대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학생들의 경우는 비교적 예측이 가능했고 또 예측과 현실치가 근접하였다. 이것은 참석 규모에 대한 호사가적 관심이 아니다. 10월 20일 오전 투쟁에 대한 동력의 문제이며, 투쟁 주체의 규모와 가능한 전술방식에 대한 고민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전술 지도부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20일 오전 8시의 아셈 저지투쟁의 수위도 이와 연동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는 8시 투쟁과 관련하여 몇가지 가능성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대오를 중심으로 하고 노동자대오는 선봉대 중심으로 결합하여 아셈정상들이 숙식하는 특정 호텔을 오전에 봉쇄한다는 것, 아셈 정상들이 회의장으로 참석하러 가는 도로 중 강남의 요충지에서 기습시위를 벌이는 것 등에 대해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아셈 저지 투쟁의 기조를 고수할 것, 투쟁의 규모를 판단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한 전술이어야 할 것, 학생들만의 투쟁으로 비추어져서는 안될 것 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19일 저녁 현실적으로 노동자대오가 8시 투쟁에 일부라도 결합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투쟁의 기조를 전환하였다. 즉 1천여명의 학생 대오를 단일하게 형성하여 진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학생들을 노동자와 분리시켜 고립시킬 가능성이 많으며, 또한 1천여명의 학생대오로는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8시 투쟁과 관련해서는 학생 단위를 소규모로 재편하여 아셈 회의장 주변에서 기습시위를 연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최종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일부 신문에서도 민주노총 관계자의 발언으로 소개되고, 공식회의상에서 확인된 민주노총 지도부의 발언과는 다르게, 20일 오전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오전 투쟁이 학생들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민주노총이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정이 핵심적 이유였다.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8시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투쟁이고, 10시는 민주노총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민중연대운동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발언에 다름아닌 것이다)
10시 투쟁과 관련한 전술적 고민은 뱅뱅사거리 주변에서 어떻게 집회공간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집회 금지를 통고한 상황에서 경찰은 최대한의 강도로 집회장 주변을 봉쇄할 것이고, 또한 집회 대오가 형성되더라도 행진은 가능하지 않고 상당수가 연행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이에 근거할 때 강력한 물리적 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높은 결의와 주체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고 올바른 것인지에 전술 고민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결정된 방침은 선봉대를 중심으로 집회 공간을 기습적으로 확보하고, 집회 이후 전원 연좌투쟁을 전개한다는 공격적 방어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것은 20일 10시 드러났다. 집회 공간은 봉쇄되지 않았고, 경찰은 집회대오를 연행하지도 않았고, 강남역까지의 행진도 허용했다. 약 3000여명의 집회 대오가 형성되었고, 일정한 물리적 충돌이 있었지만 강남역까지 행진을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하였다. 강남역까지 행진한 다음 어떠한 전술과 행동방침을 채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예상했던 전술방향과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강남역 이후에 대한 현장에서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지도부는 집회의 종결과 2시 서울행동의 날 참석을 선언했다. 이러한 결정의 근거에는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강박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뱅뱅사거리와 강남역에서의 대치를 어떻게 확대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판단이 아니었다.
서울행동의 날에 강남역 대오가 결합해야 한다는 것, 강남역 대치가 장기화되거나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서울행동의 날 행사가 훼손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강박관념이 결정을 신속하게 한 배경인 것이다. 결국 이 판단은 서울행동의 날과 아셈 투쟁의 총론적 기조가 반영되었던 것이며, 단순히 강남역 대치에 대한 현실적 판단의 차이로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서울행동의 날은 세 연대기구의 조정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즉 대회는 문화행사 중심으로 진행하며 3.2km를 힘있게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종합경기장에서 한다는 것은 세 연대기구간에 조정·결정된 것이다. 민중행동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할 지점은 장소 선정에서 참석자들의 투쟁의지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로 국한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결정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행진과 마무리 집회에서 민중행동의 구체적인 개입 방안이 제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올림픽공원에서 집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정권과의 긴장감있는 대치와 대중적 투쟁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민중행동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구조적 제약을 감수하면서 개입전술을 채택하든가 아니면 대회 자체를 보이코트하고 별도의 대중행동을 조직하는가의 양자선택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민중행동은 전자를 선택하였지만 개입 전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민중행동의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계획이 부재한 상황에서 마무리 집회에서의 일정한 대치와 공방은 결국 에피소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하나, 애초에 민중행동은 서울행동의 날 사전 행사로 전국실업단체연대회의에서 제안한 실업자대회의 개최에 동의하고, 아셈민간포럼에 합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은 사전행사로 실업자대회를 개최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실업자대회는 공식행사와는 별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 바로 '실업의 구조적 재생산,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점에서 민중행동은 실업자대회가 서울행동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라는 취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은 행사의 집중성과 여러 가지 실무적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일 행사는 집중적이지도, 압축적이지도 않았고, 예정에도 없었던 순서들도 배치되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구체적 실행과정을 문제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셈민간포럼이 실업자대회를 반대했던 진정한 이유가 실무적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즉 아셈민간포럼은 '신자유주의 반대·세계화 반대'를 하나의 수사와 포장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을 갖게 된다.
지난 8월 24일 민주노총 집행간부들과 [신자유주의반대·민중생존권쟁취 민중대회위원회], [투자협정·WTO반대 국민행동]의 핵심 활동가들은 간담회 형식의 연석회의를 가졌다. 10월 20일로 예정된 아셈 회의와 저항 투쟁을 어떻게 공동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논의의 주제였다. 논의 핵심쟁점은 시민단체들이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아셈2000 민간단체 포럼]이 10월 20일경 [아셈2000 '시민행동'의 날]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 시민행동을 준비·기획하는 단위가 바로 민주노총이었던 상황에서 기인했다.
즉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핵심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민간포럼의 시민행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아셈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저항투쟁을 자신의 주요한 사업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지만, 민간 포럼의 10월 20일 시민행동과 다른 별도의 민중연대집회를 상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셈에 대한 '비판적 개입'인가 아니면 '전면적 투쟁과 비판'인가라는 현실인식·투쟁수위-방식을 둘러싼 '아셈민간포럼'과 '민중대회위원회 및 국민행동'간의 상이한 입장차이는 민주노총을 경계로 하여 매우 불분명한 형태로 봉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인식 차이를 조율하고, 사업 계획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 바로 8월 24일 간담회였던 것이다.
여기서 모아진 결론은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이 공동의 이름으로 아셈민간포럼에 '10월 20일 세 연대기구의 공동집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론은 세 연대기구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상황을 고려하여 민주노총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의결단위에서 승인되고, 민간포럼에 대한 공동 제안이 이루어지고, 몇차례의 우여곡절과 조정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아셈2000 신자유주의반대 서울행동의날 준비위원회'이다. 그리고 서울행동 준비위원회는 민간포럼과 민중대위원회, 국민행동 각 3인씩으로 구성되는 기획단을 의견 조정단위로 구성하였고, 그 산하에 실무소위를 두어 구체적 업무와 사업계획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아셈민간포럼의 핵심 사업은 13개 분과회의와 전체 회의로 이루어지는 18~19일의 민간포럼 행사이고, 이것은 민중대회위원회, 국민행동과는 무관한 민간포럼의 독자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민간포럼 내부적으로는 인권분과의 절대 다수인 13개 인권단체가 아셈민간포럼에서 공식 탈퇴를 하였다.정부지원금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반대하고 민간포럼 진행과정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였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민간포럼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진기구인 아셈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비판적 참여'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면서였다. 이러한 민간포럼의 상황과는 별개로, 10월 20일 서울행동을 준비하고 대중을 교육·선전하는 독자적 사업계획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에게 과제로서 요구되었다.
더군다나 아셈민간포럼의 사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강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아셈에 대한 민중진영의 공통된 인식을 확립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공동의 투쟁기획단을 꾸리고, 이 단위에서 공동으로 아셈투쟁에 대한 계획과 실천사업을 논의·추진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말뿐인 행동으로서의 '시민행동'이 아닌 '민중행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아셈 투쟁이 10월 18~19일의 아셈민간포럼으로 대표되거나 10월 20일 2시의 집회 하나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곧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며, 다양한 실천사업들을 규모와 수위를 조절하여 배치하는 것이라는 것이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이었다. 세 연대기구 공동으로 진행하는 10월 20일 오후의 서울행동과 이를 사전에 목적의식적 실천사업으로 배치하고 준비하는 두 연대기구의 민중행동은 이러한 점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직적 논의와 의결, 조정 과정을 거치는 공식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행동의 맥락과 기조에서 아셈 교육자료집(국민행동 자료집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을 발행하였고, 아셈 투쟁문화제 '시애틀, 프라하 그리고 서울'을 10월 8일 개최하고 참석하였다. 또한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대중화시키기 위해, 서울행동의 날 공식 포스터와 별도로 아셈 대자보를 두 연대기구 공동의 명의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 서울행동 이전에 민중행동의 의의를 알려내고 투쟁의 결의를 모으기 위해 민중행동 문화제를 서울행동 전날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서울행동의 날 오전, 아셈 정상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한국 민중들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의 결의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기로 한 것이다. 이 투쟁들은 어느 한 부문과 몇몇 단체의 투쟁이 아니라 민중행동을 결의한 우리 모두의 투쟁 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난 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투쟁을 평가하고 한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무엇을 결의하고 합의하였는지를 부정할 때 또는 망각할 때,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투쟁 경험이 성과적으로 축적되고 일보전진을 위한 기반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셈투쟁의 과정에 대한 개요
◆10월 19일 이전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셈 투쟁의 준비는 실질적으로는 9월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셈 투쟁이 한 번의 집회투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아셈과 투쟁의 의미에 대해 교육하고 선전, 조직하는 사업을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집회 투쟁 또한 소규모로 연속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아셈 투쟁을 투쟁사업, 정치사업, 교육선전사업, 문화사업, 기타사업 등으로 나누어서 사업을 계획하고 배치하기로 하였다.
투쟁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19일 전야제와 20일 오전투쟁과 서울행동의 날이 가장 큰 사업이었지만, 소규모 투쟁으로 16일 오므론 집회와 18일과 19일의 경총규탄 집회, 파견철폐공대위 집회 등에 결합하여 아셈 투쟁의 의의를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외에도 아셈공식회의의 하나였던 세계지식포럼(이랜드 협찬)에 대한 규탄과 항의투쟁, 시티은행과 같은 초국적자본이나 외자기업에 대한 상징적 투쟁을 추진하였지만 주·객관적 사정으로 인해 철회하거나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평가의 한 지점이 되어야 한다. 아셈 투쟁이 어느 날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아셈반대라는 정치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라면 사전에 투쟁을 조직하고 확산시켜가는 사업들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되고 조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으며 그 원인을 진단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정치사업과 관련해서 시민단체의 아셈민간포럼과는 다른 축으로, 민중행동의 투쟁과 정치적 방향을 알려낼 수 있는 사업으로 국제토론회를 추진하였다. 아셈에 대한 저항을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현실과 서울을 주시하고 있는 국제적 운동세력들에게, 한국 민중운동의 태도와 입장을 정식화해주는 정치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존재하였는데,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 대부분이 아셈민간포럼에 의해 초청받은 인사라는 점, 이와 별도로 국제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재정적,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아셈민간포럼에 온 외국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민중행동의 실천계획을 알려내고, 민중행동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소규모 국제토론회를, 아셈민간포럼 일정과 겹치지 않게 잡아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사회진보연대가 주최하는 국제포럼이 전야제 장소에서 대여섯명의 외국 활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2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행사 자체는 외형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제포럼이 정치사업의 한 맥락에서 배치되었고, 포럼에서 다루려던 내용 또한 한두 단체의 간담회가 아니라, 민중행동이 시민운동과 별도로 구성되고 다양한 실천을 전개하는 정치적 의미와 투쟁의 방향을 알리고 논의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 기준에 미달하였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다. 정치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벤트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교육선전사업과 관련해서는 국민행동에서 발행한 아셈 투쟁 자료집이 유효적절하게 제출되었고, 활용 또한 대중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국민행동 자료집은 주로 아셈과 국제기구에 대한 분석과 비판, 국제적 민중 투쟁의 흐름을 소개하고 反신자유주의·反세계화 투쟁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반면,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국내 민중들의 현실을 연관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토대로 노동·농민·빈민·실업과 교육 등 현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민중을 파괴하고 피폐화시키고 있는가를 선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국민행동 자료집의 내용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이 발행된 시점과 배포를 위한 물리적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소수 분량만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파일을 통한 지역과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활용되기를 바랬다. 비교적 아셈 투쟁의 다른 측면에 비해 교육선전사업이 외형적으로는 성과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 자료집이 대중 교육과 조직화의 매개체로, 적극적이고 효율성있게 사용되었는가는 별도로 확인되고 평가되어야 할 측면이다.
선전사업과 관련한 다른 한 측면에서, 서울행동 포스터와 민중행동 대자보가 평가되어야 한다. 포스터와 대자보의 내용적 형상화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정치적 판단과 입장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조직에서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 아셈민간포럼에서는 포스터가 서울행동과는 다른 성격이 가미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단체에서 자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사전 통제가 행해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민중행동이 취한 태도는 민중행동의 독자적인 내용을 집약하는 선전대자보를 제작하여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을 집행하고 단위별로 배포하였다.
그러나 민중행동의 독자적 대자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현실적 이유는 민주노총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대자보의 필요성과 의미, 배포과정은 민주노총과 공유되지 못했다. 이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아셈 투쟁을 선전하는 민주노총의 자체 포스터에 10월 20일 서울행동 장소로 '건국대'가 인쇄된 점이다. 물론 민주노총에서는 인쇄 과정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지워서 내려보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대는 아셈민간포럼이 진행되는 장소이며, 민중행동이나 서울행동과는 전혀 무관한 장소이다. 결국 민주노총의 고민과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었는지는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이다.
문화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8일 국민행동의 문화제와 10월 19일의 민중행동 전야제가 배치되었다. 참석자의 숫자나 관객들의 반응 그리고 문화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던 정치적 의미의 형상화하는 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민중행동은 예측되는 경찰측의 방해를 방지하고 10월 20일 서울행동 집회를 강력하게 전개하기 위해 아셈회의장 주변 몇군데에 미리 집회신고를 내기로 하였다. 9월 8일과 9일 사회진보연대와 공공의료강화를 위한 연대회의 명의로 집회 신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중복신고를 이유로 집회 금지를 통고하였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를 통해 경찰이 불법부당하게 아셈행사장 주변의 기업과 관변단체를 강요하여 집회 신고를 내도록 한 것이 드러났다. 이 시점에서 문제는 집회신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아셈투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경찰의 불법 행위가 폭로되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정세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행동은 이 쟁점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면서 아셈 투쟁의 선제공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신고 주최단체의 개별적 문제로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민중행동의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9월 22일 국민행동 아셈자료집 발간 → 10월 6일 아셈 집회금지와 관련하여 강남경찰서 항의방문 → 10월 8일 국민행동 문화제 → 10월 9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 발간 → 10월 12일 민주노총 '한일 한미투자협정' 토론회 → 10월 16일 사무금융노련 주최의 한국오므론 관련 집회 → 10월 17일 민중행동 기자간담회 → 10월 17일 서울경찰청장 강남경찰서장, 직권남용과 집회 방해로 고발 → 10월 18일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개악에 대해 경총 항의 집회 → 10월 19일 이랜드노조, 경총 항의집회 / 학생들 아셈관련 선전전과 가두행진 / 민중행동 국제포럼 / 민중행동 문화제
◆10월 19일~20일
10월 19일 전야제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혼선이 존재하였다. 애초 민주노총이 상경투쟁의 핵심을 20일~21일로 잡았을 때는 19일 전야제에 노동자대오가 결합하기 힘들다는 판단 속에서, 학생과 사회단체 중심으로 민중행동 전야제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수가 많지 않고 노동자대오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더라도, 20일 오전투쟁을 위해서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민중행동의 판단이었다. 민주노총이 19일 상경으로 방침을 바꾼 이후에도, 상경 대오의 규모와 전야제에 결합하는 정도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오전 투쟁에 대한 민주노총의 결합 수위는 전혀 예측되지 못했다. 이것은 투쟁의 주체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민중행동의 맥락에서 전술을 배치하고 운용하는 것인지, 민중행동과 별개로 민주노총이 투쟁 계획을 잡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후적으로 평가한다면 상당한 혼란과 동요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숭실대 봉쇄 여부(20일 오전투쟁에 대한)에 대한 경찰측의 움직임도 정확하게 분석되지 못하였다.
전술운용의 핵심은 경찰측의 대응 방향과 주체의 준비 정도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판단하에, 전술운용의 기조에 근거하여 몇가지의 전술을 결정하고, 현장의 상황 변화에 맞추어 이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0.19~20 투쟁의 전술 지도부는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전술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와 수립된 전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전술운용의 주체가 누구였는가? 과연 민중행동이 아셈투쟁의 중심 주체였는가 아니면 민중행동이 민주노총 투쟁에 대한 지지 지원자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아셈 투쟁전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평가 과정에서 던져져야 한다. 그 질문과 대답에서 이번 투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20일 투쟁의 흐름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9일 전야제(민중행동) ― 20일 8시 아셈저지 투쟁(민중행동) ― 20일 10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아셈 진격투쟁(민중행동) ― 20일 오후 2시 서울행동의 날이 그것이다.
전야제의 참석 규모는 정확하게 점검되거나 예측되지 못했다. 특히 노동자대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학생들의 경우는 비교적 예측이 가능했고 또 예측과 현실치가 근접하였다. 이것은 참석 규모에 대한 호사가적 관심이 아니다. 10월 20일 오전 투쟁에 대한 동력의 문제이며, 투쟁 주체의 규모와 가능한 전술방식에 대한 고민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전술 지도부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20일 오전 8시의 아셈 저지투쟁의 수위도 이와 연동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는 8시 투쟁과 관련하여 몇가지 가능성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대오를 중심으로 하고 노동자대오는 선봉대 중심으로 결합하여 아셈정상들이 숙식하는 특정 호텔을 오전에 봉쇄한다는 것, 아셈 정상들이 회의장으로 참석하러 가는 도로 중 강남의 요충지에서 기습시위를 벌이는 것 등에 대해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아셈 저지 투쟁의 기조를 고수할 것, 투쟁의 규모를 판단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한 전술이어야 할 것, 학생들만의 투쟁으로 비추어져서는 안될 것 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19일 저녁 현실적으로 노동자대오가 8시 투쟁에 일부라도 결합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투쟁의 기조를 전환하였다. 즉 1천여명의 학생 대오를 단일하게 형성하여 진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학생들을 노동자와 분리시켜 고립시킬 가능성이 많으며, 또한 1천여명의 학생대오로는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8시 투쟁과 관련해서는 학생 단위를 소규모로 재편하여 아셈 회의장 주변에서 기습시위를 연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최종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일부 신문에서도 민주노총 관계자의 발언으로 소개되고, 공식회의상에서 확인된 민주노총 지도부의 발언과는 다르게, 20일 오전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오전 투쟁이 학생들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민주노총이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정이 핵심적 이유였다.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8시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투쟁이고, 10시는 민주노총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민중연대운동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발언에 다름아닌 것이다)
10시 투쟁과 관련한 전술적 고민은 뱅뱅사거리 주변에서 어떻게 집회공간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집회 금지를 통고한 상황에서 경찰은 최대한의 강도로 집회장 주변을 봉쇄할 것이고, 또한 집회 대오가 형성되더라도 행진은 가능하지 않고 상당수가 연행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이에 근거할 때 강력한 물리적 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높은 결의와 주체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고 올바른 것인지에 전술 고민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결정된 방침은 선봉대를 중심으로 집회 공간을 기습적으로 확보하고, 집회 이후 전원 연좌투쟁을 전개한다는 공격적 방어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것은 20일 10시 드러났다. 집회 공간은 봉쇄되지 않았고, 경찰은 집회대오를 연행하지도 않았고, 강남역까지의 행진도 허용했다. 약 3000여명의 집회 대오가 형성되었고, 일정한 물리적 충돌이 있었지만 강남역까지 행진을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하였다. 강남역까지 행진한 다음 어떠한 전술과 행동방침을 채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예상했던 전술방향과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강남역 이후에 대한 현장에서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지도부는 집회의 종결과 2시 서울행동의 날 참석을 선언했다. 이러한 결정의 근거에는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강박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뱅뱅사거리와 강남역에서의 대치를 어떻게 확대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판단이 아니었다.
서울행동의 날에 강남역 대오가 결합해야 한다는 것, 강남역 대치가 장기화되거나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서울행동의 날 행사가 훼손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강박관념이 결정을 신속하게 한 배경인 것이다. 결국 이 판단은 서울행동의 날과 아셈 투쟁의 총론적 기조가 반영되었던 것이며, 단순히 강남역 대치에 대한 현실적 판단의 차이로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서울행동의 날은 세 연대기구의 조정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즉 대회는 문화행사 중심으로 진행하며 3.2km를 힘있게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종합경기장에서 한다는 것은 세 연대기구간에 조정·결정된 것이다. 민중행동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할 지점은 장소 선정에서 참석자들의 투쟁의지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로 국한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결정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행진과 마무리 집회에서 민중행동의 구체적인 개입 방안이 제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올림픽공원에서 집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정권과의 긴장감있는 대치와 대중적 투쟁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민중행동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구조적 제약을 감수하면서 개입전술을 채택하든가 아니면 대회 자체를 보이코트하고 별도의 대중행동을 조직하는가의 양자선택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민중행동은 전자를 선택하였지만 개입 전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민중행동의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계획이 부재한 상황에서 마무리 집회에서의 일정한 대치와 공방은 결국 에피소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하나, 애초에 민중행동은 서울행동의 날 사전 행사로 전국실업단체연대회의에서 제안한 실업자대회의 개최에 동의하고, 아셈민간포럼에 합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은 사전행사로 실업자대회를 개최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실업자대회는 공식행사와는 별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 바로 '실업의 구조적 재생산,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점에서 민중행동은 실업자대회가 서울행동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라는 취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은 행사의 집중성과 여러 가지 실무적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일 행사는 집중적이지도, 압축적이지도 않았고, 예정에도 없었던 순서들도 배치되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구체적 실행과정을 문제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셈민간포럼이 실업자대회를 반대했던 진정한 이유가 실무적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즉 아셈민간포럼은 '신자유주의 반대·세계화 반대'를 하나의 수사와 포장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