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언론의 가능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과거 언론의 역사를 회복하는 길
"신문사를 테러하라"
월간 사회진보연대 8·9월호에 실린 글 중 하나의 제목이다. 테러. 참으로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이다. 필자의 논지는 명쾌하다. 해방 이후 자유로웠던 언론·출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이후 점차 '사회 통념의 개념'만을 싣도록 왜곡되어 왔으며, 적극적이고 활발한 의견의 대립과 표현(때로는 테러까지도 불사하는)만이 과거 '언론의 역사'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극단적 표현은 제쳐두고라도, 필자가 펼치는 논지의 핵심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걱정도 많고 의심도 많은 제도임에 틀림이 없다. 절대권력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분립해 놓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해놓았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권력간 상호감시 이외에도 '언론'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주장을 모아 '여론'이라는 것을 창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언론의 존재이유는 '다양한 의견의 소통과 충돌'이며 언론의 존재가치는 '현존하는 계급투쟁의 양상과 각각의 주장을 지면과 화면에 펼쳐냄으로써(또는 자신의 의도와 주장을 타자의 그것과 충돌시키는 방식을 통해)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우위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김병관 동아일보사주의 취중 행태
얼마 전, 언론의 존재이유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회장뿐만이 아니라, 언론사의 족벌사주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홀연 나타난 이 학교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회장인 김병관 씨는 낮술에 취한 채 횡설수설을 남발해 세인의 지탄을 받았다.
처음 고대 앞에 나타난 김 회장은 '김영삼씨와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대는 민족대학, 동아일보는 민족신문, 김대통령을 동아일보로 모시겠다. 이상 끝"이라고 답해 이 날 사태를 예고했다. 이어 김병관 회장은 이 자리에서 김정일 '동지'가 선물했다는 CD에 담긴 '심장에 남은 사람'의 가사를 '낭송'하기도 하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주사파'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돌연 학생들 틈에 끼어 길바닥에 앉아 '반 아셈'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취재차 나온 한겨레 김소민 기자에게 "너희 신문이 선동해서 이 학생들이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던 그는 결국 자사 기자의 만류로 차에 올라 고대 앞을 떠났다. 김 회장의 추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 신문 OhMyNews의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사 신문의 편향된 편집방향을 비판한 기자에게 술에 취한 채 심한 욕설과 인간적 모욕감을 준 것을 비롯, 드라마 '왕과 비'에 출연 중이던 채시라 씨가 동아일보 편집국을 찾은 자리에서 "대왕대비마마"라고 소리쳐 빈축을 사기도 했다.
김병관에 대한 각 언론의 시각
김병관 회장의 취중 행태는 어찌보면 '친근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김 회장의 주사가 '도'를 넘을 지언정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준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도덕적 비난이 쇄도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업계 1-2-3위를 다투는 굴지 언론사의 사주라는 사실 때문이다.
좋다. 여기까지 접어준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이 일어난 3일 뒤인 10월 16일자 사설 '고대 앞에서 벌어진 반지성'을 통해 김 회장을 거들고 나섰다. 같은 족벌사주를 모시고 있기 때문일까?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반지성적' '학생회가 검열권을 행사' '어거지' '이념적 폭력성' '역매카시즘' 등 듣기에도 겁나는 용어들을 섞어 가며 고대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나마 조선일보는 솔직했다. 동아일보가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국민일보 등 종합일간지는 김영삼 씨의 고대 진입 실패 기사를 다루며 '김병관 회장이 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학생들 설득에 나섰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했을 뿐이다.
정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겨레다. 한겨레는 10월 25일자 신문 정연주 칼럼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2'를 통해 '세습사주의 제왕적 권력에 대해 적극적인 내부 혁파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언론사 사이에 형성된 침묵의 카르텔'을 지적했다. 구구절절 올바른 말이다. 언론이 족벌사주의 횡포에 맞서 사회적 공기로서의 자기역할을 다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언론노동운동의 영원한 화두이며, 족벌사주 체제가 언론사 내부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병폐인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한겨레에 대한 기대 그리고 실망
물불 가리지 못한 채 권력과의 동침과 자본과의 밀월소식을 전달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우리 신문의 고질병 정중앙에는 이들 '족벌사주'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는 모르는 것일까? 자신들도 '신자유주의'와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맥락의 '조폭적 행태'를 저지르고 있다는 혐의를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그간 언론개혁과 사회민주화에 기여해 왔던 한겨레의 역할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한겨레는 그 시작부터 조선투위·동아투위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들이 유신정권의 언론탄압 속에서 민주언론의 꽃을 피워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겨레는 '민주'에 목말랐던 민중들에게 소외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신문이었으며,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와 진실을 바로잡아주는 '우리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니 실망도 큰 것일까? 최근 대우·한보철강의 해외매각이나 ASEM 정상회의를 전후해 나타난 한겨레의 보도를 보면, 이러한 이들의 역사에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드라이브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구축 전략 속에서 이를 부채질하는 기사와 보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 자신의 이념과 목소리를 가지는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순 없겠지만, 그간 한겨레가 점해왔던 위치와 현재의 지면을 비교해 볼 때, 실망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특히 한겨레의 사설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을 진보의 마지노선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아셈을 전후한 한겨레의 사설
한겨레는 지난 10월 19일자 '아시아-유럽 실질적 협력 틀 되기를' 제하의 사설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모여 의견을 개진하는 것 자체가 지니는 무게'를 강조하며 '88 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많은 외국 귀빈들을 초청한 만큼 회의 진행에 만전을 기하고 우리 나라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도록 최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셈 정상회의 폐막 다음날인 지난 10월 22일에도 한겨레는 '목표와 방향이 선명해 진 아셈' 제하의 사설을 내보내면서, 아셈 직전 국민행동 등 민중운동진영에 대한 충실한 보도로 쌓아왔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 사설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확고하게 다졌다는 점과 아셈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성공적인 개최'였다는 식의 용비어천가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아셈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정치대화 강화, 경제 재무 사회 문화 분야 협력 증진 등의 큰 틀 아래 이를 구체화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ASEM이 촉진시킬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 될 것이라는 신호탄이며, 그간 축적되어온 민주적 통제장치가 초국적 자본 앞에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각종 투기자본의 국내 유입과 2차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 공기업 민영화 등 사회 역기능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사설은 이러한 역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정부의 정책방향에 힘을 실어주는 데에만 충실했다.
민주언론의 가능성을 외면하는가
해외매각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하다. 한겨레는 지난 10월 5일자 '엎친데 덮친 한보철강 매각 실패' 사설을 통해 매각 실패가 '부진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에 차질을 주면서 우리 경제의 불안지수를 더욱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설은 또 '한보 매각 계획 무산이 우리 경제에 미칠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정부의 협상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 초국적 자본의 일방적 처사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해외 매각의 반민중성과 '사회화' 대안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한겨레 기자는 "한겨레 경제부에 반신자유주의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는 축출당하기 일쑤다"고 대답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논의와 토론도 실제 생활에서는 바쁜 일정에 쫓겨 잊혀지기 쉽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한겨레 내부에도 진보언론의 기능과 역할을 고민하고, 무리한 정부정책과 잘못된 정책기조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올곧은 목소리를 내기에 앞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대화의 전제가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마저도 언론의 일방적 발언을 통해 형성됐다는 원죄는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한겨레가 민중으로부터 사랑 받아온 매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운동진영의 씁쓸함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폭력의 수단은 다양하다. 수많은 유·무형 폭력의 피해자였던 한겨레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김병관 회장을 위시한 수많은 족벌언론들이 '족벌'의 이해를 위해 펼치는 지면 위의 '조폭적 행태'와 한겨레가 보이는 '친정권·친신자유주의·친세계화적 발언'이 동급으로 폄하될 수는 없겠지만, 정권교체에 따른 일시적 아노미 현상으로 파악하기에는 민중운동진영의 상처가 너무 크다.
한겨레가 보여줬던 우리나라 진보언론의 가능성을 계속 보고싶어 하는 민중들의 소박한 바램.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 뿐이다.
"신문사를 테러하라"
월간 사회진보연대 8·9월호에 실린 글 중 하나의 제목이다. 테러. 참으로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이다. 필자의 논지는 명쾌하다. 해방 이후 자유로웠던 언론·출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이후 점차 '사회 통념의 개념'만을 싣도록 왜곡되어 왔으며, 적극적이고 활발한 의견의 대립과 표현(때로는 테러까지도 불사하는)만이 과거 '언론의 역사'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극단적 표현은 제쳐두고라도, 필자가 펼치는 논지의 핵심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걱정도 많고 의심도 많은 제도임에 틀림이 없다. 절대권력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분립해 놓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해놓았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권력간 상호감시 이외에도 '언론'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주장을 모아 '여론'이라는 것을 창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언론의 존재이유는 '다양한 의견의 소통과 충돌'이며 언론의 존재가치는 '현존하는 계급투쟁의 양상과 각각의 주장을 지면과 화면에 펼쳐냄으로써(또는 자신의 의도와 주장을 타자의 그것과 충돌시키는 방식을 통해)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우위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김병관 동아일보사주의 취중 행태
얼마 전, 언론의 존재이유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회장뿐만이 아니라, 언론사의 족벌사주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홀연 나타난 이 학교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회장인 김병관 씨는 낮술에 취한 채 횡설수설을 남발해 세인의 지탄을 받았다.
처음 고대 앞에 나타난 김 회장은 '김영삼씨와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대는 민족대학, 동아일보는 민족신문, 김대통령을 동아일보로 모시겠다. 이상 끝"이라고 답해 이 날 사태를 예고했다. 이어 김병관 회장은 이 자리에서 김정일 '동지'가 선물했다는 CD에 담긴 '심장에 남은 사람'의 가사를 '낭송'하기도 하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주사파'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돌연 학생들 틈에 끼어 길바닥에 앉아 '반 아셈'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취재차 나온 한겨레 김소민 기자에게 "너희 신문이 선동해서 이 학생들이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던 그는 결국 자사 기자의 만류로 차에 올라 고대 앞을 떠났다. 김 회장의 추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 신문 OhMyNews의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사 신문의 편향된 편집방향을 비판한 기자에게 술에 취한 채 심한 욕설과 인간적 모욕감을 준 것을 비롯, 드라마 '왕과 비'에 출연 중이던 채시라 씨가 동아일보 편집국을 찾은 자리에서 "대왕대비마마"라고 소리쳐 빈축을 사기도 했다.
김병관에 대한 각 언론의 시각
김병관 회장의 취중 행태는 어찌보면 '친근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김 회장의 주사가 '도'를 넘을 지언정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준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도덕적 비난이 쇄도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업계 1-2-3위를 다투는 굴지 언론사의 사주라는 사실 때문이다.
좋다. 여기까지 접어준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이 일어난 3일 뒤인 10월 16일자 사설 '고대 앞에서 벌어진 반지성'을 통해 김 회장을 거들고 나섰다. 같은 족벌사주를 모시고 있기 때문일까?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반지성적' '학생회가 검열권을 행사' '어거지' '이념적 폭력성' '역매카시즘' 등 듣기에도 겁나는 용어들을 섞어 가며 고대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나마 조선일보는 솔직했다. 동아일보가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국민일보 등 종합일간지는 김영삼 씨의 고대 진입 실패 기사를 다루며 '김병관 회장이 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학생들 설득에 나섰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했을 뿐이다.
정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겨레다. 한겨레는 10월 25일자 신문 정연주 칼럼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2'를 통해 '세습사주의 제왕적 권력에 대해 적극적인 내부 혁파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언론사 사이에 형성된 침묵의 카르텔'을 지적했다. 구구절절 올바른 말이다. 언론이 족벌사주의 횡포에 맞서 사회적 공기로서의 자기역할을 다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언론노동운동의 영원한 화두이며, 족벌사주 체제가 언론사 내부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병폐인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한겨레에 대한 기대 그리고 실망
물불 가리지 못한 채 권력과의 동침과 자본과의 밀월소식을 전달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우리 신문의 고질병 정중앙에는 이들 '족벌사주'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는 모르는 것일까? 자신들도 '신자유주의'와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맥락의 '조폭적 행태'를 저지르고 있다는 혐의를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그간 언론개혁과 사회민주화에 기여해 왔던 한겨레의 역할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한겨레는 그 시작부터 조선투위·동아투위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들이 유신정권의 언론탄압 속에서 민주언론의 꽃을 피워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겨레는 '민주'에 목말랐던 민중들에게 소외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신문이었으며,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와 진실을 바로잡아주는 '우리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니 실망도 큰 것일까? 최근 대우·한보철강의 해외매각이나 ASEM 정상회의를 전후해 나타난 한겨레의 보도를 보면, 이러한 이들의 역사에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드라이브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구축 전략 속에서 이를 부채질하는 기사와 보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 자신의 이념과 목소리를 가지는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순 없겠지만, 그간 한겨레가 점해왔던 위치와 현재의 지면을 비교해 볼 때, 실망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특히 한겨레의 사설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을 진보의 마지노선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아셈을 전후한 한겨레의 사설
한겨레는 지난 10월 19일자 '아시아-유럽 실질적 협력 틀 되기를' 제하의 사설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이 모여 의견을 개진하는 것 자체가 지니는 무게'를 강조하며 '88 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많은 외국 귀빈들을 초청한 만큼 회의 진행에 만전을 기하고 우리 나라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도록 최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셈 정상회의 폐막 다음날인 지난 10월 22일에도 한겨레는 '목표와 방향이 선명해 진 아셈' 제하의 사설을 내보내면서, 아셈 직전 국민행동 등 민중운동진영에 대한 충실한 보도로 쌓아왔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 사설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확고하게 다졌다는 점과 아셈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성공적인 개최'였다는 식의 용비어천가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아셈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정치대화 강화, 경제 재무 사회 문화 분야 협력 증진 등의 큰 틀 아래 이를 구체화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ASEM이 촉진시킬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 될 것이라는 신호탄이며, 그간 축적되어온 민주적 통제장치가 초국적 자본 앞에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각종 투기자본의 국내 유입과 2차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 공기업 민영화 등 사회 역기능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사설은 이러한 역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정부의 정책방향에 힘을 실어주는 데에만 충실했다.
민주언론의 가능성을 외면하는가
해외매각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하다. 한겨레는 지난 10월 5일자 '엎친데 덮친 한보철강 매각 실패' 사설을 통해 매각 실패가 '부진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에 차질을 주면서 우리 경제의 불안지수를 더욱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설은 또 '한보 매각 계획 무산이 우리 경제에 미칠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정부의 협상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 초국적 자본의 일방적 처사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해외 매각의 반민중성과 '사회화' 대안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한겨레 기자는 "한겨레 경제부에 반신자유주의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는 축출당하기 일쑤다"고 대답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논의와 토론도 실제 생활에서는 바쁜 일정에 쫓겨 잊혀지기 쉽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한겨레 내부에도 진보언론의 기능과 역할을 고민하고, 무리한 정부정책과 잘못된 정책기조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올곧은 목소리를 내기에 앞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대화의 전제가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마저도 언론의 일방적 발언을 통해 형성됐다는 원죄는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한겨레가 민중으로부터 사랑 받아온 매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운동진영의 씁쓸함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폭력의 수단은 다양하다. 수많은 유·무형 폭력의 피해자였던 한겨레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김병관 회장을 위시한 수많은 족벌언론들이 '족벌'의 이해를 위해 펼치는 지면 위의 '조폭적 행태'와 한겨레가 보이는 '친정권·친신자유주의·친세계화적 발언'이 동급으로 폄하될 수는 없겠지만, 정권교체에 따른 일시적 아노미 현상으로 파악하기에는 민중운동진영의 상처가 너무 크다.
한겨레가 보여줬던 우리나라 진보언론의 가능성을 계속 보고싶어 하는 민중들의 소박한 바램.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