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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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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재벌개혁론 비판

박준형 | 인천지부 회원
1997년 외환위기 후 3년간의 구조조정과정이 신자유주의로 뚜렷하게 표현되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이견은 있더라도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비교적 충실하게 진행되었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의 4대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된 구조조정 계획은 큰 틀에 이어 한국 경제의 금융화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구조조정은 금융 구조조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면서 추진되었다.

기업 구조조정의 쟁점은 "재벌을 어떻게 구조조정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YS 정권 당시부터 업종전문화로 추진된 빅딜 계획은 1998, 1999년을 거치면서 계속 추진되었고, 현재 2단계 구조조정에서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된 문제까지 다루어지면서 재벌 체제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힘이지만, 한편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재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존재하였다. 재벌의 천민성과 부패성, 비효율성은 누가 보기에도 명확했으며 재벌을 개혁하자는 재벌개혁론은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주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벌개혁론은 진정으로 한국사회의 독점적 구조를 바꾸는 대안이 되지 못하고 그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구제금융 3년차의 논쟁 과정에서 진보진영 내부의 재벌개혁론은 점점 더 신자유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제기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 닮은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현대 건설 자구안과 관련한 논쟁

현대건설 사태의 진전,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와 논쟁은 재벌개혁론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현대 건설은 현대 그룹의 지주회사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기에, 특히나 현대 사태의 처리 문제는 관심을 모았다.
현대 건설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처리 방식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은 현대의 자구안이 만족스럽다고 밝혔고, 이에 따라 채권단도 자구안을 받아들이고 추가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일부 시장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하였다. "정부가 재벌의 상호지급보증 등을 묵인한 것을 의미하는 이번 현대 사태의 마무리는 이후에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정운찬(서울대 교수) 같은 이는 현대건설이나 대우자동차와 같은 기업들은 퇴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발언하였다. 또한 논쟁의 와중에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재벌개혁에 역행하는 진념 재경부장관과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발언'이라는 논평을 내고 현대 측의 자구안이 재벌개혁을 후퇴시키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마치 현재의 '재벌개혁론'이 정부와 모종의 쟁점(?)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8월의 이익치 현태투신 회장의 사퇴와 함께 숨을 돌리는 듯했던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는 10월을 거치면서 다시 표면화되었다. 10월 30일 1차부도 이후는 현대 측과 정부, 채권단이 밀고 밀리면서 자구안 마련을 쟁점으로 진통을 겪어왔다. 자구안 마련에서 쟁점이 된 부분은 현대상선 등의 계열사의 지원과, 현대자동차와 같은 가족사의 지원이다. 진념 장관은 애초 자구안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하던 입장에서 11월 초에 계열사 지원도 용납할 수 있다고 발언하여 현대상선과 현대자동차의 지원이 가능한 길을 열어주게 된다. 결국 11월 16일, 현대 자동차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현대건설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자구안 마련과 관련한 진통은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급진적인 시장주의자들의 비판은 바로 시작되었다. 재벌 계열사 상호지원 금지와 같이 이제까지의 재벌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견지한 원칙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오른 쪽에서의 비판 : 시장주의자들의 경우

시장주의자들의 비판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현대건설의 자구안 마련 과정에서 이루어진 계열사 지원이, 현대 그룹 계열사들은 물론이고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상실하게 할 것이다."(실제로 현대건설 자구안 발표 후 현대자동차의 주가는 갑자기 하락하였고 이는 증시 전반의 동반하락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 형성된 합의에 따르면 현재의 경기 침체, 혹은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조조정의 강화'이다. 재벌에게는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의 '재벌개혁'이 요구되는 데, 이 원칙으로 제시되는 순환출자제한, 상호지급보증 금지 등을 기업이 위반하고 정부가 방관-조장하는 것은 쟁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장주의자들의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예정된 결론으로 하고 모든 입장을 제출한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오히려 현재의 경제위기가 지난 1단계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증시 과열을 통해서 경기를 부양하고 금융 시장을 팽창시키는 정책은 실물경제의 이윤율을 회복시키기는 커녕, 기업의 부실을 누적시켰다. 그리고 이 부실은 다시 금융기관들의 부실로, 이는 다시 신용경색과 대량의 기업퇴출 사태로 연결되고 다시 신용경색이 강화되는 가운데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1단계 구조조정이 실패한 이유는 미완의 재벌개혁으로 끝난 '빅딜'의 불충분성 때문이 아니라, 금융화를 통해서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하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실패를 오히려 '빅딜'이 진정한 재벌개혁에 미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금융구조조정이 더욱 강도높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빅딜 방식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에 미달한 것이 라 하더라도, '재벌개혁' 추진이 경기를 호전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또한 금융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과 신용경색 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금융화를 더욱 추동하는 금융구조조정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오히려 위기를 구조적으로 강화할 뿐이다.


'시장의 신뢰' = '재벌개혁'과 '금융화'

결국 시장주의자들의 근거는 '시장의 신뢰'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그 시장에서 투자할 여력이 남아있는 주체는 오직 해외 투기자본이다. 그렇다면, 이들 평가에 경제 운용을 종속시키자는 노골적인 주장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대우자동차의 부도 처리 과정에서 해외 금융기관과 언론들의 긍정적인 평가는, 대우자동차 처리가 어떠한 논리에 따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 경총 세미나에서 "외국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시각이 아니라 선진국의 표준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이 '시장의 신뢰' 논리는 정부관료들의 것이기도 하다.

이는 OECD의 「기업지배구조 기본원칙」(OECD Principles of Corporate Governance)에도 맞고, 정부 스스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11. 8)의 경우는 신흥시장의 주식시장 침체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해외 투자자들이 이들 시장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까지 지적할 정도이다. 따라서 속도 문제는 있을지라도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재벌개혁의 방향은 계속 유지될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뉴욕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등 언론기관은 대우자동차 부도처리를 통해, 구조조정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미국 금융기관인 J.P 모건은 대우차 부도조치가, 현대건설에 대해서도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 의지를 담은 경고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했다고 강조했다. IMF 또한 대우와 같이 신용이 떨어지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밝혔고, 정확히 그대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재벌개혁의 과정은 경제 전반의 '금융화'와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주5) 재벌 소유구조의 개선은 총수 일가의 재벌 지배를 차단하고 주주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재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에 있어서 그룹집중경영제도 폐지, 소액주주권 강화 등이 제기되는 것은, 기업의 의사결정에 발언할 수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이는 기관투자자와 해외 금융자본이 기업에 투자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이것들은 재벌이 족벌 경영진의 논리가 아니라 '(주식) 시장의 논리'라는 또 다른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금융 시장의 팽창, 산업자본의 금융화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한편 현재 외국인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자. 증시의 경우 1/3, 은행 여·수신의 경우 42∼45%에 달하고 있다. 상장 기업들의 경우에 외환, 국민, 하나은행, S오일, 한국유리 등은 외국인 1인이 최대 주주이며, 삼성전자, 현대전자, 현대 자동차 등은 외국인 지분이 내국인 지분을 초과한다. 그러나 이들은 '지분에 걸맞는' 운영의 발언력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기업들에서, 지분을 가지는 외국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주주의 이해를 보장하는 기업운영이고 이를 위한 기업지배구조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이렇게 외국자본의 이해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주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정부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안

이러한 비판이 가능한 이유는 정부가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 정책은 지난 10월27일 발표된 2단계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에서 드러난바 있다. 이 안에 따르면, 재벌의 저항에 따라 애초의 안보다 상당히 후퇴하기는 했으나 집중투표제가 가능해졌고 소수주주권의 행사요건이 완화되었다. 그 밖에 사외이사의 독립성과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소액주주들의 집단 소송제가 미루어지고, 집단소송제의 의무화가 아니라 도입요건 완화로 결정되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재벌개혁론자들이 요구하던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논평을 발표하고 집단소송제의 의무화와 집중투표제의 조속한 실시를 요구하였다.

소수주주권의 제도적 보장으로, 기관투자자들이나 외국계 금융자본들이 이사회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에 더 수월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집중투표제와 사외 이사제의 도입은 이미 올해 3월부터 추진되어온 상호지급보증 금지 등과 함께 족벌적 운영을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기관투자자, 해외 금융자본들이 적은 지분으로도 효과적으로 기업운영에 개입할 수 있도록 열어준다.
비록 현대건설 사태 속에서 정부가 재벌개혁안의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를 포기한 것으로는 볼 수는 없다. 정부는 현대건설을 퇴출시키면서 시장에 주는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배경에는 자신이 추진하는 구조조정 계획조차 책임질 수 없는 정권의 무능함이 존재한다) 11.3 기업 퇴출 이후에 경기후퇴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는 속에서 연이어 11월 5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11월 6일 진념 장관의 '계열사 지원 가능' 발언이 나오게 되는 과정도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 집단소송제〓1명의 주주라도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했을 경우 다른 주주들도 별도의 소송 없이 똑같은 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
# 집중투표제〓예컨대 대주주가 70%, 군소주주가 분산되어 30%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사 10명을 선임하는 경우 지금은 대주주가 10명 모두를 선임할 수 있다. 그러나 집중투표제를 실시하게되면 군소주주들이 집중투표할 경우 3명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이사로 선출할 수 있게된다.



사회운동 내의 '진보적(?)' 재벌 개혁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의 정책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도, 위에서 언급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와 같이 재벌 개혁론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운동 내부의 재벌개혁론이 신자유주의적 재벌 구조조정론과 거의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배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 총수일가의 권력을 제한하고 상호지급보증과 같은 '불공정 거래' 관행을 근절하고 주주 이해를 보장한다는 방향이 일치하고 있다. 사회운동 내의 재벌개혁론은 소액주주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집단 소송제 등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등 강조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부차적일 뿐이다.

이러한 재벌개혁론은 IMF 구제금융 이후, 위기논쟁에서부터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제기된바 있다. IMF 구제금융 위기가 재벌체제의 부패성 때문이라는 주장은 경제위기의 책임주체를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 상당한 대중적 공감을 얻었다.(*주6) 그들은 이 논거에 따라, 재벌 개혁이 향후 경제위기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재벌의 '독단적 기업지배구조와 선단식 경영체제, 과다한 차입경영'이 '경제독재'체제로서 모순을 증폭시켜왔다는 진단이다. 현재의 위기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유지되는 데, 재벌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재벌개혁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재벌개혁'이 가져올 효과는 위에서 언급한 정부의 재벌 구조조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오히려 시장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 '재벌개혁'을 구성하는 항목들은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채무보증 제한, 소액주주의 권익보호와 경영참가, 노동자의 경영참가, 전문경영인 체제, 사외이사제도 등이었다. 이는 노동자 경영참가 정도가 흐지부지되고, 소액주주 집단소송제 실시 요구 등이 보완된 채로 '주주권력 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안으로 구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를 정부가 제시하는 기업 구조개혁 5대 원칙(경영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금지, 재무구조 개선, 주력·핵심 부문 역량 집중, 지배주주·경영진 책임강화)와 비교한다면 문제가 무엇인지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부의 이 원칙은 재벌의 저항에 의해서 계속 제동이 걸리고 있지만,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올해 8월부터는 4대 그룹 조사중), 재벌개혁5대 원칙 천명 (1998년1월), 상호지급보증 해소(2000년 3월 시한)와 2단계 기업지배구조 개선안까지 연결되는 일관된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재벌개혁론자들의 금융개혁론이다.(*주6) 이들의 금융개혁론은 관치금융의 철폐와 금융 기관의 효율성, 수익성의 강화 등으로 연결된다. 이 역시, 정부의 금융 구조조정의 미흡함에 대한 시장주의자들의 비판과 동일한 논리를 가진다. 관치금융 철폐란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다. 이러한 금융개혁론은 정부의 것과 구사하는 어법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다시 금융개혁론과 재벌개혁론은 '금융화'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뚜렷하게 수렴된다. 재벌의 족벌적 지배체제를 해체하여 주식시장의 지배 체제로 바꾸고, 주식시장을 보족할 수 있는 금융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금융 구조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정책에 대한 오른 쪽에서의 비판, 즉 시장주의적 비판과 동일한 결론이다.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결론'이 필요하다

시장주의적 재벌개혁론과 사회운동 내부의 재벌개혁론은 위기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서는 당장의 차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같은 결론으로 수렴되고 있다. 전자는 위기의 원인이 구조조정이 미흡하기 때문이라는 순환논리에 빠져있는 반면, 후자는 위기의 원인은 재벌체제의 모순과 '관치금융'의 폐해에 있다고 말하는 정도의 차이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강조점의 상대적 차이일 뿐이다. 구조조정의 결론이 상정하는 모델과, 재벌체제와 '관치금융'의 폐해를 비판하기 위해 적용되는 이상형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 재벌개혁론이 정부와 형성하려는 쟁점은 허구적일 뿐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더 철저하게 수행하라는 비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재벌개혁론이 '진보적'인 것으로 주장되고 민중운동 진영에 지속적으로 유포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민중운동이 신자유주의 개혁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진보진영은 이러한 개혁담론과 명확히 단절하지 못하면서 투쟁의 후퇴를 가져왔다. 게다가 정부의 재벌개혁류의 논리가 마치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양보인 것처럼 이해되고 투쟁의 중심을 흐트리는 일도 있었으며, 오히려 이를 지지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하위파트너로 포섭될 위험을 보여주었다.
노동자 민중은 주주 이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각종 대안에서 등장하는 '주주'가 될 수는 없다. 금융시장의 주체로서 '주주'들은 초국적 금융자본을 의미할 뿐이다. 더구나 현재의 위기는 '금융화'를 추동하고 금융자본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속화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재벌개혁론의 대안은 민중진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위기를 발생시키는 구조의 모순을 강화하고 기껏해야 위기를 지연시킬 뿐이다. (혹은 최근 이루어진 11.3 퇴출과 같이 대규모 위기를 분산하기 위해 위기의 일부분을 앞당기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파탄난 신자유주의적 대안은 '대안'이라 부르기 민망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민망한 일은 파탄난 신자유주의적 대안을 가공한 무엇을 노동자 민중의 대안으로 오해하는 일이다. 사회운동 내의 일부 재벌개혁론들은 이러한 우려를 점점 강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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