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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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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윤리는 사라지고, 왜곡과 폭력만 남았다

이승철 | 회원, 전국언론연맹 편집국
"운동가는 본질을, 기자는 현상을 중시한다"

언론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오래된 분석 중 하나다. 사태의 근본적 모순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투쟁의 방향을 예각화해 나가는 운동가의 모습과 매일 갱신되는 지면을 위해 현실적으로 투영되는 각각의 상들을 포착해야 하는 기자 - 이 양자 사이에서 좌익적 활동을 펼쳐내기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표현의 압축이기도 하다.
어느 곳 하나 운동을 풀어내기가 쉬운 곳이 있을까만, 특히 언론노련은 더욱 좋지 않은 조건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벼룩 세 가마니보다 기자 셋 데리고 가기가 더 힘들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활동가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딜 가나 좋지 않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른바 '언론운동가'들의 어려움은 사실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자기비판과 케케묵은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름 아닌 11월 '대우사태'를 중심으로 언론에 대한 비난이 다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서'와 '대우차 사태의 근본적 원인과 해법'이라는 이름의 '현상'과 '본질' 사이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들은 좀 더 자극적인 '현상'과 '노동자 책임전가'에 손을 들어줬다. 또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언론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노조를 비판하는데 혈안이 되어왔다는 사실도 많이 취합됐다. 결국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의 '본질'적 문제제기는 다시 지면 뒤로 숨어버렸다.


언론보도, 원색적인 노조공격으로 점철되다

11월 초부터 불붙기 시작한 '대우논쟁'은 연일 언론의 지면과 화면을 뜨겁게 달궜다.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서'를 중심으로 한 원색적인 보도양태는 핵심대립지점을 '노조 對 채권단'으로 설정하고 있었지만, 실상 더 큰 갈등은 다른 곳에 있었다. 노조를 상대로 한 언론의 융단폭격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중앙일간지와 공중파 방송은 11월 6일부터 8일까지 대우차 부도사태를 보도하며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서 없이는 부도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나섰다.
한국일보는 11월 8일자 사설 <구조조정과 실업자 100만명>을 통해 연말 대대적 실업사태를 우려하했다. 사설은 '구조조정의 성공적 마무리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대승적 자세가 필요'하다며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신문 1면에 실린 '구조조정 해설기사'와 맞물려 노사갈등이 경제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11월 8일자 사설 <대우차의 어리석은 선택>에서 이번 사태가 '채권은행단이 최종부도를 결정한 것은 노조가 회사측의 구조조정안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 뒤 '선량한 국민들이 입을 여타의 손실'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사설은 또 '이번 사태로 노조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노조를 질책하는 논조를 유지했다.
국민일보도 11월 6일자 경제면 기사 <발목잡힌 대우차 自救>를 통해 '갈길 바쁜 대우차가 자구계획안에 대한 노조의 동의에 발목이 잡혀 부도위기에 직면했다'고 적시했다.
한겨레도 11월 8일자 신문사설을 통해 '노조가 억울하게 고통을 떠안고 있는 측면을 인정하더라도,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한 사태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면서 '(노조가)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대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노조의 무조건 승복을 촉구했다.

중앙일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일보는 <대우 노조가 남긴 최악의 선례> 제하의 11월 9일자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은 '구조조정 동의를 거부함으로써 회사를 최악으로 몰고간 최종 책임은 노조측에 있음'을 자신있게 규정했다.
대우차노조에 대한 공격은 11월 8일자 대한매일 칼럼에서 극치를 이룬다. 대한매일 김상웅 주필은 칼럼에서 '회사가 망해도 구조조정을 거부하는 극렬노조의 모럴 헤저드(부도덕)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천민성을 대변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조선일보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동아건설 부도와 현대건설 부도위기가 증폭되던 지난 11월 2일 [경제 이대론 안된다]시리즈 중 네 번째인 <노조 벽에 막힌 구조조정> 제하의 기사에서 영국에서 발행되는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를 인용한 바 있다. '포드가 대우차 인수를 포기한 중요한 이유는 노조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라고 적시하면서 '기아보다 대우의 해외매각이 어려운 이유는 노조의 인력구조조정 반대가 거세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도했던 것이다.

조선은 이어 [경제 이대론 안된다] 시리즈 아홉 번째 기사인 지난 11월 9일자 <괴로운 외국투자자>기사에서도 '지난 6월 말 외국기업 최초로 노사공동선언을 채택한 한국바스프 노조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지금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방송보도 역시 노동조합을 밀어붙이는데 혈안이었다.
KBS는 7일자 보도 <이대론 안된다-도덕적 해이>를 통해 노조의 생존권적 저항을 재벌총수들의 도덕적 해이와 동일시했으며 SBS도 같은날 <매각협상도 차질>을 통해 노조를 질타했다.


결국 드러날 자의적 인용과 사실왜곡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같은 보도는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11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대해 한국바스프 노조는 "노사 공동선언을 채택한 일도 없고, 이로 인해 민주노총으로부터 질책을 받거나 차별대우를 받은 적도 없다"고 알려왔다. 이에 따라 한국바스프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국민주화학섬유연맹(공동위원장 오길성, 황영호)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즉각 정정보도 요청을 냈고, 결국 조선 측이 이를 받아들여 사태가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이 일은 보수언론 일반이 노동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해당 노조에 전화 한통화면 사실확인을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사안마저도 '오보'를 내고 마는, '취재의 ABC'조차도 지켜지지 않은 보도였다. 11월 2일자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언론노련에서 발행하는 매체비평전문지 '미디어 오늘'에는, 조선일보가 인용한 기사를 직접 작성했던 파이낸셜 타임스의 존 버튼(John Burton) 기자를 통해 확인한 결과 조선의 기사인용은 철저한 왜곡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존 버튼 기자는 인터뷰에서 "포드가 대우차 노조 문제를 제기한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면서 "때문에 기사도 그렇게 작성하지 않았다"고 알려왔다. "이번 기사가 문제가 된 뒤 조선일보 측에서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전반적인 논조를 집약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존 버튼 씨는 "그것은 조선일보의 해석일 뿐이며 잘못한 번역(misinterpretation)"이라면서 "조선일보가 표현한 것은 우리의 논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존 버튼 기자는 또 조선일보의 이같은 자의적 인용과 보도에 대해 매우 불쾌한 기색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언론의 사실왜곡은 이뿐만이 아니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구조조정 동의서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는 문제에 대해 노조가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최종학 대우차노조 대변인은 이에 대해 "그러한 제안에 대해 전향적 검토 의사를 밝힌 바가 없다"며 "나 스스로도 해고자이지만, 구조조정 동의서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는 것은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일축했다.
최 대변인은 이어 "언론의 사실왜곡과 편파보도, 명예훼손 등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면서 "조만간 언론중재위원회 등을 비롯한 각종 기구에 해당 언론사를 제소하는 것을 비롯한 각종 법적 대응을 모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11. 12 노동자대회 이후 계속되는 토끼몰이식 보도

결국 이번 대우사태에 대한 보도일반은 노골적인 적대양상을 띠는 것은 물론, 노조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거나 총자본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지도 못했다. 해외매각과 같이 정부와 채권단의 잘못된 정책을 심층분석하며 사태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보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해외매각의 시기적 문제나 조급함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오히려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의 충돌을 빌미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압박해 가는 이른바 '토끼몰이식 보도'를 일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11월 7일 협상 직후 대우차 노조는 '노·사·정·채권단의 4자 기구'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단신처리할 뿐 제안의 진의와 기대되는 효과 등을 심층보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지난 11월 10일 대우사태 관련 31개 사회단체가 '대우차 부실경영 책임자 처벌·경영 정상화 촉구'기자회견을 열었지만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한 신문과 방송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 사회단체들은 "대우 부실의 책임은 정부의 재벌위주 경제정책과 졸속 해외매각 추진에 있으며, 대우재벌 총수인 김우중 씨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민주노동당과 대우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인천시민대책위원회도 지난 11월 18일 인천 부평역에서 '대우자동차 졸속부도처리 규탄 및 생존권 보장 촉구대회'를 1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개최했으나 지역방송인 iTV를 제외한 다른 신문·방송사에서 관련 보도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11월 12일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를 기점으로 이들의 보도양태는 더욱 심각성을 띠기 시작했다. 각 지면과 화면은 폭력경찰에 의해 부상당한 2백여명의 노동자와 요구의 본질은 외면한 채 <민노총 휴일 도심 격렬시위>(세계일보 14일 자) 등의 제목과 함께 경찰과의 충돌장면만이 부각됐다. 이어 발표된 정부의 '공안대책협의회' 부활과 함께 각종 보도는 <연말 불법시위 강경대응 선언>(대한매일 16일 자) <법대로…>(KBS 15일 9시 뉴스) 등으로 채워졌다. 특히 KBS는 "집단적 행동은 국민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해외 투자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우려"라는 멘트를 달면서 노동계를 압박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정부의 발표 직후인 17일 '공안대책협의회 부활 음모 철회하라'는 제목의 성명과 보도자료를 냈지만 이를 보도한 매체는 하나도 없었다. 민주노총은 성명에서 '공안대책협의회 부활 음모는 역사를 낡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공안세력이 불순한 음모이자, 노정대결을 극한으로 몰아갈 위험천만한 불장난'이라고 규정한 뒤 '검찰은 공안대책협의회 부활 음모를 철회하고 정당한 생존권 투쟁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고 주장했었다.


최소한 양자 입장은 모두 담아내야

의견의 대립과 충돌이 있을 경우 양자의 입장에 모두 귀기울이고 그 목소리를 동일 비중으로 보도하는 것은 공익언론의 철칙이다. 더구나 한쪽의 입장이 일방적으로 매도되거나 왜곡되고 있을 때 이를 바로잡고 약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보도윤리에 해당한다.
언론은 또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구체적인 사안에 접근하는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언론은 도발적인 지배세력을 폭로하고 거리의 열기와 이 양자간의 불협화음을 전달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다시 생각하는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그러나 끈기 있게 - 이것이 언론의 존재이유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 원칙들을 지키기는커녕, 앞다투어 노동자들을 매도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이른바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한 일간지 역시 '양비론'으로 일관하거나 침묵을 미덕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을 진행하고 있는 최보은 씨는 김일섭 대우차노조 위원장과의 좌담에서 "언론개혁 없이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사회 내의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수렴되는 공간으로서의 언론은 사라지고, 오직 자본의 폭력과 권력의 횡포만이 살아 숨쉬는 우리의 지면과 화면을 탓하는 말이다.
이른바 '언론플레이'가 운동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여론'이란 이름의 실체 없는 유령이 사회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 오늘날 이를 등한시하는 것도 답일 수는 없다.

언론개혁을 위한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별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대로 된 진보적 매체 하나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현실과 [디쁠로마띠끄], [가디언], [먼쓸리 리뷰]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체제내화 되지 않는 건강한 언론노동운동과 비정치적 시민운동을 넘어서는 좌익적 사회운동의 결합이 반독점 민주언론과 반제 자주언론의 유력한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제어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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