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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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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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동소설?

장귀연 | 회원, 서울대사회학과 박사과정
<b>바람을 지고 선 사내들</b>

술집의 조명은 흐릿했다. 여섯명의 사내들은 마치 자신의 얼굴이 비치기라도 하는 듯 눈을 내리깔고 술잔 속을 깊숙이 들여다 볼 뿐, 말이 없었다. 술집 문이 벌컥 열렸다. 시퍼렇게 날을 곤두세운 칼바람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문을 들어선 일곱번째 사내는 바람을 등에 지고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사내들이 모여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님들, 소식 들었어요." 그제서야 사내들은 고개를 들었다.

"규병이 왔나." 영해는 웃으려고 했으나 미소는 입꼬리까지도 올라가지 못한 채 일그러져 버렸다.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자식들이 언제 우릴 사람 취급했나요? 완전 속은 거지. 제가 그랬잖습니까, 그때 밀어붙여야 했다고." 규병은 쾅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침울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의 얼굴은 생기있어 보였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있을 때 나타나는 미미한 안도감이었다.

영해는 그런 규병이 오히려 안스러웠다. 규병은 이미 몇달 전에 해고당한 몸이었다. 회사에서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규병을 내쫓았지만, 규병이 노조 설립에 앞장서서 나대는 바람에 찍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때 규병과 술을 마시면서 영해는, 걱정 마라, 기필코 노조를 쟁취할 것이다, 너도 반드시 복직된다, 그렇게 목소리 높였다. 다혈질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자리는 밤새도록 훨훨 타올랐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얼마나 사치스러운 상황이었던가를 영해는 지금 느끼고 있었다.

B업종의 노조 설립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이었고, 호응도 매우 컸다. 처음에는 완강하던 B업종 경영자협회와 회사들은 기세에 밀려, 연말쯤에 자신들도 교섭준비를 할 테니 그때쯤 노조 설립을 하라고 달랬다. 그러면서 회사들은 각각 개별 노동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 작전에 들어갔다. 물론,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을 믿었다. "노조는 꼭 있어야지." "내 소원이 뭐였는지 아냐, 우리도 노조 한번 가지고 큰 소리 쳐보는 거였어." "저는 짬밥도 낮고 그래서 나서진 못하지만, 당연히 가입하죠. 우리 위해서 형이 나서는 건데."

동료들, 선배들, 후배들은 굳게 손을 쥐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어제 설립 총회에서 노조원 가입을 한 것은 28명이었던 것이다. 겨우 28명.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오늘이었다, 주도자들에게 해고통지서가 날아온 것은.

"규병이 네 말이 맞아. 회사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자신하고 있겠지. 하지만 앞으로가 진짜 중요한 거야.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큰 코 다칠 걸." 우진이 달래듯이 말했다.
영해는 울컥 성질을 내고 말았다. "아직 노조 설립신고도 못했잖아요. 우리가 해고되면 이제 누가 노조를 만듭니까?" "가입률이 낮은 건 협박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지, 노조에 대한 뜻은 같다는 거 알지 않냐? 회사에서는 우리를 본보기로 하면 다들 꼼짝 못하고 더 움츠러들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동료들을 믿는다." 우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혁준은 우진을 쳐다보았다.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장 먼저 노조 얘기를 꺼낸 것이 바로 혁준 자신이었다. 누구나 생각은 하고 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던 노동조합. 물밑에서 얘기가 되다가 노조준비위를 꾸릴 때 선뜻 준비위장을 맡아준 것이 바로 우진이었다. 이미 강경파로 찍힌 혁준이 준비위원장을 맡는 것은 좀 꺼려졌고, 우진은 나이도 많고 심성이 무던하여 후배들 사이에서나 회사에서나 신망이 두터웠던 것이다. 그런데 총회 전, 준비위원장이었던 우진은 노조위원장을 고사했다. 사실, 힘들었으리라.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님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후배들의 간청은 잔인했고, 우진은 결국 초대 노조위원장 맡는 것을 수락했다. 쑥스러운 듯한, 푸근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외유내강. 우진을 보면 그것이 느껴졌다.

혁준은 수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정은 묵묵히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곰같은 덩치가, 초췌해 보였다.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수정이 다니는 D사는 특히 치사한 방법을 썼다. 가족들을 협박했던 것이다.

"당신 아들이 빨갱이 농간에 휘말렸수다. 이제 벌어먹기도 힘들 테니 알아서 하쇼." 수정의 아버지는 그 협박을 듣고 혈압으로 쓰러졌다. 아내도 몸져누웠다. 수정은 차라리 집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다른 동료들이 소매를 붙잡으며 눈물을 뿌리는 가족들을 못이겨 한발짝씩 뒤로 물러설 때, 수정은 자리를 지켰다. 그것을 비정하다고 해야 하나. 저 넓은 가슴 속으로 더 많은 눈물을 담았을 것이다.
혁준은 다시 원태를 바라보았다. 단 한번도 지각, 결석, 조퇴를 하지 않은 원태였다. 잔업도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정말 죽어라고 일했다. 악바리가 그의 별명이었다. 작지만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몸집과 꽉 다문 입술도 별명에 한몫 했다.

"나는 내가 일한만큼 벌어먹고 살 거야." 언젠가 그는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해고당했고 더이상 일해서 벌어먹고 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태의 입술은 언제나처럼 야무지게 닫혀 있었다.
'그래, 저들과 함께라면, 간다, 끝까지 간다.' 혁준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침울했던 술자리는 곧 활기를 띠었다. 속았던 것은 지난 일이고 해고당한 것은 당한 것이었다. 우진의 말대로 이제 시작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자, 충격은 오늘로 끝내자구. 내일 노조 사무실에서 보자."
그러나 사람들과 헤어진 우진은 걸음을 옮겨놓다 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아들의 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하늘에 떠올랐다. 집에 들어가면 오늘도 아이들은 멋모르고 팔뚝에 매달릴 테고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밀어젖히며 눈치를 살필 것이다. 해고.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각오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쳐오고 나서야,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설마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청춘을 바친 회사가 그렇게 나오려고, 내가 회사를 위해 온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는 것을 회사에서도 아는데, 직급이나 기술이나 인간관계에서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설마 해고까지야 할까.

"우진이 자네가 믿음직한 사람인 것 아네. 우리 회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구. 제발 나서지만 말라구." 회사 관리자는 협박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 또한 감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순진했었다.
우진은 갑자기 길잃은 고아처럼 막막해졌다. 어떻게 사나. B업종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 기술만은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일은 전혀 할 줄 몰랐다. 당연히 이제 어떤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정 복직이 안되면 장사라도 알아봐야 하나. 그러나 한쪽 어깨에 가족들이 얹혀 있다면 다른 쪽 어깨에는 그를 믿고 따르는 동료들이 달려 있었다.
우진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맘놓고 뱉지 못하는 한숨이었다. 형형색색 네온이 반사되는 서울의 밤하늘은 우진의 마음만큼 어지러웠다.


<b>바람은 어디로 부는가</b>

▶ L사의 태정은 혼자서 혁수가 있는 병원을 찾았다. 혁수의 병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가족도 무작정 계속 병상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혁수는 홀로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병실의 흰 빛이 처연했다.
'나 왔다, 혁수야.' 입 밖에 내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혁수는 듣지도 못할 테니까. 혁수는 열달 전 작업현장에서 쓰러진 후 지금까지 의식불명 상태였다. 일하다가 그대로 쓰러진 것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혁수가 심장 지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도 금시초문이거니와, 설사 그렇더라도 그 순간 그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쓰러질 리 없었다. 산재 인정이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르지만, 백화점에서 도둑으로 오해받았다가 혈압으로 쓰러진 아주머니도 보상을 받아내는 세상이 아니던가. 회사에서는 쥐꼬리만한 돈을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주고서는 입을 씻었다. 젊디나 젊은 나이에 혁수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버렸고, 아내와 어린 자식들만이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어디 혁수 뿐인가. 명백한 산재나 직업병의 경우에도 치료비조차 변변히 받아내기 어려웠다. 회사는 그런 사람들을 이제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었다는 듯이 냉정하게 쫓아냈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가전제품, 그런 것이었다. 쓸만큼 쓰고 고장이 나면 폐기처분하는.

'노조가 있었다면…' 태정도 노조 가입을 했다. 물론 같은 회사의 영해에 비하면 태정은 아주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온건파라고나 할까, 어차피 잘 협상하기 위한 것인데 쓸데없이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정 자신은 가입을 했지만, 영해만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냥 잘 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영해를 해고해 버렸다.

태정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꾹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영해의 해고 소식은 충격을 넘어서서 치욕이었다. '영해만 해고하다니, 그러면 나나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죽여줍쇼 할 줄 알았나 보지. 내가 물로 보이냐.' 물로 보이냐라는 유행어를 속으로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태정은 간신히 마음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그쪽은 낫지요. 노조의 노자라도 꺼낼 수 있고. 회사에서도 당신들한테는 해고할 때도 눈치를 보잖아요. 우리는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냥 내일부터 일거리 없으니 나오지 마라, 이 한 마디로 끝난다구요. 일하다 다치면, 당신들은 그래도 치료비라도 받아내잖아요. 우린 전혀 없어요. 기술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사람인데, 그런 취급 받으면 안 서럽겠어요? 우리 처지에서 나서기는커녕 입도 뻥끗 못하지만, 노조를 정말 만들고 싶은 건 우리라구요. 노조가 제대로 되면 춤이라도 추겠어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단순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 얘기를 듣고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 울려오는 것을 느끼며 태정은 눈을 감았다.

삐리리리, 핸드폰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흠칫 눈을 뜬 태정은 반사적으로 혁수 쪽을 쳐다보았다. 혁수는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태정은 낮게 한숨을 삼키며 핸드폰을 받았다. "헹님예. 영해 헹님 소식 들었는데예, 지금 난리가 아닙니더. 다 노조 가입하겠다고 모여 있다 안캅니꺼. 헹님은 어데 게시는데예? 헹님이 와서 어떻게 결단을 내려 주셔야지예." 후배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태정은 눈을 부릅떴다. "좀만 기다려라, 내 금방 갈 테니."

태정은 병실 문을 뛰쳐나가다 말고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혁수는 태정이 들어올 때와 꼭같은 모습,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혁수야. 우리가 널 위해 추렴도 하고 바자회도 하고 그랬지. 그것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또 시작을 한다. 그러면서 널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자주 찾아올게." 이번에는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그리고나서, 태정은 급한 마음에 병원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 "이거 왜 이러나. 요즘같이 어수선한 때에 자네가 있어줘야지." H사의 관리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 사이로 볼펜을 돌렸다. "어수선한 김에 저도 좀 쉬어야겠다구요." 성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빙글거리는 상대방의 얼굴이 갑자기 역겨워졌다. 너는 우리 편이라는 뜻이 관리자의 웃음에 담겨 있었다.
선심쓰듯 사인해 준 휴가원을 내고 성호는 작업장 문을 나섰다. 확실히 작업장 곳곳에 모여 수근대는 모습들이 평상시와 달랐다. 분개, 긴장감, 그리고 묘한 들뜸. 성호에게 아무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것도 평상시와 다른 것이었다.

"이럴 때 휴가 가고, 누군 팔자 좋군." 소리죽인 빈정거림이 뒤편에서 들려왔다. '어떤 새끼야!' 호통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뒤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성호는 대신 걸음을 재게 놀려 공장을 빠져나왔다. 을씨년스러운 잿빛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제길." 성호는 담 밑에 침을 뱉었다. 혁준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이 불끈 뜨거워졌다. 보통 때 그 감정은 밉살스러움이었는데, 오늘은 그 밑에 끈적하고 뭉클한 앙금이 느껴졌다. 성호는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그러나 가슴 속의 앙금은 내뱉어지지 않은 채 묵직히 가라앉았다.

노조에 앞장선 혁준을 누구보다도 얄밉게 본 것이 성호였다. 잘난 척하고 떠드는 꼴이 영 맞갖잖았다. 회사는 정말 어려운 상태였다. B업종에서 나이는 먹었지만 H사에 입사한 지는 얼마 안된 혁준과는 달리, H사에서 뼈가 굵은 성호는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노조라니, 내가 사장이래도 그건 못 들어주겠다, 이게 성호의 생각이었다. 철모르는 후배들이 혁준을 따르는 모양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후배들을 윽박질렀다. 노조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그런데도 노조 설립이 본격화되자, 회사에서는 성호를 비롯한 몇몇 조장들을 불렀다.

"회사가 어렵긴 하지만, 사실 노조도 인정할 수 있다구. 노사가 같이 모여서 서로 이해를 구하고 회사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고 우리도 좋다 이거야. 근데 지금 얘기되는 노조는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구. 특히 혁준이 걔, 제일 문제가 커. 돈 더 받는 데에만 혈안이 돼서 그게 권리니 뭐니 하는 모양인데, 회사가 살아야 임금도 주는 거 아냐? 순수한 취지면 몰라도 불순세력이 개입된 노조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나? 그래서 말인데, 노조는 안되고, 그래도 노사가 얘기를 해보자 하는 입장에서 일단 노사협의회 같은 걸 만들어 볼까 하는 게 사장님 생각이신데, 조장들이 좀 나서줘야지."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사협의회만 해도 회사에서 양보한 것인데, 굳이 노조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노사협의회라는 말에 당장 코웃음을 쳤고 노조 설립이 계속 추진되었다. 성호는 한편으로는 답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했고 혼자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별소리 없이 일만 열심히 하던 동료들이 갑자기 변한 것 같았다. 쌓여왔던 불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일까. 성호도 물론 불만이 없지 않았다. 임금이나 현장시설이나 처우나.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열심히 일을 해서 회사가 잘 되면 그만큼 되돌아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성호는 노조보다는 그게 더 현실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혁준과 다른 동료들의 해고 소식을 들었을 때, 성호는 갑자기 뒷덜미에 칼이 콱 박히는 느낌이었다.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성호는 그 느낌이 배신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원들의 노조 가입을 막았던 것은 다른 동료들을 해고시키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회사에나 동료들에게나 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회사는 노조 가입자가 적자, 보란듯이 가입자들을 해고해 버렸던 것이다. 혁준이 아무리 얄미워도 잘리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 역시 해고되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동료노동자임을 모르지 않았다. 회사의 말을 듣고 노조 가입을 막은 것이, 동료들을 해고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불순세력? 그럼 회사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는 건 순수한가? 츳.' 성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술렁이는 현장에 있기가 괴로워서 휴가원을 낸 것이지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호는 발길닿는 대로 걷다가 겨울 바람이 차가운 것을 느끼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만져졌다. 찌라시였다. <B업종 노조 설립을 추진하며> 모금을 해서 변두리 3평짜리 월세를 얻었다는 노조사무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걸 내가 왜 버리지 않았지?' 성호는 손에 찌라시를 들고 쳐다보았다. 다른 한쪽 손은 어느새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노조 사무실입니다." 전화를 받은 목소리는 혁준이 아니었다. 성호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묘하게도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H사의 이성호라고 하는데요, 거기 가면 지금 노조 가입서 쓸 수 있습니까?"


▶ "이거 어디 창피해서 살겠냐? 우리 회사엔 노조 가입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니 말야." S사의 엽승은 동료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고작 28명이라더라. 다른 회사들도 대부분 기껏해야 한두명씩인데 그게 그거지, 창피할 게 뭐 있냐?" "그래도 한두명 있는 것 하고 한명도 없는 것하곤 다르지. 사실 우리가 노조 반대하는 건 아니잖냐? 어떻게 되나 좀 눈치 봐가면서 하려는 건데, 한두명이라도 있으면 얘기도 듣고 분위기 파악도 되지만, 어떻게 우리 회사는 나서는 사람이 한명도 없냐, 그래." 동료는 아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회사들에서는 지금 난리났다더라. 그렇게 해고시킬 줄은 몰랐다고, 다 집단가입하겠다고 그런다던데, 우리는 가만 있어야 되는 거냐?"

"그럼 네가 하지 그래? 왜 날 붙들고 이러는 거야?" 엽승이 쏘아붙였다.
"그래도 네가 제일 말마디라도 할 만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아니, 내가 너보고 뭐랬냐?" 동료는 당장 실쭉해져서 곁을 떠났다.
말마디나 할 사람. 엽승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가끔씩 와서 슬쩍 떠보는 것이었다. "넌 노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저번에 태기 형님이 노조는 시기상조라고 그럴 때 너도 수긍했다며? 진짜냐?" "네가 나이는 어려도 회사에선 영향력이 있잖아."

그럴 때마다 엽승은, 왜 하필 내가 나서야 되냔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뭘 한단 말이야. 일이 되려면 사실 태기 형님이 나서야 될 텐데.'
그러나 별로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야, 우리 사장님 노조의 노자만 들어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잠 못 주무시는 것 알지? 괜히 철모르는 짓 했다가 너희들만 피해본다. 다 너희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태기는 이렇게 후배들을 단속하곤 했다. 한번은 용기를 내서 물어보았다. "그럼 형님은 노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진 않잖아요?"

태기는 우물거렸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안된다 이거야. 다른 회사는 몰라도 우리 회사는 안돼. 안될 게 뻔한데 괜히 피만 볼 순 없잖아."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태기 형님도 생각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 다른 회사에서 노조 주동자들을 해고했고 그 반발로 현장 분위기가 급격히 살벌해졌다는 소식에 S사도 술렁거렸다. 한명도 가입자가 없는 S사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태기 형님에게 가서 의논을 해봐야 하나? 나 혼자라도 가입을 해야 하나? 내가 가입하면 다른 사람들도 정말 같이 따라줄까?' 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바람 속에서 엽승은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b>우리는 승리하리라</b>

"형, 들었죠? 전체 파업이에요!" 각 회사에서 파업 참가결의 소식이 속속 들어오면서 노조 사무실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이렇게 되면 B업종 전체노동자 파업이었다. 회사들은 집단적으로 직장폐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웃기고 있네. 대한민국에서 B업종을 완전히 없애버리라고 하지." 영해는 코웃음을 쳤다. "없애버려도 좋다구요. 노예로 사는 것보다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한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규병은 그렇게 말하면서 흥분을 억누르지 못해서 겅중겅중 뛰고 있었다.

"야, 천장 뚫어지고 바닥 꺼지겠다." 영해가 규병의 큰 키를 손으로 재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수정은 창가에 가 섰다. 멀리 보이는 도심에는 수많은 불빛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웃고 있었다.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맘 알아. 네 맘이 우리 맘 아니겠냐?" 언제 다가왔는지 위원장 우진이 곁에 서서 나직히 말했다. 복직되지 않아도 좋았다. 진정으로 가슴벅찬 것은 동료들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확인이었다. 믿는다고 그리고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말은 안해도 노조를 염원하는 마음은 다 같을 거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면서도, 불안했고 의심스러웠고 서러웠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이러는 거냐고 외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다들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판에 혼자 나서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단 28명이 가입했던 설립총회 때는 가슴이 무너졌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산산히 무너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맸었다. 그러나 동료들은 결국 믿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가슴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수증기처럼 눈물이 맺혔다. 수정은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우진은 왁자지껄한 사무실 분위기를 뒤로 하고 수정 곁에 서서 계속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동녘 하늘 아래 숨겨져 있는 붉은 태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일은 내일의 투쟁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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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노동소설들 중 많은 것이 노조 설립투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밀레니엄도 지나고 21세기도 밝아온 지금, 웬 노동소설인가? 그러나, 소설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실제 사건들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혹시 눈치를 채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바꿔 보시라. 우진→(송)진우, 영해→(마)해영, 혁준→(양)준혁, 수정→(심)정수, 원태→(최)태원, 규병→(강)병규, 태정→(박)정태, 혁수→(임)수혁, 성호→(이)호성, 태기→(김)기태, 그리고 물론 가장 엽기적인 이름이 되어버린 엽승은 (이)승엽이다.
(참, 1년 전 선수협에 앞장섰던 양준혁 선수는 지난 시즌 직전 트레이드되어 지금은 LG소속이지만, 소설적 구성상 여전히 해태 이호성과 소속이 같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해태 선수협 대표인 박충식 선수의 이름이… ^^)

그러나 어디 프로야구 선수협 뿐이랴. 구단주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꼴은 볼 수 없다는 이 땅 자본가들의 심정을 대중적으로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눈에 흙을 뿌릴 차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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