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시에 가다
<b>영화관을 찾아서</b>
후배랑 영화를 보기로 했다. 단성사, 대한극장, 서울극장, 녹색극장, 티파니극장 등이 아닌, 그 이름도 길고 꼬불꼬불한, 메가박스시네플렉스에서.
"코엑스 옆에 있어요. 삼성역에서 내리면 돼요. 매표소 앞에서 전화할게요." 예술의전당 부근 아르바이트하는 집에서 출발한다던 후배,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전화가 안 온다. 지하철 속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 "우씨, 삼성역에서 1㎞쯤 걸어야 되나봐요.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아요. 표 끊고 기다릴게요." 1㎞? 흠, 걷기엔 좀 멀잖아?
삼성역에서 내렸다. 주변약도를 확인해 보고 당연히 나는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1㎞는커녕 50m도 안돼서 코엑스 건물을 찾았다. 코엑스 건물이 크다 한들, 하늘 아래 뫼도 못 되거늘, 이제 메가박스시네플렉스 건물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메가박스시네플렉스라는 간판을 단 극장건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로 내려와요." 지하? 단성사, 대한극장, 서울극장, 녹색극장, 티파니극장만 다녀본 나의 관습이 흔들, 했다. "지하?"라고 반문하는 입에서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운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순간의 쪽팔림이란.
어쨌든 내려가는 계단이 있길래 내려갔고, 그 다음부터는 쉽게 찾았다. "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1㎞는 안 되던데?" 그렇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나의 후배는 삼성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하거리를 따라 걸어왔고, 1㎞를 헤맸던 것이다.
영화 시작까지는 2시간 20분이 남아 있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1㎞ 답사에 들어갔다. 지하 거리 1㎞, 거기엔 무엇이 있단 말인가?
<b>호텔, 터미널 그 밑에 지하도시</b>
나는 모른다, 그 길이 1㎞인지, 2㎞인지, 10㎞인지. 지금 인터넷검색을 해본 결과 지하공간 2만6천평이라고 하는데, 2만6천평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단 한번, 그것도 한두 시간 돌아본 것 가지고는, 전혀 그 공간구조를 그릴 수가 없다.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큰대륙간 호텔이라…), 공항터미널(공항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현대백화점, 코엑스몰, 코엑스인터컨티넨탈서울(뭐 하는 데냐?) 등의 순서로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인터넷검색 화면은 내 머릿속의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휘어진 길과 미로들,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지하. S야, 네가 1㎞를 걸은 건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지하 코엑스몰, 지상 코엑스.(그러니까 무역센터, 세계의 기업들이 첨단을 자처하며 모여드는 곳. 지상 코엑스에서는 e-business solution fair @ world 2001을 하고 있었다. 그래, 너 잘 나가라, 자본주의여!) 지하 아셈길, 지상 아셈타워(아셈, 발을 절룩거리며 걸었던 그날의 행진은 잊혀지고, 여기에 굳게 새겨져 있는 이름).
위성전화와 노트북을 들고 대륙을 건너는 사람들이 묵을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 호텔인지 면세점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급스런 쇼윈도들이 은은한 기품을 풍기고 있는 데다가 별로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바람에 뒤가 켕겨 얼른 나온 코엑스인터컨티넨탈서울(처음에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과 코엑스인터컨티넨탈을 구별 못하고 한 바퀴 뺑 돌아온 줄 알았다). 아, 한 가지 알게 된 건 있다. 나는 항상 공항터미널이 뭐 하는 곳이며 왜 이 동네에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비행기 티켓 끊는 데더라고.
내가 공항터미널이란 이름을 들어본 건, 대한민국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끼리끼리 결혼식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른 이름이었으면 기억에 안 남았을지 모른다. 난, 드레스 입고 칵테일 잔이라도 들 것 같은 그런 상류 사교계 인사들이, 왜 하필 '터미널'에서 결혼식을 하는지 의아했었다. 터미널, 뭔가 복잡하고 지저분한 그런 느낌 아닌가? 적어도 내가 아는 터미널들은 그랬다. 그런데 공항터미널은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배 왈, "외국인들이 왜 서울 거리가 깨끗하다고 하는지 이상했었는데, 여기 와 보니까 알겠네.") 아쉬운 건 그 공항터미널 결혼식장을 못찾았다는 거다. 한번쯤 곁눈질이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어디 숨어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여기서 결혼식 한다는 게 맞긴 맞아요?" 후배의 의심스러운 시선) 간판이나 표지판 없어도 다들 잘 찾아가나 보다.
위성전화와 노트북과 정장과 매끈한 미소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자본의 가속을 더하기 위해 대륙을 가로질러 회의하고 묵고 결혼하는 지상의 공간 밑에는, 또 하나의 도시가 있었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들어간 곳이 이 찬란한 지하도시였던 것이다.
어렸을 때 공상모험 소설에서 보았던 지하세계가 떠올랐다. 그 지하세계에는 괴물과 공룡과 원시인들이 살았다. 비슷했다. 상품의 괴물과 자본의 공룡과 그 앞에서 소비의 욕망으로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원시인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보았던 지하세계에서는 두 개의 태양이 빛났고 푸르고 붉은 원시림이 싱싱했다. 이 곳 지하도시 역시 다른 세계, 희고 푸르고 붉은 조명이 태양보다 훨씬 은은하고 세련된 빛을 뿌렸다. 원시목 대신 SF 영화 속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철골 기둥들이 우뚝우뚝 도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속을 더해 만들어내고 있는 미래도시가 이런 거라고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지하도시 거리에 '수풀길', '계곡길' 등등의 이름이 붙어있냐는 거였다. 후배는 분명히 지상을 본따서, 말하자면 수풀길 위 지상에는 나무 몇 그루라도 있는 그런 것일 거라고 주장했다. 나는 조명이나 거리 치장의 주제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우기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둘 다 근거가 희박했다.
지하도시는 그런 곳이었다. 수풀길에 수풀이 없고 계곡길에 계곡이 없는, 푸른빛 조명과 미끈하게 잘 빠진 기둥과 분수를 이룬 물과 계단(이게 계곡인가?)이 매끈한 조화를 이룬 도시. "전쟁은 걱정없네. 북한 인민군들이 여기 오면, 전쟁하고 싶겠어요?" 이건 후배 말이었다.
<b>놀기, 상품과 눈 마주치기, 상품을 매개로 의사소통하기</b>
우리가 주로 돌아다닌 곳은 코엑스몰이었다. "광고에서 본 건 다 있네요." TV도 광고도 보지 않는 나는 묵묵부답, 그런가 할 뿐. 다시 후배 왈, "여기 다니는 사람들 패션 중에서 우리가 제일 후질 거예요. 여자들 화장도 신림동하고는 다른데." 역시 패션이나 화장에 대해 일가견이 전혀 없는 나는 묵묵부답, 그런가 할 뿐.(칫, 나도 괜찮게 입고 나왔는데. 아마 녀석의 자격지심이겠지.)
후배에게 물었다.
"넌 여기 예전에 와 봤다며? 어떻게 와 봤니?"
"아르바이트 과외하는 애랑 왔어요. 걔는 심심하면 여기 와서 논대요."
"뭐? 여기서 뭘하고 놀아?"
"그냥 돌아다니는 거죠."
"그냥 돌아다닌다고?"(음, 전혀 이해가 안 되는군.)
내 관습으로는 논다는 것은, 찻잔이나 술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영화와 공연을 보러 간다든지 교외로 나가 금수강산 산천경개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든지, 좀 더 어릴 때는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놀이기구를 타러 간다든지… 이런 거였다.
물론 지하도시엔 영화관도 있었고 수족관도 있었고(입장권 1만4천5백원. "회 쳐 먹지도 못할 물고기들.") 맥도널드와 TGI와 베니건스도 있었고 거리 공연무대도 있었고 인터넷휴게실도 있었고(무슨 다이어트를 했는지 너무나 날씬한 컴퓨터들) 펌프방도 있었고 중간중간 거리에 즉석 컴퓨터 자수기, 운세기, 사진기 등도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상점들이었다.
당연히도 여기는 쇼핑몰인 것이다. 물론 넘쳐흐르는 상품들은 모두 다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하고 깔끔하고 새침 떨면서도 눈웃음치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물건을 사러온 것이 목적이지 노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후배의 설명에 따르면(물론 녀석 과외하는 아이의 경험을 빌어), 이 지하도시란 종합 쇼핑-엔터테인먼트 거리로서, 아이쇼핑과 진짜 쇼핑을 하다가 거리공연무대의 힙합 페스티발을 흘끔거리다가 TGI나 맥도널드에서 다리쉼을 하고 기타 등등, 즉 쇼핑과 엔터테인먼트를 원스톱으로 서비스해주는 곳이란다. 아하, 그런 건가, 그게 노는 건가?
그래도 잘 감이 안 와서, 우리는 한 커플을 골라 미행을 해보기로 했다. 놀 줄 모르는 우리, 그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해보자. 우리도 한번 놀아보자.
너무 어리지도 튀지도 않고 적당히 세련되고 상쾌해 보이는 커플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한 가지 문제점이 곧 드러났다. 걸음이 너무 느렸다. 미행하기엔 좋은 조건이었지만, 너무 답답하고 지겨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커플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단 쇼윈도에 달라붙거나 한 숍에 들어서면 약 1분에 한 발자국. 어여쁜 상품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살거리기만 했다.
"이건 너무하네요."
"네 말을 확인시켜주는 거잖아. 여기 아이쇼핑 하는 거리라며?"
"그래도 좀 심하다. 표본 추출이 잘못된 것 같아요."
덕분에 팔자에 없는 일본 아니메 캐릭터, 인테리어, 팬시 장난감 등등을 구경해야 했는데, 갑자기 후배가 손으로 쇼윈도를 가렸다. "이 인형 얼마게요?" 바구니에 레이스 리본이 묶인 큰 인형. "글쎄, 10만원 쯤?" 후배가 손을 내렸다. ₩170,000. "그래도 비슷하게 맞추네요."(난 최대한 높여 부른 건데….)
음반 상점.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헤드폰 끼고 즉석에서 CD 들어보는 그 길쭉한 쇠기둥(?)이 있었다.
"우왓, 난 미국영화에서는 봤지만 서울에도 있는지는 몰랐어."
내 말에 후배가 눈을 흘겼다. "촌스럽기는."
분수대 거린가에서는, 후배 녀석이 "앗"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난 갑자기 바닥이 꺼진 줄 알았네."
밑에 물이 흐르는 유리바닥이었다. 이번엔 내가 눈을 흘겼다. "촌스럽기는."
그렇게 30여분 동안 그 커플을 뒤따르며 같이 놀았다. 그러니까 논다는 건,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하고 깔끔하고 새침 떨면서도 눈웃음치는 상품들과 눈 마주치는 거였다. 난 놀거나 데이트한다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 의미있는 것을 같이 보고 같이 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지하도시의 데이트 방식은 상품을 보는 것이고, 함께 '놀러온' 연인과 친구들은 상품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상품을 매개로 한 의사소통 세계. 그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나의 세계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짜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의 편견이겠지. 잘 가거라,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놀게 해준 커플아, 30여분 동안 그렇게 꼼꼼히 상품들과 눈 마주치고서도 하나도 산 것이 없으니, 너희도 가난한 연인들인가 보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 아비투스의 문제라니까요."
<b>Welcome to Abalon</b>
우리가 지하도시의 메가박스시네플렉스에서 본 영화는 '아바론'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어둡고 음습한 도시. 젊은이들은 현실에서의 절망을 보상받으려는 듯 네트워크 게임 '아바론'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내용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한 도시의 현실과 게임 속의 전투장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현실이든 가상이든 화면의 색조는 어두운 갈색, 짙은 회색, 황량한 모랫빛. 현실의 사람들은 조상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게임 속의 전투장소는 항상 폐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게임 플레이어인 주인공 애슈가 아바론 게임 속의 숨겨진 최고단계로 진입하는 순간, 컴퓨터 모니터에 The Class Real이라는 글자가 뜨고, 갑자기 화면이 컬러풀해진다. 맨 먼저 강렬히 스치는 색은 코카콜라 광고의 붉은 빛. 거기서 조우한 옛 동료이자 현실 미귀환자인 머피는 게임 속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애슈에게 질문한다. "그 곳이 현실이고 여기가 가상이라고 확신하니?"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면서 끝난다. "Welcome to Abalon"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곳은 여전히 지하도시다. 지하도시가 현실인가, 지상의 거리가 현실인가? 여기는 현실 속인가, 게임 속인가? 웰컴 투 아바론. 밤낮을 구별할 수 없는 지하도시가 반짝이며 눈부시게 웃음짓고 있었다.
후배랑 영화를 보기로 했다. 단성사, 대한극장, 서울극장, 녹색극장, 티파니극장 등이 아닌, 그 이름도 길고 꼬불꼬불한, 메가박스시네플렉스에서.
"코엑스 옆에 있어요. 삼성역에서 내리면 돼요. 매표소 앞에서 전화할게요." 예술의전당 부근 아르바이트하는 집에서 출발한다던 후배,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전화가 안 온다. 지하철 속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 "우씨, 삼성역에서 1㎞쯤 걸어야 되나봐요.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아요. 표 끊고 기다릴게요." 1㎞? 흠, 걷기엔 좀 멀잖아?
삼성역에서 내렸다. 주변약도를 확인해 보고 당연히 나는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1㎞는커녕 50m도 안돼서 코엑스 건물을 찾았다. 코엑스 건물이 크다 한들, 하늘 아래 뫼도 못 되거늘, 이제 메가박스시네플렉스 건물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메가박스시네플렉스라는 간판을 단 극장건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로 내려와요." 지하? 단성사, 대한극장, 서울극장, 녹색극장, 티파니극장만 다녀본 나의 관습이 흔들, 했다. "지하?"라고 반문하는 입에서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운 헛바람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순간의 쪽팔림이란.
어쨌든 내려가는 계단이 있길래 내려갔고, 그 다음부터는 쉽게 찾았다. "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1㎞는 안 되던데?" 그렇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나의 후배는 삼성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하거리를 따라 걸어왔고, 1㎞를 헤맸던 것이다.
영화 시작까지는 2시간 20분이 남아 있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1㎞ 답사에 들어갔다. 지하 거리 1㎞, 거기엔 무엇이 있단 말인가?
<b>호텔, 터미널 그 밑에 지하도시</b>
나는 모른다, 그 길이 1㎞인지, 2㎞인지, 10㎞인지. 지금 인터넷검색을 해본 결과 지하공간 2만6천평이라고 하는데, 2만6천평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단 한번, 그것도 한두 시간 돌아본 것 가지고는, 전혀 그 공간구조를 그릴 수가 없다.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큰대륙간 호텔이라…), 공항터미널(공항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현대백화점, 코엑스몰, 코엑스인터컨티넨탈서울(뭐 하는 데냐?) 등의 순서로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인터넷검색 화면은 내 머릿속의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휘어진 길과 미로들,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지하. S야, 네가 1㎞를 걸은 건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지하 코엑스몰, 지상 코엑스.(그러니까 무역센터, 세계의 기업들이 첨단을 자처하며 모여드는 곳. 지상 코엑스에서는 e-business solution fair @ world 2001을 하고 있었다. 그래, 너 잘 나가라, 자본주의여!) 지하 아셈길, 지상 아셈타워(아셈, 발을 절룩거리며 걸었던 그날의 행진은 잊혀지고, 여기에 굳게 새겨져 있는 이름).
위성전화와 노트북을 들고 대륙을 건너는 사람들이 묵을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 호텔인지 면세점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급스런 쇼윈도들이 은은한 기품을 풍기고 있는 데다가 별로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바람에 뒤가 켕겨 얼른 나온 코엑스인터컨티넨탈서울(처음에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과 코엑스인터컨티넨탈을 구별 못하고 한 바퀴 뺑 돌아온 줄 알았다). 아, 한 가지 알게 된 건 있다. 나는 항상 공항터미널이 뭐 하는 곳이며 왜 이 동네에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비행기 티켓 끊는 데더라고.
내가 공항터미널이란 이름을 들어본 건, 대한민국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끼리끼리 결혼식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른 이름이었으면 기억에 안 남았을지 모른다. 난, 드레스 입고 칵테일 잔이라도 들 것 같은 그런 상류 사교계 인사들이, 왜 하필 '터미널'에서 결혼식을 하는지 의아했었다. 터미널, 뭔가 복잡하고 지저분한 그런 느낌 아닌가? 적어도 내가 아는 터미널들은 그랬다. 그런데 공항터미널은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배 왈, "외국인들이 왜 서울 거리가 깨끗하다고 하는지 이상했었는데, 여기 와 보니까 알겠네.") 아쉬운 건 그 공항터미널 결혼식장을 못찾았다는 거다. 한번쯤 곁눈질이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어디 숨어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여기서 결혼식 한다는 게 맞긴 맞아요?" 후배의 의심스러운 시선) 간판이나 표지판 없어도 다들 잘 찾아가나 보다.
위성전화와 노트북과 정장과 매끈한 미소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자본의 가속을 더하기 위해 대륙을 가로질러 회의하고 묵고 결혼하는 지상의 공간 밑에는, 또 하나의 도시가 있었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들어간 곳이 이 찬란한 지하도시였던 것이다.
어렸을 때 공상모험 소설에서 보았던 지하세계가 떠올랐다. 그 지하세계에는 괴물과 공룡과 원시인들이 살았다. 비슷했다. 상품의 괴물과 자본의 공룡과 그 앞에서 소비의 욕망으로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원시인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보았던 지하세계에서는 두 개의 태양이 빛났고 푸르고 붉은 원시림이 싱싱했다. 이 곳 지하도시 역시 다른 세계, 희고 푸르고 붉은 조명이 태양보다 훨씬 은은하고 세련된 빛을 뿌렸다. 원시목 대신 SF 영화 속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철골 기둥들이 우뚝우뚝 도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속을 더해 만들어내고 있는 미래도시가 이런 거라고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지하도시 거리에 '수풀길', '계곡길' 등등의 이름이 붙어있냐는 거였다. 후배는 분명히 지상을 본따서, 말하자면 수풀길 위 지상에는 나무 몇 그루라도 있는 그런 것일 거라고 주장했다. 나는 조명이나 거리 치장의 주제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우기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둘 다 근거가 희박했다.
지하도시는 그런 곳이었다. 수풀길에 수풀이 없고 계곡길에 계곡이 없는, 푸른빛 조명과 미끈하게 잘 빠진 기둥과 분수를 이룬 물과 계단(이게 계곡인가?)이 매끈한 조화를 이룬 도시. "전쟁은 걱정없네. 북한 인민군들이 여기 오면, 전쟁하고 싶겠어요?" 이건 후배 말이었다.
<b>놀기, 상품과 눈 마주치기, 상품을 매개로 의사소통하기</b>
우리가 주로 돌아다닌 곳은 코엑스몰이었다. "광고에서 본 건 다 있네요." TV도 광고도 보지 않는 나는 묵묵부답, 그런가 할 뿐. 다시 후배 왈, "여기 다니는 사람들 패션 중에서 우리가 제일 후질 거예요. 여자들 화장도 신림동하고는 다른데." 역시 패션이나 화장에 대해 일가견이 전혀 없는 나는 묵묵부답, 그런가 할 뿐.(칫, 나도 괜찮게 입고 나왔는데. 아마 녀석의 자격지심이겠지.)
후배에게 물었다.
"넌 여기 예전에 와 봤다며? 어떻게 와 봤니?"
"아르바이트 과외하는 애랑 왔어요. 걔는 심심하면 여기 와서 논대요."
"뭐? 여기서 뭘하고 놀아?"
"그냥 돌아다니는 거죠."
"그냥 돌아다닌다고?"(음, 전혀 이해가 안 되는군.)
내 관습으로는 논다는 것은, 찻잔이나 술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영화와 공연을 보러 간다든지 교외로 나가 금수강산 산천경개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든지, 좀 더 어릴 때는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놀이기구를 타러 간다든지… 이런 거였다.
물론 지하도시엔 영화관도 있었고 수족관도 있었고(입장권 1만4천5백원. "회 쳐 먹지도 못할 물고기들.") 맥도널드와 TGI와 베니건스도 있었고 거리 공연무대도 있었고 인터넷휴게실도 있었고(무슨 다이어트를 했는지 너무나 날씬한 컴퓨터들) 펌프방도 있었고 중간중간 거리에 즉석 컴퓨터 자수기, 운세기, 사진기 등도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상점들이었다.
당연히도 여기는 쇼핑몰인 것이다. 물론 넘쳐흐르는 상품들은 모두 다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하고 깔끔하고 새침 떨면서도 눈웃음치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물건을 사러온 것이 목적이지 노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후배의 설명에 따르면(물론 녀석 과외하는 아이의 경험을 빌어), 이 지하도시란 종합 쇼핑-엔터테인먼트 거리로서, 아이쇼핑과 진짜 쇼핑을 하다가 거리공연무대의 힙합 페스티발을 흘끔거리다가 TGI나 맥도널드에서 다리쉼을 하고 기타 등등, 즉 쇼핑과 엔터테인먼트를 원스톱으로 서비스해주는 곳이란다. 아하, 그런 건가, 그게 노는 건가?
그래도 잘 감이 안 와서, 우리는 한 커플을 골라 미행을 해보기로 했다. 놀 줄 모르는 우리, 그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해보자. 우리도 한번 놀아보자.
너무 어리지도 튀지도 않고 적당히 세련되고 상쾌해 보이는 커플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한 가지 문제점이 곧 드러났다. 걸음이 너무 느렸다. 미행하기엔 좋은 조건이었지만, 너무 답답하고 지겨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커플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단 쇼윈도에 달라붙거나 한 숍에 들어서면 약 1분에 한 발자국. 어여쁜 상품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살거리기만 했다.
"이건 너무하네요."
"네 말을 확인시켜주는 거잖아. 여기 아이쇼핑 하는 거리라며?"
"그래도 좀 심하다. 표본 추출이 잘못된 것 같아요."
덕분에 팔자에 없는 일본 아니메 캐릭터, 인테리어, 팬시 장난감 등등을 구경해야 했는데, 갑자기 후배가 손으로 쇼윈도를 가렸다. "이 인형 얼마게요?" 바구니에 레이스 리본이 묶인 큰 인형. "글쎄, 10만원 쯤?" 후배가 손을 내렸다. ₩170,000. "그래도 비슷하게 맞추네요."(난 최대한 높여 부른 건데….)
음반 상점.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헤드폰 끼고 즉석에서 CD 들어보는 그 길쭉한 쇠기둥(?)이 있었다.
"우왓, 난 미국영화에서는 봤지만 서울에도 있는지는 몰랐어."
내 말에 후배가 눈을 흘겼다. "촌스럽기는."
분수대 거린가에서는, 후배 녀석이 "앗"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난 갑자기 바닥이 꺼진 줄 알았네."
밑에 물이 흐르는 유리바닥이었다. 이번엔 내가 눈을 흘겼다. "촌스럽기는."
그렇게 30여분 동안 그 커플을 뒤따르며 같이 놀았다. 그러니까 논다는 건, 예쁘고 발랄하고 유쾌하고 깔끔하고 새침 떨면서도 눈웃음치는 상품들과 눈 마주치는 거였다. 난 놀거나 데이트한다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 의미있는 것을 같이 보고 같이 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지하도시의 데이트 방식은 상품을 보는 것이고, 함께 '놀러온' 연인과 친구들은 상품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상품을 매개로 한 의사소통 세계. 그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나의 세계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짜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의 편견이겠지. 잘 가거라,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놀게 해준 커플아, 30여분 동안 그렇게 꼼꼼히 상품들과 눈 마주치고서도 하나도 산 것이 없으니, 너희도 가난한 연인들인가 보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 아비투스의 문제라니까요."
<b>Welcome to Abalon</b>
우리가 지하도시의 메가박스시네플렉스에서 본 영화는 '아바론'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어둡고 음습한 도시. 젊은이들은 현실에서의 절망을 보상받으려는 듯 네트워크 게임 '아바론'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내용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한 도시의 현실과 게임 속의 전투장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현실이든 가상이든 화면의 색조는 어두운 갈색, 짙은 회색, 황량한 모랫빛. 현실의 사람들은 조상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게임 속의 전투장소는 항상 폐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게임 플레이어인 주인공 애슈가 아바론 게임 속의 숨겨진 최고단계로 진입하는 순간, 컴퓨터 모니터에 The Class Real이라는 글자가 뜨고, 갑자기 화면이 컬러풀해진다. 맨 먼저 강렬히 스치는 색은 코카콜라 광고의 붉은 빛. 거기서 조우한 옛 동료이자 현실 미귀환자인 머피는 게임 속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애슈에게 질문한다. "그 곳이 현실이고 여기가 가상이라고 확신하니?"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지면서 끝난다. "Welcome to Abalon"
영화를 다 보고 나온 곳은 여전히 지하도시다. 지하도시가 현실인가, 지상의 거리가 현실인가? 여기는 현실 속인가, 게임 속인가? 웰컴 투 아바론. 밤낮을 구별할 수 없는 지하도시가 반짝이며 눈부시게 웃음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