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 왼편에서 보기
언론사 세무조사와 언론운동진영의 대응
<b>혼란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b>
중구 태평로1가 25번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위치한 한국언론회관의 주소다. 대한매일과 함께 쓰고있는 이 건물 18층 조합사무실에 오르면 북쪽 창으로 청와대와 동아일보가 한눈에 잡힌다. 시선을 조금만 왼쪽으로 돌리면 최근 재건축을 마친 조선일보가 우뚝 서있다. 중앙일보 사옥이 있는 서소문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돌담길 운치가득한 길을 10여분 따라올라 신문로 앞에 서면 오른편에 경향신문이, 왼편에 문화일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이 위치한 이 곳 도심 한가운데에서는 시가전이 한창이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옛말을 증명하느라 경쟁이라도 붙은 것 마냥, 펜끝으로 위장한 포탄이 하늘 위를 아침저녁으로 날아다닌다. 이른바 '舌戰'이다.
이 한편의 무협극은 입장의 양극화도 불러왔다. 혹 길을 지나다 흐르는 유탄을 맞지 않기 위해선 어느 한편에 서야할 것처럼 보인다. 또 이 전쟁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지면과 화면에서 소외되기 일쑤다. 자민련을 보라.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어느 한편에 서는 순간, 당신은 다른 한편의 십자포화를 맞게 된다. 홈페이지가 다운될 지경에 이르렀던 문화권력가 이문열 씨. 이씨는 지난 7월 2일 조선일보에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가 네티즌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소장하고 있는 이 씨의 소설을 반납하겠다"는 주장에 대해 이씨가 "반송하면 환불해주겠다"고 답하면서 일대 소동까지 일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입장의 글을 실었다가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전화통화에 시달리는 교수도 있다. 한 교수는 결국 핸드폰 번호까지 바꿔야 했다.
적군 아니면 아군이다. 혹자는 '20세기와 21세기 가치 사이의 싸움' '부패와 반부패' '구체제와 신체제' 심지어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이 모든 것이 1월 시작됐다.
국세청은 지난 1월 31일 서울소재 중앙일간지들과 방송4사를 대상으로 정기법인세 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었다. 지난 1994년 첫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7년만의 일이며, DJ의 '언론개혁' 발언 이후 불과 보름만의 일이었다.
국세청은 2월 8일부터 SBS 51명, 조선일보 50명을 비롯, 총4백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각 언론사의 광고·판매·이자수입, 각종 수당과 상여금 등이 적절히 계상됐는지 여부와 계열회사 간 자금거래, 지분변동조사 등을 조사해 왔다. 이번 발표는 이 조사에 따른 것이다. 필자는 당시 지면을 통해 정부의 이러한 발표가 언론개혁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임을, 또 언론개혁의 문제에 진보진영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혼란'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의 정체성에 대해, 주요한 슬로와 요구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5개월 전에 충분히 예상됐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 펼쳐진 결과 앞에 우왕좌왕하거나, 또는 눈을 가린 채 앞으로만 나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이 혼란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가져보자는 것이 오늘의 주제다.
<b>언론개혁을 위한 운동진영의 요구</b>
먼저 운동진영에서 요구하고 있는 핵심적 과제들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언론운동진영이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와 검찰고발 이후 내세워 온 주장 크게 4가지.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 공개 △언론사 추징금액 자진공개 △족벌언론 비호 중단 △부실경영 책임 사주 퇴진 △정간법 개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세무조사 결과에 따른 정부여당과 거대언론사간의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양측에 결과 및 추징금액 공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 언론개혁의 문제를, 색깔론은 물론 심지어 지역주의로까지 몰고가는 한나라당을 타격하고, 정쟁으로 비화되며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다. 아울러 조선·동아·중앙·국민·한국 등 족벌·종교·재벌 신문사주들의 퇴진을 통해 편집권 독립을 이뤄냄과 동시에 부실경영의 책임까지 함께 묻겠다는 말이다.
정간법 개정의 경우, 족벌사주의 소유지분이 30%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신문기업의 투명성 확보 조항을 담고 있다. 편집위원회의 구성, 편집규약 제정을 의무화토록 규정해 편집권 독립에도 무게를 실었다. 편집위원회는 사용자와 취재 또는 편집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동수의 편집위원으로 구성하도록 되어있다. 정간법 개정안은 이 밖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해 언론의 공익성을 강조했다.
공동배달제도 주요한 요구 중 하나다. 존재하는 신문지국을 지역 또는 구획별로 하나로 묶어 배달업무를 관장토록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배제는, 프랑스 등 일부국가에서 시행 중인 '공동판매제'의 전단계다. 공판제의 경우 신문판매 및 판촉까지 하나로 묶고 있다. 이 경우 발행부수 조작과 과열 판촉경쟁을 통한 여론왜곡을 제어할 수 있다. 신문 5부 중 1부가 독자들의 손에 가기도 전에, 포장도 풀리지 않은 채 버려지는 형국임을 보면 타당성이 충분한 제도다. 양보다는 질을 통한 경쟁도 유도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신문마다의 색깔과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진보적 매체가 등장할 경우 판매망을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언론개혁에는 민주노총도 가세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6월 22일 비상중앙위원회와 26일 조선일보 앞 집회를 잇따라 열며 '노동자 파업에 대해 악의적 왜곡·허위보도를 일삼는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펼치겠다'고 선포했다. 민주노총이 밝힌 조선일보 거부운동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중앙과 지역본부. 민주노총의 조사결과 중앙과 연맹·지역본부 사무실 40여 곳 중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던 곳은 서울의 총연맹, 전교조, 금속산업연맹, 사무금융연맹, 보건의료노조 등이다. 지난 26일 집회를 마친 뒤, 위 5곳에서 구독중지 통보서를 제출함에 따라 1단계는 마무리됐다. 경남본부는 이보다 3일 앞서 구독중지 통보서를 냈다.
민주노총은 2단계 운동으로 소속사업장 총1천5백여 곳을 상대로 27일부터 조선일보 구독 중단을 조직하고 있다. 폭발적인 조선일보 구독거부 호응에 민주노총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3단계는 노조 사무실을 넘어서 개별 조합원이다. 현재 민주노총의 조합원은 약 60만명으로 3단계까지 착실히 진행될 경우 조선일보는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또 △조선일보 취재거부 및 사무실 출입 금지 △허위보도 언론중재위 조정신청 △해당기자 편집국장 등에 강력 항의 등의 지침을 각 단위사업장에 내려보냈다. 위 주요 요구조항들 중 언론운동진영에서 최근 들어 가장 큰 목소리로 발언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무조사 결과 공개'와 '족벌언론 비호 중단'이 단연 1·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b>소모적인 정치쟁점화에 대한 경계 </b>
이러한 주장의 흐름에 대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분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1994년 YS정권 당시 세무조사 결과를 빌미로 언론의 순종을 요구했던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예측가능하다면 적극 저지하고 나서야 함도 당연하다.
또 비생산적인 정치쟁점화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 왔듯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제기되며 쟁점화되고 있는 이른바 색깔론 등은 사태의 진전과 본질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언론노조는 지난 6월 25일 세무조사 결과 및 불공정행위조사 결과 등 언론정보공개를 청구하고 7월 5일에는 한국일보 장재국 대표이사를 비롯한 장씨 일가 주주 11명을 업무상 배임과 상법상 특별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언론노조 등 전국 170여개 노동사회단체가 참여한 신문개혁국민행동(본부장 성유보)도 매주 수요일 벌여오던 집회를 한나라당 앞으로 집중, 지난 4일 족벌언론 비호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연데 이어, 11일에도 한나라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민주당사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국세청이나 검찰의 입장이 뒤바뀌거나, DJ와 언론사간의 대타협이 이루어지거나, 족벌사주들이 마음을 바꿔먹기 전에 이러한 언론공방 국면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언론개혁선언 동참자의 숫자나 산별 전환 이후 급격히 상승한 언론노조의 조직력 등을 볼 때 언론운동진영의 대응과 행보 역시 순항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우려되는 지점 역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솔직한 표현이다.
<b>갈 데까지 간 '언론탄압', 운동진영의 요구는?</b>
"정부가 세무조사 방침을 결정하고 행동에 착수하면서 조선이나 동아와 같은 족벌언론의 반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극한의 저항과 독설이 지면에 난무하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도 국세청이 일차적으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검찰고발까지 갈 수 있었던 데에는 제2, 제3의 공격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 이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데, 외환밀반출이 바로 그 중 핵심사안입니다. 현행법상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카드를 통해 정부는 다시 반전을 시도할 것이 확실합니다."
한 중앙일간지 간부의 말이다. 이 간부는 "이미 국세청과 검찰은 특정신문사가 광고대금을 수입으로 잡지 않고 미국으로 빼돌려 대규모 부동산을 구입한 증거를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 정권과 언론은 이미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정부여당의 상임고문이 공개석상에서 전한 이 말은 정부가 타협보다는 전면전을 통해 정권재창출과 같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6월 27일 대정부투쟁을 천명하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지금 사방에서 언론을 옥죄어오는 권력의 殺氣를 절감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성명은 "언론개혁이 비판언론 압살작전에 다름 아니"라고 못박으며 강력한 언론자유 수호와 권력의 음모에 맞선 투쟁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조선 기자들의 성명에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성명을 긍정한다. 하나는 발행부수 1위에 걸맞는 수려한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를) 압살하려는 권력의 음모가 명확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조선일보 사주는 이에 앞서 편집국을 상대로 "나는 각오가 돼있으니, 내 일신의 구속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비판적 논조를 유지해 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인용들은 정부와 수구적 논조를 끝까지 유지해 온 몇몇 족벌언론이 결국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환언하면 '정부와 족벌의 대타협설'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제출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암실에서의 뒷거래로 사태가 완전히 무마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언론운동진영이 '안 그래도 정부가 잘하고 있는 세무조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동안'에, 6월 30일 막을 내린 제222회 임시국회에서는 정기간행물등록등에관한법률과 국회산하 언론발전위원회 구성문제가 상임위 논의조차 거치지 못했다. 핵심적 요구사안 중 하나인 신문공동배달제는 쟁점화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문제에 훼방을 놓을 필요는 없다. 박수를 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자의에 의해 기왕 하고있는 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운동진영의 주역할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세무조사의 그늘에 가려진 공동배달제 실시 등 핵심적 요구사안과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 우리 안에서 홀대받게 된 지금의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답해야 한다.
<B>정작 신문은 무엇이 바뀌었을까?</B>
"DJ정권은 상대적 개혁성과 함께 경제정책의 극우적 지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상한 성격의 정권입니다. 현 정권의 이중성에 맞서 대응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의 상대적 진보성이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50호에 실린 한 언론노동운동지도자의 말이다.
이 지면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성격규정이나 그가 주장한 '이중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문제와 계급투쟁을 두고 분리된 시각으로 현하의 김대중 정권을 분석하는 통일운동 일각에 대한 그간의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진보성에 만족해 주저앉을 때, 권력은 우리보다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수구보수언론에 대한 타격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정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득권 주류와 기득권 비주류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누구 편에 서더라도 결국 이는 '기득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꼴이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한국일보, 국민일보 등의 논조는 세무조사 결과 발표를 전후해 현저히 변화했다. 목소리도 많이 약해졌을 뿐더러, 동아일보에서는 해직기자 출신의 편집국장이 임명되기도 했다. 만일 이것이 언론사 세무조사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 김대중 정권은 충분히 효과를 본 셈이다. 언론계 일각에서 조심스레 나오는 '구속제외 교감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주 고발 카드만으로 이 정도의 '톤다운'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당연히 성공이라 칭할만하다. 모 신문사는 정치부와 제목을 뽑는 편집부 기자들을 상대로 강약조절을 특별주문하기까지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정작 신문은 무엇이 바뀌었을까?
세무조사 공개와 족벌사주 처벌을 가장 큰 목소리로 촉구하던 언론운동단체들이 현격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제 갓 시작한 싸움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DJ정부가 얻은 효과에 비해, 아군진영의 상황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당에 대한 독설이 사라진 지면에 채워지는 것은, 투쟁하는 민중의 삶이 아니었다. 모순을 고발하는 정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가해자가 표정을 바꿔 내보낸 기사를 통해 들리는 것은 피해자들의 절규가 아닌 수혜자들의 웃음이었다.
상대적 진보를 안고 화려하게 출범한 國民의 정부는 결국 窮民의 정부로 판명됐다. DJ의 모든 개혁정책은 하나도 빠짐없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이었음이 증명됐다. 레미콘을 도끼로 부수고 부평·울산을 피로 물들이던 김대중과 언론개혁에 나선 김대중은 같은 DJ다. 그것은 '정권의 이중적 성격'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두 얼굴'이다.
<b>언론개혁의 궁극적 지향은</b>
7월 4일 열렸던 한나라당사 앞 신문개혁 결의대회는 두 가지 진풍경을 연출했다.
하나는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열렸던 한나라당 주최의 '언론탄압 규탄대회'다. 같은 사안을 두고 정부를 비난하는 한나라당의 집회와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린 것. 당사 앞에서 '족벌언론 비호하는 한나라당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시위대 앞으로 왼쪽 가슴에 '언론탄압 중단하라'고 적힌 붉은색 리본을 단 한나라당직자들이 눈을 흘기며 지나쳐갔다.
진풍경 둘. 신문개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이날 집회의 연사는 모두 세 명, 이 중 두 명의 연사는 자신의 발언 대부분을 '홍위병설'에 대한 반박으로 채웠다. 둘 중 첫번째 연사는 "언론개혁 하자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품팔아도 결국 월수입 몇십만원에 그치는 활동가들이 무슨 홍위병이냐"며 반박했고, 다음 발언자는 "우리는 노동운동탄압을 자행하는 민주당과 족벌언론을 비호하는 한나라당 모두 반대한다"면서 민주당에 대한 반대의사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뒀다.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MBC가 7월 2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조치가 조세정의와 공정거래 질서확립 차원인가’라는 설문에 ‘그렇다’가 54%, ‘아니다’는 40%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워낙 고무줄처럼 결과가 나와 웬만해선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여론조사라곤 하지만, 이번의 결과는 생각과 너무 달랐다.
필자는 정부의 세무조사 전반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언론개혁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왜 정치적 의도가 없겠는가? 정권이 추진하는 어떤 정책에 정치적 의도가 배어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부의 세무조사 조치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절차적 정당성과 조세정의 실현 차원의 접근방식 그리고 언론사의 탈루와 탈세가 천문학적인 액수에 이르렀기 때문이며, 족벌의 오만과 방자함이 위험수위를 넘어 민중의 삶을 왜곡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혁운동세력이라면, 진보적 활동가라면, 적어도 개혁적 성향을 자부한다면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요구와 투쟁이 뒤따라야만 '홍위병' 딱지를 떼고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문열씨 등이 설파한 '홍위병'론에 물론 동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거액을 받고, 지시를 받아 활동해야만 이중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의 악경향과 국지적 정치국면에 치우쳐 기득권의 노예가 되기 일쑤라는 과거의 교훈은 곱씹어 볼만하다.
<b>매체수용자 운동을 넘어서</b>
최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6월 투쟁에 대한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초벌적으로 논의했다. 언론노조는 9월 정기간행물법 개정투쟁을 준비하며 다양한 대중운동계획을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 이 평가논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스로 벌여왔던 싸움에 대한 비판적 평가였다. '언론플레이 위주의 투쟁방식'과 '조합원과 함께 가지 못하는 싸움'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대중운동은 인식의 공유와 공분의 조직화, 행동의 통일화다. 함께 논의해 함께 나서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언론노조의 자기평가와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만이 정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언론운동은 크게 매체수용자운동과 언론노동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벌이고 있는 '안티조선 운동'은 대표적인 수용자운동이다. 그러나, 매체를 생산하는 언론노동자들의 몫이 수용자운동으로 국한될 수는 없다. 그런데 활동의 폭과 수위가 만족스러운 대중운동화에 이르지 못하다보니 시민단체류의 여론플레이로 흘러온 것이다. 6월 투쟁을 통해 대중운동계획의 단초를 마련한 만큼 언론노조의 계획을 주목해 볼만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세무조사가 탄력을 받으며 진행돼 족벌사주들이 흔들거리기 시작할 때, 언론운동진영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정간법 개정안은 개인의 소유지분을 30%로 제한하고 있으니, 이 운동을 더 힘차게 벌여나가야 할까? '소수의 목소리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의무조항도 있으니, 정간법이 개정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러나 아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행 방송법은 일인의 소유제한을 30%로 엄격하게 하고 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소수의 목소리에 더욱 귀기울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방송법의 제한을 받는 SBS는 독립자유언론인가? 소유지분을 제한하고 있으니 족벌언론이 아닌가? 절대 다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b>언론개혁투쟁은 결국 이데올로기 싸움</b>
오히려 핵심은 각 사업장 내에서, 또는 산업 전반에 걸쳐 형성돼 있는 노사간 힘의 역관계다. 1987년 봇물처럼 터져나온 언론사 노동조합 결성 이후 15년, 대부분의 언론사 노동조합들은 강력한 공정보도규약과 단체협약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성과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IMF와 함께 찾아온 '자사이기주의'와 연봉제의 공격 등을 거치며 약화되어온 노동조합의 위치, 이에 따른 노자간 역관계의 후퇴 때문이다.
이렇게 그간 밀려오기만 했던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사업장·산업별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상반기 내세웠던 언론개혁 5대 요구를 각 단위사업장 임단협과 연계해 대중운동화하는 계획이 제출되어야 하며, '지르기'와 '양보교섭'으로 몇몇 조항을 따오는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노조의 결속력과 투쟁력 약화를 불러왔던 교섭 관성을 버려야 한다. '사문화되고 화석화된 공정보도조항'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실질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대정부투쟁에 있어서도 좀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현하의 언론개혁투쟁은 결국 이데올로기 싸움이다. 지면을 사유화하고 자본의 이익을 덧칠하기 바빴던 모든 보수언론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투쟁은 시쳇말로 '한 놈만 찍어패는' 전술일 뿐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중의 목소리가 한 줄 나지 않는 보도현상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어야 하며, 나아가 정치놀음과 여론왜곡에 여념이 없는 이데올로기 장치인 '신문'과 '방송'을 혁신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진보진영은 언론개혁투쟁이 언론사주 구속에서 머물지 않도록, 조선일보 구독거부에서 멈추지 않도록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답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다수파가 길을 제시해야 한다.
세인의 지탄을 받고 있는 조선일보. 역사의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문장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주장했던 글로 잡문을 마무리해보자.
"언제나 투쟁이란 다수자가 승리를 얻는 것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점한 무산계급의 단결된 조직만 완성하면 최후 승리는 다반사일 것이다."(조선일보 1924년 11월 21일자)
중구 태평로1가 25번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위치한 한국언론회관의 주소다. 대한매일과 함께 쓰고있는 이 건물 18층 조합사무실에 오르면 북쪽 창으로 청와대와 동아일보가 한눈에 잡힌다. 시선을 조금만 왼쪽으로 돌리면 최근 재건축을 마친 조선일보가 우뚝 서있다. 중앙일보 사옥이 있는 서소문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돌담길 운치가득한 길을 10여분 따라올라 신문로 앞에 서면 오른편에 경향신문이, 왼편에 문화일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이 위치한 이 곳 도심 한가운데에서는 시가전이 한창이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옛말을 증명하느라 경쟁이라도 붙은 것 마냥, 펜끝으로 위장한 포탄이 하늘 위를 아침저녁으로 날아다닌다. 이른바 '舌戰'이다.
이 한편의 무협극은 입장의 양극화도 불러왔다. 혹 길을 지나다 흐르는 유탄을 맞지 않기 위해선 어느 한편에 서야할 것처럼 보인다. 또 이 전쟁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지면과 화면에서 소외되기 일쑤다. 자민련을 보라.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어느 한편에 서는 순간, 당신은 다른 한편의 십자포화를 맞게 된다. 홈페이지가 다운될 지경에 이르렀던 문화권력가 이문열 씨. 이씨는 지난 7월 2일 조선일보에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가 네티즌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소장하고 있는 이 씨의 소설을 반납하겠다"는 주장에 대해 이씨가 "반송하면 환불해주겠다"고 답하면서 일대 소동까지 일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입장의 글을 실었다가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전화통화에 시달리는 교수도 있다. 한 교수는 결국 핸드폰 번호까지 바꿔야 했다.
적군 아니면 아군이다. 혹자는 '20세기와 21세기 가치 사이의 싸움' '부패와 반부패' '구체제와 신체제' 심지어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이 모든 것이 1월 시작됐다.
국세청은 지난 1월 31일 서울소재 중앙일간지들과 방송4사를 대상으로 정기법인세 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었다. 지난 1994년 첫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7년만의 일이며, DJ의 '언론개혁' 발언 이후 불과 보름만의 일이었다.
국세청은 2월 8일부터 SBS 51명, 조선일보 50명을 비롯, 총4백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각 언론사의 광고·판매·이자수입, 각종 수당과 상여금 등이 적절히 계상됐는지 여부와 계열회사 간 자금거래, 지분변동조사 등을 조사해 왔다. 이번 발표는 이 조사에 따른 것이다. 필자는 당시 지면을 통해 정부의 이러한 발표가 언론개혁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임을, 또 언론개혁의 문제에 진보진영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혼란'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의 정체성에 대해, 주요한 슬로와 요구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5개월 전에 충분히 예상됐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 펼쳐진 결과 앞에 우왕좌왕하거나, 또는 눈을 가린 채 앞으로만 나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이 혼란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가져보자는 것이 오늘의 주제다.
<b>언론개혁을 위한 운동진영의 요구</b>
먼저 운동진영에서 요구하고 있는 핵심적 과제들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언론운동진영이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와 검찰고발 이후 내세워 온 주장 크게 4가지.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 공개 △언론사 추징금액 자진공개 △족벌언론 비호 중단 △부실경영 책임 사주 퇴진 △정간법 개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세무조사 결과에 따른 정부여당과 거대언론사간의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양측에 결과 및 추징금액 공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 언론개혁의 문제를, 색깔론은 물론 심지어 지역주의로까지 몰고가는 한나라당을 타격하고, 정쟁으로 비화되며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다. 아울러 조선·동아·중앙·국민·한국 등 족벌·종교·재벌 신문사주들의 퇴진을 통해 편집권 독립을 이뤄냄과 동시에 부실경영의 책임까지 함께 묻겠다는 말이다.
정간법 개정의 경우, 족벌사주의 소유지분이 30%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신문기업의 투명성 확보 조항을 담고 있다. 편집위원회의 구성, 편집규약 제정을 의무화토록 규정해 편집권 독립에도 무게를 실었다. 편집위원회는 사용자와 취재 또는 편집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동수의 편집위원으로 구성하도록 되어있다. 정간법 개정안은 이 밖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해 언론의 공익성을 강조했다.
공동배달제도 주요한 요구 중 하나다. 존재하는 신문지국을 지역 또는 구획별로 하나로 묶어 배달업무를 관장토록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공배제는, 프랑스 등 일부국가에서 시행 중인 '공동판매제'의 전단계다. 공판제의 경우 신문판매 및 판촉까지 하나로 묶고 있다. 이 경우 발행부수 조작과 과열 판촉경쟁을 통한 여론왜곡을 제어할 수 있다. 신문 5부 중 1부가 독자들의 손에 가기도 전에, 포장도 풀리지 않은 채 버려지는 형국임을 보면 타당성이 충분한 제도다. 양보다는 질을 통한 경쟁도 유도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신문마다의 색깔과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진보적 매체가 등장할 경우 판매망을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언론개혁에는 민주노총도 가세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6월 22일 비상중앙위원회와 26일 조선일보 앞 집회를 잇따라 열며 '노동자 파업에 대해 악의적 왜곡·허위보도를 일삼는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펼치겠다'고 선포했다. 민주노총이 밝힌 조선일보 거부운동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중앙과 지역본부. 민주노총의 조사결과 중앙과 연맹·지역본부 사무실 40여 곳 중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던 곳은 서울의 총연맹, 전교조, 금속산업연맹, 사무금융연맹, 보건의료노조 등이다. 지난 26일 집회를 마친 뒤, 위 5곳에서 구독중지 통보서를 제출함에 따라 1단계는 마무리됐다. 경남본부는 이보다 3일 앞서 구독중지 통보서를 냈다.
민주노총은 2단계 운동으로 소속사업장 총1천5백여 곳을 상대로 27일부터 조선일보 구독 중단을 조직하고 있다. 폭발적인 조선일보 구독거부 호응에 민주노총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3단계는 노조 사무실을 넘어서 개별 조합원이다. 현재 민주노총의 조합원은 약 60만명으로 3단계까지 착실히 진행될 경우 조선일보는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또 △조선일보 취재거부 및 사무실 출입 금지 △허위보도 언론중재위 조정신청 △해당기자 편집국장 등에 강력 항의 등의 지침을 각 단위사업장에 내려보냈다. 위 주요 요구조항들 중 언론운동진영에서 최근 들어 가장 큰 목소리로 발언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무조사 결과 공개'와 '족벌언론 비호 중단'이 단연 1·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b>소모적인 정치쟁점화에 대한 경계 </b>
이러한 주장의 흐름에 대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분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1994년 YS정권 당시 세무조사 결과를 빌미로 언론의 순종을 요구했던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예측가능하다면 적극 저지하고 나서야 함도 당연하다.
또 비생산적인 정치쟁점화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 왔듯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제기되며 쟁점화되고 있는 이른바 색깔론 등은 사태의 진전과 본질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언론노조는 지난 6월 25일 세무조사 결과 및 불공정행위조사 결과 등 언론정보공개를 청구하고 7월 5일에는 한국일보 장재국 대표이사를 비롯한 장씨 일가 주주 11명을 업무상 배임과 상법상 특별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언론노조 등 전국 170여개 노동사회단체가 참여한 신문개혁국민행동(본부장 성유보)도 매주 수요일 벌여오던 집회를 한나라당 앞으로 집중, 지난 4일 족벌언론 비호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연데 이어, 11일에도 한나라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민주당사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국세청이나 검찰의 입장이 뒤바뀌거나, DJ와 언론사간의 대타협이 이루어지거나, 족벌사주들이 마음을 바꿔먹기 전에 이러한 언론공방 국면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언론개혁선언 동참자의 숫자나 산별 전환 이후 급격히 상승한 언론노조의 조직력 등을 볼 때 언론운동진영의 대응과 행보 역시 순항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우려되는 지점 역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솔직한 표현이다.
<b>갈 데까지 간 '언론탄압', 운동진영의 요구는?</b>
"정부가 세무조사 방침을 결정하고 행동에 착수하면서 조선이나 동아와 같은 족벌언론의 반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극한의 저항과 독설이 지면에 난무하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도 국세청이 일차적으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검찰고발까지 갈 수 있었던 데에는 제2, 제3의 공격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 이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데, 외환밀반출이 바로 그 중 핵심사안입니다. 현행법상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카드를 통해 정부는 다시 반전을 시도할 것이 확실합니다."
한 중앙일간지 간부의 말이다. 이 간부는 "이미 국세청과 검찰은 특정신문사가 광고대금을 수입으로 잡지 않고 미국으로 빼돌려 대규모 부동산을 구입한 증거를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 정권과 언론은 이미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정부여당의 상임고문이 공개석상에서 전한 이 말은 정부가 타협보다는 전면전을 통해 정권재창출과 같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6월 27일 대정부투쟁을 천명하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지금 사방에서 언론을 옥죄어오는 권력의 殺氣를 절감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성명은 "언론개혁이 비판언론 압살작전에 다름 아니"라고 못박으며 강력한 언론자유 수호와 권력의 음모에 맞선 투쟁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조선 기자들의 성명에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성명을 긍정한다. 하나는 발행부수 1위에 걸맞는 수려한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를) 압살하려는 권력의 음모가 명확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조선일보 사주는 이에 앞서 편집국을 상대로 "나는 각오가 돼있으니, 내 일신의 구속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비판적 논조를 유지해 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인용들은 정부와 수구적 논조를 끝까지 유지해 온 몇몇 족벌언론이 결국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환언하면 '정부와 족벌의 대타협설'이 청와대를 중심으로 제출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암실에서의 뒷거래로 사태가 완전히 무마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언론운동진영이 '안 그래도 정부가 잘하고 있는 세무조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동안'에, 6월 30일 막을 내린 제222회 임시국회에서는 정기간행물등록등에관한법률과 국회산하 언론발전위원회 구성문제가 상임위 논의조차 거치지 못했다. 핵심적 요구사안 중 하나인 신문공동배달제는 쟁점화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문제에 훼방을 놓을 필요는 없다. 박수를 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자의에 의해 기왕 하고있는 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운동진영의 주역할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세무조사의 그늘에 가려진 공동배달제 실시 등 핵심적 요구사안과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 우리 안에서 홀대받게 된 지금의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답해야 한다.
<B>정작 신문은 무엇이 바뀌었을까?</B>
"DJ정권은 상대적 개혁성과 함께 경제정책의 극우적 지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상한 성격의 정권입니다. 현 정권의 이중성에 맞서 대응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의 상대적 진보성이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50호에 실린 한 언론노동운동지도자의 말이다.
이 지면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성격규정이나 그가 주장한 '이중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문제와 계급투쟁을 두고 분리된 시각으로 현하의 김대중 정권을 분석하는 통일운동 일각에 대한 그간의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진보성에 만족해 주저앉을 때, 권력은 우리보다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수구보수언론에 대한 타격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정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득권 주류와 기득권 비주류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누구 편에 서더라도 결국 이는 '기득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꼴이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한국일보, 국민일보 등의 논조는 세무조사 결과 발표를 전후해 현저히 변화했다. 목소리도 많이 약해졌을 뿐더러, 동아일보에서는 해직기자 출신의 편집국장이 임명되기도 했다. 만일 이것이 언론사 세무조사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 김대중 정권은 충분히 효과를 본 셈이다. 언론계 일각에서 조심스레 나오는 '구속제외 교감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주 고발 카드만으로 이 정도의 '톤다운'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당연히 성공이라 칭할만하다. 모 신문사는 정치부와 제목을 뽑는 편집부 기자들을 상대로 강약조절을 특별주문하기까지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정작 신문은 무엇이 바뀌었을까?
세무조사 공개와 족벌사주 처벌을 가장 큰 목소리로 촉구하던 언론운동단체들이 현격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제 갓 시작한 싸움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DJ정부가 얻은 효과에 비해, 아군진영의 상황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당에 대한 독설이 사라진 지면에 채워지는 것은, 투쟁하는 민중의 삶이 아니었다. 모순을 고발하는 정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가해자가 표정을 바꿔 내보낸 기사를 통해 들리는 것은 피해자들의 절규가 아닌 수혜자들의 웃음이었다.
상대적 진보를 안고 화려하게 출범한 國民의 정부는 결국 窮民의 정부로 판명됐다. DJ의 모든 개혁정책은 하나도 빠짐없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이었음이 증명됐다. 레미콘을 도끼로 부수고 부평·울산을 피로 물들이던 김대중과 언론개혁에 나선 김대중은 같은 DJ다. 그것은 '정권의 이중적 성격'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두 얼굴'이다.
<b>언론개혁의 궁극적 지향은</b>
7월 4일 열렸던 한나라당사 앞 신문개혁 결의대회는 두 가지 진풍경을 연출했다.
하나는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열렸던 한나라당 주최의 '언론탄압 규탄대회'다. 같은 사안을 두고 정부를 비난하는 한나라당의 집회와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린 것. 당사 앞에서 '족벌언론 비호하는 한나라당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시위대 앞으로 왼쪽 가슴에 '언론탄압 중단하라'고 적힌 붉은색 리본을 단 한나라당직자들이 눈을 흘기며 지나쳐갔다.
진풍경 둘. 신문개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이날 집회의 연사는 모두 세 명, 이 중 두 명의 연사는 자신의 발언 대부분을 '홍위병설'에 대한 반박으로 채웠다. 둘 중 첫번째 연사는 "언론개혁 하자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품팔아도 결국 월수입 몇십만원에 그치는 활동가들이 무슨 홍위병이냐"며 반박했고, 다음 발언자는 "우리는 노동운동탄압을 자행하는 민주당과 족벌언론을 비호하는 한나라당 모두 반대한다"면서 민주당에 대한 반대의사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뒀다.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MBC가 7월 2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조치가 조세정의와 공정거래 질서확립 차원인가’라는 설문에 ‘그렇다’가 54%, ‘아니다’는 40%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워낙 고무줄처럼 결과가 나와 웬만해선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여론조사라곤 하지만, 이번의 결과는 생각과 너무 달랐다.
필자는 정부의 세무조사 전반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언론개혁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왜 정치적 의도가 없겠는가? 정권이 추진하는 어떤 정책에 정치적 의도가 배어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부의 세무조사 조치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절차적 정당성과 조세정의 실현 차원의 접근방식 그리고 언론사의 탈루와 탈세가 천문학적인 액수에 이르렀기 때문이며, 족벌의 오만과 방자함이 위험수위를 넘어 민중의 삶을 왜곡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혁운동세력이라면, 진보적 활동가라면, 적어도 개혁적 성향을 자부한다면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요구와 투쟁이 뒤따라야만 '홍위병' 딱지를 떼고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문열씨 등이 설파한 '홍위병'론에 물론 동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거액을 받고, 지시를 받아 활동해야만 이중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정치적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의 악경향과 국지적 정치국면에 치우쳐 기득권의 노예가 되기 일쑤라는 과거의 교훈은 곱씹어 볼만하다.
<b>매체수용자 운동을 넘어서</b>
최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6월 투쟁에 대한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초벌적으로 논의했다. 언론노조는 9월 정기간행물법 개정투쟁을 준비하며 다양한 대중운동계획을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 이 평가논의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스로 벌여왔던 싸움에 대한 비판적 평가였다. '언론플레이 위주의 투쟁방식'과 '조합원과 함께 가지 못하는 싸움'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대중운동은 인식의 공유와 공분의 조직화, 행동의 통일화다. 함께 논의해 함께 나서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언론노조의 자기평가와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만이 정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언론운동은 크게 매체수용자운동과 언론노동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벌이고 있는 '안티조선 운동'은 대표적인 수용자운동이다. 그러나, 매체를 생산하는 언론노동자들의 몫이 수용자운동으로 국한될 수는 없다. 그런데 활동의 폭과 수위가 만족스러운 대중운동화에 이르지 못하다보니 시민단체류의 여론플레이로 흘러온 것이다. 6월 투쟁을 통해 대중운동계획의 단초를 마련한 만큼 언론노조의 계획을 주목해 볼만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세무조사가 탄력을 받으며 진행돼 족벌사주들이 흔들거리기 시작할 때, 언론운동진영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정간법 개정안은 개인의 소유지분을 30%로 제한하고 있으니, 이 운동을 더 힘차게 벌여나가야 할까? '소수의 목소리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의무조항도 있으니, 정간법이 개정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러나 아쉽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행 방송법은 일인의 소유제한을 30%로 엄격하게 하고 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소수의 목소리에 더욱 귀기울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방송법의 제한을 받는 SBS는 독립자유언론인가? 소유지분을 제한하고 있으니 족벌언론이 아닌가? 절대 다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b>언론개혁투쟁은 결국 이데올로기 싸움</b>
오히려 핵심은 각 사업장 내에서, 또는 산업 전반에 걸쳐 형성돼 있는 노사간 힘의 역관계다. 1987년 봇물처럼 터져나온 언론사 노동조합 결성 이후 15년, 대부분의 언론사 노동조합들은 강력한 공정보도규약과 단체협약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성과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IMF와 함께 찾아온 '자사이기주의'와 연봉제의 공격 등을 거치며 약화되어온 노동조합의 위치, 이에 따른 노자간 역관계의 후퇴 때문이다.
이렇게 그간 밀려오기만 했던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사업장·산업별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상반기 내세웠던 언론개혁 5대 요구를 각 단위사업장 임단협과 연계해 대중운동화하는 계획이 제출되어야 하며, '지르기'와 '양보교섭'으로 몇몇 조항을 따오는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노조의 결속력과 투쟁력 약화를 불러왔던 교섭 관성을 버려야 한다. '사문화되고 화석화된 공정보도조항'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실질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대정부투쟁에 있어서도 좀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현하의 언론개혁투쟁은 결국 이데올로기 싸움이다. 지면을 사유화하고 자본의 이익을 덧칠하기 바빴던 모든 보수언론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투쟁은 시쳇말로 '한 놈만 찍어패는' 전술일 뿐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중의 목소리가 한 줄 나지 않는 보도현상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어야 하며, 나아가 정치놀음과 여론왜곡에 여념이 없는 이데올로기 장치인 '신문'과 '방송'을 혁신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진보진영은 언론개혁투쟁이 언론사주 구속에서 머물지 않도록, 조선일보 구독거부에서 멈추지 않도록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답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다수파가 길을 제시해야 한다.
세인의 지탄을 받고 있는 조선일보. 역사의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문장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주장했던 글로 잡문을 마무리해보자.
"언제나 투쟁이란 다수자가 승리를 얻는 것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점한 무산계급의 단결된 조직만 완성하면 최후 승리는 다반사일 것이다."(조선일보 1924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