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Sonata No.23 Op.57 "열정"
베토벤(1770-1827)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소위,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열었다는 세간의 평가(이것은 매우 정치적이며, 논란이다)는 젖혀놓더라도, 그가 인류에게 안겨준 것이 천상의 울림이 아니라 지상의 울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전까지 창작은 분명 신의 영역이었으며, 인간에게는 기술의 습득과 구현의 과제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그에게서 혁명(프랑스 혁명)의 보편성과 예술혼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맥락이기도 하다.
그의 소나타가 전시대(특히, 하이든)에 비해 미증유의 변화가 보이는 곳이 있다면, 한 동기에 의해 곡 전체의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모순적인 두 개의 주제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전개부가 무한하게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모순의 대립, 갈등, 응축, 폭발...... 이 작품에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제한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곡 전반에 흐르고 있는 세잇단 리듬의 동기는 다음의 동기와 긴장감을 끊임없이 이끌어 가고 있고, 전개부의 격렬함과 악기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극한에의 추구는 두 주제간의 격렬한 대립을 넘어, 이상(작가)과 현실(피아니스트)의 대결까지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비극적 결과(치욕은 더욱 치욕적으로)에 대해 말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1915~1997), 에밀 길레스(1916~1984)는 다같이 소련의 피아니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교사인 겐리프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의 제자이다. 길레스가 소위 정통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친 피아니스트라면, 리히터는 네이가우스의 제자가 되기 전(20살) 까지 거의 독학으로 기량을 쌓아온 사람이다. 같이 수학한 사이이면서도 둘의 연주와 해석은 매우 다른데, 이 작품에서 둘의 차이는 보다 현격하다.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녹음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 1972년 길레스의 연주는 음의 구축미를 보다 진지하고 안정되게 구현하고 있으며, 1959년 리히터의 연주는 음의 충돌과 대립을 보다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길레스가 작품을 보다 관조적이게 한다면, 리히터에게 있어 작품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마지막 종지가 울리고 난 뒤다. 특히, 리히터의 3악장에서는 상황을 가늠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에 능수 능란한 기술자들인지, 예술가인지는 분명 논란의 대상이다. 그것은 텍스트로서의 음악(악보)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논쟁만큼이나 길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서방세계에 소개될 때는 다분히 체제 경쟁적이었는데, 이들은 엄청난 생산력(기교)을 보유하고 있는 기술자(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평화공존과 문화예술의 교류, 이념을 초월하는 예술, 고급예술 혹은 순수예술, 이 거창한 담론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음악은 조금 더 섬세한 기술이라는 사실밖에 없다. 그리고, 리히터와 길레스가 연주한 “열정”은 이를 충분히 비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소위,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열었다는 세간의 평가(이것은 매우 정치적이며, 논란이다)는 젖혀놓더라도, 그가 인류에게 안겨준 것이 천상의 울림이 아니라 지상의 울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전까지 창작은 분명 신의 영역이었으며, 인간에게는 기술의 습득과 구현의 과제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그에게서 혁명(프랑스 혁명)의 보편성과 예술혼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맥락이기도 하다.
그의 소나타가 전시대(특히, 하이든)에 비해 미증유의 변화가 보이는 곳이 있다면, 한 동기에 의해 곡 전체의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모순적인 두 개의 주제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전개부가 무한하게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모순의 대립, 갈등, 응축, 폭발...... 이 작품에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제한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곡 전반에 흐르고 있는 세잇단 리듬의 동기는 다음의 동기와 긴장감을 끊임없이 이끌어 가고 있고, 전개부의 격렬함과 악기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극한에의 추구는 두 주제간의 격렬한 대립을 넘어, 이상(작가)과 현실(피아니스트)의 대결까지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비극적 결과(치욕은 더욱 치욕적으로)에 대해 말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1915~1997), 에밀 길레스(1916~1984)는 다같이 소련의 피아니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교사인 겐리프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의 제자이다. 길레스가 소위 정통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친 피아니스트라면, 리히터는 네이가우스의 제자가 되기 전(20살) 까지 거의 독학으로 기량을 쌓아온 사람이다. 같이 수학한 사이이면서도 둘의 연주와 해석은 매우 다른데, 이 작품에서 둘의 차이는 보다 현격하다.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녹음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 1972년 길레스의 연주는 음의 구축미를 보다 진지하고 안정되게 구현하고 있으며, 1959년 리히터의 연주는 음의 충돌과 대립을 보다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길레스가 작품을 보다 관조적이게 한다면, 리히터에게 있어 작품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마지막 종지가 울리고 난 뒤다. 특히, 리히터의 3악장에서는 상황을 가늠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에 능수 능란한 기술자들인지, 예술가인지는 분명 논란의 대상이다. 그것은 텍스트로서의 음악(악보)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논쟁만큼이나 길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서방세계에 소개될 때는 다분히 체제 경쟁적이었는데, 이들은 엄청난 생산력(기교)을 보유하고 있는 기술자(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평화공존과 문화예술의 교류, 이념을 초월하는 예술, 고급예술 혹은 순수예술, 이 거창한 담론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음악은 조금 더 섬세한 기술이라는 사실밖에 없다. 그리고, 리히터와 길레스가 연주한 “열정”은 이를 충분히 비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