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봉기 (2)
번역: 김용현 (정책부장, 한반도위원회)
본 기관지 4월호(통권 14호)부터 연재되어온 “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은 이번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기획의 의도는 몇 가지 사건 혹은 쟁점을 중심으로 중동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필자의 능력의 한계가 가장 컷을 것입니다. 또한 지난 9․11 사건과 관련한 ‘시의적절한’ 글쓰기 때문에 기획의도와 벗어난 글들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중동의 석유문제나 중동의 지역․국가 간 갈등과 관련한 정치지형, 그리고 중동 내 소수민족(대표적으로 쿠르드족)문제 등을 다루지 못하였습니다. 아쉽지만 연재를 마치고 필자의 ‘내공’을 보다 증진하여 새로운 기획으로 독자들을 다시 만날 훗날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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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동양화(orientalisation)
아마도 아랍 세계에 관한 최근의 문헌들이,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영구적이고 해로운 유산들로, 유럽의 교육 및 유럽의 문화적 지배를 지적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연구들에서 나타나는 탁월한 성과일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 Said)의 ꡔ오리엔탈리즘ꡕ(Orientalism)과 이것의 속편인 ꡔ문화와 제국주의ꡕ(Culture and Imperialism), 이 선구적인 두 저서는 제국주의를 문화적 권력의 측면에서 재정의하고 있다. 그는 푸코의 ‘담론’(discourse)이라는 분석틀을 취하여, 오리엔탈리즘을 권력과 지식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담론으로 분석한다. 19세기 및 20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권력은 동양에 대한 지식을 끌어왔는데, 이는 동양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그리하여 동양(the Orient)을 (사회학적으로, 군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가상적으로)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유럽의 문화가 자신을 동양에 비해 우월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힘과 동일성(정체성, identity)을 갖게되는 동안, 동양은 말 그대로 ‘동양화’(orientalised)되었다.
식민지 교육정책은 이러한 동양화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얀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외국의 지배자들은 어떠한 예외 없이, 특별한 목적과 집요함으로 가능한 한 [무슬림들에게] 어떠한 교육도 제공하려 하지 않았으며(만약에 교육을 제공했다 해도 그건 잘못된 종류의 것이었다), 또한 무슬림 공동체 정신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G. H. Jansen, Militant Islam (London: Penguin, 1978), note 7, p. 68.
은근히 무시하는 것[즉, 어떠한 대책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상책]을 통해 지역의 교육체계는 파괴되거나 혹은 붕괴되었는데, 이 와중에 유럽의 언어와 교육과정을 이용하는 새로운 학교를 도입하였다. 새로운 종류의 지식엘리트들을 선택하고 육성하여 ‘이슬람 연구’나 ‘동양 연구‘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유학을 보냈다. 이들은 그곳에서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것을 배웠다. 얀센은 1995년까지 이슬람에 관한 책들 중 95%를 서양의 학자들이 썼다 라는 흥미로운 통계를 제시한다. G. H. Jansen, ibid., p.75.
아직도 식민주의적으로 제시된 독단적인 국가형성의 과정은 이러한 토착 엘리트들―자신의 세계를 유럽의 시각을 통해 보게 될―을 교육하는 의식적인 정책과 결합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간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주의자들과 신원리주의자들(neo-fundamentalist)간의 깊은 간극을 점차 벌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든 운동들은 또한 공통의 기원을 가졌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러한 모든 집단들을 ‘이슬람주의자들’로 분류하거나, 혹은 ‘정치적 이슬람’의 표상으로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버 로이(Oliver Roy)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학적이고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근대 세계의 산물이며, 더욱 정확하게는 서양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체계에서 그들의 종속적인 지위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이슬람주의 운동은 제3세계주의 운동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은 자신의 운동을 명백히 사회․정치적 기획으로 여기고 있으며,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정의되는 이슬람에 기초를 두었다. O. Roy, The Failure of Political Islam (London: I. B. Tauris, 1995) p. 3.
그러나 (상이한 방식으로 그리고 세속화[정교분리]에 대한 상이한 강조들을 갖는) 근대화론자들은 이슬람 사상과 제도들을 유럽인들이 제시한 새로운 질서/요구(order)(주로 국가간 체계와 발전주의의 ‘질서/요구’)에 맞추기 위해 개혁 혹은 합리화하려 하였고, 개혁론자들은 서양 모델을 이슬람화하려 하였고, 근대성과 이슬람의 종합(synthesis)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반면에 신원리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은 서양 문화의 사악한 영향이라는 문제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서양의 모델을 거부하며, 그것과의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 대신, 성전(聖典)과 (선택된 그리고 신성한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진정한 신도에게만 해당되는) 복식(複式), 신체언어[몸짓, 표정 따위 의사 소통의 수단](body language), 사회적 풍습들, 그리고 여성의 지위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는 생활양식의 복원을 모색하였다. 로이가 말한 것처럼, ‘신원리주의는 공적 공간이 가족과 사원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수반한다.’ O. Roy, ibid., p. 83. 이와 유사한 분류로는, G. H. Jansen, op. cit., note 7, p. 134.
독립 이후, 신식민주의 시기 동안, 근대화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급진적인 개혁주의자 및 신원리주의자들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외부적이자 내부적이다: 즉, 근대화론자들의 종속적 발전 프로젝트가 서방의 지속적이며 분열적인(divisive) 개입(석유에 대한 전략적 이익의 추구 및 냉전을 이용한 정당화)에 의하여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대화론자는 물질적 이득이나 응집력 있는 의미체계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종속적 발전의 실패
욤 기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1973.10-1974.1]의 패배와 뒤따른 경제위기는 독립 이후,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의 보증수표였던 범아랍 통일이라는 깨지기 쉬운 시도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모든 아랍 민족주의가 보다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 선회해야 했고 그 지도력을 상실하여 미국 및 IMF/세계은행의 출자자들(donors)과 원조제공자들(aid givers)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자신의 대중들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짐에 따라, 그들은 군사력과 그들의 서양 ‘주인들(masters)’에게서의 또 다른 동냥(handout)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석유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국가들의 보수적 정체들은 미국과 서양의 지리 전략적 이익들에 점점 연루되었다. 이란에서 쉬아파의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혁명을 쉬아주의 및 이란민족주의와 상당부분 동일하게 간주하게 만든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보수적인 아랍국가들은 자신의 영토 밖에서 상승하고 있던 이슬람 혁명의 기세(momentum)를 꺾기 위해 순니파 원리주의자들[이라크]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분열에 뒤이어] 이라크에 대항해 보수적 아랍국가들과 서양이 연합했던 걸프전은 아랍세계에 더욱 큰 혼란을 주었다.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나게 한 지정학적 동학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신원리주의적(neo-fundamentalist) 이슬람이 등장한 동인들(forces)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 채택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체계에서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반주변부나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끊임없는 고도의 발전과정에 있으며, 매우 복합적인 통합형태들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각 부분들간의 관계들의 교체,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과 관련된 공식적인 정치조직들의 파괴와 재건을 강제한다.
2차 세계전쟁 이후, 그리고 세계질서의 양극화라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계의 주변부내에서 탈식민지화(decolonisation)의 과정과 주권국가들 다수의 창출은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봉사했던 공식적인 정치조직들의 ‘적절한’(appropriate) 재건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불가피하게도, 주변부 국가들에게 민족적 발전과 해방의 기회들을 제공하였고, 민족적 이익을 위해 초강대국들을 속이는 법을 알게 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후세인과 그의 바아쓰당은 그러한 기회를 활용하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이러한 과업을 위해 후세인이 취했던 방식을 결코 선호할 수 없고, 강력한 군사력의 확보, 산업의 향상과 사회적으로 훌륭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반된 파쇼적인 야만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할지라도, 우리는 [후세인에 의해] 민족 경제와 사회적 과정들이 만들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 도덕적이고도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인 민주화를 향한 내부적 진전을 가로막고 대신, 외부로의 공격으로 나아간 이러한 잔악 무도한 지도력을 추진하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서는 비난하는 것도 봐주는 것도 아닌, 구조적 분석은 그 지역에서 중심-주변과 반주변부 관계들의 전체적인 망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제시한다. 그 망은 세계적인 자본주의적 통합의 효과와 양극화된 세계질서의 붕괴 양자의 결합에 의해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관계들의 구조는 무엇이며 왜 그 구조의 위기가 일어났는가?
물론 중심부는 중동에서 석유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다. 석유에 접근하기 위해서, 과거에는 이 지역의 봉건영주들, 왕, 혹은 이슬람 지도자들과 석유채취의 이권의 협상을 위해 제국주의적 중심부 국가들의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았던 석유회사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왔다. 현재 어떤 국가가 노동력이나 소비시장에서 보다는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에 이익을 얻고 있다면, 그의 이윤전략은 민주적 체제보다는 독재적 체제를 선호한다. 석유와 독재는 공존한다.
같은 이유들로 분할지배 전략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산유국들의 인구의 불균등교환이다. 석유가 풍부하고 인구가 적은 국가는 큰 국가에 비해 [분배에 대한] 요구가 덜하다. 1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오토만 제국이 붕괴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의해 인위적으로 불균등한 국가 구획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만 지역에는 부유한 6개국(페르시아만협력회의(GCC)로 결합되어 있는)이 있다. 이들 6개국의 총인구는 1천만 명 정도이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인구는 약 2억에 달한다. 이스라엘에 의해 자신의 땅을 잃고 쉴 곳 없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문제를 그럭저럭 잘 처리해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6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다.
1973년 산유국들에서 카르텔 형식의 반란(rebellion)을 조직한 결과, 결국 석유가격이 상승하자, 이 지역에서 주변부와 반주변부 국가 간의 연관들(links) 그리고 이들과 중심부와의 연관들은 더욱 복합적이게 되었다. 이제 무기 거래 및 금융 그리고 석유는 이해관계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하였고, 중심부와 [부유한] 작은 국가의 지배자의 이익이 결합되었다. 이것이 세계 자본주의 체계로의 발전적 통합의 특징이다.
서양이 중동에 석유 값으로 100달러를 지불할 때마다, 40달러가 무기 거래를 통해 회수되며, 대략 나머지 40달러는 중심부 국가들의 금융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은행으로 회수되는 것이다. 노암 촘스키는 걸프전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유행하던 농담을 통해 이 점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왜 미국과 쿠웨이트는 서로를 원하는가? 정답: 쿠웨이트는 국가가 없는 금융시스템이기 때문이고 미국은 금융시스템이 없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P. Aarts, 'Democracy, Oil and the Gulf War', Third World Quaterly 13 (3) (1992) p. 527에서 재인용.
서양에서 투자된 오일달러의 정확한 총계에 비밀의 막(幕, blanket)이 씌어질 동안, 미국에 대한 페르시아만 지역의 국가들의 투자액은 1조 달러에 달했다. 1989년 쿠웨이트는 국내의 석유 생산에 비해 자본주의적 거대도시들에 광범한 해외투자를 해서 보다 많은 수입을 얻었다(전자의 수입은 7백 7십 억 달러였고, 후자의 수입은 8백 8십억 달러였다). S. Bromely, American Hegemony and World Oil: The Industry, the State System and the World Economy (Oxford: Polity Press, 1991) p. 250.
서양 자본주의 체계와 연관된 제 3세계의 ’근대화된‘ ’개혁주의‘ 무슬림 엘리트들의 혼재는 점차 자신들과 (그들이 지배하고 ’착취‘하고 있는) 국민 대다수간의 간극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의 등장은 대중적․반제국주의적 저항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 전통에서 고유한 두 가지의 특징들 즉, 영적 부흥의 전통과 (신앙공동체로서) '움마'(umma)라는 개념은 신원리주의에 활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들이 만약 실천적인 개념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원칙적인 개념일 수 있다: 부흥운동에서 통치 엘리트들 및 ’착취자들‘의 개조와 재흡수는 전세계적인 이슬람 공동체의 우위를 꾀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내부의 민족주의적 혹은 심지어 초민족주의적(범아랍주의와 같은) 요구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화의 탈민족화 동력들과 역사적으로 부합하게 만든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1980년 대 이래 서양이 우려했던 것은 점차 순니파의 영역에서 원리주의적 이슬람 해석이 대중적 힘이자, 반서양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진짜 힘은 그들의 평화적이며, 공동체에 근거한 활동에서 비롯하였다. 이른바 무슬림형제당(The Muslim Brotherhoods)은 세속적인 정권이 거부한 수천의 인민들에게 복지, 보건 그리고 교육과 같은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이슬람 지식인의 등장과 반(反)발전주의(anti-developmentalism) 정치학
독립 이후 주권의 외피가 주어지면서, 근대화/서구화된 지배세력들은 사회적․경제적 발전의 과업에 착수하였다. 브롬리가 언급했듯이, 이들이 자본주의적 모델 혹은 사회주의적 모델을 채택했던지 간에, 사회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본 [그 모델들의] 결과들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첫째, 국가 전체가 잉여가치 전유(appropriation)의 공간이 되었다. 수입의 원천은 국제적인 석유독점체들의 보호를 받아 수출한 석유였다. 그 국가들은 ‘금리국가’(rentier-state)가 되어갔지만, 석유 자원이 부재한 국가의 민족주의적 엘리트들―마치 이집트, 이라크 그리고 수단에서처럼―은 내부자원의 이동에 대한 어느 정도 완벽한 통제권―완전한 사유재산 통제는 아니었을지라도―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다. 중요한 점은 두 경우 모두 지배와 잉여가치 전유의 제도들의 분리를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롬리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곳에서 민주적 참여를 위한 조건들의 부재로 귀결되었다. S. Bromely, ‘The prospects for Democracy in the Middle East', in D. Held (ed.), Prospects for Democracy (Oxford: Polity Press, 1993) pp. 380-406.
둘째, 인구가 많고, 수입대체전략을 취한, 비산유국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사하게) 외채의 증가라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반대로, 산유국들은 인구가 적고 그들의 필요 이상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사실상 엄청난 석유 보유는 자국내의 인민들의 기술과 능력[즉,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산유국들은 자신의 돈을 서양의 국가에 투자하였고, [비산유] 아랍국가와 인도와 같은 하위지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였으며, [이주노동자와 같은] 이른바 ‘2차 계급’의 인클레이브(飛地)를 창출하여, 비시민들(non-citizens)의 시민권마저 박탈하였다. 확실한 해결책은 지역경제의 통합의 몇몇 형태였고, 한동안 범아랍 민족주의는 전후시기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양은, 특히 미국과 그의 교두보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아랍의] 지역적 연대를 분할하고 붕괴시키려고 하였다.
신식민지 시기 동안 종속적 발전의 세번째 특징적인 결과는, 급격한 인구증가를 동반하는 도시화 과정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로의 종속적 통합은 농업의 포기, 도시와 농촌간의 이주, 매우 높은 실업률과 도시거주자들의 불안정 고용 등을 양산했다. 이러한 이슬람주의의 사회적 위치 변동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변동을 발생시켰다. 이슬람주의를 추종하는 오늘날의 대중은 ‘전통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근대 도시의 가치들―소비자주의와 상승된 사회적 이동성과 같은―과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올 때, 그들은 오래된 유흥의 형태들, 어른 및 합의(consensus)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들]을 버리고 온 것이다. […] 그들은 거대 도시들의 쇼윈도(show-window)에 포함된 소비자주의의 가치들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영화 극장, 까페, 청바지, 비디오 그리고 스포츠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거나 실업상태로 이주자들의 게토에서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취하기 어려운 소비자주의 세계의 그 고유한 좌절을 겪으면서 말이다. […] 그들의 군사적인 행동은 그들의 [그러한 환경의] 도시에서 영유하는 공동생활에서 기인한다: 즉, 아프가니스탄과 쿠르디스탄을 제외하면, 모든 현대 무슬림 게릴라들은 도시거주자들이다. Oliver Roy, op. cit., note30, p. 4.
신식민지 시기 동안 종속적 발전의 네번째 사회 구조적 특징은 서양의 교육방식에 따라 설립된 국립학교에서 교육받은 개인들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의 등장이다. 로이는 이러한 지식인계급을 다양한 명칭, 즉 ‘룸펜 지식인들’, ‘이슬람주의적 신지식인들’ 혹은 ‘신원리주의자들’로 분류한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심지어 대학교육까지 마친) 젊은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기대나 전망에 부응하는 지위나 직업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그 국가의 자본주의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국가 행정부문이나 산업부문에서, 또한 (종교학교 또한 가치절하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회적 망에서도, 대학들 또한 포화상태이자 사회적 지위를 상당부분 잃었기 때문에 근대 대학들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교육받은 무슬림들의 세계는 기대했던 어떠한 (상징적이든 현실적으로든)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였다. ibid., p. 93.
올리버 로이는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독특한 그리고 도발적인 분석에서, 현대 신원리주의 그룹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룸펜 지식인들의 사회적 기초 및 정치적 계획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철저히 해부한다. 이 작업을 통해, 로이는 신원리주의가 새로운 세력으로 국제관계 통합될 수 있다는, 혹은 실제로는 그들을 서양에 대한 위협으로 가정하는 이론의 신화를 폭로한다.
로이에 따르면, 룸펜 지식인들은 종교학자들(울라마(ulema), 즉 상위 이슬람 학자들)과 구별되고, 그들과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상위 이슬람 학자들과 달리, 그들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지식에 대한 [인민의] 관계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ibid., pp. 98-99.
동시에 그들은 서양의[서양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의 지적체계와 제도적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로이는 새로운 지식인들의 ‘개념적’ 공간의 배열과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간의 직접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새로운 지식인은 ‘스스로 선언한’ 이슬람 법학자로서 혹은 전사로서 도시 빈민들에게 설교한다. 그는 아직 국가에 의해 사회화되지 않은 만남의 집이나, 예배소, 교육센터 그리고 새로운 교외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다. 서양화된 전문가들과 통치계급이자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성직자, 이 양자를 거부하고 그 외부에 위치한다. 그의 개념적 장치는 양자의 주변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반영한다.
독립 이후 시기의 급진적 또는 ‘정치적’ 이슬람이 신원리주의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실패한 근대주의에 의한 버림받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그들을 존재하지 않았던 이슬람 권위로의 복귀라는 신화를 중심으로 동원하였다. 그러한 이슬람주의는, 로이가 결론짓듯이, 지리 전략적인 요인이 결코 아니었다; 즉, 그것은 무슬림 세계를 통일하지도 않았으며 중동에서의 세력균형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권력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슬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던 고전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을 오히려 무함마드의 민족적 모델을 실현하고자 공허한 무대(empty stage)로 끌고 나오는 것이다. ibid., p. 196.
공허한 무대는 바로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시민사회이다. 공식적으로 세속적이고 근대화된 체제를 이슬람화 하는 것은 민법과 형법을 겨냥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경제 형태와 정치적 모델을 이슬람화 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과정에서, 아랍의 기업 엘리트들과 통치계급들은 아마도 상호경쟁하고, 부패할 것이고, 세계체계로 통합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 문화적 저항운동 및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되지 못한 청년세대의 좌절로부터 발생한 신원리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무슬림 사회들의 근대화 과정의 추진으로부터 배제되고 그것에 의해 생산된 이러한 사회적 부문들을 적응시키는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다.
본 기관지 4월호(통권 14호)부터 연재되어온 “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은 이번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기획의 의도는 몇 가지 사건 혹은 쟁점을 중심으로 중동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필자의 능력의 한계가 가장 컷을 것입니다. 또한 지난 9․11 사건과 관련한 ‘시의적절한’ 글쓰기 때문에 기획의도와 벗어난 글들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중동의 석유문제나 중동의 지역․국가 간 갈등과 관련한 정치지형, 그리고 중동 내 소수민족(대표적으로 쿠르드족)문제 등을 다루지 못하였습니다. 아쉽지만 연재를 마치고 필자의 ‘내공’을 보다 증진하여 새로운 기획으로 독자들을 다시 만날 훗날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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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동양화(orientalisation)
아마도 아랍 세계에 관한 최근의 문헌들이,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영구적이고 해로운 유산들로, 유럽의 교육 및 유럽의 문화적 지배를 지적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연구들에서 나타나는 탁월한 성과일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 Said)의 ꡔ오리엔탈리즘ꡕ(Orientalism)과 이것의 속편인 ꡔ문화와 제국주의ꡕ(Culture and Imperialism), 이 선구적인 두 저서는 제국주의를 문화적 권력의 측면에서 재정의하고 있다. 그는 푸코의 ‘담론’(discourse)이라는 분석틀을 취하여, 오리엔탈리즘을 권력과 지식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담론으로 분석한다. 19세기 및 20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권력은 동양에 대한 지식을 끌어왔는데, 이는 동양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그리하여 동양(the Orient)을 (사회학적으로, 군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가상적으로)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유럽의 문화가 자신을 동양에 비해 우월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힘과 동일성(정체성, identity)을 갖게되는 동안, 동양은 말 그대로 ‘동양화’(orientalised)되었다.
식민지 교육정책은 이러한 동양화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얀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외국의 지배자들은 어떠한 예외 없이, 특별한 목적과 집요함으로 가능한 한 [무슬림들에게] 어떠한 교육도 제공하려 하지 않았으며(만약에 교육을 제공했다 해도 그건 잘못된 종류의 것이었다), 또한 무슬림 공동체 정신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G. H. Jansen, Militant Islam (London: Penguin, 1978), note 7, p. 68.
은근히 무시하는 것[즉, 어떠한 대책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상책]을 통해 지역의 교육체계는 파괴되거나 혹은 붕괴되었는데, 이 와중에 유럽의 언어와 교육과정을 이용하는 새로운 학교를 도입하였다. 새로운 종류의 지식엘리트들을 선택하고 육성하여 ‘이슬람 연구’나 ‘동양 연구‘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유학을 보냈다. 이들은 그곳에서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것을 배웠다. 얀센은 1995년까지 이슬람에 관한 책들 중 95%를 서양의 학자들이 썼다 라는 흥미로운 통계를 제시한다. G. H. Jansen, ibid., p.75.
아직도 식민주의적으로 제시된 독단적인 국가형성의 과정은 이러한 토착 엘리트들―자신의 세계를 유럽의 시각을 통해 보게 될―을 교육하는 의식적인 정책과 결합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간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주의자들과 신원리주의자들(neo-fundamentalist)간의 깊은 간극을 점차 벌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든 운동들은 또한 공통의 기원을 가졌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러한 모든 집단들을 ‘이슬람주의자들’로 분류하거나, 혹은 ‘정치적 이슬람’의 표상으로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버 로이(Oliver Roy)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학적이고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근대 세계의 산물이며, 더욱 정확하게는 서양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체계에서 그들의 종속적인 지위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이슬람주의 운동은 제3세계주의 운동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은 자신의 운동을 명백히 사회․정치적 기획으로 여기고 있으며,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정의되는 이슬람에 기초를 두었다. O. Roy, The Failure of Political Islam (London: I. B. Tauris, 1995) p. 3.
그러나 (상이한 방식으로 그리고 세속화[정교분리]에 대한 상이한 강조들을 갖는) 근대화론자들은 이슬람 사상과 제도들을 유럽인들이 제시한 새로운 질서/요구(order)(주로 국가간 체계와 발전주의의 ‘질서/요구’)에 맞추기 위해 개혁 혹은 합리화하려 하였고, 개혁론자들은 서양 모델을 이슬람화하려 하였고, 근대성과 이슬람의 종합(synthesis)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반면에 신원리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은 서양 문화의 사악한 영향이라는 문제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서양의 모델을 거부하며, 그것과의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 대신, 성전(聖典)과 (선택된 그리고 신성한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진정한 신도에게만 해당되는) 복식(複式), 신체언어[몸짓, 표정 따위 의사 소통의 수단](body language), 사회적 풍습들, 그리고 여성의 지위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는 생활양식의 복원을 모색하였다. 로이가 말한 것처럼, ‘신원리주의는 공적 공간이 가족과 사원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수반한다.’ O. Roy, ibid., p. 83. 이와 유사한 분류로는, G. H. Jansen, op. cit., note 7, p. 134.
독립 이후, 신식민주의 시기 동안, 근대화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급진적인 개혁주의자 및 신원리주의자들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외부적이자 내부적이다: 즉, 근대화론자들의 종속적 발전 프로젝트가 서방의 지속적이며 분열적인(divisive) 개입(석유에 대한 전략적 이익의 추구 및 냉전을 이용한 정당화)에 의하여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대화론자는 물질적 이득이나 응집력 있는 의미체계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종속적 발전의 실패
욤 기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1973.10-1974.1]의 패배와 뒤따른 경제위기는 독립 이후,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의 보증수표였던 범아랍 통일이라는 깨지기 쉬운 시도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모든 아랍 민족주의가 보다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 선회해야 했고 그 지도력을 상실하여 미국 및 IMF/세계은행의 출자자들(donors)과 원조제공자들(aid givers)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자신의 대중들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짐에 따라, 그들은 군사력과 그들의 서양 ‘주인들(masters)’에게서의 또 다른 동냥(handout)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석유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국가들의 보수적 정체들은 미국과 서양의 지리 전략적 이익들에 점점 연루되었다. 이란에서 쉬아파의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혁명을 쉬아주의 및 이란민족주의와 상당부분 동일하게 간주하게 만든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보수적인 아랍국가들은 자신의 영토 밖에서 상승하고 있던 이슬람 혁명의 기세(momentum)를 꺾기 위해 순니파 원리주의자들[이라크]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분열에 뒤이어] 이라크에 대항해 보수적 아랍국가들과 서양이 연합했던 걸프전은 아랍세계에 더욱 큰 혼란을 주었다.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나게 한 지정학적 동학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신원리주의적(neo-fundamentalist) 이슬람이 등장한 동인들(forces)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 채택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체계에서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반주변부나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끊임없는 고도의 발전과정에 있으며, 매우 복합적인 통합형태들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각 부분들간의 관계들의 교체,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과 관련된 공식적인 정치조직들의 파괴와 재건을 강제한다.
2차 세계전쟁 이후, 그리고 세계질서의 양극화라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계의 주변부내에서 탈식민지화(decolonisation)의 과정과 주권국가들 다수의 창출은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봉사했던 공식적인 정치조직들의 ‘적절한’(appropriate) 재건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불가피하게도, 주변부 국가들에게 민족적 발전과 해방의 기회들을 제공하였고, 민족적 이익을 위해 초강대국들을 속이는 법을 알게 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후세인과 그의 바아쓰당은 그러한 기회를 활용하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이러한 과업을 위해 후세인이 취했던 방식을 결코 선호할 수 없고, 강력한 군사력의 확보, 산업의 향상과 사회적으로 훌륭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반된 파쇼적인 야만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할지라도, 우리는 [후세인에 의해] 민족 경제와 사회적 과정들이 만들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 도덕적이고도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인 민주화를 향한 내부적 진전을 가로막고 대신, 외부로의 공격으로 나아간 이러한 잔악 무도한 지도력을 추진하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서는 비난하는 것도 봐주는 것도 아닌, 구조적 분석은 그 지역에서 중심-주변과 반주변부 관계들의 전체적인 망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제시한다. 그 망은 세계적인 자본주의적 통합의 효과와 양극화된 세계질서의 붕괴 양자의 결합에 의해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관계들의 구조는 무엇이며 왜 그 구조의 위기가 일어났는가?
물론 중심부는 중동에서 석유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다. 석유에 접근하기 위해서, 과거에는 이 지역의 봉건영주들, 왕, 혹은 이슬람 지도자들과 석유채취의 이권의 협상을 위해 제국주의적 중심부 국가들의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았던 석유회사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왔다. 현재 어떤 국가가 노동력이나 소비시장에서 보다는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에 이익을 얻고 있다면, 그의 이윤전략은 민주적 체제보다는 독재적 체제를 선호한다. 석유와 독재는 공존한다.
같은 이유들로 분할지배 전략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산유국들의 인구의 불균등교환이다. 석유가 풍부하고 인구가 적은 국가는 큰 국가에 비해 [분배에 대한] 요구가 덜하다. 1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오토만 제국이 붕괴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의해 인위적으로 불균등한 국가 구획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만 지역에는 부유한 6개국(페르시아만협력회의(GCC)로 결합되어 있는)이 있다. 이들 6개국의 총인구는 1천만 명 정도이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인구는 약 2억에 달한다. 이스라엘에 의해 자신의 땅을 잃고 쉴 곳 없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문제를 그럭저럭 잘 처리해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6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다.
1973년 산유국들에서 카르텔 형식의 반란(rebellion)을 조직한 결과, 결국 석유가격이 상승하자, 이 지역에서 주변부와 반주변부 국가 간의 연관들(links) 그리고 이들과 중심부와의 연관들은 더욱 복합적이게 되었다. 이제 무기 거래 및 금융 그리고 석유는 이해관계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하였고, 중심부와 [부유한] 작은 국가의 지배자의 이익이 결합되었다. 이것이 세계 자본주의 체계로의 발전적 통합의 특징이다.
서양이 중동에 석유 값으로 100달러를 지불할 때마다, 40달러가 무기 거래를 통해 회수되며, 대략 나머지 40달러는 중심부 국가들의 금융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은행으로 회수되는 것이다. 노암 촘스키는 걸프전 당시 월스트리트에서 유행하던 농담을 통해 이 점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왜 미국과 쿠웨이트는 서로를 원하는가? 정답: 쿠웨이트는 국가가 없는 금융시스템이기 때문이고 미국은 금융시스템이 없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P. Aarts, 'Democracy, Oil and the Gulf War', Third World Quaterly 13 (3) (1992) p. 527에서 재인용.
서양에서 투자된 오일달러의 정확한 총계에 비밀의 막(幕, blanket)이 씌어질 동안, 미국에 대한 페르시아만 지역의 국가들의 투자액은 1조 달러에 달했다. 1989년 쿠웨이트는 국내의 석유 생산에 비해 자본주의적 거대도시들에 광범한 해외투자를 해서 보다 많은 수입을 얻었다(전자의 수입은 7백 7십 억 달러였고, 후자의 수입은 8백 8십억 달러였다). S. Bromely, American Hegemony and World Oil: The Industry, the State System and the World Economy (Oxford: Polity Press, 1991) p. 250.
서양 자본주의 체계와 연관된 제 3세계의 ’근대화된‘ ’개혁주의‘ 무슬림 엘리트들의 혼재는 점차 자신들과 (그들이 지배하고 ’착취‘하고 있는) 국민 대다수간의 간극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의 등장은 대중적․반제국주의적 저항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 전통에서 고유한 두 가지의 특징들 즉, 영적 부흥의 전통과 (신앙공동체로서) '움마'(umma)라는 개념은 신원리주의에 활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들이 만약 실천적인 개념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원칙적인 개념일 수 있다: 부흥운동에서 통치 엘리트들 및 ’착취자들‘의 개조와 재흡수는 전세계적인 이슬람 공동체의 우위를 꾀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내부의 민족주의적 혹은 심지어 초민족주의적(범아랍주의와 같은) 요구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화의 탈민족화 동력들과 역사적으로 부합하게 만든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1980년 대 이래 서양이 우려했던 것은 점차 순니파의 영역에서 원리주의적 이슬람 해석이 대중적 힘이자, 반서양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신원리주의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진짜 힘은 그들의 평화적이며, 공동체에 근거한 활동에서 비롯하였다. 이른바 무슬림형제당(The Muslim Brotherhoods)은 세속적인 정권이 거부한 수천의 인민들에게 복지, 보건 그리고 교육과 같은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이슬람 지식인의 등장과 반(反)발전주의(anti-developmentalism) 정치학
독립 이후 주권의 외피가 주어지면서, 근대화/서구화된 지배세력들은 사회적․경제적 발전의 과업에 착수하였다. 브롬리가 언급했듯이, 이들이 자본주의적 모델 혹은 사회주의적 모델을 채택했던지 간에, 사회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본 [그 모델들의] 결과들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첫째, 국가 전체가 잉여가치 전유(appropriation)의 공간이 되었다. 수입의 원천은 국제적인 석유독점체들의 보호를 받아 수출한 석유였다. 그 국가들은 ‘금리국가’(rentier-state)가 되어갔지만, 석유 자원이 부재한 국가의 민족주의적 엘리트들―마치 이집트, 이라크 그리고 수단에서처럼―은 내부자원의 이동에 대한 어느 정도 완벽한 통제권―완전한 사유재산 통제는 아니었을지라도―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의 핵심부를 장악하였다. 중요한 점은 두 경우 모두 지배와 잉여가치 전유의 제도들의 분리를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롬리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곳에서 민주적 참여를 위한 조건들의 부재로 귀결되었다. S. Bromely, ‘The prospects for Democracy in the Middle East', in D. Held (ed.), Prospects for Democracy (Oxford: Polity Press, 1993) pp. 380-406.
둘째, 인구가 많고, 수입대체전략을 취한, 비산유국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사하게) 외채의 증가라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반대로, 산유국들은 인구가 적고 그들의 필요 이상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사실상 엄청난 석유 보유는 자국내의 인민들의 기술과 능력[즉,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산유국들은 자신의 돈을 서양의 국가에 투자하였고, [비산유] 아랍국가와 인도와 같은 하위지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였으며, [이주노동자와 같은] 이른바 ‘2차 계급’의 인클레이브(飛地)를 창출하여, 비시민들(non-citizens)의 시민권마저 박탈하였다. 확실한 해결책은 지역경제의 통합의 몇몇 형태였고, 한동안 범아랍 민족주의는 전후시기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양은, 특히 미국과 그의 교두보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아랍의] 지역적 연대를 분할하고 붕괴시키려고 하였다.
신식민지 시기 동안 종속적 발전의 세번째 특징적인 결과는, 급격한 인구증가를 동반하는 도시화 과정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로의 종속적 통합은 농업의 포기, 도시와 농촌간의 이주, 매우 높은 실업률과 도시거주자들의 불안정 고용 등을 양산했다. 이러한 이슬람주의의 사회적 위치 변동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변동을 발생시켰다. 이슬람주의를 추종하는 오늘날의 대중은 ‘전통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근대 도시의 가치들―소비자주의와 상승된 사회적 이동성과 같은―과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올 때, 그들은 오래된 유흥의 형태들, 어른 및 합의(consensus)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들]을 버리고 온 것이다. […] 그들은 거대 도시들의 쇼윈도(show-window)에 포함된 소비자주의의 가치들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영화 극장, 까페, 청바지, 비디오 그리고 스포츠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거나 실업상태로 이주자들의 게토에서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취하기 어려운 소비자주의 세계의 그 고유한 좌절을 겪으면서 말이다. […] 그들의 군사적인 행동은 그들의 [그러한 환경의] 도시에서 영유하는 공동생활에서 기인한다: 즉, 아프가니스탄과 쿠르디스탄을 제외하면, 모든 현대 무슬림 게릴라들은 도시거주자들이다. Oliver Roy, op. cit., note30, p. 4.
신식민지 시기 동안 종속적 발전의 네번째 사회 구조적 특징은 서양의 교육방식에 따라 설립된 국립학교에서 교육받은 개인들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의 등장이다. 로이는 이러한 지식인계급을 다양한 명칭, 즉 ‘룸펜 지식인들’, ‘이슬람주의적 신지식인들’ 혹은 ‘신원리주의자들’로 분류한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심지어 대학교육까지 마친) 젊은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기대나 전망에 부응하는 지위나 직업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그 국가의 자본주의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국가 행정부문이나 산업부문에서, 또한 (종교학교 또한 가치절하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회적 망에서도, 대학들 또한 포화상태이자 사회적 지위를 상당부분 잃었기 때문에 근대 대학들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교육받은 무슬림들의 세계는 기대했던 어떠한 (상징적이든 현실적으로든)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였다. ibid., p. 93.
올리버 로이는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독특한 그리고 도발적인 분석에서, 현대 신원리주의 그룹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룸펜 지식인들의 사회적 기초 및 정치적 계획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철저히 해부한다. 이 작업을 통해, 로이는 신원리주의가 새로운 세력으로 국제관계 통합될 수 있다는, 혹은 실제로는 그들을 서양에 대한 위협으로 가정하는 이론의 신화를 폭로한다.
로이에 따르면, 룸펜 지식인들은 종교학자들(울라마(ulema), 즉 상위 이슬람 학자들)과 구별되고, 그들과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상위 이슬람 학자들과 달리, 그들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지식에 대한 [인민의] 관계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ibid., pp. 98-99.
동시에 그들은 서양의[서양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의 지적체계와 제도적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로이는 새로운 지식인들의 ‘개념적’ 공간의 배열과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간의 직접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새로운 지식인은 ‘스스로 선언한’ 이슬람 법학자로서 혹은 전사로서 도시 빈민들에게 설교한다. 그는 아직 국가에 의해 사회화되지 않은 만남의 집이나, 예배소, 교육센터 그리고 새로운 교외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다. 서양화된 전문가들과 통치계급이자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성직자, 이 양자를 거부하고 그 외부에 위치한다. 그의 개념적 장치는 양자의 주변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반영한다.
독립 이후 시기의 급진적 또는 ‘정치적’ 이슬람이 신원리주의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실패한 근대주의에 의한 버림받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그들을 존재하지 않았던 이슬람 권위로의 복귀라는 신화를 중심으로 동원하였다. 그러한 이슬람주의는, 로이가 결론짓듯이, 지리 전략적인 요인이 결코 아니었다; 즉, 그것은 무슬림 세계를 통일하지도 않았으며 중동에서의 세력균형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권력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슬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던 고전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을 오히려 무함마드의 민족적 모델을 실현하고자 공허한 무대(empty stage)로 끌고 나오는 것이다. ibid., p. 196.
공허한 무대는 바로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시민사회이다. 공식적으로 세속적이고 근대화된 체제를 이슬람화 하는 것은 민법과 형법을 겨냥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경제 형태와 정치적 모델을 이슬람화 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과정에서, 아랍의 기업 엘리트들과 통치계급들은 아마도 상호경쟁하고, 부패할 것이고, 세계체계로 통합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 문화적 저항운동 및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되지 못한 청년세대의 좌절로부터 발생한 신원리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무슬림 사회들의 근대화 과정의 추진으로부터 배제되고 그것에 의해 생산된 이러한 사회적 부문들을 적응시키는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