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민중운동의 부침과 전환
번역: 노선호(정책부장)
들어가며
말레이시아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이다. 말레이시아는 서쪽에 말레이시아 반도, 동쪽에 북보르네오의 사바(Sabah)와 사라와크(Sarawak)라는 두 개의 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지역은 다른 인종과 문화, 역사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반도의 인구는 주로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오랑 아살(orang asal)이라는 원주민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말레이시아(사바와 사라와크 주)는 주로 카다잔(Kadazan)계, 이반계(Iban), 말레이계, 중국계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레이시아 반도는 1957년에 독립했으며, 사바와 사라와크 주는 1963년에 독립했다. 1963년은 말레이시아 반도와 싱가포르가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어 말레이시아 연방국이 된 해이기도 하다.(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제3세계 국가들처럼 말레이시아는 수 백년간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으며, 독립전쟁에 따르는 고통과 비참함을 감수해야 했다. 말레이시아 민중은 독립 후에도 식민지 경제종속 하에 있었으며, 다른 인종과 사회 계층들간의 내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억압이 있는 곳엔, 언제나 저항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경향이다. 과거, 사회적 억압은 대개 국가 장치와 제도를 활용해 진행해 왔다. 지배계급은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된 방식으로 억압을 행사했다. 오늘날까지도 국가권력은 제도화된 사회적 억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법에 의한 통치'를 다시 정의한다. 한편, 시민의 자유에 대한 국가 탄압이 점증하면, 고립적이고 조직되지 않았던 사회적 저항은 점자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저항운동은 30년 식민통치에 맞서 투쟁했다. 즉 영국의 식민통치, 일본의 지배, 다시 영국의 식민통치에 맞서 저항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모든 투쟁은 엄청난 희생과 강한 결단을 가진 민중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억압과 이에 맞선 저항은 점차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전개과정
1970년 전까지, 말레이시아의 저항운동은 매우 강렬하고 급진적이었다. 1970년 이후 억압적인 정치권력은 여전히 말레이시아 민중의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잔인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저항운동은 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한편, 저항운동의 오랜 역사 속에 정치정당은 투쟁의 주요한 세력으로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민족당과 같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당과 연합한 공산당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1960년대에는 말레이시아 민중당과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하는 노동당 같은 좌파 정당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전선이 저항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당시 저항운동은 노동, 농민, 학생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은 잔혹한 탄압을 받거나, 방향을 상실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970년에서 80년은 국가기구와 경제정책의 혜택을 입어 형성된 신중간계급이 강렬하고도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1980년 초반부터는 마하티르 現총리의 지지기반인 신중간계급이 기득권 층으로 등장하였고, 말레이시아의 정치, 경제 영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마하티르에 의해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급이 등장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내 여러 인종 공동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를 통제해 말레이시아를 전체적으로 유지했다. 1980년 중반 이후 신중간계급은 가장 지배적이고 주요한 계급으로 성장해왔다. 그 결과 전통적인 정치세력과 혼합된 이러한 신진 세력들은, 기업 근대화와 국가 주도의 발전 속에서 독재권력과 결합하여 국가의 성장을 독점한 국가 자본주의를 형성하였다.
1989년,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정부와의 평화 협상을 가진 후, 40년 간의 기나긴 무장투쟁에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무장투쟁의 종결은 일정하게 전통적, 정치적인 투쟁 형태와 믿음의 소멸을 가져왔다. 1990년에서 1997년까지 말레이시아 경제는 전 세계 및 동아시아 경제의 팽창으로 인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독재권력은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국가 장치를 활용하고, 역으로 국가 기구를 통제하기 위해 축적된 부를 이용함으로써, 정치와 경제에서의 지배력을 굳건히 했다. 분명히 국가의 정치경제적 권력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왔다. 좀더 구체적으로, 정치경제적 권력은 국민전선(Barisan Nasional)과 말레이시아 국가 연합(the United Malay National Organization, UMNO) 그리고 마하티르의 이해를 위해서만 봉사할 따름이었다. 1991년부터 1992년, 마하티르 체제는 왕가(王家)를 공격해, 전통적인 보수세력들을 거의 제거했다. 한편, 마하티르 체제는 반서구, 반식민지, 반제국주의의 측면을 모사(模寫)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해왔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에서 추진된 반서구 전략은 정치경제적 통제를 지속하기 위한 독재세력의 이해를 보장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반서구 전략의 결과, 마하티르는 제3세계의 영웅이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통치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1993년에서 1994년, 지배체제 내에서 스스로를 '비전세력'(Vision Team)이라 칭하면서, '새로운 말레이시아'(New Malay) 슬로건을 주창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이 비전세력의 등장은 지배세력들내에서 구세력와 신진세력간의 내부적인 경쟁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은 최근 말레이시아의 정치에 상당한 여파를 몰고 왔다.
1990년에서 1997년 동안, 말레이시아 사회는 안정, 진보, 평화, 자유로운 소비, 국가에 대한 만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회변화를 위해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반대세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강타했던 1997년 경제위기는 엄청난 정치적 파급력을 야기했다. 1997년의 경제위기로 그동안 전전긍긍하고 있던 저항 세력이 급진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저항운동의 배경
국제적으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격양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독립투쟁이후, 민중의 정치의식은 대체적으로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생활조건의 향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호소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그 결과 1965부터 1969년에는 저항운동이 절정에 다달았다. 이 절정기에는 좌파 정치 정당과 노동자, 학생에 의해 주도되는 무장 세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대중운동이 서서히 침체하면서, 저항세력이 분열되는 가운데 쇠퇴기를 맞았다. 그 결과 대중운동은 1975부터 거의 20년 간 무력해졌다. 저항운동이 이처럼 긴 세월동안 무력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지배세력의 관점에서
지배세력은 과거 대중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들의 권력지반이 심대한 위협을 받았던 경험을 통해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배세력은 내적으로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즉 시민사회의 전문가들을 채용하고,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는 정치 엘리트들을 활용했다. 지배세력은 불안정한 피지배세력들을 포섭함으로써(이전 반대정당과 대중조직을 무력화시켰다) 주변을 아우르는 가운데, 중심적인 정치지반을 통합하고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이러한 개량화 전략은 정치적 권력의 강화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신중간계급 엘리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영역에서 전통적인 정치세력들을 점진적으로 대체해왔다. 이들은 신선하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유포하는 가운데,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조직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정하였는데, 이들의 새로운 관점은 특히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지배세력은 경제와 사회 개발에 있어 일정하게 비(非)시장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방 토지개발부나, 농업부는 소농과 어민, 소상인들에게 모든 종류의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도시빈민지역을 개발하고, 도시개발계획 등을 세웠다. 이러한 비시장적인 조치들은 노동자 계급과 농민 공동체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며, 계급 모순과 갈등을 희석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지배세력은 좌파정당에 의해 지도되는 무장 저항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방식을 이용했다. 그들은 저항단체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으며, 저항운동의 인적 재생산을 차단하기 위해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을 파괴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인종간의 심리적인 거부감을 야기해 인종간의 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계급 갈등을 왜곡시켰다.
또한, 1970년대 이래로 시행된 신경제정책은 인종차별에 바탕한 정책을 시행했다. 인종 차별적 정책은 (인종적) 차등 대우를 제도화했으며, 다양한 인종간의 통합을 파괴했다. 신경제정책은 인종적 감성을 자극했으며, 인종간의 갈등과 모순을 증대시켰다. 결과적으로 신경제정책은 계급갈등을 인종간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신경제정책은 계급의 이해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개발, 생활조건의 향상, 복지의 향상, 그리고 맹목적인 소비 진작은 민중의 관심을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요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2)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저항운동은 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저항운동 내에서 다양한 인종간의 불평등한 입지는 주요한 실패요인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말레이 계는 말레이시아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 독립투쟁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후에, 저항운동의 역량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게다가 지배세력은 스스로를 조정하며, 민족주의 투쟁을 진정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저항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이용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운동은 대중에 기초한 사회운동이라는 주요한 자기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非말레이계 투쟁이 훨씬 조직적이고 효과적이긴 하지만, 말레이 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으며, 투쟁에 함께 나서지 못했다. 대신에 지배세력은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방해하는데 말레이 계 공동체를 지지해 왔다.
또한, 운동주체 스스로가 부과한 제약들도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말까지 정치정당과 조직들을 망라한 사회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구금에서 풀려 나왔다. 이러한 석방은 제한적이었으며 조건이 뒤따랐는데, 대표적인 예가 거주지역의 제한, 정치정당 활동 금지, 노동조합활동 금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제한은 수년간 뒤따라 이들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운동가들이 석방되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나이든 부모님과 어린 자녀를 돌봐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엄청난 압력과 다시 투옥되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제한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3) 국제적인 사회운동의 영향력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지역의 세 개 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을 마감했다. 민족주의를 실질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 국가들 대부분이 독립을 쟁취했다. 같은 기간에 중국은 개혁과 경제 자유화를 추진하였으며, 그 이후 구소련이 붕괴했고,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40년간의 기나긴 무장투쟁을 해소하는 가운데, 국내 경제는 팽창했다.
우리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쇠락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지구적 경향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파 투쟁을 부활시킬 필요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으며,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주요한 사회 이데올로기로서 내면화된 인종정치(racial politics)에 혼란스러워 했다. 인종정치의 부상 이후, 과거의 좌파 활동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으며, 계급갈등의 진정한 면모를 직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앞서 말했듯, 지배세력은 개량화 조치를 실행하고, 일정한 자유주의적 정책를 구사했는데, 그 결과 계급에 바탕한 정치투쟁은 종말을 고했거나,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요구만을 중심에 놓는 정치투쟁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우리 사회의 주요한 모순은 인종 갈등이라고 믿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원칙을 포기하고 현재의 정치체제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거나 온순하고 순종적인 시민이 되었다.
한편 일부 부류들은 그릇된 사회 분석과 그릇된 주장을 했다; 그들은 과거의 저항운동과 정치투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의 경제발전과 구조개선을 위한 시기라고 선언했다. 또한 '정치적 차이'(이는 실은 정치적 억압이다)는 협상과 같은 수단을 활용하여 온화하게 풀어야 한다고 사고했다. 이들은 국가의 개량화 전략(예를 들어, 5월1일을 공식 휴일로 인정한다든가,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외교관계를 개선한다든가,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경제 자유화 정책들 취하는 것 등)을 혼동하여 이를 진정한 개혁으로 인정함으로써 지배세력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러한 정책을 진보적이고 실질적인 민주화의 과정으로 간주했다. 1980년대 말 이후, 이들은 마하티르를 국가의 '총명한 지도자'라 칭하며 공개적으로 추앙했다.
4) 정부의 사회개혁으로 인한 사회운동의 제약
말레이시아는 식민통치를 거부하기 위해 저항했던 여타의 제3세계 국가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수십 년 간 식민통치가 부과했던 고통과 착취, 빈곤, 저개발을 경험한 민중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은 대중적인 지지와 합의를 모아나가면서 활력을 얻기가 매우 쉬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민족주의 운동이 해방을 쟁취한 이후,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팽창되는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이후 독재정권이나 전제정치로 나아간 결과를 통해도 알 수 있다. 실제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에 원인이 있다. 식민지 지배시기 동안 민중은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와 그들의 우선순위는 생존이었다. 해방이후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물질적 착취는 소멸되고, 생활수준은 일반적으로 향상되었다. 생존문제가 부분적으로 해결됨에 따라 많은 정치적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긴급한 요구를 축소시켰다. 말레이시아 반도는 1957년에 독립을 쟁취하였고, 말레이시아 연방국은 1963년에 형성되었는데, 이는 민족국가가 식민직접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식민통치 권력은 국가의 권력과 이익을 통제하는 소수 지역 엘리트들에게 이양되었다. 지배계급은 과거 식민 지배권력으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획득해 다른 형태의 억압을 가했으며, 그들 자신의 이익과 해외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부를 축적해왔다. 또한 지배세력은 저항운동을 희석하기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고, 대중 심리를 자극했다.
1960년, 저항운동은 축적된 과거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운동 세력을 통해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0년 이후 말레이시아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더욱 총체적인 민주주의 운동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는데, 이는 저항운동이 후퇴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가장 큰 지배정당인 UMNO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하여 헤게모니를 더더욱 굳건히 했다. 그들은 지배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였으며, 사회 분위기와 대중의 정서를 통제했다. UMNO에 의해 주도되었던 지배체제는 1970년 이후 정치전략을 수정해 나갔다. 그들은 정치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3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합을 14개 정당의 구성된 국민연합(Barisan National)으로 상승시켰다. 나아가 주변부 세력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흡수해 나가면서 권력을 확장해 나갔다. 1980년에서 1990년 중반까지가 이들 지배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절정기였다. 반면 이 시기는 저항운동에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1980년대부터 국가 경제는 농업경제에서 상업과 공업에 기반한 경제로 이행했다. 최근에는 여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경제 성장 속에서, 도시화와 근대화가 빠르게 증가했다. 1980년에서 1990년 중반까지 말레이시아는 10년 간 경제 발전과 물질적인 번영기를 경험했다. 이 시기 동안 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엄청나게 증가해,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만연해졌다. 이는 저항운동의 가치관과 인식을 희석시켰다. 지배권력은 비민주적인 정책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만적으로 의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활용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정치권력이다. 의회민주주의의 활용은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가운데, 오직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정당 세력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반면에 대중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투쟁을 약화시키고, 저항운동의 진전을 정지시켰다.
저항운동-쇠퇴기에서 절정기까지
사회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발전이론이다. 실제로 저항운동은 역사 속에서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투쟁의 쇠퇴기나 운동이 정지해 보이는 순간에도 저항운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운동의 새로운 순환이 도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쇠퇴기는 또 다른 절정기를 위한 시작이다. 1997년 아시아 지역의 금융위기는 부총리 아느와르(Anwar) 사건의 촉발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낳았다. 1998년 아느와르 사건(동성애, 불법행위 등으로 아느와르가 구속된 사건-역주)은 저항운동의 대중적인 부활을 가져왔다. 1998년부터 오늘날까지 저항운동의 여세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운동의 부상에는 몇 가지 사회적인 조건들이 있다.
1) 전제정치를 유지해온 10년 간의 도전 받지 않은 정치권력
전제권력은 말레이시아 사회의 모든 면을 철저히 통제하고 독점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켰다. 실제로 가장 심각한 갈등은 정당 엘리트들과 정당 내 분파들간의 내부적인 갈등과 권력투쟁이었다. 1987년에서 1995년까지 UMNO내에서 前재경장관 라잘레이 세력과 마하티르 세력간에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1993년부터는 스스로를 새롭고 젊은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는 '비전팀'의 등장으로 구세력들과의 심각한 충돌이 진행되었다. 이는 아느와르 사건을 촉발했던 사전적인 갈등이라 할 수 있다.
2) 끊임없는 부패를 야기한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정치와 경제의 강력한 사슬고리는 자연스럽게 부패와 권력남용, 정실주의, 그리고 혼란을 가져왔다. 오랜 기간동안 발생했던 이런 문제들은 지배세력 스스로를 파괴시켰는데, 특히 정치권력을 유지해 온 중요한 구조적인 체계의 파괴를 야기했다. 또한 결국 자신들의 정치 운영을 순조롭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3) 주도적인 사회계급으로 자리잡은 중간계급의 성장
중간계급은 전제권력의 남용에 분노하는 사회계급이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개혁이 진전되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던 계급이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중간계급은 매체의 독점과 억압을 깰 수 있었으며, 나아가 사회의 심리적 제약을 한층 자유롭게 했다.
4) 아시아 독재권력의 몰락
아시아 나아가서는 전지구적인 수준에서 전제주의와 독재권력의 몰락은 말레이시아 대중의 전형적인 심리와 인식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와, 변화의 믿음을 깨우치고 강화하였다.
아느와르 사건과 개혁운동의 부흥
아느와르 사건과 개혁운동은 1997년 변화를 위한 촉매제였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금융위기에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자신의 수중에 굳건하게 장악하고 있던 지배세력, 특히 지배세력 내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은 경제위기에 심하게 타격을 입었다. 지배세력 내에서 경제 이해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분파들간의 다툼을 더욱 심화시켰다. 1998년 9월 UMNO의 부대표이자 부총리인 아느와르 이브라힘이 지배정당으로부터 파면되었다. 심지어 그는 동성애, 권력남용, 불법행위 등으로 기소되었다. 나중에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재판을 받고서 몇 가지 기소조항들로 15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아직도 다른 기소조항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이 인정하듯이, 아느와르 사건은 지배세력들 내부의 권력 쟁투의 결과이지만, 이전의 내부 투쟁이나 갈등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단지 당내의 갈등이라 볼 수 있는 라자레이와 마하티르 간의 위기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아느와르 사건은 아느와르와 그의 분파의 이해를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요구로 전환시켜내면서 지배세력 내부의 투쟁을 사회적인 투쟁으로 끌어올 수 있었고, 더욱 크고 광범위한 사회운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반대세력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으로 인해, 아느와르는 보복의 무기로서 대중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 이시기 동안에 가장 중요한 점은, 대중운동의 조건이 무르익어, 단지 폭발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8년(그리고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은 많은 혁신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일단 수도에서 몇 달간 매주 집회가 개최되었고, 수천 명의 대중이 여러 지역에서 대중집회를 열었다. 또한 말레이시아 대중투쟁의 새로운 국면은 시내에서 고속도로까지 인파들의 행진이 진행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투쟁형태는 강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조직적인 대중투쟁이 강화되어야하고, 정치적인 의식과 운동의 근간이 강력해져야 한다.
저항의 정치적 지반과 방향성
UMNO와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의 헤게모니와 도덕성의 상실은 지배세력의 권력근간의 붕괴를 초래했다. 또한 과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주변부 권력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했다. 2000년도 이후, 주요 세력은 더 이상 UMNO와 국민동맹이 아니라, 주요 반대 정당들로 구성된 Barisan Alternatif라는 대안전선과 범말레이 이슬람 당(PAS, Pan Malayan Islamic Party)이 자리를 대신했다. 거의 십 년 간 조직을 정비하고 정치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등의 내적인 개혁과정을 거친 이후, PAS는 많은 지식인들을 당내로 포섭하고 젊은층과 학생들의 집단적인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PAS는 또한 무슬림 공동체(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말레이계 공동체)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주로 PAS가 가지고 있는 반전제정치, 반부패, 반물질만능주의라는 입장 때문이다. PAS는 또한 변화를 갈망하는 노동계급과 빈민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대표한다. 1990년 선거에서 PAS는 켈란탄(Kelantan)주의 선거에서 승리해, 현재까지 주지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1999년 선거에는 PAS는 켈란탄주와 테렝가누(Terengganu)주에서 승리했는데, 이 두 주는 서부 말레이시아의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PAS는 앞으로 말레이시아의 정치 발전과 방향을 주도할 가장 주요한 세력이 될 것이다.
1) 민주행동당(DAP, Democratic Action Party)
DAP는 약 35년 간 현존했으며, 반대세력의 정치적 공백을 메꿔 왔다. DAP는 1960년 중반 사회주의 전선이 붕괴했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민중당(Malaysian People Party)의 지도부와 활동가 절반이 투옥되었고, 많은 반대 정당들이 포섭되었다. DAP는 반대세력들의 빈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반대정당이었으며, 당대의 정치 지형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970년대에 통치세력들은 비말레이시아계 사람의 불만을 가져온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인종적 감정이 격앙되는 상황 속에서 비말레이시아계 단체들은 DAP를 지지했다. DAP는 1970년과 80년대에 반대세력의 주요 대표체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DAP는 의회 내 권력투쟁을 위한 순수단 정당일 뿐, 장기적인 전망이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임무와 과제를 갖지는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체적으로 개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치 지형에 흡수되거나 현실 정당정치의 구도에서 주변화 될 것이다.
2) 말레이시아 민중당(Malaysian Peoples Party, 혹은 PRM, Parti Rakyat Malaysia)
PRM은 거의 45년 간 존속해 왔다. PRM은 주로 말레이시아계를 대표하지만, 비인종적이며 민족주의적 지향을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벌이는 진보적인 정당으로, 통치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왔다. 1970년 이래로 정치지형과 대중정서에 있어 인종적 감정이 지배적이었으나, PRM은 비인종적인 정치 원칙을 견지했다. PRM은 일정하게 국제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쇠퇴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사회 개혁과 저항운동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즉,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확장시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중의 하나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보수적인 특징에 있다 할 수 있겠다.
3) 국민정의당(National Justice Party)
국민정의당은 현실정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치세력이다. 국민정의당은 역사적인 부담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혁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 세력은 다른 반대 정당들과는 매우 다른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 현재 국민정의당은 유약 하지만 오늘날 저항운동은 젊은 세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국민정의당은 향후 주요한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 국민정의당은 말레이시아 개혁운동에 있어 강력한 추동세력이 되고 있다.
결론
말레이시아 민중은 전제권력과 부패, 권력남용, 정실주의, 그리고 독재에 강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분명히 사람들은 민주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종과 자본에 의한 정치의 자리를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대신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대중적인 사회개혁운동에 있어서의 말레이시아 민중의 열망은 바로 새로운 세기의 새롭고도 거역할 수 없는 정치적 파워이다.
한편, 낡은 봉건잔재와 구악(舊惡)이 일소되어 새로운 정치 질서와 구조가 개발되고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저항운동은 이럴 때라야만 점차 새롭게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 속에 점차 발전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새로운 정치 지형은 다양한 정치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서로를 견인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관계 및 정치 구조를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상호 견제해야 한다. 동시에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권력이 이러한 새로운 정치지형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기 위한 자기 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새로운 정치에 대해 보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력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기존의 정치 구조를 거부하고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치를 갈망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성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진보적인 정치권력이 우위에 설 때에야 만이 말레이시아 민중의 저항운동은 전진할 수 있다.
들어가며
말레이시아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이다. 말레이시아는 서쪽에 말레이시아 반도, 동쪽에 북보르네오의 사바(Sabah)와 사라와크(Sarawak)라는 두 개의 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지역은 다른 인종과 문화, 역사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반도의 인구는 주로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오랑 아살(orang asal)이라는 원주민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말레이시아(사바와 사라와크 주)는 주로 카다잔(Kadazan)계, 이반계(Iban), 말레이계, 중국계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레이시아 반도는 1957년에 독립했으며, 사바와 사라와크 주는 1963년에 독립했다. 1963년은 말레이시아 반도와 싱가포르가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어 말레이시아 연방국이 된 해이기도 하다.(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제3세계 국가들처럼 말레이시아는 수 백년간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으며, 독립전쟁에 따르는 고통과 비참함을 감수해야 했다. 말레이시아 민중은 독립 후에도 식민지 경제종속 하에 있었으며, 다른 인종과 사회 계층들간의 내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억압이 있는 곳엔, 언제나 저항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경향이다. 과거, 사회적 억압은 대개 국가 장치와 제도를 활용해 진행해 왔다. 지배계급은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된 방식으로 억압을 행사했다. 오늘날까지도 국가권력은 제도화된 사회적 억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법에 의한 통치'를 다시 정의한다. 한편, 시민의 자유에 대한 국가 탄압이 점증하면, 고립적이고 조직되지 않았던 사회적 저항은 점자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저항운동은 30년 식민통치에 맞서 투쟁했다. 즉 영국의 식민통치, 일본의 지배, 다시 영국의 식민통치에 맞서 저항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모든 투쟁은 엄청난 희생과 강한 결단을 가진 민중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억압과 이에 맞선 저항은 점차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전개과정
1970년 전까지, 말레이시아의 저항운동은 매우 강렬하고 급진적이었다. 1970년 이후 억압적인 정치권력은 여전히 말레이시아 민중의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잔인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저항운동은 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한편, 저항운동의 오랜 역사 속에 정치정당은 투쟁의 주요한 세력으로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민족당과 같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당과 연합한 공산당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1960년대에는 말레이시아 민중당과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하는 노동당 같은 좌파 정당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전선이 저항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당시 저항운동은 노동, 농민, 학생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은 잔혹한 탄압을 받거나, 방향을 상실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970년에서 80년은 국가기구와 경제정책의 혜택을 입어 형성된 신중간계급이 강렬하고도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1980년 초반부터는 마하티르 現총리의 지지기반인 신중간계급이 기득권 층으로 등장하였고, 말레이시아의 정치, 경제 영역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마하티르에 의해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급이 등장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내 여러 인종 공동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를 통제해 말레이시아를 전체적으로 유지했다. 1980년 중반 이후 신중간계급은 가장 지배적이고 주요한 계급으로 성장해왔다. 그 결과 전통적인 정치세력과 혼합된 이러한 신진 세력들은, 기업 근대화와 국가 주도의 발전 속에서 독재권력과 결합하여 국가의 성장을 독점한 국가 자본주의를 형성하였다.
1989년,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정부와의 평화 협상을 가진 후, 40년 간의 기나긴 무장투쟁에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무장투쟁의 종결은 일정하게 전통적, 정치적인 투쟁 형태와 믿음의 소멸을 가져왔다. 1990년에서 1997년까지 말레이시아 경제는 전 세계 및 동아시아 경제의 팽창으로 인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독재권력은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국가 장치를 활용하고, 역으로 국가 기구를 통제하기 위해 축적된 부를 이용함으로써, 정치와 경제에서의 지배력을 굳건히 했다. 분명히 국가의 정치경제적 권력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왔다. 좀더 구체적으로, 정치경제적 권력은 국민전선(Barisan Nasional)과 말레이시아 국가 연합(the United Malay National Organization, UMNO) 그리고 마하티르의 이해를 위해서만 봉사할 따름이었다. 1991년부터 1992년, 마하티르 체제는 왕가(王家)를 공격해, 전통적인 보수세력들을 거의 제거했다. 한편, 마하티르 체제는 반서구, 반식민지, 반제국주의의 측면을 모사(模寫)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해왔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에서 추진된 반서구 전략은 정치경제적 통제를 지속하기 위한 독재세력의 이해를 보장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반서구 전략의 결과, 마하티르는 제3세계의 영웅이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통치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1993년에서 1994년, 지배체제 내에서 스스로를 '비전세력'(Vision Team)이라 칭하면서, '새로운 말레이시아'(New Malay) 슬로건을 주창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이 비전세력의 등장은 지배세력들내에서 구세력와 신진세력간의 내부적인 경쟁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은 최근 말레이시아의 정치에 상당한 여파를 몰고 왔다.
1990년에서 1997년 동안, 말레이시아 사회는 안정, 진보, 평화, 자유로운 소비, 국가에 대한 만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회변화를 위해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반대세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강타했던 1997년 경제위기는 엄청난 정치적 파급력을 야기했다. 1997년의 경제위기로 그동안 전전긍긍하고 있던 저항 세력이 급진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저항운동의 배경
국제적으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격양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독립투쟁이후, 민중의 정치의식은 대체적으로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생활조건의 향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호소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그 결과 1965부터 1969년에는 저항운동이 절정에 다달았다. 이 절정기에는 좌파 정치 정당과 노동자, 학생에 의해 주도되는 무장 세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대중운동이 서서히 침체하면서, 저항세력이 분열되는 가운데 쇠퇴기를 맞았다. 그 결과 대중운동은 1975부터 거의 20년 간 무력해졌다. 저항운동이 이처럼 긴 세월동안 무력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지배세력의 관점에서
지배세력은 과거 대중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들의 권력지반이 심대한 위협을 받았던 경험을 통해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배세력은 내적으로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즉 시민사회의 전문가들을 채용하고,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는 정치 엘리트들을 활용했다. 지배세력은 불안정한 피지배세력들을 포섭함으로써(이전 반대정당과 대중조직을 무력화시켰다) 주변을 아우르는 가운데, 중심적인 정치지반을 통합하고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이러한 개량화 전략은 정치적 권력의 강화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신중간계급 엘리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영역에서 전통적인 정치세력들을 점진적으로 대체해왔다. 이들은 신선하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유포하는 가운데,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조직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정하였는데, 이들의 새로운 관점은 특히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지배세력은 경제와 사회 개발에 있어 일정하게 비(非)시장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방 토지개발부나, 농업부는 소농과 어민, 소상인들에게 모든 종류의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도시빈민지역을 개발하고, 도시개발계획 등을 세웠다. 이러한 비시장적인 조치들은 노동자 계급과 농민 공동체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며, 계급 모순과 갈등을 희석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지배세력은 좌파정당에 의해 지도되는 무장 저항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방식을 이용했다. 그들은 저항단체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으며, 저항운동의 인적 재생산을 차단하기 위해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을 파괴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인종간의 심리적인 거부감을 야기해 인종간의 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계급 갈등을 왜곡시켰다.
또한, 1970년대 이래로 시행된 신경제정책은 인종차별에 바탕한 정책을 시행했다. 인종 차별적 정책은 (인종적) 차등 대우를 제도화했으며, 다양한 인종간의 통합을 파괴했다. 신경제정책은 인종적 감성을 자극했으며, 인종간의 갈등과 모순을 증대시켰다. 결과적으로 신경제정책은 계급갈등을 인종간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신경제정책은 계급의 이해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개발, 생활조건의 향상, 복지의 향상, 그리고 맹목적인 소비 진작은 민중의 관심을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요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2)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저항운동은 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저항운동 내에서 다양한 인종간의 불평등한 입지는 주요한 실패요인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말레이 계는 말레이시아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 독립투쟁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후에, 저항운동의 역량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게다가 지배세력은 스스로를 조정하며, 민족주의 투쟁을 진정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저항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이용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운동은 대중에 기초한 사회운동이라는 주요한 자기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非말레이계 투쟁이 훨씬 조직적이고 효과적이긴 하지만, 말레이 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으며, 투쟁에 함께 나서지 못했다. 대신에 지배세력은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방해하는데 말레이 계 공동체를 지지해 왔다.
또한, 운동주체 스스로가 부과한 제약들도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말까지 정치정당과 조직들을 망라한 사회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구금에서 풀려 나왔다. 이러한 석방은 제한적이었으며 조건이 뒤따랐는데, 대표적인 예가 거주지역의 제한, 정치정당 활동 금지, 노동조합활동 금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제한은 수년간 뒤따라 이들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운동가들이 석방되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나이든 부모님과 어린 자녀를 돌봐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엄청난 압력과 다시 투옥되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제한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3) 국제적인 사회운동의 영향력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지역의 세 개 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을 마감했다. 민족주의를 실질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 국가들 대부분이 독립을 쟁취했다. 같은 기간에 중국은 개혁과 경제 자유화를 추진하였으며, 그 이후 구소련이 붕괴했고,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40년간의 기나긴 무장투쟁을 해소하는 가운데, 국내 경제는 팽창했다.
우리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쇠락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지구적 경향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파 투쟁을 부활시킬 필요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으며,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주요한 사회 이데올로기로서 내면화된 인종정치(racial politics)에 혼란스러워 했다. 인종정치의 부상 이후, 과거의 좌파 활동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으며, 계급갈등의 진정한 면모를 직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앞서 말했듯, 지배세력은 개량화 조치를 실행하고, 일정한 자유주의적 정책를 구사했는데, 그 결과 계급에 바탕한 정치투쟁은 종말을 고했거나,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요구만을 중심에 놓는 정치투쟁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우리 사회의 주요한 모순은 인종 갈등이라고 믿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원칙을 포기하고 현재의 정치체제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거나 온순하고 순종적인 시민이 되었다.
한편 일부 부류들은 그릇된 사회 분석과 그릇된 주장을 했다; 그들은 과거의 저항운동과 정치투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의 경제발전과 구조개선을 위한 시기라고 선언했다. 또한 '정치적 차이'(이는 실은 정치적 억압이다)는 협상과 같은 수단을 활용하여 온화하게 풀어야 한다고 사고했다. 이들은 국가의 개량화 전략(예를 들어, 5월1일을 공식 휴일로 인정한다든가,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외교관계를 개선한다든가,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경제 자유화 정책들 취하는 것 등)을 혼동하여 이를 진정한 개혁으로 인정함으로써 지배세력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러한 정책을 진보적이고 실질적인 민주화의 과정으로 간주했다. 1980년대 말 이후, 이들은 마하티르를 국가의 '총명한 지도자'라 칭하며 공개적으로 추앙했다.
4) 정부의 사회개혁으로 인한 사회운동의 제약
말레이시아는 식민통치를 거부하기 위해 저항했던 여타의 제3세계 국가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수십 년 간 식민통치가 부과했던 고통과 착취, 빈곤, 저개발을 경험한 민중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은 대중적인 지지와 합의를 모아나가면서 활력을 얻기가 매우 쉬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민족주의 운동이 해방을 쟁취한 이후,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고 팽창되는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이후 독재정권이나 전제정치로 나아간 결과를 통해도 알 수 있다. 실제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에 원인이 있다. 식민지 지배시기 동안 민중은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와 그들의 우선순위는 생존이었다. 해방이후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물질적 착취는 소멸되고, 생활수준은 일반적으로 향상되었다. 생존문제가 부분적으로 해결됨에 따라 많은 정치적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긴급한 요구를 축소시켰다. 말레이시아 반도는 1957년에 독립을 쟁취하였고, 말레이시아 연방국은 1963년에 형성되었는데, 이는 민족국가가 식민직접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탈식민통치 권력은 국가의 권력과 이익을 통제하는 소수 지역 엘리트들에게 이양되었다. 지배계급은 과거 식민 지배권력으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획득해 다른 형태의 억압을 가했으며, 그들 자신의 이익과 해외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부를 축적해왔다. 또한 지배세력은 저항운동을 희석하기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고, 대중 심리를 자극했다.
1960년, 저항운동은 축적된 과거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운동 세력을 통해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0년 이후 말레이시아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더욱 총체적인 민주주의 운동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는데, 이는 저항운동이 후퇴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가장 큰 지배정당인 UMNO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하여 헤게모니를 더더욱 굳건히 했다. 그들은 지배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였으며, 사회 분위기와 대중의 정서를 통제했다. UMNO에 의해 주도되었던 지배체제는 1970년 이후 정치전략을 수정해 나갔다. 그들은 정치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3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합을 14개 정당의 구성된 국민연합(Barisan National)으로 상승시켰다. 나아가 주변부 세력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흡수해 나가면서 권력을 확장해 나갔다. 1980년에서 1990년 중반까지가 이들 지배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절정기였다. 반면 이 시기는 저항운동에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1980년대부터 국가 경제는 농업경제에서 상업과 공업에 기반한 경제로 이행했다. 최근에는 여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경제 성장 속에서, 도시화와 근대화가 빠르게 증가했다. 1980년에서 1990년 중반까지 말레이시아는 10년 간 경제 발전과 물질적인 번영기를 경험했다. 이 시기 동안 사람들의 가치 기준이 엄청나게 증가해,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만연해졌다. 이는 저항운동의 가치관과 인식을 희석시켰다. 지배권력은 비민주적인 정책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만적으로 의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활용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정치권력이다. 의회민주주의의 활용은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가운데, 오직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정당 세력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반면에 대중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투쟁을 약화시키고, 저항운동의 진전을 정지시켰다.
저항운동-쇠퇴기에서 절정기까지
사회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발전이론이다. 실제로 저항운동은 역사 속에서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투쟁의 쇠퇴기나 운동이 정지해 보이는 순간에도 저항운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운동의 새로운 순환이 도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쇠퇴기는 또 다른 절정기를 위한 시작이다. 1997년 아시아 지역의 금융위기는 부총리 아느와르(Anwar) 사건의 촉발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낳았다. 1998년 아느와르 사건(동성애, 불법행위 등으로 아느와르가 구속된 사건-역주)은 저항운동의 대중적인 부활을 가져왔다. 1998년부터 오늘날까지 저항운동의 여세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운동의 부상에는 몇 가지 사회적인 조건들이 있다.
1) 전제정치를 유지해온 10년 간의 도전 받지 않은 정치권력
전제권력은 말레이시아 사회의 모든 면을 철저히 통제하고 독점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켰다. 실제로 가장 심각한 갈등은 정당 엘리트들과 정당 내 분파들간의 내부적인 갈등과 권력투쟁이었다. 1987년에서 1995년까지 UMNO내에서 前재경장관 라잘레이 세력과 마하티르 세력간에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1993년부터는 스스로를 새롭고 젊은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는 '비전팀'의 등장으로 구세력들과의 심각한 충돌이 진행되었다. 이는 아느와르 사건을 촉발했던 사전적인 갈등이라 할 수 있다.
2) 끊임없는 부패를 야기한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정치와 경제의 강력한 사슬고리는 자연스럽게 부패와 권력남용, 정실주의, 그리고 혼란을 가져왔다. 오랜 기간동안 발생했던 이런 문제들은 지배세력 스스로를 파괴시켰는데, 특히 정치권력을 유지해 온 중요한 구조적인 체계의 파괴를 야기했다. 또한 결국 자신들의 정치 운영을 순조롭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3) 주도적인 사회계급으로 자리잡은 중간계급의 성장
중간계급은 전제권력의 남용에 분노하는 사회계급이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개혁이 진전되기를 간절히 기다려왔던 계급이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중간계급은 매체의 독점과 억압을 깰 수 있었으며, 나아가 사회의 심리적 제약을 한층 자유롭게 했다.
4) 아시아 독재권력의 몰락
아시아 나아가서는 전지구적인 수준에서 전제주의와 독재권력의 몰락은 말레이시아 대중의 전형적인 심리와 인식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와, 변화의 믿음을 깨우치고 강화하였다.
아느와르 사건과 개혁운동의 부흥
아느와르 사건과 개혁운동은 1997년 변화를 위한 촉매제였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금융위기에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자신의 수중에 굳건하게 장악하고 있던 지배세력, 특히 지배세력 내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들은 경제위기에 심하게 타격을 입었다. 지배세력 내에서 경제 이해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분파들간의 다툼을 더욱 심화시켰다. 1998년 9월 UMNO의 부대표이자 부총리인 아느와르 이브라힘이 지배정당으로부터 파면되었다. 심지어 그는 동성애, 권력남용, 불법행위 등으로 기소되었다. 나중에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재판을 받고서 몇 가지 기소조항들로 15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아직도 다른 기소조항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이 인정하듯이, 아느와르 사건은 지배세력들 내부의 권력 쟁투의 결과이지만, 이전의 내부 투쟁이나 갈등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단지 당내의 갈등이라 볼 수 있는 라자레이와 마하티르 간의 위기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아느와르 사건은 아느와르와 그의 분파의 이해를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요구로 전환시켜내면서 지배세력 내부의 투쟁을 사회적인 투쟁으로 끌어올 수 있었고, 더욱 크고 광범위한 사회운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반대세력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으로 인해, 아느와르는 보복의 무기로서 대중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 이시기 동안에 가장 중요한 점은, 대중운동의 조건이 무르익어, 단지 폭발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8년(그리고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은 많은 혁신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일단 수도에서 몇 달간 매주 집회가 개최되었고, 수천 명의 대중이 여러 지역에서 대중집회를 열었다. 또한 말레이시아 대중투쟁의 새로운 국면은 시내에서 고속도로까지 인파들의 행진이 진행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투쟁형태는 강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조직적인 대중투쟁이 강화되어야하고, 정치적인 의식과 운동의 근간이 강력해져야 한다.
저항의 정치적 지반과 방향성
UMNO와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의 헤게모니와 도덕성의 상실은 지배세력의 권력근간의 붕괴를 초래했다. 또한 과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주변부 권력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했다. 2000년도 이후, 주요 세력은 더 이상 UMNO와 국민동맹이 아니라, 주요 반대 정당들로 구성된 Barisan Alternatif라는 대안전선과 범말레이 이슬람 당(PAS, Pan Malayan Islamic Party)이 자리를 대신했다. 거의 십 년 간 조직을 정비하고 정치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등의 내적인 개혁과정을 거친 이후, PAS는 많은 지식인들을 당내로 포섭하고 젊은층과 학생들의 집단적인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PAS는 또한 무슬림 공동체(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말레이계 공동체)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주로 PAS가 가지고 있는 반전제정치, 반부패, 반물질만능주의라는 입장 때문이다. PAS는 또한 변화를 갈망하는 노동계급과 빈민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대표한다. 1990년 선거에서 PAS는 켈란탄(Kelantan)주의 선거에서 승리해, 현재까지 주지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1999년 선거에는 PAS는 켈란탄주와 테렝가누(Terengganu)주에서 승리했는데, 이 두 주는 서부 말레이시아의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PAS는 앞으로 말레이시아의 정치 발전과 방향을 주도할 가장 주요한 세력이 될 것이다.
1) 민주행동당(DAP, Democratic Action Party)
DAP는 약 35년 간 현존했으며, 반대세력의 정치적 공백을 메꿔 왔다. DAP는 1960년 중반 사회주의 전선이 붕괴했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민중당(Malaysian People Party)의 지도부와 활동가 절반이 투옥되었고, 많은 반대 정당들이 포섭되었다. DAP는 반대세력들의 빈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반대정당이었으며, 당대의 정치 지형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970년대에 통치세력들은 비말레이시아계 사람의 불만을 가져온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인종적 감정이 격앙되는 상황 속에서 비말레이시아계 단체들은 DAP를 지지했다. DAP는 1970년과 80년대에 반대세력의 주요 대표체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DAP는 의회 내 권력투쟁을 위한 순수단 정당일 뿐, 장기적인 전망이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임무와 과제를 갖지는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체적으로 개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치 지형에 흡수되거나 현실 정당정치의 구도에서 주변화 될 것이다.
2) 말레이시아 민중당(Malaysian Peoples Party, 혹은 PRM, Parti Rakyat Malaysia)
PRM은 거의 45년 간 존속해 왔다. PRM은 주로 말레이시아계를 대표하지만, 비인종적이며 민족주의적 지향을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벌이는 진보적인 정당으로, 통치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왔다. 1970년 이래로 정치지형과 대중정서에 있어 인종적 감정이 지배적이었으나, PRM은 비인종적인 정치 원칙을 견지했다. PRM은 일정하게 국제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쇠퇴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사회 개혁과 저항운동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즉,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확장시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중의 하나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보수적인 특징에 있다 할 수 있겠다.
3) 국민정의당(National Justice Party)
국민정의당은 현실정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치세력이다. 국민정의당은 역사적인 부담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혁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 세력은 다른 반대 정당들과는 매우 다른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 현재 국민정의당은 유약 하지만 오늘날 저항운동은 젊은 세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바,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국민정의당은 향후 주요한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 국민정의당은 말레이시아 개혁운동에 있어 강력한 추동세력이 되고 있다.
결론
말레이시아 민중은 전제권력과 부패, 권력남용, 정실주의, 그리고 독재에 강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분명히 사람들은 민주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종과 자본에 의한 정치의 자리를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대신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대중적인 사회개혁운동에 있어서의 말레이시아 민중의 열망은 바로 새로운 세기의 새롭고도 거역할 수 없는 정치적 파워이다.
한편, 낡은 봉건잔재와 구악(舊惡)이 일소되어 새로운 정치 질서와 구조가 개발되고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저항운동은 이럴 때라야만 점차 새롭게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 속에 점차 발전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새로운 정치 지형은 다양한 정치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서로를 견인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관계 및 정치 구조를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상호 견제해야 한다. 동시에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권력이 이러한 새로운 정치지형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기 위한 자기 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새로운 정치에 대해 보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력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기존의 정치 구조를 거부하고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치를 갈망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성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진보적인 정치권력이 우위에 설 때에야 만이 말레이시아 민중의 저항운동은 전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