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시대 중국(1) - 흔들리는 중국
1.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중국에게 2001년은 2008년 올림픽 유치의 성공, WTO 가입, 그리고 중국 축구팀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 등으로 세계무대 진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해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성장이 계속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며, 중국인들은 유례없는 자긍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사회의 양극화는 전례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불평등이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보다 심해 "비교 가능한 자료가 있는 모든 나라 중 최대"라고 평가하였다. 소득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를 살펴보면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잘 드러나는데, 지난해 중국의 한 잡지에 나타난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1995년의 0.38에서 1990년대 말에 0.47로 높아져 빠르게 불평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민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사실상 이보다 높은 0.59로까지 나타난다.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기점인 1978년에 이 수치는 0.15에 불과하였다. 지니계수가 0.4를 넘으면 소득분배가 심각한 불평등 상태인 국가로 분류되는데, 개혁개방 20년 만에 중국은 소득분배의 면에서 평등도가 가장 높은 국가군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군으로 빠르게 옮겨간 것이다. 중국 내에서는 이것이 과도기적 현상으로, 사회 내에서 고소득자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1992년 떵샤오핑이 제창한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의 효과라고 보지만, 문제는 앞으로 이런 불평등이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될 요인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 내에서 불평등은 크게 세 축으로 발생하는데,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의 확대, 지역 사이 불균형의 확대, 그리고 관리자층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격차의 확대가 그것이다.
중국에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이 아직도 제약되고 있다. 과거 코포라티즘적 관리의 결과 생겨난 호구제도는 중국의 인구를 농업호구와 비농업호구로 나누고 농업호구를 지닌 사람이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여 직업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식량배급제도가 사라지고 직업배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호구제도의 규제력이 다소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안정적 직업의 획득과 교육과 의료 혜택들에서 호구제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1980년대 초반 인민공사 제도를 해체하고 농지를 가구별로 청부를 준 제도가 시행되고 수매가격이 인상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농가의 소득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이후에는 이러한 농촌에 대한 일시적 자극효과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도시지역의 소득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는 수치상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고, 삶의 불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농촌주민들의 소득증가가 사실상 농작물 판매수입의 증가보다는 농촌지역에 건립된 향진기업에 취업하여 얻은 비농업 소득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런데 1993년 이후 향진기업의 고용창출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의 취업기회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가의 소득도 줄어들었다. 경작지를 소규모로 다시 분할하였고, 농촌에서 비농업 분야의 취업기회가 한정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활수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1989년부터 많은 내륙지방의 농민들이 연안지역의 발달한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농촌출신 노동자들의 파도 현상'(民工潮)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에 걸쳐 적게는 4천만 명에서 많게는 1억 명 이상으로 추계되는 이 거대한 유동 인구군은 호구를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지역에 서 2등 시민인 '불법취업자'로 거대한 노동력 저수지를 형성하여 저임금 노동력 공급처가 되고 있다.
지역 간 격차 또한 계속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의 일인당 GNP는 800달러 수준인데, 성장이 빠른 대도시인 상하이는 3,300달러, 베이징은 2,100달러, 텐진은 1,800달러 수준으로 평균의 두배 이상 높으며, 이에 비해 내륙의 구이저우성은 300달러, 간쑤성은 440달러로 평균의 절반 수준일 뿐이다. 이처럼 지역별 소득 격차가 커지는 원인은 중국의 고속성장을 추동한 해외 외국인 자본의 투자가 연해지역에 집중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만 소득의 증대가 발생하였고, 반면 내륙의 농업지역에서는 기존의 상호부조의 틀이나 국가의 지원의 틀이 약화되면서이다. 이처럼 지역격차가 벌어지면서 내륙지역에서 배출되는 유동인구 또한 늘어나는데, 쓰촨, 안후이, 구이저우 등지가 주요한 농촌출신 노동자 배출지역이 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기존의 국유기업과 집체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실업과 불안정고용이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의 공식 실업률은 아직 4% 수준에 묶여있지만, 중국의 특성을 반영한 특징적인 준실업 현상인 '면직'(下崗)이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면직이란 소속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해고된 상태는 아니지만, 직무를 배정 받지 못해 기업 내에 대기발령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며, 기업으로부터 약간의 생활비 보조를 받고, 기업이 여전히 사회보험비를 납부하고, 기존에 배정 받은 주택에서 거주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면직자의 일부는 새로 일자리를 찾겠지만, 조사에 따르면 면직자의 대다수가 상당 기간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면직자의 수는 1천만 명을 넘고, 이런 고용의 불안정성의 결과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단체 노동쟁의가 3배 증가하기도 하였다. 면직자를 포함한 일반노동자들의 지위하락이 계속되는 반면, 기업의 경영관리자의 지위는 반대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도시주민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한데 비해 1990년대 들어서는 고급관료와 기업경영자의 소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일반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커지면서 도시 내 소득 불평등은 계속 커지고 있다. 기업경영자들이 연봉제의 시행, 주식의 배분 따위를 통해 기업이윤을 분배받게 되면서 이들과 일반노동자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2.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중국 헌법 제 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법조문의 규정을 넘어서 실제로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논란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중국 내에서 중국이 사회주의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소유제와 정치권력의 문제이다. 즉 소유제에서 공유제(국유와 집체)가 우위에 있다는 것과, 정치권력이 인민에게 있으며, 이는 인민의 당인 중국공산당이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모두 사실상 법률 차원의 정의 문제에 불과하며, 그 내실과 나아가는 방향의 경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공유제의 우위'만 하더라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정의는 중국 내에서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과거 이에 대한 정의는 국내 모든 산업이 공유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사영기업이나 외자기업처럼 비공유제 형태의 기업이 병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다음으로 공유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권리는 분할될 수 있다는 논의가 전개되어 국유기업의 운영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를 계승하여 국유제란 국가가 소유제 지분의 51%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정의에 부합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이어서 전체 경제 중 핵심적 부분만 공유제 형태로 유지하면 공유제의 우위가 된다는 논지로 발전하였다. 1999년에 이미 국유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도시종업인원의 39.7%(집체부문은 7.9%), 농촌을 포함한 전체 종업 인원의 12.1%, 전체공업기업수의 0.8%, 공업생산총액의 28.2%로 낮아졌다. 급기야 중국경제체제의 구조조정을 담당하고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핵심기구인 체제개혁위원회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중국개혁}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수립하는 근본 해결책은 절대다수의 국유기업을 비국유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공유제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중국공산당의 성격 변화와 맞물리고 있다. 떵샤오핑의 노선을 계승한 중국의 국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장쩌민은 2000년 2월 '세가지 대표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이 중국의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 중국의 가장 폭넓은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하기만 하면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와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한다는 의미와 폭넓은 인민이란 누구를 포함하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2001년 7월 장쩌민은 7.1 강화에서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그 함의를 분명히 하였다. 즉 사영기업의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선 사영기업가의 입당을 허용해야 하는데, 이들 사영기업가들이야말로 선진생산력을 대표하는 자라는 논지가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을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사회 모든 세력에 대한 조직적 통제력을 확보하는 코포라티즘적 정당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이런 과정은 중국의 개혁정책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에는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자본가 계급은 없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계급으로서 자본가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가 이를 대신하여 한편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본축적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준비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으로서 자본가 세력을 적극 형성해 온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지향의 국가관료와 국유기업의 상층관리자들 그리고 외국자본이 결합된 주도세력이 국가자본주의 또는 관료자본주의라 말할 수 있는 발전노선을 추진해 왔으며, 이 주도세력의 일부가 점차 독립된 자본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과정은 중소규모의 사적자본가들이 아래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점차 자본주의 지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세력이 주도적으로 변신하여 국가자본주의 발전노선을 펴나가면서 여타의 부문들을 종속적 지위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장쩌민의 7.1 강화는 당 외부에 존재하는 사영기업가들을 당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략인 동시에 당원인 각급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실질적 자본가로 변신하는 현실을 사후에 추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의 방향은 사실 1978년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계기는 1972년의 닉슨의 중국 방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의 현실파인 닉슨/키신저는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진을 막고 동아시아의 해상봉쇄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는 문화혁명 종결 후 대외개방의 길을 모색하던 중국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1970년대 초 중국의 이처럼 변화된 전략이 반드시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졌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이후 변화는 문화혁명 실패의 후과였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경향과 공산주의 경향의 모순적 결합에서 출발하였다. 이 두가지 경향은 1960년대 말까지 상충하면서 지속되다가 문화혁명을 계기로 결국 중국에서 민족주의 경향이 압도적 우위에 서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봉쇄에 이어 1950년대 말과 1960년 초 중소논쟁을 거치면서 소련과 단절하게 된 후 자력 갱생적 사회주의 모델을 실험해 온 중국은 1960년대 말에 사회주의에서 축적된 모순이 폭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문화대혁명으로 드러났다. 하나의 단일 사건이라기보다 상이한 역사적 경향과 모순들이 응축된 응결점으로서 문화대혁명은 당과 대중의 모순, 사회주의와 국가의 문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등 은폐되어 있던 문제들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국은 문제제기로 멈추었고, 문화대혁명을 지속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할 마오쩌둥이 그 운동의 지속을 중단시키고 당조직을 복원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은 그 후 오랜 기간 특정 사회세력에 대한 숙청 켐페인으로 변질되어 중국인들 사이에 거대한 트로마로 남았다. 문화대혁명기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휘어진 막대는 1970년대부터 다시 과도하게 반대방향으로 휘어져 문화대혁명기의 모든 문제제기를 무화하는 쪽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중국에게 2001년은 2008년 올림픽 유치의 성공, WTO 가입, 그리고 중국 축구팀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 등으로 세계무대 진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해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성장이 계속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며, 중국인들은 유례없는 자긍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사회의 양극화는 전례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불평등이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보다 심해 "비교 가능한 자료가 있는 모든 나라 중 최대"라고 평가하였다. 소득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를 살펴보면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잘 드러나는데, 지난해 중국의 한 잡지에 나타난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1995년의 0.38에서 1990년대 말에 0.47로 높아져 빠르게 불평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민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사실상 이보다 높은 0.59로까지 나타난다.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기점인 1978년에 이 수치는 0.15에 불과하였다. 지니계수가 0.4를 넘으면 소득분배가 심각한 불평등 상태인 국가로 분류되는데, 개혁개방 20년 만에 중국은 소득분배의 면에서 평등도가 가장 높은 국가군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군으로 빠르게 옮겨간 것이다. 중국 내에서는 이것이 과도기적 현상으로, 사회 내에서 고소득자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1992년 떵샤오핑이 제창한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의 효과라고 보지만, 문제는 앞으로 이런 불평등이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될 요인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 내에서 불평등은 크게 세 축으로 발생하는데,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의 확대, 지역 사이 불균형의 확대, 그리고 관리자층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격차의 확대가 그것이다.
중국에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이 아직도 제약되고 있다. 과거 코포라티즘적 관리의 결과 생겨난 호구제도는 중국의 인구를 농업호구와 비농업호구로 나누고 농업호구를 지닌 사람이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여 직업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식량배급제도가 사라지고 직업배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호구제도의 규제력이 다소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안정적 직업의 획득과 교육과 의료 혜택들에서 호구제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1980년대 초반 인민공사 제도를 해체하고 농지를 가구별로 청부를 준 제도가 시행되고 수매가격이 인상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농가의 소득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이후에는 이러한 농촌에 대한 일시적 자극효과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도시지역의 소득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는 수치상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고, 삶의 불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농촌주민들의 소득증가가 사실상 농작물 판매수입의 증가보다는 농촌지역에 건립된 향진기업에 취업하여 얻은 비농업 소득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런데 1993년 이후 향진기업의 고용창출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의 취업기회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가의 소득도 줄어들었다. 경작지를 소규모로 다시 분할하였고, 농촌에서 비농업 분야의 취업기회가 한정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활수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1989년부터 많은 내륙지방의 농민들이 연안지역의 발달한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농촌출신 노동자들의 파도 현상'(民工潮)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에 걸쳐 적게는 4천만 명에서 많게는 1억 명 이상으로 추계되는 이 거대한 유동 인구군은 호구를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지역에 서 2등 시민인 '불법취업자'로 거대한 노동력 저수지를 형성하여 저임금 노동력 공급처가 되고 있다.
지역 간 격차 또한 계속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의 일인당 GNP는 800달러 수준인데, 성장이 빠른 대도시인 상하이는 3,300달러, 베이징은 2,100달러, 텐진은 1,800달러 수준으로 평균의 두배 이상 높으며, 이에 비해 내륙의 구이저우성은 300달러, 간쑤성은 440달러로 평균의 절반 수준일 뿐이다. 이처럼 지역별 소득 격차가 커지는 원인은 중국의 고속성장을 추동한 해외 외국인 자본의 투자가 연해지역에 집중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만 소득의 증대가 발생하였고, 반면 내륙의 농업지역에서는 기존의 상호부조의 틀이나 국가의 지원의 틀이 약화되면서이다. 이처럼 지역격차가 벌어지면서 내륙지역에서 배출되는 유동인구 또한 늘어나는데, 쓰촨, 안후이, 구이저우 등지가 주요한 농촌출신 노동자 배출지역이 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기존의 국유기업과 집체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실업과 불안정고용이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의 공식 실업률은 아직 4% 수준에 묶여있지만, 중국의 특성을 반영한 특징적인 준실업 현상인 '면직'(下崗)이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면직이란 소속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해고된 상태는 아니지만, 직무를 배정 받지 못해 기업 내에 대기발령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며, 기업으로부터 약간의 생활비 보조를 받고, 기업이 여전히 사회보험비를 납부하고, 기존에 배정 받은 주택에서 거주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면직자의 일부는 새로 일자리를 찾겠지만, 조사에 따르면 면직자의 대다수가 상당 기간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면직자의 수는 1천만 명을 넘고, 이런 고용의 불안정성의 결과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단체 노동쟁의가 3배 증가하기도 하였다. 면직자를 포함한 일반노동자들의 지위하락이 계속되는 반면, 기업의 경영관리자의 지위는 반대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도시주민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한데 비해 1990년대 들어서는 고급관료와 기업경영자의 소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일반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커지면서 도시 내 소득 불평등은 계속 커지고 있다. 기업경영자들이 연봉제의 시행, 주식의 배분 따위를 통해 기업이윤을 분배받게 되면서 이들과 일반노동자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2.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중국 헌법 제 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법조문의 규정을 넘어서 실제로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논란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중국 내에서 중국이 사회주의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소유제와 정치권력의 문제이다. 즉 소유제에서 공유제(국유와 집체)가 우위에 있다는 것과, 정치권력이 인민에게 있으며, 이는 인민의 당인 중국공산당이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모두 사실상 법률 차원의 정의 문제에 불과하며, 그 내실과 나아가는 방향의 경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공유제의 우위'만 하더라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정의는 중국 내에서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과거 이에 대한 정의는 국내 모든 산업이 공유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사영기업이나 외자기업처럼 비공유제 형태의 기업이 병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다음으로 공유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권리는 분할될 수 있다는 논의가 전개되어 국유기업의 운영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를 계승하여 국유제란 국가가 소유제 지분의 51%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정의에 부합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이어서 전체 경제 중 핵심적 부분만 공유제 형태로 유지하면 공유제의 우위가 된다는 논지로 발전하였다. 1999년에 이미 국유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도시종업인원의 39.7%(집체부문은 7.9%), 농촌을 포함한 전체 종업 인원의 12.1%, 전체공업기업수의 0.8%, 공업생산총액의 28.2%로 낮아졌다. 급기야 중국경제체제의 구조조정을 담당하고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핵심기구인 체제개혁위원회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중국개혁}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수립하는 근본 해결책은 절대다수의 국유기업을 비국유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공유제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중국공산당의 성격 변화와 맞물리고 있다. 떵샤오핑의 노선을 계승한 중국의 국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장쩌민은 2000년 2월 '세가지 대표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이 중국의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 중국의 가장 폭넓은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하기만 하면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와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한다는 의미와 폭넓은 인민이란 누구를 포함하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2001년 7월 장쩌민은 7.1 강화에서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그 함의를 분명히 하였다. 즉 사영기업의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선 사영기업가의 입당을 허용해야 하는데, 이들 사영기업가들이야말로 선진생산력을 대표하는 자라는 논지가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을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사회 모든 세력에 대한 조직적 통제력을 확보하는 코포라티즘적 정당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이런 과정은 중국의 개혁정책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에는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자본가 계급은 없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계급으로서 자본가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가 이를 대신하여 한편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본축적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준비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으로서 자본가 세력을 적극 형성해 온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지향의 국가관료와 국유기업의 상층관리자들 그리고 외국자본이 결합된 주도세력이 국가자본주의 또는 관료자본주의라 말할 수 있는 발전노선을 추진해 왔으며, 이 주도세력의 일부가 점차 독립된 자본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과정은 중소규모의 사적자본가들이 아래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점차 자본주의 지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세력이 주도적으로 변신하여 국가자본주의 발전노선을 펴나가면서 여타의 부문들을 종속적 지위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장쩌민의 7.1 강화는 당 외부에 존재하는 사영기업가들을 당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략인 동시에 당원인 각급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실질적 자본가로 변신하는 현실을 사후에 추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의 방향은 사실 1978년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계기는 1972년의 닉슨의 중국 방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의 현실파인 닉슨/키신저는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진을 막고 동아시아의 해상봉쇄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는 문화혁명 종결 후 대외개방의 길을 모색하던 중국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1970년대 초 중국의 이처럼 변화된 전략이 반드시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졌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이후 변화는 문화혁명 실패의 후과였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경향과 공산주의 경향의 모순적 결합에서 출발하였다. 이 두가지 경향은 1960년대 말까지 상충하면서 지속되다가 문화혁명을 계기로 결국 중국에서 민족주의 경향이 압도적 우위에 서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봉쇄에 이어 1950년대 말과 1960년 초 중소논쟁을 거치면서 소련과 단절하게 된 후 자력 갱생적 사회주의 모델을 실험해 온 중국은 1960년대 말에 사회주의에서 축적된 모순이 폭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문화대혁명으로 드러났다. 하나의 단일 사건이라기보다 상이한 역사적 경향과 모순들이 응축된 응결점으로서 문화대혁명은 당과 대중의 모순, 사회주의와 국가의 문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등 은폐되어 있던 문제들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국은 문제제기로 멈추었고, 문화대혁명을 지속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할 마오쩌둥이 그 운동의 지속을 중단시키고 당조직을 복원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은 그 후 오랜 기간 특정 사회세력에 대한 숙청 켐페인으로 변질되어 중국인들 사이에 거대한 트로마로 남았다. 문화대혁명기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휘어진 막대는 1970년대부터 다시 과도하게 반대방향으로 휘어져 문화대혁명기의 모든 문제제기를 무화하는 쪽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