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ns Eisler 한스아이슬러
한스 아이슬러(1898-1962)
쉰베르크는 아이슬러에게 스승이었고, 아이슬러는 쉰베르크에게 배신자였다. 12음 기법을 완성한 쉰베르크를 두고, 노년의 아이슬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부르주아의 쇠퇴와 몰락,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눈부신 낙조입니까!" 아이슬러가 보기에 당이 지칭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계급의 눈으로 분석하지 않은 무익한 타협이었고, 당이 환호하는 (양식으로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란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 편견이었다.
20세기 초 격변하는 독일의 음악가로서, 아이슬러는 음악의 기법보다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음악이 정치적인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음악이 곧 정치라고 생각했다. 투쟁가요란 계급투쟁이 요구하는 것을 노동자 대중이 쉽게 습득하도록 하고, 활기에 넘치며 정확한 정치적 태도에 입각한 것이어야 했다. 모든 노래는 계급투쟁의 교사로서, 교훈적인 요소로 대중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했으며, 관객과 거리를 두어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가수나 연주자도 마찬가지였다. 관객을 작품으로 몰입시키는 행위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는 거의 모든 면에서 브레히트와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노래 대부분이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인 것은 예술창작에 대한 견해가 같아서였다. 파시즘에 맞서 혁명을 노래하는 "통일전선의 노래(Das Einheitsfrontlied)", "연대의 노래(Solidaritatslied)", "붉은 결혼식(Der Rote Wedding)", "은밀한 전진(Der Heimliche Aufmarsch)", 뿐만 아니라, 칸타타 "독일교향곡", "레닌 진혼곡"의 대본이 브레히트 것이고, "조치", "어머니", "갈릴레오의 생애" 등 브레히트 연극 대부분에서 그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위의 노래들은 참세상(go.jinbo.net)의 자료실에서 MP3로 들어볼 수 있다. 독일교향곡과 레닌 진혼곡이 그의 대표곡인데, 필자 역시 못 들어 보았고, 아직 국내에서는 들어볼 길이 없다.
그가 말하는 '감상용'음악-장대하고, 정확한 음악 형식을 발전시키는 단편들의 내용으로 만드는 음악-은 대체로 그의 12음 기법에 기반하는데, 그의 12음 기법은 쉰베르크의 그것과 다르다. 가장 주요한 것이 쉰베르크의 추상성(반복의 배제, 협화음의 배제, 12음의 추상성)인데, 아이슬러가 보기에 12음 기법 역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여기에 사회 조건에 따라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증대시키는 변화를 포함시킨다. 혁명가요가 12음 기법이라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렇게 12음 기법이 자리바꿈하면서,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였고, 예술가들의 12음 기법에서 노동자계급의 12음 기법으로 탈환한다. 이로써 그는 스승이 요구한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 다른 작품을 '증명'한다. 앞서 이야기한 레닌 진혼곡이 바로 그의 수정 12음 기법에 의한 칸타타이고 오늘 소개하는 OrchestrerWerke ⅠⅡ 역시 그의 12음 기법에 의한 관현악 곡들이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고, 당대의 보편적 이념과 혁명정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때문에 쉰베르크와 결별한 것인데, 쉰베르크는 이를 정치적인 차이 정도로 이해했다. "음악의 문맹을 절멸시켜, 고전음악가의 가장 복잡한 음악까지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설령 쉰베르크가 부활한다 할지라도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기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쉰베르크는 아이슬러에게 스승이었고, 아이슬러는 쉰베르크에게 배신자였다. 12음 기법을 완성한 쉰베르크를 두고, 노년의 아이슬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부르주아의 쇠퇴와 몰락,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눈부신 낙조입니까!" 아이슬러가 보기에 당이 지칭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계급의 눈으로 분석하지 않은 무익한 타협이었고, 당이 환호하는 (양식으로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란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 편견이었다.
20세기 초 격변하는 독일의 음악가로서, 아이슬러는 음악의 기법보다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음악이 정치적인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음악이 곧 정치라고 생각했다. 투쟁가요란 계급투쟁이 요구하는 것을 노동자 대중이 쉽게 습득하도록 하고, 활기에 넘치며 정확한 정치적 태도에 입각한 것이어야 했다. 모든 노래는 계급투쟁의 교사로서, 교훈적인 요소로 대중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했으며, 관객과 거리를 두어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가수나 연주자도 마찬가지였다. 관객을 작품으로 몰입시키는 행위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는 거의 모든 면에서 브레히트와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노래 대부분이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인 것은 예술창작에 대한 견해가 같아서였다. 파시즘에 맞서 혁명을 노래하는 "통일전선의 노래(Das Einheitsfrontlied)", "연대의 노래(Solidaritatslied)", "붉은 결혼식(Der Rote Wedding)", "은밀한 전진(Der Heimliche Aufmarsch)", 뿐만 아니라, 칸타타 "독일교향곡", "레닌 진혼곡"의 대본이 브레히트 것이고, "조치", "어머니", "갈릴레오의 생애" 등 브레히트 연극 대부분에서 그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위의 노래들은 참세상(go.jinbo.net)의 자료실에서 MP3로 들어볼 수 있다. 독일교향곡과 레닌 진혼곡이 그의 대표곡인데, 필자 역시 못 들어 보았고, 아직 국내에서는 들어볼 길이 없다.
그가 말하는 '감상용'음악-장대하고, 정확한 음악 형식을 발전시키는 단편들의 내용으로 만드는 음악-은 대체로 그의 12음 기법에 기반하는데, 그의 12음 기법은 쉰베르크의 그것과 다르다. 가장 주요한 것이 쉰베르크의 추상성(반복의 배제, 협화음의 배제, 12음의 추상성)인데, 아이슬러가 보기에 12음 기법 역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여기에 사회 조건에 따라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증대시키는 변화를 포함시킨다. 혁명가요가 12음 기법이라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렇게 12음 기법이 자리바꿈하면서,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였고, 예술가들의 12음 기법에서 노동자계급의 12음 기법으로 탈환한다. 이로써 그는 스승이 요구한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 다른 작품을 '증명'한다. 앞서 이야기한 레닌 진혼곡이 바로 그의 수정 12음 기법에 의한 칸타타이고 오늘 소개하는 OrchestrerWerke ⅠⅡ 역시 그의 12음 기법에 의한 관현악 곡들이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고, 당대의 보편적 이념과 혁명정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때문에 쉰베르크와 결별한 것인데, 쉰베르크는 이를 정치적인 차이 정도로 이해했다. "음악의 문맹을 절멸시켜, 고전음악가의 가장 복잡한 음악까지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설령 쉰베르크가 부활한다 할지라도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기는 지금도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