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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1999.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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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국가의 실패

이수강 | 서울대사회학과대학원
<b>며칠전 한 일간지에는 </b>
이런 표제의 두 기사가 1면에 실렸다. "올 상반기 나랏일 6대 실패작'"과 "진형구 전 공안부장 수감". (이 제목은 {중앙일보} 99년 7월 29일자 1면에서 딴 것이지만, 다른 신문도 비슷했다) 전자는 '정부정책평가위원회'라는 '민관 합동기구'가 '정부업무심사평가보고대회'에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국력 결집에 큰 장애요인이 됐다"고 지적했다는 '6대 실패작'에 대한 기사였다. 후자는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 결과, 해당 혐의가 밝혀진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이 구속되었다는 기사였다.
위에 사용된 표현대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린" 사건이라면, '△한일어업협상 준비 △공직자 준수사항 제정 △국민연금 확대문제 △두뇌한국21 계획 △씨랜드 화재사건 △검·경 수사권 갈등' 등 '6대 실패작'에 비해 우리의 진형구 부장님 '취중진담' 사건이 하등 못할 바 없으련만, 무슨 결격사유가 있었는지 랭크가 되지 못하였다.
'6대 실패 시리즈'와 '파업유도 코미디 시리즈'는 보기에 따라 서로 관련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조금 거시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떠올려지는 것은, 이를테면 '국가의 실패'이다.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주류경제학의 기본개념을 가르치는)에 나오는 '시장의 실패(the failure of market)'란 어법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b>예컨대 '검찰의 실패'를 보자. </b>
검찰이란 무엇인가? 검찰청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검찰소개란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검찰 : 범죄의 수사, 증거의 수집, 공소의 제기 유지,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청구, 재판의 집행 지휘 감독 기타 이에 수반하는 검찰행정사무 등을 처리하는 국가행정작용"이라고 설명해놓고 있었다.
좀 복잡하기에, 평소 뉴스 같은 데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은 없나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수사를 주재하고 소추기능을 전담하는 오늘날의 모습…."


<b>정부 수립 이후 </b>
검찰이 그러한 "오늘날의 모습"을 한때라도 보여왔는지는 별 문제로 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입되어 온 검찰의 (바람직한) 상(像)은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검찰이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개탄하고 분노하는 국민과 언론의 눈에 비쳤던 것은 그 바람직한 상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였을 것이다.
그 바람직한 상이란, 개념적으로 보면, 사실 많은 비판적 지식인과 사법개혁론자들도 공유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법조계의 현실을 비판할 때 그 기저에는 "검찰 등 법조계 기구와 인사들이 '공익의 대표자'라는 정도(正道)의 기능을 발휘해달라"는 주문이 깔려있다고 할 것이다.
일례로 특검제 주장을 보자. 그 주장은 물론 기존 검찰의 독립성과 수사능력에 대한 강한 불신과 비판을 배경으로 하는, 기존 검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위계구조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불쾌하고 위험한 뇌관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면, 검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제도의 (일부) 개편을 통하여 검찰의 본연의 기능을 살리자는 '검찰을 위한 고단위 처방'이기도 한 것이다. (국민들의 차디찬 냉소를 읽을 줄 알고 그 속에서 검찰의 완전한 파국을 우려하며, 검찰을 '정말 사랑하는' 검찰맨이 있다면, 그는 과연 특검제에 대해 상부처럼 반대만 할까?)


<b>물론 그러한 '바람직한 상'이란,</b>
관념과 홈페이지 바깥에서 즉 현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건국 이후 내내 그러하였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 때부터 그러하였다. 검찰이 "실추된 명예를 회복" 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 다짐 자체가 사실왜곡을 내포하고 있다. "회복(回復)"이란 사전적 의미로 이미 존재한 바가 있던 그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일 터인데, 대한민국 검찰청법이 공포되었다는 49년 12월 20일 이후로 검찰이 떳떳한 "공익의 대표자"로서 한시라도 존재했다고 보는 것인가(그렇다면 홈페이지에 올려주시길). 진형구 전 부장은 수사과정에서 "노사분규에 대한 검찰의 개입은 관행"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진술이야말로 현재 검찰이 '사상 최대의 위기'니 '검치일(檢恥日)'이니 하고 호들갑을 떠는 사태의 핵심을 보여준다. 검찰이 '제 기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위기라고 한다면 그 위기는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관행"을 계승하는 데서 생기는, "관행"적인 위기이이다. '검찰의 실패'라고 한다면 그것은 "관행"화된 실패인 것이다.


<b>그렇다면 이 '관행화된 실패'를 두고</b>
새삼스럽게 '국가의 실패' 운운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그것에는 정권교체라는 변수가 관계된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의 실패 역시 관행화된 실패이며, 80년 5월이야말로 최악의 실패였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국군'이, '국민의 정부(일반명사로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국민에게 총알을 발사했다는 것은, 이미 그 국가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을 의미했다. '정권=정부=국가'는 부정의 대상이었으며, 그 부정의 힘이 87년 6월항쟁을 일궈냈다. 그리고 그 힘에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힘과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힘이 결합되어 있었다고 본다.
김동춘 교수(성공회대)가 "우리의 역사를 되돌이켜 보면 지난 30년간의 군사독재기간, 아니 3·1운동 이후 80년 동안의 학생운동사는 바로 지식인으로서의 학생의 근대국가 건설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당대비평} 6호 179-180쪽)"고 말할 때에는 후자로서의 동력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위 인용문과 대칭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면에서 김 교수는 "1980년대에 와서도 대다수의 사회과학자들은 국가 대신에 '정부'를, 계급 대신에 '서민', '국민' 그리고 '민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자유라는 화두} 16쪽)"라고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역으로 "대다수"가 아닌 소수일망정, 어떤 사회과학자들은 '국가'와 '계급'의 개념을 사용하는 담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정부' 대신 '국가'를 사용하며 등장한 '국가론'이 보여준 '정권=정부=국가' 등식의 재고와, '국가=일반이익의 대변' 공식의 파기는,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곤 억압, 통제, 수탈 뿐인 민중들이 던졌음직한 "대체 국가는 뭣하는 놈이야?"라는 질문에 대한 이론적 응답으로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요컨대 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진보운동에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 자체를 부정하려는 흐름(꼭 무정부주의가 아니더라도) 내지 별다른 기대를 안 갖는 입장과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흐름이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두 흐름이 두부모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b>현 집권여당의 자기선전식 역사해석을</b>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지속적인 보수·우경화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97년도의 정권교체는 어느 정도는 80년과 87년 국민대중의 요구의 뒤늦은 실현이라는 성격을 가졌다(여기엔 그 이후의 정권운영에 대한 평가는 포함되어있지 않다).
국가와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소외계층의 포용'을 바라던, 많은 국민대중·시민단체·비판적 지지파가 김대중을 응원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정권교체라는 것이 "국가를 담당하는 세력(인맥)이 교체될 수 있다"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확인한 점에서 국가가 일방(한 지역, 한 계층, 한 정당)의 것만은 아니며 국민의 요구에 조응하는 변화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과연 담당세력의 변화로 인해 국가가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사상 첫 실험대 위에 현 정권을 올려놓기도 한 것이다.
적어도 지금쯤 와서는 김대중 정권에 대해, 계급적 테두리를 뛰어넘는 구조변혁적 개혁을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경제, 노동 영역에서의 개혁요구는 계속해서 필요하겠지만, 김대중 정권에 대한 평가는, 집권 전 그 스스로 많은 전향적인 공약을 내세우기도 한 제도적·공공적·사회적 영역(즉 정치제도, 공안기구, 사법, 언론, 교육, 문화, 인권, 복지, 여성, 공무원 등)에서 '의미있는 개혁'이 이뤄지느냐에 보다 크게 달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분야들이 '하부구조'와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이미 평가에 필요한 기간이 지났다고 보는 사람과 단체도 많을 것이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그러한 영역들에서의 사태추이는,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 되었지만 다시금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질문에 대한 대답들과도 연결이 될 거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국민연금 파동 등 '6대 실패 시리즈'와 '파업유도 시리즈'는 연관을 맺는다. 현재의 시점을 '국가의 위기'라고 칭한다면, 그 위기는 '국가에 대한 기대감 자체의 추락 위기'인 것 아닐까. 지금처럼 한편으로는 노사정위원회로 폼을 잡고 한편으로는 생존권이 걸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파렴치한 공작을 꾀하는 따위로서는, '제2의 건국'이 아니라 '제2의 국가의 실패'가 자명하다는 것이야 닐러 무삼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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