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권 2년, 남북관계의 진전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거나, 광복절이 끼여 있는 8월이 되면 이번에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나오지는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특히 정통성이나 정당성의 위기에 시달리는 정권이라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통일정책'의 문제를 검토해 봄직하다. 실제로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이 강력하게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91년 '남북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일반론이다.
그렇지만, 독일통일과 소연방의 해체라는 국제적인 대지각변동이 있던 1990년대 초반 이후, 남북관계는 장기적인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어느 우방보다 민족을 우선하겠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실제 재임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북한의 조속한 붕괴론을 주도하면서 남북관계의 완전한 냉각을 초래하였다. 또한 90년대 이후로 북·미간의 접촉은 지속되었지만, 아직까지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동결을 담보로 한 북·미 제네바합의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 특히 김대중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는 자못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기자회견에서 '남북교류와 공존에 기반한 평화통일론'과 '4대국 평화보장론'을 밝히고 71년 대선에서 선거공약화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90년대까지 나름대로의 '통일론'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째가 되고 있으나, 실제로 남북관계의 진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해교전 사태,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이산가족문제를 핵심 의제로 삼았던 남북 차관급회담의 결렬 등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면 조속한 시일 내에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망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특히,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의 핵관련 의혹에 대한 북·미간의 회담이 마무리된다면 1999년에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새틀이 마련될 것이라는 올초의 전망들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b>햇볕정책은 감내할만한 것인가? </b>
이처럼 남한에 신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시각은,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주원인을 북한으로 돌리는 시각이다. {한겨레}와 같이 전통적으로 대북 '온건론'의 편에 서있는 언론 역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겨레 권근술 사장과 북한의 안병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인터뷰는 이러한 시각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 자리에서 권근술 사장은 "북한이 남한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햇볕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햇볕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는 그 내용이다. 북에 대한 봉쇄와 압박정책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연북화해정책이다. (…) 미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대결정책을 취하도록 강요하는 정권이 있었고, 두 나라에 대해 대결정책을 화해정책으로 바꾸도록 요청하는 정권도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남쪽 정부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자주와 주체는 올바른 말처럼 들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립과 편향으로 비춰질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탈냉전,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논리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주되게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봉쇄·압박함으로써 붕괴를 앞당기자"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남한과 미국 내의 보수강경파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북한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나서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들은 공통적으로, 햇볕정책이 과연 북한으로서 받아들일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견해를 제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북한이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노선, 아니 취해야 마땅한 노선은 개혁·개방 노선"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와 같은 경로를 최대한 '부드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b>햇볕정책은 '평화공존' 정책인가? </b>
기실 94년 북·미간의 제네바합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남한과 미국 정가를 주도했던 논의들은 바로 북한 '붕괴' 가능성에 대한 검토였다. 1980년대 북한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핵개발 프로그램을 제네바합의라는 틀 속에서 경수로 및 중유 공급을 통해 동결시킨 데 일단 만족하면서, 경제난 봉착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의 북한의 변화를 관망하자는 정치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붕괴를 전망하면서, '연착륙'을 시켜야한다든지, 아니면 '경착륙'적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든지 등의 대북 정책수립을 둘러싼 논의는 무성했지만, 실제로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네바합의는 실제 북·미관계의 정상화, 경제제재의 해소 및 완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했지만, 미국은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 붕괴론이 잦아들면서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북한이 90년대 이후 심각한 경제쇠퇴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럭저럭 버텨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나아가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궁극적으로 해소할 방안이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키고 동시에 남북한간의 경제통합을 통한 북한의 세계 자본주의시장으로의 편입을 촉진시킨다는 복안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제시된 햇볕정책이다.<font color="#0033CC"><각주1: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한 시기는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이 제기된 98년 여름이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전인 199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font>
현재 한국과 미국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골격은 다음의 두가지 요소이다.
첫째는 북한의 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군비통제 조치들과 경제지원 조치들을 맞바꾸는 여러 단계의 협상을 진행하는데, 여기에서 경제지원 조치는 북한에서 '시장원칙'을 증진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북한과 협상을 할 때 남한과 미국이 서로 역할분담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군사문제 또는 국제안보 이슈를 담당하고, 남한 정부는 경제협력사업이나 사회·문화 교류를 담당하면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font color="#0033cc"><각주2:또한 한국과 미국은 각각 국내의 여론조성을 위한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예컨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방문시에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조치 완화를 촉구한 바 있었는데, 이는 실제로 한·미간에 '북한에서의 시장원칙의 증진'을 위한 제한적인 경제제재 조치 완화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의 일이었다. 즉 미국과 한국이 각각 '채찍'과 '당근'의 역할을 적절히 취하면서 여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font>
그리고 햇볕정책을 추진하는데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첫번째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이 확고한 정치적 공조체제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미국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기본전제에 대해 양국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햇볕정책의 궁극적인 결과로서의 한반도 통합이 결국 미국의 국익과 남한의 재벌 그리고 초국적자본 측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이다.
미국은 '통일코리아'가 기존의 한·미 군사동맹관계의 유지, 미군주둔 승인, 비핵화를 인정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지난 1998년 미국 방문시에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 주둔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총괄적으로 평가해본다면,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정책은 평화공존 정책에 '미달'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게 올바르다. 김영삼 정부와 같이 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촉진하고 조속한 흡수통일을 이루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북한과의 접촉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 북한을 무력화시키고 개혁·개방을 유도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통합을 이룩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담겨 있는 것이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가 대북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첫째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튼튼한 안보'는 사실상 현존하는 남북간의 군사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초과'하고 있다. 즉 군사력의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그 얼개가 공개된 작전계획 5027이 보여주는 군사적 호전성, IMF 상황에 대한 온갖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감축되지 않고 있는 국방비, 그리고 미국-일본의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 구축에 대한 호응과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 등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그리고 국방비 등의 모든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조치들은 역으로 북한의 안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동북아에서 군비증강이라는 악순환의 매개고리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b>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위한 이니셔티브</b>
현재의 시점까지도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쟁점들에 대한 협상을 전적으로 미국에게 위임하고 있다. 1998년 여름에 제기되었던 금창리 지하시설 핵관련 의혹의 해소를 위한 협상이나 미사일 협상 등은 전적으로 미국이 협상의 당사자 역할을 하고 있고 4자회담의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의제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밀착된 정책 공조를 통해서, 북한과의 합의점을 만드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경제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의 문제로 남북대화의 초점을 맞추고 있을 따름이다. 이점에 대해 북한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의 안병수 부위원장의 발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교류해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 때 남쪽에서 이 선언을 비판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선언 중에 가장 중요한 정치 군사적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빠져 있으며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는 교류만으로는 안된다는 게 그 내용이다. 그런 식의 관계는 기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교류를 반대하지 않는다. 교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남북이 화해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치 군사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우리는 합의서를 체결할 당시 교류와 정치 군사적 문제 해결을 병진하자는 취지에서 도장을 찍었다."
올초 북한은 남북 당국자간 대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한·미·일 공조체제의 중단 △국가보안법 폐지 △남한내의 자유로운 통일운동 보장 등의 3개항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남한 정부와 언론들은 북한의 의례적인 정치공세이거나 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되지 않더라도 남북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들을 내놓았다. 즉 북한이 내놓은 전제조건들의 타당성에 대한 원칙적인 검토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햇볕정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포괄적' 협상안은, 북한과의 접촉통로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변화 즉 군사적 무력화와 경제통합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김대중 정부 스스로도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포괄적 협상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복잡한 협상과정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경제지원 조치를 구하면서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햇볕정책의 기본전제들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한겨레} 신문이 취하는 태도처럼 북한의 태도 변화를 하릴없이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기본적 전제가 향후 남북한의 자본주의적 경제통합을 전망하면서 남한의 재벌들과 초국적자본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민중들로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햇볕정책에 대한 막연한 지지는 분명히 철회되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통해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남한 민중운동진영의 평화를 향한 이니셔티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독일통일과 소연방의 해체라는 국제적인 대지각변동이 있던 1990년대 초반 이후, 남북관계는 장기적인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어느 우방보다 민족을 우선하겠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실제 재임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북한의 조속한 붕괴론을 주도하면서 남북관계의 완전한 냉각을 초래하였다. 또한 90년대 이후로 북·미간의 접촉은 지속되었지만, 아직까지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동결을 담보로 한 북·미 제네바합의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 특히 김대중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는 자못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기자회견에서 '남북교류와 공존에 기반한 평화통일론'과 '4대국 평화보장론'을 밝히고 71년 대선에서 선거공약화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90년대까지 나름대로의 '통일론'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째가 되고 있으나, 실제로 남북관계의 진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해교전 사태,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이산가족문제를 핵심 의제로 삼았던 남북 차관급회담의 결렬 등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면 조속한 시일 내에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망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특히,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의 핵관련 의혹에 대한 북·미간의 회담이 마무리된다면 1999년에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새틀이 마련될 것이라는 올초의 전망들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b>햇볕정책은 감내할만한 것인가? </b>
이처럼 남한에 신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시각은,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주원인을 북한으로 돌리는 시각이다. {한겨레}와 같이 전통적으로 대북 '온건론'의 편에 서있는 언론 역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겨레 권근술 사장과 북한의 안병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인터뷰는 이러한 시각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 자리에서 권근술 사장은 "북한이 남한의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햇볕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햇볕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는 그 내용이다. 북에 대한 봉쇄와 압박정책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연북화해정책이다. (…) 미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대결정책을 취하도록 강요하는 정권이 있었고, 두 나라에 대해 대결정책을 화해정책으로 바꾸도록 요청하는 정권도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남쪽 정부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자주와 주체는 올바른 말처럼 들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립과 편향으로 비춰질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탈냉전,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논리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주되게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봉쇄·압박함으로써 붕괴를 앞당기자"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남한과 미국 내의 보수강경파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북한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나서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들은 공통적으로, 햇볕정책이 과연 북한으로서 받아들일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견해를 제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북한이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노선, 아니 취해야 마땅한 노선은 개혁·개방 노선"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와 같은 경로를 최대한 '부드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b>햇볕정책은 '평화공존' 정책인가? </b>
기실 94년 북·미간의 제네바합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남한과 미국 정가를 주도했던 논의들은 바로 북한 '붕괴' 가능성에 대한 검토였다. 1980년대 북한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핵개발 프로그램을 제네바합의라는 틀 속에서 경수로 및 중유 공급을 통해 동결시킨 데 일단 만족하면서, 경제난 봉착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의 북한의 변화를 관망하자는 정치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붕괴를 전망하면서, '연착륙'을 시켜야한다든지, 아니면 '경착륙'적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든지 등의 대북 정책수립을 둘러싼 논의는 무성했지만, 실제로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네바합의는 실제 북·미관계의 정상화, 경제제재의 해소 및 완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했지만, 미국은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 붕괴론이 잦아들면서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북한이 90년대 이후 심각한 경제쇠퇴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럭저럭 버텨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나아가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궁극적으로 해소할 방안이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키고 동시에 남북한간의 경제통합을 통한 북한의 세계 자본주의시장으로의 편입을 촉진시킨다는 복안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제시된 햇볕정책이다.<font color="#0033CC"><각주1: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한 시기는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이 제기된 98년 여름이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전인 199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font>
현재 한국과 미국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골격은 다음의 두가지 요소이다.
첫째는 북한의 군사력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군비통제 조치들과 경제지원 조치들을 맞바꾸는 여러 단계의 협상을 진행하는데, 여기에서 경제지원 조치는 북한에서 '시장원칙'을 증진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북한과 협상을 할 때 남한과 미국이 서로 역할분담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군사문제 또는 국제안보 이슈를 담당하고, 남한 정부는 경제협력사업이나 사회·문화 교류를 담당하면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font color="#0033cc"><각주2:또한 한국과 미국은 각각 국내의 여론조성을 위한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예컨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방문시에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조치 완화를 촉구한 바 있었는데, 이는 실제로 한·미간에 '북한에서의 시장원칙의 증진'을 위한 제한적인 경제제재 조치 완화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의 일이었다. 즉 미국과 한국이 각각 '채찍'과 '당근'의 역할을 적절히 취하면서 여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font>
그리고 햇볕정책을 추진하는데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첫번째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이 확고한 정치적 공조체제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미국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기본전제에 대해 양국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햇볕정책의 궁극적인 결과로서의 한반도 통합이 결국 미국의 국익과 남한의 재벌 그리고 초국적자본 측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이다.
미국은 '통일코리아'가 기존의 한·미 군사동맹관계의 유지, 미군주둔 승인, 비핵화를 인정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지난 1998년 미국 방문시에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 주둔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총괄적으로 평가해본다면,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정책은 평화공존 정책에 '미달'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게 올바르다. 김영삼 정부와 같이 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촉진하고 조속한 흡수통일을 이루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북한과의 접촉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 북한을 무력화시키고 개혁·개방을 유도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통합을 이룩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담겨 있는 것이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가 대북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첫째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튼튼한 안보'는 사실상 현존하는 남북간의 군사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초과'하고 있다. 즉 군사력의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그 얼개가 공개된 작전계획 5027이 보여주는 군사적 호전성, IMF 상황에 대한 온갖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감축되지 않고 있는 국방비, 그리고 미국-일본의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 구축에 대한 호응과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 등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그리고 국방비 등의 모든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조치들은 역으로 북한의 안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동북아에서 군비증강이라는 악순환의 매개고리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b>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위한 이니셔티브</b>
현재의 시점까지도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쟁점들에 대한 협상을 전적으로 미국에게 위임하고 있다. 1998년 여름에 제기되었던 금창리 지하시설 핵관련 의혹의 해소를 위한 협상이나 미사일 협상 등은 전적으로 미국이 협상의 당사자 역할을 하고 있고 4자회담의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의제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밀착된 정책 공조를 통해서, 북한과의 합의점을 만드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경제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의 문제로 남북대화의 초점을 맞추고 있을 따름이다. 이점에 대해 북한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의 안병수 부위원장의 발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교류해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 때 남쪽에서 이 선언을 비판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선언 중에 가장 중요한 정치 군사적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빠져 있으며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는 교류만으로는 안된다는 게 그 내용이다. 그런 식의 관계는 기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교류를 반대하지 않는다. 교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남북이 화해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치 군사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우리는 합의서를 체결할 당시 교류와 정치 군사적 문제 해결을 병진하자는 취지에서 도장을 찍었다."
올초 북한은 남북 당국자간 대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한·미·일 공조체제의 중단 △국가보안법 폐지 △남한내의 자유로운 통일운동 보장 등의 3개항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남한 정부와 언론들은 북한의 의례적인 정치공세이거나 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되지 않더라도 남북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들을 내놓았다. 즉 북한이 내놓은 전제조건들의 타당성에 대한 원칙적인 검토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햇볕정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포괄적' 협상안은, 북한과의 접촉통로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변화 즉 군사적 무력화와 경제통합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김대중 정부 스스로도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포괄적 협상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복잡한 협상과정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경제지원 조치를 구하면서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햇볕정책의 기본전제들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한겨레} 신문이 취하는 태도처럼 북한의 태도 변화를 하릴없이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기본적 전제가 향후 남북한의 자본주의적 경제통합을 전망하면서 남한의 재벌들과 초국적자본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민중들로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햇볕정책에 대한 막연한 지지는 분명히 철회되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통해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남한 민중운동진영의 평화를 향한 이니셔티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